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바로보는 불교_무념 스님

삐딱함과 바름



내가 처음 출가했을 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절 집 안에 왜 이리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은지.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기도에 매달릴까?

기도를 하더라도 본인이 해야지, 남이 대신 목탁치고 기도해준다고 소원이 이루어질까?

진짜로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이 있을까?

기도를 열심히 하면 진짜로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나 소원을 들어줄까? 

그들이 진짜로 그렇게 전능하고 초월적인 존재라면 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 

왜 이렇게 절 집 안에는 신령스런 존재들이 많을까? 


영가를 위해 천도제를 지내면 진짜로 귀신이 와서 음식을 먹고 법문을 듣고 천도가 되는가? 

영가 천도를 한다면서 목탁을 치고 요령을 흔들면서 뭔가를 중얼거리는 것은 영매나 무속인들이 하는 일 아닌가?

이건 출세간의 진리를 깨닫기위해 수행하는 스님들이 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왜 사시불공을 하는 걸까?

왜 꼭 목탁을 치고 요령을 흔들면서 부처님에게 음식을 올리는 의식을 할까?

부처님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목탁을 치고 요령을 흔들어야 음식을 먹는다고?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사실 붓다는 빠리닙바나에 들어 음식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님. 그리고 존재하는지 조차 확인되지 않음. 어떤 이는 붓다를 우주에 가득 찬 에너지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이도 있는데 어이없음.)


대승경전과 교리들은 왜 이렇게 난해할까?

난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철학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고상하고 훌륭한 말씀들로 가득하지만 왜 어떻게 실천할 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을까?

아름다운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지만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이상일 뿐이지 않는가?

아무리 아름답고 멋있는 말씀이라도 실천할 수 없고 성취할 수 없다면 관념놀이가 아닐까?

아무리 멋있는 말씀이라도 비논리적이면 공수표를 남발하는 거와 같지 아닐까?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안 그대도 복잡한 머리에 더욱 혼란을 부추기는데... 

이런 문제들을 선배 스님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더군. 

"스님은 왜 그렇게 삐딱한가?" 

"믿음이 부족한 자여! 믿음을 내어라!"


나도 믿고 싶어!!!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살고 싶어. 

나도 선배 스님들이 하는 말씀들을 그대로 믿고 싶어. 

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들을 그대로 믿고 의지하고 실천하고 싶어. 

하지만 나는 그게 안 돼. 

왜 그럴까? 

나에게는 생각이라는 것이 있더군. 

나에게는 그들에게 없는 논리적인 사유가 있더군. 


그래도 선어록에는 정말 보배같은 말씀들이 있더군.

거기에는 '어떻게 실천한 것인가?'가 있더군.

거기에는 왜, 어떻게, 무엇을 닦아서 깨달음에 도달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더군.

그래서 한 십년을 미친듯이 선어록을 읽고 화두를 잡았지.

비록 화두 수행에서 뭔가 경험한 것은 없었지만 남방불교를 공부할 때 그 공부가 바탕을 이루어 기준과 균형을 잡아 주었지.

하지만 참선 공부도 역시 난해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서는 매한가지였지.


내가 그렇게 대승불교에서 십 년을 넘게 혼란 속에 살다가 미얀마를 가게 됐지. 

남방 불교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해서. 

남방에 가니 그동안의 모든 의심이 순식간에 풀려버리더군. 

거기에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지장보살, 아미타불도 없고, 사시불공도 없고, 영가 천도제도 없고, 기도도 없더군.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도 없고, 위대한 사상가들의 논서도 없더군.

그곳의 절에서는 일년 365일 어떤 행사(돈을 벌 목적으로 하는)도 없더군.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명상! 

지혜로운 알아차림!


내가 삐딱한 게 아니었어! 

내가 바르게 보는 것이었어! 

그들이 잘못된 것이었어! 

그들이 관념불교를 하고 있는 것이었어! 


붓다께서 <무아경(S22.59)>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요,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붓다께서는 

'내가 생각한다. 내가 느낀다. 내가 감정을 일으킨다.'라고 생각하면 진실이 아니라는 거지.

'나의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거지.


이것은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이지 않는가! 

이제까지 '나'를 존재하게 만든 그 모든 구성요소들이 '내'가 아니라니! 

이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라니! 


그러므로 

삐딱하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다! 

삐딱하게 보아야 나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내가 아니라는 입장에서 보아야 동일시에서 벗어나 객관화가 이루어진다.

나를 남 보듯이 냉정하게 관찰할 때 나에게서 번뇌와 집착이 떨어져 나간다. 

평상시에 나를 생각과 동일시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객관적인 관찰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동일시에서 벗어나서 바라보려면 삐딱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붓다께서 말씀하시기를 

"짯짜야나여!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갈애와 사견으로 인해 집착에 묶여 있다. 

그러나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런 제자는 생각이 머무는 곳과 그러한 집착을 '나의 자아'라고 고수하지 않는다. 

짯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 

<짯짜야나 경(S12.15)> 


이제 알겠는가? 

삐딱하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라는 것을!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지 간에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이것은 자아(에고, 유신견)가 일으키는 것이지,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렇게 동일시에서 벗어나 바라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다.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