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그대는 그대 자신의 주인
그대 자신의 미래를 만든다.
고엔카의 가르침/인경 옮김
## 길
이 책은“지혜의 계발”이라 불리우는 비파사나 수행법을 소개하고 있다. 인류의 스승 고마타 붓다의 가르침의 본질인 비파사나는 시간과 공간, 문화적 배경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관찰을 통해 우리는 실제의 삶에서 생기는 갈등, 집착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고 평화로운 마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S.N. 고엔카
비파사나 수행이 나의 삶에 가져온 변화에 영원히 감사한다. 처음 이 수행법을 배울 때, 나는 마치 복잡하고 어두운 샛길에서 헤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지금은 큰 길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길을 걷는 여러 해 동안 점점 분명해졌다.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수행법이 궁극적인 목표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이 수행법을 가르쳐 준 사야지 우 바킨(Sayagya U BaKhin)과 붓다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스승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들을 대신하여 또 빚을 갚기 위해서도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수행의 길을 권하고 싶다. 그래서 그들도 역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발견했으면 한다.
바라건대 이 책이 비파사나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그 이해를 깊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수행법을 소개하여 그들도 자유와 행복을 경험하도록 했으면 한다. 우리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평화와 조화를 발견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웃과 함께 이 평화로운 기쁨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도 이 삶의 기술을 배웠으면 한다.
차례
소박한 모든 이들에게 5
이야기 ; 늙은 항해사 6
1. 탐구 8
이야기 ; 스스로 길을 가는 것 12
2. 출발점 14
이야기 ; 붓다와 과학자 17
3.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 19
이야기 ; 종자와 열매 22
4.문제의 뿌리 24
이야기 ; 조약돌과 버터기름 29
5.도덕성의 훈련 31
이야기 ; 의사의 처방 36
6. 집중의 훈련 37
이야기 ; 밀크푸딩 42
7. 지혜의 훈련 44
이야기 ; 두 개의 반지 52
8. 깨어있음과 마음의 평정 53
이야기 ;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58
9. 수행의 궁극적 목표 60
이야기 ; 빈 병에 기름 채우기 66
10. 삶의 슬기 67
이야기 ; 괘종소리 71
부록 A
붓다의 가르침에서 느낌(受)의 중요성 74
부록 B
느낌에 관한 경전의 말씀 78
## 소박한 모든 이들에게
만약 당신이 혼란으로부터 벗어나 고요하고 한적한 곳에서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상상해 보라. 이 곳에서 당신은 기본적인 식사와 공간을 제공받고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오직 깨어있는 모든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선택된 하나의 대상(이를테면 호흡이나 느낌)에 마음을 집중시키게 될 것이다.
세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시간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보낸다면 당신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아마도 당신은 단전호흡, 명상, 현실도피, 정신적 은둔, 자기도취 등의 낱말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수행은 결코 도피가 아니다. 수행은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우주란 우리가 몸과 마음으로 경험했을 때만 우리 각자에게 존재한다. 그것은 다른 곳이 아닌 지금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금-여기”를 탐구함으로써 세계를 알 수 있다. 만약 자신의 내면에서 세계를 조사해 보지 않는다면 단지 세계에 대한 지적 개념만을 알게 될 뿐 결코 참된 존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직접 “실재”를 알게 되고 자신을 긍정적, 창조적으로 만드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수행이다.
비파사나 수행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의 실재를 조사하고 감추어진 문제를 벗겨 내어 해결하고 잠재력을 개발하여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선(善)을 위한 길잡이가 되게 한다.
낱말 vipassana는 인도의 고어인 팔리어로 “통찰(觀)”을 의미한다.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핵심이 되는 요소로 그 분이 설한 진리의 실제적 경험, 즉 깨달음이다. 붓다는 이 수행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았다. 따라서 비파사나 수행은 그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며 수행을 통해 얻은 경험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상세한 안내서이다.
경전의 대부분은 널리 읽혀지고 수용되고 있지만 붓다가 제시한 안내를 어떻게 따라가고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오늘날 붓다로부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승되어 온 경전들이 과연 그대로 붓다의 가르침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비록 붓다의 가르침이 경전 속에 왜곡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행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은 살아 있는 실천의 맥락에서 보지 않으면 어려워진다.
그러나 만약 어떤 수행법이 젊은 세대에게 계속 가르쳐지고 붓다가 말한 결과에 도달한다면, 그리고 오랫동안 애매했던 점들을 밝혀 주고 붓다의 가르침과 일치된다면 이 수행법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 비파사나 수행법은 바로 이 같은 방법이다. 여기에는 단순함 속에 비범함이 깃들여 있으며 모든 교리적 독단을 거부한다.
비파사나 수행법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적합하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으며 수행의 경험은 개인에게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우선 수행은 힘든 작업이다. 또한 수행이 비활동적인 일이라는 통념이 잘못된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떤 긴장도 하지 않으면서 계속 완전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익숙하기 전에는 매우 피곤하고 정신의 집중은 자꾸 흐트러진다.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처음 시작할 때 자기관찰로부터 얻어지는 통찰이 전혀 기쁨이나 행복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점이다. 대체로 우리는 자신의 견해 안에서 모든 선택을 한다. 우리가 거울을 들여다 볼 때 가장 자신 있는 자세를 취하게 되듯이, 우리는 매력 있는 특징은 강조하고 단점은 약화시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즉 있는 그대로의 실재가 아닌 우리가 보기를 원하는 이미지를 본다. 그러나 비파사나 수행은 모든 각도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는 방법이다. 조심스럽게 수행자는 편집된 자기 모습(self-image)대신 발가벗은 자아의 실재에 직면하게 된다. 때론 어떤 점은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며 수행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발견하기보다 오히려 마음의 들썩임만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의 혼란이 주는 어려움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수행자는 노력 없는 노력, 느긋하면서도 예민한 관찰, 초연한 관심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오히려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식사와 공간, 규율의 제한이 도움이 될 것이다. 주변의 모든 사물을 다 비추어주는 동시에 가까이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그 깊이를 다 드러내는 산 속의 호수처럼 마음은 고요해진다. 마음이 이 같은 청명함에 이르면 모든 순간이 긍정과 아름다움, 그리고 평화로 가득 찬다.
고엔카는 이 수행법을 그의 스승인 사야지 우 바킨에게서 배웠고, 사야지 우 바킨은 20세기 초에 널리 알려진 샤야 우 테트(Saya U Thet)에게서, 사야 우 테트는 유명한 버마의 학승 레디 사야도에게서 배웠다. 그 위로는 이 수행을 가르친 스승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레디 사야도는 비파사나 수행법을 붓다의 가르침을 처음 미얀마에 전할 때부터 오랜 세월 여러 세대를 통해 보존시켜 온 전통의 스승으로부터 배웠다고 믿어진다.
확실히 이 수행법은 참선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수행자들에게 직접적으로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유용성을 제공한다.
본 서는 붓다의 가르침과 그 핵심의 수행법을 폭넓게 이해하기를 기대하면서 그로 인해 평범한 모든 사람의 마음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기를 바라면서 내놓은 안내서이다.
## 늙은 항해사
한 젊은 교수가 뱃길로 먼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많은 공부를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경험은 적었다. 그와 함께 간 승무원 가운데는 글을 읽지 못하는 노인이 있었다. 이 늙은 항해사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매일 저녁 젊은 교수의 방을 찾아가곤 했다. 노인은 젊은 교수의 학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대화가 끝나고 돌아갈 때 교수는 물었다.
“당신은 지리학을 공부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인데요?”
“지구에 관한 학문입니다.”
“아니오, 나는 학교나 대학에 다녀 본 적도 없고 무엇을 공부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인생의 4분의 1을 놓쳤군요.”
항해사는 우울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처럼 많이 배운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생의 4분의 1을 낭비했다.’
다음 날 저녁 다시 젊은 교수는 항해사에게 물었다.
“당신은 해양학을 공부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인데요?”
“바다에 관한 학문이지요.”
“아니오, 공부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은 인생의 반을 낭비했습니다.”
항해사는 더욱 우울해져 돌아갔다. ‘나는 인생의 반을 낭비했다.’
그 다음날도 이 젊은 교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기상학을 공부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왜 있잖아요. 바람, 비, 날씨 등을 연구하는 학문 말입니다.”
“아니오. 내가 당신에게 말한 것처럼 나는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어요. 나는 그 무엇을 공부해 본 적이 없어요.”
“당신은 지구에 살면서 지리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당신 삶의 터전인 바다에 관해 공부하지 않았으며, 매일 접하는 날씨에 관하여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습니다.”
늙은 항해사는 매우 슬펐다. ‘이 학자는 내가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다고 말한다. 정말 나는 인생의 4분의 3을 낭비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다음 날은 항해사가 질문을 했다. 그는 젊은 교수의 방에 달려가서 외쳤다.
“교수님 당신은 수영법을 공부했습니까?”
“수영법, 무슨 말입니까?”
“헤엄을 칠 수 있냐고요.”
“아니오, 나는 수영하는 법을 모릅니다.”
“교수님, 당신은 인생의 전부를 낭비했어요! 배가 암초에 부딪혀 가라앉으면 헤엄칠 수 있는 사람은 가까운 해안으로 헤엄쳐 갈 수 있으나 헤엄치지 못하는 사람은 익사해 버립니다. 미안하지만 교수님은 인생의 전부를 낭비했습니다.”
누구나 세계의 모든 학문을 공부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헤엄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 공부는 쓸모가 없다. 우리는 수영에 관하여 논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 속에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는 수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1.## 탐구
우리 모두는 평화와 조화를 갈망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것들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을 원한다. 사실 행복은 우리가 누릴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행복은 쉽게 얻어질 수 없다. 반대로 싸워야 얻을 수 있다. 매 순간 마다 우리는 불안, 동요, 초조, 고통 등을 경험한다. 비록 어느 한 순간에 우리가 이런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해도 우리는 괴롭던 시간을 기억하고 그런 불안이 언젠가 다시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안다. 더욱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의 고통에 직면한다.
우리는 이런 불안들을 개인적 차원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사건은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그 불만을 전가시킨다. 불행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환경은 불안하고 그 불안한 환경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 역시 불행과 심적 동요를 느낀다. 이런 개인적 긴장들이 모여 사회적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이것이 삶의 기본적인 문제이다. 사건은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원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모르듯이 사건의 과정이 어떻게, 왜 일어나는지를 알지 못한다.
2천5백 년 전, 북인도의 한 사람이 인간의 고통을 탐구해 보기로 결심했다. 결국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본 몇 해 동안의 탐구 끝에 그는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방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참다운 자유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붓다, “깨달은 사람”이라고 알려진 이 사람은 그 이상의 무엇을 결코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위대한 스승들처럼 그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비록 붓다의 전생에 관한 놀라운 사건과 위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을지라도 결코 붓다는 신이라든가 신에 의해서 힘을 받았다던가 하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붓다가 지닌 특별한 힘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들은 그를 완벽하게 만든 탁월한 인간적 자질이었다. 그러므로 붓다가 성취한 것은 인간이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인간의 이해력 내에 있는 것이다.
붓다는 어떤 종교나 철학 혹은 믿음 등을 가리키지 않았다.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법(法, dhamma), 즉 “법칙”이라고 불렀다. 그는 어떤 교리나 공론, 어설픈 사변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본질적 문제에 대한 보편적이고 실제적인 해결을 제공했다. 그는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고통(苦)과 고통의 소멸(滅)을 가르친다.”(상응부) 그는 고통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거부했다.
이 가르침은(法)은 붓다가 발명한 것도 신에 의해서 계시된 내용도 아니며, 단순하게 붓다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또 전대의 사람들이나 후대의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서도 발견되어질 수 있는 실재하는 진리일 뿐이다. 붓다는 진리의 독점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진리에 관하여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이나 가르침의 논리적 성격과 같은 어떤 권위도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붓다는 인간의 경험을 초월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마땅히 의심하고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엇이든 함부로 믿지 말라. 과거의 세대로부터 전해 오는 상식이든 경전에서 이야기된 것이든 단순하게 연역된 것이든 추론되어진 것이든 외적인 형식이나 어떤 견해에 의해서든 그럴듯한 설득이나 스승의 말이든 그것을 단순히 진리로써 인정하지 말라. 그러나 ‘이 원리들은 건전하지 못하다. 현인들에 의해서 비난받을 만하다. 만약 이것대로 실행한다면 피해와 고통을 야기할 것이다.’ 라고 당신이 스스로 깨달았을 때 그것들을 주저 없이 포기하라.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 원리는 건전하고 현자들이 비난하지 않고 칭찬할 만하다. 이것을 채택하여 적용시키면 번영과 행복이 올 것이다.’ 라고 직접적으로 느꼈다면 그때 그것들을 실천하라.”(증지부)
최상의 권위는 그 자신이 직접 경험한 진리이다. 단지 믿음만으로 인정하고 채용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그것이 논리적인가 실제적인가 유용한가를 알기 위해 경험해야만 한다. 또 이성이거나 지성에 의해서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만약 진리가 우리에게 유용한 것이라면 직접 경험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이것이 진실로 진리임을 알게 된다.
붓다는 항상 강조했다. 그는 직접적 체험에 의해 경험된 것만을 가르쳤으며,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의 권위가 되는 그와 같은 지식을 몸소 개발하라고 권장했다.
“그대들 각자는 그대들의 섬이며 자신의 의지처이다. 또 다른 귀의처는 없다. 진리를 그대들이 의지할 섬으로 삼고, 진리를 그대들의 귀의처로 삼으라, 또 다른 의지처는 없다.”(장부)
인생에 있어 참다운 귀의처, 딛고 설 수 있는 굳건한 대지, 올바르게 인도하고 보호해 줄 유일한 권위는 몸소 경험하고 검증한 법(法), 진리, 자연의 법칙이다. 그리고 붓다가 가르침에서 최고로 중시한 것이 진리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다.
붓다는 스스로 경험한 진리를 가능한 한 명료하게 설명해서 다른 사람들도 몸소 진리를 실현할 수 있도록 안내자 역할을 했다.
“내가 제시한 가르침은 안팎이 없다. 감추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상계서)
붓다는 선택된 몇 사람을 위한 비밀스런 가르침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반대로 붓다는 법(法)이 가능한 한 아주 쉽고 편리하게 널리 가르쳐져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혜택을 받았으면 했다.
법(法)의 실현자로서 그의 개인적 신앙이나 종교적 교단을 설립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가르치는 사람의 인격은 가르침의 내용과 상응하여 아주 중요하다고 붓다는 말했다. 붓다의 가르침(法)은 따르는 사람들을 눈 먼 신도로 만들기보다 그들에게 어떻게 그들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붓다에게 과도한 숭배를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그는 말했다.
“곧 붕괴되고 말 이 몸뚱이만을 보고서 그대는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법(法)을 보려는 사람은 나를 보고, 나를 보려는 사람은 법(法)을 보라.”(상응부)
다른 사람을 향한 헌신은 비록 거룩하다 할지라도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지는 못한다.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없이 자유나 구원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보다 선행한다. 모든 존경은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나 최상의 존경은 진리를 몸소 실현하는 일이다. 지나친 존경이 붓다에게 바쳐지자 붓다는 “이것은 깨달은 사람을 온당하게 존경하는 방법이 아니다. 최고의 존경은 스스로 올바른 방법으로 마지막 목적지까지 흔들리지 않고 법의 길을 가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붓다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붓다는 이 길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8가지의 수행, 성스러운 팔정도(the Noble Eightfold Path)라고 부른다. 이 길을 걷는 사람은 누구든지 거룩한 마음,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이 된다는 의미에서 성스럽다. 그것은 진리 실현의 길이고 실재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통찰의 길이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 이 자유인 진리를 열반(涅槃, Nibbana), 천국 그 외에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을 경험하는 일이다.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의 유일한 길은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일이다. 우리 대부분은 외부 세계를 관찰하는 데에만 너무나 익숙해 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우리의 정신과 신체적 구조, 자신의 행동, 자신의 참다운 성품 등을 검토해 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을 무지의 영역에 계속 남겨 둘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 무지가 얼마나 해로우며 알지 못하는 우리 내부의 힘에 의해 얼마나 오랫동안 노예상태로 남아 있었던가를 깨닫지 못한다.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붓다가 제시한 길은 자기 관찰의 길이며 내관의 통로이다. 붓다는 말한다.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담고 있는 바로 이 몸뚱이 속에서 나는 우주와 그 기원,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다.”(증지부)
우주와 그 작용은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 경험된다. 그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안에서 경험될 뿐이다.
또한 이 길은 마음을 정화하는 길이다. 우리는 무익한 지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정신적 통찰을 방해하는 편견, 참다운 실재를 은폐하고 고통을 야기하는 충동 등을 일순간에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는 우리를 동요시키고 비참하게 만드는 축적된 내적 긴장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것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점차 우리는 그것들을 해소시키는 방법을 배우고 마음은 순수하고 행복하며 평화로워진다.
수행은 계속적인 정진이 요구되는 과정이다. 갑자기 깨침의 순간이 올지라도 그것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이다. 단계적인 노력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모든 단계들은 축복의 순간이다. 우리는 오직 미래에 기대되는 어떤 즐거운 이익이나 죽은 다음에 얻을 수 있다는 천국에 대한 희망 때문에 이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수행의 효능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그리고 개인적으로 경험된다.
무엇보다 우선 수행은 실천적 가르침이다. 단순하게 붓다에 대한 믿음이나 가르침에 대한 믿음만으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명상 수행은 지적 이해의 길이 아니다. 믿음이나 지적 이해는 실천적으로 그 생명력을 부여받을 때만 유용한 가치를 가진다. 붓다가 가르친 실제적인 수행의 실천은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우리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킨다. 붓다는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많은 양의 경전을 암송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남의 집의 소만 세는 목동과 같다. 그는 진리를 찾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내적 보상을 받을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경전의 몇 구절만을 암송할 수 있을지라도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의 길을 위해서 법(法)대로 살아간다면, 그는 진리를 찾는 사람만이 맛 볼 수 있는 보상을 받는다.”(법구경)
수행의 길은 밟아 가야만 하고 가르침은 실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 없는 수행이 된다. 이 수행법을 실천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불교도라고 부를 필요도 없다. 고통은 차별 없이 모두에게 공통된다. 그러므로 치료법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수행은 속세와 절연한 은둔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물론 일정 기간동안 한적한 곳에서 확실하게 수행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그 가르침을 일상생활에 적용시켜야 한다.
수행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 세속적인 책임과 가정을 버린 사람은 집중적인 수행의 기회를 갖기 때문에 깊은 이해와 보다 바른 진보를 이룩할 수 있다. 반면에 많은 세속적인 책임을 가진 일반 사람들은 수행할 시간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정을 가지든 출가를 하든지 우리는 법(法)을 실천해 가야 한다. 오직 법(法)의 실천만이 어떤 의미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
만약 진실로 이것이 고통으로부터 평화를 이끄는 길이라면, 그때 수행의 진보에 따라 우리도 일상생활 가운데서 보다 행복해 질 것이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보다 평화롭고 화합된 장을 마련할 것이다. 사회적 긴장을 증가시키기보다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번영에 기여할 것이다. 수행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 우리는 법, 즉 진리의 순수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며 정확하게 실천되는 법이야말로 삶의 기술인 것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 당신은 붓다의 가르침을 인용한다. 당신은 불교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답; 나는 “주의”(-ism)에 관심이 없다. 나는 법(dhamma), 즉 붓다의 가르침을 가르친다. 붓다는 결코 어떤 주의(-ism)나 교파적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어떠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무엇, 즉 “삶의 기술”을 가르쳤다. 계속되는 무지는 모든 사람에게 해로울 뿐이다. 지혜의 개발은 모두를 위한 선(善)이다. 그래서 누구든 이 수행법을 실천해 보면 실제적인 유용성을 발견할 것이다. 기독교인은 보다 좋은 기독교인이 되고, 유대인은 보다 나은 유대인이 되고, 이슬람교인은 보다 좋은 이슬람교인이 되고, 힌두교인은 보다 나은 힌두교인이 되고, 불교인은 보다 좋은 불교인이 될 것이다. 사람은 종교와 관계없이 먼저 선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좋은 기독교인 유대인 이슬람교인 힌두교인 불교인이 될 수 없다. 어떻게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질문; 당신은 조건(condition)에 관하여 말한다. 비록 긍정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것은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조건화시키는 훈련은 아닌가?
대답; 정반대다. 오히려 수행의 과정은 형성된 조건을 벗겨 내는 과정이다. 마음에 무엇을 부담 주는 대신 자연스럽게 불건전한 특징들을 제거시킨다. 그래서 오직 건전하고 긍정적인 품성만 남게 된다. 부정적인 덕행을 제거해 기본적이고 순수한 마음의 본성인 긍정성을 드러낸다.
질문; 그러나 일정한 시간 동안 특별한 자세로 주의 집중하고 앉아 있는 것은 조건화의 형태가 아닌가?
대답; 만약 당신이 게임이나 기계적 의례처럼 행한다면 이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마음을 조건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잘못된 수행이다. 만약 올바르게 비파사나를 행한다면 당신은 진리를 직접 경험을 통해 올바르게 이해할 것이고 이전의 모든 조건 지워진 것들은 붕괴될 것이다.
질문; 세속적인 것을 버리고 온 종일 앉아 명상하는 일은 이기적이지 않는가?
대답 ; 만약 이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라면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결코 이기적이지 않다. 우리의 육체가 병에 걸리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다. 당신은 병원에 가 본 적이 없는가?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온다. 당신이 그것을 얻었다면 당신은 당신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일상생활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질문; 다른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때조차도 평온과 행복을 유지하는 것은 목석이 아닌가?
대답;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 당신 스스로 슬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은 평온과 침착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그들의 고통을 덜기 위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만약 슬픔에 함께 젖는다면 당신은 당신의 주변을 슬프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질문;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가?
대답; 그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가 없는 생활은 꿈꾸는 생활이며 걱정과 불행으로 이루어진 삶이다. 우리 자신에게나 타인을 위한 우리의 첫 번째 책임은 건강하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관찰하고 진리를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질문; 수행법(자신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10일 수련 코스”가 왜 필요한가?
대답; 물론 더 길다고 해도 당신은 보다 잘하기 위해 참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10일은 수행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다.
질문; 왜 우리는 10일 동안 이 수련센터 안에 있어야만 하는가?
대답; 왜냐하면 당신은 이 안에서 마음을 수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술은 병원에서 감염으로부터 보호된 수술실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 명상센터 안에서 당신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이 과정이 끝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질문; 이 수행법은 육체의 병도 치료되는가?
대답; 그렇다. 일종의 부산물로써 많은 육체의 질병은 정신적 긴장이 해소되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만약 마음이 안절부절못하여 불안해지면 육체의 질병도 생겨난다.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면 자동적으로 육체의 고통도 소멸된다. 그러나 마음의 정화 대신에 당신이 육체의 치료를 목적으로 수행법을 이용한다면 당신은 그 어느 쪽도 얻을 수 없다. 육체의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이 수련센터에 온 사람들은 주의 집중을 온통 환부에 고정시킨다. “오늘은 좋아질까? 아닌데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 “오늘은 차도가 있을까? 아닌데.” 이렇게 그들은 10일을 낭비해 버린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정신집중을 올바르게 마음의 정화에 둔다면 자동적으로 많은 질병이 그 명상수행의 결과로 소멸된다.
질문;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답;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인간은 성품을 관찰하고 깊게 통찰하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 이런 능력은 일생 내내 사용해도 소모되지 않는다. 이 능력을 건전하게 사용한다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질문; 당신은 마음의 부정적인 특성들에 관하여 말한다. 긍정성, 예를 들면 사랑 같은 덕성이 어떻게 마음속에 가득 찰 수 있겠는가?
대답; 당신이 긍정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음의 참다운 본성이다. 마음이 조건지어진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그것은 항상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으며 당신은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만일 당신이 부정적인 요인들을 제거한다면 그때 긍정적 요소가 남고 순수함이 존재한다. 이 세계가 온통 이 같은 긍정으로 충만하도록 노력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 스스로 길을 가는 것
북인도 사받티(Savatthi)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설법을 듣기 위해 찾아오는 큰 수행처가 있었다.
한 젊은이가 매일 저녁 붓다의 설법을 듣기 위해서 찾아 왔다. 여러 해 동안 그는 붓다의 가르침을 들었지만 결코 그 가르침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어느 날 저녁, 젊은이는 평상시 보다 빨리 오게 되었는데 붓다 혼자임을 알고 다가가 물었다.
“저에게 마음속에서 자꾸 일어나는 의심이 있습니다.”
“그래 법(法)의 실천에서는 어떠한 의심도 없어야 한다. 의심이 있다면 분명히 밝혀야 한다. 질문해 보라.”
“저는 여러 해 동안 수행센터에 찾아 왔습니다. 늘 당신의 주변에는 많은 구도자들, 비구, 비구니, 남녀 신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당신을 찾아 왔고, 제가 알기로는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궁극의 목표에 분명히 도달했습니다. 아주 명백하게 그들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습니다. 또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전과 다를 바가 없으며 심지어 더욱 나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변화도 없고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은 그처럼 위대한 사람, 완전히 깨달은 자비로운 사람, 당신에게로 옵니다. 그들 모두를 위해 왜 당신의 힘과 자비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붓다는 웃으며 말했다.
“젊은이여 그대는 어디서 사는가? 그대의 국적은 어디인가?”
“저는 여기 코살라(Kosala)국의 수도 사받티에서 삽니다.”
“그런데 그대의 얼굴로 보면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저는 마가다(Magadha)국의 수도 라자가하(Rajagaha)에서 왔습니다. 몇 년 전부터 사받티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대는 라자가하와는 이제 모든 관계를 끊었는가?”
“아니오. 아직 가족들과 친구들이 라자가하에 있습니다. 저는 거기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러면 종종 라자가하를 방문하는가?”
“그렇습니다. 해마다 저는 라자가하에 갔다가 다시 사받티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가고 오는 길들을 잘 알고 있는가?”
“저는 길을 완전히 알고 있습니다. 수차에 걸쳐 그 길을 갔기 때문에 눈을 가리고도 길을 갈 수 있다고 자부할 정도입니다.”
“라자가하에 살고 있는 친구들도 그대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가? 그리고 종종 그대가 라자가하를 방문하고 돌아가며, 그대가 그 길을 잘 안다고 친구들도 분명하게 알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나와 친한 모든 사람들은 종종 제가 라자가하에 가고 그 길을 완전히 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 중 몇 사람이 그대에게 찾아와 그 길을 물으면 그대는 무엇인가를 숨기는가 아니면 친절하게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는가?”
“아니, 감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모든 것을 아주 친절하게, 가능하면 자세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그대에게서 상세한 설명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틀림없이 라자가하에 도착할 수 있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오직 끝까지 완전하게 그 길을 가는 사람들만이 라자가하에 도착합니다.”
“그렇다. 바로 그 점이 내가 그대에게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젊은이여, 사람들은 계속해서 내게로 온다. 여기서부터 열반으로 가는 길을 완전하게 알기 위해서 그들은 와서 묻는다. 열반, 자유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무엇을 감추겠는가? 나는 그것을 그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한다.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렇다.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그 길을 가는데 고생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마지막 목적지까지 도착하겠는가?”
“젊은이, 나는 누군가를 어깨에 태워 그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수는 없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어깨에 태워 마지막 목적지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다. 단지 사랑과 자비로 ‘그렇다. 이것이 길이다. 이것이 길을 가는 방법이다. 당신도 가보라. 그러면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몸소 걸어야 한다. 스스로 그 길을 가야만 한다. 한 발자국을 가는 사람은 그 만큼 목적지에 가까이 간 것이다. 그 길을 다 걷는 사람만이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대는 그대 스스로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중부)
## 2.## 출발점
고통의 근원은 우리들 각자 내부에 존재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품을 이해할 때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알라”고 모든 현자들은 충고한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세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자신의 중요성과 유일성을 확신 하지만 그에 관한 지식은 단지 피상적일 뿐이다. 그 깊은 밑바닥을 전혀 알지 못한다.
붓다는 그 자신을 검토함으로써 인간을 이해하려 했다. 모든 선입견들을 버리고 안으로부터 자아의 실재를 찾아 마침내 모든 존재는 물질(色)과 네 가지의 정신적인 의식(識), 인식(想), 감각(受), 의지(行)의 복합체(五蘊)임을 발견했다.
*물질*(*色*, rupa)
먼저 물질적 측면을 고찰해 보자. 이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기관으로 쉽게 인식되는 분명하고 구체적인 우리 자신의 일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에 관하여 잘 알지 못한다. 피상적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몸을 의식적인 의지에 따라 조정할 뿐이다. 그러나 모든 내적 기관들은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작용한다. 미시적 측면에서 우리는 경험으로 몸의 각 세포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계속적인 생화학적 반응에 대해 아는 게 없다. 그러나 이것이 물질의 궁극적 실재는 아니다. 견고해 보이는 몸은 궁극적으로 입자들과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더욱이 이 입자들은 수천억 분의 일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입자들은 물결의 떨림처럼 끊임없이 일어났다가는 사라지고 존재와 무(無) 사이를 왕래한다. 이것이 2천5백 년 전 붓다가 발견한 우리 몸의 궁극적 실재이다.
