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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불교는 성적 욕망을 어떻게 말하는가.



“붓다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적 욕망의 완전한 극복을 통해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1. 들어가는 말 

이제 우리 사회도 성에 대해 좀 더 자유로운 태도로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전철이나 대학의 강의실 등의 공공장소에서도 서로 부둥켜안고 키스와 함께 깊은 수준의 스킨십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인간 본능의 근저에 있는 쾌락 추구 본능을 이용하여 감각적인 유흥산업이 불야성을 이루며 주택가까지 맞닿아 있다. 일반인들도 ‘섹시하다’라는 말 또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주고받으며, 오히려 섹시함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가 되었다. 이제 성행위(性行爲)는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상호 간 커뮤니케이션이나 사교 그리고 스포츠 차원에서도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性)은 상품화되어 매매되고 있고, 승진을 위한 뇌물로도 이용되고 있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모든 활동 영역이 섹스와 관련되거나 가미되고 그렇게 될 때 더욱 활력을 얻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더 이상 인간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질문은 필요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는 누구나 먹고 마시고 성(性)을 충족시키는 데에 열중하는 것이 존재하는 모든 이유와 목적이라고 알고 행동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처럼 우리 삶에서 적극적으로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그러한 감각적인 즐거움의 중심에는 성행위가 있다. 이 점에 있어 프로이트(1856~1939)가 인간 활동의 모든 바탕을 성욕으로 보고 인류문명 또한 근원적으로 성욕에 근거한 것으로 주장하였던 것을 상기시킨다. 서구심리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프로이트가 인간 삶의 문제에서 이처럼 성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높음을 말했지만, 사실은 그보다 2,500년 전의 붓다에 의해서 설해졌다. 물론 긴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붓다와 프로이트 모두 인간의 근원적 욕구를 성욕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점이 있지만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 문제 해결의 방향은 크게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또 다른 주제에서 취급돼야 할 것이다. 


2. 불교경전의 성(性, sex) 

출가와 재가 모두 공통되는 오계(五戒)의 세 번째는 “그릇된 성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지키겠습니다.(Kāmesu micchācārā veramaṇī sikkāpadaṁ samādiyāmi.)”이다. 이에 대한 한역은 불사음(不邪淫)으로 음(淫)의 원어는 kāma이다. 글자 그대로 성행위로 옮겨지는 말이다. 하지만 경전에서 성행위나 성교를 나타내는 이보다 더 직접적인 용어는 methuna-dhamma라는 말이다. 이 말은 빠알리어이고 산스끄리뜨어로는 mithuna이다. 모두 기본적으로 남녀교합을 의미하는 말이다. 영어로 흔히 sexual intercourse로 번역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오계의 불사음계에서 알 수 있듯이 kāma라는 말이 성교를 포함한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불교 외에 고대 인도의 성에 관한 유명한 고전의 이름도 Kāma Sutra로 상상을 초월하는 갖가지 성 체위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인도 전통에서 kāma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외에도 taṇhā와 rāga가 많이 쓰이고 chanda도 또한 성행위와 같은 욕구를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는 경우도 많다. 특히 taṇhā는 한역으로 주로 애(愛)와 갈애(渴愛)로 옮겨졌으며, rāga는 탐(貪) 그리고 chanda는 욕(欲)으로 옮겨졌다. taṇhā의 경우 유전연기(流轉緣起)의 12연기 가운데 여덟 번째 항목으로 제시되고 환멸연기(還滅緣起)의 사성제에서는 두 번째 집성제(集聖諦)의 내용으로 제시된다. 여기서는 세 종류의 갈애 중 첫 번째로 kāma와 taṇhā의 복합어인 kāmataṇhā(欲愛)라는 말도 사용되며 한역으로는 욕애(欲愛)로 옮겨졌다. taṇhā는 어원적으로 ‘갈증’을 의미하는 말로 영어로 thirst나 lust, craving 등으로 옮겨지는데 이는 한역의 갈애와 의미상 통한다. rāga는 탐진치(貪瞋癡) 삼독 가운데 첫 번째인 탐에 해당되는 말이다. 어원적으로 ‘색깔’이나 ‘물든 것’을 의미하여 colour나 hue, dye로 옮겨지기도 하지만 lust와 attachment로도 또한 많이 옮겨진다. rāga는 다시 불을 의미하는 aggi와 합성어로 ‘탐욕의 불’을 의미하는 rāgaggi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chanda는 impulse, will, wish, intention 등으로 영역되며 rāga라는 말과 복합어로 chandarāga(exiting desire)나 kāmacchanda(excitement of sexual pleasure)라는 말로도 사용된다. 모두 인간 욕망을 나타내는 말로서 경전에서 쓰임새를 통해 볼 때 서로 간 약간의 개념 차는 있다. 

