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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後)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後)
아나빠나사띠(호흡관)를 이용한 지관겸수止觀兼修 방식의 사념처 수행경

여기에 포스팅하는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과 보충설명은 냐나띨로까 비구가 빠알리어(갠지스 강 유역의 고대인도의 민중어 중 하나로 부처님 말씀을 경전으로 기록하던 당 시대에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고대인도 민중어)로 기록된 경전모음인 니까야에서 발췌하여 독일어로 번역 편집한 『붓다의 말씀(Das Wort des Buddha; The Word of the Buddha)』에 수록된 것으로 정원 김재성님이 우리말로 옮긴 것을 일부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본 포스팅은 『대념처경[大念處經;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의 후반부에 대한 포스팅입니다.

냐나띨로까(Nyanatiloka) 비구는 니까야에 실려있는 많은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Buddhist Dictionary(https://what-buddha-said.net/library/Buddhist.Dictionary/index_dict.n2.htm & https://www.urbandharma.org/pdf/palidict.pdf)를 만들어서 붓다의 말씀(가르침, 설법)을 서양에 전파하는데 매우 큰 역활과 큰 기여를 한 훌륭한 비구입니다. 냐나띨로까 비구는 1904년에 독일인으로는 처음으로 비구계를 받았습니다. 1902년에 비구계를 받은 영국 출신 아난다 메떼야(Ananda Metteya) 비구에 이어 서양인으로는 두 번째 비구입니다.

『붓다의 말씀(Das Wort des Buddha; The Word of the Buddha)』은 1946년에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에 ‘고요한 소리’출판사에서 한글로 번역(김재성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The Word of the Buddha(영문판): http://www.urbandharma.org/pdf/wordofbuddha.pdf>

범례
[*]의 문장은 냐나띨로까 비구의 보충설명
<역주>는 역자의 보충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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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소수의 지배계층(브라만계급)이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당시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갠지스강(항하恒河) 유역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마가다(Māgadha)국의 대중들이 사용하던 고대인도 민중어인 마가다어를 사용해서 설법을 하셨다. 그러나 마가다어는 사장되었고 마다다어와 가장 (거의) 유사한 고대인도어가 빠알리(Pāli)어인데, 이 빠알리어가 후대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 모음인 니까야(Nikāya)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빠알리어는 부처님 말씀을 경전으로 기록하던 당 시대에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던 고대인도 민중어였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입멸(빠리-닙바나, 무여열반)하신 직후 얼마 동안은 제자 아라한들이 부처님 말씀(가르침, 법法)을 합송으로 후대에 전달했다. 합창을 하면 한 사람이 틀린 것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합송으로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대한 변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아라한의 수가 줄어들고 전쟁 등의 장애요소가 생기고 부처님 말씀(가르침, 법法)을 전파하는 지역이 넓어지면서 문자로 기록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겼다.

빠알리어로 기록된 니까야를 산스크리트어로 옮겨서 편찬한 경전 모음을, 이른바 대승경전(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정토경 등)이 중국어(한문)로 번역되던 AD 5세기 경 이후에, 중국에서 번역 편찬한 경전 모음이 아함경(阿含經)이다. 아함(阿含)은 산스크리트어 아가마(āgama)를 중국어(한문)로 음사한 것으로 법장(法藏) 또는 전교(傳敎)라고 한역된다. 산스크리트어 아가마(āgama)의 뜻은 전승(傳承), 즉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전해져 내려왔다는 뜻이다. 아함경(阿含經, 아가마 수트라)은 '붓다의 말씀(가르침, 법法)을 전하는 경전 모음'이라는 뜻이다.

니까야와 아함경은 생각보다 꽤 차이가 있다. 그 원인은 첫째, 옛날에는 요즘처럼 정보의 전달이 상대적으로 원활하고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즘보다 번역 시 오류가 상대적으로 많다. 둘째, 산스크리트어로 편찬된 불교 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하던 시대의 중국인들은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과 같은 주요 대승경전에 비해서 아함경을 그리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함경의 번역에 상대적으로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고 번역이 상대적으로 정교하지 못하고 허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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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역주 : 아함경(阿含經)에 수록된 『대념처경(大念處經)』의 원문은 빠알리어로 기록된 니까야에 수록된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Mahā Sati-Paṭṭhāna Sutta]』이다. 중국어(한문) 경전에서 마하[mahā]는 대(大)로, 사띠[sati]는 념(念)으로, 빳타나[paṭṭhāna]는 처(處)로 번역하였다.

중국어(한문) 경전에서 념(念, 생각 념; 마음에 둠, 기억함)이라고 번역하는 사띠[sati]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전념하여 또는 정신차려서 또는 마음챙겨서 알아차림, 빠자나[pajāna; 알아차림/앎], 깨어있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mindfulness(주의깊음, 마음챙김), awareness(자각함), memory(기억함), recognition(알아차림),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깨어있음) of mind, alertness, lucidity of mind, self-possession, self-consciousness' 등으로 번역한다.

념(念)은 '지금(今)+마음(心)'의 합성어다. 사띠[sati]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지금(현재 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또는 작용)을 ‘전념하여(바르게 기억하여 또는 바르게 새겨) 마음챙겨서 알아차림' 정도로 표현하면 유사하다. 사띠[sati]는 대개 빠자나[pajāna; 알아차림]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된다.

중국어(한문) 경전에서 처(處, 곳 처; 거주함, 머뭄)라고 번역하는 빳타나[paṭṭhāna]는 부처님 설법(법을 설명함)에서 ‘확립(함), 세움, 드러냄’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setting forth, putting forward’ 등으로 번역한다.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대념처경(大念處經)』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띠[sati; 마음챙겨서 알아차림]의 확립[빳타나paṭṭhāna]에 대한 큰 경』 정도로 표현하면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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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깜마사담마라고 하는 꾸루 족의 마을에 머무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열반[Nibbana;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ekayano maggo]이다.(THE ONLY PATH TO NIBBANA)*

그것은 바로 ‘네 가지(四) 사띠[sati, 念]의 확립[paṭṭhāna, 處]’(사념처四念處)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신념처身念處], 
느낌에 대한 사띠의 확립[수념처受念處], 
마음에 대한 사띠의 확립[심념처心念處],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법념처法念處]이다.

[* 부처님께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이 네 가지에 대한 사띠를 확립(四念處)'하는 것이 모든 중생들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열반[Nibbana;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THE ONLY PATH TO NIBBANA)이라고 단언하신다.]

<역주 : 한문 경전에서 념(念, 생각 념; 마음에 둠, 전념함, 기억함)으로 번역하는 사띠[sati; 마음챙겨 알아차림]가 빠자나[pajāna; 알아차림]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한문 경전에서 정념(正念)으로 번역하는 삼마사띠[samma-sati]는 삼빠자나[sam-pajāna; 바른 알아차림, 正知]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된다. 즉, 삼마사띠[samma-sati] = 정전념[正專念; 바른 전념, 바른 마음챙김] + 정지[正知, 삼빠자나sam-pajāna; 바른 알아차림].

따라서 삼마사띠[samma-sati]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 정념(正念)이 아니라 정념지(正念知) 또는 정전념지(正專念知)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삼마사띠의 의미를 비교적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역주 :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이 위빠사나를 설하는 가르침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초선정~4선정) 삼매를 계발하여 성취하지 않고 하는 위빠사나'(소위 마른 위빠사나)만을 가르치는 마하시 수행쎈터 등 일부 남방불교에서는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大念處經]』는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선정(초선정~4선정) 삼매를 계발하여 성취할 것을 설하시는 내용이 포함 수록되어 있는 사마타-위빠사나에 대한 가르침이다.

바른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을 부처님께서는 '사마디(삼매) 바와나(계발 수행) = 사마타'라고 칭하셨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의 측면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여 가르치셨는데, 바른 삼매 계발 수행을 지칭하는 사마타는 '정정진(바른 노력)·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 바와나를 통칭하신 것이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바른 관찰/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 바와나를 통칭하신 것이다.

