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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바로보는 불교_무념 스님

정작 중요한 것은

팔만대장경 목판이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각
팔만대장경이 새겨진 목판
빠알리어 삼장(뜨리 삐따까)이 새겨진 석판
뜨리 삐따까 석판이 보관되어 있는 불탑(파고다)

 

팔만대장경

갓 출가했을 때, 30대의 젊은 혈기가 혈관을 질주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서울에 나들이하였는데 종로를 걷다가 한 열성적인 기독교인을 만났다. 그 여인은 손에 기독교 홍보물을 들고 의도적으로 나에게 접근해왔다. 나는 그 여인의 의도를 알고 부딪히면 나만 손해라고 생각해서 그녀를 피해서 전철을 타려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 악착스러운 여인은 지하철역까지 쫓아와 나에게 기어이 시비를 걸었다. 그녀는 그날 사탄의 자식을 구제하는 것이 평생의 숙원이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결코 평화롭지 않은 얼굴로 나에게 어리석은 도전을 해왔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베스트 셀러 책이 뭔지 아십니까?”
기뽕(기독교 뽕)에 취한 그녀의 허접한 질문에 불뽕(불교 뽕)에 취한 내가 당할 리가 없었다.
“호, 그게 무슨 책인데요?”
“성경입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입니다.”
“오, 대단하군요. 그런데 겨우 두 권 가지고 그따위 허접한 자랑질입니까? 우리 불교에는 팔만대장경이 있지요.”
순간 그녀의 결코 평화롭지 않은 얼굴이 분노의 아수라상으로 변했다. 말문이 막히자 열이 용틀음을 하며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는 모양이었다. 난 아수라에게 잡아먹힐까 봐 얼른 전철을 타고 도망쳤다.

팔만대장경은 인쇄판본이 81,258판이라는 뜻이지 책의 권수가 팔만이라는 뜻은 아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권수로는 6,815권이라고 한다. 그럼 그 육천 팔백 여 권이 전부 붓다의 말씀(The Word of the Buddha)이냐? 그게 아니다. 붓다의 말씀은 신국판 600페이지로 19권(초불 번역본으로)에다가 율장, 법구경, 숫타니파타, 소성경, 감흥어경과 같은 작은 경들까지 모두 합쳐서 30여 권 정도다. 그럼 나머지 책은 누구의 말씀인가? 후대에 만들어진 경전, 선사들의 어록, 학자들의 논장, 원효와 같은 학자들의 주해서 등 붓다 이후의 누군가의 저술이다. 그중에는 깨달은 분의 말씀도 있고, 깨닫지 못한 자들이 의도적으로 붓다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철학서들도 존재한다. 모두가 붓다의 말씀이라고 하면 오해가 발생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그 모두가 붓다의 말씀이라고 하면 붓다께서는 먹고 잘 틈도 없이 매일 하루종일 법문을 해도 모자랐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모셔져 있는 해인사 장경각에서 기도하는 스님들이 가끔 있다. 거기서 백만 배를 하고 그 공덕으로 큰 절을 세웠다는 스님도 있다. 팔만대장경에 영험이 있는 모양이다. 팔만대장경 앞에서 목탁을 치고 기도하면 큰 복이 생기는 모양이다. 근데 참 어리석기도 하지. 경전을 읽으라고 있는 것이지 기도하라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경전이 신비주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까? 당신이 서점에 가서 좋아하는 책을 샀다고 하자. 그런데 그 책이 매우 존경하는 스승의 책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책을 읽지 않고 책장에 모셔두고 그 앞에 방석을 놓고 절을 하고 목탁을 치면서 기도한다. 그러면 책의 내용이 머리에 저절로 들어오고 저절로 이해가 되는 신비한 일이 발생한다. 그 책에서 신비한 기운이 흘러나와 나의 몸으로 스며들어와 병을 낫게 한다. 이런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현상이 일어날까?

어느 때 성철 스님이 누워서 경전을 읽고 있었다. 그러자 어떤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 따졌다.
“아니 스님, 존경스러운 경전을 불경스럽게 누워서 봅니까?”
성철스님이 천연덕스럽게 누운 채로 대답했다.
“그럼 존경스러운 경전을 올려다보아야지 내려다봅니까?”
누워서 보면 올려다보게 되지만, 앉아서 보면 내려다보게 된다.

미얀마에 가면 빠알리어 삼장(뜨리 삐따까)을 석판에 새겨 모셔놓은 곳이 있다. 만달레이 꾸토도 사원이다. 이 빠알리어 대장경 석판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남방에서는 경전에 대한 존경은 삼장을 외우는 것이다. 삼장을 다 외우려면 머리 좋은 이가 어렸을 때 출가해서 다른 것은 일절 하지 않고 오직 외우는 일에만 전념해서 이삼십 년을 하면 시험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시험을 통과하면 삼장법사 칭호를 얻는다. 역사상 미얀마에 삼장법사가 50여 명 등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장법사보다 삼장과 주석에 대한 이해력 시험을 통과한 위암사가 더 대접을 받고, 위암사보다 깨달음을 성취한 비구가 더 존경을 받는다.

경전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 지침서이지 경배의 대상이 아니다.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기 위한 안내서이지 기복의 대상이 아니다. 금강경을 백만 번 독송한다고 복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금강경을 실천하여 아상의 소멸(아상타파)을 성취하는 것이 진정 금강경을 읽는 것이다. 경전을 읽고 이해하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실천(행, 수행)에 옮겨 체험(직접 경험)으로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는 것, 즉 신해행증(信解行證)이 진정 경전에 대한 존경이다.

[출처 : 무념스님 포스팅, https://www.facebook.com/mahabhante/posts/701864930549257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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