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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여기에 포스팅하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Four Noble Truths ; Cattāri Ariya Saccā]와 보충설명은 냐나띨로까 비구가 빠알리어(갠지스 강 유역의 고대인도의 민중어 중 하나로 부처님 말씀을 경전으로 기록하던 당 시대에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고대인도 민중어)로 기록된 경전모음인 니까야에서 발췌하여 독일어로 번역 편집한 『붓다의 말씀(Das Wort des Buddha; The Word of the Buddha)』에 수록된 것으로 정원 김재성님이 우리말로 옮긴 것을 일부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냐나띨로까(Nyanatiloka) 비구는 니까야에 실려있는 많은 경전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Buddhist Dictionary(https://what-buddha-said.net/library/Buddhist.Dictionary/index_dict.n2.htm & https://www.urbandharma.org/pdf/palidict.pdf)를 만들어서 붓다의 말씀(가르침, 설법)을 서양에 전파하는데 매우 큰 역활과 큰 기여를 한 훌륭한 비구입니다. 냐나띨로까 비구는 1904년에 독일인으로는 처음으로 비구계를 받았습니다. 1902년에 비구계를 받은 영국 출신 아난다 메떼야(Ananda Metteya) 비구에 이어 서양인으로는 두 번째 비구입니다.

『붓다의 말씀(Das Wort des Buddha; The Word of the Buddha)』은 1946년에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에 ‘고요한 소리’출판사에서 한글로 번역(김재성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The Word of the Buddha(영문판): http://www.urbandharma.org/pdf/wordofbuddha.pdf>

범례
[*]의 문장은 냐나띨로까 비구의 보충설명
<역주>는 역자의 보충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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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소수의 지배계층(브라만계급)이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당시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갠지스강(항하恒河) 유역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마가다(Māgadha)국의 대중들이 사용하던 고대인도 민중어인 마가다어를 사용해서 설법을 하셨다. 그러나 마가다어는 사장되었고 마다다어와 가장 (거의) 유사한 고대인도어가 빠알리(Pāli)어인데, 이 빠알리어가 후대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 모음인 니까야(Nikāya)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빠알리어는 부처님 말씀을 경전으로 기록하던 당 시대에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던 고대인도 민중어였기도 하다.

부처님께서 입멸(빠리-닙바나, 무여열반)하신 직후 얼마 동안은 제자 아라한들이 부처님 말씀(가르침, 법法)을 합송으로 후대에 전달했다. 합창을 하면 한 사람이 틀린 것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합송으로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 부처님 말씀에 대한 변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아라한의 수가 줄어들고 전쟁 등의 장애요소가 생기고 부처님 말씀(가르침, 법法)을 전파하는 지역이 넓어지면서 문자로 기록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겼다.

니까야는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언행록(言行錄;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을 적어 모은 기록)이다. 이 언행록에 실려있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부처님의 생활(行)은 매우 검소하고 소박하면서도 정갈하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설법(법法을 설명)하시는 부처님의 언어(言) 또한 매우 소박하면서도 적확(적절+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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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Four Noble Truths ; Cattāri Ariya Saccā]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고통받으며 이 윤회의 굴레에서 헤매야만 했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dukkha; suffering]의 고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이 윤회의 굴레에서 헤매야만 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발생 근원[dukkha-samudaya; the origin of suffering]의 고귀한 진리’를 ... ‘괴로움의 소멸[dukkha-nirodha; the extinction of suffering]의 고귀한 진리'를 ...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dukkha-nirodha-gamini-patipada; the path that leads to the extinction of suffering]의 고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나와 그대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이 윤회의 굴레에서 헤매야만 했다.

長部16. 『大般涅槃經』 DN II, 90.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如實知見)'이 나에게 아주 분명하지 않았더라면, 비구들이여, 나는 천신, 범천(梵天),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 위 없는 완전한 바른 깨달음[無上正等覺]을 깨달았다고 공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이 나에게 아주 분명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위 없이 완전하고 바르게 깨달았다는 분명한 앎이 나에게 생겨났다.

相應部 LVI 11. 『如來所說』 SN V, 422-3.

심오하며,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며, 수승하며, 단순한 논리적 사유로는 얻을 수 없는 이 법을 나는 증득하였다. 하지만 세간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에 머물러,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있다. 감각적 욕망에 머물러, 감각적 욕망에 집착하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있는 이러한 세간 사람들은 이 법, 즉 이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연기[緣起, paticca-sam-uppada; 조건에 따른 상호의존 발생]의 법'을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법, 즉 모든 형성작용[sankhara]의 소멸과 모든 삼사라[samsara; 순환 흐름, 윤회]의 뿌리[upadhi]를 끊어버리는 것과, 갈애[taṇhā]의 소멸과, 이욕(離欲)과, 멸(滅)과 열반을 이해하기 어렵다.

(범천 사함파티가 이렇게 말했다.)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셔야 합니다. 선서[善逝; sugata]께서는 법을 설하셔야 합니다. 때가 덜 낀 중생들이 있는데 법을 듣지 못하면 타락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법을 설하시어) 법을 아는 이들이 되게끔 하소서.

中部 26. 『聖求經』 MN I, 167-8

<역주 : 선서[善逝; sugata]는 여래십호 중 하나로, 깨달음의 피안(彼岸)의 세계로 (잘, 훌륭하게) 간 채 미망(迷妄)의 세계(世界)로 다시 돌아오지 않음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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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苦聖諦]

1.1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의 정의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란 무엇인가. 태어남[生]은 괴로움이며, 늙음[老]도 괴로움이며, 죽음[死]도 괴로움이며, 슬픔, 비탄, 통증, 비애 그리고 절망도 괴로움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求不得苦]이며,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怨憎會苦]이며, 좋아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愛別離苦]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무더기[五蘊]에 대한 집착[五取蘊]이 괴로움이다.

相應部 『初轉法輪經[Dhammacakkappavattana Sutta]』 S56;11

비구들이여, 태어남[uppajjana; 生, 出生]이란 무엇인가.

생명 있는 존재들이 이런 저런 유정(有情; 정신 작용이 있는 존재, 생명)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 존재[bhava; 有, 存在, the process of existence, the state of existence]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五蘊]의 생겨남, 인드리야[indriya, 根; 감각 기능(또는 기관)]의 발생 등. 비구들이여, 이것을 태어남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늙음(老)이란 무엇인가.

생명 있는 존재들이 이런 저런 유정(有情)의 세계에서 늙어 가는 것. 나이를 먹는 것, 허약해지는 것, 흰머리가 생기는 것, 피부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 생생한 기운이 쇠잔해지는 것, 감각 기능이 떨어지는 것 등, 비구들이여, 이것을 늙음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죽음(死)이란 무엇인가.

생명 있는 존재들이 이런 저런 유정(有情)의 세계를 떠나 소멸하는 것. 파괴되는 것, 사라지는 것, 한 생(一生)의 종결,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무더기[五蘊]의 해체, 생명기능의 끊어짐 등, 비구들이여,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求不得苦]이란 무엇인가.

태어나게 되어있는 중생에게 다음과 같은 바램이 있다고 하자. '아, 태어남의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더 이상 (윤회의 바다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늙음(老), 병듦(病), 죽음(死), 슬픔, 비탄, 통증, 비애 그리고 절망이 닥쳤을 때, '아, 이러한 괴로움을 받지 않았으면. 더 이상 이러한 괴로움들이 생겨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원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간단하게 말해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五取蘊苦]이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05-7

<역주 :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몸과 마음이라는 물질[色] 작용과 정신[수상행식] 작용의 다섯 무더기, 오온[五蘊; 색수상행식 무더기]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지(무명; 실상을 모름, 실상을 완전히 깨닫지 못함)로 인해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적으로 매 순간 생멸 변화하는 무상한 오온에 집착하여 오온을 실체[Atta, Atman;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 실체로서의 나我]라고 여기고 오온에 취착하고 오온이 탐하는 대상을 갈애하며 집착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모든 괴로움[苦; dukkha]을 일으킨다는 것이 첫 번째와 두 번째 고귀한 진리인 고성제[苦聖諦]와 집성제[集聖蹄]다.