마하시 수행쎈터에서 가르치는 바른 삼매를 계발하지 않고 하는 마하시식 위빠사나(소위 마른 위빠사나)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위빠사나가 아니다. 달리 표현하면 마하시식 위빠사나(소위 마른 위빠사나)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정도(八正道)를 계발하는 수행 중에서 정정(正定; 바른 삼매)을 계발하는 수행을 하지 않는 칠정도(七正道)를 계발하는 수행인 셈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마타 후에 극대로 계발되는 고요집중의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 능력을 사용해서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네 가지 사띠를 확립함'(사념처四念處 수행을 함)으로써 자신과 세상의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통찰(깊이 관찰)하여 꿰뚫어 보고 바르게 깊이 분석 사유하는 깊은 정견·정사유를 계발하여 깊은 빤냐(반야;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꿰뚫어 아는 통찰 지혜)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해야 한다고 누누이 설(설명)하셨다.>

<역주 : 부처님께서는 선정(禪定, 선정 삼매)을 계발하는 수행의 집중 대상은 반드시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당신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집중 대상 중에서 호흡[아나빠나]이 가장 수승(훌륭)하다고 추천하셨다. 즉 부처님께서는 '아나빠나(들숨날숨, 호흡) 사띠'를 통해서 바른 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방법을 가장 추천하셨다. (『아나빠나 사띠 숫따, 안반수의경』 참조)

왜냐하면 호흡은 탐(갈망, 탐욕)•진(혐오, 성냄)•치(탐과 진에 대한 집착의 어리석음)를 일으키지 않으며, 우리 몸에 있는 수 많은 신체 작용(물질 작용) 중에서 '무의식적인 작용이면서도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또한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동적인) 작용이면서도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작용(또는 현상)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 몸에 항상 있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마타[사마디 바와나; 삼매 계발 수행 or 사띠 초점확립 계발 수행]에서 호흡은 사띠를 거친 수준(거친 감각,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수준)에서 미세한(또는 깊은) 수준(미세한 감각,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 수준)으로 건너가게 하는 아치형태의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보면 거친 수준에서부터 점점 더 깊은(또는 미세한) 수준까지 여러 수준의 사띠가 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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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음에 대한 사띠의 확립[심념처心念處]

<역주 : 1.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신념처身念處]과 2. 느낌에 대한 사띠의 확립[수념처受念處]은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 Sutta]』 전반부 포스팅 참조>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탐욕이 있는 마음(有貪心)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탐욕이 없는 마음(無貪心)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성냄이 있는 마음(有瞋心)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성냄이 없는 마음(無瞋心)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有癡心)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無癡心)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침체된 마음을 침체된 마음이라고 알며,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안다.
(선정 수행으로) 커진 마음(大心)을 커진 마음이라고 알며,
(선정 수행을 닦지 않아) 커지지 않은 마음을 커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색계 선정과 무색계 삼매 수행이) 향상된 마음을 향상된 마음이라고 알며,
향상이 안 된 마음을 향상이 안 된 마음이라고 안다.
(선정에 의해) 잘 집중된 마음을 잘 집중된 마음이라고 알며,
집중이 안 된 마음을 집중이 안 된 마음이라고 안다.
(선정 수행에 의해 일시적으로) 번뇌로부터 벗어난 마음(解脫心)을 벗어난 마음이라고 알며,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非解脫心)을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 여기에서 사용된 마음[citta]이라는 용어는 마음의 순간들 또는 의식의 순간들(moments of consciousness)을 통틀어서 일컫는 집합적인 용어(collective term)다.

참고로 사고(思考; thought) 또는 생각함(thinking; 생각 작용)은 마음의 언어적인 작용, 즉 위딱까(尋; 거친 생각)과 위짜라(伺; 미세한 생각)에 해당하며, 형성[行; sankhara] 작용의 무더기인 행온(行蘊)에 속한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마음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마음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마음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마음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299-300.

<역주 : 냐나띨로까 비구의 보충설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의식[識; vinnaņa]의 순간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특히 사소한 마음의 변화도 민감하게 포착하고 있는 수행 중인 수행자의 순간순간의 마음들 또는 의식의 순간들을 가리키고 있다.

마음 또는 의식이란 고정되어 있는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서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순간순간의 총체를 통칭하는 집합적인 용어다. 엄밀하게 말하면 마음은 순간순간 변하므로 동일한 두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부처님 가르침)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마음을 만들어낸 조건도 변하므로, 동일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이 동일한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지칭하는 마음은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며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순간순간의 현상(또는 작용)을 어떤 범주를 정해서 편의상 통칭하여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요점은 수행 도중에 경험하는 순간순간의 마음들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며, 그러한 마음을 집착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탐심이 일어나면, 탐심이라고 알아차리면 된다. 알아차리게 되면, 생겨난 탐심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수행의 힘이 약한 일상의 마음으로는 탐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 탐심을 다루는 법에 능숙하지 못하므로 탐심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하지만 수행의 힘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면, 탐심이 일어나는 순간 탐심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수행에 의해 어느 정도 길러지고 새겨진 지혜의 힘으로 탐심의 진행은 차단된다. 이것이 수행에 의해 길러진 깊은 사띠의 힘과 수행에 의해 길러지고 새겨진 깊은 지혜의 힘에 의해서 번뇌가 제어되는 과정이다.

수행을 하다보면 거친 수준에서부터 점점 더 미세한 또는 더 깊은 수준까지 여러 수준의 사띠와 여러 수준의 지혜가 있음을 알게 된다.

탐심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뿐만 아니라, 탐심이 없는 마음과 같은 긍정적인 마음도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즉, 탐심을 알아차린 후 탐심이 사라졌으면, 탐심이 사라졌음을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부정적인 마음들은 사라지고, 긍정적인 마음, 탐심이 없는 청정한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긍정적인 마음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마음이 사라짐으로써 생겨난 긍정적인 마음도 집착의 대상이 된다면 결국 또 다른 탐심(부정적인 마음)이 생겨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마음이 생겨나면, 생겨났음을 바로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정적인 마음도 긍정적인 마음도 거부나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 사띠(마음챙겨서 알아차림)의 대상이 될 때, 수행은 제대로 진행되는 것이다. 그 어떠한 것이라도 생겨나고 사라지고 경험되는 것은 알아차림의 대상이지, 집착의 대상은 아니다. 부정적인 요소가 없어지고, 긍정적인 요소가 생겨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요소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수행의 바른 길이다.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좋은 마음의 순간들은 수행이 향상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향상된 마음에 집착하지 않고 사띠를 지니는 것은 수행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순간순간의 마음을 잘 살피고 사띠(마음챙겨서 알아차림)를 굳건히 지닐 때, 부정적인 마음은 사라지고, 마음은 청정해지며, 더욱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사념처[네 가지 사띠의 확립] 수행의 이로움은 바로 스스로 청정해지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지혜를 확립해주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얻은 깊은 지혜의 힘으로 최상의 행복인 열반[Nibbana; 완전한 행복]을 증득하는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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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법념처法念處]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4.1 다섯 덮개[오개五蓋]에 대한 사띠의 확립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다섯 덮개[五蓋]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오개[五蓋]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있다’라고 안다.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바르게 안다.