현대 과학자들은 연구 결과, 물질적 우주의 궁극적 실재로써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자유를 얻은 깨달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단지 호기심으로 그들의 지성과 이론을 검증할 실험 도구를 사용하여 연구했다. 반대로 붓다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는 오직 그 자신의 마음을 사용했으며 어떤 도구로써 탐구하지는 않았다. 그가 발견한 진실은 지성적 사업의 결과가 아닌 스스로의 깨달음에 의한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리가 왜 그를 자유롭게 했는가 하는 이유이다.
붓다는 물질적 우주가 팔리어로 Kalapas(개체)라고 부르는 입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 개체는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덩어리, 응고, 온도, 운동 등의 물질적 고유한 특징을 보여준다. 이것들은 영속성을 가지고 있는 듯한 구조를 형성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들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개체들의 구성물이다. 이것이 물질의 궁극적 실재, 파장이나 입자의 끊임없는 흐름이며, 바로 우리 각자가 ‘자기’라고 부르는 몸이다.
*마음*(*心*, mind)
물질적 과정과 더불어 마음이라는 정신적 과정이 있다. 비록 보고 만질 수 없지만 마음은 우리의 육체보다 직접 우리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몸이 없어도 미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지만 마음 없이는 그 어떤 존재도 그려 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에 관하여 조금밖에 알지 못하고 마음대로 조정할 수도 없다. 마음은 얼마나 자주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고, 우리가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게 하는가? 통제 가능한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우리가 미처 인정하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의 마음은 완전히 우리 자신의 통제와 이해를 초월한다. 붓다는 마음을 조사한 끝에 그것이 의식(識, vinnana), 인식(想, sanna), 감각(受, vedana), 의지(行, san khara) 네 가지의 과정으로 이루어졌음을 발견했다.
첫 번째 과정인 의식(Consciousness)은 무분별한 의식인 마음의 기관이다. 의식은 단순히 현상(접촉)의 발생을 기록하고 어떤 물질적 정신적 입력을 수신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입력된 자료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거나 꼬리표를 매달아 분류하지 않고 경험의 원 자료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두 번째 과정인 인식(Perception)은 재인식의 행위이다. 마음의 이 기관은 의식이 기록하는 것은 무엇이나 검토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과정은 입력되는 자료를 분류, 꼬리표를 붙이고 구별해 낸다. 곧 부정이나 긍정의 가치를 부여한다.
다음의 과정은 감각(Sensation)으로, 어떤 자료가 입력되면 감각은 무엇이 일어난다는 신호를 일으킨다. 입력 자료가 아직 평가되고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각은 중성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일단 가치가 입력 자료에 부착되면 감각은 주어진 가치에 따라 기쁨이나 불쾌감을 일으킨다.
만약 감각이 기쁨을 느낀다면 지속하고자 하는 소망이 일어나고 그 경험을 강화시키려 한다. 만약 불쾌한 감각이라면 그것을 멈추고 제거하려는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은 좋고 싫음을 선택한다. (Sankhara<行>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다. 또한 번역하기에도 가장 어려운 낱말 중의 하나이고 여기서는 의도. 의지작용. 충동 등의 뜻으로 사용한다.)
이를테면 귀가 정상으로 작용해서 소리가 들리면 인식활동이 일어난다. 즉 그 소리가 긍정이나 부정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면 인식은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다음에 감각이 작용한다. 만약 그 말이 칭찬이었다면 기쁜 감각이 일어나며, 욕설이었다면 불쾌한 감각이 일어난다. 즉 심리적 의지작용(行, Reaction)이 시작된다. 만약 감각이 기쁜 느낌이었다면 그것을 좋아하게 되고 보다 많은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 불쾌감을 제거하려 한다.
이와 같은 과정들은 의식, 인식, 의지작용 등 개체(Kalapas)가 어떤 자극을 받든지 간에 동일한 단계들이 발생한다. 이들 네 가지 정신 작용은 물질적 실재를 구성하는 덧없는 입자들보다 빨리 지나간다. 감각이 어떤 대상에 접촉되는 순간 네 가지 정신적 과정이 번갯불처럼 일어나고 접촉의 매 순간 반복된다. 이 과정은 대단히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의지적 활동(行)이 계속 같은 방식으로 오랜 기간동안 반복될 때 그리고 이것을 의식의 수준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분명하고 강력한 도구를 가질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정신적 네 가지 작용을 알지 못한 채로 지나가 버린다.
인간을 기술하는 불교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나”라는 용어를 생략하는 데 있다. 서구인이든 동양인이든 유대인이든 이슬람교인이든 힌두교인이든 불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우리들 각자는 우리 내부에 지속적인 동일성으로써의 “나”가 존재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10년 전에 있었던 사람은 본질적으로 오늘 존재하는 사람과 같으며 앞으로 10년 후에도 존재할 것이며 아마 죽고 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을 은연중에 설정한다. 철학, 종교적 교리, 믿음 등 우리가 무엇을 진리로써 받아들이든지 실제로 “나는 존재했고 존재하며 존재할 것이다.” 라는 뿌리 깊은 믿음으로 살아간다.
붓다는 이 본능적인 자기 동일성의 확신에 도전했다. 그는 다른 이론들에 대항하려는 보다 정교한 견해를 제시하고 설명하는 대신에, 스스로 경험했고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진리를 단순하게 그대로 기술한 것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붓다는 말했다.
“깨달은 사람은 모든 이론을 옆으로 치워놓는다. 왜냐하면 그는 물질, 감각, 인식, 의지작용, 그리고 의식의 본질과 오온(五蘊)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았기 때문이다.”(중부,72)
붓다는 외형적 형태에도 불구하고 각자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사건의 연속체임을 발견했다. 이 각각의 사건들은 앞 뒤 사건 사이에 아무런 간격이 없다. 서로 밀접하게 관계된 사건의 진행(進行)은 계속적인 외적 형체인 자기 동일성을 갖지만, 이것은 외양일 뿐 궁극적인 진리는 아니다.
우리는 강에 이름을 붙이지만 실제로 강은 결코 간격이 없는 하나의 물의 흐름이다. 우리는 촛불의 빛을 계속적인 무엇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가까이 가서 조사해 보면, 그것이 순간마다 타오르는 심지로부터 일어나는 불꽃, 새로운 불꽃으로 끊임없이 대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강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전등 빛을 말할지도 모른다. 매 순간마다 앞으로 일어나는 빛은 새로운 빛으로 바뀐다. 사건의 연속이 매우 빠르게 계속되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 과정의 한 점에서 볼 때, 새로 일어나는 빛은 선행하는 빛과 같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성의 과정은 계속된다.
이와 같이 붓다는 인간이란 고정되고 변함이 없는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로 상주하는 존재는 없다. 오직 끊임없이 생성하는 과정, 계속되는 흐름만이 있다.
물론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개성을 다소 독립된, 변하지 않는 개체로써 취급한다. 우리는 외형적이고 상식적인 모습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속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외형적이고 상식적인 모습도 하나의 자아임은 분명하나 단지 피상적인 외형일 뿐이다. 심층적 수준에서 보면 우주, 생명, 무생물 등 일체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생성의 계속적 상태이다. 의식, 인식, 감각, 의지작용의 과정은 물질의 미립자 보다 더 빠르게 변하는 미립자의 흐름이다.
이것이 우리 각자가 그렇게 관심을 두는 자아의 궁극적 실재이며 변천 과정이다. 만약 이것을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서 적절하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 당신이 “마음”이라고 할 때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마음을 발견할 수 없다.
대답; 마음은 어디든지 있다. 당신이 무엇을 느끼는 곳마다 마음은 거기에 있다. 마음은 느낀다.
질문; 그러면 마음이란 뇌를 의미하지 않는가?
대답; 아니다. 서구에서는 마음은 오직 머리에 있다고 생각하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질문; 마음은 몸 전체에 있는가?
대답; 그렇다. 마음은 몸 전체에 있다.
질문; 부정적 의미에서만 “나(I)”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긍정적 측면은 없는가?
기쁨, 평화, 환희 등을 느끼는 개인적 경험이 있지 않는가?
대답; 수행을 통해서 모든 감각적 쾌락은 무상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들은 왔다가는 금방 사라진다. 만약 이 “나(I)”가 실재로 그것들을 즐긴다면, 만약 그것들이 “나의(my)” 쾌락이라면, 그 때 “나(I)”는 그것들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냥 일어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이때 “나(I)”는 어디에 있는가?
질문; 말하고 싶었던 바는 감각적 쾌락이 아니라, 보다 깊은 심층적 측면에서 한 이야기이다.
대답; 그런 수준이라면 “나(I)”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그런 수준에 이를 때 자아는 사라진다. 오직 기쁨이 있은 뿐이다. “나”의 문제는 이제 일어나지 않는다.
질문; “나(I)” 대신 개인적 경험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
대답; 느낌 자체를 느끼는 자는 없다. 무엇이 일어난다. 이것이 전부이다. 지금 당신에게는 느낌을 느끼는 자, “나”가 있어야만 할 것 같지만 당신에 계속 수행을 해 간다면 당신은 자아가 사라지는 단계에 도달할 것이다. 그 때 당신의 의문은 사라진다.
질문;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하다.
대답‘ 아무도 당신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 당신이 마음속에서 긴장을 일으킴으로써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낸다. 만약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을 안다면, 당신은 일상의 모든 상황에서 평화와 행복을 쉽게 유지할 수 있다.
질문;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했을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대답; 당신은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가 잘못을 할 때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고 동시에 자신에게도 상처를 준다. 만약 잘못하는 그를 인정한다면 당신은 그를 격려할 수 있다. 당신은 그가 잘못을 그만둘 수 있도록 힘을 쏟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 사람에 대한 당신의 노력은 언제나 자비와 공감 그리고 선한 의지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분노와 질투로 행동한다면 모든 상황을 악화시킨다. 또한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지 못하다면 역시 그 사람에 대한 선한 의지를 지닐 수 없다. 당신 내부에 평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수행이 이루어지면 그 때 당신은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질문; 세계가 평화롭지 못한 가운데 안으로만 평화를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대답;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할 때 비로소 세계는 평화로울 것이다. 변화는 각 개인의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만약 숲이 시들었고 당신은 숲이 다시 소생되기를 바란다면 그 숲에 있는 각각의 나무에 물을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당신이 세계의 평화를 원한다면 스스로 평화로울 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 때 당신은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질문; 당신의 가르침은 소승인가 대승인가?
대답; 어느 쪽도 아니다. 승(乘,yana)이란 낱말은 실제로 당신을 마지막 목적지로 데리고 갈 수송 수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잘못되어 교파적 의미로 함축되어 버렸다. 붓다는 결코 교파적인 무엇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보편적 법(法, dhamma)을 가르쳤다. 이 보편성이 힌두교도인 나를 붓다의 가르침에로 이끌어 들였다. 이것은 내게 기쁨을 주었다. 이제 이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 법(法)을 나의 온전한 사랑과 자비로써 모든 이들에게 권하는 바이다. 법은 대승도 소승도 아니다. 어떠한 교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 붓다와 과학자
존재하는 모든 것(reality)은 매 순간마다 끊임없이 변한다. 이러한 사실은 붓다가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깨달은 바이다. 강한 정신집중으로 자신의 본성을 깊이 꿰뚫어, 모든 물질적 구조물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미세한 미립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붓다는 손가락을 딱 퉁기는 순간이나 눈 깜짝할 사이에 이 미립자들이 수십억 번 일어났다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정도 견고하고 지속적인 몸의 형체만을 관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수십억번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관용구로 사용했다. 그러나 현대 과학자들은 이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몇 년 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한 물리학자가 오랫동안 우주를 형성하고 있는 미립자들을 밝혀내는 연구와 실험을 해왔다. 이미 미립자들이 대단히 빠르게 반복하여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 이 과학자는 일 초 동안에 미립자들이 몇 번이나 일어났다가 사라지는지를 계산해 낼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 냈다. 그는 이 기계를 거품상자(bubble chamber)라고 불렀다. 그는 이 기계를 이용하여 미립자들이 일 초 동안에 1022번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과학자가 발견한 사실은 붓다가 발견한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인도에서 10일 수련코스에 참여했던 미국 학생들이 다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간 후 이 과학자를 방문했다. 그는 비록 물리적 사실을 발견했지만 아직도 평범한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가진 보통의 인간이었다. 또한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으며 결코 깨달은 사람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는 직접적으로 진리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배운 것은 오직 지적인 지식일 뿐이다. 그는 발명한 기계를 믿기 때문에 그가 발견한 진리도 믿었지만 그 진리를 몸으로 경험하지는 못했다.
나는 과학자와 현대 과학의 성과를 부인할 의도는 결코 없다. 사실 과학자와 현대 과학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바깥 세계를 탐구하는 과학자일 필요는 없다. 붓다는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위한 내적 세계의 과학자다.
진리를 실현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마음의 습관이 변하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살아가기 시작한다. 모든 행동은 그 자신의 선과 타인의 선을 위해 행하여진다. 만약 내적 경험이 결여되어 있다면 과학은 잘못 이용되어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내적 실재를 탐구하는 과학자라면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과학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 3.##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
현실 세계는 모든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동화 속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의 삶은 불안하고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이 어떤 원인으로 생겨나며, 또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건이 우리가 조정하고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영역 속에서 제멋대로 발생한다면, 그 때 우리는 무력해지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마저 포기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고통이 전능한 존재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명령된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없도록 이 존재를 달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붓다는 우리의 고통이 그저 단순하게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님을 깨달았다. 모든 현상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고통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다. 인과의 법칙은 존재의 보편적이고 기본적 원리이다. 그리고 고통의 원인은 우리의 영향 밖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업*(*業*; kamma)
산스크리트어 ‘karma’로 알려진 ‘kamma’라는 낱말은 대체로 ‘운명’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운명이라는 낱말은 붓다가 업에 의해 의도했던 뜻과는 정반대가 된다. 업은 문자적 의미로 ‘행동’(action)이다. 우리 자신의 행동은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의 원인이다.
“모든 존재는 그들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행위로부터 상속되고 생성된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행위하고자 한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의지처이며 삶의 토대이고 거룩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존재하게 된다.”(중부,135)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의 주인이 됨으로써 운명의 주인이 된다. 우리 각자는 고통을 야기하는 우리의 행동을 책임져야 한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고통을 종식시키는 방법을 가진다. 붓다는 말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주인
그대 자신의 미래를 만든다.(법구경,XXX.21(380))
우리들 각자는 마치 복잡한 고가도로에서 운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눈가리개를 하고 운전대에 앉아 있는 것과 흡사하다. 그는 사고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것 같지 않다. 그가 차를 운전하고자 하나 실제로는 그 차가 그를 운전한다. 어떠한 사고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다면, 우선 눈가리개를 벗고 운전하는 법을 배우고 가능한 한 빨리 그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깨달아만 한다. 이때 우리는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는 행동을 배우게 된다.
*업의 종류*
업(業)에는 신체적인 업(身業), 언어에 의한 업(口業), 정신적인 업(意業) 등 세 종류가 있다. 물론 신체, 언어, 정신의 순서대로 그 중요성을 둔다. 현실에서는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을 속으로 품은 악의보다 또는 말로 심하게 모욕을 주는 것보다 더 심각한 행동으로 본다. 확실히 이것은 법률적 해석과 일치한다.
그러나 법(法, dhamma)에 따르면 정신적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 몸이나 입에 의한 업은 그 행동을 이루는 의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외과의사는 칼을 죽어 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사용하지만, 살인자는 그 칼을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한다. 신체적으로 보면 이들 행위는 비슷하고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정신적으로 이들은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다. 외과의사는 자비로써 행동하고 살인자는 증오심으로 행동한다. 각자의 행동은 정신적 행동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
입으로 말하는 경우에도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동료와 싸우고 그를 바라보고 부르면서 욕설을 퍼붓는다. 또 어떤 사람은 진흙탕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다정스럽게 바라보고 부른다. 그는 사랑으로 말한다. 이 양자의 경우 똑같은 말을 했지만 그 마음은 반대다. 이 같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이다.
말이나 행동에서 드러난 결과는 순전히 정신적 행위의 결과이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표현하는 의도와 성격에 따라 판단된다.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 올 참된 의미의 업은 정신적 행동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기 때문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은 모든 현상보다 먼저 존재하고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 만약 삿된
마음으로 그대가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땐 고통이 그대를 뒤따르리라,
마치 바퀴가 마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만약 순수한 미음으로 그대가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땐 행복이 그대를 뒤따르리라,
마치 그대를 따르는 그림자처럼.(상게서<上偈書>, 1, 1과2)
*고통의 원인*
그런데 정신적 행동(意業)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일까? 단지 마음의 의식(識), 인식(想), 감각(受), 의지작용(行) 이라면 고통은 이 중 어느 정신 과정에서 생겨나는가? 이들 각각은 어느 정도 고통을 야기하는 과정에 모두 관여한다.
의식은 단순히 경험의 자료를 받아들이고, 인식은 자료를 분류하고 감각은 입력되는 사건을 감지한다. 이 세 단계는 단지 수동적으로 입력되는 정보를 소화한다. 그러나 마음의 의지작용은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싫고 좋은 감정을 발생시킨다. 마음의 의지작용(行)이 행동에 새로운 사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낸다. 사건의 출발점에는 마음의 의지작용인 상카라(행,sankhara)가 있다. 붓다는 말한다.
고통이 일어나는 곳에는 그 원인이 되는 의지작용이 있다.
만약 이 마음의 조작이 멈추면 고통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수타니파타<Sutta Nipata>,3.12)
고통의 참다운 원인, 진실한 의미의 업은 마음의 의지적 작용이다. 싫고 좋은 순간적인 마음의 조작은 아직 뚜렷한 결과를 만들지 않지만 계속하여 축적이 된다. 마음의 반응은 순간순간 반복되고 반복됨에 따라 강화되어 혐오감이나 탐욕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말한, 문자적 의미로 갈애를 뜻하는 탕하(tanha)이다. “갈애”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현재에 대한 불만족을 의미한다.(상응부) 갈망이나 불만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의 사고, 말,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고통은 그만큼 깊어진다. 붓다는 말한다.
“몇 가지의 의지인 행위(行)는 연못의 물 위에 그어놓은 선과 같이 긋자마자 곧 사라진다. 어떤 행위는 모래밭에 그어놓은 선처럼 파도와 바람에 의해 지워진다. 또 어떤 행위는 끌과 해머로 바위에 깊이 새겨놓은 선과 같아서 바위가 바닷물에 침식될 때까지 수많은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지워진다.”(증지부.3 5.3,130)
살아가면서 마음은 계속적으로 반응하고 조작하여 간다. 만약 잠자리에 들어 그것들을 기억해 내려 하면 깊은 인상을 남긴 한두 개 정도의 행위를 상기시킬 수 있다. 만약 월말에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보면 역시 한두 개 정도의 조작되어진 우리 자신의 행위를 기억할 수 있다. 다시 연말에 우리는 그 해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전하지 못한 충동적 행위를 한두 개 정도 기억해 낼 수 있다. 지워지지 않고 이와 같이 깊이 잠재되고 축적되어진 마음의 의지적 조작은 매우 위험하고 커다란 슬픔의 원인이 된다.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째로 마음의 조작행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철학적 개념이나 믿음이 아닌 진실로 우리의 삶에 깊게 영향을 주는 힘의 존재로써, 있는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고통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는 고통을 받는지를 이해하고 스스로 시인함으로써 마음의 조작이나 충동 등을 멈출 수 있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본성을 직접 자각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질문과 대답*
질문; 고통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삶의 일부인가? 왜 우리는 그것들을 피할 수 없는가?
대답; 우리는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정신의 순수한 행복이 존재함을 믿는다면, 행복이 마음의 자연스런 상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질문; 고통은 사람을 성숙시키고 품위 있게 만들 수도 있지 않는가?
대답: 그렇다. 사실 수행은 고통을 통해 사람을 품위 있게 만드는 정교한 도구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당신이 고통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때만 가능하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고통에 집착한다면 고통은 당신을 고귀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비참한 상황이다.
질문;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계속 관찰한다면 어떻게 일상생활을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관찰하는 데에 너무 바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대답: 수행을 완전히 다 마친 사람은 매우 자연스럽다. 지금 그대로 10일 수련 코스에 참여함으로써 정신적 훈련을 받는다. 이것이 그대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필요한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다. 당신이 온 종일, 온 생애를 눈감고 수행할 필요는 없다. 마치 체력 훈련에서 얻은 힘이 일상생활 속에서 당신을 돕듯이 이 정신적 훈련 역시 일상생활 속에서 당신을 도와 줄 것이다. 당신이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맹목적인 충동이다. 스스로를 관찰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삶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평정 속에서 당신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당신은 이때야 비로소 참되게, 긍정적으로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한 행동을 할 것이다.
질문; 어떤 원인도 없이 우연히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없는가?
대답; 원인이 없이 그냥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종종 우리들의 감각이나 지성으로 알 수 없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이 원인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질문; 그러면 인생은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는가?
대답; 확실히 우리 과거의 행동은 선이나 악의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경험되는 상황, 삶의 형태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과거의 행동에 의해서 예정되고 규정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거 우리의 행동의 쾌락이나 불쾌의 경험이 우리 삶의 흐름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의 행동도 중요하다. 자연은 우리에게 현재 우리 행동의 주인이 되는 능력을 주었다. 이 같은 통제력이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킨다.
질문; 그런데 다른 사람의 행동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가?
대답; 물론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전적이라면 전쟁과 파괴가 일어나 고통을 야기한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정화시키기 시작하면 폭력은 줄어든다. 문제의 뿌리는 각 개인의 마음 안에 있다. 왜냐하면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각 개인들이 변화하기 시작하면, 그때 사회는 변할 것이고 전쟁과 파괴도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 각 개인이 그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로써 한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다른 개인을 도울 수 있는가?
대답; 우리 자신의 정신적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생각만 일으킨다면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건강한 마음과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조절할 수 없지만 주변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질문 ; 왜 유복함이 좋은 업이 되는가?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서구인의 대부분은 선업(善業)을 가지고 있고 가난한 제3세계의 사람들은 악업(惡業)을 가지고 있는가?
대답; 오직 부(富), 이것만이 선업은 아니다. 만약 부자가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통스럽다면 어떻게 이 부를 잘 사용하겠는가? 부를 가지면서도 진실로 행복하다면 그것은 선업이다. 부자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행복이다.
질문; 우리는 어떻게 건전하지 못한 습관적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대답; 행위의 인위적인 조작보다는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행동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비파사나 수행자는 식물처럼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운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삶을 행위의 조작으로부터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매우 가치 있는 무엇을 얻을 것이다. 또 비파사나 수행을 통해서 당신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종자와 열매
원인이 있으면 그 결과도 있다. 씨앗이 있으면 열매도 있다. 행동이 있으면 결과도 있다.
농부가 밭에 두 종류의 씨앗을 뿌렸다. 하나는 망고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악취가 나는 열대 식물인 님(neem)나무의 씨앗이다. 이 두 씨앗을 같은 토양에 같은 양의 물을 주고 동일한 공기와 햇살을 받도록 한다. 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온 힘을 다하여 님나무는 악취를 풍기고 망고나무는 온 힘을 다하여 향기를 내뿜으며 자란다. 왜 자연은(당신이 좋다면 신이라고 해도 좋다) 하나에게는 향기를 주고 다른 하나에게는 악취를 주었는가? 자연이 불공평한 것은 아닌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자연은 친절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고정된 법칙대로 작용할 뿐이다. 자연은 씨앗의 본성이 드러나도록 도와 줄 뿐이다. 모든 자양분이 씨앗의 잠재적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준다. 망고나무의 씨앗은 향기로운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무도 향기롭다. 님나무의 씨앗은 쓴맛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무는 필연적으로 쓴 향을 낸다.
농부는 님나무에게 가서 세 번 절하고 그 주변을 108번 돌면서 꽃이 피고 향기가 나고 열매 맺기를 바란다. 그리고 농부는 기도를 한다. “오, 님나무 신이여, 제게 향기로운 망고를 주세요. 저는 향기로운 열매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엾은 님나무 신은 농부에게 망고를 줄 수 없다. 만약 망고의 열매를 원한다면 농부는 망고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그 누구에게 구걸할 필요도 없다. 만약 농부가 망고나무의 씨앗을 심으면 향기로운 망고나무의 씨앗을 얻을 수 있다. 씨앗이 있으면 열매가 있다.
우리의 무지는 뿌린 씨앗에 대해 엉뚱한 열매를 원한다는 점이다. 님나무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을 때가 되면 우리는 갑자기 엉뚱하게 망고 열매를 원한다. 그리고 희망 없는 망고열매 맺기를 기도하며 울기까지 한다. 이런 일은 소용없는 짓이다.(증지부.1.5)
## 4.## 문제의 뿌리
고통의 문제는 끝까지 철저하게 탐구되어야 한다. 붓다는 말한다.(상응부) 붓다가 깨닫던 날 밤 그는 고통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소멸되는지 알 때까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보리수 밑에 앉았다.
고통의 정의
분명하게 고통이 존재함을 붓다는 보았다. 비록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통은 인생의 시작과 더불어 생긴다. 어머니 배 속에서의 생활을 기억할 순 없지만 태어나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탄생은 커다란 상처이다. 인생이 시작되면서 필연적으로 병과 늙음의 고통을 만난다. 그러나 비록 병에 걸리고 늙어 가지만 우리 모두는 죽기를 원치 않는다. 죽음은 정말로 큰 슬픔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음에 직면한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고통을 만날 수밖에 없다.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싫어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고통이다.
고통의 실례들은 깊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붓다는 지적인 설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하여 내부에서 고통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실험을 했다. 붓다는 “물질(色), 의식(識), 인식(想), 감각(受), 의지작용(行)의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상게서)이 고통임을 발견했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고통은 우리들 각자의 몸과 마음속에 생겨나는 비정상적인 집착이다. 인간은 자신의 정신이나 육체에 깊이 집착해 있다. 이 집착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며 실제로 계속되는 고통일 뿐이다.
*집착*
집착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습관적으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집착이다. 마약에 중독이 된 사람은 마약의 사용이 중독을 더욱 깊게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약에 의해 감각적 쾌락을 계속 경험하기를 바란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조건지어진 갈망의 수준을 탐닉한다.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발생한다. 그 대상은 오히려 이차적이다. 사실 모든 갈망 자체가 쾌락적 감각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적으로 갈망의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갈망은 이미 소멸시킬 수 없는 중독 상태, 습관이 되어 있다. 중독자에게 약을 점차로 줄이면 더 많은 분량을 요구하는 것처럼, 갈망이 점차 강해질수록 더욱 그 갈망을 만족시키려 한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갈망을 소멸시킬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갈망하는 한 결코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두 번째 집착은 스스로 가지는 자기의 이미지, 즉 자아 “나”이다. 우리 각자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쇳가루로 둘러싸인 자석처럼 행동한다. 자석은 종이 위에 있는 모든 쇳가루를 자기를 중심으로 배열시킨다. 조그만 반성도 없이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싫은 것은 거절하고 쾌락은 추구하면서 세계를 자기중심으로 정돈하려 한다. 그러나 누구도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타인과 갈등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각자가 만들고 싶은 배열 형태는 다른 사람의 자기장에 의해 방해받는다. 우리는 쉽게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는 불행과 고통뿐이다.
집착은 “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집착을 “나의 것”까지 확대한다. 우리 각자는 소유한 것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유한 것은 우리와 결합되어 있고 “나”의 이미지를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만일 “나의 것”이 영원히 존재하고 “나”가 그것을 영원히 즐길 수 있다면 이것에 대한 집착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나”와 “나의 것”은 분리되어 있어 언젠가는 헤어질 시간이 온다. 그 때가 되면 집착이 크면 클수록 고통은 더욱 커진다.
집착은 더욱 광범위하여 견해나 신념까지 확대된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어떤 내용이든지, 옳든 잘못되었든 간에 우리가 집착한다면 분명히 그것은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견해와 신념이 최상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것들에 대한 비판을 하면 매우 언짢아한다. 또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본인의 신념이나 견해를 주장하는 것은 효과가 없는 설득이다. 오히려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實相,reality)을 보는 일이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견해에 대한 집착은 진실을 보는 데 방해될뿐더러 우리를 계속 불행하게 한다.
세 번째 종류는 종교적 형식이나 의식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는 내면적 의미보다도 종교의 외적 표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종교적 의식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한 종교인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본질적 요소가 결여된 외형적 종교의식은 빈껍데기임을 망각한다. 만약 마음이 여전히 성나고 악의로 가득 차 있다면, 기도하고 의식을 행한다 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참된 종교인이 되기 위해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순결, 사랑, 자비와 같은 종교적 태도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외형적인 종교의식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정신보다는 의식의 껍데기에 더 비중을 둔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을 놓치게 되고 무지한 상태로 남게 된다.
모든 우리의 고통은 이런 세 가지의 집착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고통과 집착은 항상 함께 발견된다.
