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빠나사띠(호흡관)를 이용한 지관겸수止觀兼修 방식의 사념처 수행경
여기에 포스팅하는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과 보충설명은 냐나띨로까 비구가 빠알리어(갠지스 강 유역의 고대인도의 민중어 중 하나로 부처님 말씀을 경전으로 기록하던 당 시대에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고대인도 민중어)로 기록된 경전모음인 니까야에서 발췌하여 독일어로 번역 편집한 『붓다의 말씀(Das Wort des Buddha; The Word of the Buddha)』 가운데 사성제[四聖諦] 챕터(chapter, 章) 중에 도성제[道聖諦]의 팔정도 챕터의 정념[正念] 절(4장 7절)에 수록된 것으로 정원 김재성님이 우리말로 옮긴 것을 일부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본 포스팅은 『대념처경[大念處經;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의 전반부에 대한 포스팅입니다.
냐나띨로까(Nyanatiloka) 비구는 니까야에 실려있는 많은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Buddhist Dictionary(https://
『붓다의 말씀(Das Wort des Buddha; The Word of the Buddha)』은 1946년에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에 ‘고요한 소리’출판사에서 한글로 번역(김재성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The Word of the Buddha(영문판): http://
범례
[*]의 문장은 냐나띨로까 비구의 보충설명
<역주>는 역자의 보충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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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 냐나띨로까 비구가 <붓다의 말씀(Das Wort des Buddha)>을 니까야에서 발췌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소수의 지배계층(브라만계급)이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당시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갠지스강(항하恒河) 유역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마가다(Māgadha)국의 대중들이 사용하던 고대인도 민중어인 마가다어를 사용해서 설법을 하셨다. 그러나 마가다어는 사장되었고 마다다어와 가장 (거의) 유사한 고대인도어가 빠알리(Pāli)어인데, 이 빠알리어가 후대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 모음인 니까야(Nikāya)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빠알리어는 부처님 말씀을 경전으로 기록하던 당 시대에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던 고대인도 민중어였기도 하다.
(참고로 2001년 기준으로 인도에는 총 3,372개의 언어가 존재하며 이중 10만 명 이상의 인구가 사용 중인 언어는 216개, 헌법이 인정한 지정 언어는 22개이다.)
부처님께서 입멸(빠리-닙바나, 무여열반)하신 직후 얼마 동안은 제자 아라한들이 부처님 말씀(가르침, 법法)을 합송으로 후대에 전달했다. 합창을 하면 한 사람이 틀린 것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합송으로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대한 변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아라한의 수가 줄어들고 전쟁 등의 장애요소가 생기고 부처님 말씀(가르침, 법法)을 전파하는 지역이 넓어지면서 문자로 기록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겼다.
니까야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언행록(言行錄;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을 적어 모은 기록)이다. 이 언행록에 실려있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부처님의 생활(行)은 매우 검소하고 소박하면서도 정갈하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설법(법法을 설명)하시는 부처님의 언어(言) 또한 매우 소박하면서도 적확(적절+명확)하다.
니까야는 부처님의 최초 설법인 초전법륜경에서부터 마지막 설법인 대반열반경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하여 모아 놓은 빠알리어 경장(經藏; 경전 모음)으로 5부(部)로 분류되어 있다. 니까야는 '디가니까야(長部), 맛지마니까야(中部), 상윳따니까야(相應部), 앙굿따라니까야(增支部), 쿳다까니까야(小部)'로 구성되어 있다.
빠알리어로 기록된 니까야를 산스크리트어로 옮겨서 편찬한 경전 모음을, 이른바 대승경전(금강경, 화엄경, 법화경, 정토경 등)이 중국어(한문)로 번역되던 AD 5세기 경 이후에, 중국에서 번역 편찬한 경전 모음이 아함경(阿含經)이다. 아함(阿含)은 산스크리트어 아가마(āgama)를 중국어(한문)로 음사한 것으로 법장(法藏) 또는 전교(傳敎)라고 한역된다. 산스크리트어 아가마(āgama)의 뜻은 전승(傳承), 즉 붓다(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서 전해져 내려왔다는 뜻이다. 아함경(阿含經, 아가마 수트라)은 '붓다의 말씀(가르침, 법法)을 전하는 경전 모음'이라는 뜻이다. 아함경은 장(長)아함, 중(中)아함, 잡(雜)아함, 증일(增一)아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니까야와 아함경은 생각보다 꽤 차이가 있다. 그 원인은 첫째, 옛날에는 요즘처럼 정보의 전달이 상대적으로 원활하고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즘보다 번역 시 오류가 상대적으로 많다. 둘째, 산스크리트어로 편찬된 불교 경전을 중국에서 번역하던 시대의 중국인들은 금강경, 화엄경, 법화경과 같은 주요 대승경전에 비해서 아함경을 그리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함경의 번역에 상대적으로 심혈을 기울이지 않았고 번역이 상대적으로 정교하지 못하고 허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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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서언
<역주 : 아함경(阿含經)에 수록된 『대념처경(大念處經)』의 원문은 빠알리어로 기록된 니까야에 수록된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Mahā Sati-Paṭṭhāna Sutta]』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마하[mahā]는 대(大)로, 사띠[sati]는 념(念)으로, 빳타나[paṭṭhāna]는 처(處)로 번역하였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념(念, 생각 념; 마음에 둠, 기억함)이라고 번역하는 사띠[sati]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전념하여 또는 정신차려서 또는 마음챙겨서 알아차림, 빠자나[pajāna; 알아차림/앎], 깨어있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mindfulness(주의깊음, 마음챙김), awareness(자각함), memory(기억함), recognition(알아차림),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깨어있음) of mind, alertness, lucidity of mind, self-possession, self-consciousness' 등으로 번역한다.