사성제의 맨 처음인 고성제는 인간의 실존양상(현실)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철저한 통찰이며 자각이다.

부처님 자신도 인간의 실존양상[dukkha; 苦]을 정면으로 직시하시고 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가를 결심하셨고, 그리하여 인간의 실존양상인 둑카[dukkha; 苦]에 대한 철저한 통찰과 자각은 마침내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그리고 해탈(완전한 자유; 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벗어남)과 열반(완전한 행복)의 경지(상태)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는 열쇠[고성제]가 되었던 것이다.

고[苦, dukkha; 고통, 괴로움]는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행복)을 향해가는 모티브(Motive, 동기)가 될 때에만 고귀한 진리[고성제]가 된다.

그렇지 않다면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고통 자체가 고귀할 게 뭐가 있겠는가?

요컨대 인간의 실존양상[dukkha; 苦]에 대해서 철저히 자각[고성제]하고 그 근원[근본원인; 무명, 갈애; 집성제]을 해결[멸성제]하고자 바르게 노력[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도성제]할 때, 그 근원적 괴로움[dukkha; 苦]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고귀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해탈, 열반; 멸성제]을 증득하는 고귀한 진리[고성제]가 되는 것이다.

한 줄의 진리(法, 진실한 이치) 

"자신의 괴로움을 만드는 자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한 그는 결코 자신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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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다섯 무더기[五蘊]

비구들이여, 과거의 것이거나 현재의 것이거나 미래의 것이거나, 내부의 것이나 외부의 것이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고귀하거나 저열하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어떠한 루빠[색色; 물질, 물질작용]들도 루빠[색色]-칸다[온蘊;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것이거나 현재의 것이거나 미래의 것이거나, 내부의 것이나 외부의 것이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고귀하거나 저열하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어떠한 웨다나[수受; 감각, 느낌; 감수(감각받음)작용]들도 웨다나[수受]-칸다[온蘊;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것이거나, 현재의 것이거나, 미래의 것이거나, 내부의 것이나 외부의 것이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고귀하거나 저열하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어떠한 산냐[상想; 표상작용, imaging작용; 개념작용, 기억작용]들도 산냐[상想]-칸다[온蘊;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것이거나, 현재의 것이거나, 미래의 것이거나, 내부의 것이나 외부의 것이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고귀하거나 저열하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어떠한 상카라[행行; 의도, 의지; 의도작용, 의지작용; (업) 형성작용]들도 상카라[행行]-칸다[온蘊;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것이거나, 현재의 것이거나, 미래의 것이거나, 내부의 것이나 외부의 것이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고귀하거나 저열하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어떠한 윈냐나[식識; 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아식/바왕가, (의식 및 심층의식의) 알음알이; (의식 및 무의식적인) 앎識작용, 인식작용]들도 윈냐나[식識]-칸다[온蘊;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라고 한다.

中部 109. 『滿月大經』 MN III, 16-7.

[* 이 다섯 무더기[五蘊]는, 부처님께서 존재의 물질적, 정신적인 모든 현상(또는 작용, 또는 요소)을 다섯 가지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이 가르침[오온五蘊 설법]은 특히 자아(his ego) 또는 personality(인격의 주체)에 대하여 무지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태어남, 늙음, 죽음 등은, 실제로 세계(물질세계 + 정신세계) 전체를 이루고 있는 이 다섯 가지 무더기가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하여 생기 소멸하며 변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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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루빠[색色; 물질, 물질작용, 물질작용이 드러난 물질현상]-칸다[온蘊;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 색온[色蘊; rupa-khandha]

비구들이여, 루빠-칸다[色蘊; 물질 무더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의 네 가지 기본 요소(또는 작용)'[四大色]와 그것들로부터 파생된 물질(四大所造色)들이다.

'네 가지 기본 요소(또는 작용)'[四大]란 무엇인가. 지대[地大; pathavi-mahā], 수대[水大; apo-mahā], 화대[火大; vayo-mahā], 풍대[風大; tejo-mahā]를 말한다.

[* 일반적으로 지, 수, 화, 풍으로 불리는 네 가지 요소(또는 작용)는 물질의 기본적인 성질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이 네 가지는 비록 성분 상 다양한 강도(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물질(물체)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또는 작용)이다. 예컨대, 지[地]의 요소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 물질(물체)는 '무거움 또는 딱딱함'의 성질이 우위를 차지한다.

네 가지 기본적인 요소(또는 작용)로부터 파생된 물질(물질현상)들은 아비담마에 의하면, 다음의 24가지 물질현상으로 되어있다. 즉, 눈, 귀, 코, 혀, 몸, 형체나 색깔(色), 소리, 냄새, 맛, 남성의 기관, 여성의 기관, (육체의)생명력, 정신의 육체적인 기반, 육체적 표현(몸짓), 언어적 표현(말), 공간, 몸의 경쾌함, 몸의 무거움, 몸의 적응성, 몸의 성장, 몸의 지속, 늙음, 무상함, 영양분이 그것들이다.]

<역주 : 위에서 말한 ‘물질의 네 가지 기본 요소’를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사대색[四大色]’이라고 한다. 대색[大色]은 고대인도어 ‘마하부따루빠[mahā-bhūta-rūpa]’를 한역한 것이다.

여기서 색[色]은 ‘물질’을 의미하는데 고대인도어 루빠[rūpa]를 한역한 것이다. “루빠[rūpa; 물질, 물체]는 색깔(色)과 형태(모양, 형상, 형체)를 지니는 것이 그 특징이다”라는 부처님의 설법(법法을 설명함)에 따라, 표의문자의 특성상 한 글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루빠[rūpa]를 ‘색[色]’으로 한역했다.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마하부따루빠[mahā-bhūta-rūpa]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물질[물체, 육체; rūpa]을 형성하는[bhūta] 기본[mahā] 요소(또는 작용)’ 정도로 표현하면 유사하다.

부처님께서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있는 그대로' 관찰 탐구(조사 분석)하시여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를 발견하시고 나서 설(설명)하신 ‘물질을 형성하는 기본 작용(또는 요소)’은 (1) 地[pathavi] 작용(또는 요소), 무거움(중력 또는 질량) 작용(또는 요소), (2) 水[apo] 작용, ‘수축, 응축, 인력, 잡아당김’ 작용, (3) 風[vayo] 작용, ‘팽창, 척력’ 작용, (4) 火[tejo] 작용, ‘변화, 열’ 작용이다.

물질의 기본 구성체(물질의 최소단위;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용어로는 깔라빠kalāpa)인 원자도 물질이기 때문에 극미하지만 얼마간의 ‘地[pathavi; 무거움 또는 질량] 작용(또는 요소)‘이 있다. 이 무거움(질량, 地) 작용(또는 요소)은 다른 작용, ’水[apo; 수축인력] 작용’에 의해서 잡아당겨져 연결되어 있고, 동시에 또 다른 작용, ‘風[vayo; 팽창척력] 작용’에 의해서 어느 정도 밖으로 당겨져 형체적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또 다른 작용, ‘火[tejo; 변화] 작용’에 의해서 끊임없이 매 순간 변하고 있는 것이다.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실체)로서의 원자는 없다. 원자(깔라빠)로 구성된 모든 물질(물체, 육체)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깔라빠(물질의 최소단위; 원자) 그리고 깔라빠(원자)로 구성된 모든 루빠(물질; 물체, 육체)는 실체(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매 순간 생멸(생기 소멸) 순환[삼사라]하며 변화하는 사대[四大; 地水火風] 작용의 인과 연기적인 현상, 줄임말로 연기현상이다.