*연기*(*緣起*) : *고통이 발생되는 인과의 고리*
집착의 원인은 무엇인가? 집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붓다는 자신을 분석하고 관찰함으로써, 집착은 좋고 싫은 것을 분별하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선택하는 의지적 행위(行)에 의해서 생겨남을 발견했다. 미음의 무의식적 조작 행위는 반복되고 순간순간 강화되어 강력한 힘과 충동으로 자라나 모든 집착에 개입한다. 집착은 마음속에서 무의식적 조작적 반응이 발전된 형식에 불과하다. 이것이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렇다면 좋고 싫은 분별하는 조작 원인은 무엇인가? 붓다는 깊이 관찰하여 그것이 감각(受;Sensation)임을 발견했다. 쾌락을 느끼는 감각은 대상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불쾌한 감각은 싫어하게 된다. 왜 이런 감각이 생겨났는가? 감각의 원인은 무엇인가? 붓다는 더욱 깊게 관찰하여 그것이 접촉(接觸)임을 발견했다. 눈은 색깔을, 귀는 소리를, 코는 향기를, 입은 맛을, 몸은 만질 수 있는 것들을, 마음은 생각. 감정. 이념. 기억. 상상된 것들과 접촉한다. 이 다섯 가지의 신체적 감각과 마음으로 우리는 세계를 경험한다. 물질적 대상이나 정신적 현상이 이 여섯 감각과 접촉할 때마다 감각은 쾌락이나 불쾌를 일으킨다.
왜 첫 번째에 접촉이 있는가? 붓다는 눈, 귀, 코, 입, 신체, 마음의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六處)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접촉은 불가피하다. 세계는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다양한 생각들과 감정들, 셀 수 없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세계와의 접촉은 피할 수 없다.
왜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六處)이 있는가? 이것들은 마음과 물질의 흐름에서 본질적 측면이기 때문이다. 왜 물질과 마음의 흐름이 있는가? 이 흐름의 원인은 무엇인가? 흐름(flow)은 세계를 보는 자와 보여지는 것, 주체와 객체, 나와 타인으로 구분하는 인식행위인 의식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런 이원적 격리로부터 탄생과 개체와 과정이 일어난다. 매 순간마다 의식은 일어나고 이때 정신과 물질의 형태를 수반한다. 다음 순간에 의식은 재빠르게 다른 형태로 변한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지만 의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떤 간격도 없이 의식은 새로운 형태로 한 존재에서 다음 생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때 의식의 흐름은 무엇으로 인하여 계속되는 것일까? 붓다는 이것을 심리적 의도(行)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음은 끊임없이 작의(作意)를 일으키고 모든 심리작용은 의식의 흐름에 추진력을 주어 다음 순간까지 계속되게 한다. 심적 작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주는 추진력은 더욱 강해진다. 한 순간의 미세한 마음의 작용은 오직 그 한 순간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좋고 싫은 것의 순간적인 의지 선택이 탐욕이나 혐오의 형태로 강화되면 그것은 추진력을 얻어 여러 순간에 반복되고 또 몇 분, 몇 시간 동안 계속된다. 탐욕이나 혐오감도 더욱 깊어지면 몇 달, 몇 년까지도 지속된다. 만약 전 생애를 걸쳐서 특정 형태의 무의식적 충동(行)이 계속하여 반복되고 강화되면, 이 마음의 작용은 다음 생애까지 충분히 지속될 것이다.
마음의 의지적 작용(作意)은 무엇으로 일어나는가? 실재를 깊이 관찰한 결과, 붓다는 바로 무지(無知)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았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으로 어떤 사건에 재반응하여 조작한다는 사실을 모를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재반응하여 조작하는 마음의 진실한 본성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영원하지 못하고(無常),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無我)을 알지 못한다. 또한 이것들에 대한 집착이 고통(苦)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반응하고, 이 맹목적 충동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맹목을 고집하고 더욱 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무지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심리 조작에 의한 습관 속에 갇혀 지낸다. 이것이 고통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원인이다.
무지(無明)를 연(緣)하여 의지작용(行이) 일어나고
의지작용을 연하여 의식(識)이 일어나고
의식을 연하여 마음과 물질(名色)이 일어나고
마음과 물질을 연하여 여섯 감각(六處)이 일어나고
여섯 감각을 연하여 접촉(觸)이 일어나고
접촉을 연하여 느낌(受)이 일어나고
느낌을 연하여 탐욕과 증오(愛)가 일어나고
탐욕과 증오를 연하여 집착(取)이 일어나고
집착함을 연하여 생성(有)이 일어나고
생성을 연하여 탄생(生)이 일어나고
탄생을 연하여 늙음과 죽음, 슬픔과 한탄, 육체와 정신의 고통과 시련이 일어난다.(중부.38)
이런 인과(因果)의 고리에 의해서 우리는 현재에 존재하고 미래의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마침내 진리는 분명해졌다. 고통은 “나”라고 불리는 현상, 우리의 참된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된다. 다른 고통의 원인은 의지작용(行), 습관적인 마음의 조작. 충동이다. 무지로 눈이 멀었기 때문에 우리는 탐욕과 증오를 쌓아 가고 이것에 다시 집착하여 모든 불행을 만들어 낸다. 마음의 의지적 습관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행위자, 즉 업(業)이다. 행(行)은 단지 참된 본성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어난다. 무지, 탐욕, 증오는 모든 고통을 일으키는 세 가지의 뿌리이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고통과 그 원인을 이해함으로써, 붓다는 다시 어떻게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붓다는 인과라는 업의 법칙을 문제의 실마리로 삼는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저것이 일어난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멈춤으로 인하여 저것이 멈춘다,”(상게서<上揭書>)
원인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원인이 소멸된다면 결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고통이 일어나는 과정을 거꾸로 관찰된다.
무지가 소멸되면 의지작용이 멈추고
의지작용이 멈추면 의식이 멈추고
의식이 멈추면 마음과 물질이 멈추고
마음과 물질이 멈추면 여섯 감각이 멈추고
여섯 감각이 멈추면 접촉이 멈추고
접촉이 멈추면 느낌이 멈추고
느낌이 멈추면 증오와 탐욕이 멈추고
증오와 탐욕이 멈추면 집착이 멈추고
집착이 멈추면 생성이 멈추고
생성이 멈추면 탄생이 멈추고
탄생이 멈추면 늙음과 죽음, 슬픔과 한탄,
정신적 신체적 고통과 재난이 멈추고
그래서 고통의 덩어리가 멈춘다.(상게서)
만약 무지가 뿌리째 뽑히면 모든 종류의 고통을 야기하는 맹목적인 의지작용도 없다. 더 이상 고통이 없다면 그때 우리는 참다운 평화와 행복을 경험한다. 고통의 수레바퀴는 자유의 수레바퀴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고마타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실천했던 바이고 가르친 내용이다. 그는 말한다.
스스로 악을 행함으로써 그대는 그대 자신을 더럽힌다. 스스로 악을 행하지 않으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바이다. (법구경)
우리 각자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신의 의지적 행위(行)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런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윤회*
연기의 수레바퀴에 의해서 붓다는 윤회(輪廻, samsara)의 과정을 설명한다. 당시 인도에서 윤회라는 개념은 널리 일반화된 상식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윤회를 지지할 수 없는 걸맞지 않는 교의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윤회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기 이전에 윤회가 존재하는지에 관하여 이해해야 한다.
윤회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반복되는 존재의 사이클이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계속되는 삶의 과정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힘이다. 낮은 수준이든 높은 수준이든 각자의 삶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천하기도 하고 거룩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윤회의 개념은 현생에서 행한 행동의 보상을 내생에서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다른 종교들의 개념과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붓다는 최상의 거룩한 존재에게서조차 고통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시 태어나는 곳이 어디든지 환생은 전체적으로 고통이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자유로울 때 세속적인 기쁨보다 진실한 행복(法悅)을 경험한다. 붓다는 모든 생활 속에서 이런 행복을 경험하는 길을 가르쳤다.
윤회(samasara)는 환생을 반복하면서 고전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아나 영혼의 전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붓다는 이쪽의 삶에서 저쪽의 삶으로 옮겨가는, 그러면서도 전혀 변화가 없는 동일성은 없다고 말한다.
“소에서 우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유에서 응유(凝乳)가 나오고, 응유에서 버터가 나오고, 깨끗한 버터에서 걷어 올린 크림이 나온다. 우유가 있을 때는 그것을 응유나 버터 그리고 크림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재에서 현재의 순간만이 참으로 진실한 모습이다. 과거나 미래는 기억이나 상상에 속하는 것이다.”(장부.9)
붓다는 고정된 자기의 동일성이 계속 반복하여 환생한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과거나 미래의 존재는 없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의 행위가 생성되는 삶의 흐름에 추진하는 힘(연료)이 계속 주어지는 한, 이쪽 삶에서 저쪽 삶으로 계속하여 생성되어감을 깨달았고 가르쳤다.
비록 현재의 순간만이 참다운 존재라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연기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자신의 맹목적인 의지작용에 관하여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지금 여기에서 고통을 만든다. 만약 무지를 제거하고 맹목적인 의지작용을 멈춘다면 지금 여기에서 곧장 행복을 경험할 것이다. 천당과 지옥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육체 안에서, 이 현생에서 경험된다. 붓다는 말했다.
“비록 내생은 없으며 선한 행위에는 보상을 받고 악행은 처벌을 받을 미래가 없다고 믿을지라도, 질투와 성냄과 무지로부터 자유롭다면 모든 삶 속에서 그는 행복하게 살아간다.”(증지부)
과거나 미래의 존재에 대해 믿거나 믿지 않거나 관계없이,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맹목적인 의지작용에 의해서 야기되는 문제들, 현재의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맹목적인 습관을 종식시킴으로써 고통을 소멸시키는 길을 밟을 것이며, 자유와 행복을 지금 경험하는 것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 건전한 탐욕과 혐오가 있지 않는가? 이를테면 독재에 대한 혐오, 자유에 대한 갈망, 신체적 상처에 대한 두려움 등?
대답; 탐욕과 혐오는 결코 건전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항상 당신을 긴장시키고 불행하게 할 것이다. 만약 마음속으로 탐욕과 혐오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비록 당신이 매우 가치 있는 목표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당신은 끝내 건전하지 못한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물론 당신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당신은 공포에 압도되어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당신은 결국 스스로에게 해를 주는 공포를 발전시킬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혐오감을 가지고 불의와 싸워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혐오감은 해로운 정신적 상처나 콤플렉스를 만든다. 당신은 불의와 싸워야 한다. 당신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균형 잡힌 마음으로 행동해야 한다. 마음의 평정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좋은 무엇을 성취하는 일을 할 수 있다. 마음의 평정은 항상 도움이 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질문: 미래를 위한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도 탐욕의 일종인가?
대답: 판단의 기준은 당신이 그 계획에 집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모든 사람은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만약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당신이 울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에 집착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어도 여전히 웃으면서 “나는 최선을 다 했다. 실패했을지라도 다시 도전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당신은 여전히 행복하다.
질문: 연기의 수레바퀴가 멈춘다는 것은 자살이나 자기 허무주의에 떨어진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왜 우리는 이것을 원하는가?
대답; 허무주의의 추구는 인생에 있어 무엇을 성취하려는 비정상적인 탐욕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해롭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한 탐욕도 없이 자유분방하지도 않으면서 일이 진행되는 본성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질문: 그러나 마음의 의지적 작용인 행(行,sankhara)의 사슬이 완전히 멈출 때 비로소 윤회가 멈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대답;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지금 현재의 삶, 바로 그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라.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 멋진 현재를 만들어 가라. 그러면 자동적으로 미래는 좋다. 윤회에 관계된 마음의 의지적인 모든 행(行)이 소멸될 때 삶과 죽음의 과정은 멈추게 된다.
질문: 그것은 소멸이 아닌가?
대답; “나”라는 환상의 소멸이 고통의 소멸이다. 이것이 불꽃을 불어서 끈다는 낱말 nibbana(涅槃)의 의미이다. 인간은 탐욕의 불꽃, 화의 불꽃, 무지의 불꽃으로 끊임없이 타오른다. 이 불꽃이 멈추면 괴로움도 멈추게 된다. 남은 것은 오직 긍정성이다. 그러나 이 긍정성은 감각적 영역을 초월하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현재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그때 당신은 존재의 본성을 알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게 되면 소멸의 공포는 사라지게 된다.
질문: 그때 의식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대답: 왜 그것을 걱정하는가? 오직 경험되어질 성격의 것을 사변적인 말로써는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최고의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당신을 오히려 멀리 격리시켜 놓을 것이다. 당신이 그곳에 도달하면 그것을 즐기라. 더 이상 의심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 이르기 위해 뜨겁게 노력하라.
## 조약돌과 버터기름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울면서 붓다를 찾아왔다. 그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붓다는 그에게 물었다.
“젊은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예, 어제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쩔 것인가? 운다고 해서 돌아가신 분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특별한 부탁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제발 죽은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십시오.”
“음, 내가 죽은 너의 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발 무언가를 좀 해주십시오. 당신은 매우 힘이 있는 사람이고 분명히 무엇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사제들, 면죄부를 파는 사람, 자선 기부금을 모으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돕기 위해 장례식이나 종교적 의식을 집행합니다. 제식이 행하여지면 천국의 문이 열리고 죽은 사람들은 그곳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말하자면 입국비자를 얻은 것입니다. 부처님, 당신은 그런 힘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죽은 저의 아버님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 주신다면, 그는 비록 입국비자는 발급받지는 못했지만 영원한 거주를 승낙받게될 것입니다. 제발 죽은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십시오.”
이 젊은이는 너무나 슬펐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붓다는 그를 위해 새로운 방식을 사용했다. 붓다가 그에게 말했다.
“좋다. 시장에 가서 단지 두 개를 사 오너라.”
젊은이는 붓다가 그의 죽은 아버지를 위해 어떤 의식을 집행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기뻐했다. 그는 시장으로 달려가서 단지 두 개를 사가지고 왔다.
“좋다. 한 쪽에는 버터기름를 넣고 다른 쪽에는 자갈을 넣어라.”
붓다가 지시한 대로 젊은이는 따랐다.
“자, 그것들을 연못에다 집어넣어라.”
젊은이는 그대로 했다. 두 개의 단지는 연못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붓다는 말했다.
“자 이제 긴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그 단지를 쳐서 깨뜨려라.”
젊은이는 붓다가 그의 아버지를 위해 훌륭한 의식을 행한다고 생각하고 매우 기분이 좋았다.
인도의 옛 관습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의 아들은 화장터로 가서 장작 위에 놓고 불태운다. 몸이 반쯤 탔을 때 아들은 두꺼운 막대기로 두 개골을 지끈 깬다. 옛 관습에 의하면, 두개골이 이 때 깨어지면 천국의 문이 열린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젊은이는 ‘아버지의 몸은 이제 다 재로 변해가고 붓다는 상징적으로 내가 이 단지를 깨뜨리기를 원하는구나.’ 고 생각했다. 그는 매우 행복했다.
붓다가 말한 대로 젊은이는 막대기를 가지고 두 개의 단지를 내리쳐 깨뜨렸다. 당장에 한 쪽 단지에 담겨진 버터가 흘러나와 연못 물 표면으로 떠올랐다. 다른 쪽에 담긴 자갈은 흘러나와 밑바닥에 남았다. 그때 붓다는 말했다.
“젊은이, 이것이 내가 행한 의식이다. 자, 이제 너의 사제들과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불러와 그들에게 찬송과 기도를 하게 하라. ‘오 자갈이여 위로 올라오라, 위로 올라오라. 버터여 밑으로 가라앉으라, 가라앉으라.’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오, 부처님 당신은 지금 농담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자갈은 물보다 무겁기 때문에 바닥으로 가라앉습니다. 그것들은 위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버터는 물보다 가볍기 때문에 물 표면에 올라옵니다. 버터는 아래로 가라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젊은이여, 그대는 자연의 법칙은 매우 잘 알고 있으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대의 아버지가 그의 인생에서 자갈처럼 무거운 행위를 했다면 그는 반드시 아래로 내려간다. 누가 그를 위로 끌어올리겠는가? 그리고 버터처럼 그의 행동이 가벼웠다면 그는 반드시 위로 올라간다. 누가 그를 아래로 끌어내리겠는가?”
우리가 보다 빨리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여 그 법칙에 따라 살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보다 빨리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상응부)
## 5.## 도덕성의 훈련
수행이란 무지, 탐욕, 성냄 등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여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작업이다.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붓다는 실천의 방법을 발견하고 몸소 가르쳤다. 붓다는 이 방법을 팔정도(八正道, the Noble Eightfold Path)라고 불렀다.
모든 악을 삼가고 선을 행하며 그대의 마음을 정화시키라. 이것이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이 다.(법구경)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매우 명료한 가르침이다. 모든 사람들은 해로움을 주는 행동은 피하고 자비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해롭다든가 자비롭다는 것 혹은 건전하다든가 사악하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자신의 견해, 전통적인 믿음, 우리의 선호나 편견에 따라 이것들을 이해한다면, 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좁은 교파적 이해에 머물고 만다. 붓다는 이런 편파적 해석을 버리고 건전함과 사악함, 자비와 죄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를 제공한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행동, 그들의 평화와 조화를 방해하는 행동은 건전하지 못한 잘못된 행동이다. 다른 사람을 돕고 평화와 조화에 기여하는 행동은 건전하고 가치 있는 행동이다. 더구나 수행은 종교적 의식을 행하거나 지적인 훈련 없이 스스로 실재를 직접 경험하고 또한 고통을 만들어 내는 조건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하는 일을 함으로써 자체를 정화시킨다.
팔정도(八正道)는 계(戒, sila), 정(定, samadhi), 혜(慧, panna) 세 단계로 나뉘어 진다. 계는 몸과 입으로 행하는 건전하지 못한 행동을 삼가는 도덕적 실천이고, 정은 주의력을 모아 자신의 정신과정을 의식적으로 조정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수행이며, 혜는 그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순수한 통찰의 발전된 형태이다.
*도덕적 실천의 가치*
법(法)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계행을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수행의 진보에 없어서는 안 될 첫 번째 단계이다. 우리는 모든 행동(身), 말(口), 뜻(意)을 절제해야만 한다. 사회는 그 자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해롭기 때문에 행동의 절제가 요구된다. 마음속에서 초조함, 탐욕, 그리고 성냄이 일어나지 않고서 건전하지 못한 행동들, 거짓말, 살인 도적질, 사음 등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탐욕과 화를 내는 순간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 깊은 불행을 가져온다고 붓다는 말한다.
현재 타오르는 불꽃은 미래에도 타오르고, 악을 행하는 자는 두 번이나 고통을 받네.
현재 행복하면 미래에도 행복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두 번 기뻐하네.(상게서)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의 생에서 바로 우리의 내면에 있는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잘못된 행동을 범할 때 우리는 혐오와 탐욕이라는 지옥의 불꽃을 경험한다. 자비를 실천할 때 천국의 내적 평화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전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삼가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행복 그 스스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그러하다.
계행의 실천을 위한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꿰뚫는 깊은 성찰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마음이 매우 고요해야 한다.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우물의 깊이를 들여다 볼 수 없다. 내면적 관찰은 초조함으로부터 자유로운, 고요한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잘못된 행위를 할 때마다 마음은 초조함으로 넘치게 된다. 몸으로나 정신으로나 모든 악(惡)을 멀리할 때 마음은 충분히 평화로워져 내면의 관찰을 계속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계행이 왜 본질적인 문제인가 하는 세 번째 이유가 있다. 법(法)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궁극적 목표를 향하여 간다. 이렇게 수행하는 동안 그는 버리려고 하는 모든 옳지 않은 습관들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행동은 수행을 향한 모든 순간에 발걸음을 뒤로 옮기게 하며 목표를 향해 가는 데 방해가 된다. 이때 계는 사회의 정의와 구성원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개인의 세속적인 선과 수행의 진전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팔정도의 세 부분인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위(正業), 올바른 생활(正命)은 계행의 실천에 포함된다.
*올바른 말*(*正語*)
말은 순수하고 건전해야 한다. 순수는 삿됨을 제거함으로써 성취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삿됨을 이루는 요소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거짓말, 험담, 욕설, 부질없는 이야기, 자기와 다른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는 의미 없는 잡담,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너절한 말들이 포함된다. 이런 모든 잡된 말들을 삼감으로써 올바른 말(正語)이 남게 된다.
이것은 오직 부정적인 개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어(正語)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붓다는 설명한다.
진실을 말하라.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고 성실하며 신뢰할 수 있도록 확고해라. 싸움을 중재하고 화합을 조성하며, 조화를 즐거워하며 조화를 추구하고 말로써 화합을 만들어 내라. 말은 점잖고 듣기에 편하며 친절하게, 따뜻하고 용기를 북돋우며 긍정적으로 즐겁게 하라.
정어를 실천하는 사람은 법과 계행에 맞게 적절한 시기에 말한다. 그의 말은 매우 합리적 이며 절제되어 있고 건설적이다.(중부)
*올바른 행동*(*正業*)
행동 역시 깨끗해야 한다. 말과 함께 우리는 잘못된 행동을 삼갈 수 있도록 잘못된 행동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행동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사음,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을 알지 못할 정도로 술을 과음하는 것, 마약의 흡연 등이 포함된다. 이런 잘못된 행동을 삼감으로써 건전하고 올바른 행동을 지킨다.
이것 역시 부정적 개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올바른 행동(正業)을 실천하는 사람에 관하여 붓다는 말했다.
회초리와 칼을 옆으로 치워 두고, 정업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해를 주지 않으며 친절하고 모든 생명의 선을 추구한다. 어떤 비밀도 없이 스스로 순수 그 자체가 되어 살아간다.(상게서)
*계행*(*戒行*)
세속적 생활을 하는 일반인은 올바른 말과 행동을 실천하기 위해서 다섯 가지의 계행을 지켜야 한다.
1.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
2. 훔치지 않는다.
3. 사음하지 않는다.
4. 거짓말하지 않는다.
5. 술을 마시지 않는다.
오계는 도덕적 행위에 필요한 본질적인 최소한의 것이다. 법(法)을 실천하는 모든 사람은 이것들을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마음을 정화시키고 자유를 향하는 길을 걷기 위해 며칠 아니 단 하루라도 바쁜 세속적 일상생활을 옆으로 제쳐두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10일 수련코스 같은 기회가 주어질 지도 모른다. 이런 기간은 법을 실천하는 중요한 시간이고 이런 시기의 행동은 일상생활보다 더욱 주의 깊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마음의 정화에 맞지 않는 행동은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시기에는 팔계를 지키는 것이 좋다. 이 계 가운데 사음을 삼가라는 계율은 모든 음행을 금하는 조항으로 바뀌어 적용되고, 오계에 때 아닌 때 먹지 말라, 오락을 즐기거나 몸에 장식물을 부착하지 말라, 사치한 침대를 사용하지 말라는 계행이 더 첨가된다.
독신생활의 요구와 강화된 계행은 마음의 고요를 증대시키고 내적 관찰을 고무시킨다. 또 모든 외적 혼란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데 도와준다. 팔계는 법의 집중적인 수행을 위해 주어진 기간동안이라도 지켜져야 한다. 이 일정한 수련의 기간이 끝나면 일반 재가 신도는 다시 오계로 되돌아간다.
마지막으로 탁발승이나 은둔자에게 적용되는 십계가 있다. 십계는 일곱 번째의 계행을 춤추고 노래하는 오락의 금지와 몸에 금, 은 등의 장식물을 지니지 말라는 두 개의 항목으로 나뉘고, 돈을 받지 않는다는 계율이 첨가된다. 탁발승은 탁발로 생활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과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해 자유롭게 완전히 마음을 밝히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다.
오계, 팔계, 그리고 십계는 전통에 의해서 명령되는 공허한 형식이 아니다. 계는 말 그대로 “수행을 완성시키기 위한 단계”로 그 자신과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말과 행동을 확실하게 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올바른 생활*(*正命*)
각 개인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고유한 생활 방식, 직업을 가진다. 올바른 생활을 위해서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는 그 자신의 일 속에서 오계를 범하지 않아야만 한다. 오계를 범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른 사람이 계를 범하게 하는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우리의 생활양식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도록 요구하는 생활은 올바른 생활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죽였다 해도 죽은 동물의 가죽과 살과 뼈 따위를 파는 행위는 올바른 생활양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술이나 다른 약을 파는 행위는 많은 이익이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을 마취시키고, 그들을 결국에는 해치게 된다. 도박하는 카지노를 경영하는 것은 수지가 맞는 일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서 노름하는 사람은 그들 스스로를 해치고 있다. 독을 팔거나 무기를 판매하는 일은 이익이 큰 사업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수의 행복과 평화를 해친다. 이것들은 결코 온당한 생활양식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생활양식이 직접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만약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결국 해를 입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생활이 아니다. 전염병이 발생하기를 바라는 의사나 식량 부족 상태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장사꾼은 결코 올바른 생활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또 각자는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회에 대한 책무를 다 한다. 이것에 대한 보상으로 각자는 스스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탁발하는 승려조차도 그가 받은 보시나 공양으로 그의 고유한 일 즉 자신의 선과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밝히는 일을 한다. 우리의 일로 받는 보상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만약 초과분이 있다면 적어도 그것의 일부는 사회에 환원되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사회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유용한 역할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가 하는 일은 올바른 생활 방식이 될 것이다.
10*일 수련코스에서 본 계행*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실천되어야 한다. 10일 수련코스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계행을 실천할 기회를 준다. 이것은 법(法)의 집중적인 수행을 위해 세속적인 생활을 잠시 제쳐놓는 기간이다. 그러므로 팔계가 모든 참가자들에게 지켜진다. 그러나 처음 이 수행 과정에 참가한 사람이나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휴식이 허용된다. 그들에게는 저녁에 가벼운 고기도 제공된다. 이런 이유로 그들에게는 오계만 적용된다. 참가자들은 팔계를 지키면서 9일 동안은 내내 침묵해야만 한다. 그들은 다른 참가자와 이야기할 수 없으나 선생님이나 운영자들과는 이야기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산란함은 최소화되고 사람들은 서로 방해되지 않고 비좁은 곳에서 생활한다. 그리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내적 관찰의 미묘한 작업을 계속한다.
이렇게 수행과정 중에 그들은 다른 사람의 보시로 살아가는 수행승 같은 생활을 한다. 내적 관찰의 수행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들 자신과 타인의 선을 위해 참가자는 수행과정에 참가하는 동안 올바른 생활(正命)을 실천할 수 있다.
계의 실천은 법(法)의 길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계행의 실천 없이는 도(道)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러우면 참된 내적 실재를 탐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 발전은 계 없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다. 계행의 실천 없이도 여러 가지 황홀상태를 경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신적 성취라고 할 수 없다. 계행의 실천 없이 마음은 고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또 궁극적인 진리를 경험할 수 없다.
*질문과 대답*
질문 : 올바른 행동(正業)을 지키는 것도 집착의 한 종류가 아닌가?
대답 ; 아니다. 그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일을 열심히 하라. 그것들은 이루어질 것이다.
질문 ; 그러면 실수해도 좋다는 듯인가?
대답 ; 만약 실수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다음에는 다시 실수하지 말라. 그러나 다시 실수할 수 있다. 다시 웃고 다른 방법으로 해 보라. 만약 실패도 웃고 넘길 수 있다면 당신은 집착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실패가 당신을 우울하게 하고 성공이 당신을 우쭐하게 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 ; 올바른 행동(正業)은 결과가 아니고 단지 노력인가?
대답 ; 결과가 아니다. 만약 당신의 행동이 좋다면 자연히 결과도 좋을 것이다. 법(法)은 인과의 사슬이다. 우리는 결과를 선택할 힘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의 행동을 선택할 수는 있다. 곧장 최선을 다하라.
질문 ; 정당한 성행위와 잘못된 성행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충동의 문제인가?
대답 ; 아니다. 성은 가정생활에서 정당성을 가진다. 억지로 억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강하게 독신을 주장하는 고행자는 긴장을 만들고 이것은 보다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만약 성적 욕구가 일어날 때마다 아무하고나 성관계를 가진다면 이때 당신은 그러한 정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양극단을 피하기 위해서 법(法)은 정신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고 서로가 허락한 남녀의 성관계인 건전한 성적 표현, 중도의 길을 마련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파트너가 비파사나 수행자라면 성적 열정이 일어날 때마다 당신 두 사람은 그것을 관찰할 것이다. 이것은 억압도 탐닉도 아니다. 관찰함으로써 당신은 쉽게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당신 부부는 여전히 성관계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점차 성이 의미 없는 단계로 발전한다. 이것이 진실하고 참다운 독신의 단계, 마음속에서 성적 열정의 생각마저 일어나지 않는 단계이다. 이런 독신은 성적 만족을 넘어 큰 기쁨을 준다. 항상 만족스럽고 조화로운 느낌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이런 참된 행복을 경험해야만 한다.
질문 ; 서구에서는 많은 사람이, 서로 동의한 성인들의 성관계는 허용된다고 생각한다.
대답 ; 이런 견해는 법(法)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람 저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그의 욕망과 고통을 증가시킨다. 당신은 어떤 한 사람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독신생활을 해야 한다.
질문 ; 새로운 의식이나 괴상한 환상을 경험하기 위해 약을 사용하는 경우는 어떤가?
대답 ; 어떤 학생은 환각제를 사용함으로써 명상에서 만나는 것과 같은 경험을 겪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약을 복용해서 얻는 경험은 외적인 힘에 의존한 형태이다. 그러나 법(法)은 원해서 하기만 하면 당신의 의지로 경험할 수 있도록 언제든지 당신 자신이 그대로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친다.