념(念)은 '지금(今)+마음(心)'의 합성어다. 사띠[sati]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지금(현재 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또는 작용)을 ‘전념하여(바르게 기억하여 또는 바르게 새겨) 마음챙겨서 알아차림' 정도로 표현하면 유사하다. 사띠[sati]는 대개 빠자나[pajāna; 알아차림]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된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처(處, 곳 처; 거주함, 머뭄)라고 번역하는 빳타나[paṭṭhāna]는 부처님 설법(법을 설명함)에서 ‘확립(함), 세움, 드러냄’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영어 경전에서는 'setting forth, putting forward’ 등으로 번역한다.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대념처경(大念處經)』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띠[sati; 마음챙겨서 알아차림]의 확립[빳타나paṭṭhāna]에 대한 큰 경』 정도로 표현하면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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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깜마사담마라고 하는 꾸루 족의 마을에 머무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열반[Nibbana;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ekayano maggo]이다.(THE ONLY PATH TO NIBBANA)*
그것은 바로 ‘네 가지(四) 사띠[sati, 念]의 확립[paṭṭhāna, 處]’(사념처四念處)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1)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신념처身念處]
비구들이여, 여기(이 가르침)에서
어떤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사띠를 지니고, 분명한 앎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혐오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2) 느낌에 대한 사띠의 확립[수념처受念處]
그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사띠를 지니고, 분명한 앎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혐오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3) 마음에 대한 사띠의 확립[심념처心念處]
그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사띠를 지니고, 분명한 앎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혐오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4)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법념처法念處]
그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사띠를 지니고, 분명한 앎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혐오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역주 : 불교 경전과 논서들에서 고타마 싯달타 붓다(석가모니 부처님)를 흔히 세존(世尊)이라 호칭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온갖 공덕을 원만히 갖추어 세상을 이익케 하시고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과 존중을 받으신 분이므로 세존(世尊)이라고 호칭한 것이다.>
[* 부처님께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이 네 가지에 대한 사띠를 확립(四念處)'하는 것이 모든 중생들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열반[Nibbana; 완전한 행복]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THE ONLY PATH TO NIBBANA)이라고 단언하신다.]
<역주 : 한문 경전에서 념(念, 생각 념; 마음에 둠, 기억함)으로 번역하는 사띠[sati; 마음챙겨 알아차림]가 빠자나[pajāna; 알아차림]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한문 경전에서 정념(正念)으로 번역하는 삼마사띠[samma-sati]는 삼빠자나[sam-pajāna; 바른 알아차림, 正知]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된다. 즉, 삼마사띠[samma-sati] = 정전념[正專念; 바른 전념, 바른 마음챙김] + 정지[正知, 삼빠자나sam-pajāna; 바른 알아차림].
따라서 삼마사띠[samma-sati]를 한문으로 번역할 때 정념(正念)이 아니라 정념지(正念知) 또는 정전념지(正專念知)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삼마사띠의 의미를 비교적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다.>
<역주 :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이 위빠사나를 설하는 가르침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사마타 수행으로 선정(초선정~4선정) 삼매를 계발하여 성취하지 않고 하는 위빠사나'(소위 마른 위빠사나)만을 가르치는 마하시 수행쎈터 등 일부 남방불교에서는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大念處經]』는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선정(초선정~4선정) 삼매를 계발하여 성취할 것을 설하시는 내용이 포함 수록되어 있는 사마타-위빠사나에 대한 가르침이다.
바른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을 부처님께서는 '사마디(삼매) 바와나(계발 수행) = 사마타'라고 칭하셨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바와나[bhavana; 계발 수행]의 측면에서, 실라[sila, 계戒; 정어·정업·정명], 사마디[samadhi, 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빤냐[panna, 혜慧; 정견·정사유] 세 그룹으로 그룹핑하여 가르치셨는데, 바른 삼매 계발 수행을 지칭하는 사마타는 '정정진(바른 노력)·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 바와나를 통칭하신 것이다. 그리고 위빠사나는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바른 관찰/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 바와나를 통칭하신 것이다.
마하시 수행쎈터에서 가르치는 바른 삼매(正定)를 계발하지 않고 하는 마하시식 위빠사나(소위 마른 위빠사나)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위빠사나가 아니다. 달리 표현하면 마하시식 위빠사나(소위 마른 위빠사나)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정도(八正道)를 계발하는 수행 중에서 정정(正定; 바른 삼매)을 계발하는 수행을 하지 않는 칠정도(七正道)를 계발하는 수행인 셈이다.
부처님께서는 선정 삼매에서 나온 후, 법열(法悅; 삼매 체험으로 생기는 무아지경의 황홀경)에 취해서 허송세월하지 말고, 선정 삼매 상태에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빽카(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를 이용해서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네 가지) 사띠를 확립함'[사념처四念處 수행을 함]으로써 자신과 세상의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통찰(깊이 관찰)하여 꿰뚫어 보고 바르게 깊이 분석 사유하는 깊은 정견·정사유를 계발하여 깊은 빤냐(반야;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꿰뚫어 아는 통찰 지혜)를 계발(열고 발전향상)해야 한다고 누누이 설(설명)하셨다.
사마타 후에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해 여러가지로 깊이 정견(바른 관찰/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하는 위빠사나를 하다가 몸이 피곤해지거나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빽카(평정심; 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가 약해지거나 또는 더 깊은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빽카가 필요해지면 수행자는 하시라도 사마타를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누누이 설(설명)하셨듯이 '팔정도 바와나, 계[戒, 실라; 정어·정업·정명]•정[定, 사마디; 정정진·정념·정정]•혜[慧, 빤냐; 정견·정사유] 바와나(계발 수행) = 실라•사마타•위빠사나'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의 바와나(계발 수행)이다. 즉 실라•사마타•위빠사나는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된다. 실라를 바탕으로 사마타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계발된 사마타는 실라를 더 발전향상시킨다. 사마타를 바탕으로 위빠사나가 계발(열리고 발전향상)되고 계발된 위빠사나는 사마타를 더 발전향상시킨다.