내적으로 '악의(惡意; 혐오, 분노)'가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악의(惡意)가 있다’라고 안다. 내적으로 악의가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악의가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악의가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악의가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악의가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바르게 안다.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있다’라고 안다.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혼침과 졸음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혼침과 졸음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혼침과 졸음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혼침과 졸음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바르게 안다.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후회, 우울)'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있다’라고 안다.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들뜸과 회한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회한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들뜸과 회한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들뜸과 회한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바르게 안다.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다’라고 안다.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없으면 ‘나에게 내적으로 회의적 의심이 없다’라고 안다.
그리고 생겨나지 않은 회의적 의심이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회의적 의심이 사라지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사라진 회의적 의심이 이후에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바르게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오개라는) 법에서 법[五蓋]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五蓋; 감각적 욕망, 악의,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의심]에서 (어떤) 현상[法]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법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덮개[五蓋]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300-301

<역주 : 사념처[四念處; 네 가지 사띠의 확립] 중에 네 번째인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法念處] 부분은 사념처 수행의 대상과 장애, 사념처 수행 도중에 경험하는 현상들 그리고 사념처 수행의 궁극의 목적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앞서 설해진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身念處], ‘느낌에 대한 사띠의 확립’[受念處], ‘마음에 대한 사띠의 확립’[心念處] 수행의 전 과정이 요약 정리되어 제시되면서, 부처님의 주요 설법인 오개(五蓋),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칠각지(七覺支), 사성제(四聖諦)가 사띠의 대상으로 설해져 있다.

다섯 가지의 법(오개, 오온, 십이처, 칠각지, 사성제)에 대한 사띠의 확립이 설해지고 있는 법념처 수행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교리(설법 또는 교학; 오개, 오온, 십이처, 칠각지, 사성제)들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수행을 해 나가면서 사띠(마음챙겨서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법념처[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 수행에서 사띠의 대상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의(또는 인간의 또는 모든 생명체의) 육체(물질)적 정신적 현상 전체인 오온(五蘊)이다. 이렇게 오온(五蘊)을 사띠의 대상으로 삼는 수행, 즉 우리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현상을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가 처음 부딪히는 문제가 다섯 가지 덮개[오개五蓋, 다섯 가지 수행의 장애; 감각적 욕망, 악의(혐오, 분노 등),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후회, 우울 등), 회의적 의심]이다.

일차적인 수행의 대상인 육체적인 현상, 즉 좌선 시에는 호흡이나 호흡에 동반되어 발생하는 복부의 움직임 등이나, 행선(걷는 수행)시에는 발을 들어올리고, 앞으로 나아가고, 내려놓는 동작 등을 사띠하다가 수행에 방해가 되는 장애가 생기면 생기는 바로 그 즉시 알아차리고 알아차린 후 이 장애들이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바로 알아차려야 한다고 이 절에서 설(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집중적인 수행을 하지 않을 때에도 다섯 가지 덮개(장애)는 우리의 마음을 오염시키는 번뇌이므로 항상 주의 깊게 살펴서 마음에서 생겨난 이러한 번뇌들이 증장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번뇌를 차단시키려면 항상 자신의 마음과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기민하게 마음을 챙겨서 알아차려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사띠를 마음을 지키는 문지기에 비유하셨다. 사띠라는 문지기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에는 각가지 번뇌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번뇌라는 정신적인 현상으로서의 법이 생겨날 때 그리고 사라질 때 즉시즉시 알아차리는 것이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法念處]의 한 부분이다.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은 오개[五蓋; 다섯 가지 덮개]에 이어서 (2) 오온['色受想行識' 온], (3) 십이처[眼耳鼻舌身意와 色聲香味觸法], (4) 칠각지['念, 擇法, 精進, 喜, 輕安, 定, 捨' 각지], (5) 사성제['苦集滅道' 성제]로 이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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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다섯 무더기[오온五蘊]에 대한 사띠의 확립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물질적, 정신적) ‘다섯 무더기’[五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다섯 무더기[五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가 
'이것은 루빠[色; 물질] 작용 무더기가 드러난 물질 현상이다', '이것은 물질 현상의 발생이다', '이것은 물질 현상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웨다나[受; 감각 받음] 작용 무더기가 드러난 감수(감각 받음) 현상이다', '이것은 감수 현상의 발생이다', '이것은 감수 현상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산냐[想; 표상, imaging] 작용 무더기가 드러난 표상 현상이다', '이것은 표상 현상의 발생이다', ‘이것은 표상 현상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상카라[行; 의지, 의도, (업)형성] 작용 무더기가 드러난 형성 현상이다', '이것은 형성 현상의 발생이다', '이것은 형성 현상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것은 윈냐나[識; 의식+무의식; 앎, 판단, 분별] 작용 무더기가 드러난 식[識] 현상이다', '이것은 식[識] 현상의 발생이다', '이것은 식[識] 현상의 소멸이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오온이라는) 법에서 법[五蘊]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五蘊]에서 (어떤) 현상[法]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법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다섯 무더기[五蘊]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302-3

<역주 :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오개[五蓋],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칠각지[七覺支], 사성제[四聖諦]가 설해져 있는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法念處] 수행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교리(설법 또는 교학)들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수행을 해 나가면서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법념처[法念處;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 수행의 두 번째 항목은 자기 자신(또는 인간 또는 생명체, 더 나아가 세상, 우주자연)을 구성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또는 작용 또는 작용이 드러난 현상)을 다섯 범주(카테고리)로 분류한 오온(五蘊; 다섯 무더기)이다.

우리들 자신을 구성하는 물질적(육체적) 정신적 다섯 무더기의 현상(또는 작용)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그 순간 바로 알아차리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리는 것, 즉 생멸(생기 소멸)하는 심신(心身)의 세세한 현상을 하나도 빠트림 없이 마음챙겨서 알아차릴 것을 가르치고 있다.

끊임없이 일어났다가는 사라지는 물질적(육체적) 정신적 현상(또는 작용)들을 바로 그 생멸의 순간에 포착하는 것이 오온에 대한 사띠의 확립이며, 이러한 사띠가 있을 때, 현상들에 대한 경험적인 바른 이해인 경험적인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살아오면서(윤회하면서) 겪은 윈냐나[識; 앎, 판단, 분별] 작용은 생명체의 고착화된 무의식(또는 잠재의식 또는 심층의식)을 형성한다.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바왕가와 유사한 의미의 현대식 용어가 무의식(또는 잠재의식 또는 심층의식)이라 할 수 있다. 후대 불교인들이 사용한 아뢰야식이라는 용어도 어느 정도 유사한 의미다.

요컨대, 식온[識蘊; 윈냐나 칸다]은 '윈냐나[識;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 '의식 및 무의식'적인 앎, 판단, 분별 작용과 알음알이(아는 것, 대상에 대해 생겨난 알음알이)]의 칸다[蘊; 집적/쌓임/무더기]'이다.

우리의 마음은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이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비유하자면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은 빙산의 수면 위 부분이고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은 빙산의 수면 아래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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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여섯 가지 인식 기관과 인식 대상[육내외처六內外處]에 대한 사띠의 확립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六內外處]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육내외처[六內外處]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여기에 비구가 
눈[眼; 시각기관]을 알아차리고, 색[色; 시각 대상으로서의 모양과 색깔]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結; samyojana]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귀[耳; 청각기관]를 알아차리고, 소리[聲]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코[鼻; 후각기관]를 알아차리고, 냄새[香]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혀[舌; 미각기관]를 알아차리고, 맛[味]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몸[身; 촉각기관]을 알아차리고, 접촉[觸]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마노[意; 정신감각 기능; 사고기능]를 알아차리고, 마음의 현상[法]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를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족쇄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리고,
생겨난 족쇄가 끊어지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끊어진 족쇄가 이후로 생겨나지 않으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육내외처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六內外處]에서 (어떤) 현상[法]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법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내적인 인식 기관과 외적인 인식 대상[六內外處]이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302-3

<역주 :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오개[五蓋],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칠각지[七覺支], 사성제[四聖諦]가 설해져 있는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法念處] 수행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교리(교학 또는 설법)들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수행을 해 나가면서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법념처[法念處;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 수행의 세 번째 항목인 ‘여섯 가지 인식 기관(기능)과 여섯 가지 인식 대상’[육내외처六內外處 또는 십이처十二處]에 대한 사띠의 확립에서는 인식 기관[인드리야; 기능]과 인식 대상이 부딪힐 때 생겨나는 번뇌(의 족쇄)를 다스리는 가르침이 제시되어있다.