먼저 kāma는 초선의 단계에서 제거되는 오개(五蓋)의 탐욕개(貪欲蓋, kāmacchanda)에서 알 수 있듯이 1차적으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 같은 다섯 감각기관과 그 감각대상이 인연하여 일어나는 쾌락추구의 욕망을 말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감각적 욕망’이라 흔히 옮겨진다. 이에 반해 taṇhā와 rāga는 kāma보다는 훨씬 깊이 잠재하면서 넓게 작용하는 쾌락의 욕망을 의미한다. 따라서 kāma보다 taṇhā와 rāga가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kāmataṇhā의 경우 12연기와 사성제에 제시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욕망으로 나타나지만 어원적으로도 영역의 thirst나 한역 갈애에서 알 수 있듯이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는 허기진 욕망 또는 타오르는 욕망을 말한다. 실제로 인도의 살인적인 더위를 경험해 보면 왜 붓다가 인간고(人間苦)의 근원적인 욕망을 나타내는 말로 마셔도 마셔도 해소되지 않는 갈증 즉 taṇhā의 말을 선택했는지를 깨닫게 한다. 욕애(欲愛)는 12연기나 사성제에서 삼애(三愛)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욕구로 첫 번째에 배치되어 있다. 욕망과 관련한 붓다의 인간 이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rāga는 염색을 의미하는 어원을 가진다. 탐진치 삼독(三毒)의 탐의 원어로서 깊이 물들어 있는 중독성의 욕망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중독(中毒)의 독(毒)이라는 말이 더해졌으며 모든 욕망을 대표하는 말로 주로 사용되는 이유이다. 탐(rāga)은 동사형인 rajjati가 kāma와 함께 쓰여 ‘성행위의 중독 또는 물듦’에 대한 말로 이미 초기경전에 나타난다. 그렇기에 궁극적인 경지인 열반을 설명할 때 탐진치 삼독의 제거로 정의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말들이 경전에서 대체로 성행위를 포함한 부정한 인간 욕망을 나타내는 동의어로 쓰이지만 가끔은 구도의 과정에서 실천수행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쓰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뒤에서 설명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이상과 같은 말보다는 상대적으로 적게 나타나는 말이지만 동의어로 쓰이는 ālaya라는 말이다. 영역으로 lust, clinging, desire 그리고 attachment로 옮겨지며 후에 대승에서 제8 아뢰야식을 의미하는 말로 발전하였다. 쓰이는 문맥에서 볼 때 애욕이나 탐욕이라는 말이 적합하다. 성도 후 붓다는 세상 사람들은 애욕(ālaya)의 쾌락에 있고 애욕에 헌신적이고 애욕의 환희에 있기에 연기법을 보기 어렵다고 전법을 주저하는 장면에서 이 말을 사용한 바 있다. 


3. 출가자와 재가자의 범행 

붓다의 제자들 가운데는 출가 후라도 “여인을 보자 여색에 마음이 어지러워져서 욕정이 일어났으나” 스스로 다잡아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애욕에 대한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함”을 다지는 경우도 나타난다. 특히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유혹적인 옷을 입은 여자를 보아 성적 욕망이 엄습하여 경도되지 않도록 붓다는 제자들에게 늘 ‘sati를 확립(四念處)’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권장한다. sati가 확립된 상태란 어떠한 유혹으로부터도 휘말리지 않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한 경전에서는 박쿨라 비구가 오랜만에 어렸을 때 친구였던 한 나행(裸行) 사문을 만난다. 그런데 그 나행 수행자 친구는 ‘출가한 후 80년 동안 몇 번이나 성교를 해보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불교 승려는 성교는 그만두고 80년 동안에 욕상(欲想)이라도 일으킨 기억이 있는가 하고 묻게 하고 그 답으로 ‘도를 배운 지 80년 동안 아직 한 번도 욕상이 일어나지 않았다.’라고까지 말하는 예에서 출가한 불교도의 성생활 정도를 가름할 수 있다. 따라서 재가와 출가에 있어 외관상 차이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면에서 큰 차이는 재가자는 오계 가운데 세 번째인 불사음계와 출가자의 바라이법(波羅夷法, pārājika)의 제일 음계(淫戒)의 차이이다. 즉 재가자의 불사음계는 남의 아내와 같이 보호를 받는 여자와 불법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자신의 배우자나 합법적인 성관계는 허용되고 이외의 불사음계를 범하면 참회하면 된다. 반면에 출가자의 음계는 어떠한 경우에서도 성관계[淫行] 자체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 갖게 되면 승단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비구가 될 수 없다. 이를 범한 비구를 꾸짖는 붓다의 다음과 같은 문구로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그대의 성기를 여인에게 집어넣느니보다는 차라리 무시무시하고 독을 품은 뱀 아가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 낫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의 성기를 여인에게 집어넣느니보다는 차라리 검은 뱀의 아가리 속에 집어넣는 것이 낫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의 성기를 여인에게 집어넣느니보다는 차라리 활활 타오르는 숯 구덩이에 집어넣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출가 후 평생 동안 성행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많은 경전에서 강조된다. 그 이유는 “성행위(methuna)에 탐닉하는 자는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삿됨을 행한다.”나 “홀로 수행하는 지혜 있는 자라 하더라도, 성행위에 빠지면 사리분별이 흐려진 사람처럼 괴로워한다.” 등으로 간략하게도 설명한다. 특히 출가 비구에게 성행이 금지되는 이유는 보시물에 의존하고 있는 수행자가 지극히 사적이고 감각적인 욕망 충족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측면과 함께, 수행 교단의 안정적인 유지도 그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붓다 자증(自證)의 중도적 체험 때문이다. 즉 성행과 같은 쾌락적인 낙행(樂行)과 반대인 자학의 고행도 궁극적인 고멸(苦滅)을 담보할 수 없고 그렇기에 일체 고가 다한 열반 또한 성취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성적 쾌감에 대한 반성이나 포기 없이 열반을 성취하고 해탈하겠다는 것은 마치 독사를 잡겠다고 하면서 꼬리나 몸통을 잡는 격과 같다는 것이다. 목을 잡아야 독사에 물리지 않지 몸통이나 꼬리를 잡다가는 물려 죽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전의 많은 곳에서 “성적 행위의 단절인 범행(梵行)의 실천으로 완전히 고(苦)을 멸한다”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출가자와 재가자가 구분되는 결정적인 경계로서 성행(性行)을 차단할 수 있는 마음 자세와 환경을 가졌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할 수 있다. 《율장》의 여러 조항에 의하면 출가 비구는 이성 또는 동성 간의 직접적인 성행위는 물론 자위행위를 포함한 어떠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도 성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상대 성을 말로 희롱해서 성적 쾌감을 얻는 경우나 상대 성의 자태에 대한 기억이나 상상을 통해서 얻는 것도 포함된다. 