이렇게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실라•사마타•위빠사나)은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방식으로 완성된다.>
<역주 : 부처님께서는 선정(禪定, 선정 삼매)을 계발하는 수행의 집중 대상은 반드시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당신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집중 대상 중에서 호흡[아나빠나]이 가장 수승(훌륭)하다고 추천하셨다. 즉 부처님께서는 '아나빠나(들숨날숨, 호흡) 사띠'를 통해서 바른 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방법을 가장 추천하셨다. (『아나빠나 사띠 숫따, 안반수의경』 참조)
왜냐하면 호흡은 탐(갈망, 탐욕)•진(혐오, 성냄)•치(탐과 진에 대한 집착의 어리석음)를 일으키지 않으며, 우리 몸에 있는 수 많은 신체 작용(물질 작용) 중에서 '무의식적인 작용이면서도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또한 '자연스럽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동적인) 작용이면서도 의도적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작용(또는 현상)으로 죽을 때까지 우리 몸에 항상 있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마타[사마디 바와나; 삼매 계발 수행, or 사띠 초점확립 계발 수행]에서 호흡은 사띠를 거친 수준(거친 감각,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수준)에서 미세한(또는 깊은) 수준(미세한 감각,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 수준)으로 건너가게 하는 아치형태의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사마타, 위빠사나 수행을 하다보면 거친 수준에서부터 점점 더 깊은(또는 미세한) 수준까지 여러 수준의 사띠가 있음을 알게 된다.>
<역주 : 쌍윳따니까야 제3권의 칸다(무더기) 쌍윳따(상응) 품의 『삼매경[사마디 숫따], SN.III.I.i.5』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바른 삼매[正定; 삼마 사마디]'를 계발해야 한다. 충분한 삼매가 있으면, 현상[Dhamma, 法; 연기현상]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볼 수 있다. 현상(法)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면 현상(法)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色) 작용 무더기의 일어남과 사라짐, 감각(느낌; 受)·표상(想)·상카라(行)·식(識; 의식+무의식) 작용 무더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요히 잘 집중된 비구는 오온(색·수·상·행·식 작용 무더기)과 그 원인(연기; 인因-직접조건/직접원인과 연緣-간접조건/간접원인) 그리고 그것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잘 안다. 그 원인이 일어날 때 오온이 일어나고, 그 원인이 소멸될 때 오온도 소멸되는 것을 비구는 분명히 보고 안다.“
쌍윳따니까야 제5권의 삿짜[sacca; 1.진리, 2.사상제] 쌍윳따(상응) 품의 『삼매경[사마디 숫따], SN.V.XII.i.1』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바른 삼매[正定]를 계발하라. 바른 삼매를 얻으면 비구는 법(法; 진리)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안다. 비구가 무엇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가?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유사정법경(類似正法), 상윳따니까야 S16:13』에서 '여래가 가르친 바른 삼매(正定)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는 유사정법(類似正法)의 출현'을 엄중히 경고하신다.
"깟사빠여, 중생들이 하열해지고 정법(正法)이 사라질 때에는 학습계목은 더 많아지지만 구경의 지혜에 안주하는 비구들은 더 적어진다."
"깟사빠여, 예를 들면 황금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지 않으면 황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황금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면 황금은 사라지게 된다. 그와 같이 유사정법이 세상에 생기지 않는 한 정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유사정법(類似正法)이 세상에 생기면 정법(正法)은 사라지게 된다."
"깟사빠여, 자연현상이 정법을 사라지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쓸모없는 인간(사자충)들이 나타나서 이 정법을 사라지게 만든다."
"깟사빠여, 여기 사부대중(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이 여래(부처님이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의 가르침에 따른 공부지음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여래가 가르친 '바른 삼매(正定)'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깟사빠여, 이런 유해한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여러 경전들을 읽다 보면 법(法; 현상, 실상과 진리, 사성제)을 여실지견(如實之見; 있는 그대로 바르게 봄)하기 위해서 '바른 삼매(正定)'를 계발할 것을 누누이 강조하시고 당부하시는 부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바른 삼매를 계발하여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사념처[四念處; 네 가지 사띠의 확립]를 완성하고 법[法, Dhamma; 현상, 실상과 진리, 사성제]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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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신념처身念處]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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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호흡(出入息)에 대한 사띠(念)’[출입식념出入息念; 아나빠나 사띠]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서, 다리는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 바로 세우고 전면에 사띠(마음챙겨서 알아차림)을 단단히 하여 앉는다.
그리고는 사띠(마음을 챙겨서 알아차림)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사띠하면서 숨을 내쉰다.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길게 내쉬면서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빠자나띠(pajanati)].
숨을 짧게 들이쉬면서는 ‘숨을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쉬면서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온 몸(호흡의 전 과정)을 파악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한다[식카띠(sikkhati); trains oneself, 자기 자신을 훈련시킨다, 스스로를 훈련시킨다].
(호흡이라는) ‘육체의 작용[身行]을 고요히 안정시키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육체의 작용을 고요히 안정시키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한다.
