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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용수스님_티벳불교이야기

바른 삼매



삼매(三昧)는 빠알리어 사마디(samādhi)를 중국에서 음역해서 삼매라고 하고 번역해서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잘 아시는 이야기이고.

“사마디는 ‘집중’이 아니고 ‘고요함’이다.”
내가 이렇게 설명하자 어떤 분이 반론을 제기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경전에 보면 ‘바른 삼매(sammā samādhi)는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이다.’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는데요. 그리고 삼매는 ‘집중’을 통해 들어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한 번 생각해봅시다. 수행은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고, 팔정도 중에서 바른 삼매는 반드시 사선정을 성취해야만 한다고 하면, 사선정을 성취하지 못한 사람은 도과를 얻을 수 없다는 공식이 성립됩니다. 그렇죠?”
“그렇습니다. 사선정을 얻지 않고서 도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 언하대오(言下大悟)한 사람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사선정을 성취하지 않고 바로 깨달았는데요. 그리고 순수 위빠사나로 들어가서 얼마든지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사선정을 성취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욱 사야도께서는 사선정을 성취하지 못하더라도 근접삼매라도 성취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스승들은 근접삼매라는 이야기조차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위빠사나 사마디를 이야기합니다. 위빠사나 사마디는 계정혜라는 틀에 맞추다 보니까 위빠사나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요함을 편의상 위빠사나 사마디라고 부릅니다.”
“순수 위빠사나에서도 ‘집중 수행’을 하지 않습니까? 호흡에 집중한다거나 마음이나 느낌에 집중한다거나 말입니다.”
“위빠사나에서는 어느 한 대상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대상은 수시로 바뀔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에서는 집중이 아니고 관찰입니다.”

수행은 집중이 아니고 관찰이라고 하면 수행은 해보지 않고 교리적으로만 접근하는 사람은 반론을 제기한다. 경전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직접 수행을 해보라. 호흡에 집중한다고 삼매가 일어날까? 나의 경험에 의하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먼저 관찰을 통해서 감각적 욕망을 가라앉혀야 한다. 감각적 욕망이 가라앉지 않고 동요하고 흔들리면 삼매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감각적 욕망을 가라앉히면 마음에 고요함이 일어난다. 그것이 위빠사나 사마디이다. 그래서 팔정도에 나오는 바른 삼매(sammā damādhi)는 반드시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일 필요는 없다.

삼매의 요소를 ‘집중’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선정의 다섯 요소가 일으킨 생각(vitakka), 지속적인 고찰(vicāra), 기쁨(piti), 행복(sukha), 일념(ekāggata)이다. 여기서 에깍가따(ekāggata)를 학자마다 집중, 일념, 심일경성(心一境性) 등으로 번역한다. 심일경성? 매우 생소한 단어다. 마음이 하나로 일념을 이루고 있다는 뜻인가? 그러니까 에깍가따를 집중이라고 하기에 적합지 않아서 중국의 역경사들이 심일경성이라고 번역했다는 의미다. 화두일념처럼 마음이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거기에 반해 ‘집중’은 의도적으로 어디에 집중해 있다는 의미가 강하다.

그러니까 사마디를 ‘집중’이라고 생각하면 오해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사마디라는 단어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 중요한 요소들을 나열해보면 대체로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지속적이고(steaded)
2. 흔들리지 않고(unmoved)
3. 안정되어 있고(composed)
4. 통일되어 있고(unified)
5. 집중되어 있고(concentrated)

사마디의 요소 중에서 집중은 그중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흔들리지 않음’일 것이다. 어디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인가? 감각적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경전에도 초선을 설명할 때 이것을 중요한 요소로 꼽지 않는가?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을 떨쳐버린 뒤,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그러므로 삼매를 성취하려면 먼저 감각적 욕망을 관찰해야 한다. 삼매를 성취하는데 다섯 가지 장애 요소(오장애)가 있는데 맨 처음이 감각적 욕망이다. 감각적 욕망을 어느 정도 가라앉혀야 삼매에 들어간다. 감각적 욕망을 관찰해서 소멸시키지 않고 무조건 집중한다고 해서 삼매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육조단경에서도
“그저 평온하고 고요하고 안온하여 텅 비어있는 듯이 담백하게 되면 이러한 경계를 일상삼매라고 한다.”
라고 사마디를 정의하고 있다.

한 대상에 집중해서 삼매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켜 놓은 그러한 사마디는 일시적이다. 그런 사마디에서 나오면 마음이 다시 감각적 욕망에 흐트러진다. 반면에 관찰을 통해 감각적 욕망이 많이 제거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사마디는 어떤 대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안정되어 있고, 지속적이고, 통일되어 있고, 일념을 이룬다. 이것이 진짜 사마디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번뇌가 일어나는 메커니즘의 이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지가 저절로 일어난다. 물론 사선정(jhāna)을 성취하면 그만큼 통찰지도 예리해질 것이고 도과를 성취하는 것도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사선정도 집중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다. 감각적 욕망을 떨쳐버림이 우선이다.

그래서 결론이 뭐란 말인가? 사마디는 집중을 통해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관찰을 통해 감각적 욕망을 가라앉히고 어느 정도 소멸시켜야 한다. 그러면 마음에 고요함이 일어난다. 그 고요함은 어떤 대상에도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이고 통일된 진짜 사마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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