붓다는 출가자를 위한 가르침에서 사람이 만족할 수 없는 두 가지 법이 있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법을 익히면 끝내 만족할 줄 모르는 것으로 음욕(淫欲)과 음주(飮酒)를 들고 있다. 

난타야, 너는 꼭 알아야 하느니라. 두 가지 법이 있는데, 그것에 만족이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법을 익히면 끝내 만족할 줄 모를 것이다. 어떤 것이 그 두 가지 법인가? 이른바 음욕(淫欲)과 술을 마시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만족할 줄 모르는 두 가지 법이니라. 어떤 사람이라도 이 두 가지 법을 익히면 끝끝내 만족할 줄을 모르느니라. 따라서 그 행의 결과로 말미암아 또한 함이 없는 곳[無爲處 : 涅槃]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음욕과 음주의 결과로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성행위와 술에의 중독은 점점 높은 강도와 잦은 횟수를 요구하여 자제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끝내 만족하거나 채워지기 전에 죽음이 온다고 한다. 다른 경전에서는 출가자에게 네 가지 오점이 될 수 있는 행위는 ‘음주’와 ‘음행’과 ‘금은을 받는 것’ 그리고 ‘삿된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라 한다. 현재까지 전승되는 《율장》의 대부분에서 음욕의 행함이 열반 해탈로 가는 장애의 길인가 아닌가는 다음의 율 조항이 이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 

만약 어떤 비구가,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부처님이 설하는 바의 법을 안다. 음욕(淫慾)을 행함은 장도(障道)의 법이 아니다”라고. 저 비구는 마땅히 이 비구를 간(諫)하여 말하라. “대덕이시여, 이와 같이 말하지 말라. 세존을 비방하지 말라. 세존을 비방함은 불선(不善)이다. 세존은 이와같은 말을 하지 아니하셨다. 세존은 수많은 방편으로 음욕을 행함은 곧 장도의 법이라 설하셨다.”라고. 저 비구에게 이와 같이 간할 때 견지하여 버리지 아니하면 저 비구에게 버리도록 하기 위해 마땅히 세 번 간하라. 이렇게 세 번 간하여 버리면 좋으며 만약 버리지 않으면 파일제(波逸提)이다. 

《오분률》에 의하면 이 같은 조항이 설해지게 된 인연이 어느 비구가 부부생활을 하는 재가자 가운데 성도(聖道)를 이룩하려는 이가 있는 것을 보고 그러한 주장을 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재가 또한 기본적으로 출가와 같이 음욕을 줄여나가는 실천이 갖가지 방편으로 제시된다. 예를 들면, 재가의 포살은 단 며칠만이라도 그러한 출가의 삶의 방식으로 확장하여 실천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적어도 초기불교는 출가지향의 입장을 보여준다. 
다시 이 같은 음욕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 재가자(우바새)의 이중적인 삶이 경전에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과거 세상 어느 때, 섬에 살고 있던 어떤 우바새가 다른 우바새의 집에 찾아가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 가운데에서 애욕(愛欲)에 대하여 몹시 나무라면서 말했다. “이 애욕이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으며, 사람을 속이는 법으로서, 마치 꼭두각시가 어린애를 속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하던 그는 정작 자기 집에 돌아와서는 다섯 가지 애욕을 마음껏 누렸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별역잡아함에서는 한 우바새가 아닌 여러 우바새가 모여서 애욕의 허물을 꾸짖으면서도 말뿐인 것으로 실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재가자의 태도는 《백유경》의 이야기가 또한 매우 시사적이다. 즉 한 어리석은 사람이 꿀을 달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친구가 찾아왔다. 반가운 마음에 꿀을 대접하고 싶었으나 너무 뜨거웠다. 그래서 꿀을 식히기 위해 불 위에서 꿀을 그대로 놔두고, 부채질한다는 이야기로 속된 탐욕의 불을 그대로 두고 지혜의 꿀을 찾는 어리석음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반대로 경전에서는 재가로 살면서도 단음(斷淫)이 거의 출가자에 준하는 계율을 지키며 사는 우바새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나쿨라 부부 이야기이다.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에서 나쿨라피타(Nakulapita)는 불사(不死, amata)의 열반을 성취한 ‘재가(gahapati) 아라한’ 21인의 이름으로도 나타난다. 이렇게 뛰어난 재가자의 명단에 남편이 거론되고 그의 아내 또한 대단히 높은 수행 경지에 이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감동적인 말을 한다. 즉 한번은 남편이 죽을 것 같은 병상에서 부부는 16년 동안이나 부부관계를 갖지 않은 범행(梵行)을 실천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남편이 죽더라도 성적 욕망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일은 없을 것이고, 그리고 애들을 잘 키우고 더욱 불교 수행을 열심히 할 수 있을 것으로 남편을 위로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앞의 인용 경전에서 범부의 삶은 애욕의 꼭두각시놀음이라고 한다. 수행의 입장에서 이를 분명히 통찰하는 것이 강조된다. 그래서 사성제의 집성제는 성적 쾌락은 살아가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심층의 욕구로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실천적인 면에서 출가와 재가라는 이분(二分)과 관련하여 그 중심 문제는 성 문제이다. 성생활을 벗어나는 길이 바로 출가의 시작이고, 완성은 성욕을 존재의 뿌리로부터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성적 욕망의 질적인 전환을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聖)과 속(俗) 그리고 성인과 중생의 차이는 마치 종이 한 장 차이의 문제일 수 있지만 실행하기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성생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완전한 해방을 성취하는 것이냐, 아니면 끝없는 미련과 허기로 반성 없이 쳇바퀴 돌 듯 반복하느냐의 차이가 수행에 있어 관건이 될 것이다. 