마치 도자기공이나 그의 도제가 원반을 돌릴 때, 오래 돌리면서는 '오래 돌린다'라고 알아차리며, 짧게 돌리면서는 '짧게 돌린다'라고 알아차리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 '몸이 있다'라는 것은 오직 육체적인 또는 물질적인 현상만이 있지, 거기에 중생, 인격체, 여자, 남자, 자아는 없다는 의미이다. 즉, 몸에는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나, 인격체에 속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역주 : 존재하는 것은 매 순간 생멸하는 무수한 물질적인 작용들이 드러난 물질적인 현상으로서의 육체라는 현상과 이 물질적인(또는 육체적인) 작용과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하는 정신적인 작용들이 드러난 정신적인 현상으로서의 마음이라는 현상만이 있다. 하지만 이때의 정신적인 현상에서도 물질적인 현상과 마찬가지로 남자, 여자, 인격체, 자아 등은 발견할 수 없다. 끊임없이 생멸하며 인과 연기적으로 이어지는 육체(물질작용 무더기)라는 현상과 마음(정신작용 무더기)이라는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DN-a III, 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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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 ‘호흡(날숨들숨, 出入息; 아나빠나)에 대한 사띠(念)’[출입식념出入息念; 아나빠나 사띠]는 가장 중요하고 구체적인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다. 이 방법은 ‘네 가지(四) 사띠(sati, 念)의 확립(paṭṭhāna, 處)’[사념처四念處] 수행에 기반이 되는 수행 방법이며 또한 위빠싸나 수행을 닦기 위한 예비 단계, 또는 선정(초선정~4선정) 삼매를 계발하는 방법이나 사마타-위빠싸나 양쪽을 닦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다.
꾸준한 출입식념[아나빠나 사띠; 호흡에 대한 사띠] 수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 마음의 고요집중(초선정~4선정 가운데 한 가지의 선정)을 얻은 후, 수행자는 호흡의 시작(origin of breath)을 검토한다. 그는 사대[四大; 地水火風]작용과 (코, 입 등의 감각기관, 기도, 허파, 횡경막, 배 등등처럼) 사대작용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물질[色]작용 무더기(색온)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육체에 의해서 호흡이라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의 접촉[觸]으로부터 인식[識]작용 무더기(식온)가 생겨나고, 이 색온, 식온과 함께 오온(五蘊)의 나머지 세 무더기인 ‘느낌[受]작용, 표상[想]작용, 의지[行]작용’의 무더기들이 순환 병행적으로 생겨난다는 사실도 통찰하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른바 인격체라고 불리는 에고라는 실체 또는 자아는 어디에도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다만 여러 가지 요건에 의해서 조건 지워져 있는 육체(물질작용 무더기)라는 현상과 마음(정신작용 무더기)이라는 현상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 흐름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본다. 그런 후, 그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공통적인 세 가지 특성, 즉 그것들이 전적으로 무상(매순간 생멸 변화)하며, 근원적인 괴로움을 내포하고 있으며, 동일한 실체가 없음을 통찰(깊은 관찰) 경험으로써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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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동작(행주좌와行住坐臥 등)에 대한 사띠
또한 비구들이여,
걸어갈 때는“걸어간다”라고 알아차리고,
서 있을 때에는 “서 있다”라고 알아차리며,
앉아 있을 때에는 “앉아 있다”라고 알아차리며,
누워 있을 때에는 “누워 있다”라고 알아차린다.
이와 같이, (행주좌와) 이외의 다른 몸동작이 있을 때에도, 그러한 동작을 그때그때 알아차린다.
<역주 : 위의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대한 빠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나는 걸어간다”, “나는 서 있다”,“나는 앉아 있다”,“나는 누워 있다”라고 번역해야 하지만 우리말에서는 주어인 “나는”이라는 표현을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이 실제의 수행에 비추어 볼 때 더 적합하므로 주어는 전부 생략했다. 빠알리어나 영어와 같은 인구어(印歐語; 인도-유럽어)에서는 문장의 문법구조상 주어가 생략되지 않지만, 실제의 수행에서는 행위의 주체인 “나”라는 존재의 설정이 없어도 행주좌와(行住坐臥) 등의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이 가능하며, 결국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관념)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 수행의 한 목적이라 할 때, “나”라고 하는 행위의 주체를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수행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수행이 향상됨에 따라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나”라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단지 ‘정신적인 현상’(名)과 ‘육체적 혹은 물질적인 현상’(色)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상은 인과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적으로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하는 ‘정신적인 현상’(名)과 ‘물질적인 현상’(色)일 뿐, 어디에서도 실체(동일하고 독립적인)적인 “자아”는 발견할 수 없음을 관찰을 통해서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육체적인 동작이나 행위에 마음을 챙겨서 알아차릴 때, 처음부터 “나는” 또는 “내가”라고 하는 생각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실제의 수행에 있어서 중요하다. 실제로 행주좌와 등의 동작을 알아차릴 때, 간단하게 ‘걸음’, ‘서 있음’, ‘앉음’, ‘누움’이라고 알아차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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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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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분명한 ‘바른 앎’[정지正知; 삼빠자나sampajāna]
<역주 : ‘삼빠자나[sam-pajāna; 바른 앎/알아차림]’에서 ‘삼[sam]’을 빼면 ‘빠자나[pajāna]’다. ‘빠자나[pajāna; 앎/알아차림]’의 동사형이 ‘빠자나띠[pajanati]’다. ‘삼’은 흔히 ‘삼붓다, 삼보리, 팔정도의 삼마사띠(바른 사띠) 등등’에서처럼 단어 앞에 붙는 접두어로 ‘바른’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빤냐[paññā; 慧, 지혜; 반야는 빤냐의 한문 음사]’의 동사형도 ‘빠자나띠’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정지[正知]로 번역하는 삼빠자나[sam-pajāna]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대상에 대한 바른 알아차림/앎, 빤냐로 봄/앎' 정도로 번역하면 유사하다.>
또한 비구들이여,
앞으로 나아갈 때나 뒤로 들아 갈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팔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가사(승복)를 입고, 발우를 들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한 앎을 지니며, 가고, 서고, 앉을 때에도,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에도, 말하거나, 침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닌다.
