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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관련 영상

싹이 트는 두 가지 원인 - 인연(因緣)

불교와 물리학의 기막힌 인연 


  


연기설이 설파하는 물질세계의 실체 

 

자연과학과 불교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공통점이 보인다. 물리학과 불교가 만나는 기막힌 인연과 여기에 숨겨진 좀더 큰 뜻을 알아보자. 

 

현대과학과 불교라는 두 가지 정신활동은 다루는 내용이 다르고, 시간적으로도 2500년이라는 간극이 존재할 뿐 아니라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 또한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험과 관찰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과학의 세계이해가 오직 명상만으로 이룩해낸 불교적 세계관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싹이 트는 두 가지 원인 - 인연(因緣)

 

서구의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세계를 부분에 대한 분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전통에 기초한다. 자연과학은 이를 근거로 발전했지만, 자연에 대한 이해의 정도가 깊어감에 따라 전체 계는 단순한 부분의 합이 아니며 그 이상의 어떤 것이라는 자각을 하게 됐다. 이는 곧 자연과학에 의한 세계이해가 상호연관성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 연기론의 세계관에 근접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자연과학으로 파악된 물질세계의 연관성이 불교의 연기론과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연기론(緣起論)의 세 가지 주된 사상을 통해 알아보자.

 

일체의 존재가 인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인연생기(因緣生起) 또는 줄여서 연기(緣起)라 하는데, 이는 불교의 기본사상이다. 연기는 대략적으로 ‘인과성’ ‘시·공간적 상호연관성’ ‘주관과 객관의 상호작용에 의한 세계인식’이라는 세 가지 기본적 의미를 지닌다. 

 

연기론의 인과성이란 모든 현상이 인연(因緣)에 의해 생긴다는 의미로, 인(因)은 직접적 원인이고 연(緣)은 간접적 원인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예를 들어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씨앗은 싹의 직접원인인 인(因)이 되고, 주변조건인 흙, 물, 햇빛, 온도 등은 간접원인인 연(緣)이 된다. 이는 곧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의 인과적 연관성을 말하는 것으로, 원인이 결과를 앞지를 수 없다는 점에서는 과학의 인과론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물이 ‘물’다울 수 있는 인연

 

연기론의 두 번째 의미는 상호의존성, 줄여서 상의성(相依性)이다. 이는 연기론의 핵심적 의미로 불교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상의성은 ‘저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고, 이것이 있을 때 또한 저것이 있으며, 따라서 저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또한 없다’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즉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해 있다는 말이다.

 

연기론의 상의성은 물이 물의 성질을 가질 수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물분자는 하나의 산소원자와 두개의 수소원자가 서로 의지해야만 가능하다. 상의성이라는 개념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전체는 개개의 합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점이다. 수소원자와 산소원자 하나하나를 아무리 따로따로 분석해도, 그들이 서로 의지함으로써 성립되는 물분자의 성질은 드러나지 않는다. ‘물’은 개개의 원자가 서로 의지해 성립되는 인연에 의해서만 비로소 존재한다.

 

이런 상호의존의 관계는 생명체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 생명체는 심장, 혈관 등이 모여 순환기관을 이루고 다시 뇌, 신경기관, 순환기관, 호흡기관, 소화기관이 모여 한 개체를 이룬다. 이런 모든 요소가 화합해 하나를 이루는 인연이 성립함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생긴다. 그리고 이렇게 성립된 개체생명은 다시 그들 사이의 상호의존이라는 인연에 의해서만 생명현상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에 좀 더 시야를 넓히면, 개체생명이 없는 생체기관을 생각할 수 없듯, 전체생명(온생명)이 없는 개체생명도 생각할 수 없다. 연기론은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상호연관성을 의미한다.


 

무지개는 무지개고 책상은 책상이다

 

무지개를 구성하는 물방울 무지개의 본성이 없다. 무지개가 나타날 수 있게끔 모든 인연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무지개라는 관념과 명칭이 생긴다. 