4. 단음(斷淫)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과 경지 

출가나 재가 모두 불교 수행의 목적은 같다. 한 바라문이 무슨 이유로 붓다에게 재가자나 출가자가 배우는가를 묻는 질문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집에 있거나 혹은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나의 제자들이 널리 듣고 외워 익히는 까닭은 스스로 마음을 제어하기 위함이요, 스스로 마음을 쉬기 위함이며, 스스로 열반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범지여, 집에 있거나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나의 제자들은 이런 이유로 널리 듣고 외워 익히느니라. 

이 외에도 많은 경전에서 ‘마치 모든 강들이 있지만 결국 큰 바다로 기울어 나아가듯이 불교에도 출가나 재가가 있지만 이 또한 모두 궁극적으로 열반성취로 나아감’을 말하는 경전이 많다. 마찬가지로 불교의 궁극적인 경지 성취와 관련해 한 외도가 붓다를 만나 질문하는 내용과 답변으로 출가와 재가의 차이를 알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휜 옷 입은 재가자 가운데 얼마만큼이나 범행(梵行)을 닦아 오하분결(五下分結)을 완전히 끊고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습니까?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단지 백 명이나 이백 명 내지 오백 명도 아니고, 그보다도 훨씬 많은 재가자들이 범행을 닦아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고 순간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어 바로 그곳에서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출가 비구·비구니에 이어 같은 형식으로 재가자에게도 해당하는 질의응답인데, 여기서 분명히 불설(佛說)에 의해 많은 수의 재가자들이 범행(梵行)을 닦고 오하분결을 완전히 끊어 궁극적인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재가자 또한 궁극적인 경지로서 열반의 성취를 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그 성취하는 과정까지 결코 모두 같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출가의 중요성이 강조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재가자의 조건은 출가자보다 열반 성취가 훨씬 힘들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욕애(欲愛)를 벗어나기 훨씬 어려운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가자라 할지라도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 자가 단지 백 명이나 이백 명 내지 오백 명도 아니고, 그보다도 훨씬 많은 수가 언급되고 《앙굿따라 니까야(Aṅguttara Nikāya)》에서는 열반을 성취한 21인의 재가자 이름이 열거되기도 한다. 본고는 주로 초기불교 경전을 중심으로 애욕에 관한 문제를 서술했지만 대승불교에 가서도 큰 변화는 없다. 다만 선교 방편적인 차원이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반야바라밀다경》 제402권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자야,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방편선교로써 유정들의 이익을 성취하게 하려는 까닭에 변화하여 다섯 가지 욕락을 받기는 하지만, 이 보살마하살은 다섯 가지 욕락에 대해 마음속으로 깊이 싫어하여 다섯 가지 욕락에 더럽혀지지 않고, 한량없는 법문(法門)으로 온갖 욕락을 꾸짖되, ‘애욕은 사나운 불꽃이니, 몸과 마음을 태우는 까닭이요, 애욕은 백정[魁膾]이니, 과거·미래·현재에 항상 괴롭히는 까닭이요, 애욕은 원망스러운 적군이니, 밤이 새도록 엿보아서 해로운 일을 하는 까닭이며, 애욕은 횃불[草炬]과 같고, 애욕은 쓴 과일과 같고, 애욕은 칼날과 같고, 애욕은 불더미와 같고, 애욕은 독약이 든 그릇과 같고, 애욕은 나쁜 요술과 같고, 애욕은 함정과 같다’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부문의 허물로써 모든 애욕을 꾸짖어서 모든 애욕의 허울을 이미 잘 깨달았거니 어찌 진실로 모든 애욕을 받을 이가 있겠느냐? 다만 교화할 유정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방편선교로써 모든 애욕을 받는 듯이 보일 뿐이니라.” 