이처럼 사대[四大; 地水火風] 작용이 ‘인연(인因-직접조건,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상호의존 작용하면’(연기 작용하면, 인연 화합하면) 깔라빠(물질의 최소단위; 원자)라고 인식된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기본 요소[四大]로 이루어진 이것들[色蘊; 물질 무더기]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내가 아니다. 이것들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고 보아야 한다.

목재와 골풀과 갈대와 진흙 등을 재료로 해서 만들어진 한정된 공간을 오두막이라고 부르듯이, 네 가지 기본 요소[四大]로 이루어진 뼈와 힘줄과 살과 피부 등을 재료로 해서 형성된 한정된 공간을 '육신(육체)'이라고 부른다.

中部 28.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MN I,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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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웨다나[vedan, 受]-칸다[khandha, 蘊;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 수온[受蘊]

비구들이여, 세 가지 종류의 웨다나[vedan, 受; 감수(감각받음)작용; 감각, 느낌]가 있다. 즉, 즐거운 느낌(樂), 괴로운 느낌(苦), 무덤덤한 느낌(不苦不樂)이 그것이다.

相應部 『삼매경(三昧經)』 SN IV, 204.

1.2.3 산냐[saññā, 想]-칸다[khandha, 蘊;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 상온[想蘊]

비구들이여, 산냐[sanna, 想] 무더기[[khandha, 蘊]란 무엇인가. 여섯 가지에 대한 산냐[sanna; 想]가 있다. 즉 형태나 색깔(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접촉(觸), 마음의 현상(法; 마음속에 일어나는 정신감각)에 대한 산냐[saññā, 想; 표상작용, imaging작용, 개념작용, 기억작용, perception(지각, 감지) 작용; 표상, 생각想, 기억, 상념想念, 개념概念]가 그것이다.

1.2.4 상카라[sankhara, 行]-칸다[khandha, 蘊;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 행온[行蘊]

비구들이여, 상카라[saṅkhāra; 行] 무더기[[khandha, 蘊]란 무엇인가. 여섯 가지에 대한 상카라[sankhara; 行]가 있다. 즉 형태나 색깔(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접촉(觸), 마음의 현상(法)에 대한 상카라[saṅkhāra, 行; 의지작용, 의도작용, (업) 형성작용; 為作(행함을 지음), 행위 할 때의 습관력, 형성력; 마음의 습관(습성)적 반응, 심(心)적 조작, 의지, 의도, 업습(業習; 업業의 습관, 습성); impression(인상), disposition(성향), mental formation(정신적 형성), volitional(의지적) effort]가 그것이다.

相應部 XXII 56. 『취전경(取轉經)』 SN III, 60.

1.2.5 윈냐나[vinnana, 識; (의식 및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적인) 알음알이; 앎작용, 인식작용]-칸다[khandha, 蘊;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 식온[識蘊]

비구들이여, 윈냐나[vinnana; 識] 무더기[khandha; 蘊]란 무엇인가. 여섯 가지에 대한 윈냐나[viññāṇa, 識; 분별하여 아는 것, 알음알이; 아는 작용(앎識 작용), 인식작용]가 있다. 즉, 안식[眼識; 눈의 식識], 이식[耳識; 귀의 식識], 비식[鼻識; 코의 식識], 설식[舌識; 혀의 식識], 신식[身識; 몸의 식識], 의식[意識; 마노(mano, 意, 정신 감각 작용)의 식識]이 그것이다.

相應部 XXII 56. 『취전경(取轉經)』 SN III, 58.

[* 수상행식(受想行識) 온[蘊, 칸다; 쌓임, 집적, 덩어리, 무더기]은 부처님께서 중생(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무리)의 정신적인 모든 현상(또는 작용, 또는 요소)을 네 가지 카테고리로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웨다나[수受] 무더기, 산냐[상想] 무더기, 상카라[행行] 무더기는 윈냐나[식識; 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아식/바왕가; mind as transmigrant(윤회하는 식; 재생연결식); (의식 및 잠재의식/심층의식의) 알음알이; (의식 및 무의식적인) 앎 작용, 인식작용] 무더기와 함께 현존하는 수많은 정신적 작용, 활동, 또는 양상(현상)들을 의미하는 마음을 구성하는 '집합적인' 용어다.]

<역주 : 우리들이 두루뭉술하게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용어는, 부처님의 설법(法을 설명함)에 따르면 「조건에 따라 심[心; citta], 의[意; mano], 식[識; viññāṇa]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예컨대, 물은 조건에 따라 얼음, 물, 수증기라고 불린다. 물질의 사대작용(네四 가지 기본大 작용, '지수화풍' 작용; 地무거움 작용, 水수축인력 작용, 風팽창척력 작용, 火변화 작용)이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생겨난 것 자체(H2O)를 체(體)라 한다면, 조건에 따라 얼음, 물, 수증기로 불리는 것을 상(相)이라고 한다. 조건에 따라 얼음일 때는 얼음에 맞게, 물일 때는 물에 맞게, 수증기일 때는 수증기에 맞게 ‘용(用, 사용)’하면 유익하다.

부처님께서는 설법(法을 설명)하실 때, 대상(또는 관점, 주제, 상황)과의 관계 맺음을 조건으로 그 조건에 따른 마음 작용을 상(相)에 따라 그리고 용(用; 사용처)에 따라 다음과 같이 심[心; citta], 의[意; mano], 식[識; viññāṇ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 심[心; 찟따citta] : 맨 마음 작용[kicca; function, process] 자체(體)

• 의[意; 마노mano] : 정신감각 작용; 정신감각 기능[意根, 마노 인드리야]의 작용.

ref. 정신감각은 생각, 기억, 감정 등; ref. 의근[意根, 마노 인드리야]은 인간의 경우 뇌를 기반으로 한 정신감각 기능(또는 기관); ref. '안이비설신'근(五根)은 물질감각 기관(기능); ref. 근[根, 인드리야]은 (감각) 기능 또는 기관.

• 식[識; 윈냐나viññāṇa;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 : (의식 및 무의식적인) 앎 작용, 인식작용; (의식 및 잠재의식/심층의식의) 알음알이(아는 것, 대상에 대해 생겨난 앎)

식온[識蘊; 윈냐나viññāṇa 칸다khandha] : 식[識; 의식/일상의식/표면의식 + 무의식/잠재의식/심층의식/아뢰야식/바왕가]; (의식 및 무의식적인) 앎 작용, 인식작용; (의식 및 잠재의식/심층의식의) 알음알이]의 집적/쌓임/덩어리/무더기/온(蘊)

여기서 마노[mano, 의意] 작용은 인간의 경우 뇌를 기반(물질 토대)으로 한 정신감각 기능(意根)의 작용이다. ‘다섯 가지 물질감각 기관의 작용, 오감(五感) 작용'은 생명체에 따라 있거나 없기도 하지만, ‘정신감각, 육감[六感, 意, mano]' 작용이 없는 생명체는 없다.

마노[mano, 意, 六感] 작용은 외부 대상이 없어도 인식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꽃이 없어도 꽃의 상(想; 이미지, 기억)을 인식할 수 있다.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을 돌연 회상하고, 지금 일어난 것처럼 감정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작년에 죽은 친구와 함께 10년 전 여행 갔을 때를 회상하고 미소 지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육감(六感), 여섯 번째 감각, 정신감각’ 작용인 마노[mano, 意] 작용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에게는 육근(六根; 여섯 가지 감각 기능)이 있다'고 설(설명)하셨다. 물질감각인 오감각과 정신감각을 합하여 인간의 감각은 여섯 가지이며, 이 ’정신감각, 여섯 번째 감각(육감六感)‘을 부처님께서는 고대 인도어로 마노[mano]라고 지칭하셨다. 고대 중국인들은 마노[mano]를 '의意'라고 한역했다.