눈으로 사물을 보는 순간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가 없으면 우리의 마음에는 갈망(욕심, 탐욕)과 혐오(싫어함, 성냄)이라는 번뇌가 생겨나서 번뇌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속박되어 버리고 만다. 이때, 번뇌의 족쇄가 생겨났으면 생겨났다고 바로 사띠하면(마음챙겨 알아차리면), 그 족쇄는 끊어지게 된다. 족쇄가 끊어지면, 바로 족쇄가 끊어졌다고 사띠하고 다시 일차적인 사띠의 대상(호흡 등)으로 돌아와서 사띠에 틈이 없게 해야 한다.

번뇌가 생겨나는 관문인 감각기관을 다스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띠(마음챙겨서 알아차림)라는 문지기를 감각기관의 문에다 굳게 세워 놓는 것이다. 사띠가 굳게 자리하고 있을 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작용이 일어날 때, 마음을 얽어매는 번뇌의 족쇄는 생기지 않는다. 사띠라는 방패가 있을 때 온갖 번뇌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역주 : 우리들이 두루뭉술하게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용어는, 부처님의 설법(法을 설명함)에 따르면 「조건에 따라 심[心; citta], 의[意; mano], 식[識; viññāṇa]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예컨대, 물은 조건에 따라 얼음, 물, 수증기라고 불린다. 물질의 사대작용(네四 가지 기본大 작용, '지수화풍' 작용; 地무거움 작용, 水수축인력 작용, 風팽창척력 작용, 火변화 작용)이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생겨난 것 자체(H2O)를 체(體)라 한다면, 조건에 따라 얼음, 물, 수증기로 불리는 것을 상(相)이라고 한다. 조건에 따라 얼음일 때는 얼음에 맞게, 물일 때는 물에 맞게, 수증기일 때는 수증기에 맞게 ‘용(用, 사용)’하면 유익하다.

부처님께서는 설법(法을 설명)하실 때, 대상(또는 관점, 주제, 상황)과의 관계 맺음을 조건으로 그 조건에 따른 마음 작용을 상(相)에 따라 그리고 용(用; 사용처)에 따라 다음과 같이 심[心; citta], 의[意; mano], 식[識; viññāṇ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 심[心; 찟따citta] : 맨 마음 작용[kicca; function, process] 자체(體)

• 의[意; 마노mano] : 정신감각 작용; 정신감각 기능[意根, 마노 인드리야]의 작용.

ref. 정신감각은 생각, 기억, 감정 등; ref. 의근[意根, 마노 인드리야]은 인간의 경우 뇌를 기반으로 한 정신감각 기능(또는 기관); ref. '안이비설신'근(五根)은 물질감각 기관(기능); ref. 근[根, 인드리야]은 (감각) 기능 또는 기관.

• 식[識; 윈냐나viññāṇa;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 : (의식 및 무의식적인) 앎 작용, 인식작용; (의식 및 심층의식의) 알음알이(아는 것, 대상에 대해 생겨난 앎)

여기서 마노[mano, 의意] 작용은 인간의 경우 뇌를 기반(물질 토대)으로 한 정신감각 기능(意根)의 작용이다. ‘다섯 가지 물질감각 기관의 작용, 오감(五感) 작용'은 생명체에 따라 있거나 없기도 하지만, ‘정신감각, 육감[六感, 意, mano]' 작용이 없는 생명체는 없다.

마노[mano, 意, 六感] 작용은 외부 대상이 없어도 인식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꽃이 없어도 꽃의 상(想; 이미지, 기억)을 인식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을 돌연 회상하고, 지금 일어난 것처럼 감정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작년에 죽은 친구와 함께 10년 전 여행 갔을 때를 회상하고 미소 지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육감(六感), 여섯 번째 감각, 정신감각’ 작용인 마노[mano, 意] 작용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는 육근(六根; 여섯 가지 감각 기능)이 있다'고 설(설명)하셨다. 물질감각인 오감각과 정신감각을 합하여 인간의 감각은 여섯 가지이며, 이 ’정신감각, 여섯 번째 감각(육감六感)‘을 부처님께서는 고대 인도어로 마노[mano]라고 지칭하셨다. 고대 중국인들은 마노[mano]를 '의意'라고 한역했다.

이 여섯 번째 감각(육감六感, six sense) 작용은 결코 (있지도 않은 혼을 보는 등의) ’초월적인 감각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모두 있는 극히 당연한 기본적인 감각 작용이다. 오감[五感] 작용은 생명체에 따라 있거나 없기도 하지만 ’육감(六感), 마노[mano, 意]‘ 작용이 없는 생명체는 없다.

마노[mano, 意] 작용은 개, 고양이, 지렁이, 미생물, 아메바, 바이러스 등 모든 생명체에게 있는 기본적인 감각 작용이다. 뇌세포가 없는 지렁이나 아메바나 바이러스도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생명현상을 지속하기에 적합한 환경인지를 판단 분별하는 작용을 한다. 지렁이나 아메바나 바이러스에게 보거나(시각) 듣는(청각) 작용은 없을지 모르지만 판단 분별하는 작용인 마노[mano, 意]의 작용은 있다.

눈은 빛의 감각만을, 귀는 소리의 감각만을 인식한다. 그러나 눈으로 들어 온 빛을 '아름다운 꽃'으로 판단 분별하는 인식 작용은 의[意; mano]의 인식 작용이다. 귀로 들은 소리를 '좋아하는 가수의 아름다운 노래'로 판단 분별하는 인식 작용은 의[意; mano]의 인식 작용이다. 인간의 경우, ‘오감각의 인식 작용, 전오식[前五識] 작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량의 인식 작용이 ‘의[意; mano]의 인식[識] 작용, 즉 의식[意識] 작용’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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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일곱 가지 삼보장가[sambojjhanga; 覺支]에 대한 사띠의 확립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일곱 가지 삼보장가[sambojjhanga; 覺支]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일곱 가지 삼보장가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사띠라는 삼보장가’[sati-sambojjhanga; 念覺支]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사띠라는 삼보장가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내적으로 사띠라는 삼보장가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사띠라는 삼보장가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사띠라는 삼보장가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사띠라는 삼보장가가 수행을 통해서 확립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법에 대한 위짜야[vicaya, 擇; 조사調査, 분석, 탐구探究, 고찰]라는 삼보장가’[dhamma-vicaya-sambojjhanga; 擇法覺支]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법에 대한 고찰이라는 삼보장가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내적으로 법에 대한 조사(내용을 명확히 알기 위하여 자세히 살펴봄)라는 삼보장가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법에 대한 조사라는 삼보장가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법에 대한 조사라는 삼보장가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법에 대한 조사라는 삼보장가가 수행을 통해서 확립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정진이라는 삼보장가’[viriya-sambojjhanga;精進覺支]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정진이라는 삼보장가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내적으로 정진이라는 삼보장가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정진이라는 삼보장가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정진이라는 삼보장가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정진이라는 삼보장가가 수행을 통해서 확립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선정 삼매의 성취에 의해서 생겨난) ‘희열[삐띠]이라는 삼보장가’[piti-sambojjhanga; 喜覺支]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희열이라는 삼보장가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내적으로 희열이라는 삼보장가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희열이라는 삼보장가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희열이라는 삼보장가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희열이라는 삼보장가가 수행을 통해서 확립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선정 삼매의 성취에 의해서 생겨난 심신의) ‘경안이라는 삼보장가’[passaddhi-sambojjhanga; 輕安覺支]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경안이라는 삼보장가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내적으로 경안이라는 삼보장가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경안이라는 삼보장가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경안이라는 삼보장가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경안이라는 삼보장가가 수행을 통해서 확립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선정 삼매의 성취에 의해서 생겨난) ‘사마디(삼매; 마음의 고요집중)라는 삼보장가’[samadhi-sambojjhanga; 定覺支]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사마디라는 삼보장가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내적으로 사마디라는 삼보장가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사마디라는 삼보장가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사마디라는 삼보장가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사마디라는 삼보장가가 수행을 통해서 확립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여기에 비구가 
내적으로 (선정 삼매의 성취에 의해서 생겨난) ‘평정[우뻭카]이라는 삼보장가’[upekkha-sambojjhanga; 捨覺支]가 있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평정이라는 삼보장가가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내적으로 평정이라는 삼보장가가 없을 때, ‘나에게 내적으로 평정이라는 삼보장가가 없다’라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평정이라는 삼보장가가 생겨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이미 생겨난 평정이라는 삼보장가가 수행을 통해서 확립되면, 그것을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칠각지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七覺支]에서 (어떤) 현상[法]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법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칠각지[七覺支; 정각으로 인도하는 원인이 되는 일곱 가지 요소]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302-3

<역주 :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삼보장가[sambojjhanga]를 한문 경전에서는 각지[覺支]라고 한역하였다. 정각적인소(正覺的因素) 또는 도향정각적요소(導向正覺的要素)라고 한역하기도 한다.