약을 사용하는 것과 의지에 의한 경험의 큰 차이점은 약을 사용한 경우 정신적 균형을 무너뜨리고 의지력을 약화시켜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힌다는 것이고, 법(法)의 실천에 의한 진리의 경험은 수행자로 하여금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도 견고한 균형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질문 ; 술을 삼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취하지 않고 적당히 술 마시는 것은 특별하게 어떤 해로움이 없는 것 같다 한 잔의 술도 계를 파하는 것인가?
대답 ; 적은 양을 마셨다 해도 결국은 술에 대한 갈망을 발전시킨다. 이것이 중독의 시작이고 결국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해를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중독 상태는 한 잔에서 시작된다. 만약 당신이 매우 진지하게 수행하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려 포도주 한 잔을 마셨다면, 그 날 당신은 당신의 명상수행이 약해짐을 발견할 것이다. 법(法)은 음주와 함께 갈 수 없다. 당신이 진실로 법(法)을 발전시키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술을 삼가야 한다. 이것이 수많은 수행자들의 교훈이다.
질문 ; 종종 사람들은 “좋은 것이 좋다”라고 말한다.
대답 ; 왜냐하면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혐오감으로 행동하면 자동적으로 마음속에서 초조감을 느낀다. 당신이 탐욕으로 행동하면 쾌락을 느낄지 모르지만 마음의 심층에는 초조감이 있다. 결국 그것은 무지에서 좋은 것을 느낀다. 당신은 그와 같은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를 깨달을 때 자연적으로 그런 행동을 멈추게 될 것이다.
질문 ; 고기를 먹는 것은 계를 파한 것인가?
대답 ; 아니다. 당신이 동물을 죽이지 않았다면 아니다. 만약 당신에게 우연히 고기가 제공되고 당신이 그것을 다른 음식처럼 맛있게 먹었다면 계를 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고기를 먹음으로 인하여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살생계를 범하도록 부추긴 것이 된다. 동물은 언제나 탐욕과 화를 일으킨다. 동물은 그 스스로를 관찰하고 그 마음을 정화시킬 수 없다. 동물의 온 근육은 탐욕과 화로 퍼져 있다. 당신이 채식이 아닌 육식을 먹을 때 이것들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수행자는 화와 탐욕을 없애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식을 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질문 ; 당신은 일상생활에서도 채식을 권하는가?
대답 ; 그것이 유익하다.
질문 ; 수행을 하면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가?
대답 ; 만약 당신이 법(法)을 실천한다면 비록 돈을 벌 수 없다 해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돈을 벌고 법(法)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 없다. 법(法)이 더욱 중요하다. 사람은 세상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지탱해 가야만 한다. 당신은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 여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법(法)과 함께 해야 한다.
질문 ; 평화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답 ; 평화주의의 의미가 어떤 공격에 직면하면 무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법(法)은 적극적이고 실제적 방법을 가르쳐 준다.
질문 ;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에 의한 저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답 ; 그것은 상황에 달려 있다. 만약 공격자가 무력 이외에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면 항상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물리적 힘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에 의해서 저항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법(法)의 길이다. 그리고 이것이 간디의 방법이었다. 무장된 적을 빈손으로 대항하는 것은 용기를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죽음은 곧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람은 두려움에 떨거나 아니면 용기 있게 죽을 수도 있다. 법(法)의 죽음은 두려움이 없다. 간디는 무력적 탄압 앞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동료의 시체를 등에 메지 말라, 당신의 가슴으로 안아라.” 고 했다. 법(法)이 간디의 가슴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성공했다.
## 의사의 처방
어떤 사람이 아파서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그를 진단하고 몇 가지의 처방을 적어 준다. 그 사람은 의사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그의 기도실에 아름다운 사진을 걸어 둔다. 그리고 그 사진을 향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세 번 절하고 꽃과 향을 바친다. 그리고 앉아 기도하기 시작한다. 의사가 적어 준 처방을 꺼내어 매우 경건하게 “아침 두 알, 오후 두 알, 저녁에도 두 알.” 암송하기 시작한다. 온 종일 아닌 일생 동안 내내 그는 의사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기 때문에 의사의 처방을 암송한다. 그러나 의사의 처방은 아직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 사람은 의사의 처방에 대해서 더 많이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의사에게 달려가서 묻는다. “왜 당신은 이 약을 처방했는가? 이것이 나의 병을 낫게 할 것인가?”
의사는 지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자, 이것이 그대의 병이고 그대 병의 원인이다. 만약 내가 처방한 이 약을 먹으면 병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고 설명하고 그 사람은 ‘매우 훌륭하고 그의 처방은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나의 의사가 가장 훌륭하다. 다른 의사들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이웃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평생을 주장한다 해도 이것이 결코 그를 돕지 못한다. 그가 약을 먹을 때만 그 사람은 고통이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자유를 얻은 모든 사람은 의사와 같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처방을 준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개인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발전시킨다면, 그들은 처방을 경전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들 종교의 창시자는 위대하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교파들과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약을 먹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의사의 충고를 환자가 따른다면 의사에 대한 환자의 믿음은 유용하다. 만약 약을 먹고자 하는 동기를 유발시켜 준다면 약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실제로 약을 먹지 않는다면 병은 치유되지 않는다. 당신은 스스로 약을 먹어야 한다.
## 6.## 집중의 훈련
계행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고통의 진정한 원인은 정신적인 행동이다. 단순히 말과 행동을 삼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탐욕과 혐오감 등의 건전하지 못한 정신적 행동으로 들끓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머지않아 곧 계를 파하고 탐욕과 증오가 폭발하여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미칠 것이다.
건전하지 못한 행동은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수천 년 동안 모든 종교는 도덕적 행위의 중요성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유혹이 밀어닥치면 마음은 곧 거기에 휩싸이고 계(戒)를 범하게 된다. 술은 해롭기 때문에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마시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그는 술을 마시고 다시 취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신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러자 바람직하지 못한 정신적 행위를 멈추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건전치 못한 말과 행위를 삼가는 것이 쉬워질 것이다.
문제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바바나(bhavana) 수행을 해야 한다. 바바나는 문자적으로 “정신적 발전” 보통 말로는 “명상”을 의미한다. 바바나의 가장 일반적인 영어 해석인 명상(meditation)은 보다 넓게는 정신적 이완, 백일몽, 자유연상에서 자기 최면에 이르기까지 많은 활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붓다가 바바나를 사용하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붓다는 이 용어를 특별한 정신적 훈련, 집중하는 기술과 마음의 정화를 가르치는 데 사용한다.
바바나는 정신집중과 지혜의 두 훈련을 포함한다. 정신집중의 수행은 마음의 평정(定, samatha - bhavana)을 발전시키고, 지혜의 수행은 통찰(慧, vipassna-bhavana)의 발전을 가져온다. 바바나 수행은 팔정도의 두 번째 영역으로 정신과정을 통제할 수 있는 전체적 행위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참다운 주인 노릇을 하도록 한다. 바바나 수행은 팔정도(八正道)의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깨달음(正念), 그리고 올바른 집중(正定) 등이 포함된다.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노력이 바바나(bhavana)수행의 첫 단계이다. 마음은 쉽게 무지 속에 휩싸이고 혐오나 격분에 흔들린다. 마음을 견고하고 안정되게 강화시켜야 한다. 환자를 진단하는 의사는 환자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조사한다. 조사하기 전에 의사는 먼저 현미경을 적당히 조절한 다음 혈액 샘플에 현미경을 고정시켜 집중한다.
이렇게 해야 면밀히 검사할 수 있고 병의 원인을 발견하여 적절한 처방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대상, 마음에 집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자신의 미묘한 성품, 마음을 검사하는 도구를 만들어 가야 한다.
붓다는 그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을 집중하는 여러 가지 수행법을 고안했다. 그 가운데 내적 행동을 탐구하는 가장 좋은 기술은 붓다가 몸소 실천한 호흡관법(anapanasati)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호흡은 모든 사람에게 손쉬운 주위 집중의 대상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명상의 대상이다. 바바나 수행을 시작할 때 수행자는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가능한 한 주의집중에 방해받지 않는 방에서 해야 한다. 수행자가 외부에서 내면의 세계에 돌아올 때 가장 중요한 활동은 호흡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호흡의 과정,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전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호흡하는 훈련이 아니라 깨어있음의 훈련이다. 호흡을 자의적으로 조정하는 노력이 아니라 짧든 길든 무겁든 가볍든 거칠든 부드럽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호흡을 의식하면서 깨어있는 상태로 남는 것이다.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어떤 혼란도 없이 호흡에 주의 집중하는 방법이다.
수행자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곧 알게 될 것이다. 호흡에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자마자 기억, 희망, 두려움 등의 수천 가지 생각들이 마음속에서 뛰어 나온다. 이것들 하나에 주의를 빼앗기다 보면 우리는 호흡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결심으로 다시 시작하지만 곧 마음은 호흡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된다.
호흡에 집중을 시작하자마자 마음은 재빠르게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버릇없는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마음도 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이것은 마음의 깊은 습관이며 전 생애를 통해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성품을 조사하기 시작할 때 이 마음의 방황은 멈춘다.
우리는 정신적인 습관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참된 성품과 함께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끊임없는 방황을 알아챘을 때, 참을성 있게 그리고 조용하게 다시 돌아와 호흡에 집중하면 된다. 실패하면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미소를 지으면서 긴장하지 않고 실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는 반복하여 계속 수행을 해 가면 된다. 삶의 습관이란 짧은 시간에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인내를 갖고 반복하여 계속적으로 관찰해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고 올바른 노력이다.
붓다는 바른 노력 네 가지를 말한다.
* 삿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함
* 삿된 생각이 일어나도 무시함
* 자비심의 개발
* 자비심의 발전과 완전한 성숙(증지부)
호흡에 대한 각성은 이 네 가지의 올바른 노력 모두를 닦아 가는 것이다. 우리는 앉아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호흡에 집중함으로써 자기에 대한 깨어있음의 상태를 유지한다. 우리는 나태와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만일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추구하는 대신에 다시 반복하여 호흡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는 능력과 방해에 저항하는 능력, 두 가지의 본질적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올바른 깨달음*(*正念*)
호흡의 관찰은 올바른 수행을 하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의 고통은 무지에서 온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또 자신의 참된 성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충동적 행동을 한다. 마음은 대부분의 시간을 환상, 잡념, 반복되는 과거의 기쁘고 슬픈 경험들,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등으로 낭비해 버린다. 마음이 이 같은 탐욕과 혐오로 빠져들면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에게 이 순간이 중요하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살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우리는 미래에 살 수 없다. 미래는 영원히 저 먼 곳에 있을 뿐 우리는 오직 현재에만 존재한다.
만약 현재의 자기 행위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꿈은 실현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의 순간을 자각하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면 과거를 미래의 안내서로 사용하여 우리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법(法)은 지금의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자각할 수 있도록 우리의 능력을 발전시켜야만 한다. 주의를 순간순간 우리 자신의 성품에 집중시켜야 한다.
이것이 호흡관법(anapanasati)의 기술이다. 이 수행법은 숨이 들어오는 순간, 또 밖으로 나가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자각하는 능력을 길러 준다. 호흡에 대한 관찰은 현재의 순간에 대한 자각이다.
호흡에 대한 관찰능력의 발전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우리가 궁극적 실재를 경험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호흡에 대한 집중은 자신이 느끼고 있지 못한 것들에 대한 탐구, 무의식을 의식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호흡은 의식이나 무의식의 양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호흡에 대한 관찰은 무의식을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우리는 호흡을 조절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호흡할 수 있다. 잠시 동안 호흡을 멈출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호흡 조절하기를 멈추면 그것은 자연 상태의 호흡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를테면 우리는 보다 쉽게 집중하기 위해서 약간 강하게 호흡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흡을 규칙적으로 하려는 노력은 필요 없다. 노력은 오직 호흡에 대한 각성일 뿐이다. 자연적 호흡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통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몸의 자동적 기능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의도적인 호흡의 덩어리를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자연적인 호흡의 미세한 부분을 관찰하는 데까지 발전한다. 우리의 관찰은 표면적 수준에서 미세한 실재의 자각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호흡을 관찰하는 또 다른 이유는 탐욕과 화 그리고 무지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이다. 호흡은 정신상태를 반영한다. 마음이 평화롭고 조용하면 호흡은 규칙적이고 점잖다. 그러나 마음속에 성냄, 질투, 공포와 같은 부정적 상념이 일어날 때 호흡은 보다 더 거칠어지고 무겁고 빨라진다. 이렇게 우리의 호흡은 우리에게 자신의 정신 상태를 점검하게 하는 지표가 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정신상태를 잘 다룰 수 있게 한다.
또 호흡을 관찰해야 할 이유가 있다. 우리의 목표가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이기 때문에 그 목표를 향하는 모든 단계들이 순수하고 건강하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호흡은 바로 이 점을 만족시켜 준다. 우리는 호흡에 대하여 혐오감이나 탐욕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환상이나 망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호흡은 주의집중의 적당한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마음이 호흡에 완전히 집중되는 순간 마음은 탐욕, 혐오와 무지로부터 자유롭다. 마음의 순수가 비록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매우 강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모든 습관, 조건지어진 것들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모든 축적된 의지작용의 조건지어진 습관이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다양한 형태로 솟아나 각성으로 향하는 노력들을 방해한다. 수행의 진보에 대한 갈망, 진전이 느리기 때문에 오는 압박, 성냄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혐오감 등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종종 혼수상태에 떨어질 수도 있고 좌선하기 위해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때때로 초조하여 우리는 수행을 피할 변명을 찾거나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또는 조소주의, 강박관념, 명상에 대한 우리의 능력과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한 비합리적인 의심 등으로 의지를 약화시킬지도 모른다.
이런 순간에 우리는 이런 방해들이 호흡에 대한 관찰, 수행의 성공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조금만 참고 견딘다면 그것은 줄어들고, 오히려 방해가 있을 때 수행은 더욱 쉬워진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도 몇 가지의 조건지어진 행위들은 마음의 표층에서 제거된다. 이렇게 호흡을 관찰하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마음은 청소되며 자유를 향한 전진이 시작된다.
*올바른 집중*(*正定*)
호흡에 대한 집중은 현재의 순간을 깨닫는 데 도움을 준다. 가능한 한 순간 순간에 깨어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올바른 집중(定)이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집중은 요구되지만 반드시 올바른 집중의 수준은 아니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은 집중할 수 있다. 고양이는 쥐구멍 앞에서 쥐가 나타나자마자 덮칠 준비를 하고 모든 주의집중을 기울여 기다린다. 소매치기는 지갑을 훔칠 작정으로 그것을 빼낼 순간을 기다린다. 밤중에 침대에 누워 공포에 사로잡힌 아이는 방구석을 응시한다. 이런 집중은 내적 자유에 도움을 주는 올바른 집중이 아니다. 집중(samadhi)은 모든 탐욕과 혐오와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상에의 집중이다.
호흡의 관찰에서 깨어있음의 상태를 깨뜨리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발견할 것이다. 호흡에 집중하려는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에 호흡에 대한 깨어있음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없다. 올바른 길을 걷지 못하고 자꾸 옆길로 빠지는 술 취한 사람과 같다. 사실 우리는 무지와 환상에 취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 탐욕과 혐오 속에서 비틀거린다. 우리는 깨어있음의 올바른 길을 걷지 못한다.
수행자는 곧 이 같은 곤란에 직면하여 용기를 잃거나 자책하지 말고, 살아온 날 만큼의 뿌리 깊은 정신적 습관을 변화시키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오직 반복하고 참고 견디며 끈질기게 계속해야 한다. 우리의 일은 단지 주의집중이 잘못되는 순간을 깨닫고 곧 호흡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방황하는 마음을 변화시킬 중요한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그리고 반복하여 수행함으로써 점점 빨리 의식의 흐름을 제자리로 가져올 수 있다. 점차 호흡을 놓치는 기간이 짧아지고 깨어있는 상태는 길어진다.
집중이 강해지면 우리는 여유, 행복, 충만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점점 호흡은 변화되어 부드러워지고 규칙적이고 가벼워지고 얇아진다. 종종 호흡이 멈추어 버린 것 같다. 실제로 마음이 평온해지면 몸은 고요해지고 신진대사는 느려지고 그래서 산소는 적은 양만이 필요하게 된다.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자들은 이런 단계에서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빛을 본다던가 통찰을 얻는 이상한 경험, 특별한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소위 이런 초감각적 경험은 단지 마음이 더 높은 수준의 집중으로 들어가는 징후일 뿐이다. 그 자체로써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집중의 대상은 호흡이다. 초감각의 경험을 기대하지 말라. 호흡에 대한 각성 이외는 정신적 산만일 뿐이다. 모든 초감각의 경험은 수행의 진보를 알리는 단순한 이정표이다. 때때로 이정표는 견해에 덮여 감추어지거나 수행을 열심히 하여 알아채지 못하고 성큼성큼 앞으로 전진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에 이런 이정표를 수행의 마지막 목표라고 간주하고 거기에 집착한다면 수행의 진전은 멈추게 된다. 법(法)을 수행하는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 그래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한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오직 호흡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집중이 잘 되면 호흡은 보다 정교해지고 따라가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아직은 주의력을 유지하기 위해 커다란 노력이 계속 요구된다. 이렇게 계속 마음을 닦아 집중력을 발전시키면 표면적 현상을 꿰뚫어, 가장 미세한 내면의 본질을 관찰하기 위한 방법들도 있다.
한 낱말을 반복함으로써 한 낱말에 집중하거나 영상 이미지 혹은 어떤 신체적 행동을 자꾸 반복하여 수행하는 방법들이 있다. 그러는 동안에 수행자는 하나의 대상에 주의집중하게 되고 황홀의 축복상태를 얻는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의심 없이 지속되는 동안 큰 기쁨을 준다 해도 전과 같은 문제로 가득 찬 일상생활로 되돌아왔을 때는 사라져 버린다. 이런 방법들은 마음의 표층에서는 기쁨과 평화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심층의 조건화된 무의식은 그대로 남는다. 이런 수행법들은 순간순간의 자신의 성품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다. 이때 얻는 축복이란 정화된 마음의 심연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기보다는 첨가된 것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올바른 집중은 정신적 흥분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망상이나 작위와는 거리가 멀다.
붓다의 가르침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황홀상태가 있다. 붓다는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경험하는 정신적 흥분을 여덟 가지로 분류하여 가르쳤다. 그는 계속 이것을 수행했다. 그러나 황홀상태는 그에게 자유를 주지 못했다.
붓다가 정신적 흥분상태를 가르치는 것은 통찰의 발전 단계로써의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수행자는 정신적 황홀이나 흥분을 경험하기 위해서 집중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 자신의 성품을 검토하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조건들을 제거하기 위한 마음의 도구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 ; 왜 아랫배보다는 코에 집중하는 호흡관법을 가르치는가?
대답 ; 우리에게 호흡관법은 특별하게 강한 집중이 요구되는 수행의 준비 과정이다. 집중의 영역을 좁힐수록 집중은 더욱 강해진다. 이런 집중을 개발하기 위해서 복부는 너무 넓다. 가장 적당한 것이 코이다. 이것이 붓다가 우리의 집중을 코에 두게 하는 이유이다.
질문 : 호흡을 관찰할 때 숨의 숫자를 센다든지, 숨이 들어올 때 “안으로” 숨이 나갈 때 “밖으로”라고 말해도 좋은가?
대답 ; 아니다. 말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만약 호흡을 관찰하면서 계속하여 말을 덧붙인다면 점차로 말만 의식하게 되어 당신은 호흡을 잃어버릴 것이다. 호흡할 때 “안으로”, “밖으로”라고 계속 말하면 그것은 주문이 된다. 오직 호흡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호흡만이 남아 있어야 한다.
질문 ; 삼마디(samadhi) 수행은 왜 자유를 얻는 데 충분하지 못한가?
대답 ; 삼마디를 통해 얻는 마음의 정화는 조건된 것들의 제거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억압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진흙투성이로 된 탱크의 물을 백반과 같은 침전물을 집어넣어 씻어내는 것과 같다. 백반은 퍼져있는 진흙의 입자들을 탱크의 바닥으로 가라앉게 한다. 마찬가지로 삼마디 수행은 마음을 상층의 상태로 묶어두기 때문에 무의식의 밑바닥은 그대로 남는다. 이 잠재적 불순물마저 제거해야 자유에 도달한다. 깊은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비파사나를 수행해야 한다.
질문 ; 현재의 순간에 주목하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망각하는 것은 해롭지 않는가? 결국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대답 : 이 수행법은 당신에게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리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정신적 습관은 과거의 기억이나 욕망, 계획,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에 깊이 빠져들어 현재에 대한 무지한 상태로 남고자 한다. 이 건강하지 못한 습관이 삶을 고통 속에 빠뜨린다.
질문 ; 좌선을 하면 마음이 끊임없이 떠돌아다닌다. 어떤 욕망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곧 갈망이 일어나 초조해 진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답 ; 갈망 때문에 왜 초조해지는가? 단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라. “보라, 그 갈망을” 이것이 전부이다. 그러면 당신은 거기서 빠져 나올 것이다. 마음이 방황하고 있음을 알았으면 받아들이고 그 마음의 방황을 보라. 그러면 자동적으로 다시 호흡에 집중할 수 있다. 마음이 갈망하고 방황을 일으킨다고 긴장을 만들어 내지 말라. 만약 긴장하면 당신은 새로운 감정, 혐오감을 만들어 낸다.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라. 이렇게 수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질문 ; 모든 불교 수행은 이미 요가(yoga)에서 가르쳐 왔다. 붓다가 가르친 수행의 새로운 점은 무엇인가?
대답 ; 오늘 날 요가라고 불리는 것은 실제로 후기에 발전된 것이다. 요가를 체계화시킨 파탄잘리(Patanjali)는 붓다 시대로부터 5백년 뒤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요가경>은 붓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물론 요가수행은 붓다 이전부터 인도에 널리 알려진 수행법이었다. 붓다도 깨닫기 이전에는 이 수행법을 실천해 보고 실험했다. 모든 이런 수행은 계행(戒行)과 감각적 경험으로 제한된, 정신집중의 8가지 단계로 구성된 삼마디(samadhi)로 이루어진다. 붓다는 아홉 번째의 단계를 발견했다. 그것이 곧 비파사나이다. 비파사나는 수행자에게 모든 감각적 경험을 초월하여 궁극적 목표에 이르는 통찰의 힘을 증가시켜 준다.
질문 ; 나는 자주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그들의 가치를 끌어내리곤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대답 ; 수행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만약 자아의 관념이 강하면 다른 사람의 인격을 떨어뜨리고 그들의 중요성을 줄이고 본인의 역할을 강화시킨다. 명상 수행은 자연스럽게 이런 자아의 행위를 해소시킨다. 자아가 사라지면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다.
질문 ; 가끔 내가 한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
대답 ; 죄책감은 당신을 돕지 못한다. 오직 상처만을 입힐 것이다. 죄는 법(法)의 길을 대신할 수 없다. 행동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그것을 감추거나 정당화시키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당신이 존경하는 분을 찾아가 “저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앞으로 저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입니다.”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명상 수행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그 어려움을 빠져 나왔음을 발견할 것이다.
질문 ; 왜 나는 계속하여 자아를 강화시키는가? 왜 나는 계속 “나”이기를 고집하는가?
대답 ; 이것은 무지로부터 행동한 마음이 조건화된 것이다. 그러나 비파사나는 당신을 해로운, 조건지어진 정신적 습관들로부터 해방시킨다. 자기에 대한 생각보다 항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질문 ; 다른 사람을 위한 생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대답 ; 첫 단계는 사람이 어떻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를 자각하는 일이다. 만약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애(self love)의 광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수행을 더욱 열심히 함에 따라 당신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조차도 사실은 자기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가?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행동을 기대하다가 그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의 모든 사랑은 사라져 버린다. 진실로 나는 그를 사랑했는가 아니면 나를 사랑했는가?” 대답은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비파사나 수행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이기성으로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이타적이고 조건 없이 주는 진정한 사랑을 발전시킬 수 있다.
## 밀크 푸딩
매우 가난한 두 어린 소년이 농촌이나 도시에서 음식을 구걸하면서 살았다. 한 소년은 태어나면서부터 봉사였고 다른 소년이 그를 도왔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 다녔다.
어느 날 봉사인 소년이 아팠다. 그의 친구는 “여기서 쉬어라, 내가 음식을 얻어올 테니.”라고 말하고 구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날 소년은 매우 맛있는 밀크푸딩을 얻었다. 전에 이것을 먹어 본 적이 없었던 소년은 불행하게도 친구에게 가져갈 용기가 없어서 혼자 모두 먹어 버렸다.
눈 먼 친구에게 돌아와 소년은 말했다. “미안해. 오늘 아주 좋은 밀크푸딩을 얻었지만 가져오지 못했어.”
눈 먼 소년이 친구에게 물었다. “그 밀크푸딩이라는 것이 무엇이니?”
“응, 그것은 하얀색이야. 밀크가 흰색이니까.”
태어나면서 봉사였기 때문에 그의 친구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이 하얀색이지?”
“하얀색이 무엇인지 모르니?”
“응, 몰라.”
“그것은 검정의 반대야.”
“검정이 무엇인데.” 그는 검정색도 몰랐다.
“하얀색만 알려고 해.” 그러나 눈 먼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는 주위를 돌아보다 하얀 학을 보았다. 그는 그 새를 잡아 눈 먼 소년에게 가져다주면서 “하얀색은 이 새와 같다.”고 말했다.
눈이 먼 소년은 손으로 만져 보았다.
“아, 알았다. 하얀색은 부드러운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부드러운 것은 하얀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하얀색은 하얀색이다. 제발 알아줘.”
“하지만 너는 하얀색은 이 학과 같다고 했어 내가 학을 만져 보니 그것은 부드러워. 그러니까 밀크푸딩은 부드러우며 하얀색은 부드러움을 뜻한다.”
“아니야 너는 잘못 이해했어. 다시 해보자.”
다시 눈 먼 소년은 학을 만져 보았다. 그 손으로 부리, 목, 몸통, 발톱 등을 만져 보았다. “아, 이제 알았다. 그것은 굽은 것이다. 밀크푸딩은 굽어진 것이다.”
이처럼 눈 먼 소년은 하얀색을 경험할 감각기관이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의 성품을 경험할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언제나 당신에게 굽어진 것에 불과하다.
## 7.## 지혜의 훈련
계(戒, sila)와 삼마디(定, samadhi), 어느 쪽도 붓다의 고유한 가르침은 아니다. 이것들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실천되어졌다. 사실 붓다는 자유를 얻는 방법을 찾고 있을 당시 두 스승으로부터 삼마디 수행법을 배웠다. 삼마디에 대한 해석을 붓다는 전통적인 종교의 스승들과는 달리했다. 모든 종교는 도덕적 행위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또 기도, 의식, 단식, 무소유, 기타 많은 명상을 통해서 축복의 상태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수행의 목적은 단순히 정신적인 깊은 열중의 상태다. 이것은 종교적 신비주의자들에 의해서 경험되는 “황홀”(ecstasy)이다.
이와 같은 집중은 비록 황홀상태의 수준으로 발전되지 못해도 큰 도움을 준다. 사람이 화를 내거나 탐욕에 빠져들 상황으로부터 주의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마음을 안정시킨다. 화의 분출을 막기 위해서 조용히 열까지 수를 세는 것은 삼마디 수행의 기본 원리이다. 또 하나의 분명한 형태는 낱말이나 주문을 반복하거나 눈에 보이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마음이 혼란할 때 어떤 다른 대상에 주의집중을 하게 되면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얻은 고요는 참다운 자유가 아니다. 분명하게 집중의 실천은 많은 이익을 주지만 그것은 오직 마음의 표면적인 의식의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현대 심리학이 체계화되기 전 거의 2천 5백년 전에 붓다는 아누사야(anusaya)라는 무의식의 존재를 자각했다. 주의의 전환과 집중은 의식의 수준에서 탐욕과 혐오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이다. 그러나 무의식 깊이에 있는 그것들을 제거하는 방법은 아니다. 마음의 집중은 외형의 수준에서는 평화와 조화가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위험한 채 심층에서 조만간에 폭발할 억압된 화산으로 존재한다. 붓다는 말한다.
뿌리가 상하지 않고 그대로 확고하게 땅에 박힌 나무는 비록 넘어졌지만 새로운 싹이 나온 다. 탐욕과 성냄의 습관이 뽑히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면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반 복될 것이다.(법구경)
집중의 실천으로 높은 경지에 도달했지만 그가 성취한 자유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고통을 벗어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계속 찾기로 했다.
그는 두 가지 길을 경험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쾌락의 길이다. 이것은 성취하든 실패하든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세속의 길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 길이 결코 행복으로 인도될 수 없다고 보았다. 원하는 대로 모두 다 성취한 그런 사람은 이 지구상에 없다. 사람들은 원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실패감과 불쾌감을 경험한다. 원했던 것은 곧 사라질 것이고 만족은 순간적일 뿐이라는 두려움을 갖는다. 찾고 갈망하고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항상 초조하다. 붓다는 세속을 떠나 사문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이 길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것이 평화의 길이 아님을 알았다.
