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스님과의 대화 -
“남방에서도 사시불공을 합니까?”
“하지 않습니다.”
“아니, 부처님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다니, 그들에게는 붓다에 대한 공경심이 없는 모양입니다.”
“진짜로 붓다를 공경하기 때문에 공양을 올리지 않습니다.”
“아니, 그 말에는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스님은 붓다께서 어딘가에 살아계시면서 음식을 올리면 받아먹고 물을 올리면 마실 거로 생각하십니까?”
“붓다께서 먹고 마시지는 않더라고 그 정성은 받으시겠죠.”
“그 정성을 받으시려면 붓다께서 어딘가에 살아계시면서 우리를 살피고 있어야 하겠군요.”
“그럼 붓다께서 소멸해버렸다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려는 겁니까?”
“소멸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지만, 붓다는 마하빠리닙바나(대반열반)에 드셨습니다.”
“붓다께서 대반열반에 드셔서 어딘가에 머물며 뭇 생명체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기복 종교의 교리처럼 들립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마하빠리닙바나(대반열반)은 이렇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몸을 받지 않는다’라고요.”
“‘더 이상 몸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까? 몸을 받지 않더라도 정신은 어딘가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요?”
“몸은 없고 정신만 존재하는 곳을 무색계라고 하죠. 무색계 사람들은 아라한이 아닙니다. 수다원조차도 아니고 다만 무색계 선정을 얻었을 뿐입니다. 그럼 정신으로만 존재하는 무색계 사람들과 아라한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아라한은 삼계에서 해탈한 성인입니다.
"‘더 이상 몸을 받지 않는다’라거나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거나 '삼계를 벗어났다'는 말은 다 소승의 교리입니다. 아라한이 끝이 아닙니다. 아라한은 다시 마음을 내어 중생 세계에 뛰어들어 뭇 중생들의 이익과 발전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그것이 보살입니다. 반야심경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까? ‘무노사 역무노사진’이라고요. ‘생사가 없다. 또한 생사가 끝이 없다.’라고요. 생사가 없는 경지에 올랐지만, 중생들을 위해 생사를 계속하는 겁니다. 이것이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중도입니다."
“하하! 대승의 교리가 매우 인간적이고 매력적이고 감동적입니다. 마치 예수의 십자가처럼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감동의 문제가 아니고 팩트의 문제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이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붓다는 대열반에 들었어도 그 열반의 세계에 머물며 중생들을 보살피지 않겠습니까?”
“붓다와 아라한은 대반열반에 들어 ‘더 이상 몸을 받지 않는다’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붓다와 아라한의 차이는 붓다는 무한한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것에서 다를 뿐입니다.”
“그럼 붓다에게 공양을 올려 복을 빌어야 하는데, 그럼 남방에서는 불공을 올리지 않고 어떻게 공덕을 짓습니까?”
“북방에서는 쓰리쿠션(당구)을 이용합니다. 신도들이 붓다에게 공양물을 올리면 스님들이 약간의 퍼포먼스를 해주고 내려 먹습니다. 남방에서는 신도들이 다이렉트로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며 공덕을 짓습니다. 남방에서는 공덕을 짓는 것은 뭐든지 직접 당사자에게 합니다.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을 돕거나 직접 스님에게 음식을 제공합니다.”
“그럼 형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결과는 같지 않습니까?”
“절대 같지 않습니다. 북방에서는 마치 붓다께서 어딘가에 머물고 계시면서 공양을 올리면 자신을 보살펴 줄 거라는 판타지를 신도들에게 가르칩니다. 이것을 좋게 보면 중생들에게 붓다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나쁘게 보면 사기입니다. 또한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붓다의 말씀을 왜곡시킨 것도 문제입니다. 붓다를 기독교와 힌두의 신처럼 만들어 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무아(無我)’의 교리가 왜곡되어 ‘상락아정(常樂我淨)’이 되어버린 것도 문제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구멍이 제방을 무너뜨리지요.”
※ 사시불공 巳時佛供 : 불교 사찰에서 사시 즉 오전 아홉 시에서 열한 시 사이에 올리는 예불 기도를 말한다. 사시마지(巳時摩旨), 또는 사시예불(巳時禮佛)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