이 여섯 번째 감각(육감六感, six sense) 작용은 결코 (있지도 않은 혼을 보는 등의) ’초월적인 감각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모두 있는 극히 당연한 기본적인 감각 작용이다. 오감[五感] 작용은 생명체에 따라 있거나 없기도 하지만 ’육감(六感), 마노[mano, 意]‘ 작용이 없는 생명체는 없다.

마노[mano, 意] 작용은 개, 고양이, 지렁이, 미생물, 아메바, 바이러스 등 모든 생명체에게 있는 기본적인 감각 작용이다. 뇌세포가 없는 지렁이나 아메바나 바이러스도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생명현상을 지속하기에 적합한 환경인지를 판단 분별하는 작용을 한다. 지렁이나 아메바나 바이러스에게 보거나(시각) 듣는(청각) 작용은 없을지 모르지만 판단 분별하는 작용인 마노[mano, 意]의 작용은 있다.

눈은 빛의 감각만을, 귀는 소리의 감각만을 인식한다. 그러나 눈으로 들어 온 빛을 '아름다운 꽃'으로 판단 분별하는 인식 작용은 의[意; mano]의 인식 작용이다. 귀로 들은 소리를 '좋아하는 가수의 아름다운 노래'로 판단 분별하는 인식 작용은 의[意; mano]의 인식 작용이다. 인간의 경우, ‘오감각의 인식 작용, 전오식(前五識) 작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량의 인식 작용이 ‘의[意; mano]의 인식(識) 작용, 즉 의식(意識) 작용’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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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생명체는 몸(물질작용, 色; '지수화풍' 작용 무더기)과 마음(정신작용, 名; '수상행식' 작용 무더기)이 연기(인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매 순간 생멸 변화하며 순환[삼사라]하는 인과 연기적인 현상, 줄임말로 연기현상이다. 

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현상(자연현상)은 연기현상이다. 연기현상과 자연현상은 동의어다. 우주자연에 실존하는 삼라만상,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포함한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과 무정(정신작용이 없는 존재)은 모두 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이다.

마음은 인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라 몸과 상호 의존 작용하여 매 순간 인과 연기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며 변화하는(생멸 변화하는) '수상행식' 작용 무더기를 통칭한 것이다. 수(受; 감각 받음受) 작용에서부터 식(識; 앎) 작용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정신작용인 '수상행식' 작용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생명체의 인식작용이다.

인식작용('수상행식' 작용)은 인식정보(여섯 감각)를 육근(여섯 감각 기관)에 의존한다. 이렇게 육근(여섯 감각 기관)에 인식정보(여섯 감각)를 의존하여 인식작용('수상행식' 작용)이 진행되면 인식작용 중에 신체와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 작용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심소[쩨따시까; 감정, 기억, 업 등의 마음의 내용 성분]가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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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윈냐나[vinnana, 識; 앎작용, 인식작용]의 '조건에 의존한 발생'[연기緣起]

비구들이여, 내적인 눈(의 감각기능)이 온전하더라도 만약에 외적인 색(色; 색깔과 형상)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을 경우, 또는 시야에 들어오더라도 그것에 응하는 주의력이 없을 경우에 그것에 대한 안식[眼識; 눈의 식(識; 앎) 작용]은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적인 눈(의 감각기능)이 온전하고 외적인 색(色; 색깔과 형상)이 시야에 들어왔으며, 그것에 응해서 주의력이 있을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안식[眼識; 눈의 식(識; 앎) 작용]이 생겨나게 된다.

中部 28. 『상적유대경(象跡喩大經)』 MN I, 190.

비구들이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식(識)작용의 발생은 조건[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 인연因緣]에 의존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인연因緣]이 없으면 인식작용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떠한 조건에 의존되어 인식작용이 발생하는가. 눈과 색에 의존되어 발생한 인식작용을 안식[眼識]이라고 한다. 귀와 소리에 의존되어 발생한 인식작용을 이식[耳識]이라고 한다. 코와 냄새에 의존되어 발생한 인식작용을 비식[鼻識]이라고 한다. 혀와 맛에 의존되어 발생한 인식작용을 설식[舌識]이라고 한다. 몸과 접촉에 의존되어 발생한 인식작용을 신식[身識]이라고 한다. 마노-인드리야[mano-indriya, 의근意根, 정신 감각기능; 인간의 경우 뇌를 물질토대로 한 정신 감각기능]와 그 대상[法; 오감각에 대한 상(想)과 식(識), 생각, 기억, 감정 등 마음에 일어나는 정신감각 또는 현상]에 의존되어 발생한 인식작용을 의식[意識; mano-vinnana]이라고 한다.

中部 38. 『애진대경(愛盡大經)』 MN I, 259.

1.2.7 네 가지 무더기[四蘊]에 대한 인식작용의 무더기[識蘊]의 의존성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사람이 있어서 '나는 물질작용(色)과 감수작용(受)과 표상작용(想)과 형성작용(行)을 제외시키고 인식작용(識)의 죽음, 태어남, 성장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한다면, 이 말은 근거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相應部 XXII 53. 『봉체(封滯)』 SN III,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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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존재의 세 가지 특성, 삼특상[三特相, ti-lakkhana; 삼법인三法印]

삽뻬 상카라 아닛짜[sabbe saṅkhāra a·nicca], 제행무상[諸行無常]
삽뻬 상카라 둑카[sabbe saṅkhāra dukkha], 제행개고[諸行皆苦]
삽뻬 담마 아낫따[sabbe dhamma an·attā],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sabbe, 諸] 형성되어진 것[saṅkhāra, 行]은 무상[a·nicca, 無常]하다. 
모든[sabbe, 諸] 형성되어진 것[saṅkhāra, 行]은 괴로움[dukkha, 苦]이다.
모든[sabbe, 諸] 존재하는 것[dhamma, 法]은 실체가 아니다[an·attā, 無我].

『法句經』 277-9. 增支部 III 134. AN I, 286.

<역주 : 삼특상[三特相, ti-lakkhana]은 '이 세상(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지니는 (공통적인, 보편적인; 예외가 없는) 세 가지 특성'이라는 의미다. 

삼특상은 연기법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 세상(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는 연기된 존재이고 그로 인해 공통적으로 세 가지 특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이 세 가지 공통된 특성을 가진다.

삼특상[三特相]을 삼법인[三法印; 법의 세 가지 인장]이라고도 한다. 붓다(깨달은 자)께서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자)들이 잘못된 견해에 빠지지 않도록 이 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와 모든 사물)의 실상(실제 모습)을 이 세 가지로 밝혀 주셨기 때문에, 마치 '진리(法)의 세 가지 인장(印章)과 같다'하여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어떤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인가 아닌가, 진리인가 아닌가, 정법(正法)인가 사법(邪法 또는 유사정법類似正法)인가가 궁금하다면 삼법인이라는 기준에 맞는지 틀리는 지를 살펴보면 된다. 삼법인이라는 기준에 어긋난다면 그것은 불교(佛敎; 부처님 가르침)라고 주장해도 정법(正法; 바른 진리, 바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다. 