부모·처자·권속이 다 갖추어져 있는 보살이라도 항상 범행을 닦지만 경우에 따라 욕락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방편선교 차원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보살의 방편은 시대와 장소와 사람의 근기 성향 경향성에 따라 단계적으로 불교로 이끈다는 대기설법(對機說法)과 차제설법(次第說法)의 가르침이 강조된다. 즉 중생은 욕락(欲樂)의 존재로 욕과 낙을 가졌기에 그러한 욕과 낙을 이용하여 중생을 이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보살이 애욕으로써 사람을 끌어들여 마침내 제도하는데, 여기서 욕(欲)은 마치 갈구리(鉤)와 같다는 것으로 욕구(欲鉤)라는 말이 쓰인다. 예를 들면 《유마경(維摩經, Vimalakirti-nirdesa-sutra)》 〈불도품(佛道品)〉에 보살은 ‘음녀(淫女)로도 나타나서 모든 호색가를 끌어들여 먼저 욕(欲)으로써 유혹하여 불지(佛智)에 들게 한다’고 할 정도이다. 


5. 단음의 사회 실천적 의미 

성행위는 사람 간의 가장 은밀한 인격적 교류이며 가장 원초적이고 자극적이며 끈질긴 욕망이다. 그렇기에 성은 끝없는 유혹으로 간주된다. 수행하는 출가자에게 강조하는 음계(婬戒)의 이러한 점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중생구제라는 이타적인 면에서 처자식과 가정이 있게 되면 항상 처자식과 자신의 것에 붙들려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백유경》에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한 출가자가 탁발 시간을 아끼고 수행할 요량으로 우유를 구하기 위해 염소를 기르고, 다시 염소를 지킬 개를 구하고, 계속해서 염소를 놓아 키울 땅을 구하고, 급기야는 살림이 늘어나자 이를 맡길 아내를 구하게 되면서 결국 수행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차적인 소유가 어떻게 연쇄적으로 2차적인 소유와 집착으로 끊임없이 확대재생산되어 나가는지를 잘 보여주는 재미있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단음의 출가는 소유와 집착에 떨어져 자신과 자기 가족이라는 혈족의 범위와 한계에 머무르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오로지 출가자는 집을 떠나 바리때와 한 벌의 가사·장삼에만 의지한 채 모든 것을 버릴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된다. 

가정은 기본적으로 부부간의 애정에 바탕하고 있다. 부부간의 애정이라 하더라도 이는 사적이며 이기적인 음심(淫心)이다. 그렇기에 흔히 애정의 표현은 주로 밀폐된 방이라는 어둡고 비밀스러운 사적인 공간과 관련된다. 심리적으로 사적이고 이기적이면 이타적이기 쉽지 않다. 타인이 ‘욕망의 대상’으로 대상화되는 한 이타적이기 어렵다. 성행위는 기본적으로 상대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헤아릴 수 없는 부정적인 정서와 감정 그리고 의지와 함께한다. 성은 대단히 복합적인 콤플렉스로서 위선, 조작과 왜곡, 초조, 불안, 강박, 히스테리, 우울, 스트레스, 불만족, 의심, 시기, 시샘, 질투, 시기, 결핍과 상실, 박탈감, 공허감, 수치심, 죄책감, 죄의식, 화, 미움, 울분, 신경질, 짜증, 분노, 폭력, 자학과 가학, 회피와 도피, 절망, 중독, 맹목 등과 같은 갖가지의 뒤틀린 심리와 또 다른 차원의 욕망과 내연(內緣) 관계에 있다. 성은 이러한 부정적인 정서와 감정 그리고 의지로 표출하기도 하고, 거꾸로 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성욕은 또 다른 욕망인 물욕, 권력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그리고 생명연장 욕망 등과 내밀하게 상의상관해 있다. 이를 욕망의 풍선효과 또는 전이효과라 할 수 있다. 어떤 종류의 한 욕망이 억압을 받거나 차단되면 다른 욕망으로 옮겨가 다른 형태로 보상받으려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욕이 차단되면 식욕이나 권력욕 등으로 전이되어 더욱 밝히는 것이 그것이다. 성욕은 가장 근원적이고 1차적인 욕망이어서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어떠한 인간 행위도 결국 성적 행위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자기중심의 성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한 성스러운 길로 거룩한 길로 나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경전에서는 이러한 애욕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온갖 싸움과 고통이 일어난다고 한다. 인생이 이처럼 욕망의 드라마임은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매일 보여준다. 

지극히 본능적인 동물의 세계를 보라. 발정한 수캐는 먹는 것도 잊고 이른 새벽부터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내고 여기저기 교미를 위해 암컷을 찾아다니며 목숨 걸고 이전투구한다. 사자 같은 맹수를 보면 수컷은 교미에서 불만스러운 암컷을 가차없이 물어 죽인다. 암거미는 교미 직후 흥분이 가시기 전에 수거미를 잡아먹는다. 야생동물은 다른 포식자에게 잡아먹히는 것보다 먹이 다툼과 짝짓기 경쟁으로 더 많이 희생된다고 한다. 어미 쥐도 성적 쾌감과 관련한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면 배고픈 상태에서 먹이도 내팽개치고, 새끼 젖 주는 것도 내팽개치고, 심지어는 전기적(감전) 상태를 통과하는 것까지 감수하고서 쾌감에 집착한다. 이처럼 때로는 동물을 통해 인간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현생에서도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하는 속담이 있다. 한데 애욕은 세세생생 익힌 업이고 그 힘으로 다시 삶을 받고 계속 생존을 지속하고 있는데, 성애에 목숨을 건다. 영화 제목 그대로 그것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아”이다. 때문에 초기경전에 붓다는 “무엇이 세상을 이끌고 무엇에 의해 끌려다니며, 어떠한 하나의 법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에 “욕망[渴愛]이 세상을 이끌고 욕망에 의해 끌려다니며 욕망이라는 하나의 법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답한다. 다른 곳에서는 “세상은 욕망의 화살이 꿰뚫고 있고, 세상은 욕망의 연기에 휩싸여 있다. 세상은 욕망[渴愛]에 묶여 있다.”라고 천명한다. 