삼보장가[sambojjhanga]는 '정각(正覺)으로 인도(導)하는 원인(因)이 되는 요소(要素)'라는 뜻이다. 

염[念; 사띠], 택법擇法, dhamma-vicaya; 법에 대한 조사, 분석, 탐구, 고찰], 정진[精進], 희[喜, 희열; 삐띠], 경안[輕安], 정[定; 사마디(삼매)], 평정[捨; 우뻭카]라는 칠각지[七覺支; 정각으로 인도하는 원인이 되는 일곱 가지 요소] 중에서 뒤의 네 가지는 선정(초선정~4선정) 삼매의 성취와 관련된 것들이다.>

<역주 : 다섯 가지 덮개(수행의 장애)를 극복하면서 몸과 마음의 현상들을 사띠하는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면, '정각으로 인도하는 원인이 되는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되기 시작한다. 이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고요히 안정되면서 수행에 대한 확신도 강해진다. 사띠라는 삼보장가[念覺支]가 더욱 깊어지고 예리해지고, 그로인해 몸과 마음이라는 현상(法)에 대한 위짜야[vicaya, 擇; 조사, 분석, 탐구, 고찰]와 이해라는 삼보장가[擇法覺支]가 심화된다. 수행이 향상됨에 따라 좋은 현상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더욱 더 정진에 힘을 가하게 된다[精進覺支]. 마음에서 (선정 삼매의 성취에 의해서 생겨난) 강한 기쁨[희열, 喜; 삐띠]을 맛보기도 하며[喜覺支], 마음과 몸은 편안해지고 안정된다[輕安覺支]. 편안해지고 안정된 마음은 더욱 더 고요한 집중[사마디, 定; 선정 삼매]을 이루게 되며[定覺支],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심신의 온갖 현상들에 대해서 집착하지도 거부하지도 않는 마음의 평정[우뻭카, 捨; 탐진치에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이 한시적으로 유지된다[捨覺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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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무엇이 바른 선정[禪; jhāna, 색계 삼매]인가?

여기, 비구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모든 불선한 것[不善法]을 떨쳐 버리고, 마음의 탐색적 작용[위딱까]와 회귀반성적 작용[위짜라]가 (아직) 있는 상태에서, (감각적인 욕망과 불선법, 또는 세속, 또는 신체 감각을) 멀리 떠남에 의해서 생겨난 희열[삐띠]과 행복[수카]이 있는, 그리고 (삐띠와 수카에 대한)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사띠와 빠자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 마음의 전일성, 찟따-에깍가따citta-ekaggata]을 갖춘 첫 번째 선정[초선정; 初禪]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 이것이 욕계[欲界; 감각적 욕망의 세계]를 벗어난 색계[色界; (미세한)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삼매[禪, 禪定, 색계 삼매, jhana]의 첫 번째 단계이다. 이 초선정[初禪]은 다섯 감각에 대한 인식 활동의 일시적인 정지와 오개[五蓋; 다섯 가지 덮개]의 일시적인 소멸과 마음집중의 힘을 통해서 얻어진다.]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한 비구에게는 다음과 같은 마음의 다섯 가지 작용[요소 또는 현상; 五禪支]이 있다.

(1) 위딱까[vitakka, 尋; 탐색적 작용]와 
(2) 위짜라[vicara, 伺; 회귀반성적 작용]가 있고
(3) 희열[喜, piiti], 
(4) 행복[樂, sukha],
(5) 심일경성[心一境性, 마음이 하나로 모여짐; citta-ekaggata]이 있다.

中部 43 <有明大經> MN I, 294

[* 첫 번째 선정[初禪]에서 작용하는 마음의 다섯 가지 요소(작용 또는 현상)를 초선정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라고 한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 의하면, 위딱까[尋, vitakka]는 물병을 잡는 행위에 비유되고, 위짜라[伺, vicara]는 잡은 물병을 놓아버리는 (집착을 닦고 놓아버리는) 행위에 비유된다. 초선정 상태처럼 마음이 완전히 몰입되어 있을 때, 위딱까는 산만함이 없어지고 탐색하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 초선정[初禪]에서는 위딱까-위짜라가 함께 작용하고 있지만, 이 두 가지는 두 번째 선정[二禪] 이후에는 완전히 없어진다.]

<역주 : 부처님께서는 삼매를 색계 삼매(물질을 집중 대상으로 드는 삼매)와 무색계 삼매(비물질을 집중 대상으로 드는 삼매)로 구분하셨는데, 특히 색계 삼매를 자나[jhāna, 선禪; 선禪은 자나..선나..선으로 변천된 자나의 한문 음사]라고 칭하셨다. 한문(중국어) 번역 경전에서는 대개 자나를 선(禪) 또는 선정(禪定)이라고 하는데, 정(定)은 사마디[Samādhi, 삼매三昧; 삼매三昧는 사마디의 한문 음사]를 한문으로 뜻 번역한 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선정(禪定)은 '자나사마디'(선삼매禪三昧)다. (이하 '자나[jhāna; 색계 삼매]'를 '선정 또는 선정 삼매'로 표기함)

자신이 든 삼매가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초선정 삼매인지 아닌지는 마음 상태(또는 마음 작용)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소가 있는지를 점검하고 확인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요소가 진정 무엇인가(어떤 것인가)는 초선정 삼매에서 나온 직후에 초선정 상태를 반조(返照;되돌아 비추어 봄)해서 스스로 확인하고 알아내야 한다.

• 위딱까[vitakka; 尋(찾을 심), 尋求(찾을 심 + 구할 구)] : 니밋따[nimitta; 초선정 삼매 상태에 진입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마음 상태에 대한 물질적 표상; 경우에 따라서는 니밋따 없이 초선정에 드는 경우도 있음]가 아니라, 지복[至福; 삐띠와 수카]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여 움켜쥐는 탐색적 작용. 위딱까는 일종의 집착 작용이기도 하다.

• 위짜라[vicara; 伺(엿볼 사), 伺察(엿볼 사 + 살필 찰)] : 위딱까(일종의 집착 작용)에 의해 멀어지는 초선정의 지복을 다시 무의식적으로 (집착을 반성하고) 놓아버림으로써 지복으로 반복하여 되돌아가는 회귀반성적 작용. 위딱까-위짜라 반복 과정은 초선정 상태의 미세한 흔들림(마음의 미세한 진동, 동요)이다.

• 삐띠[piti; 희喜, 희열喜悦] : 고요한 희열(喜悦), 기쁨. (수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다소 거친 기쁨)

• 수카[sukha; 락樂, 안락安樂, 행복幸福] : 깊고 고요한 행복(幸福), 평온하고 아늑한 행복감.