사실 여러 종파, 여러 전통, 여러 형태의 불교와 여러 종류의 불경들을 살펴보면 삼법인에 근거하지 않는 비불교적인 요소들도 불교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전세계적인 명상 열풍과 함께 온갖 사상과 가르침들이 난무하는 혼탁한 시대이다 보니 어느 것이 정법인지 사법(또는 유사정법)인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 사법(또는 유사정법)은 사람들에게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개인적, 집단적 욕망(예컨대, 영원히 살았으면 좋겠다. 죽기 싫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믿는 존재가 절대적이고 전능한 존재였으면 좋겠다. 그 존재가 나와 내가 속한 집단에게 복을 주면 좋겠다.. 등등)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교묘하게 홀리고 끌어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혼탁한 시대에 더욱 그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이 삼법인(삼특상)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삼법인(삼특상)을 지식차원에서나마 반드시 바르게 공부해서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이 인도 북방으로 전해진 산스크리트어 번역 경전과 중국어(한문) 번역 경전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개고(諸行皆苦) 또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삼법인이라고 부른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을 포함시키켜서 사법인이라고 하기도 한다.>

<역주 : sabbe saṅkhāra a·nicca,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sabbe, 諸] 형성되어진 것[saṅkhāra, 行]은 무상[a·nicca, 無常]하다.'

부처님 설법(法을 설명함)에서 상카라[saṅkhāra]는 '형성된 것, 조건 지어진 것,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의존)하여 일어난 것(발생한 것, 형성된 것), 연기된 것, 연기적으로 형성되어진 것, 연기적 존재, 연기현상; 의지작용, 의도작용, (업) 형성작용; 為作(행함을 지음), 행위 할 때의 습관력, 형성력, 마음의 습관(습성)적 반응, 업습(業習; 업業의 습관, 습성); 심(心)적 조작, 의지, 의도' 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한문으로는 '행行, 為作, 共作, 共作物, 형성력形成力, 必要的條件, 유조건적사물有條件的事物; 심온적반응心蕴的反應, 心的造作, 유의지적행위有意志的行爲, 습성반응習性反應, 업습業習' 등으로 번역하고, 영어로는 'formation, formed thihg(형성된 것), conditioned thihg(조건 지어진 것), preparation(의도, 준비된 업의 습성); impression(인상), disposition(성향), mental formation(정신적 형성), volitional effort(의지적 애씀)' 등으로 번역한다. 

여기서(삼특상 또는 삼법인에서) 상카라[saṅkhāra, 行]는 더 이상 조건 지어지지(연기되지) 않는 유일한 현상인 열반(해탈)을 제외한 모든 현상(물질, 정신적인 모든 것)을 지칭한다. 즉 열반(해탈)을 제외한, 연기법의 지배를 받는 우주자연(법계)에 실존하는 물질, 정신적인 모든 것(모든 현상)을 지칭한다. 

달리 표현하면, 여기서 상카라[saṅkhāra, 行]는 연기[인연(인因-직접 조건과 연緣-간접 조건)에 따라서 상호의존]하여 끊임없이 매 순간 생기 소멸하며 변하는 연기적 존재 또는 연기 현상 또는 연기 작용을 의미한다.

한문 경전에서는 유위법(有爲法; 형성된 존재, 지어진 존재, 연기적 존재;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어진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현상)이라고 한역하기도 한다.

고대인도어 a·nicca(아닛짜)의 글자 뜻은 '항상(nicca)하지 않음(a)'이다. a·nicca는 ‘항상하지 않음, 한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있지 않음, 매 순간 생멸(생기 소멸)하며 변함‘이라는 의미다. 노장사상의 영향으로 무(無)자를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a·nicca를 비상(非常; 항상하지 않음)이 아닌 무상(無常; 항상함이 없음)으로 번역했다. 영어로는 'impermanent(영속하지 않음, 일시적임), not stable(지속적이지 않음), not in a constant state of flux'(흐름의 동일한 상태에 있지 않음) 또는 vanishing from moment to moment'(순간순간 사라짐)' 등으로 번역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sabbe saṅkhāra anicca[諸行無常]"는 "이 세상(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생명이든 비생명이든) 조건지어진(연기적으로 형성되어진) 모든 것은 매 순간 인과 연기적으로 생멸(생기 소멸) 순환[삼사라]하며 변한다."는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를 핵심 키워드로 표현하신 것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이 세상(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sabbe, 諸] 조건지어진 것[연기적으로 형성되어진 것, 연기현상, saṅkhāra; 行]은 모두 다 항상[nicca; 常]하지 않다(무상하다)는 뜻이다. 모든 연기적 존재(유위법有爲法)도 항상 하지 않고, 연기적 존재의 행(유위행有爲行) 또한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이다. ‘나’라는 연기적 존재와 '너'라는 연기적 존재도 무상하고,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사물도 무상하고,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 생각, 기억 따위의 행(行)’ 또한 무상하다.

제행무상은 불교(부처님 가르침)의 존재론이다. 그 밑 바탕이 되는 것은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조건(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 인연)에 따라 상호 의존하여 생기하고, 그 조건(인연)이 사라지거나 상호 의존하는 존재가 소멸하면 그로 말미암아 상대적 존재도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이다.>

<역주 : sabbe saṅkhāra dukkha, 제행개고[諸行皆苦]

'모든[sabbe, 諸] 형성되어진 것[saṅkhāra, 行]은 괴로움[dukkha, 苦]이다.'

부처님 설법(法을 설명함)에서 dukkha(둑카)는 saṅkhāra(상카라; 연기법에 지배를 받는 이 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연기적 존재)의 무상성과 무명으로 인해서 '근원적으로 조건지어지는 괴로움’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문으로는 '고苦, 고통苦痛, 고뇌苦惱, 고초苦楚, 재난災難' 등으로 번역하고, 영어로는 'suffering(육체적 정신적 괴로움), ill, pain, painful feeling; misery(육체적 정신적 고통); agony; dissatisfaction(불만, 불만족), discomfort, unpleasant causing misery' 등으로 번역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sabbe saṅkhāra dukkha[諸行皆苦]"는 "이 세상(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sabbe] 조건지어진 존재[연기적으로 형성되어진 존재, 연기적 존재; saṅkhāra]는 존재의 무상성과 무명으로 조건지어진 근원적인 고[苦; dukkha]를 내포하고 있다."는 진리(진실한 이치)를 핵심 키워드로 표현하신 것이다. 

즉, '이 세상(우주자연; 법계, 연기법의 지배를 받는 세계)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는 자신이 무상한 연기적 존재라는 실상을 모를 때, 그 모름[無明, avijjā; 실상을 완전히 자각하지 못함]과 존재의 무상성[無常性, 무상한 성질]으로 인해서 근원적으로 그 자체 안에 괴로움의 씨앗(근본원인)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제행개고는 불교(부처님 가르침)의 실존론이다. 그 밑 바탕이 되는 것은,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을 바탕으로 한 불교의 존재론인 제행무상이다. 자신을 포함하여 물질, 정신적인 일체 모든 것이 무상한 것이라는 실상(실제 모습)을 모르거나 착각하여 집착할 때, 그 존재의 실존양상은 그 자체 안에 근원적으로 고(苦)의 씨앗(근본 원인)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제행개고를 달리 표현하면, '중생(아직 실상과 진리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이 경험하는 모든 괴로움은 근본 원인(근원)이 있는 괴로움[dukkha]이다', '중생(아직 실상과 진리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 자)이 경험하는 모든 고(苦)는 근원적으로 조건지어진 고(苦), 즉 존재의 무상성과 무명으로 인해서 근원적으로 조건지어진 고[苦; dukkha]'라는 것이다.

존재의 무상성(무상한 성질)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지만 무명(실상과 진리를 깨닫지 못함)은 극복할 수 있다. 즉, 부처님께서, 당신 자신이 실천하시고 나서, 가르치신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를 바르게 실천해서 실상과 진리를 완전히 바르게 깨달으면 부처님처럼 모든 괴로움과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탈(완전한 자유와 평화)과 자비(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열반(완전한 행복)의 경지(상태)에 도달 할 수 있다.>

<역주 : sabbe dhamma an·attā,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sabbe, 諸] 존재하는 것[dhamma, 法]은 실체가 아니다[an·attā, 無我].'