또 하나의 다른 길은 모든 욕망을 삼가는 고행의 길이다. 고행의 근본 이유는 탐욕과 혐오의 습관을 치유하고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엄격한 고행은 세계 도처에 있는 종교적 현상이다. 붓다는 집을 나와 처음 여러 해 동안 이 길을 경험했다. 그는 그의 육체가 뼈와 가죽만 남을 때까지 여러 가지 고행방법을 실천했다. 육체를 괴롭히는 것이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 못했다. 고행을 이렇게 극단적으로 할 필요는 없었다. 건전하지 못한 욕망의 삼가는 보다 온전한 방법으로 실천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자기 통제는 쾌락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고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 비도덕적 행위는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절제가 오직 자기의 억압이라면 그것은 위험할 정도의 정신적 긴장을 발생시킨다. 모든 억압된 욕망은 자기 부정의 댐에 담긴 홍수 물과 같다. 어느 날 댐이 무너지면 성난 파도가 덮쳐 온다.
조건지어진 마음이 있는 한 우리는 안전하고 평화롭지 못하다. 계는 매우 유용하지만 의지의 순수한 힘만으로 유지할 수 없다. 삼마디의 발전은 도움은 되지만 심층의 깊이에 뿌리를 둔 문제에는 효용이 없다. 이 무의식의 뿌리가 깊이 박혀있는 한 진실하고 지속적인 행복과 자유는 없다.
만약 조건지어진 무의식의 뿌리가 마음속에서 제거되면 이때에야 건전하지 못한 탐욕의 위험이 없다. 또한 자기 억압의 필요성도 없다. 모든 건전하지 못한 충동들이 사라지고 갈망과 거부의 긴장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는 평화롭게 살아간다.
무의식의 뿌리를 제거하는 방법은 그것이 작용하는 마음의 심층을 꿰뚫어 보는 기술이다. 이것이 붓다가 발견한 방법,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지혜(panna)의 훈련이다. _고통의 원인을 발견하고 제거하는 통찰,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방법의 발전, 비파사나 바바나(Vipassana-Bhavana)라고 불린다._그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수행한 것, 일생 동안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 것, 이것이 붓다가 발견한 수행법이다. 또한 그가 가장 높게 중요성을 부여한 가르침이며 그의 고유한 특징이다. 붓다는 자주 _말한다._
“만약 도덕(戒)에 의해 지탱되면 집중은 매우 효과적이고 유용하다. 집중(定)에 의해 지탱되면 지혜는 더욱 효과적이고 유용하다. 지혜(慧)에 의해 지탱되면 마음은 모든 미망으로부터 자유롭다.(장부)
그 자체로 도덕(sila)과 집중(samadhi)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참된 목표는 수행자를 지혜의 섬으로 이끄는 것이다. 극단적인 고행과 쾌락주의 사이에서 참된 중도(middle path)를 발견한 것은 오직 발전된 지혜 안에서이다. 계행을 실천함으로써 정신적 초조함을 야기하는 행동을 피하게 된다. 또 집중에 의해 마음을 지킴으로써 더욱 고요해지고 동시에 효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를 꿰뚫어 보고 무지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지혜의 발전에 의해서 성취된다. 팔정도(八正道)의 올바른 생각(正思)과 올바른 이해(正見)가 바로 지혜의 훈련에 속한다.
*올바른 생각*(*正思惟*)
비파사나 수행(vipassana-bhavana)을 시작하게 전에 모든 생각의 멈춤이 필수적인 요건은 아니다. 생각들이 아직도 저항을 계속하지만 깨어있음이 계속 유지된다면 출발로써는 충분하다. 생각은 계속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은 계속 변한다. 충동과 탐욕은 호흡의 각성에 의해서 고요해진다. 마음은 적어도 표면적 의식의 수준에서는 평온하고, 법(法)이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들을 생각하기도 한다. 호흡의 관찰을 시작할 때 일어나는 어려움은 지금은 지나갔거나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이제 다음 단계, 올바른 이해(正見)를 준비해야 할 차례다.
*올바른 이해*(*正見*)
올바른 이해가 바로 참다운 지혜이다. 진리에 대한 생각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몸소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 그대로의 모습(實相)을 보아야 한다. 외견상의 진리도 실재하지만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궁극적 실재(實在)를 경험하고 꿰뚫어 보아야 한다.
지혜는 들어서 안 지혜(suta-mayapanna), 지적인 지혜(cinta-mayapanna), 그리고 경험적 지혜(bhavana-mayapanna)의 세 종류가 있다. 낱말 suta-mayapanna의 의미는 “들은 지혜”(heard wisdom)로 책을 읽거나 설법이나 강연 등이나 다른 사람에게 듣고 얻은 지혜를 자기 것으로 채택한 지혜이다. 보통 다른 사람의 지혜를 자기 지혜로 수용하는 것은 무지로부터 생긴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어떤 이념, 신념, 종교를 가진 사회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그 사회의 주도적인 가치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또 지혜의 맹목적 수용은 내부의 탐욕으로부터 생기는 경우도 있다. 지도자들은 기존의 이념이나 전통적 믿음을 받아들이면 멋진 미래가 약속된다고 말한다. 혹은 신을 믿으면 죽은 다음에 모두 천국에 간다고 주장한다. 자연히 하늘의 축복은 매우 매력적이고 그래서 기꺼이 받아들인다. 또는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주장을 수용하는 경우도 있다. 정치 지도자들은 사회의 전통적 이념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만약 따르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한다. 또는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지옥에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의심하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하고 그 사회적 가치를 수용한다.
맹목적 믿음이나 갈망 두려움 때문에 수용하여 받아들여진 지혜는 그들 자신의 지혜가 아니며 그들 자신의 경험도 아니다. 그것은 빌려 온 지혜다.
지혜의 두 번째 형태는 지적인 이해(intellectual understanding)이다. 어떤 가르침을 읽고 들은 후에 그것이 합리적이고 유용한지를 조사한다. 만약 지적 이해의 수준에 만족한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진리로써 수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의 통찰이 아니라 오직 그가 들은 지혜의 지적인 이해일 뿐이다.
지혜의 세 번째 형태는 경험으로부터 일어나는 지혜로 진리의 개인적 실현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지혜이고 마음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그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참된 지혜이다. 세속의 문제에 있어서 경험된 지혜는 언제나 필요하고 유용하지는 않다. 세속의 문제는 연역(deductive erasoning)에 의해 사실을 확신하거나 또는 불이 위험하다는 다른 사람의 경고를 수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법(法)에 있어서는 경험된 지혜만이 본질이다. 오직 경험된 지혜만이 우리에게 조건지어진 행위로부터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얻거나 지적 탐구를 통해서 얻은 지혜가 우리를 경험의 지혜로 인도한다면 그것들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만약 의심 없이 기존의 지혜를 받아들여 단순히 만족한다면 그것은 경험의 지혜를 성취하는 데 장애가 된다. 또 우리가 지적 이해나 탐구로 단순히 진리를 숙고하는 데 만족한다면 우리의 모든 지적 이해는 자유의 출구가 아니라 우리를 지식의 노예로 만든다.
우리들 각자는 직접 경험, 수행을 통한 진리로 살아야 한다. 오직 살아 있는 경험만이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
그 밖의 어떤 진리의 실현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붓다, 그 자신의 자유일 뿐이다. 깨달음을 얻은 다른 스승도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그들에게 진리의 안내서를 제공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들 각자는 스스로 진리 실현의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말했다.
당신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진리를 이룩한 사람은 단지 그 길을 보여 줄 뿐이 다.(법구경)
진리는 오직 우리들 안에서 살아나고 경험된다. 그 밖의 어느 것도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오직 우리의 내면에서만이 직접 실재를 경험한다.
지혜의 세 형태 가운데 처음 두 가지는 붓다의 가르침의 특징이 아니다. 붓다 이전에도 이 두 가지의 형태는 존재했고, 붓다 시대에도 붓다는 무엇이나 가르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었다. 세계에 대한 붓다의 기여는 진리를 개인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며 경험적 지혜를 발전시키는 방법이었다. 진리의 직접적인 실현을 성취하는 길이 바로 비파사나 수행이다.
*비파사나 수행*
비파사나(vipassana)는 진리에 대한 갑작스런 통찰, 번뜩이는 직관으로 기술된다. 비파사나 수행을 보통 “직관의 개발”이라고 부른다. 낱말 passana의 의미는 “보는 것” 우리가 눈을 뜨고 보는 일상적 의미다. Vipassana는 자기 안의 실재를 관찰하는 특별한 통찰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의집중의 대상으로써 자신의 신체적 감각을 선택하여 성취된다. 이 기법은 자신의 감각을 조직적이고 냉철하게 관찰하는 방법이다. 이 관찰은 몸과 마음의 실재를 온통 다 드러낸다.
왜 감각(Sensation)을 주의집중의 대상으로 삼는가? 첫째로 우리가 실재(Rrality)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감각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상이 오관(眼耳鼻舌身)과 마음(意)에 접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은 세계를 만나는 문이며 모든 느낌의 기반이다. 어떤 무엇이 여섯 개의 감각과 접촉하면, 느낌이 발생한다. 붓다는 이 과정을 이렇게 기술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막대기 두 개를 서로 비벼대면 열이 나고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기분 좋은 경험의 결과로 유쾌한 느낌이 일어난다. 달갑지 않은 접촉의 결과로 불쾌한 느낌이 일어난다. 덤덤하게 경험된 느낌의 결과로 유쾌와 불쾌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덤덤한 느낌이 일어난다.(상응부)
마음이나 육체와 대상과의 접촉은 느낌의 불꽃을 산출한다. 이 느낌은 정신적 신체적 모든 현상과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이다. 경험의 지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로 경험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우리는 느낌에 대한 자각을 발전시켜야 한다.
더욱이 신체적 감각은 마치 호흡이 현재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고 있듯이 마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정신적 대상들, 생각 관념 상상 감정 기억 희망 두려움 등이 마음과 접촉하게 되면 느낌이 일어난다. 모든 생각 감정 정신의 행동은 육체 내의 상응하는 느낌에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적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역시 마음을 관찰한다.
느낌은 진리를 깊이 탐구하는 데 필수적이다. 세계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무엇이나 신체 안에서 느낌을 유발시킨다. 느낌은 육체와 정신이 만나는 교차로이다. 느낌은 육체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정신에서 느낀다. 죽은 시체나 생명 없는 물질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느낌이 없다. 만약 우리가 느낌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실재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피상적이고 불완전하게 남는다. 정원의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서 감추어진 뿌리를 찾아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들에게 대부분 감추어진 채로 남겨진 느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알고 그것을 적절하게 다루려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느낌은 모든 순간에 신체의 전 부분에서 일어난다. 모든 신체적, 정신적 접촉은 느낌을 만들어 낸다. 모든 생화학적 반응은 느낌을 유발시킨다.
일상생활 속에서 의식은 느낌을 자각할 만큼 필요한 집중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일단 호흡관법에 의해 마음을 예리하게 만들고 반응의 힘을 발전시키면 우리 내면에 있는 모든 느낌의 실재를 의식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에서 주된 노력은 호흡을 통제하고 단속하는 데 있지 않고 자연스런 호흡을 관찰하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비파사나 수행에 있어 우리는 단순하게 육체의 느낌을 관찰해야 한다. 우리는 체계적으로 신체의 전 부위, 머리에서 발끝까지 조심스럽게 주의집중을 옮겨가야지만 그러는 동안에 특별히 다른 형태의 느낌을 따라가지 않으며 다른 형태의 느낌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노력의 요점은 오직 신체에 나타나는 느낌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대상으로써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이를테면 열 차가움 행복 가벼움 떨림 수축 팽창 압박 고통 흥분 맥박 등이 될 것이다. 수행자는 특별한 느낌을 추구하기보다는 단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상의 신체적 느낌을 관찰한다.
느낌을 관찰하는 노력은 느낌의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원인은 앉은 자세에서, 신체적 허약이나 질병의 결과에서, 먹은 음식에서 오는 분위기적 조건일지 모른다. 느낌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관심 밖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을 집중하여 육체의 일부에서 일어나는 순간에 발생되는 느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 수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는 신체의 일부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 수 있다. 자각의 능력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미세한 느낌보다는 강한 느낌만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대로 신체의 모든 부분에 계속적으로 주의를 집중시키고 조직된 순서에 따라 의식의 집중을 움직여 본다. 우리는 보다 강한 느낌에 의해 과도하게 이끌어진 주의에 따라가지 않고, 의식적으로 선택한 대상에 주의를 고정시키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이제 우리는 순서적으로 신체의 각 부분에 의식을 집중하는 능력을 사용한다. 느낌이 분명치 않은 부분에서 우세한 부위로 뛰어 들어가지 않고 몇 가지 느낌 속에서 머뭇거리거나 다른 느낌으로 도망가지 않으면서 이렇게 계속 주의집중력을 키워 가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지점에 점차 이르게 된다.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에서 숨은 종종 무겁고 불규칙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점차 규칙적이고 조용하고 가볍고 미세해진다. 마찬가지로 비파사나 수행의 시작에서도 사람들은 오래 지속할 것 같은 강하게 덩어리진 느낌을 경험한다. 동시에 강렬한 감정이나 오랫동안 잊었던 생각과 기억들이 일어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정신과 육체의 불편함이 생긴다. 호흡관찰을 방해하는 탐욕 화 게으름 초조 그리고 의식의 장애물들은 느낌의 자각을 불가능하게 할 만큼 강력하게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마음의 고요와 예민함을 다시 얻기 위하여 호흡의 각성상태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참을성 있게 다시 집중을 획득한 수행자에게 이 모든 어려운 점이 첫 성공의 결과임을 이해해야 한다. 보다 깊이 숨은 조건지어진 것들이 자극을 받고 의식의 수준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점차로 어떤 긴장도 없이 지속적인 노력으로 마음은 고요와 집중을 얻는다. 강한 감정이나 생각이 지나가고 수행자는 느낌의 자각으로 되돌아온다. 반복되고 계속되는 수행으로 강한 느낌들이 통일되어 섬세한 것으로 녹아들고 마침내 대단히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단순한 떨림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느낌이 쾌락이든 불쾌이든 강한 것이든 약한 것이든 다양한 것이든 통일된 형체의 것이든 수행에는 관계가 없다. 단지 수행의 요체는 느낌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불쾌감이 주는 불안이든지 쾌락의 끌림이든지 간에 우리는 수행을 멈추거나 혼란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또 어떤 느낌에도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관찰하듯이 단지 우리들의 집착을 관찰하는 것이어야 한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그리고 괴로움*(*苦*)
느낌을 계속 관찰할 때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로 우리의 감각적 느낌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매 순간 신체의 모든 부위에서 느낌은 일어나고 모든 느낌은 변화의 표식이다. 매 순간 신체의 모든 부위에서 전자기적이나 생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 정신의 과정은 매우 빠르게 변화되고 신체변화로 나타난다.
이것이 몸과 마음의 본 성품, 실재이다. 이것이 변화이고 무상(無常, anicca)이다. 모든 순간에 몸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은 일어났다가는 사라지고 모든 순간에 정신의 기능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계속 작용한다. 신체나 정신의 우리 내부 모든 것은 외계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순간순간 변한다. 분명하게 이것이 진실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머리 속으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파사나 수행에 의해서 우리 몸의 구조 안에서 직접 무상(無常)의 실재를 경험한다. 일시적인 느낌에 대한 직접 경험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의 현상적 본성을 본다.
육체의 모든 부분, 정신의 모든 과정은 끊임없는 흐름의 과정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아(I)”는 언제나 변하는 과정의 결합일 뿐이다.
여기서 수행자는 또 하나의 기본적 실재, 진실한 나, 영원한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anatta)를 이해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헌신하는 에고는 정신과 육체적 과정의 결합,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하다. 깊은 심층의 수준에서 몸과 마음을 탐구해 보면 사람은 변화의 과정으로부터 독립된 본질, 영원한 실체는 없으며, 무상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본다. 오직 통제를 벗어나 변하는 비개인적 현상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기본적 실재가 분명해진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하며 무엇을 붙잡으려는 노력은 결국 곧 지나가 버릴 것을 붙잡아두려 하기 때문에 항상 괴로움(苦,dukkha)을 만들어 낸다. 무상하고 일시적인 환상일 뿐으로 통제로부터 벗어난 것들에 대한 집착(attachment)은 고통이다. 우리는 이런 집착이 고통스럽다고 우리에게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내면에서 그것이 고통임을 경험한다.
*마음의 평정*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불행을 막을 수 있는가? 어떻게 고통 없이 살 수 있는가? 대답은 이렇다. 습관에 길들어 반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관찰함으로써 가능하다. 어떤 경험은 선택해서 유지하려 하고 어떤 경험은 밀어내 피하려 하는 노력 대신에 단순하게 모든 경험을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마음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쉽고 간단하게 들린다. 그러나 한 시간 가량 좌선하려고 앉아 있으면 10분 후에 무릎이 아파 온다. 이때 우리의 의지적 작용(行)을 관찰해 보라. 우리는 이 고통이 싫어진다. 또 고통이 어디론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로 가지 않는다. 반대로 고통이 싫어지면 싫어질수록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신체적 고통은 이제 정신적 고통이 된다.
만약 이 순간에 우리가 신체적 고통을 관찰하는 것을 배운다면 잠깐이라도 “내”가 고통을 느낀다. 그것은 “나”의 고통이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또 우리가 의사처럼 환자의 고통을 검사하듯이 객관적으로 그 느낌을 검사할 수 있으면, 이 때 우리는 고통 그 자체의 변화를 보게 된다. 그것은 영원히 남아 있지 않는다. 매 순간 변하고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사라진다.
우리가 이것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해할 때 고통이 더 이상 우리를 압도하고 조정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 아마 그것은 재빨리 사라지거나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초연하게 고통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고통으로부터 상처받지 않는다.
*해탈의 길*
각성(awareness)과 마음의 평정(eguanimity)의 개발을 통해서 사람들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고통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무지의 어둠 속에서 마음은 좋고 싫은 것, 탐욕과 혐오로 모든 느낌에 대해서 의지적인 작용을 한다. 이런 집착은 고통을 가져오는 사건의 연결고리, 원인이 된다.
인과의 쇠사슬을 어떻게 끊어 낼 수 있는가? 아무튼 무지에서 시작된 과거의 행동으로 인하여 현재의 삶, 몸과 마음의 흐름은 출발했다. 이때 이 흐름을 멈추기 위해서 자살을 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죽이는 순간에 마음은 완전히 고통에 빠진다. 이런 행동은 행복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삶이 시작되면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면 감각경험의 기초가 되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뜻)의 육근(六根)을 파괴해야 하는가? 사람은 눈을 뽑아내고 혀를 잘라 내고 코와 귀를 도려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몸뚱이를 파괴시키고 마음(뜻)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자살이다. 이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육근(六根)이 불가능하다면 육근의 대상이 되는 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法) 등의 육경(六境)을 없애 버려야 하는가? 이것도 불가능하다. 우주는 셀 수 없는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을 모두 없앨 수 없다. 일단 육근의 감각들이 존재하면 그것에 상응하는 육경과의 접촉(contact)을 막을 수 없다. 접촉이 일어나자마자 그곳에는 반드시 느낌이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곳이 인과의 쇠사슬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지점이다.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과의 결정적 연결 고리는 “느낌”이다. 모든 느낌은 쾌락이나 불쾌를 발생시킨다. 이 순간 좋아함이나 싫어함의 무의식적 반응은 다양하고, 더욱 강렬해져 탐욕과 혐오 그리고 집착으로 발전하여 현재와 미래의 고통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결국 자동적으로 반복되는 맹목적 습관이 되다.
그러나 비파사나 수행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느낌을 각성하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수행자는 느낌에 대해 좋아함과 싫어함도 없이 냉정하게 조사한다. 그것에 새로운 느낌을 첨가하지 않고 모든 느낌에 대해 통찰(panna)만을 발전시킨다. “이것은 무상하다. 마땅히 변화될 것이다. 사라질 것이다.”
마침내 느낌의 사슬은 부서지고 고통은 멈춘다. 탐욕과 혐오의 새로운 반응은 없다. 그래서 고통을 야기할 어떠한 원인도 없다. 고통의 원인은 업(kamma), 즉 탐욕과 혐오의 맹목적인 반응, 정신적 행위(行, sankhara)이다. 마음이 한결같이 느낌을 자각하고 있을 때 여기에 무의식적인 선택은 없다. 고통을 만들어 내는 원인은 없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붓다는 말한다.
모든 행위는 무상하다. 그대가 참된 통찰로 꿰뚫어 이것을 안다면 이때 그대는 고통으로 부 터 초연해 진다. 이것이 정화의 길이다.(법구경)
여기서 상카라(行, sankhara)라는 낱말은 매우 넓은 의미를 가진다. 마음의 맹목적 의지작용을 sankhara라고 부르지만 그런 행동의 결과 역시 sankhara라고 부른다.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결과이다. 그러므로 가장 넓은 의미로 sankhara는 창조되거나 세계 내에서의 무엇을 뜻한다. 그래서 “형성되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우주 안에서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비파사나 수행에 의해 경험적 지혜로 이 명제가 관찰될 때, 고통의 원인이 사라졌기 때문에 고통은 사라진다. 수행자는 탐욕과 혐오의 맹목적인 의지작용을 포기한다. 이것이 자유의 길이다.
완전한 노력이란 어떻게 맹목적인 행위를 그만둘 것인가, 어떻게 새로운 행위(sankhara)를 만들지 않을까를 배우는 것이다. 하나의 느낌이 일어남과 동시에 좋아함과 싫어함이 일어난다. 이 흐름의 순간 우리가 sankhara의 작용을 깨닫지 못한다면 자꾸 반복되고 점차 강력해져 탐욕이나 혐오로 발전된다. 이렇게 발전된 무지상태의 탐욕이나 혐오는 마음을 압도하여 강한 감정의 덩어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감정을 붙잡아 보다 나은 판단으로 대치시킬 수 있다. 그 결과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주는 삿된 말과 행동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맹목의 순간에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고 현재와 미래에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맹목의 행위(行,sankhara)가 일어나는 순간의 지점을 알아챈다면 즉 우리의 느낌을 자각한다면 어떤 종류의 맹목적 충동이 일어나거나 강해지더라도 그것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좋고 싫은 감정도 없이 그 느낌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탐욕이나 혐오로 발전하여 우리를 압도할 만큼 강력한 감정으로 돌변할 기회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마음은 그대로 균형과 평화를 유지한다. 우리는 지금 행복하고 아무런 의지적 작용(行)이 없기 때문에 미래도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
신체 안에서 느낌을 자각할 때 동시에 한결같이 균형을 유지할 때 그 순간 마음은 자유롭다. 아마도 처음에는 명상수행의 시간이 잠깐일지도 모른다. 명상하지 않을 때는 마음이 느낌의 옛 습관에 빠져 탐욕과 혐오 그리고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반복하여 명상수행을 해가면 끝내 옛 습관은 무너지고 계속하여 평화로운 상태로 남을 수 있다. 이것이 고통을 멈추는 방법이다. 이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고통을 만들어 내는 부질없는 짓을 그만 두는 방법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 ; 왜 우리는 순서에 따라 육체에 대한 주의집중을 옮겨가야 하는가?
대답 ; 우리는 마음과 신체의 완전한 능력을 탐구하는 중이다. 이것을 위해 신체의 모든 부위에서 어느 곳도 빠뜨리지 말고 일어나는 것을 느끼는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만약 당신의 주의집중을 이곳저곳으로 마구 옮긴다면 자연히 강한 느낌 쪽으로 끌리게 된다. 따라서 당신은 신체의 다른 부위에 대해서는 게으름을 피우게 되고 미세한 느낌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게 된다. 당신의 관찰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며 피상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항상 순서에 따라 주의집중을 옮겨가는 것이 중요하다.
질문 ; 우리는 우리 느낌을 만들어 내지 않음을 어떻게 아는가?
대답 ; 당신 스스로 실험할 수 있다. 당신이 느끼는 느낌이 진실인지 어떤지를 의심한다면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명령을 하는 자기암시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느낌이 자기암시로 인하여 변한다면 이 느낌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이땐 모든 경험을 내던지고 잠깐 동안 호흡의 관찰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느낌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느낌이 당신의 의지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모든 의심을 버리고 그 경험이 진실하다고 받아들이라.
질문 ; 만약 이 느낌이 진실하다면 왜 일상생활에서 그것들을 느끼지 못하는가?
대답 ; 무의식의 수준에서 당신은 느낀다. 의식되는 마음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순간에 무의식은 육체 내부의 느낌을 느끼고 그것들에 반응한다. 이 과정은 온 종일 일어나고, 비파사나 수행에 의해서 당신은 의식과 무의식의 벽을 무너뜨린다. 당신은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의 정신적 신체적 구조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아채게 된다.
질문 ; 일부러 육체적 고통을 느끼는 데 열중한다면 그것은 매조키즘(masochism)처럼 들린다.
대답 ; 단순히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객관적으로 고통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맹목적인 습관의 반응 없이 관찰할 때, 자동적으로 마음은 고통의 현상을 뛰어 넘어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떨림적인 미묘한 마음의 성품을 꿰뚫어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이 마음의 미묘한 성품을 경험할 때 고통은 당신을 지배할 수 없다. 당신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때 당신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다.
질문 ; 그러나 고통은 신체의 일부에 혈액의 공급이 중단되었음을 표시한다. 이런 신체의 반응은 무시해도 좋은가?
대답 ; 이 수행은 몸에 해롭지 않고, 해롭다면 권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수행해 왔는데 이 수행으로 자신을 해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생각보다 우리의 몸은 유연하고 순응성이 좋다. 균형 잡힌 마음으로 그것에 직면한다면 고통은 사라진다.
질문 ; 여섯 감각의 문(六根) 이를테면 색에 대한 눈의 접촉, 소리에 대한 귀의 접촉을 관찰함으로써 비파사나 수행은 가능하지 않은가?
대답 ; 그렇다. 그러나 관찰은 느낌의 자각을 포함해야 한다. 여섯 개의 문에서 접촉이 일어날 때마다 느낌은 발생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맹목적인 의지가 작용(行)하는 지점을 놓치게 된다. 감각의 대부분은 접촉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때는 귀로 소리를 듣지만 또 어떤 때는 듣지 못한다. 그러나 심층의 수준에서 모든 순간에 마음과 물질의 접촉이 상존하고 계속적으로 느낌을 일으킨다. 이런 이유로 관찰된 느낌은 무상(無常)의 현실을 경험하는 가장 손쉽고 생생한 방법이다.
질문 ; 만약에 우리에게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단지 관찰만 한다면 어떻게 발전을 기할 수 있는가?
대답 ; 발전이란 당신이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있는지에 따라 측정된다. 당신은 느낌을 변화시킬 수 없고,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은 마음의 평정을 제외한 어떤 다른 선택도 없다. 무엇이 오면 그것은 쾌감이나 불쾌 등 이런 저런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면 당신은 확실히 수행의 길에서 진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맹목적인 의지작용(行)의 오랜 정신습관을 깨뜨리고 있다.
질문 ; 마음의 평정은 명상할 때만 가능하다. 어떻게 일상생활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
대답 ; 일상생활 속에서 문제가 일어날 때 잠깐 멈추고 균형 잡힌 마음으로 당신의 느낌을 관찰하라. 마음이 고요하고 균형을 이룰 때 당신이 결정한 것은 무엇이나 좋은 것이다. 마음이 균형을 찾지 못했다면 이때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오랜 습관의 반응이다. 당신은 부정의 반응들을 긍정적 행동으로 바꾸는 것을 배워야 한다.
## 두 개의 반지
돈 많은 노인이 두 아들을 남겨 두고 죽었다. 인도의 전통에 따라 당분간 그들은 한 집에 같이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로 결정했다. 모든 재산을 반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두 아들은 아버지가 매우 깊숙이 감추어 둔 작은 꾸러미 하나를 발견했다. 그 꾸러미 안에서 반지 두 개가 나왔는데 하나는 매우 가치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였고 다른 하나는 평범한 은반지였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자 형은 마음속으로 갖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 동생에게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가보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재산과는 별도로 보관하셨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집 보물로 계속 보관되고 앞으로도 계속 상속되어야 한다. 내가 장남이므로 이것을 보관해야겠다. 너는 은반지를 가지는 것이 좋겠다.”
동생은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지고 행복하게 사세요. 저는 은반지로 행복합니다.” 그들은 반지를 끼고 각자의 길을 떠났다.
동생은 혼자 생각했다. ‘아버지는 다이아몬드 반지의 가치가 높아 보관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은반지도 보관했을까?’ 그는 반지를 유심히 조사하고 반지에 새겨진 글씨를 발견했다. ‘이것도 또한 하나의 변화이다.’라고 그것은 아버지의 만트라(기도)였다. 그는 손가락에다 반지를 끼었다.
형제는 인생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봄이 왔을 때 형은 의기가 넘쳐 그 마음의 균형을 잃어버렸고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깊은 우울로 다시 균형을 잃었다. 그의 긴장은 결국 고혈압으로 발전했다.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수면제나 안정제 혹은 보다 강한 약을 사용했다. 병세는 전기 쇼크방법을 써야 할 단계까지 악화되었다.