• 찟따-에깍가따[citta-ekaggata, 심일경성心一境性] : 마음이 완전히 한 곳으로 고요히 모여 있는 상태, 순수 고요집중. 고요한 멈춤, 시간의 멈춤, 시공(時空) 초월, 영원함, 비이원성(非二元性; 무분별) 등으로 느껴지기도(경험되기도) 한다.

초선정에서는 '지복(至福; 지극한 행복), 삐띠(고요한 희열; 다소 거친 기쁨)와 수카(고요한 행복)'에 대한 '미묘하고도 확실한 자각[정념正念과 정지知正; 삼마사띠와 삼빠자나]의 심일경성[찟따-에깍가따]'을 이루며 삐띠와 수카는 구분되지 않는다. 세 번째 선정(3선정, 三禪)에 도달해서야 이 둘(삐띠와 수카)이 분리되고 수행자는 3선정에서 나온 후에 반조를 통해서 삐띠와 수카를 구분하게 된다.

‘삐띠와 수카’는 물질세계(오감각의 세계, 감각적 욕망의 세계, 욕계欲界)의 어떤 것도 능가(초월)하는 ‘지복(至福, 지극한 행복, 더 없는 행복)’으로 경험된다. 마음 상태에 위의 다섯 요소가 존재하고, 물질적인 오감각(신체 감각)의 인식(전오식前五識)을 포함하여 그 외의 어떤 것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때가 초선정 상태다.

초선정 삼매는 일상의식으로는 알 수도 없고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지극한 행복(至福), 신성한 황홀경, 마음의 청정함, 청정한 성스러움, 고요한 멈춤, 자아(自我; 스스로自 '나我'라는) 의식 사라짐, 비이원성(무분별), 궁극성, 시간의 멈춤, 시공(시간-공간) 초월 등의 느낌이 부수적으로 동반되는 체험이므로, 그 체험(느낌)은 수행자를 압도한다

이러한 (초선정 또는 유사) 삼매의 체험(느낌)에 압도되어 미혹한(현혹된) 사람은 이 체험(느낌)을 자신이 믿는 어떤 '신(절대자, 신격화된 부처, 예수, 알라, 브라만, 샤머니즘의 장군신, 조로아스터교의 거룩한 불의 신 .. 등)과의 합일 또는 접신, 신의 은총이나 강림 따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경험(신비체험)이나 축복' 따위로 오해하기도 한다

'바른 삼매'[정정正定, 삼마 사마디; 바른 몰아 고요집중] 상태를 경험하게 하는 수행(수련, 훈련)을 부처님께서는 '사마디(삼매) 바와나(계발 수행) = 사마타'라 칭하셨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의 측면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여 가르치셨는데, '바른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을 지칭하는 사마타는 '정정진(바른 노력/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 바와나를 통칭하신 것이다.

바른 삼매 상태의 경험은 절대자, 신, 신격화된 부처, 예수, 알라, 브라만, 샤머니즘의 장군신, 조로아스터교(중국에서는 불을 숭상한다 해서 배화교라 불렸다)의 거룩한 불의 신 .. 등의 은총이나 강림 따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경험(신비체험)이 아니라,

언제 하든, 어디서 하든, 누가 하든 상관 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과학적 경험처럼, 언제 하든(2500년 전에 하든 지금 하든), 어디서 하든(인도에서 하든 한국에서 하든 미국에서 하든), 누가 하든 상관 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에게나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마음의 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대한 경험이므로 일종의 과학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은 아니다.

바른 삼매(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들어가면 외부의 오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신체 감각; 전오식)이 전혀 인식되지 않고(전오식 사라짐; 오감각으로부터의 해탈?) '나(我) 또는 내 몸'이 사라진 듯이 느껴진다. 무아(無我)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自)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자아의식, 아상我相)이 바른 삼매 상태에서는 한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여기서 몰아(沒我)는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 또는 자아의식이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잠길 몰沒) 상태를 의미한다.>

<역주 :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념(念, 생각 념; 마음에 둠, 기억함)이라고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사띠[sati]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전념하여 또는 마음챙겨 알아차림, 빠자나[pajāna; 알아차림/앎], 깨어있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사띠[sati]는 대개 빠자나[pajāna; 바른 알아차림]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마음챙김[사띠]과 알아차림[빠자나]으로 분리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정념(正念)이라고 번역하는 삼마사띠[samma-sati]도 대개 삼빠자나[sam-pajāna; 바른 알아차림/앎]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바른 마음챙김[삼마사띠]과 바른 알아차림[삼빠자나]으로 분리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참고로 삼빠자나[sam-pajāna]에서 ‘삼[sam]’을 빼면 ‘빠자나[pajāna]’인데, ‘빠자나’의 동사형이 ‘빠자나띠[pajanati]’다. ‘삼’은 흔히 ‘삼붓다, 삼보리, 팔정도의 삼마사띠(바른 사띠) 등등’에서처럼 단어 앞에 붙는 접두어로 ‘바른’이라는 뜻이다. 빤냐[paññā; 慧, 지혜; 반야는 빤냐의 한문 음사]의 동사형도 ‘빠자나띠’다.>

다시 비구들이여, 
위딱까-위짜라(마음의 미세한 진동, 동요)를 가라앉혀서 (더욱) 고요[평온, 평정, 우빽카]한 상태에 머문다. (위딱까-위짜라가 없는) 삼매에 의해서 생겨난 희열[삐띠]과 행복[수카]의 정결함[浄, 浄潔, sampasadana]이 있는, 그리고 (그 삐띠와 수카에 대한) (더욱)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사띠와 빠자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 찟따-에깍가따]을 갖춘 두 번째 선정[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다시 비구들이여, 
(상대적으로 거친) 희열[삐띠]을 가라앉혀서 (더욱 더) 고요[평온, 평정; 우뻭카]한 상태에 머문다. 성인(예류자~아라한)들이 말하는 '우뻭카(고요함, 평정심)와 사띠를 지니고 행복[수카]에 머문다'고 하는, (더욱 더) 고요한 평정심[우뻭카]에서 오는 행복감[수카]에 대한 (더욱 더)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사띠와 빠자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갖춘 세 번째 선정[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다시 비구들이여, 
이미 기쁨과 슬픔의 느낌은 완전히 끊어졌고, 이제 괴로움[둑카]도 즐거움[행복; 수카]도 떠나서(벗어나서, 뛰어넘어서), (둑카와 수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온전한 고요함[평정심; 우뻭카]에 의한 사띠의 청정함이 있는[또는, 우뻭카와 사띠가 청정하게 된; upekkha-sati-parisuddhi], 그리고 (온전히 청정해진) 우뻭카(고요함, 평정심)에 대한 (온전히)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사띠와 빠자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갖춘 네 번째 선정[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선정‘[사선정; 四禪]이라고 한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역주 : 부처님께서는 사마타[사마디 바와나; 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 후에 하는 깊은 빤냐[慧;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를 위빠사나라 칭하셨다. 위빠사나는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바른 관찰/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 계발 수행을 통해서 빤냐[바와나빤냐, 수행지혜, 통찰지혜; 수행의 통찰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는 수행이다.

위빠사나에 필요한 '고요집중의 사띠와 평정심[우뻭카; 탐(갈망, 탐욕)•진(혐오, 성냄)•치(탐과 진에 대한 집착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평정한 마음 상태]'은 4선정 삼매에서 극대로 계발된다.

4선정 삼매에서 극대로 계발되는 고요집중의 사띠와 평정심[우뻭카; 탐진치에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도 선정 삼매에서 나온 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잦아들어 사라지고 다시 탐진치의 번뇌가 되살아난다. 삼매에서 계발되는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는, 수행자가 들었던 삼매의 깊이와 수행자가 처한 주변환경(경계)에 따라 다르지만, 4선정 삼매에 들었다 나온 경우 길게는 수 일 동안 '한시적'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선정 삼매에서 나온 후 법열(法悅; 삼매 체험으로 생기는 무아지경의 황홀경)에 취해서 허송세월하지 말고, 선정 삼매 상태에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를 이용해서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사띠를 확립함'(사념처四念處 수행을 함)으로써 자신과 세상의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통찰(깊이 관찰)하여 꿰뚫어 보고 바르게 깊이 분석 사유하는 깊은 정견·정사유를 계발하여 깊은 빤냐(반야;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꿰뚫어 아는 통찰 지혜)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해야 한다고 누누이 설하셨다.