상상해 보라! 만약 출가 수행자가 성적 욕망에 물들어 온갖 성적 상상으로 상대 이성(異性)을 성욕의 눈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분별한다면. 이러한 점에서 성(性)은 성(聖)스럽지 않고, 성(性)스러운 것에서 떠날 때 성(聖)스럽고 거룩해질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성(聖)과 성(性)은 성(聖)과 속(俗)을 그리고 승(僧)과 속(俗)을 그대로 의미한다. 이렇게 성(性)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자신과 관련한 모든 이해타산에서 벗어나 공평무사한 대의(大義)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심조(唯心造)의 입장에서 세상을 성욕으로 투사(投射)하지 않는 청정심은 순수한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함께 하화중생(下化衆生)에 전념할 수 있다. 이를 출가자의 청정성, 즉 비구성(比丘性, bhikkhu-bhāva)이라 한다. 


6. 단음(斷淫)의 실천수행 이유 

불교 수행에서 성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나타난다. 그것은 출가자들의 첫 번째 조항의 계율이 불음계(不淫戒)임을 통해서 그리고 불음의 범행(梵行)이 강조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궁극적인 경지 또한 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를 말하고 있다. 불교는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의 경우, 성적 욕망을 충족하는 등의 오욕락(五欲樂)을 누리는 삶은 인정된다. 세속적인 복(福)으로까지 그 공덕을 설하지만, 재가자의 지향성에 있어 성을 통한 쾌락적인 삶이 적극 권장되지는 않는다. 대신 출가자에서처럼 성의 속성을 깊이 통찰하여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역설한다. 이처럼 애욕을 충족시키는 삶에서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 불교의 입장은 현대의 ‘행복심리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예를 들어, 국내에도 여러 차례 내왕하기도 하고 번역서도 널리 읽히고 있는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인간의 행복에 대한 연구 주제로 유명하다. 그런데 그의 저서 가운데 ‘과연 성생활이 삶을 보람 있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쾌락은 생물학적 프로그램이나 사회적 환경에 의해 설정된 기대수준이 충족되었다는 정보를 우리가 의식하게 될 때 느끼는 만족감이다. 쾌락은 삶의 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나 그 자체로는 행복을 가져오지 못한다. 잠, 휴식, 식사 그리고 섹스는 신체적 욕구가 발생시킨 정신적 엔트로피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회복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정신적 성장까지 일으키지는 못하며, 그들은 자아에 복합성을 추가해 주지도 못한다. 즉 쾌락은 질서를 유지하게 해주지만 그 자체가 의식에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섹스와 관련한 행복론은 2,500년 전의 붓다의 통찰과 일치한다. 즉 붓다가 궁극적인 행복을 의미하는 열반 성취를 위한 실천수행의 길로 고락중도(苦樂中道)를 제시한 이유가 그것이다. 즉 감각적인 쾌락은 우리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다주는 회복기능은 하지만 그 자체로는 정신적 성장으로 인한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며 또한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요인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궁극적인 행복을 위해서는 고행은 물론 감각적인 즐거움의 낙행(樂行)까지도 지양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불교수행을 의미하는 말인 Bhāvanā는 원래 ‘마음으로/에 의한 계발(cultivation by mind)’을 의미한다. 즉 정신적 성장을 일으키는 마음수행, 수심(修心)이라는 말이 현재까지 쓰이는 이유가 된다. 


7. 단음(斷淫)의 교리적 의미 

12연기 가르침이나 사성제와 같은 중심 가르침에 의하면 욕애(欲愛, Kāma-taṇha)는 인생을 이끌어가는 동력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생을 지배하는 힘이다. 경전에서 중생은 누구나 ‘갈애(渴愛)의 화살(taṇha-salla)’을 맞은 상태로 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욕망이 지배하는 욕계(欲界)의 욕유(欲有)이고 욕생(欲生)의 존재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본능적이고 맹목적인 욕망으로 쳇바퀴를 돌다가 일생을 마감한다. 욕애의 수준에 따라 현실인식에서 조작 또는 왜곡이 좌우된다. 애욕에 눈이 어두워지면 상대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애욕이 식거나 약해지면 그동안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애욕이 강할수록 현실 왜곡도 깊고 크다. 그리고 왜곡이 깊고 클수록 고통 또한 깊고 크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보통의 사람, 욕망에 따른 쾌락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불교가 밝히는 궁극적인 진리인 연기법을 보기 어렵다고 한다. 붓다는 보드가야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고 난 후 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내가 증득한 이 법은 매우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지극히 고요하고, 수승(殊勝)하며, (분별) 사유의 범위를 넘어 있으며, 미묘하여 지혜 있는 자만이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애욕(ālaya)의 쾌락에 있고 애욕에 헌신적이고 애욕의 환희에 있다. 이렇게 애욕(ālaya)의 쾌락에 있고 애욕에 헌신적이고 애욕의 환희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과 이것을 조건[此緣性]으로 하는 연기법을 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또한 제행(諸行)의 지멸(止滅), 모든 취착(取着)의 버림, 갈애의 멸진(滅盡), 이욕(離欲), 지멸, 열반을 보기 어렵다. 