은반지를 가진 동생은 봄이 오면 즐겼다.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반지를 보면서 “이것도 하나의 변화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날씨가 변화되기 시작하면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모든 것은 변화된다는 사실을 안다.” 가을이나 겨울이 왔을 때 다시 그는 반지를 보면서 “이것도 또한 변할 것이다.” 삶의 겨울도 다시 변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울지 않았다.
그렇다. 그것 역시 변화되고 사라진다. 모든 삶의 부침(浮沈)가운데서, 인생의 흥망성쇠 속에서 그는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은 변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고 행복하게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
## 8.## 깨어있음과 마음의 평정
깨어있음(慧)과 마음의 평정(定), 이것이 비파사나 수행이다. 이 양자를 함께 수행할 때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어느 한 쪽이 결여되거나 약하면 목표에 이르는 수행의 길에서 진보가 없다. 마치 새가 날기 위해서 양 날개가 필요하고 마차가 움직이기 위해서 두 바퀴가 모두 필요한 것처럼 각성과 평정은 똑같이 강해야 한다. 새의 한쪽 날개가 약하고 다른 쪽이 강하다든지 마차의 바퀴가 한 쪽이 작고 다른 쪽이 크다면 그것은 잘 날 수 없고 계속 앞으로 굴러갈 수 없다. 수행자는 수행의 길에서 각성과 평정의 길을 동시에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마음과 물질의 전체, 그 미묘한 본성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마음과 육체의 표면적인 움직임이나 사고에 주의 집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신체의 모든 부위에 걸쳐서 느낌을 자각하는 것과 더불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만약 마음의 평정 없이 느낌을 자각하기만 한다면, 내부의 느낌을 보다 잘 의식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예민해지고 그것에 습관적으로 반응함에 따라 고통을 더욱 증가시킬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마음의 평정만 있고 내적 느낌에 대한 자각이 없다면 이때의 마음의 평정이란 마음의 심층에서 진행되고 있는 습관적 반응을 감추고 있어 단지 표면적인 안정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성(慧)과 평정(定)의 양자를 동일하게 깊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내부에 발생하는 모든 것을 자각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의 변화를 이해하면서 그것에 습관적으로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지혜다. 자신의 성품을 이해하는 것, 자신의 내부에서 직접 진리를 경험하여 성취한 이해력, 이것이 붓다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함으로써 얻은 지혜”(yatha-bhuta naan-dassana)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혜로 인하여 사람들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발생되는 모든 느낌은 무상(無常)의 이해 안에서 일어나고 모든 탐욕과 혐오의 습관적 반응, 행(行,sankhara)은 멈춘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는 부질없는 짓거리를 멈추게 된다.
*과거의 습관적 반응의 축적*
각성과 마음의 평정은 새로운 반응, 고통의 원천을 만들어 내는 일을 멈추는 길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고통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이 있다. 순간순간 습관적 반응을 멈춤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오는 고통의 원인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각자는 과거의 습관적 반응의 총합, 조건지어진 그릇이다. 우리가 비록 새로운 축적을 만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축적된 과거의 습관적 반응(sankhara)은 우리에게 아직도 고통을 야기할 것이다.
Sankhara(행)이라는 낱말은 “형성”(formation)으로 번역된다. 다시 말하면 형성하는 행위나 형성되어진 행위를 포함한다. 모든 습관적으로 형성된 행위는 정신 과정의 연속된 결과의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새로운 정신적 행위의 원인으로써 첫 단계에도 해당한다. 모든 형성되어진 행위(sankhara)는 새로운 행위를 만들어 내는 과정으로써 조건지어진 것이고, 만들어지고 형성된 행위가 따르는 조건이다.
조건지어진 행위는 정신적 작용, 지각의 이차적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의식은 기본적으로 무분별이고 무차별이다. 이것의 목적은 단순히 육체나 마음에서 일어나는 접촉을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지각은 분별적이다. 어떤 새로운 현상을 평가하고 분류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한 자료에 의존한다. 과거에 형성된 행위는 새로운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가 된다. 우리는 과거의 형성되어진 행위(sankhara)에 비추어 새로운 경험을 판단하고 분류한다.
이런 과정으로 탐욕과 혐오의 오랜 시일에 걸쳐 형성된 습관들은 현재의 우리의 지각에 영향을 준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어두운 안경을 통하여” 본다. 안팎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과거에 형성된 조건들, 편견과 기호에 따라 물들고 왜곡되어 있다. 뒤틀린 지각에 따라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적인 느낌들은 곧장 평가되어 기쁨도 되고 불쾌한 것도 된다. 이런 느낌에 우리는 다시 지각을 왜곡시키는 새로운 조건화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형성된 의지적 반응은 미래의 행동을 형성하는 새로운 원인이 된다.
조건지어지고 미래의 조건이 되는 의지적 행위, sankhara의 이 두 가지 기능은 연기(緣起)의 사슬로 나타난다. 12연기의 두 번째 고리는 무명(無明) 다음의 행(行)인데, 이것은 오온(五蘊)의 첫 번째 식(識)을 일으키는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행(行,sankhara)은 식(識,consciousness), 상(想,perception), 수(受,sensation) 다음으로 오기도 한다. 곧 느낌(受)의 다음에 오는 탐욕과 혐오의 습관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탐욕과 혐오는 집착으로 발전하고 그것은 새로운 정신적 육체적 활동의 충동이 된다. 정신의 과정은 그 자체로 성장하여 간다. 모든 행(行)은 사건의 사슬에서 나와 새로운 행(行)으로 귀착된다. 이 새로운 행(行)은 또 다시 끝없이 반복되는 사건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순간 우리는 행동하는 정신의 습관을 강화시킨다. 탐욕과 혐오를 발전시키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그것들을 계속 발생시키려는 마음을 더욱 강화시킨다. 일단 정신 행위의 형식이 형성되면 우리는 그것에 붙잡히고 만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바라는 물건을 B라는 사람의 방해로 인하여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A는 B를 매우 나쁘게 볼 뿐만 아니라 B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믿는다. 이 신념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한 판단이 아니라, B가 자기의 욕망을 좌절시켰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 경험은 A의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B와 계속되는 모든 접촉은 이것에 물들여져 있고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다시 혐오감을 발전시켜 B에 대한 A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킨다. 비록 두 사람 사이의 만남이 20년 만이라 할지라도 A는 B를 보면 즉각적으로 불쾌감을 느낀다. B가 20년 동안 많이 변했지만 A는 B를 과거의 경험으로 평가한다. 정신의 반응은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B에 대한 맹목적인, 이미 형성된 편견에 기초를 둔다.
반대로 B가 A에게 A가 원하는 물건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하자. A는 B를 매우 선량하고 자기를 좋아한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B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결코 B의 성격에 대한 고려가 아니다. 이런 믿음은 무의식 속에 계속 남아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들의 접촉에 영향을 준다. A는 그 사람 자체에 반응하지 않고 처음에 형성된 B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에 반응한다.
이렇게 행(行,sankhara)은 즉각적으로 먼 미래에까지 반응을 일으킨다. 우리가 우리의 느낌, 즉 우리의 지각에 의해서 형성된 느낌들에 반응하면서도, 우리는 외적 대상을 다루고 있다고 착각한다. 비록 이 순간에 새로운 의지적 행위(行)를 멈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과거에 형성된 의지적 행위는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 이 축적된 습관에 따라 반응하려는 경향이 남아 종종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조건지어진 이 정신적 습관이 계속 남아서 저항을 하는 한, 우리는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떻게 과거의 습관적 행위를 지울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비파사나 수행의 과정을 보다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건지어진 것들의 소멸*
비파사나 수행에 있어서 우리의 작업은 단순히 신체의 각 부위에서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특별한 느낌에 관한 원인은 우리의 관심 밖이다. 즉 모든 느낌은 내적 변화의 징후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변화는 원천적으로 정신적이거나 신체적이지만 마음과 육체의 기능은 독립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분류할 수 없다. 육체나 마음은 어느 한 쪽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은 무엇이든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친다.
제2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몸은 모든 운동이 일어났다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소립자(Kalapas)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은 결합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 신체 느낌의 전 영역을 만드는 기본적 성격을 보여준다.
소립자가 일어나게 하는 네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사는 환경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신체에 영향을 주고 소립자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입자들은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는 정신적 반응 때문에 일어나고, 현재의 정신상태에 영향을 준 과거의 반응으로 일어난다. 움직이기 위하여 육체는 음식을 요구한다. 만약 육체에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즉시 그 기능은 멈춘다. 육체는 근육에 저장된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몇 주일 동안은 계속 유지될 수 있을 것이나, 모든 저장된 에너지가 소비되어 마침내 육체는 붕괴된다. 신체의 흐름은 끝장이 난다.
같은 이유로 마음은 의식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활동을 요구한다. 이 정신의 활동이 상카라(sasnkhara)이다. 조건지어진 생기(生起)의 사슬에 따라 의식은 상카라(sankhara)에서 온다. 각각의 정신의 반응은 의식의 흐름에 충격을 줌으로써 책임을 다한다. 육체가 하루 중 일정한 간격으로 음식을 요구하듯이 마음은 새로운 자극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것이 없다면 마음은 한 순간이라도 계속될 수 없다.
그러나 비파사나 수행자는 정신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을 하지 않는다. 주어진 순간에 그는 상카라(sankhara)를 만들지 않는다. 이때 정신의 흐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당장에 멈추지 않는다. 대신에 과거에 축적된 습관의 반응이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 둘 씩 미음의 표면에 나타난다. 과거에 조건지어진 반응이 일어나 기본적 의식에서 다른 형태로 변천해 간다. 조건화는 육체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입자의 조건지어진 특별한 형태에 의해서 나타나는데 이것을 육체 내부의 느낌으로 경험한다. 아마도 혐오를 야기하는 과거의 상카라(sankhara)는 입자로 그 자체를 드러내며, 그것은 육체 내부의 불쾌감으로 경험된다. 만약 그 느낌을 싫어하게 된다면 새로운 혐오감이 발생한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은 새로운 자극을 받기 시작하며 과거의 습관적 행위는 의식의 표면으로 오를 기회도 없어진다.
그러나 혐오감이 일어난다 해도 거기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상카라(sankhara)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과거의 습관적 상카라는 사라진다. 그러나 순간에 또 다른 과거의 상카라가 느낌으로 일어난다. 다시 여기에도 반응이 없다면 과거의 상카라는 사라진다. 이렇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 축적된 습관적 반응을 마음의 표면으로 떠올리고 계속하여 그것들은 느낌으로써 각성하게 되면, 우리는 과거의 조건지어진 것들을 점차로 소멸시킬 수 있다.
혐오에 대한 조건화가 남아 있는 한, 무의식적으로 마음은 일상생활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불쾌한 경험에 혐오감을 가지고 반응한다. 탐욕에 대한 조건화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은 기분 좋은 상황에서 탐욕스럽게 반응한다. 비파사나는 이런 조건지어진 반응을 제거한다. 수행을 할 때 우리는 계속하여 유쾌와 불쾌의 느낌을 만난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모든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탐욕과 혐오를 약화시키고 소멸시킨다. 어떤 형태의 조건지어진 습관적 충동이 제거되면 그 같은 형태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모든 조건지어진 반응이 하나씩 제거되면 마음은 완전히 자유롭다. 이 과정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건지어진 것들은 진실로 무상하다네.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들,
만약 이것들이 일어나고 또 사라진다면,
조건지어진 것들의 소멸이 참다운 행복을 가져온다네.(장부)
모든 상카라(sankhara)는 끊임없이 계속되고 반복되어 일어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지혜를 발전시켜 그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면 그 반복은 멈출 것이고 소멸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반응만 하지 않는다면 층층이 쌓인 오랜 상카라(sankhara)는 일어났다가 소멸 될 것이다. 상카라가 소멸된 만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우리는 행복하게 된다. 과거의 조건지어진 상카라가 모두 소멸되면 우리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 끝없는 행복을 누린다.
그러므로 비파사나 수행은 과거의 조건화된 행위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조건지어진 것들을 소거시키기 위한 정신의 단식이다.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이제는 깨어있음(慧,awareness)과 마음의 평정(定,equanimity)에 의해 우리는 행동하고 어떤 상카라(sankhara)도 발생시키지 않는 순간을 성취한다. 이 순간에 신념은 무엇이든 해 낼 힘이 있다. 수행자는 이때 거슬러 올라가는 역류의 과정, 정화의 과정을 걷기 시작한다.
이 과정을 촉진시키기 위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즉 우리는 새로운 습관의 반응을 삼가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느낌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그것들을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서 관찰해야 한다. 각성상태와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모든 행위는 마치 어두운 방을 비추는 등불처럼 과거의 습관적 충동을 자동적으로 제거할 것이다. 붓다는 자선사업을 했던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결론적으로 논평했다.
비록 대단한 자선 사업을 했더라도 그가 마음으로부터 깨달은 사람, 법, 성인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업의 과보(行,sankhara)를 받는다. 비록 그가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해도 그가 기꺼이 다섯 가지의 지각 표상(五蘊)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아직도 업의 과보를 받는다. 그가 비록 자선사업을 했더라도 소의 우유를 짜내면서 선의 의지를 발전시킨다면 그는 아직도 업의 과보를 받는다. 그가 비록 자선사업을 많이 했더라도 그가 다른 사람을 경멸하면서 무상의 깨달음을 발전시키는 것은 아직도 그는 업의 과보를 받는다. (증지부)
비록 매우 짧은 수간이지만 수행자가 신체의 내부에서 느낌의 실체를 자각했다면 그는 순간적 존재로서의 느낌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다. 짧은 순간조차 매우 강력한 효과를 가진다.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하여 계속 수행하여 간다면 마음의 평정은 강해지고 습관의 반응은 줄어든다. 점차 습관적인 마음의 행위는 부서지고 오랫동안 조건지어진 것들은 소멸되어 마침내 마음은 과거, 현재의 모든 맹목적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운 때가 온다.
*질문과 대답*
질문 ; 오늘 오후에 움직이지 않고 등을 곧바로 세우고 더 오랫동안 앉을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느낌을 느끼지 못했다. 느낌이 실재로 올 것인가? 아니면 처음의 자세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대답 ; 일부러 불편한 자세를 취하여 느낌을 만들지 말라. 그것이 수행에 적절한 방법이라면 우리는 고통스런 장소에 앉아야 할 것이다. 이런 극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체는 곧바로 설 수 있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느낌들은 자연스럽게 오게 하라. 그것들은 올 것이다. 그것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당신이 그것을 전에 느끼던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질문 ; 전 보다 더 미세한 느낌이 있었다. 처음에 움직이지 않고 조금 앉아 있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대답 ; 당신은 보다 편안한 자세를 발견하는 것이 좋다. 느낌들은 본성대로 그냥 두라. 아마 보다 강한 느낌들이 지나가고 이제는 미세한 느낌들을 다루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은 그것을 느낄 만큼 날카롭지 못하다. 마음이 더욱 날카로워지기 위해서 당분간 호흡을 관찰하라. 이것은 당신의 집중력을 높이고 미세한 느낌을 느끼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질문 ; 느낌이 거칠다면 더 좋겠다. 왜냐하면 오랜 상카라(sankhara)가 다가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답 ; 반드시 그렇지 않다. 어떤 충동들은 미세한 느낌으로 나타난다. 왜 거친 느낌만을 갈망하는가? 무엇이 오든지 당신의 일은 관찰하는 것이다.
질문 ; 우리는 느낌과 상카라(sankhara)가 결합되는 것을 검토해야 하는가?
대답 ; 그것은 힘의 낭비다. 그것은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옷의 얼룩이 왜 생겼는지를 “체크하기 위해” 멈춘 것과 같다. 이것은 당신의 일, 이것은 옷을 깨끗하게 세탁하는 일에 도움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세탁비누를 사용하여 옷을 잘 세탁하는 것이다. 세탁이 잘 되면 얼룩은 제거될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신은 비파사나의 세탁비누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사용하여 마음의 모든 얼룩을 제거하라. 만약 당신이 특별한 느낌의 원인을 찾아낸다면 당신은 지적인 게임을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무상(anicca)과 무아(anatta)에 관해 잊어버린다. 이런 지적 게임은 당신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질문 ; 나는 관찰하는 사람, 관찰되어진 것에 관해 혼돈에 빠졌다.
대답 ; 지적인 설명으로 당신을 도울 수 없다. 당신 스스로 조사해야 한다. 내가 ‘이것’을 하는 동안 ‘나(그)’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계속 조사하고 분석하라. 어떤 ‘나’가 나타나는지 보라. 만약 무엇이 나타나거든 그것을 관찰하라. 그 무엇도 오지 않으면 그땐 “오, 이 ‘나’란 환상에 불과하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질문 ; 조건지어진 정신적 행동 가운데 몇 가지는 긍정적이지 않는가? 왜 이것들을 모두 지우려 하는가?
대답 ; 긍정적 조건들은 우리에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동기를 준다. 그러나 이런 목적을 얻었을 때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을 버리게 된다. 마치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듯이 일단 강을 건너면 여행은 끝난다. 뗏목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것은 뒤에 남겨야 한다.(이 유명한 뗏목의 비유는 중부, 22에서 인용됨) 이처럼 완전한 자유에 이르면 조건지어진 것들은 필요가 없다. 사람은 긍정적으로 조건지어진 것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의 순수함 때문에 자유롭다.
질문 ; 왜 비파사나 수행을 시작할 때 불편한 경험을 하는가?
대답 ; 비파사나는 먼저 거친 충동을 제거하는 데 작용한다. 당신은 방을 청소할 때 먼저 모든 쓰레기와 휴지 조각을 치우고 쓸고 나서 계속하여 먼지를 닦아 낸다. 비파사나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마음의 거친 충동 등을 제거하고 미세한 먼지들은 쾌감으로써 경험된다. 열중하여 이 편안한 감각적 경험을 수행의 마지막 목표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당신은 모든 조건지어진 습관적 반응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든 느낌을 객관적으로 계속 관찰해야 한다.
질문 ; 당신은 우리가 더러운 속옷을 가졌고 또 그곳을 빨 수 있는 비누도 가졌다고 말한다. 나는 오늘 그 비누를 다 써 버렸다고 느낀다. 아침에 명상은 매우 힘이 있었지만 오후엔 화만 나고 희망도 없다고 느낀다. 마치 수행이 강해지면 내부의 적(아마도 자아인데)도 그만큼 강해져 나를 탈진시킨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것과 싸울 힘이 없다고 느낀다. 이렇게 열심히 싸우지 않아도 될 좋은 방법이 있는가?
대답 ;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 이것이 최상의 길이다. 당신이 경험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명상수행이 잘 되었을 때 마음은 균형을 이루고 그것은 무의식의 깊이까지 꿰뚫었다. 그런 결과로 과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 흔들려 마음의 표면으로 나왔다. 다음엔 앉아서 당신은 과거의 흐름과 대면해야 한다. 이때 마음의 평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적 의식이 당신을 압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의 균형이 약하다면 호흡을 관찰해 보라. 큰 물결이 왔을 때 당신은 닻을 내리고 그것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라. 호흡은 당신의 닻이다. 호흡과 함께하라. 폭풍은 지나갈 것이다. 무의식이 마음의 표층으로 나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청소할 기회를 가지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쉽게 지나갈 것이다.
질문 ; 실제로 고통이 없어도 수행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가?
대답 ; 만약 당신이 각성상태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한다면 그땐 고통이 있든지 없든지 당신은 확실히 수행에서 진보한다. 발전하기 위해서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고통이 없는 대로 받아들이라. 당신은 단지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라.
##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봄베이 가까이에 성인 같은 은둔자가 살았다. 그를 만난 사람은 그의 순수한 마음을 존경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완전히 자유를 얻었다고 했다. 은둔자는 이런 말을 듣고서 ‘과연 내가 완전한 자유를 얻었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면밀히 조사한 끝에 아직도 자신의 마음속에 충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 완전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있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있습니다. 붓다라고 부르는 고타마가 바로 그분입니다. 그는 사받티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으며 자유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은둔자는 ‘그 사람에게 가야 한다. 나는 그에게서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방법을 배우리라.’ 그래서 그는 봄베이에서 인도 중앙부를 가로질러 걸어서 마침내 인도 북부에 있는 사받티시에 도착했다. 사받티에 도착하자 그는 붓다의 수행처를 물어서 찾아갔다.
“그분은 밖에 나가셨습니다.”
한 승려가 대답했다.
“그분은 탁발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면서 쉬세요. 그분은 곧 돌아오실 것입니다.”
“아니오, 기다릴 수 없습니다.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그분이 간 길을 가르쳐 주세요. 나는 따라갈 것입니다.”
“정 그렇다면 그 분이 간 길을 알려드리지요. 좋으시다면 당신은 그 길을 따라가면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은둔자는 곧 바로 출발하여 도시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탁발하는 승려를 만났다. 그 승려에게서 풍기는 평화로움과 경이로운 조화의 분위기가 은둔자에게 이분이 붓다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주었다.
은둔자는 붓다에게 다가가서 절을 하고 그의 발에 손을 얹고 말했다. “저는 당신이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를 얻는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제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붓다는 말했다. “그렇다. 나는 자유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 그러나 적절한 시간도 장소도 아니다. 나의 수행처에 가서 기다리라. 곧 돌아가 가르쳐 주리라.”
“아닙니다. 저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반시간도 못 기다리겠다고?”
“저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반시간 후면 저는 죽을 것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가진 모든 신뢰는 30분 후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때 저는 이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 적절한 시간입니다. 제발 지금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붓다는 그 사람을 보고 말했다. “그렇다 그대는 시간이 없다. 곧 죽게 될 것이다. 그대는 지금 이곳에서 법을 받아야 한다.”
거리의 한 가운데서 어떻게 법(法)을 가르칠 것인가? 그러나 붓다는 몇 마디의 말을 해 주었고 그 말은 완전한 가르침이 되었다.
“보는 곳에서는 오직 보기만 해야 한다.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하는 곳에서는 오직 냄새만 맡고 맛만 보고 만지기만 해야 한다. 인식이 있는 곳에서는 오직 인식만이 있어야 한다.”
여섯 감각의 접촉으로 느낌이 일어날 때 아무런 평가도 조건지어진 지각도 없어야 한다. 일단 지각이 경험을 좋다 나쁘다 평가하게 되면 그는 맹목적인 습관의 반응으로 세계를 왜곡하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과거의 습관적 반응이나 평가를 멈추고 무의식의 반응도 없이 깨어있어야 한다.
은둔자는 매우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몇 마디의 말로도 충분했다. 그는 도로의 한 쪽에 앉아서 그의 주의를 자신의 내적 본성에 집중시켰다. 아무런 평가도 없이 아무런 무의식의 투사도 없이 그는 아주 단순하게 그 자신의 내면의 변화과정을 관찰하기만 했다. 몇 분이 지나자 그는 수행의 목표를 얻었다. 그는 곧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 9.## 수행의 궁극적 목표
“형성된 모든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상응부) 실재에 관한 이런 경험이야말로 붓다의 가르침에서 본질에 해당한다.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과정의 다발일 뿐이다. 우리의 고통은 실체가 없는 하루살이에 불과한 변화의 과정에 집착함으로써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이 과정의 무상(無常)한 본질을 직접적으로 깨닫게 되면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사라진다. 끊임없이 변하는 내면의 느낌과 생각들을 관찰하여 그 자체의 덧없는 본성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수행자가 할 일이다.
느낌과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에 따라가지 않고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는 대로 그냥 바라본다. 그러면 오랫동안 마음에 조건지어진 무의식이 표면으로 튀어나와 사라진다. 조건지어진 것과 집착이 멈추면 고통이 멈추고 우리는 자유를 경험한다. 이것이 오랜 기간동안 수행자에게 계속적으로 요구되는 작업이다. 길을 가는 모든 순간에 행복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계속되는 힘찬 정진을 요구한다. 오직 인내심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감으로 인하여 수행자는 마침내 마지막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궁극적 진리에의 통찰*
수행의 길에는 세 단계의 발전이 있다. 첫째는 단순히 어떻게 왜 수행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행법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자신의 성품의 깊이를 꿰뚫어 수행의 마지막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붓다는 모양, 형상, 색깔, 냄새, 고통, 쾌락, 사유와 감정, 인간의 외형적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붓다는 그것들이 궁극적 실재는 아니라고 말한다. 일상적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보다 미묘한 현상들로 구성된 커다란 형태만을 인식한다. 밑에 잠재된 구성요소는 보지 못하고 그 형체만을 보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형체의 차이점을 인식하게 된다. 또 분별하여 이름을 붙이면 편애와 편견이 생겨 좋아하고 싫어하기 시작한다.
탐욕이나 탐욕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전체적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사물을 깊이 관찰하여 표면적 현상의 배후까지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비파사나 수행이다. 신체의 여러 부위, 여러 가지 기관이나 손발 등,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자기를 검토하기 시작해야 한다. 자세한 관찰이 신체의 어느 부위는 견고하고 어느 부위는 부드러우며 어느 부위는 운동하고 어느 부위는 운동하지 않음을 밝혀 줄 것이다. 우리는 신체의 온도와 대기의 온도를 구별할 수 있다. 모든 이런 관찰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준다.
내면의 느낌을 자각함으로써 우리는 수행자로서 큰 발전을 이룬다. 이 발전은 우리에게 전에 무지의 상태로 남겨져 있던 미세한 순간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먼저 우리는 신체의 다른 부위에서 다른 형태의 느낌, 일어났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느낌들을 알아챈다. 비록 우리가 표면적 수준을 뛰어 넘는다 해도 우리는 아직도 표면적 현상의 통합된 형태를 관찰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탐욕, 성냄,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만약 우리가 부지런히 수행해 간다면 곧 우리는 느낌이 일어나는 내적인 장소에 도달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신체를 통하여 일어났다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미세한 느낌의 형태를 자각한다. 우리는 통합된 형태를 꿰뚫어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의 미세한 느낌을 인식한다. 우리는 계속 일어났다 사라지는 입자들의 덧없는 본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이제 우리는 내면에서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혈액이나 뼈, 액체나 고체 혹은 가스,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관계없이 오직 떨림의 덩어리로서 인식한다. 그리하여 분별하고 이름 붙이는 과정을 멈춘다. 우리는 우리 육체 내부에서 물질의 궁극적인 진리,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흐름을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정신과정의 표면의 현상이 미묘한 심층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좋고 싫은 느낌이 발생하는 순간, 그것은 과거에 조건지어진 것들에 기초한다. 마음이 좋고 싫음을 반응, 반복하는 다음 순간에 그것은 탐욕과 혐오감으로 발전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강화된다. 우리는 강한 정신의 반응만을 알아챈다. 이런 표면의 인식을 가지고 우리는 쾌락과 불쾌, 선과 악, 갈망과 혐오 사이를 분별하고 혹은 동일시하기도 한다. 물질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감정의 경우에 있어서도 내면의 느낌을 관찰하는 순간에 그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물질이 소립자의 미묘한 물결이듯이 강렬한 감정도 순간적인 좋고 싫음이 결합된 형태, 느낌의 순간적인 충동일 뿐이다. 일단 강렬한 감정이 미세한 형태로 녹아들면 그것들은 더 이상 압도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신체의 다른 부위에서 다르게 결합된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신체의 전 구조 내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통일된 미세한 느낌을 자각하는 데까지 진보한다. 바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느낌들로 인하여 그것들은 신체의 전체에서 흐르는 떨림의 물결로 경험한다. 우리가 신체의 구조 내에 의식을 집중하는 부위는 어디든지 일어남과 소멸됨의 과정을 깨닫는다. 하나의 생각이 마음에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신체의 느낌을 알아챈다. 마음과 육체의 거친 덩어리가 녹으면 우리는 물질, 육체 그리고 정신적 형성물이 궁극적으로 대단히 바른 속도의 떨림, 진동이라는 사실을 경험한다. 이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은 말한다.
온 세계는 불타오르고 연기 속에 파묻힌다.
온 세계는 불타오르고 끊임없이 진동한다.(상응부)
고통의 소멸상태(bhanga)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깨어있음(慧)과 마음의 평정(定)만이 필요하다. 마치 과학자가 현미경으로 배율을 높임으로써 보다 미세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듯이 깨어있음과 마음의 평정을 발전시킴으로써 수행자는 미세한 내적 변화를 관찰할 능력을 증가시킨다.
이런 경험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이 경험은 확실히 매우 큰 기쁨임을 알 것이다. 모든 번민과 고통은 사라지고 수행자는 평화로움, 행복, 은총을 느낀다.
정신-물리적 과정의 생멸을 경험할 때마다 수행자는 기쁨과 축복을 느낀다. 그는 불사를 얻는다. 현자들이 실현한 바와 같다.(법구경)
마음과 육체의 견고함이 소멸할 때 축복은 수행의 길에서 하나의 진보를 이룩한 것이다. 이런 기분 좋은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목적지에 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의 길에서 만나는 오직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마음과 물질을 뛰어넘어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하여 궁극적 진리를 체험해야 한다.