 

연기론의 마지막 의미는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떻게 그려지는가 하는 인식과정에 관한 것이다. 좀 더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연기론은 주관이 대상세계를 어떻게 그려내는가, 객관인 대상이 주관인 우리에게 다가와 부딪히면서 객관의 경계가 주관의 인식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를 포함한다. 이는 세계에 대한 관념이 나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결과 세계가 나에게 어떻게 구성되는지 하는 문제다. 

 

예를 통해 알아보자. 여름철 흔히 볼 수 있는 무지개는 왜 생기며 어떻게 우리 눈에 보일까. 물리학에서는 무지개가 생기는 원인을 빛의 굴절과 반사, 서로 다른 파장의 굴절률 차이라는 말로써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우리의 시각기능이 현재와 같은 상태로 돼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일곱 가지 색의 무지개가 나타나는 이유는 물리학적 원인뿐 아니라, 우리가 빨강색에서부터 보라색에 이르는 빛을 감지할 수 있고 또한 이런 빛만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다면 무지개는 일곱 가지 이상의 색으로 보일 것이다. 

 

공중에 떠있는 물방울을 아무리 분석해 봐도 거기에 무지개라는 성질은 없다. 즉 물방울 자체에는 무지개의 본성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요소가 무지개가 나타날 수 있게끔 조성됨으로써, 즉 모든 인연이 어우러짐으로써 무지개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그 결과 무지개라는 관념과 명칭이 생겨난다. 

 

이는 다른 감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촉각의 경우, 아주 매끄러운 책상의 표면도 전자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설악산의 공룡능선보다 더 굴곡이 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매끄럽다고 생각되는 물질도 물질 자체에는 원래 매끄러운 성질이 포함돼 있지 않다. 오로지 모든 인연의 어우러짐으로 인해, 우리는 그 물체를 매끄럽다고 느끼게 되고 매끄럽다는 관념과 매끄럽다는 명칭이 생겨난다. 이처럼 우리의 인식세계는 객관세계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이 주관에 부딪쳐 상호 연관되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서로 의지해 존재하는 만물

 

인과성과 상의성, 객관과 주관의 상호작용에 의한 세계인식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연기론은 모든 존재가 그 자신의 변하지 않는 스스로의 성질, 불교용어로 자성(自性)을 갖는다고 믿는다. 또한 모든 존재는 남과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요소와 끝없는 어우러짐을 통해 존재하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 끝없이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물질세계의 경우 소립자들이 모여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고 그들이 모여 원자를 이루며 원자가 모여 분자를 이루고, 그 분자들이 생명체를 포함한 갖가지 물체를 만든다. 또한 이런 것들이 모여 천체를 이루고 천체가 모여 우주를 형성한다. 이렇듯 물질세계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고정된 자성을 갖고 있지 않다. 같은 양성자라도 어떤 때는 수소원자가 되기도 하며 어떤 때는 산소원자가 된다. 이를 불교에서는 ‘모든 사물이 다 무아’, 즉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한다. 여기서 ‘아’는 범어 ‘아트만’(Atman)을 음역한 것으로, 불멸하고 불변하는 실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제법무아라는 말은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가 그 자신만의 독특한 성질인 자성을 가질 뿐이지, 자기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듯 불교와 현대과학은 그 자체로는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두 분야는 모두 철저하게 의심한다는 접근법에 공통점이 있다. 현상의 본질과 원리를 끝까지 의심하며 파고든다는 점에서 불교와 자연과학은 접근방식이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현대과학은 자연의 실체를 규명하기에 너무 급급한 나머지 그 전체를 아우르는 관점을 지니지 못했다. 현재의 과학이 제기하는 많은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현대과학이 제기하는 많은 문제점의 해결책은 과학 내부가 아니라 오히려 불교의 연기론에서 비롯되는 통합적 사고방식에 있을 지도 모른다. 

 

<양형진/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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