<역주 : 분명한 ‘바른 앎’[正知; 삼빠자나] 절은 앞의 행주좌와의 동작에 대한 사띠에 이어지는 부분으로, 일상의 모든 육체적인 상태나 동작, 행위를 할 때도 반드시 분명한 앎이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정념[正念, 바른 사띠; 삼마사띠]과 정지[正知, 바른 앎; 삼빠자나]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수레의 두 바퀴, 새의 두 날개와 같은 관계이다. 삼마사띠의 바른 마음챙김이 있으면 분명한 바른 앎이 있고, 분명한 바른 앎이 있으면 반드시 바른 마음챙김이 동반되어 있다.
사띠의 마음챙김이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그 대상에 대해서 순간순간 잊지 않고, 놓치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라 한다면. 분명한 앎은 마음챙김과 동반되는,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인식, 파악을 의미한다.
수행자 특히, 일정 기간 집중적인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잠에 드는 순간까지 의식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에, 자신의 육체적인 모든 행위와 동작에 마음을 챙기고 분명한 앎을 지녀야 한다. 한 순간의 방심도 없이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가 이어질 때, 마음의 고요집중[定; 사마디]과 바른 지혜[慧; 빤냐]가 성숙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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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292-3.
<역주 :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념(念, 생각 념; 마음에 둠, 기억함)이라고 번역하는 고대인도어 사띠[sati]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전념하여 또는 마음챙겨 알아차림, 빠자나[pajāna; 알아차림/앎], 깨어있음'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사띠[sati]는 대개 빠자나[pajāna; 바른 알아차림]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마음챙김[사띠]과 알아차림[빠자나]으로 분리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정념(正念)이라고 번역하는 삼마사띠[samma-sati]도 대개 삼빠자나[sam-pajāna; 바른 알아차림/앎]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바른 마음챙김[삼마사띠]과 바른 알아차림[삼빠자나]으로 분리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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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육신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 [부정관不淨觀]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육신을 아래로는 발바닥에서 위로는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피부로 덮여져 있으며, 가지가지의 깨끗하지 못한 것들로 가득 차있다. 즉, 이 육신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 발톱, 이,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늑막, 지라, 허파, 내장, 내장의 내용물, 위장, 위장의 내용물, 대변, 담즙, 가래, 고름, 혈액, 땀, 고형지방질, 눈물, 액체지방질, 침, 콧물, 관절액, 소변 등.
비구들이여, 마치 위아래 양쪽에 구멍이 나있는 자루에 여러 가지 곡식; 즉, 벼, 보리, 녹두, 콩, 깨, 쌀 등이 들어있는 경우, 이 자루를 눈이 있는 사람이 풀어보고서 “이것은 벼, 이것은 보리, 이것은 녹두, 이것은 콩, 이것은 깨, 이것은 쌀이다”라고 직접 관찰하는 것과 같이,
비구들이여, 수행자는 바로 자신의 육신을 직접 관찰한다.
즉, 이 육신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 발톱, 이, 피부,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심장, 간장, 늑막, 지라, 허파, 내장, 내장의 내용물, 위장, 위장의 내용물, 대변, 담즙, 가래, 고름, 혈액, 땀, 고형지방질, 눈물, 액체지방질, 침, 콧물, 관절액, 소변 등으로.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역주 : 오늘날 미얀마를 중심으로 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위에서 설해진 육신의 32가지 부분에 대한 관찰은 그다지 하지 않는다.
부정관(不淨觀)의 일환으로 제시되어 있는 육신의 32가지 구성부분에 대한 관찰은 현재에는 태국의 아잔 먼(Ajhan Mun, 1870-1949)의 전통을 따르는 제자들을 중심으로 선정(禪定)을 닦는 수행의 일환으로 실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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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네 가지 기본 요소[四大]에 대한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이 육신을 현재 있는 그대로, 구성되어진 그대로 (네 가지) 기본 요소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즉, “이 육신에는 지[地; pathavi]의 기본 요소(地大), 수[水; apo]의 기본 요소(水大), 화[火; tejo]의 기본 요소(火大), 풍[風; vayo]의 기본 요소(風大)가 있다”라고.
비구들이여, 마치 숙련된 백정이나 그의 제자가 소를 도살해서 사거리의 큰 길에 부위별로 해체해 놓고 앉아있는 것과 같이,
바로 이처럼 비구들이여, 수행자는 바로 자신의 육신을 (네 가지) 기본 요소의 측면에서 관찰한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292-5.
<역주 : 위에서 말한 ‘육신의 네 가지 기본 요소’를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사대색[四大色]’이라고 한다. 사대색[四大色]의 대색[大色]은 고대인도어 ‘마하부따루빠[mahā-bhūta-rūpa]’를
여기서 색[色]은 ‘물질’을 의미하는데 고대인도어 루빠[rūpa]를 한문(중국어)으로 번역한 것이다. “루빠[rūpa; 물질, 물체]는 색깔(色)과 형태(모양, 형체)를 지니는 것이 그 특징이다”라는 부처님의 설법(법法을 설명함)에 따라, 표의문자의 특성상 한 글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루빠[rūpa]를 ‘색[色]’으로 한역했다.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마하부따루빠[mahā-bhūta-rūpa]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물질[물체, 육체, 육신; rūpa]을 형성하는[bhūta] 기본[mahā] 요소(또는 작용)’ 정도로 표현하면 유사하다.