부처님 설법(法을 설명함)에서 dhamma(담마)는 '진리, 법칙; 부처님 가르침; 도덕, 윤리; 실상(존재의 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 사물(事物), (물질, 정신적인 모든) 것, 현상; 마노-인드리야[mano-indriya, 意根; 인간의 경우 뇌를 물질토대로 한 정신 감각기능]의 대상(생각, 기억, 감정 등의 정신 감각)' 등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한문으로는 '法, 教法, 眞理, 敎理, 正義; 物(thing, 것), 事物, 現象, 一切法, 諸法; 自然, 事實, 實相, 道德' 등으로 번역하고, 영어로는 'truth, law, doctrine(교리), justice, righteousness(정의); nature; morality; thing(것), phenomenon(현상), object of mind(mano-indriya의 대상)' 등으로 번역한다.

여기서(삼특상 또는 삼법인에서) dhamma(담마)는 더 이상 조건지어지지(연기되지) 않는 유일한 현상인 열반(해탈)까지도 포함하는 모든 현상 또는 물질, 정신적인 모든 것을 지칭한다. 

고대인도어 an·attā(아낫따)는 '앗따[attā, atman; 실체, 또는 실체(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나我]가 아님[an; 非] 또는 비[an]·실체[attā]'라는 뜻이다. 노장사상의 영향으로 무(無)자를 좋아하는 고대중국인들은 an·attā를 비아[非我; 실체로서의 나我 아님非]가 아닌 무아[無我; 실체로서의 나我 없음無]으로 한역했다. 영어로는 ‘not-self, non-ego[ego(我) 아님], egolessness, soul-less, 또는 the illusion of self[self(我)라는 착각, 환상]’ 등으로 번역한다.

고대중국인들은 앗따[attā, 산스크리트어 아트만atman; 실체로서의 나]를 '아我 또는 자아自我'라고 한역했다. 영어로는 'ego 또는 soul[영혼, 생명체의 내면에 있는 실체(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번역한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sabbe dhamma an·atta[諸法無我]"는 "이 세상(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sabbe, 諸] 것[dhamma, 法]은 실체[attā, 我; 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an; 非, 無]."라는 진리, 

좀 달리 표현하면, "더 이상 조건 지어지지 않는(연기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연기세계를 벗어나는) 열반까지도 포함한, 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생명이든 사물이든) 모든 것은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실체; attā]가 아니라[an],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하여 매 순간 생멸(생기 소멸) 순환[삼사라]하며 변하는 무상[a·nicca]한 연기적 현상[dhamma]이다."라는 진리를 핵심 키워드로 표현하신 것이다.

이 세상(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아니라 현상(연기적 현상; 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이다. 우주자연의 일부인 ‘나’도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연기현상이자 자연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는 인연(因緣; 직접조건因과 간접조건緣)에 따라 상호 의존(연기)하여 매 순간 생멸하며 변하는 무상[a·nicca]한 존재이기 때문에,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실체)로서의 자아나 영혼 같은 것은 없다.>

비구들이여, 생각해 보라. 
색온[色蘊; '물질, 물질작용, 물질작용이 드러난 물질현상' 무더기; 여기서는 육체]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존자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존자여. 이처럼 무상하고 괴로우며 [연기(조건에 따라 상호 의존}적으로] 변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것은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나'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아트만atman, 앗따atta]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존자여.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존자여.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존자여. 이처럼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하는 것들에 대하여,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아트만atman, 앗따atta]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존자여.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과거, 현재, 미래의 것이거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거나 외적인 것이거나, 거친 것이거나 미세한 것이거나, 저열한 것이거나 수승한 것이거나, 긴 것이거나 짧은 것이거나, 모든 색온[色蘊]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如實하게) 알고 보아야 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것이거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거나 외적인 것이거나, 거친 것이거나 미세한 것이거나, 저열한 것이거나 뛰어난 것이거나, 긴 것이거나 짧은 것이거나, 모든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蘊]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아트만atman, 앗따atta]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如實하게) 알고 보아야 한다.

相應部 XXII 59. 『오군비구경(五群比丘經)』 SN III, 66-8

[* 무아설법[無我說法, Anatta Doctrine] : 실체 아님 또는 비실체성이라는 법法을 설명함

전체 세계(물질세계+정신세계)와 마찬가지로 개별적 존재는 모두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에 의해 구성되어진,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기적 현상의 흐름이다. 이 흐름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 시작을 알 수 없는 시간에서부터 계속되어 우리가 죽은 후에도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에 걸쳐 이어질 것이다. 그 조건이 있는 한 그만큼 오랫동안. 다섯 가지 무더기는 분리되어 있거나 결합되어 있거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실재적인 자아의 실체 또는 영속적인 인간을 구성할 수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이 다섯 무더기 내외에서 그것들의 '주인'으로서의 그 어떠한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자아도 영혼도 실체로서의 주체도 발견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다섯 가지 무더기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며[anattā; 非我, 無我] 또한 그것들은 자아에 속해 있지도 않다[anattaniya; 非我所的]. 모든 존재의 무상함과 조건 의존성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형태의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믿음도 환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개인'이니 '사람'이니 또는 '나'라고 부르는 것들이 단지 변화하고 있는 오온[육체적, 정신적 요소(또는 작용, 또는 현상)의 다섯 무더기]의 연기적 결합에 지나지 않으며, 그 자체에 있어서는 고정불변(늘 동일)하고 독립적인 어떤 존재(실체)는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이 '모든 존재는 실체(동일하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라는 붓다의 무아[無我; an·attā] 설법(법法을 설명함)이다. 이 무아설법은 다른 어떤 종교적인 가르침이나 철학이나 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붓다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그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추상적이고 지적인 방식에 있어서가 아니라, 실재(실제 존재; 실상, 실제 모습)에 대한 실제적 체험(직접 관찰 경험)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며, 실제적 체험(직접 관찰 경험)을 통한 파악이 붓다의 가르침(佛法; Buddha-dhamma)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그 목적(정각, 해탈,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조건인 것이다. 무아설법[無我說法, Anatta Doctrine]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Buddhist Dictionary(https://what-buddha-said.net/library/Buddhist.Dictionary/index_dict.n2.htm)를 참조하기 바람.]

비구들이여, 
눈이 멀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어서, 갠지스강에서 떠내려가고 있는 수많은 물거품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자. 그는 물거품을 살피면서 아주 주위 깊게 관찰하고 검토하였다. 주위 깊게 관찰하고 검토 해보니 그 물방울들은 비어있는 것, 실체가 아닌 것, 견고하지 않은 것임을 그는 알게 되었다. 비구들이여, 물거품에 어떻게 견고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어떤 비구가, 과거의 것이거나 현재의 것이거나 미래의 것이거나, 멀리 있는 것이거나 가까이 있는 것이거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거나 외적인 것이거나, 거친 것이거나 미세한 것이거나, 저열한 것이거나 뛰어난 것이거나, 긴 것이거나 짧은 것이거나, 모든 물질적 현상(色), 감수작용(受), 표상작용(想), 형성작용(行), 인식작용(識)의 무더기를 보고 있다. 그는 이 다섯 무더기들을 주위 깊게 관찰하고 검토한다. 주위 깊게 관찰하고 검토 해보니 그 다섯 가지 무더기들은 비어있는 것, 실체가 아닌 것(고정불변하고 독립적이지 않는 것), 견고하지 않은 것임을 그는 알게 된다.

相應部 XXII 95. 『거품經』 SN III 140-2.

비구들이여, 
물질적 현상(色), 감수작용(受), 표상작용(想), 형성작용(行), 인식작용(識)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괴로움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다. 괴로움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말한다.