붓다(Buddha)라는 낱말의 의미는 명상수행을 통해서 우리에게 매우 명백하게 된다. 거친 내적 실재로부터 미세한 마음의 작용까지 그 변화를 꿰뚫음으로써 우리는 신체의 전 부위에서 일어나는 떨림의 흐름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때 갑자기 흐름이 사라지고 우리는 신체의 어떤 부위에서 강력하고 불쾌한 느낌을 경험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부위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상황에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반대로 변하는 흐름에 탐욕을 가진다면 비파사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기분 좋은 경험은 취하고 불쾌한 경험은 피하는 노력 속에서 비파사나를 변질시키고 있다. 일생 동안 계속될지도 모를 밀고 당기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무의식적 선택의 게임은 오직 고통을 초래할 뿐이다.
지혜가 증가함에 따라 소멸의 경험이 이후에서조차 거친 느낌들의 재현은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수행의 진보를 가르친다. 비파사나 수행의 목표는 느낌에 대한 특별한 경험에 있지 않고 마음을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데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느낌에 다시 반응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일이다. 우리가 느낌을 따르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 채로 남아 있다면 조건지어진 것들은 곧 사라지고 느낌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수단이 된다. 불쾌한 느낌들에 반응하지 않고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혐오감을 제거한다. 쾌락을 주는 느낌에 반응하지 않고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탐욕을 제거한다. 애매하고 멍한 느낌들에 반응하지 않고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무지를 제거한다.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느낌이나 경험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만약 수행자가 균형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선이다. 그러나 수행자가 마음의 균형을 상실하면 그것은 악이다.
이런 이해를 가질 때 우리는 모든 느낌을 조건지어진 것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의 마음의 평정, 곧 상카라-우펫카(sankhara-upekkha)로 알려진 단계로 점차 마지막 목표인 궁극의 진리 자유, 열반(涅槃,nibbana)으로 인도한다.
*자유의 경험*
자유는 가능하다. 인간은 모든 조건지어진 것,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붓다는 말했다.
물질의 전 영역 마음의 전 영역을 넘어선 경험이 있다. 그것은 이 세계도 아니요, 다음 세계도 아니요, 또 양자 모두의 세계도 아니다. 달도 해의 영역도 아니다. 이 경험을 일어남 발전함 거주함 소멸함 혹은 환생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것은 유지 발전 작용도 아니다. 이것은 바로 고통의 끝이다.(udana, 詩)
또 붓다는 말했다.
태어나지 않고 생성하지 않으며 창조되지 않고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만약 태어나지 않고 생성되지 않으며 창조되지 않고 조건지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면, 해탈은 태어나고 생성되고 창조되고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고 생성되지 않는 것 때문에, 해탈은 태어나고 생성되며 창조되고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 알려진다.(Udana)
열반은 단순히 인간이 죽은 후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서 그리고 지금 각자의 내면에서’ 경험되어질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부정적 경험(negative-experiene)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기술할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에 부정의 용어에 의해서 기술된다. 모든 언어는 정신과 물질의 영역을 다루지만 물질과 마음을 뛰어넘는 무엇을 기술하는 낱말이나 개념들은 아니다. 언어는 모든 범주의 구별을 정의한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함으로써만이 대상을 기술한다.
사실 열반(nibbana)을 기술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어떤 설명도 혼란을 가중시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반에 관한 논의나 토론보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붓다는 말했다.
“고통의 소멸, 이 거룩한 진리는 자기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상응부)
자유의 궁극적 실재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선 내면의 실재를 꿰뚫어 몸과 마음의 소멸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행자가 내면의 실재를 더욱 꿰뚫고 들어가면 갈수록 궁극적 진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단계적으로 밟아 가면 자연스럽게 열반을 경험하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을 갈망할 필요도 없고 그것이 과연 올 것인지 의심할 이유도 없다. 법(法,Dhamma)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정확하게 온다. 그것이 왔을 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깨달음의 일부는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조건지어진 것들의 축적의 정도에 달려 있고, 일부는 그것을 제거하려는 뜨거운 노력에 의존한다. 수행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일은 조건지어진 것에 따라 다시 반응하지 않고 각각의 느낌을 계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 진리인 열반을 경험할 때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열반을 향하여 진보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마음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안팎으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이 순간에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궁극적 진리에 도달한자, 붓다는 말했다.
“탐욕의 소멸, 생성의 소멸, 무지의 소멸, 이것을 열반(nibbana)이라고 부른다.”(상응부)
비파사나를 수행하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자유를 경험한다. 결국 법(Dhamma)은 미래가 아닌 지금 현 시점에서 효과가 있어야 한다. 모든 수행의 과정에서 수행의 은총을 경험해야 하고 모든 단계에서 직접적으로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이 순간에 조건지어진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은 평화롭다. 모든 순간이 우리를 완전한 자유의 순간으로 보다 가깝게 데려간다.
우리는 억지로 열반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 열반은 개발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열반으로 이끌기 위해서 여러 가지 덕, 마음의 평정 등을 발전시킬 수 있다. 작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관찰하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궁극적 진리를 꿰뚫는다. 마음에서 최고의 덕은 완전한 깨달음에 기초한 마음의 평정이다.
진실한 행복
언젠가 붓다는 참다운 행복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를 받았다. 그는 행복을 만들어 내는 건전한 행위를 열거했다. 모든 행복은 가족과 사회적 책임을 완수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번영에 기여하는 실천적 행동과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실천 행동 두 가지 범주로 나눈다. 자기 자신의 선은 다른 사람의 선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붓다는 말했다.
모든 인생의 소용돌이에 직면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혼란에 빠지지 않고 항상 견고함을 느끼는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숫다니파타)
무엇이 일어나든지 자기 자신의 육체와 마음의 세계에서든 혹은 거대한 외계에서든, 긴장하지 않고 탐욕과 혐오감을 가까스로 억누름도 없이 편안하게 마음의 깊이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으로 삶의 소용돌이에 우리는 직면할 수 있다. 모든 상황에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부족하거나 남거나 수행자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무상(無常)의 통찰로 오는 완전한 견고함을 느낀다.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주인이고 당신을 압도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웃으면서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완전한 균형이고 참다운 자유이다. 이것이 비파사나 수행을 통해서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참다운 마음의 평정은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초연함이 아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친숙함이나 인생의 문제를 도피하는 냉담이 아니다. 오히려 참다운 정신의 균형은 문제에 대한 완전한 자각에 기초한다.
탐욕과 혐오감의 결핍은 무감각한 무관심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유를 즐기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참된 마음의 평정은 “거룩한 무관심”(holy indifference)이라고 불러야 적절하다. 거룩한 무관심은 마음의 순결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맹목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마음은 처음으로 매우 생산적이고 창조적이며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마음의 균형과 더불어 순수한 마음의 또 다른 덕목이 생겨날 것이다. 선한 의지,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 다른 사람의 실패와 아픔을 함께 하는 자비, 성공과 행복을 기뻐하는 것, 이런 네 가지 덕목은 비파사나 수행에서 얻어지는 자연스런 결과이다.
전에는 항상 자기가 좋은 것은 가지려 하고 원치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자신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음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줌으로써 스스로 행복해짐을 이해한다. 그래서 좋은 것은 무엇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나누어 갖고자 한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평화를 경험함으로써 수행자는 이것이 가장 커다란 선(善)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수행자는 다른 사람이 이 선을 경험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비파사나 수행의 논리적 결론, 메타-바바나(metta-bhavana) 즉 다른 사람을 향한 선한 의지의 개발이다. 예전에는 말뿐인 봉사였고 마음의 깊은 곳에서 여전히 탐욕과 혐오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정도까지는 맹목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은 멈추고 깊은 이기주의는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선한 의지가 자연히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순수한 마음의 전체적인 힘과 이 선한 의지는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해 평화롭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창조하는 데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마치 어떤 화가가 팔레트(pelette)의 수많은 색깔 가운데 회색만을 사용하여 그림 그리고, 혹은 어떤 피아니스트가 오직 중앙의 도 음만을 연주하는 것과 같이, 마음의 평정을 수많은 인생의 다양성 속에서 오직 한 가지 의미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행하게도 사실 우리 자신의 피아노음은 조율되지 않아서 엉망이고 더더욱 그것을 연주하는 방법조차 모른다. 단지 우리는 자기표현이란 미명 아래 건반을 마구 두들김으로써 불협화음만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러나 악기를 다루는 방법을 배워 적절히 잘 연주한다면 이때 우리는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가장 낮은 음에서 가장 높은 음까지 우리는 키보드의 전 영역을 사용하여 우리가 연주하는 모든 악보가 조화롭고 아름다운 음악이 되도록 할 수 있다.
붓다는 마음을 정화하는 데 있어서 “완전한 지혜”를 얻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기쁨 평정 깨달음 완전한 이해 참된 행복”을 경험한다고 말한다.(장부) 균형 잡힌 마음으로 우리는 인생을 보다 잘 즐길 수 있다. 기분 좋은 상태가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완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현재의 순간에 완전하고 혼란되지 않은 깨달음을 가지고 또한 그 경험이 사라질 때도 어떠한 실망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것이 마땅히 완전히 변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면서 계속 미소 지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불쾌한 상황이 와도 우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변경시킬 길을 발견한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내부 문제가 아니라면 그때 우리는 이 경험이 곧 지나갈 것임을 알기 때문에 평화롭게 남을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이 긴장으로부터 자유롭게 됨으로써 우리는 보다 즐겁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미소는 집착이나 무지에서 나오지 않고 법(法,Dhamma)에서 온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찡그릴 수 없다. 고통이 없어지면 자연히 미소가 생긴다. 자유로워지면 자연히 미소가 생긴다.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그는 자연히 행복을 느끼게 된다. 평화, 평정 그리고 선한 의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미소, 모든 상황에서 밝게 나는 미소가 참된 행복이다. 이것이 법의 목적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 ; 신체적 고통처럼 정신적 강박관념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겠다.
대답 ; 단지 마음속에 강박관념이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그것은 깊이 억압되었다가 이제 의식의 수준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상세하게 조사하려 하지 말라. 단지 감정은 감정으로써 받아들이라. 그것과 함께 당신은 무엇을 느끼는가? 신체의 수준에서 감정은 반드시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느낌을 관찰하라.
질문 ; 이때 우리는 어떤 특별한 감정과 관계되는 느낌을 조사해야 하는가?
대답 ;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라. 당신은 느낌과 감정의 관계를 발견해 낼 수 없다. 그것은 쓸모없는 노력이다. 마음속에 감정이 있을 때 신체적으로 당신이 경험하는 느낌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 감정에 관계한다. “이 느낌은 무상하다.” “이 감정 또한 무상하다.”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단지 이렇게 느낌을 관찰하고 이해하라. 당신은 감정의 뿌리가 잘려지고 곧 사라짐을 발견할 것이다.
질문 ; 감정과 느낌은 같은가?
대답 ; 동전의 양면이다. 감정은 정신이고 느낌은 신체적이다. 실제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은 신체에 있어서 느낌들과 함께 일어난다. 이것이 자연 법칙이다.
질문 ; 감정 그 자체는 마음의 문제인가?
대답 ; 마음은 육체의 전체와 밀접하게 관계를 가진다.
질문 ; 의식은 육체의 모든 입자들 안에 있는가?
대답 ; 그렇다. 이것은 특별한 감정과 관계된 느낌이 왜 육체 안에서 일어나는지의 이유이다. 만약 당신이 신체의 전 부위에서 느낌을 관찰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감정에 관계된 느낌을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질문 ; 만약 우리가 앉아서 어떤 느낌을 느낄 수 없다면 이것은 수행에 있어 어떤 도움이 있는가?
대답 ; 만약 당신이 앉아서 호흡을 관찰한다면 그것은 고요하게 마음에 집중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느낌을 느낄 수 없다면 마음의 정화는 표면적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마음의 심층에서는 끊임없이 계속 무의식의 충동이 일어난다.
질문 ; 선생님께서는 학생이 열반(nibbana)을 경험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대답 ; 어떤 수행자가 실제로 열반을 경험했다면 그것을 체크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 때문에 선생님은 잘 훈련되어져야만 한다.
질문 ; 수행자는 어떻게 혼자 힘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대답 ; 그들의 삶에 변화가 온다. 열반을 진실로 경험한 사람은 성인다워지고 순수한 마음에 된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본적 오계를 파괴하지 않는다. 실수를 감추는 대신에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종교적 제사나 의식에 대한 집착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지 외적 형태나 실제의 경험이 없는 공허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를 가져다 준 길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가진다. 그들은 수행 이외의 다른 방법을 탐색하려 하지 않는다. 끝내 자아의 환상은 그들의 내면에서 사라질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열반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마음이 여전히 혼란되고 예전처럼 행동이 건전하지 못하다면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 그들의 삶은 진실로 열반을 상태를 보여주어야 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열반을 얻었다고 선언하거나 어떤 증명서를 발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학생이나 선생에게 자아를 강화시키는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학생들은 오직 깨달음의 면허증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선생이 면허증을 많이 발급하면 할수록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간다. 열반의 경험은 이차적인 것이 되고 면허증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된다. 이것은 미친 게임이다. 법(dhamma)은 오직 사람들을 순수하게 돕는다. 최상의 도움은 학생이 진실로 열반을 경험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선생과 그 가르침의 목적은 진정으로 사람을 돕는 것이지 그들의 자아를 밀어 올리는 것이 아니다.
질문 ; 정신분석과 비파사나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대답 ; 정신분석은 마음속에 조건지어지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과거의 사건으로 의식을 되돌리려고 한다. 반면에 비파사나는 실제로 조건지어지기 시작하는 마음의 깊은 장소로 수행자를 데려가려 한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려는 사건은 신체의 수준에서 느낌으로 나타난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전체의 전 부위에 걸쳐 신체의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수행자는 조건지어진 수많은 무의식의 층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도록 허락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조건지어진 것을 그 뿌리부터 처리하여 그것으로부터 그 자신을 해방시킨다.
질문 ; 무엇이 진실한 자비인가?
대답 ;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소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집착도 없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슬픔에 울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법의 길이 아니다. 만약 참된 자비를 가진다면 그때 모든 사람과 함께 당신의 최선을 다하여 돕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봉사의 결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균형 잡힌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참된 자비이다.
질문 ; 비파사나 수행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할 것인가?
대답 ;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검토하고 조건지어진 것을 제거함으로써 성취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비파사나이다. 이런 방법을 당신이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결코 비파사나를 들어본 적이 없는 수행자들이 자발적으로 그와 같은 수행의 과정을 해 나간다. 이런 경우는 인도의 많은 성자들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들은 단계적 과정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 빈 병에 기름 채우기
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빈 병과 10루피를 주고 가까운 상점에서 기름을 사오라고 했다. 소년은 상점에 가서 병에 기름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만 기름병을 떨어뜨렸다. 다시 소년이 병을 집어 들었을 때는 기름이 땅에 흘러 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울면서 소리쳤다. “기름 반을 잃어버렸어요. 반이나 잃어버렸다니까요.” 그는 매우 기분이 나빴다.
어머니는 둘째 아들에게 병과 10루피를 주고 기름을 사오라고 했다. 그도 역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병을 떨어뜨렸다. 기름은 땅에 흘러 반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매우 행복해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께 말했다. “보세요. 저는 기름을 반쯤 구해 냈어요.” 두 사람은 똑같은 상황으로 어머니께 돌아왔다. 그러나 한쪽은 반병이기 때문에 울었고 다른 한쪽은 반병이나 구해 낸 것에 기뻐했다.
그때 어머니는 또 다른 아들에게 병과 10루피를 주고 기름을 사오라고 심부름시켰다. 그도 역시 돌아오는 길에 기름병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기름 반 정도를 버렸다. 그는 두 번째 아들처럼 행복하여, “ 어머니, 저는 기름 반 정도를 구해 냈어요.” 그러나 이 소년은 비파사나를 수행하는 소년이었다. 그는 낙천주의자였고 실재론주의자였다. 그는 기름 반병을 구해 냈으나 반병을 잃어버렸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어머니께 말했다. “나는 시장에 가서 온 종일 일하겠어요. 나는 병에 가득 채울 기름값을 벌겠어요.”
이것이 비파사나이다.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반대로 낙천주의자이며 실용주의자이다. 특히 그는 일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 10.## 삶의 지혜
우리들 자신에 관한 편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자아가 있다”(There is self)는 것이다. 이 같은 가정에 의해서 우리들 각자는 자아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또 우주의 중심으로 삼는다. 모든 무한한 세계 가운데 자아만이 오직 유일하다. 비록 셀 수 없는 많은 존재 가운데 오직 자아만이 유일하다는 것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한다 해도, 우리는 자아의 존재와 그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자아를 과장시킨다 해도 시간과 공간의 광대함에 비교하면 그것은 하찮은 것으로 남는다. 자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분명하게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한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자아의 성공을 이룩하는 데 바친다.
그러나 자아의식이 고뇌임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가 얼마나 큰 병통인지를 안다. 우리가 갈망과 공포, 자기정체성(identity)에 열중되어 있는 한, 우리는 세계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자아의 감옥에 갇혀있을 뿐이다. 이런 자기 망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속박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이고, 우리를 세계 속으로 뛰어들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삶에 있어서 진정한 성취를 발견하는 길이다. 필요한 것은 자기 부정이나 자기 억압이 아니라 잘못된 자아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런 해방의 길은, 자아라고 불리는 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 하루살이의 파동에 불과하다는 자각에 의해서 비롯된다.
비파사나 수행은 이런 자각을 얻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 육체와 마음의 순간적 변화의 본질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의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단 고정되고 영원한 것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면 “나”라는 고집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고통은 엷어지고 마침내 없어진다. 수행자에게 자아와 세계의 수난적인 본성인 무상(無常, anicca)에 대한 자각은 자유로 향한 문을 여는 열쇠다.
무상(impermanence)은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꿰뚫는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그는 말했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삶의 본성을 알고 살아가는 단 하루가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천년의 삶 보다 더 낫다.(법구경)
그는 무상함의 자각을 농부의 쟁기에다 비유했다. 그것은 농부의 쟁기처럼 밭을 갈 때 모든 뿌리를 잘라 낸다. 무상에 대한 깨달음은 모든 대들보 가운데 가장 높은 지붕의 용마루이며 모든 신하들을 지배하는 힘 있는 왕이며 별들의 빛을 압도하는 달빛이며 모든 어둠을 쫓아내는 밝은 태양이다.(상응부)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은 “모든 형성되어진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 부지런히 정진하라.”(법구경) 였다.
무상(anicca)의 진리는 단순히 지적인 이해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또 감정이나 헌신만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다. 오직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상의 진실을 경험해야 한다. 무상과 자아 그리고 고통의 환상적인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가 자유로 인도하는 참된 통찰을 구성한다. 이것이 올바른 이해이다.
수행자는 계(계, sala), 정(定, samadhi), 그리고 혜(慧, panna)의 실천으로써 이 자유로운 지혜를 경험한다. 만약 이 세 가지를 닦지 않는다면, 또 길을 따라 단계적으로 밟아 가지 않는다면, 수행자는 참다운 통찰,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 비록 수행을 시작하기 전이지만 수행자는 몇 가지의 지혜, 고통(苦)에 대한 지적 인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표면적 수준이라고 해도 그와 같은 이해가 없다면 고통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할 수행에 대한 발심(發心)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올바른 이해(正見, right understanding)가 최우선한다.”고 붓다는 말했다.(중부)
사실 팔정도의 첫 번째 단계는 올바른 이해(正見)와 올바른 사유(正思)이다. 우리는 문제를 알고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결정한다. 오직 이때야말로 법의 실제적인 실천이 가능하다. 우리의 행위를 삼가는 계행(戒行)을 지키는 도덕적 훈련으로부터 수행은 시작된다.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집중력(定)을 발전시키고, 신체의 전 부위의 느낌을 관찰함으로서 우리는 조건지어진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경험적 지혜(慧)를 발전시킨다.
첫 단계로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참다운 이해가 일어났을 때 올바른 이해가 생겨난다. 비파사나 수행을 통하여 자아의 본성을 자각함으로써 수행자는 탐욕 혐오 그리고 무지로부터 자유롭다. 이 같은 순수한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준다는 생각조차 불가능하다. 그의 생각은 선한 의지와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로 가득 차 있다. 말 행동 그리고 생활에서 그는 불평이 없고 성실하며 평화롭게 살아간다. 도덕의 실천으로 얻어진 마음의 평정은 보다 쉽게 집중을 가능케 하고 집중이 강하면 강할수록 지혜는 더욱 깊어진다.
서로를 돕는 계(戒), 정(定), 혜(慧)의 훈련은 다리가 세 개 있는 삼각대와 같다. 세 개의 다리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삼각대는 설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계(戒, sila), 정(定, samadhi), 혜(慧, panna)를 동일한 국면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바른 이해에서 올바른 생각이 나오고, 올바른 생각에서 올바른 말이 나오고, 올바른 말에서 올바른 행동이 나오고, 올바른 행동에서 올바른 생활이 나오고, 올바른 생활에서 올바른 노력이 나오고, 올바른 노력에서 올바른 각성이 나오고, 올바른 각성에서 올바른 집중력이 나오고, 올바른 집중에서 올바른 지혜가 나오고, 올바른 지혜에서 올바른 자유가 나온다.(상게서)
비파사나 수행은 수행의 가치를 지금 현시점에 둔다. 일상생활에서는 마음의 평정을 위협하는 셀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 기대하지 않던 반대, 어려움 등을 만난다. 결국 비파사나를 배우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보증이 아니다. 항해사가 항해 기술을 배우는 것은 오직 순조로운 항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폭풍이 오고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을 피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자기 패배이다. 반대로 적절한 훈련은 폭풍을 돌파하도록 도와준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무지는 우리로 하여금 외적 사건이나 사람을 비난하게 하고 그것들을 두려움의 근원으로 간주하고 모든 힘을 외적 상황의 변화에 쏟는다. 그러나 비파사나 수행은 우리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의 책임은 우리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한다. 문제는 맹목적인 습관의 반응(行)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조건지어진 맹목적인 충동이라는 내적 폭동에 주의 집중해야 한다. 단순히 무의식의 반응을 멈추려는 결심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조건지어진 것들이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한 조만간에 그것은 일어나 마음을 뒤흔들고 모든 결심을 압도해 버릴 것이다. 오직 참다운 해결은 그것을 관찰하는 법을 배워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는 대단히 쉽다. 그러나 이것을 실행에 옮기기는 매우 어렵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관찰하는가이다. 부정적인 충돌, 공포, 화 혹은 질투 등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관찰하기도 전에 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 말하고 행동해 버린다. 그리고 나중에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에야 실수를 깨닫고 후회하곤 하지만 다음에도 똑같은 행위를 계속하여 반복한다.
화가 나기 시작할 때 그것을 관찰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라. 관찰하려는 순간에 화를 나게 만든 사람이나 상황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여기에 머무르는 것을 화를 더욱 돋우는 것이다. 어떤 원인이나 상황으로부터 독립된 감정의 관찰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닌 능력을 벗어난다.
그러나 마음과 물질의 궁극적인 실재를 탐구함으로써 붓다는 무의식적 충동이 일어날 때 마다 신체에 두 가지 형태의 변화가 일어남을 발견했다. 하나는 호흡이 거칠어지는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미세한 현상으로써 생화학적 반응인 느낌이 신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보통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 적절한 훈련을 한다면 쉽게 호흡과 느낌을 관찰할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 이곳은 우리에게 부정적 무의식의 충동이 위험한 수준으로 발전하기 전에 발견하여 변화시킬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호흡과 느낌을 관찰한다면 쉽게 부정적 무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물론 무의식적 충동의 습관은 매우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당장에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비파사나 수행을 완벽하게 한다면 적어도 몇 가지 정도는 무심코 그 충동에 따르지 않고 쉽게 자기 자신을 관찰할 수 있다. 점차 관찰의 순간이 증가하면 무의식의 충동이 일어나는 횟수가 줄어들 것이다. 비록 부정적인 반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강도와 시간은 최소화된다. 대단히 자극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호흡과 느낌을 관찰할 수 있고 균형과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마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의 평온과 균형을 가지고 사람은 처음으로 참다운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참다운 행동은 항상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부정적 행위에 대한 무의식의 동일한 보복 대신에 우리는 보다 유익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 무지한 사람은 덩달아 화를 내고 결국은 양자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는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균형과 평화를 유지한다면 그 사람이 분노로부터 문제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다룰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우리는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부정적 무의식의 충동에 우리가 압도당하게 되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정적 무의식의 충동을 볼 때마다 그들이 고통 받고 있음을 이해한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들 스스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울 수 있다. 우리가 평온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행복하고 평화롭도록 도울 수 있다.
깨어있음과 마음의 균형을 개발하는 것은 식물처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내적 평화의 추구에 열중하는 동안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는다. 법(法)은 자신의 번영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번영에도 책임을 지도록 가르친다. 항상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는데 필요한 행동을 취한다. 모래 웅덩이 속에 빠지는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 어리석은 사람은 당황한 나머지 어린이의 앞뒤로 뛰어다니며 결국 그도 빠져 버리고 만다. 현명한 사람은 조용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아이에게 닿을 수 있는 나뭇가지를 찾아내어 아이를 구출한다. 탐욕과 혐오의 웅덩이에 빠지는 사람과 함께 당황하면 그를 도울 수 없다. 우리는 견고한 정신적 기반 위로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
인생에 있어 종종 강력한 행동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로 그의 실수를 설명하려 하지만 강력한 말과 행동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은 충고를 무시한다. 이런 때 강력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행동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만약 사랑과 자비가 있다면 그 행동은 도움을 줄 것이다. 만약 사랑과 자비가 없다면 진정으로 누구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랑과 자비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결코 나쁘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를 보았을 때 그 같은 불건전한 행동을 멈추게 할 책임을 느낀다. 비록 약자에게는 동정을 공격자에게는 화를 낸다고 하더라도, 비파사나 수행자는 약자에게는 강자의 피해를 공격자는 스스로 불건전한 행동으로 인한 상처를 막아야 함을 알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연민을 느낀다.
강경한 행동을 취하기 전에 마음을 검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나중에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만약 우리 스스로 안으로부터 평화와 조화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평화와 조화를 조장할 수 없다. 우리는 깨어있음과 마음의 평정을 수행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해 일한다. 만약 세계의 전체적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위해 건전한 행위를 실행할 것이다. 진실로 마음의 평정은 모든 침묵에 의해서 여러 방향으로 좋은 영향을 멀리 미친다.
결국 정신적 부도덕성은 세계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뿌리이다. 마음이 순결할 때 무한한 삶이 앞에서 열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참다운 행복을 즐길 수 있다.
*질문과 대답*
질문 ; 나는 요가(Yoga)를 실천한다. 어떻게 이것을 비파사나와 결합시킬 수 있는가?
대답 ; 본 명상센터에서 요가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서 당신은 비파사나와 요가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요가 자세의 신체적 연습과 호흡의 연습의 조절을 실천할 수 있다. 요가는 육체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 당신은 요가와 비파사나를 결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자세를 취하고서 신체의 느낌을 관찰한다. 이것은 요가만 했을 때 보다 더 큰 효과를 줄 것이다. 그러나 주문과 영상을 사용하는 요가 수행법은 비파사나 수행법과는 완전히 반대된다. 비파사나와 요가를 섞지 말기 바란다.
질문 ; 비파사나 호흡법과 요가의 호흡법은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대답 ; 요가의 호흡법은 신체적 연습으로 도움을 주지만 비파사나의 호흡관법(anapana)과는 섞지 말라. 비파사나 호흡관법은 호흡을 조절하려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호흡을 관찰해야 한다. 요가의 호흡조절은 신체적 연습이지만 비파사나의 호흡은 명상을 위한 수행이다.
질문 ;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집착, 끓어오르는 야심이 아닌가?
대답 ; 그렇다면 당신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당신이 집착하는 한 당신은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단순히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라. 이 순간의 실재(reality)를 계속적으로 관찰하라. 그러면 깨달음은 온다. 그것이 오지 않는다 해도 당황하지 말라. 오직 당신은 당신의 수행만을 계속하라. 그 결과엔 관심을 두지 말라. 만약 이렇게 수행해 간다면, 당신은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깨달음은 틀림없이 올 것이다.
질문 ; 이땐 오직 정진만 해야 하는가?
대답 : 그렇다. 당신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 당신의 책임이다. 책임을 다하라. 그러나 집착하지 말라.
질문 : 이것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가?
대답 ; 아니다. 오는 것은 그 자체로 온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질문 ; 아이들에게 법(Dhamma)을 가르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답 ; 가장 적절한 시기는 태어나기 전이다. 임신 기간동안 어머니가 비파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면 아이는 그것을 받아서 법의 아이(Dhamma Child)가 태어난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있다면 그들에게 법을 가르칠 수 있다. 예를 들면 비파사나 수행의 결과로써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평화와 조화를 나누어주는, 다른 사람을 향한 선의 의지(metta bhavana)를 배웠다. 만약 당신의 아이들이 어리다면 명상이 끝날 때마다 혹은 잠잘 시간에 그들에게 직접 당신의 선한 의지, 사랑을 주라. 이런 식으로 그들은 당신의 법의 수행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그들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조금씩 법(Dhamma)을 설명하라.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몇 분씩 호흡관법을 가르치라. 결코 강요하지 말라. 단지 당신과 함께 앉아 있도록 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 스스로 건강한 법의 삶(Dhamma Life)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당신의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귀감이 된다. 가정에서 당신은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돕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어린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다.