부처님께서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있는 그대로' 관찰 탐구(조사 분석)하시여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를 발견하시고 나서 설(설명)하신 ‘물질을 형성하는 기본 작용(또는 요소)’은 (1) 地[pathavi] 작용(또는 요소), 무거움(중력 또는 질량) 작용(또는 요소), (2) 水[apo] 작용, ‘수축, 응축, 인력, 잡아당김’ 작용, (3) 風[vayo] 작용, ‘팽창, 척력’ 작용, (4) 火[tejo] 작용, ‘변화, 열’ 작용이다.
물질의 기본 구성체(물질의 최소단위;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용어로는 깔라빠kalāpa)인 원자도 물질이기 때문에 극미하지만 얼마간의 ‘地[pathavi; 무거움 또는 질량] 작용(또는 요소)‘이 있다. 이 무거움(질량, 地) 작용(또는 요소)은 다른 작용, ’水[apo; 수축인력] 작용’에 의해서 잡아당겨져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또 다른 작용, ‘風[vayo; 팽창척력] 작용’에 의해서 어느 정도 밖으로 당겨져 형체적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또 다른 작용, ‘火[tejo; 변화] 작용’에 의해서 끊임없이 매 순간 변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실체)로서의 원자는 없다. 원자(깔라빠)로 구성된 모든 물질(물체, 육체)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깔라빠(물질의 최소단위, 원자) 그리고 깔라빠(원자)로 구성된 모든 루빠(물질; 물체, 육체)는 실체(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매순간 생멸(생기 소멸) 순환[삼사라]하며 변하는 사대[四大; 地水火風] 작용의 인과 연기적인 현상, 줄임말로 연기현상이다.
이처럼 사대[四大; 地水火風] 작용이 ‘인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하면’(연기 작용하면, 인연 화합하면) 깔라빠(물질의 최소단위, 원자)라고 인식된다.>
<역주 : 육신의 네 가지 기본 요소 중 하나인 풍대(風大)에 대한 관찰은 미얀마의 마하시 사야도(1904-1982)의 전통에 따르는 마하시식 위빠사나 수행의 토대가 되는 수행의 방법이다. 마하시식 위빠사나 수행은 들숨날숨(出入息)을 사띠하는 출입식념(出入息念)을 택하지 않고 호흡에 동반되어 발생하는 복부의 움직임을 사띠하는 것이다. 호흡에 따라 발생하는 복부의 팽창과 수축에 마음을 챙겨서 바로 이 '복부의 움직임이 바람의 기본 요소(風大)라는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려가면서 마음집중과 지혜를 동시에 향상시켜나가는 것이 마하시식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적인 방법이다.
마하시 수행쎈터에서 가르치는, 바른 삼매(正定)를 계발하지 않고 하는 마하시식 위빠사나(소위 마른 위빠사나)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위빠사나가 아니다. 달리 표현하면 마하시식 위빠사나(소위 마른 위빠사나)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팔정도(八正道)를 계발하는 수행 중에서 정정(正定; 바른 삼매)을 계발하는 수행을 하지 않는 칠정도(七正道)를 계발하는 수행인 셈이다.
마하시식 수행법은 마하시 이전에는 일반화되지 못한 채 몇몇 수행승들에 의해서 전해져 내려오다가, 1950년대부터 미얀마에서 본격적으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미얀마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닦는 수행법이 바로 마하시식 위빠사나 수행법이다. 미얀마에는 마하시식 수행법이외에도 몇몇 수행법이 현재 승려는 물론 일반 재가자들 사이에서 실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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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묘지에서의 관찰 [부정관不淨觀]
<역주 :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묘지에서의 부정관 수행을 할 수가 없다. 고대 인도에서처럼 시체를 그대로 묘지에 버리는 장례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묘지에서 시체를 관찰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태국에서는 수행자(비구, 비구니, 청신사, 청신녀)들에게 의과 대학의 인체 해부시간에 견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시체의 썩어 가는 과정을 직접 관찰하면서 수행을 할 수는 없으나, 전신해골을 전시해 놓아 백골관을 할 수 있게 준비해 놓은 수행처는 태국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태국의 동북 지역의 한 수행처에는 백골과 함께 생전의 사진(30대 중반에 죽은 여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방콕의 교외에 있는 한 수행처에서는 죽은 시체 네 구(남녀 각각 두 구)를 백골이 아닌 미라로 만들어서 수행자들이 관찰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죽은 시체나 백골을 보면서 하는 수행의 전통은 현재 미얀마의 위빠사나 수행법에서는 그다지 가르치지 않고 있다.
묘지에서의 관찰 수행[부정관]의 핵심은 수행자 자신이 자신의 육체의 속성도 이와 같다는 사실을 바르게 알아서 육신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극복하는 데에 있다. 묘지에서의 관찰 수행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사념처[四念處; 네 가지 사띠의 확립] 증에서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身念處]」에 대한 설명이 마무리된다.>
① 첫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져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 된 시체가 부풀어 오르고, 검푸러지고, 썩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② 두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까마귀, 매, 독수리, 개, 표범, 호랑이, 재칼 등에 의해서 먹혀지고, 갖가지의 벌레에 의해서 파 먹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③ 세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이 붙어있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④ 네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이 남아 있고, 살점은 없이 핏자국만 얼룩진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⑤ 다섯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만 남아 있고, 살점이나 핏기가 없는 채로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⑥ 여섯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여기에 손뼈, 저기에 발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골반, 등뼈, 두개골 등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⑦ 일곱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조개껍질의 색처럼 하얗게 변해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⑧ 여덟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일 년도 더되어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⑨ 아홉 번째 관찰
다음으로 비구들이여,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뼈마저 썩어 가루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바로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라고.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몸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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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신념처身念處]의 열 가지 이익
비구들이여,
몸에 대한 사띠를 거듭 닦고, 향상시키며,
계발하고, 수레(수행법)로 쓰며, 기반으로 하고,
강화시켜, 잘 수행하여, 확고하게 확립한다면,
다음의 열 가지 이익이 기대될 것이다.