相應部 XXII 29. 『환희경(歡喜經)』 SN III, 31.

무엇을 즐기며 웃고, 어찌하여 즐거워하는가. 끊임없이 불타고 있는 세상에서.
그대는 무지의 어둠에 둘러싸여 있는데 지혜의 등불을 찾지 않고 있구나.
보라, 이 꾸며놓은 몸뚱이를. 고통 덩어리인 이 몸뚱이를.
병치레 시달리고, 끊일 새 없이 욕망에 타오르고, 견고하지도 영원하지도 못한 꺼풀.
이 몸은 늙어서 시들어 버리고, 깨지기 쉬운 질병의 둥지.
썩은 육신은 마디마디 흩어지고, 생명은 반드시 죽음으로 끝난다.

『法句經』 Dhp 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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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세 가지 경고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이 세상에서 80세, 90세, 100세가 된 남자나 여자들을. 허약하고 허리는 지붕처럼 아래로 굽어 있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걸음을 걷고, 젊은 기운이 없어진지는 벌써 오래된, 이는 빠져 버렸고, 백발이 성성한 머리는 드문드문 남아있거나 그나마 없는, 때가 낀 사지에 피부는 주름져 있는 노인들을. 그리고 그대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그대도 역시 이처럼 늙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대도 늙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이 세상에서 병들어 괴로워하며, 병상에서 비탄에 빠져 있으며, 자신의 배설물 속에서 뒹굴고 있는 남자나 여자가 다른 이들에 의해서 들것에 들려져서 병상에 눕혀져 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대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그대도 역시 이처럼 병들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대도 병들어 쓰러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이 세상에서 죽은지 하루, 또는 이틀, 또는 사흘이 된 남자나 여자의 시신이 부어오르고, 색깔은 검푸르게 되어 완전히 썩어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대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가. 그대도 역시 이처럼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대도 죽어 쓰러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增支部 II I. 「天使品」 35. AN I, 138-140.

1.5 삼사라[saṃsāra; 순환, 윤회] - 生死(또는 생멸)의 반복

비구들이여, 이 윤회는 그 처음을 알 수가 없다. 최초의 시간은 알려질 수 없다. 무명에 의해 뒤덮여 있고, 갈망에 의해 속박되어 있는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들은 이 생사(또는 생멸)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매이며 삶과 죽음을 되풀이한다.

[* 삼사라[saṃsāra] : 윤회輪廻, 유전(流転, 이리저리 떠돎); 순환(circulation), 계속된 흐름(continuous flow), continuous process; round of rebirth, transmigration(윤회); lit. perpetual wandering(끊임없이 계속되는 헤맴), faring on(이리저리 떠돎)

윤회의 세계는 그 시작을 알 수가 없다. 그 시작점은 알려진 바도, 알 수도 없다. 마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원이나 뫼비우스의 띠(Möbius strip)나 클라인 병(Klein bottle)이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의 표면처럼. 

우리는 무지에 가려지고 갈애에 묶여 죽음과 탄생을 끝없이 되풀이하며 배회하고 방황해 왔다. 너무나 오래 배회하고 방황해 온 나머지 익숙해져 버렸다. 우리가 그 안에서 살다가 죽는 동안 무지의 구름을 흩어 버리지 못한다면, 윤회는 계속 반복 순환될 것이다.

삼사라[saṃsāra]-존재의 생사(생멸)의 수레바퀴, 어원적인(문자적인, lit.) 의미는 '끊임없는 헤매임'- 라는 말은, 빠알리어 경전에서 끊임없이 부침하고 있는 생사의 바다를 의미하는 용어로 쓰이며, 끊임없이 반복되는 태어남(生), 늙음(老) 그리고 죽음(死)의 연속적인 흐름의 순환을 뜻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윤회는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헤아릴 수 없는 때부터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어져온, 다섯 무더기[五蘊]의 결합과 흩어짐, 생멸(생사)의 흐름이 인과 연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윤회 속에서 한 번의 삶(生)은 단지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첫 번째 고귀한 진리[苦聖諦]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시선을 이 윤회 즉, 무시무시한 생사의 반복에 두어야 하지, 때로는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을지도 모르는 한 번의 삶(生)에 시선을 두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첫 번째 고귀한 진리[苦聖諦]에서 '괴로움(苦)'이라는 말은 단순히 불쾌한 육체적인 통증과 정신적인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을 빚어내는 모든 것 또는 괴로움으로 전락하는 포텐셜(potential; 잠재성, 잠재력)을 지닌 모든 것을 포함시켜서 이해해야 한다. 고성제[苦聖諦]를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무상[無常; anicca]이라는 보편적인(universal, 모든 것에 공통이 되는, 예외가 없는) 존재의 특성 때문에, 아무리 격조 높고 고상한 행복의 상태라 할지라도 늘(항상) 유지되지 않고 변하고 깨져버리는 것이며, 따라서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존재)의 모든 상태는 그 자체 안에 괴로움의 씨앗을 품고 있는 불안정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비구들이여, 생각해 보라. 이 생사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매이며 삶과 죽음을 되풀이하면서,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고 좋아하는 대상과 헤어지면서, 슬픔 때문에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과 저 사해(四海)의 바닷물 중 어떤 것이 더 많겠는가.

비구들이여, 생각해 보라. 이 생사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매이며 삶과 죽음을 되풀이하면서, 고통과 고난을 당해 흘린 피땀과 저 사해(四海)의 바닷물 중 어떤 것이 더 많겠는가.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오랫동안 생사를 거듭하면서, 부모, 배우자, 아들, 딸, 형제, 자매와의 사별 때문에 괴로워해 왔다. 그리고 수 많은 고통과 고난을 당하며 괴로워해 왔다. 이처럼 이 생사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매이며 삶과 죽음을 되풀이하면서,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고 좋아하는 대상과 헤어지면서, 고통과 고난을 당하며 슬픔과 고통 때문에 울부짖으며 흘린 피눈물은 저 사해(四海)의 바닷물보다 더 많다.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비구들이여, 이 윤회는 그 처음을 알 수가 없다. 최초의 시간은 알려질 수 없다. 무명에 의해 뒤덮여 있고, 갈망에 의해 속박되어 있는 중생(생명의 무리)들은 이 생사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매이며 삶과 죽음을 수 없이 되풀이해왔기 때문이다.

相應部 XV 13. 『淚(눈물 루)經』 SN II, 179-180.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생사를 거듭하면서, 괴로움을 겪어왔고, 슬픔을 겪어왔고, 불행을 겪어왔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바로 지금이 모든 형성되어진 것(諸行)에 대해서 싫어하는 생각을 내기에 적당한 때이며, 탐욕을 버리기에 적당한 때이며, 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해탈을 얻기에 적당한 때이다.

相應部 XV 1. 『신초경(薪草經)』 SN II,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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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괴로움의 발생원인'의 고귀한 진리(苦集聖諦)

2.1 '괴로움의 발생원인'의 고귀한 진리의 정의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발생원인' 인가? 그것은 바로 갈애[渴愛; tanha]인데, 갈애란 또 다른 생존을 초래하며, 쾌락과 탐욕과 집착을 동반하는, 이른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有)에 대한 갈애, 비존재(非有)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란, 다섯 가지 감각(오감각; 눈, 귀, 코, 혀, 몸)의 대상에서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욕망을 말한다.