질문 ; 경이로운 법(Dhmma)에 감사드린다.
대답 ; 법(Dhmma)에 감사를 바친다. 법은 위대하다. 나는 오직 하나의 뗏목에 불과하다. 또한 그대 자신에게도 감사하라. 당신은 매우 열심히 정진했다. 그래서 삶의 기술을 이해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행복하게 살라. 그리고 뜨겁게 노력하라.
## 괘종소리
이 경이로운 수행법이 원형의 형태로 2천여년 동안 보존되어 온 곳, 법(法)의 땅, 버마에 태어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백여년 전에 나의 할아버지는 인도에서 이곳에 정착했다. 그래서 나는 이 나라에 태어났다. 사업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십대부터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돈 버는 것이 인생에서 나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다행이 일찍부터 많은 돈을 벌었다. 만약 부자의 생활을 스스로 알지 못했다면 나는 그와 같은 삶의 공허함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만약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마음 한 구석에서 참된 행복은 부에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부자가 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이나 특별한 지위가 주어진다. 그들은 여러 조직의 책임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사회적 특권을 추구하는 이 미친 짓을 시작했다. 그 자연스런 결과로 바쁜 생활의 긴장은 신경증과 심한 편두통을 야기했다. 밤마다 이 증세로 고생했다. 그러나 이 병의 발생은 큰 행운이었다.
버마의 가장 좋은 의사조차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처방은 고통을 진정시키는 모르핀을 투여하는 것이었다. 밤마다 나는 모르핀주사를 요청했다. 그리고 메스꺼움, 구토, 신경쇠약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았다.
몇 년이 지나서 의사들은 “지금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모르핀주사를 맞고 있지만, 만약 계속 투여한다면 곧 모르핀에 중독 되고 당신은 매일 모르핀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나는 앞으로 계속될 고통을 예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의사는 충고했다. “우리는 당신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당신은 사업상 외국에 종종 나가므로 위험한 모르핀 보다 중독증이나 후유증이 없는 다른 진통제를 구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당신 건강에도 좋다.”
의사들의 충고에 따라 나는 스웨덴 독일 영국 미국 그리고 일본 등지를 여행했다. 나는 이들 나라에서 최상의 의사들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병을 치료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것을 행운으로 여기나 나는 떠날 때보다 더 악화되어 돌아왔다.
내가 참담한 상태로 되돌아왔을 때 친한 친구가 내게 와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비파사나 수행의 10일 수련코스에 참가해 보지 않을 텐가? 인품이 고결하고 정부의 고위 공무원이며 자네처럼 가정을 가진 우바킨(U Ba Khin)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는데, 이 수행은 마음의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고 하네. 자네의 병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 수행생활이 자네의 병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병을 고치려고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명상을 가르치는 이 선생님을 만나 보기로 했다. 나는 곧 명상센터로 찾아가 이 비범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 그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저는 당신의 비파사나 수행코스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좋다. 10일 수련코스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그대를 환영한다.”
나는 계속하여, “저는 몇 년 동안을 치료할 수 없는 편두통으로 고생해 왔습니다. 이 수행을 통해서 병을 고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안된다.” 그분은 갑자기 말했다.
“이곳에 오지 말라. 그대는 이 수행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나는 그분이 왜 단호해졌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분은 곧 자비로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법(法, Dhamma)의 목적은 신체의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병원으로 가는 것이 더욱 좋겠다. 법(Dhamma)의 목적은 모든 삶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다. 당신의 그 병은 매우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병은 곧 지나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정화과정에서의 부산물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첫 번 부산물로써 병이 치유된다면 그때 당신은 법(Dhamma)을 높게 평가하지 못할 것이다. 법의 목적은 신체의 치유가 아니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는 나를 안심시켰다. “이제 저는 이해합니다. 오직 마음의 정화를 위해 오겠습니다. 병의 치료와 관계없이 나는 이곳에서 본 평화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분에게 나는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10일 수련코스에 참여하는 것을 미루었다. 독실하고 보수적인 힌두교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그대 자신의 본성, 그대 자신의 종교 안에서 죽는 것이 좋다. 결코 다른 종교로 가지 말라.”라는 시를 암송하면서 자랐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불교는 다른 종교가 아닌가? 그리고 불교는 무신론자들이다. 그들은 신과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마치 신이나 영혼을 믿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양) ‘만약 내가 무신론자가 된다면 그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오, 아니다. 나는 나의 종교 안에서 죽는 것이 좋다. 불교의 수행센터에는 가지 않으리라.’
몇 달 동안 이렇게 주저했다. 그러나 마침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기 위해서 명상수행법을 배워 보기로 결정했다. 나는 10일 수련코스에 참여하여 그 코스를 끝마쳤다. 나는 대단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성, 나 자신의 길, 다른 사람들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직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 자신을 관찰할 능력을 가진다. 동물은 자신을 관찰할 능력이 없다. 자기 내면의 실재를 관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만약 우리가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면 그때 우리는 낮은 수준의 삶을 살고 우리의 삶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항상 스스로를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모든 필수적인 의무를 실천했으며 도덕 규칙에 따라 많은 자선을 했다. 만약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면 왜 그렇게 많은 종교단체의 장 노릇을 했을까? 확실히 나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내가 많은 자선과 봉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또 비록 내가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어두운 상자를 관찰하기 시작했을 때 끊임없이 고통을 만들어 내는 교활함 오만 등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했다. 지금은 불건전한 삿된 생각들이 점차 소멸됨에 따라 평화를 누리기 시작했다. 나는 법(Dhamma)의 보물인 이 경이로운 수행을 배운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깨달았다.
14년 동안 나는 선생님의 친절한 지도 아래 버마에서 비파사나 수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 하면서 동시에 아침과 저녁으로 계속 명상수행을 하고 주말이면 선생님의 명상센터에 찾아갔다. 그리고 해마다 10일 수련코스에 참가했다.
1969년 초 나는 인도를 여행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몇 년 전에 인도를 가셨다. 어머니는 비파사나 수행을 통해서 고칠 수 있는 신경병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어머니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인도에는 없었다. 비파사나 수행의 발생지인 인도에는 이 수행법이 사라진 지가 오래 되었고 이름조차도 잊어버렸다. 나는 내가 인도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한 버마 정부에 감사한다. 당시엔 일반 시민의 외국 여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1969년 6월에 첫 비파사나 코스를 봄베이에서 열었다. 부모님과 12명이 참여했다. 부모님에게 법(Dhamma)을 가르침으로써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어 기뻤다.
인도에서 나의 목적이 달성되면 버마로 되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이 수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명상코스가 운영되기를 열망해 왔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 남편 자식들 그리고 친구들을 위한 명상코스의 신설을 원했다. 그래서 그때 두 번째 10일 수행코스를 열었고, 다시 세 번째 네 번째의 과정으로 법(Dhamma)의 가르침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1971년 보디가야에서 명상수행코스에 참여하고 있을 때 나는 나의 스승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랑군(Rangoon)으로부터 받았다. 물론 이 소식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너무나 갑작스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내게 준 법(Dhamma)의 도움으로 나의 마음은 균형을 유지했다.
이젠 나는 이 거룩한 스승, 우바킨(U Ba Khin)에게 감사의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했다. 나의 부모님은 인간의 몸을 주었지만, 여전히 무지의 조개껍질 속에 갇혀 있었다. 내가 조개껍질을 깨뜨리고 내면의 실재를 관찰하여 진리를 발견한 것은 오직 이 경이로운 분의 도움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4년 동안 법(Dhamma) 안에서 나를 튼튼하게 자라도록 지도해 주었다. 어떻게 그분에게 보답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법의 생을 살기 위해 그가 가르친 바를 실천하는 길이다. 가능한 큰 사랑과 자비를 발전시키며 또 마음의 순결을 향한 길을 걸으면서 남은 생을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그분이 내게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가 입멸한 후 2천 5백년 뒤에는 법(Dhamma)이 이곳에서부터 세계로 퍼져 다시 인도로 되돌아간다는 버마의 전통적 믿음을 자주 언급하곤 하셨다. 버마에서 비파사나를 가르치면서 이 예언이 실현되기를 돕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2천 5백년이 지났다.” 그는 말씀하시곤 했다. “비파사나의 괘종소리는 울리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그분은 말년에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외국여행을 할 수가 없었다. 1969년 내가 인도입국을 허가 받았을 때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고엔카, 나는 못 갈 것이지만 너는 그곳에 간다.”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 나는 이 예언이 단순히 종파적 신념이라고 생각했다. 왜 보다 빨리 일어나지 않고 2천5백년 이후에 일어나야 하는가? 그러나 내가 인도에 왔을 때 내가 비록 백 명의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든 문화 사회적 집단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인도뿐만 아니라 수천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왔다.
원인이 없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연히 명상코스에 참여하지 않는다. 몇 사람은 그들이 과거에 건전한 행위를 한 것의 결과로 현재에 법의 종자를 받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미 법의 종자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 온다. 당신의 법의 종자를 얻기 위해서건 혹은 발전시키기 위해서건 당신 자신의 선, 자신의 은총, 자신의 자유를 법안에서 키우라. 그러면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돕는 방법을 발견할 것이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다.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이 평화의 길을 들어서든지 발견하기를!
그들이 모든 속박 고통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그들이 모든 삿된 생각과 조건지어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우주의 모든 생명이 행복해지기를 발원한다.
모든 생명이 평화를 누리기를 발원한다.
모든 생명이 자유롭기를 발원한다.
## 부록## A
*붓다의 가르침에서 느낌*(*受*)*의 중요성*
붓다의 가르침은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을 발전시킴으로써 자기를 변화시키는 조직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본성의 실재를 경험으로 이해하게 됨으로써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무지를 제거할 수 있다. 우리는 맞게 행동하는 법을 배우고 그래서 생산적이고 유용하며 행복한 삶으로 인도된다.
염처경(念處經, Satipattana Sutta) “깨어있음에 관한 설법”에서 붓다는 자기 관찰을 통한 자기에 대한 지식을 발전시키는 실제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이것이 비파사나 수행법이다.
자신에 관한 진리를 관찰하는 시도는 ‘자기’라고 부르는 것이 마음과 몸, 신체와 정신이라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이 양자를 관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몸과 마음의 실재를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의 설명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지적 이해에 의존하는 것도 충분하지 못하다. 이것들은 자기탐구의 작업으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지만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직접 실재를 탐구하고 경험해야 한다.
우리들 각자는 육체적 느낌을 수단으로 하여 그 느낌에 의해서 신체의 실재를 경험한다. 눈을 감고도 우리는 손을 가지고 있음을 안다. 신체의 다른 부위의 존재도 그것을 느끼기 때문에 안다. 책이 외적인 형태와 안으로는 내용을 가지고 있듯이 신체 구조도 외적 대상인 몸(kaya)과 내적인 주관적 느낌(vedana)의 실재를 갖는다. 우리는 책 속의 모든 낱말을 읽음으로써 책을 이해한다. 우리는 느낌을 느낌으로써 몸을 경험한다. 느낌에 대한 각성 없이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은 없다. 이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다.
마찬가지로 정신의 구조도 형식과 내용으로 분류된다. 마음(citta)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 이를테면 생각. 감정. 기억. 희망. 공포. 정신적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몸과 느낌을 따로 분류하여 경험할 수 없듯이 인간의 마음은 마음의 내용물로부터 분류해 낼 수 없다. 그러나 마음과 신체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한 쪽에서 일어난 것은 다른 쪽에 영향을 준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에서 결정적인 중요한 핵심에 해당된다. 붓다가 말한 바와 같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느낌이 따른다.”(증지부) 그러므로 느낌의 관찰은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의 전체성을 검토하는 단서를 제공한다.
신체와 느낌, 마음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들, 이 네 가지의 실재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다. 이것이 염처경의 네 가지 부분으로써 깨어있음을 설정하는 네 가지 접근 양식이며 인간존재를 관찰하는 네 가지의 관점이다. 만약 탐구가 완벽하다면 모든 국면이 경험되어져야 한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느낌(受, vedana)을 관찰함으로써 경험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붓다는 특별히 느낌을 각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붓다의 가장 중요한 교설중의 하나인 법망경(Byahmajala Sutta)에서
“깨달은 자들은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로 관찰함으로써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장부)
라고 했고, 느낌에 대한 각성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팔정도를 이해하는 전제조건이 된다.
“느낌을 경험한 사람에게 고통(苦), 고통의 원인(集), 고통의 소멸(滅), 소멸에 이르는 길(道) 등을 깨닫는 길을 가르쳐 준다.”(증지부)
그러면 정확하게 무엇이 느낌(受, Vedana)인가? 붓다는 이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술했다. 붓다는 마음을 구성하는 식(識), 인식(想), 느낌(受), 행(行) 네 가지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켰다. 그러나 느낌을 보다 명확하게 정의하면 정신과 육체의 양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상응부) 물질은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단독으로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다. 느끼는 것은 마음이지만 그 마음은 필연으로 신체적 대상을 갖는다. 이 신체적 요인이야말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실천의 목적은 우리의 내면에서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삶의 변천을 다룰 능력을 개발시키는 것이다.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관찰함으로써 명상 속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배운다. 이런 마음의 균형에 의해서 맹목의 습관적 반응을 소거하고 상황 속에서 가장 유익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모든 것은 다섯 가지의 신체 감각(眼. 耳. 鼻. 舌. 身)과 마음(意)인 여섯 개의 감각의 문을 통해서 만난다. 연기법(緣起法)에 따르면 접촉이 어떤 감각에서 일어나 신체와 마음의 현상을 만나자마자 곧 느낌이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몸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면 우리의 의식은 느낌을 알지 못한 채 남아 있을 뿐이다. 무지의 어둠 속에서 무의식의 충동은 순간의 좋고 싫은 느낌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런 충동은 의식 속에 나타나기 전까지 무한한 시간 동안 반복되며 강화된다. 만약 수행자가 주의하여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한다면, 그들은 충동이 일어나 그들을 압도하기 전에 충분한 위험한 긴장으로까지 발전하는 과정을 깨닫게 된다. 물론 소화시키기 어려운 격렬한 충동의 불꽃은 느낌의 작은 성냥불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만약 신체 내부에서 느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수행자는 큰 불이 일어나기 전에 작은 불꽃을 꺼버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신체적 측면에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수행자는 느낌이 일어나자마자 그것을 깨달아 어떤 습관적인 무의식의 충동이 일어남을 미리 막을 수가 있다.
느낌의 신체적 측면은 우리의 내면에서 무상(無常)의 실재를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경험케 하므로 특별히 중요하다. 변화는 우리의 내면에서 모든 순간에 느낌의 형태로 일어난다. 무상이 경험되어져야 할 곳도 바로 이런 신체적 느낌의 수준이다. 변화는 느낌을 계속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끊임없이 변화되는 본성을 깨닫게 된다. 이런 자각이 덧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의 허망함을 분명하게 한다. 무상(無常, anicca)에 대한 직접 경험은 자동으로 집착으로부터 초연하게 하고, 동시에 탐욕이나 화 등의 새로운 반응뿐만 아니라 모든 습관적 반응을 제거한다. 이렇게 하여 점차 수행자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신체적 측면이 포함되지 않으면 느낌의 각성은 부분적이거나 불안전하다. 그러므로 붓다는 신체적 느낌을 통한 무상에 대한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붓다는 말했다.
몸에 대한 직접적인 각성을 위해 계속 노력하는 사람은 삿된 행동을 삼가고, 해야 될 일을 하는 사람은 모든 번뇌와 업장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얻으리라. 완전한 이해와 깨달음으로 인하여.(법구경)
고통의 원인은 탕하(tanha) 즉 갈망과 혐오이다. 보통 우리는 신체의 감각과 마음을 통해서 만나는 여러 가지 대상에 대한 혐오와 탐욕의 충동을 가진다. 그러나 붓다는 대상과 반응 사이에는 느낌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음을 발견했다. 우리는 내면의 느낌 없이 외적 실재에 반응하지 않는다. 혐오나 탐욕 없이 느낌의 관찰법을 배울 때 고통의 원인(集)은 일어나지 않고 고통(苦)은 멈춘다. 그래서 느낌에 대한 관찰은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필수적이다. 만약 느낌에 대한 각성이 완전하다면 관찰은 신체의 느낌의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신체적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문제의 뿌리를 꿰뚫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깊이 관찰할 수 있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함으로써 염처경(念處經, Satipatthana <염처경은 장부22와 중부10에서 두 곳에 실려 있다.>)을 꿰뚫는 신선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이 경은 깨어있음의 확립(念處, Satipatthdna)을 언급하면서 시작된다. “존재의 정화, 슬픔과 한탄의 초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의 소멸, 진리의 길을 걷는 것, 궁극적 진리(nibbana)의 직접 경험”(상계서) 등 우리가 느낌에 깨어있어야 하는 목표를 열거한다. 그런 다음 어떻게 이런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간결하게 설명한다.
“여기서 수행자는 철저한 이해와 깨달음, 몸 안에서 몸의 관찰, 느낌들 안에서 느낌들의 관찰, 마음 안에서 마음의 관찰, 마음 내용 안에서 마음의 내용의 관찰에 대한 뜨거운 노력을 견지하여 세계를 향한 탐욕과 혐오를 극복하게 되느니라.”(상계서)
‘몸 안에서 몸의 관찰, 느낌들 안에서 느낌의 관찰’ 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파사나 수행자에게 이 표현은 대단히 명확하게 다가온다. 몸 느낌 마음 그리고 정신적 내용들은 인간 존재의 네 가지 측면(四念處)이다. 정확하게 이 인간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실재를 경험해야만 된다. 이 직접적인 경험을 얻기 위해 수행자는 깨어있음(念, sati)과 철저한 이해(正知, sampajanna)의 두 가지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설법에서는 ‘깨어있음의 확립’(念住, Satipatthana, The Establishing of Awareness)이라고 부르지만 깨어있음(念, Sati)은 “나”라고 부르는 현상의 무상을 꿰뚫고 깊이 자신의 본성을 통찰하는 철저한 이해(正知, Sampajanna) 없이는 불완전한 상태로 남는다. 깨어있음의 확립(Satipatthana)의 실천은 수행자로 하여금 그들의 본질적이면서 순간적인 본성을 깨닫게 한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이것을 완전히 체득했을 때, 깨어있음은 자유로 인도하는 올바른 각성(正念)을 견고하게 확립(住)하게 된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외부 세계나 내부 세계를 향한 탐욕과 혐오는 사라진다. 무의식 속에 집착이 남아있는 한,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깨어있음에 관한 설법’에서는 먼저 몸의 관찰을 토의한다. 이것은 정진-신체의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관점으로 자기관찰을 시작하는 아주 적절한 지점이다. 몸(身)의 관찰로부터 느낌(受), 마음(心), 정신적 대상(法)의 관찰(四念處)로 자연스럽게 발전된다. 설법은 몸을 관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설명한다. 먼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 호흡의 관찰이다. 또 다른 방법은 몸의 움직임에 주의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목표인 열반에 이르기까지는 거쳐야 할 확실한 단계들이 있다. 이것들은 아주 중요한 구절들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안으로나 밖으로 혹은 안과 밖을 동시에 몸 안에서 몸을 관찰하여 조용히 멈춘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여 멈춘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의 사라짐을 관찰하여 조용히 머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조용히 머문다. 깨어있음의 상태가 유지되면서 “이것이 몸이다.”라는 사실이 저절로 드러나게 된다. 이 깨어있음은 오직 철저한 이해(正知)와 관찰(正念)만이 남는 상태까지 발전하여 그는 세계의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아니하고 초연하게 머문다.(상계서)
이 구절의 중요성은 몸의 관찰을 논하는 모든 부분뿐만 아니라, 느낌 마음 정신의 대상들의 관찰을 논하는 부분에서도 계속 반복된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다음 구절은 ‘몸’(身)대신에 ‘느낌’(受), ‘마음’(心), 그리고 ‘정신적 대상’(法)으로 각각 대치된다.)
이 구절은 염처경의 수행에서 공통된 바탕을 이룬다. 깨어있음의 확립(念住)을 체득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것의 해석은 매우 다양하고 넓다. 그러나 이 어려움은 느낌의 각성을 언급하는 구절을 이해하면 사라지게 된다. 깨어있음의 수행에 있어서 수행자는 자신의 본성에 대한 포괄적인 통찰을 성취해야만 한다. 이 꿰뚫는 통찰의 수단은 느낌의 관찰로 인간 정신과 신체의 다른 세 가지 현상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첫 단계가 다를지라도 그런 차이를 뛰어넘는 수행은 느낌의 각성을 포함해야 한다.
수행자는 육체의 내부나 외부, 육체의 표면이나 심층에서 이들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시작된다. 즉 다른 곳이 아닌 어떤 부위의 각성으로부터 수행자는 점차 신체의 전 부위를 느끼는 능력으로 발전된다. 그들은 수행을 시작했을 때 일어나는 강한 느낌을 처음에 경험할지도 모른다. 이런 단계에서 그들의 몸과 마음의 구체적 실재, 통합되고 어느 정도는 견고하고 지속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여전히 경험할 것이다. 그러나 계속 수행해 감에 따라 대상의 견고함은 자동적으로 사라지고 마음과 육체는 모든 순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떨림의 과정으로써 진실한 본성을 체험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이런 경험으로 수행자는 육체(色), 느낌(受), 마음(心), 그리고 정신적 대상(法)들이 진실로 무엇인지 즉 그것들은 비개인적 흐름, 계속적으로 변하는 현상임을 이해한다.
마음과 물질의 궁극적 실재에 관한 이런 직접적인 이해는 환상 오해 편견 등을 점차로 소멸시킨다. 단지 신념에 의해서 혹은 지적인 추론에 의해서 받아들인 올바른 개념조차도 그것들이 직접 경험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점차로 내면의 실재를 관찰함으로써 지각을 왜곡시키는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이 소멸된다. 그리고 오직 순수한 각성과 지혜만 남는다.
무지가 사라질 때 탐욕과 혐오의 무의식적 경향은 제거되고 그리고 수행자는 모든 집착, 그 자신의 몸과 마음의 내적 세계에 대한 가장 깊은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된다. 이 집착이 소멸되면 고통은 사라지고 인간은 자유롭게 된다.
붓다는 종종 “느끼는 것은 무엇이나 고통과 관계한다.”고 말했다.(상응부) 그러므로 느낌(受, vedana)은 거룩한 진리의 하나인 고통(苦諦)을 탐구하는 이상적인 수단이다. 불쾌한 느낌들은 분명하게 고통이다. 그러나 큰 기쁨도 역시 매우 미세한 초조나 불안의 표현이다. 모든 느낌은 무상(無常, impermanent)이다. 만약 유쾌한 느낌에 집착한다면, 그것들은 곧 지나가 버리고 고통이 남는다. 모든 느낌은 괴로움의 종자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붓다가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말했을 때, 그는 느낌(vedana)의 일어남으로 인도하는 길과 느낌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을 언급했다.(상응부) 마음과 물질의 조건지어진 장소(處)에 인간이 남아있는 한 느낌과 고통은 소멸되지 않고 저항한다. 이것들은 오직 인간이 조건지어진 장소(處)를 초월하여 궁극적 실재인 열반(nibbana)을 경험했을 때만 멈춘다. 붓다는 말했다.
어떤 인간들은 법(Dhamma) 대로 살지 못하네.
단지 그들은 법에 관해 너무나 많은 말만 하기 때문이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그가 비록 법에 관해서 들은 바가 없다 해도
몸으로 법을 보아 진실로 여기에 따라 살아간다면
그는 법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네.(법구경)
우리 자신의 몸은 진리를 볼 수 있다. 수행자가 진리를 내면에서 발견했을 때 그것은 그에게 진실이 되고 그는 이것에 따라 살아간다. 자신의 내부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워서 우리는 각자 그러한 진리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 부록## B
*느낌에 관한 경전의 말씀*
경전 속에서 붓다는 자주 느낌에 대한 각성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다음은 느낌에 관한 경전의 말씀 가운데 아주 작은 일부이다.
많은 종류의 바람이 하늘을 스치고 지나가네.
동쪽과 서쪽에서 북쪽과 남쪽에서 청명한 바람과 먼지바람이
차갑거나 혹은 뜨거운 격렬한 폭풍과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바람처럼 우리의 몸뚱이 속에서도 느낌들이 일어나네.
유쾌하기도 하고 혹은 슬픈 혹은 불쾌하지도 기쁨도 아닌 느낌들이
뜨거운 정진으로 철저한 이해(正知)의 힘을 개발한 수행자는
불어오는 느낌의 바람을 완전히 이해하리라.
그리하여 철저한 이해로 인하여 현재의 이 삶 속에서
그 모든 삿된 생각으로부터 끝내 자유를 얻으리라.
모든 조건지어진 세계를 뛰어넘어 일상의 삶에서 법을 실현하게 될 것이니라.(상응부)
어떻게 몸 안에서 몸을 관찰하여 머물 수 있는가?
이런 경우엔 숲으로 가라. 나무 밑으로 혹은 한적한 곳으로
허리를 곧게 펴고 가부좌를 하고 앉아 모든 주의 집중을 코끝으로 모으라.
숨이 들어오고 나가고 그러나 깨어 있으라. 호흡이 길게 들어오면 긴 호흡의 들어옴을 곧 알아채고 호흡이 길게 나가면 긴 호흡의 나감을 알아채고 짧은 호흡이 들어오면 짧은 호흡의 들어옴을 알아채고 짧은 호흡이 나가면 짧은 호흡의 나감을 곧 알아채고
온 몸으로 호흡의 들어옴을 느껴라. 온 몸으로 호흡이 밖으로 나감을 느껴라. 고요해진 몸의 움직임을 보는 숨결이 들어오고 나가는 길목에 앉아 수행자여, 어떻게 몸 속에서 몸을 관찰하여 머물러야 하는가?
이런 경우 숲으로 가라. 나무 밑으로 혹은 한적한 곳으로(장부, 염처경)
유쾌하고 불쾌하고 또는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났을 때 수행자여 보고 이해하라.
“유쾌하고 불쾌하고 또는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이 내게 일어났다. 느낌은 무엇엔가 근거하고 있다. 근거 없이 느낌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그것은 바로 몸이다.”라고
몸 안에서 느낌의 무상함을 보고 깨어있으라.(상응부)
수행자여, 알라.
“내게 유쾌함, 불쾌함 혹은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 느낌은 조건지어진 것들을 따라 물결친다. 그러나 진실로 존재하는 가장 탁월한 것은 마음의 평정이다.”라고
유쾌함이 일어나든지 불쾌함이 일어나든지 혹은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경험이 일어나든지 이것들은 결국 사라진다. 오직 마음의 평정만이 남으리라.(중부)
느낌에는 세 종류가 있다. 유쾌함 불쾌함 그리고 유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은 느낌.
이 세 종류는 모두 무상하고 조건지어진 것들에 의존하고 부서져 사라지기 쉽다.
실재를 본 거룩한 진리를 따르는 자는 세 가지의 느낌으로부터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마음의 균형으로 인하여 초연하고, 초연함으로 인하여 그는 자유롭다.(중부)
만약 수행자가 몸 안에서 일어나는 쾌감의 무상을 관찰하여 머문다면, 느낌의 쇠퇴 사라짐 그리고 그것들의 멈춤을 관찰하여 머문다면, 그리고 그런 느낌에 관한 자신의 포기를 관찰하여 머문다면, 이땐 무의식 깊이 조건지어진 쾌감을 향한 갈망은 소멸된다. 만약 몸 안에서 이러나는 불쾌감의 무상함을 관찰하여 머문다면, 이때 무의식의 깊이 조건지어진 불쾌감을 향한 혐오는 소멸된다. 만약 몸 안에서 일어나는 쾌감이나 불쾌가 아닌 느낌의 무상을 관찰하여 머문다면, 이때 무의식 깊이 조건지어진 무지는 소멸된다.(상응부)
쾌감을 향한 열망, 불쾌감을 향한 혐오, 쾌감도 불쾌감도 아닌 느낌에 대한 무지, 이런 무의식적 조건화가 완전히 소멸된 자,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 진리를 본 자, 갈망과 혐오를 끊어버린 자, 모든 악업을 쉬어버린 자, 자아의 환상을 완전히 깨달은 자, 고통이 끝나버린 자, 그를 가리켜 수행자라 부른다.(상응부)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견해가 올바른 견해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생각이 올바른 생각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향한 노력이 올바른 노력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깨어있음이 올바른 깨어있음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재에 대한 집중이 올바른 집중이다.
그리하여 몸과 행동과 말과 생활이 진실하게 정화되리라.
그리하여 수행자의 내면에서 팔정도(八正道)는 열매를 맺으리라.(중부)
팔정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정진하게 된다. 고집스럽게 정진함으로써 마음은 더욱 섬세하고 주의 깊어진다.
마음의 주의 깊음과 예민함으로 인하여 집중이 생기고, 집중으로 인하여 올바른 이해가 발전한다. 올바른 이해가 참다운 믿음을 개발시켜 팔정도를 실천하는 수행자는 “전에 내가 들었던 진리를 지금 몸 안에서 직접 경험하면서 생활하고, 전에 들어왔던 통찰로써 꿰뚫어 관찰한다.”는 믿음을 지닌다.(상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