(1) 불쾌함과 즐거움을 제어하게 되어 불쾌함이 그를 정복하지 못하게 된다. 불쾌함이 생겨날 때 (즉각 사띠함으로써) 불쾌함을 극복하며 지낸다.
(2) 공포와 두려움을 제어하게 되어 공포와 두려움이 그를 정복하지 못하게 된다. 공포와 두려움이 생겨날 때 (즉각 사띠함으로써)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며 지낸다.
(3)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갈증, 모기, 바람, 햇빛, 기어 다니는 벌레등과 접촉할 때 견디어 내게 되며, 험담이나 불쾌한 말, 고통스럽고 통증이 심하며, 살을 애는 듯한 괴로움이나, 뼈를 깎아내는 듯한 괴로움, 고뇌 그리고 생명에의 위협을 견디어 내게 된다.
(4) 어려움이나 곤란함 없이 자신의 의지의 따라서 '네 가지 선정[색계 삼매]'(四禪)을 얻을 수 있다, 사선(四禪)은 마음이 정화된 높은 경지이며, 사선을 얻으면 바로 여기에서 안락하게 지내게 된다.
(5) 여러 가지 신통력을 얻게 된다. 몸이 하나의 상태에서 여럿이 되기도 하며, 여럿인 상태에서 하나로 되기도 한다.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며, 벽이나 사방이 가로막힌 곳을 가로질러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도 하고, 마치 빈 공간을 지나가듯이 산을 뚫고 지나가며, 마치 물속으로 잠수하듯이 땅속으로 들어가며, 마치 땅 위를 걷듯이 물위를 빠지지 않고 걸어간다. 가부좌를 한 채로 새처럼 공중을 날아가며, 손으로 달과 태양을 만질 정도로 신통력이 생긴다. 범천의 세계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그의 신통력이 미치게 된다.(神足通)
(6) 인간의 귀를 뛰어넘는 청정한 귀로 멀리서 나는 소리나 가까이에서 나는 소리나, 천상과 인간세계의 소리를 듣는다.(天耳通)
(7) 다른 존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마치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의) 탐심에 물든 마음을 탐심에 물들어 있다고 알며 탐심이 없는 마음을 탐심이 없다고 안다. 성내는 마음을 성내는 마음이라고 알며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에 덮여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에 덮여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인색한 마음을 인색한 마음이라고 알며 인색한 마음이 없어지면 인색한 마음이 없어졌다고 안다. (색계와 무색계의 삼매에 의해) 고양된 마음을 고양된 마음이라고 알며 고양된 마음이 없으면 고양된 마음이 없다고 안다. 보다 뛰어난 마음을 보다 뛰어난 마음이라고 알며 뛰어난 마음이 없으면 뛰어난 마음이 없다고 안다. 집중이 되어 있는 마음을 집중이 되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집중이 안 된 마음을 집중이 안 된 마음이라고 안다.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며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他心通)
(8) 자신의 수많은 과거 전생에 대해서 기억하여 관찰한다. 즉, 한 생이나 두 생 ..... 등등의 과거생의 자신의 이름, 태생, 모습, 생전의 경험,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 등을 기억하여 관찰하게 된다.(宿命通)
(9) 인간의 눈을 뛰어넘는 청정한 눈으로 뭇 중생(생명의 무리)들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관찰한다. 좋은 곳에 태어나는가 나쁜 곳에 태어나는가, 어떤 신체를 가졌는가, 행복한가 불행한가 등을 보게 된다. 이처럼 그는 중생들이 자신의 행위(業)에 따라서 받게 되는 삶의 양태를 알게 된다.(天眼通)
(10) 모든 번뇌를 없애 버려서, 번뇌가 없는 (아라한과의) '마음의 해탈'[心解脫; ceto-vimutti]과 '지혜의 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을 바로 이 생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증득해서 깨달음을 완성하게 된다.(漏盡通)
비구들이여,
몸에 대한 사띠를 거듭 닦고, 향상시키며,
계발하고, 수레(수행법)로 쓰며, 기반으로 하고,
강화시켜, 잘 수행하여, 확고하게 확립한다면,
위와 같은 열 가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中部119 『身念經』 MN III, 97-9.
<역주 : 냐나띨로까 비구가 여기에 수록한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身念處; kayagata-sati-paṭṭhāna]」이 가져다주는 열 가지 이익은 『대념처경』의 내용이 아니라, 별도의 경전인 중부(中部)의 『신념경(身念經 또는 念身經; Kayagata-sati Sutta)』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염신경(念身經 또는 身念經)』은 『대념처경』의 「몸에 대한 사띠」 부분만이 제시되어 있는 경전으로, 몸에 대한 사띠 수행이 선정(禪定)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으로 이어지는 측면이 중점적으로 제시되어 있는 경전이다.>
[*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이 가져다주는 열 가지 이익 가운데 뒤의 여섯 가지(5~10)의 이익을 이른바 육신통(六神通)이라고 한다. 이 육신통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신통은 세간적인 것들이어서 (번뇌를 아직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범부들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의 여섯 번째의 누진통은 출세간적인 신통으로서 (번뇌를 완전히 제거한) 아라한만이 지니는 덕목이다.