사마타 후에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해 여러가지로 깊이 정견(바른 관찰/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하는 위빠사나를 하다가 몸이 피곤해지거나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 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가 약해지거나 또는 더 깊은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가 필요해지면 수행자는 하시라도 사마타를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누누이 설(설명)하셨듯이 '팔정도 바와나, 계[戒, 실라; 정어·정업·정명]•정[定, 사마디; 정정진·정념·정정]•혜[慧, 빤냐;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 = 실라•사마타•위빠사나'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의 바와나(계발 수행)이다. 즉 실라•사마타•위빠사나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된다. 실라를 바탕으로 사마타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사마타는 실라를 더 발전향상시킨다. 사마타를 바탕으로 위빠사나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위빠사나는 사마타를 더 발전향상시킨다.>

<역주 : 탐(갈망, 탐욕)·진(혐오, 성냄)·치(어리석음).
갈망(탐욕; 탐)과 갈망의 다른 측면인 혐오(성냄; 진) 그리고 탐과 진에 대한 집착의 어리석음(치)은 모두 딴하[tanhā; 갈애]의 한 측면이다. 갈망(탐욕; 탐, 좋아함)에 집착하기도 하고, 혐오(성냄; 진, 싫어함)에 집착하기도 하고, 어리석음(치)으로 인해 집착하기도 한다. 딴하(갈애)는 탐진치를 통칭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딴하[tanhā; 갈애]가 둑카[dukkha; 존재의 근원적 괴로움, 苦]의 근본 원인이라고 설하셨다(집성제).>

<역주 : 수행이 진전되면서 생겨나는 칠각지[七覺支; 정각으로 인도하는 원인이 되는 일곱 가지 요소]가 경험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긍정적인 현상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수행의 핵심은 사띠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현상들도 사띠의 대상일 뿐이다. 경험되면 바로 알아차리고 ‘일차적인 사띠의 대상’(호흡 등)으로 마음을 돌려야 한다.

칠각지[七覺支; 정각으로 인도하는 원인이 되는 일곱 가지 요소]는 『청정도론』에서 제시된 위빠싸나를 닦는 수행자가 경험하게 되는 10가지 번뇌(十觀隨染)와 대조해보면 흥미롭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위빠사나를 닦는 수행자가 경험하게 되는 10가지 번뇌를 설명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에 따르는 10가지 번뇌(十觀隨染)는 모두 처음 위빠사나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행자에게만 생기는 번뇌이다.(Vism .633-638) 10가지 번뇌(十觀隨染)란 다음과 같다.

①光明(obhasa; 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하기도 하고), ②知(냐나nana;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듯이 이해되기도 하며), ③喜(piti; 몸에 전율을 느낄 정도의 희열이 생기기도 하고), ④輕安(passaddhi; 몸과 마음이 아주 안정되어 편안해지며), ⑤樂(sukha; 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 아주 강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며), ⑥勝解(adhimokkha; 강한 신심이 생겨나기도 하고), ⑦努力(paggaho; 더욱더 수행에 전념하여 지나칠 정도로 정진하기도 하며), ⑧現起(upatthana; 흔들림 없는 사띠가 뚜렷하게 항상 자리 잡고 있는듯하기도 하고), ⑨捨(upekkha;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이 흔들림 없이 항상 평정한듯하기도 하고), ⑩欲求(nikanti; 이러한 제 현상들에 대하여 알아차리기 힘든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난다).

수행 도중에 위와 같은 현상을 경험하게 되면,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미세한 욕망이 마음에 있는가를 잘 살펴서 조금이라도 집착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번뇌라고 마음챙겨 알아차리고 계속해서 수행을 해 나아가야 한다. 위빠싸나 수행에 따르는 10가지 번뇌와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와의 차이는 집착 또는 욕망이라는 번뇌에 있다. 칠각지[七覺支; 정각으로 인도하는 원인이 되는 일곱 가지 요소]와 같이 수행을 통해서 얻은 좋은 현상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위빠싸나 수행에 따르는 10가지 번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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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네 가지 고귀한 진리[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사띠의 확립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낸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네 가지 고귀한 진리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올바르게[있는 그대로, 여실히; yathabhutam]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원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올바르게 안다.

中部 『念處經』

<역주 : 장부(長部, 디가니까야 DN) 『대념처경(大念處經)』에서 상세하게 설해져 있는 사성제의 자세한 내용에 대한 부분(DN II, 305-313)은, 4.5 절에서 중부(中部, 맛지마니까야 MN)의 『염처경(念處經)』을 인용하고 있는 냐나띨로까 비구의 편집에 따라서 생략한다.

장부의 『대념처경』과 중부의 『염처경』의 차이는 바로 사성제에 대한 설명에 있다. 『대념처경』에서는 자세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음에 반해서 『염처경』은 위와 같이 간단하게 사성제에 대한 항목만이 설해져 있다.

사성제는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을 대표하는 교설이다. 불교는 다름 아니라 괴로움(苦)이라는 인간의 현실 상황에 대한 파악과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열반(涅槃)을 설한 가르침이다. 사성제에 대한 이해는 불교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사성제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법[四聖諦]에서 (어떤) 현상[法]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법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법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사성제[四聖諦]라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302-3

<역주 : ‘네 가지 고귀한 진리[사성제四聖諦]라는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 수행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사념처[四念處; 네 가지 사띠의 확립] 수행에 대한 설명이 막을 내렸다. 앞에서도 누누이 설명했듯이 사성제에 대한 사띠의 확립도 이론적으로 사성제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파악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성제에 대한 사띠의 확립이 마지막에 제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사성제에 대한 체험적 이해는 열반의 체험으로 완성되는 것이므로, 사념처[四念處; 네 가지 사띠의 확립] 수행도 궁극적으로는 열반의 체험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열반의 체험은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멸진滅盡]한 아라한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세 가지 명지[밝은 지혜; vijja], 삼명(三明), 즉 숙명명, 천안명, 누진(멸진)명'의 성취를 통해서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바르게 꿰뚫어 보는 스스로의 체험으로 법(法; 현상, 실상과 진리, 사성제)을 완전히 바르게 알면 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붓다, 부처, 아라한; 석가모니 부처님도 아라한이다. 스승으로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아라한]가 된다.>

<역주 :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법(法; 현상, 실상과 진리, 사성제)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보실 수 있었을까?

쌍윳따니까야 제5권의 삿짜[sacca; 1.진리, 2.사상제] 쌍윳따(상응) 품의 『삼매경[사마디 숫따], SN.V.XII.i.1』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바른 삼매[正定]를 계발하라. 바른 삼매를 얻으면 비구는 담마[法]를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안다. 비구가 무엇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가?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삼매경[사마디 숫따], SN.III.I.i.5; 쌍윳따니까야 제3권 칸다(무더기) 쌍윳따(상응), 제1편, 제1품, 제5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바른 삼매[正定; 삼마 사마디]'를 계발해야 한다. 충분한 삼매가 있으면, 현상[Dhamma, 法; 연기현상]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볼 수 있다. 현상(法)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면 현상(法)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色) 작용 무더기의 일어남과 사라짐, 감각(느낌; 受)·표상(想)·상카라(行)·식(識; 의식+무의식) 작용 무더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요히 잘 집중된 비구는 오온(색·수·상·행·식 작용 무더기)과 그 원인(연기; 인因-직접조건/직접원인과 연緣-간접조건/간접원인) 그리고 그것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잘 안다. 그 원인이 일어날 때 오온이 일어나고, 그 원인이 소멸될 때 오온도 소멸되는 것을 비구는 분명히 보고 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유사정법경(類似正法), 상윳따니까야 S16:13』에서 '여래가 가르친 바른 삼매(正定)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는 유사정법(類似正法)의 출현'을 엄중히 경고하신다.

