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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바로보는 불교_무념 스님

명상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떤 사람은 호흡이 콧구멍에 부딪히는 그 포인트에 집중하라고 하고, 어떤 이는 호흡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단전에 집중하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습니까?”

“그렇게 호흡에 집중하면 호흡에 의도가 개입하지 않던가요?”

“숨 쉬는데 의도가 들어갑니다.”

“그럼 숨 쉬는 것이 불편해지지 않던가요?”

“불편해집니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호흡에 의도가 들어가지 않고 호흡이 들고나는 것을 무심히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호흡에 의도가 개입하면 수행이 힘들어집니다.”

“어떤 분은 호흡에 의도를 개입해서 화두를 들고 들이쉬고 내쉬라고 하던데요.”

“초보자에게 방편으로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호흡에 의도가 들어가면 수행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호흡 하나에 집중하지 말고 넓게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의도 없이 호흡을 볼 정도가 되면 호흡 하나에 집중해도 됩니다.”

“호흡에 의도가 들어가지 않고 호흡을 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거 같습니다.”

“그래서 초보자는 집중하지 말고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집중하지 말고 관찰하라는 말이 이해가 안 됩니다.”

“수행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수행의 목적은 탐진치의 소멸입니다. 탐진치가 어디서 일어납니까?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그럼 마음을 관찰해야지 왜 호흡에 집중합니까?”

“마음이 마음을 어떻게 보는 겁니까? 다른 것은 관찰의 대상이 있는데 마음은 대상이 없지 않습니까? 마음이 마음의 대상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생각이 마음의 대상인 마음입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마음의 대상인 생각을 전문용어로 법이라고 부릅니다.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할 때 법이 거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많은 스승이 호흡을 관찰하라고 가르치던데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호흡 관찰은 마음을 관찰하는 보조수단으로 호흡을 보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마음만 보면 초보자는 마음이 생각 따라 빠져나가 버립니다. 한참 밖에서 놀다가 아차 싶어 다시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호흡에 마음을 묶어두기 위해서 호흡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호흡과 마음을 동시에 보는 것이 가능합니까?”

“주의력을 넓게 가져가는 것입니다. 집중하지 말고 호흡과 마음을 동시에 보면 마음이 휩쓸려가지 않고 관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집착이 강하면 아무리 호흡에 마음을 묶어놓으려고 해도 생각 따라 흘러가 버리던데요.”

“어떨 때는 알아차림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때는 왜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지 그 원인을 조사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이런 생각에 자꾸 시달릴까? 나는 왜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렇게 원인을 찾으면 생각이 소멸해갑니다. 내면의 결핍감이나 불만족이 번뇌의 원인일수도 있고, 우월감이나 열등감이 원인일 수도 있고, 과거의 트라우마가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 원인이라는 것이 순전히 개인적이어서 남들이 코치해줄 수 없습니다. 자신만이 자신을 정확히 압니다. 이렇게 자신을 이해해나갑니다. 그러면 불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도둑이 들키면 도망치듯이 그렇게 번뇌는 소멸해갑니다.”

“그러면 느낌을 관찰한다던가 몸의 움직임을 관찰한다던가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모든 관찰은 마음을 관찰하기 위한 보조수단입니다. 느낌을 보더라도 마음과 함께 보고, 몸의 움직임을 보더라도 마음과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모두가 마음을 보기 위해서 느낌과 몸의 움직임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도망가지 않고 항상 제자리에 있다면 굳이 호흡이나 느낌이나 몸의 움직임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때에는 마음만 보아도 됩니다. 마음을 보면 모든 것이 다 보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정화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일어나는 것도 마음의 일이고, 깨달음이라는 것도 결국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수행은 이게 전부입니까?”

“유익한 마음(쿠살라)과 해로운 마음(아쿠살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해로운 마음을 제거하고 유익한 마음을 키워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생각이 곧 번뇌가 아닙니다. 생각이 번뇌일 수도 있고 지혜일 수도 있는 겁니다. 생각을 정지시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 가지 수행기법들은 무시해도 됩니까? 가르치는 사람마다 방법들이 달라서요.”

“다양한 수행기법들이 있지만 큰 범주에서는 여기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수행의 핵심은 오직 이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수행해나가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일어난 마음이 유익한 마음인지 해로운 마음인지 구별하고, 해로운 마음이면 그 원인을 조사하고, 그러면 번뇌가 소멸되어 갑니다. 번뇌가 소멸되어 갈수록 알아차림이 확립되고, 알아차림이 확립될수록 사마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마디는 번뇌가 없는 고요와 평온입니다. 사마디가 점점 늘어나 길어지고 깊어집니다. 그때 호흡에 집중하여 몰입 삼매(자나)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꼭 몰입 삼매를 성취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몰입 삼매를 들어가지 않더라도 사마디가 항상 유지되고 알아차림이 확립된다면 더 이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부터는 일부로 의도를 일으켜 알아차림을 유지하면 몇 시간이고 번뇌 없는 청정함을 경험합니다. 일부러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일으키지 않더라도 지혜가 일어나 스스로 수행해나갑니다. 번뇌가 일어나면 지혜가 스스로 일어나 제거합니다. 이것은 마치 지지대가 흔들리면 짐벌이 즉시 카메라의 수평을 잡아주는 거와 같습니다.”

“수행이란 것이 매우 간단해 보이는군요. 

“그렇습니다. 아주 간단하죠? 수행은 별 거 아닙니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론은 쉬운데 실천이 어려운 것은 시간과 노력과 끈기가 필요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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