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에고' 그러면,
이기적인 생각, 타인을 위하거나 배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생각이나 행위를 떠올린다.
'에고이즘' 그러면,
'이타주의'의 반대되는 말로써 '이기주의'를 떠올린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어느 누가 남을 먼저 생각하겠는가?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팔은 안으로 굽고
여유가 있어야 양심과 배려와 눈치 때문에 타인을 생각하게 된다.
<말리까 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꼬살라국의 왕 빠세나디는 부인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은근히 알고 싶었다.
"중전, 그대는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습니까?"
"전하, 저는 제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붓다께서도 이 말이 옳음을 게송으로 증명하셨다.
"마음으로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자를 찾을 수 없네.
이처럼 누구에게나 자신이 사랑스러운 법
그러므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 남을 해치지 마라." <S3.8>
아무리 뜨거운 연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자기를 최고로 사랑해.'라고 속삭인다면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거짓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를 두 번째로 사랑해.'라고 해야 정확한 말이다.
그러므로 종교인들이 아낌없는 사랑, 무한한 자비를 노래 부르더라도 믿지 마라.
그들이 말하는 것에는 뭔가 꿍꿍이가 있다.
'에고'를 밑밥으로 깔고 하는 말이다.
낚시꾼이 고기를 낚을 때 바늘에 미끼만 끼어서는 고기가 물지 않는다.
반드시 밑밥을 쫙 깔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고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것이다.
생존을 위해서 본능적으로 발현되는 자연 현상이다.
그러면 진짜 순수한 사랑, 순수한 자비는 없단 말인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범부의 세계가 아닌 진리의 세계, 출세간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수행을 통해 에고의 속박에서 벗어난 성인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진리의 세계에서 에고는 무엇을 의미할까?
몸과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몸이 내가 아니라고?
그렇기는 하네.
죽으면 부셔져 없어지는 것이니까 몸을 '나' 또는 '나의 것'이라고 할 수 없겠지.
그래도 정신은 남아있을 것 아닌가?
영혼은 남아서 어딘가에서 새로운 물질로 몸을 만들어서 존재할 것이 아닌가?
몸은 옷과 같은 것이지.
죽음은 옷을 갈아입는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뿌리깊은 삿된 견해, 유신견(有身見)
에고의 본질이다.
붓다께서는 유신견을 깨뜨리기 위해 다양하게 말씀하셨다.
"차라리 몸을 나라고 생각할지언정 마음을 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몸은 그래도 변화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마음은 시시때때로 변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나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붓다는 몸을 분해하는 방법을 자주 썼다.
"몸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수화풍으로 분해해보면 거기에 나라고 할만한 것이 어디 있는가?"
붓다께서 생물학을 공부하셨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몸은 수억만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그 세포가 끝없이 생멸한다. 어제의 몸과 오늘의 몸이 다른 것이다. 거기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붓다는 마음도 분해했다.
"마음은 느낌, 인식, 상카라(마음 작용),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느낌도 변하고 인식도 변하고 상카라도 변하고 의식도 변한다. 거기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인식을 예로 들어보자.
인식은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곳이다.
어제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오늘 새로운 기억이 입력되어 인식이 새로 재편집되었다.
어제의 인식과 오늘의 인식은 다른 것이다.
무의식의 저 아래에 아뢰야식이라는 기억의 저장창고가 있어서 세세생생 기억을 저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카라를 예로 들어보자.
상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생각, 의도, 심리현상이다.
어떤 것을 계속 생각하면 생각은 방향성을 가진다.
생각이 패턴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업이다.
그런데 오늘 정신적인 충격이나,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생각의 패턴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면 어제의 상카라와 오늘의 상카라는 다른 것이다.
거기에 '나'라고 할만한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
마치 촛불이 옮겨가듯이 오온이 끝없이 변해간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동일하고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가 같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나'가 있다고
동일한 연속성을 지닌 개체가 있다고
이런 근거 없는 믿음 체계, 이것이 유신견이다.
에고의 본질이다.
붓다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무아경>
십이연기가 어떻게 전개되는가?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우비고뇌"
무명은 유신견이다.
유신견을 기반으로 생노병사의 괴로움이 일어난다.
'이것이 나다.'라는 생각(아상)을 기반으로
탐욕, 분노, 시기, 질투, 인색, 자만, 등과 같은 번뇌가 일어난다.
동일한 연속성을 지닌 개체라는 생각(에고)을 기반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익된 방향으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특별한 자아다.'라는 생각을 기반으로 가치판단과 분별이 일어나
나와 남을 비교하고 우월감, 열등감, 자아도취, 자기혐오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에고의 현현, 에고의 작용이다.
수행은 왜 하는가?
수행은 순전히 유신견을 깨뜨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생각의 패턴을 나쁜 패턴에서 좋은 패턴으로 바꾸어나간다.
에고가 일으키는 불선한 마음을 지혜가 일으키는 선한 마음으로 바꾸어나간다.
번뇌는 사라져가고 고요와 평온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그 고요와 평온 속에서 마침내 문제를 일으키는 그 녀석,
유신견, 아상, 에고, 자아를 발견하고 깨뜨림으로써 족쇄를 끊고 묶임에서 풀려나 해탈한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이다.
- 석무념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