"깟사빠여, 중생들이 하열해지고 정법(正法)이 사라질 때에는 학습계목은 더 많아지지만 구경의 지혜에 안주하는 비구들은 더 적어진다."

"깟사빠여, 예를 들면 황금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지 않으면 황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황금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면 황금은 사라지게 된다. 그와 같이 유사정법이 세상에 생기지 않는 한 정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유사정법(類似正法)이 세상에 생기면 정법(正法)은 사라지게 된다."

"깟사빠여, 자연현상이 정법을 사라지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쓸모없는 인간(사자충)들이 나타나서 이 정법을 사라지게 만든다."

"깟사빠여, 여기 사부대중(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이 여래(부처님이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의 가르침에 따른 공부지음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여래가 가르친 '바른 삼매(正定)'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깟사빠여, 이런 유해한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여러 경전들을 읽다 보면 법(法; 현상, 실상과 진리, 사성제)을 여실지견(如實之見; 있는 그대로 바르게 봄)하기 위해서 '바른 삼매(正定)'를 계발할 것을 누누이 강조하시고 당부하시는 부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바른 삼매를 계발하여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사념처[四念處; 네 가지 사띠의 확립]를 완성하고 법[法, Dhamma; 현상, 실상과 진리, 사성제]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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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네 가지 사띠의 확립[四念處]의 이익 - 사념처[四念處; 네 가지 사띠의 확립] 수행에 의한 깨달음의 보증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네 가지 사띠의 확립’[四念處]을 이와 같이 7년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Anagami; 아나함, 불환不還]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7년은 그만 두어도 좋다 (7년은 걸리지 않아도 좋다).
이 네 가지 사띠의 확립을 이와 같이 6년간, ... 5년간, ... 4년간, ... 3년간, ... 2년간, ... 1년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아나함)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1년은 그만 두어도 좋다. 
이 네 가지 사띠의 확립을 이와 같이 7개월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아나함)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7개월은 그만 두어도 좋다. 
이 네 가지 사띠의 확립을 이와 같이 6개월간, ... 5개월간, ... 4개월간, ... 3개월간, ... 2개월간, ... 1개월간, ... 반달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아나함)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반달은 그만 두어도 좋다. 
이 네 가지 사띠의 확립을 이와 같이 7일간 닦는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의 결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결실이 기대될 것이다. 
즉,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의) 지혜를 이루거나,
집착이 남아 있는 경우에는 아나가미(아나함)의 깨달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열반[Nibbana;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ekayano maggo]이다.(THE ONLY PATH TO NIBBANA)
바로 그것은 ‘네 가지의 사띠의 확립’[四念處]이다. 
앞에서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로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설하셨다.
(설법을 들은) 비구들은 만족해하며, 세존의 설법에 대해 환희에 찼다.

長部22 『대념처경大念處經』 DN II, 304-315
아나빠나사띠(호흡관)를 이용한 지관겸수止觀兼修 방식의 사념처 수행경

<역주 : 『대념처경大念處經』과 『염처경念處經』은 마지막으로 사념처四念處 수행을 통해서 열반을 얻을 수 있는 수행 기간에 대해서 설하면서, 사념처 수행에 의한 깨달음을 보증하고 있다.

7년이라는 기간과 7일이라는 기간의 차이는 ‘개개인의 근기; 즉 살아오면서(윤회하면서) 겪은 경험(모든 일상적인 경험과 수행 경험), 그 경험에 의해 형성된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여러 가지 능력(이치를 이해하는 능력, 인내력, 집중력..) 등등의 차이’와 '얼마나 철저하고 치밀하고 바르게 수행[수련, 식카띠sikkhati; trainning oneself, 자신을 훈련시킴, 스스로를 훈련시킴]을 하는가 하는 개개인의 수행의 차이’에 있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을 당시에는 바보라 불릴 정도로 일반인에 비해 지적능력이 매우 부족했던 쫄라빤따까(일명 바보 주리반특)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수 년 간 수행하여 정각을 증득한 사람[아라한]이 되었다. 사리뿟따(사리불, 사리자; '사리'라는 여인의 아들子)는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15일 만에 아라한이 되었고, 이미 네 단계 선정의 자유자재와 네 단계 무색계 삼매를 모두 이룬 수행 상태였다고 추정되는 바히야 따루찌리야는 탁발하러 가시는 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하여 듣고 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수행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아라한이 되었다.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지금 이 생에서 아라한이나 아나함이 될 수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자신의 선택이다. 부처님은 길을 가리키는 분이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누구도 그 길을 대신 가줄 수는 없다. 그 길은 각자 자신의 발로 한발 한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펼쳐 놓으신 바른 수행에 대한 바른 가르침[正法]이 오늘날에도 바르게 전승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정각으로 가는 올바른 길을 안내하기를...>

<역주 : 부처님께서는 매일 제자들과 함께 탁발을 하셨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무언(無言, 또는 묵언黙言)의 탁발은 수행의 일환이기도 했다. 부처님께서는 탁발을 나가시기 전에 묵언의 탁발 수행에 대해 미리 제자들에게 자세히 가르치셨다. 부처님께서는 탁발 중에는 설법을 하지 않으셨는데, 천리길을 달려와 탁발하러 가시는 부처님께 가르침을 청하는 바히야에게만은 유일하게 아래와 같은 설법을 하셨다.

볼 때, 단지 ‘보여 지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seen will be merely what is seen;

들을 때, 단지 ‘들려지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heard will be merely what is heard;

감각(후각, 미각, 촉각)을 느낄 때, 단지 ‘느껴지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sensed will be merely what is sensed;

인식(생각, 기억, 감정 등의 정신감각을 인식)할 때, 단지 ‘인식되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cognized will be merely what is cognized.

이와 같은 방법으로 네 자신을 수련(training oneself, 훈련, 식카sikkhā; 계발 수행, 바와나bhavana)해야 하느니라. 바히야여!
In this way you should train yourself, Bahiya!

<바히야경(Bāhiya Sutta), Udana 1.10>

“'보고, 듣고, 냄새, 맛, 촉감' 등(의 물질감각, 오감각)을 느끼고, ‘생각, 기억, 감정' 등(의 정신감각)을 인식하는 ‘여섯 감각’에 대한 인식작용을 할 때, 눈에 보여지는 것(눈의 감각), 귀에 들려지는 것(귀의 감각), 코의 감각, 혀의 감각, 몸의 감각, 마노-인드리야[mano-indriya, 의근意根; 뇌를 기반으로 한 정신감각 기능]의 감각 등 ’여섯 감각‘만 있게 하여라."

아(我)가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분별없이 객관적으로 ’여섯 감각 받음(受) 무더기(蘊), 수온[受蘊; 웨다나 칸다]‘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사띠[sati, 念; 마음챙겨 알아차림]하도록 스스로를 수련(훈련, 수행)하라는 것이 부처님께서 바히야에게 가르치신 사띠-빳타나[sati-patthana, 念處; 사띠 확립] 수행의 핵심 요체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히야는 미친 소에 받혀서 죽어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히야는 아라한과를 성취한 후에 죽었으니 아라한의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주라"고 하셨다.

이미 네 단계 선정의 자유자재와 네 단계 무색계 삼매를 모두 이룬 수행 상태였다고 추정되는 바히야 따루찌리야는 탁발하러 가시는 부처님께 위와 같은 가르침[바히야경(Bāhiya Sutta), Udana 1.10]을 듣고 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수행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정각을 증득한 아라한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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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illowing the Buddha's sammā Dhamma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벗어나기를, 해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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