계속해서 수고로이 증득한 진리를 설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생각하는 장면에서 유명한 범청권청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탐(rāga)과 진(dosa)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이 진리를 잘 깨닫게 하기는 어렵다. 이 진리는 세간의 흐름을 거슬러 가고(paṭisotagāmi) 심심미묘하여 보기 어렵다. 탐욕에 물든 자(rāgarattā), 어둠에 뒤덮인 사람은 보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은 반성 없이 ‘감각적 쾌락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것이 일반적인 성향이다. 이러한 점에 반해 불교는 스스로 이러한 세류에 반한 역류도(逆流道 : paṭisotagāmi)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붓다는 궁극적인 진리인식 측면에서 애욕과 탐욕에 물들어 있는 자는 연기법을 보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불교가 왜 단음 즉 범행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8. 단음(斷淫)의 구제론적 의미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수행 공동체에서 금욕과 단음의 의미는 단순히 조직의 기강을 위한 규범 체계나 윤리 조항이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사성제 가르침에 의하면 욕망은 중생을 윤회하게 하는 원인과 이유로 설명된다. 고성제의 원인인 집성제가 그것이다. 이러한 욕망 즉 갈애를 제거하는 길이 바로 멸성제의 열반 성취의 길이 된다. 성행위는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끊임없이 구속하고 속박하는 질곡으로, 이로써 세상만사가 확대재생산되고 순환하는 바탕이 된다. 때문에 온갖 인생고와 부조리의 뿌리로서 집성제의 첫 번째에 배정된다. 불교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속박과 구속에서 벗어나는 대자유로서 해탈을 말한다. 그러한 대자유의 길은 바로 완전한 평화인 열반의 길이라고 한다. 때문에 열반과 해탈의 상태를 나타내는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깨끗한 믿음의 마음으로써 위없는 청정행을 닦고 현재에 있어서 스스로의 몸으로 증명하여 생사는 이미 다하고 청정행은 이미 세워졌으며 할 일은 다해 마쳐 뒷 목숨을 받지 않고 곧 아라한을 이루었다. 삶이 다하고, 범행을 완성하고, 해야 할 바를 모두 마치어 더 이상 또다른 삶을 받지 않음을 반야지혜로 안다. 
고수, 낙수, 불고불락수에 대해서도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싫어하기 때문에 즐거워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한 줄을 안다. 그래서 나의 생은 이미 다하고 , 범행은 서고, 할 일은 이미 마쳐, 다시는 후생의 몸을 받지 않는 줄을 스스로 안다. 

범행의 확립이 의미하는 바는 완전한 단음이다. 완전한 단음은 또 다른 생을 부르는 일을 정지시킨다. 욕애는 중생계에 있어 윤회하게 하는 요인이다. 즉 욕애가 그침으로써 더 이상 윤회는 없는 것이다. 이로써 열반과 해탈을 이룬 것이다. 그렇기에 열반에 대한 약 32가지 다른 이름 가운데는 taṇhakkhaya(渴愛盡/ 갈애의 소멸), Virāga(離貪/ 탐욕의 소멸)로 열거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성제 체계에서는 멸성제는 바로 열반을 의미하는 것인데 다름 아닌 갈애의 소진을 의미한다. 


9. 남는 문제 

섹스를 자유로이 즐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세속의 현대사회에서는 성욕을 억압하는 금욕주의 강조는 인간의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다. 성은 과거 사회에 비해 복잡해진 현대사회만큼이나 훨씬 더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2500년 또는 2600년 전 석가모니 붓다 시대의 성과 현대 사회의 성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차이를 고려해야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생명현상으로서 성의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관통해 있는 보편적인 문제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현대에는 은폐와 억압의 성에서 긍정적이고 자유분방한 성으로 진행되고 있다. 나아가 핫 섹스(Hot sex)와 쿨 섹스(Cool sex) 개념까지 논의되고 있다. 예전과 같이 성행위를 부끄럽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아닌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삶의 일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로 나가고 있다. 오히려 건강한 삶은 건강한 성생활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열반 해탈을 위한 금욕은 중생의 처지에서 선뜻 수용하기 어려운 측면도 없지 않다. 실제로 중생계는 성적 욕망과 같은 기본적이고 1차적인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거나 차단됨으로써 야기하는 갈등, 불만족, 분노와 폭력, 무기력과 절망 그리고 일탈 등은 커다란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급변하는 한국사회에 있어 가족 해체는 경제적인 이유와 함께 더 깊은 이유로는 부부간의 성적 갈등과 부조화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구별이 없다. 예전 같으면 할아버지라 불리는 나이가 든 연장자도 예외는 아니다. 주변의 지인 가운데 40~50대에 갑자기 죽은 경우, 흘러나오는 뒷이야기는 부부간의 성적 갈등이 자리했다는 경우가 많다. 금실 좋은 부부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별거 또는 각방을 사용하면서 속앓이를 했다거나, 그러다가 어느 날 아침에 방에서 나오지 않아 가서 보니 혼자 죽어 있더라는 등등. 
열린 사회에서 다면적인 접촉은 예기치 않은 충동과 과잉욕망을 유발한다. 또한 욕망을 부추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의 절제는 더욱 어렵다. 따라서 아무리 고귀한 이상을 가진 것이라도 세상 가치에 부응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시당하거나 경시당하기가 쉽다.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자신의 입장과 처지에 따라 부분적으로 또는 아전인수격으로 조작 왜곡해 받아들이기가 쉽다. 많은 이들이 불교 또한 세상의 조류, 아니 자신의 세속적인 욕구와 성향에 맞추어 합리화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역류도(逆流道)로서 불교의 금욕정신은 욕망의 사회를 설득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 생명의 문제를 과감하게 극복하려고 나서는 자에게 더 큰 희소가치가 부여되는지도 모른다. 