'네 가지의 선정[색계 삼매]'(四禪)을 이룬다면 다섯 가지(5~9)의 세간적인 신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역주 : 몸에 대한 사띠의 확립[身念處] 수행을 통해 네 가지의 선정[ 삼매를 이룬다면, 바로 이 선정 삼매의 힘으로 다섯 가지 세간의 신통과 더 나아가 궁극에는 출세간의 누진통(漏盡通)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역주 : 『양면해탈경(Ubhatabhāga-vimutta
해탈에는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과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의 두 가지가 설해진다. 혜해탈은 오온(몸과 마음) 그리고 (십이)연기에 실체[我; atta]가 없는 것을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하여 앎으로써 해탈하는 것을 뜻한다.
아라한도의 혜해탈로 마지막 남은 아(我)의 존재에 대한 미세한 집착(존재하고자하는 욕망과 집착; 갈애 또는 무명)의 끈을 놓아버리고, 심행(心行, 마음작용, '수상행식' 작용)의 완전한 소멸과 함께 모든 번뇌가 완전한 소멸하는 상수멸(멸진 또는 누진)을 성취하는 해탈을 '아라한과의 심해탈[心解脫; ceto-vimutti]'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수멸(멸진 또는 누진)을 성취하여 갖게 되는 통찰지인 누진(멸진)명으로 사성제를 완전히 바르게 깨달아 지혜[paññā]를 완성하면 정각을 증득한 자(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 아라한, 부처)가 된다. 이러한 지혜[paññā]의 완성을 성취하는 해탈을 '아라한과의 혜해탈[慧解脫; paññā-vimutti]'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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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느낌에 대한 사띠의 확립[수념처受念處]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가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수행자가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괴로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 '나는 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정신적인(비육체적인) 즐거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 '나는 정신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 '나는 육체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 '나는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육체적인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육체적인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정신적인 느낌을 현재 느끼고 있으면 '나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정신적인 느낌을 느끼고 있다'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느낌에서 (어떤)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느낌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느낌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에게 '느낌이(라는 현상이) 있다'라고 하는 사띠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사띠는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長部22 『大念處經』 DN II, 2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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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 몸[身]에 대한 사띠는 일차적으로 몸에서 일어나는 느낌[受]에 대한 사띠로 바로 연결되고, 이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受]에 대한 사띠로 연결된다. 이런 점에서 「몸[身]에 대한 사띠의 확립」 뒤에 「느낌[受]에 대한 사띠의 확립」이 설해져 있다.
「느낌에 대한 사띠의 확립」 수행이 갖는 의미를 집중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경우와 일상생활에서의 경우를 들어서 살펴보자.
1) 집중수행의 경우
집중적인 수행을 하고 있는 수행자는 몸과 마음에서 생겨나는 감각적인 느낌을 생생하게 파악하게 된다. 우선적으로는 육체적인 느낌(주로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특히 초보자의 경우, 좌선을 할 때에는 다리의 통증이나, 등의 통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때, 통증이 느껴지는 과정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몸에서 통증이 생기면, 바로 그 통증을 제거하기 위한 조건 반사적인 행동을 취하게 된다.
수행 도중에도 이러한 조건 반사적인 행동을 취한다면, 감각적인 느낌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수행은 자극에 대해서 반사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 자체를 알아차리는 작업(훈련)이다. 다리의 통증이나 등의 통증이 있을 때, 견디어 낼 수 있을 때까지 견디면서 (이 때 중요한 것은 마음의 평온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할 것) 느낌 자체를 관찰하면서 그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등의 자극을 반사적인 반응 없이 알아차려 나갈 때, 그 느낌들의 본질을 직접 이해하게 된다.
즉 모든 느낌은 (조건에 의해서) 생겨나서, (조건이 없어지면) 사라져 가는 것이라는 본질을 자신의 관찰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이해가 생기면, 고통을 견디어 내는 힘도 강해지고, 즐거운 느낌에도 괴로운 느낌에도 집착하는 마음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수행 도중에는 마음의 고요집중[사마디]이 향상함에 따라서 (세간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강한 기쁨[희열; piti]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 때 경험하는 기쁨도 생겨나는 순간에 관찰해야 하는 대상일 뿐, 붙들고 집착할 대상은 아니다. 좋은 느낌도 결국은 사라지는 느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즐겁고, 괴로운 느낌들을 집착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관찰해 나갈 때, 지혜가 성숙해 가는 것이다. 느낌은 지혜를 계발하는 재료다.
2)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에 대한 관찰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갖가지 감각적인 자극들로 가득 차 있다.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은 무방비 상태로 개방된 채 수많은 자극들을 소화도 시키지 못한 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이렇게 쏟아져 들어오는 자극들을 정리도 못한 채, 이리저리 헤매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다. 즐거운 느낌이 있으면 더욱 그 느낌을 얻으려고 집착하고, 불쾌한 느낌이 있으면 그 느낌을 없애려고 애를 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탐[갈망, 탐욕]과 진[혐오, 성냄]이 생겨나는 것이다. 탐욕과 성냄이라는 마음의 번뇌는 근원적으로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에 의해서 생겨난다. 즉 번뇌의 근원은 느낌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느낌을 없앨 수는 없다. 느낌은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의 접촉에서 필연적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문제는 느낌 자체가 아니라 느낌에 대한 집착(갈망)과 거부감(혐오)이다.
예를 들면, 여름철의 무더위 때문에 육체의 불쾌한 느낌이 생긴다. 이 육체의 불쾌한 느낌 때문에 정신적인 짜증이 생기고 불쾌지수가 높아진다. 이처럼 육체의 불쾌감이 정신의 불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은 일상에서 늘 경험되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살피려 하고 탐욕과 성냄이라는 마음의 번뇌를 덜어내려면, 느낌에 의해서 이러한 번뇌가 일어나는 과정을 잘 이해해서, 느낌 뒤에 번뇌라는 족쇄가 생겨나는 것을 방지하는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느낌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그 느낌을 극복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느낌에 대한 사띠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