조준호 /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교수. 동국대 및 인도 델리대 불교학과 석사·박사. BK(Brain Korea) 21 불교사상연구단과 동국대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역임. 저서로 《우파니샤드 철학》 《불교−종교문화적 그리고 사상적 기원에 대한 비판적 검토》 《실천불교의 이념과 역사》(공저), 주요 논문으로 〈대승의 소승폄하에 대한 반론〉 〈초기불교에 있어 止 觀의 문제〉 〈무명(無明)과 공(空): 욕망의 비실재성에 대한 불교적 통찰〉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출처 : 불교평론 [49호]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




10. 경전에서 말하는 성적 욕망 

음란한 마음을 끊지 않고는 절대로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사 선정이나 지혜가 생겼다 할지라도 음행을 끊지 않으면 반드시 악마의 길에 떨어지고 말것이다.

그러므로 음욕을 끊지 않고 수도한다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

음란의 뿌리를 몸과 마음에서 말끔히 뽑아버리고 뽑아버렸다는 생각마저 없어야 비로소 

깨달음의 길에 오를 것이다.

-능엄경-



정욕에 색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색에 대한 욕심은 크기가 끝이 없다.

다행히 하나뿐이기 망정이지 만일 그것이 두개였다면 이 세상에서 수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사십이장경-



인간은 누구나 남녀간의 이성과 재물에 초연하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칼날에 묻은 꿀을 보고 핥다가 혀를 베는 것과 같다. 

-사십이장경-



만남이 깊어지면 애정이 싹트고 애정이 싹트면 고통의 그림자가 따른다.

애정으로부터 불행이 시작된다는 것을 관찰하고 저 광야를 가고 있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



모든 중생은 음욕 때문에 생사에 윤회한다. 음욕은 애정을 일으키고 애정은 생사를 일으킨다.

음욕은 사랑에서 오고 생명은 음욕에서 싹튼다. 음욕 때문에 마음에 거스름이 생기고,

미움과 질투를 일으켜 온갖 악업을 짓는다.

그러므로 그 누구라도 고통스러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정의 갈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원각경-



습한 땅에 잡초가 무성하듯 애욕의 습지에는 번뇌의 잡초가 무성하다.

애욕은 꽃밭에 숨어 있는 독사와 같다. 사람들은 독사에게 물려 죽는 줄도 모르고 꽃을 꺾으러 꽃밭으로 달려간다.

이처럼 애욕이 숨어 있는 곳에는 항상 유혹이 뒤따른다. 

-열반경-



보통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색을 보고 사음의 마음을 일으키면, 온갖 사악한 마음이 모두 일어난다.

나쁜 마음들이 생겨나면, 양심은 곧 죽고 만다. 

-불가록-



사람에게 애욕은 횃불을 쥐고 바람을 맞으며 가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횃불을 놓지 않으니 반드시 손을 태우는 우환이 있게 될 것이다. 

-사십이장경-



늙은 여인은 어머니같이 생각하고 젊은 여인은 누이같이 생각하고

어린 여자는 딸 같이 생각하여 예로써 공경할지니라. 

-사십이장경-



애욕은 착한 법을 태워버리는 불꽃과 같아서 모든 공덕을 없애버린다.

애욕은 얽어 묶는 밧줄과 같고, 시퍼런 칼날을 밟는 것과 같다.

애욕은 험한 가시덤불에 들어가는 것 같고, 성난 독사를 건드리는 것 같으며, 더러운 시궁창과 같은 것이다.

차라리 남근을 독사의 아가리에 넣을지언정 여자의 몸에는 대지 말라. 

-사분율-



남의 딸을 보거든, 자기 딸이 다른 남자의 침범을 싫어하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라.

남의 아내를 보거든, 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더럽혀지길 두려워하는 것과 똑같이 생각하라. 

사음의 생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하거든, 자신을 깊이 되살피고 흔들어 일깨우며, 스스로 이렇게 경책하자.

"내가 남의 아내와 딸을 간음하고 싶은 마음이 이는데, 만약 나의 아내와 딸이 또 다른 사람에게 간음을 당한다면 어떠하겠는가?"

여자의 얼굴을 마주 대하고서, 위와 같이 한번 생각해 본다면, 나쁜 마음은 저절로 사라지고 그칠 것이다. 

-불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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