존재(有)에 대한 갈애란,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으로,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에서의 생존에 대한 욕망을 의미한다. 이 욕망은, 육체와는 상관없이 존속하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자기-영혼에 대한 믿음인 이른바 상견[常見; sassata-ditthi]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비존재(非有; 자기 절멸, 존재 소멸)에 대한 갈애란, 이른바 단견[斷見; uccheda-ditthi]에서 나온 욕망이다. 단견이란, 진정한 자아란 바로 육체라고 하는, 잘못된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의 입장에 서서 자아는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완전히 소멸하고 말며, 죽기 전과 죽은 후는 아무런 인과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는 견해(또는 주장, 또는 믿음)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 갈애는 무엇에서 생겨나며, 어디에 머무는가? 이 세상에서 즐거운 대상, 또는 즐길만한 대상이 있는 곳이면 그 어디에서나 이 갈애는 생겨나고 그곳에 머무른다. 육근[六根; 여섯 가지 감각기능; 눈, 귀, 코, 혀, 몸, 의근(意根, 마노-인드리야; 인간의 경우 뇌를 물질토대로 한 정신 감각기능)]이 즐겁거나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생겨나고 거기에 머무른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맛, 육체의 촉감, 마음속의 현상(정신 감각)들'[육경六境;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생겨나고 거기에 머무른다.

그리고 각각 여섯 가지 식識작용[六識], 여섯 가지 접촉[六觸], 여섯 가지 접촉에서 생긴 느낌[六受], 여섯 가지 표상작용[六想], 여섯 가지 의지작용[六行], 여섯 가지 갈애[六愛], 여섯 가지 거친 사색작용[위딱까; 불선한 마음 작용][六尋], 여섯 가지 미세한 사색작용[위짜라][六伺]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생겨나고 거기에 머무른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의 발생'의 고귀한 진리(苦集聖諦)라고 한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08-9.

2.2 모든 현상의 조건에 의한 발생

비구들이여, 눈으로 대상을 볼 때, 즐거운 대상이면 그 대상에 집착하고, 즐거운 대상이 아니면 싫어한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 코로 냄새를 맡을 때, ... 혀로 맛을 볼 때, ... 몸으로 접촉을 할 때, 마음(意根)으로 마음속의 떠오르는 현상들을 인식할 때, 즐거운 대상이면 그 대상에 집착하고, 즐거운 대상이 아니면 싫어한다. 그리고 몸과 마음과 감각과 법에 대한 사띠의 확립[사념처四念處]을 지니지 않고, 편향되고 편협한 마음으로 지내면서, 마음의 해탈[심해탈; ceto-vimutti]과 지혜의 해탈[혜해탈; paññā-vimutti]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이러한 모든 선하지 못한 현상들이 부지불식간에 감추어져 버린다. 

이처럼 좋아하는(갈망하는) 마음과 싫어하는(혐오하는) 마음을 지닌 채로, 어떤 느낌이 생겨났을 때 그 느낌을 즐기고 붙잡게 되면, 애착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렇게 느낌에서 생겨난 애착은 바로 집착(取)이며, 이 집착을 조건으로 해서 존재경향[형성, bhava, 有; 업에 의한 존재 발현 과정 또는 업의 발현 과정]이 생겨나며, 이 존재경향에 의존하여 새로운 태어남(生)이 생겨나게 되며, 이 태어남을 의존해서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절망 등의 온갖 괴로움의 무더기가 생겨나게 된다.

中部 38. 『애진대경(愛盡大經)』 MN I, 266-7.

[* 앞 장(첫 번째 고귀한 진리)에서 12지(支) 연기 가운데 몇 가지만 언급했던 연기의 고리(지支)가 이번 장인 두 번째 고귀한 진리에 자세한 설명으로 다루어 질 것이다.]

2.3 현재 생에서 받게되는 업(業, 행위)의 결과

실로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감각적인 욕망에 의존되어, 감각적인 욕망에 강요되어, 감각적인 욕망에 의해 완전히 휘둘려져서 왕들은 왕들과 싸우고, 왕자들은 왕자들과, 바라문들은 바라문들과, 부자들은 부자들과 싸운다. 아들은 어머니와 다투고, 어머니는 아들과 다투며, 아버지는 아들과 다투며, 아들은 아버지와 다툰다. 형제 자매와 형제 자매끼리 다투며, 친구와 친구끼리도 다툰다. 이러한 불화와 말다툼과 싸움에 빠지게 되면, 그들은 상대방을 주먹이나 몽둥이나 무기로 쓰러뜨린다. 결국 그들은 죽음이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 괴로워하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감각적인 욕망에 의존되어, 감각적인 욕망에 강요되어, 감각적인 욕망에 의해 완전히 휘둘려져서 사람들은 집을 부수고, 도둑질을 하며, 강탈하고, 약탈하며, 강도질을 하고, 남의 부녀자를 범한다. 그러면 왕은 그런 자들을 잡아서 여러 가지 형벌을 내려 고통을 준다. 형벌을 받다가 죽기도 하고, 죽을 병에도 걸리게 되는 등 갖가지 고통을 받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감각적인 욕망에 의존하여, 감각적인 욕망에 강요되어, 감각적인 욕망에 의해 완전히 휘둘려져서 저지른 행위 때문에 바로 이 삶에서 받게되는 고통의 무더기이며, 감각적 욕망의 재앙인 것이다.

2.4 미래 생에서 받게되는 업(業, 행위)의 결과

비구들이여, 더 나아가, 사람들은 몸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입으로 악행을 저지르며, 마음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처럼 몸과 입과 마음으로 악행을 지음으로 해서, 몸이 무너져 죽은 후에 나쁜 곳(惡處)으로 떨어져서 고통을 받게 되고 불행한 운명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감각적인 욕망 때문에, 감각적인 욕망에 의존되어, 감각적인 욕망에 강요되어, 감각적인 욕망에 의해 완전히 휘둘려져서 저지른 행위 때문에 다음 생인 미래에서 받게 되는 고통의 무더기이며, 감각적 욕망의 재앙인 것이다.

中部 13. 『고온(苦蘊; 고통의 무더기)大經』 MN I, 86-7.

허공 속도 아니고, 바다 속도 아니다.
산 속의 바위 틈 속에서도 몸을 숨길 수 없다.
지상의 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사람들이 악행으로부터 도망칠 곳을.

『法句經』 Dhp 127.

2.5 의지작용으로서의 행위[kamma; 業, 行為]

비구들이여, 내가 깜마[kamma, 카르마karma; 業, 行為, 作業]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의지작용[cetana; 의意思, 의도意圖; volition(자의), intention(의사, 의도), will(의지)]을 말한다. 의지를 지니고, 사람들은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행위를 한다.

비구들이여, 지옥에서 그 결과를 받아야 할 행위(業)가 있고, 축생계에서 그 결과를 받아야 할 행위(業)가 있으며, 아귀의 세계에서 그 결과를 받아야 할 행위(業)가 있고, 인간계에서 그 결과를 받아야 할 행위(業)가 있으며, 천상에서 그 결과를 받아야 할 행위(業)가 있다.

비구들이여, ‘행위(業)의 결과’[vipaka; 과보果報, 이숙異熟, 응보报应; fruition(결실), consequence(결과); kamma-result]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한다. 현세에서 받는 것, 미래 생에서 받는 것이 그 두 가지이다.

增支部 VI 63. AN III, 415.

2.6 행위[kamma; 業, 行為]의 상속자

비구들이여, 모든 중생들은 자신들의 업[kamma; 業, 행위行為]의 소유자이며, 행위(業)의 상속자이고, 행위(業)로부터 태어났으며, 행위(業)에 묶여 있고, 행위(業)를 피난처로 하고 있다. 선한 행위(業)이던지 악한 행위(業)이던지 그 어떤 행위(業)라 하더라도 그 행위(業)의 상속자가 된다.

增支部 X 206. AN V, 288.

어떤 곳이던지 생명이 태어나는 곳에서는 그들의 행위[kamma; 業, 行為]가 결실을 맺는다. 행위가 결실을 맺는 곳에서는 어떤 곳이던지 그 행위의 결과를 맛보게 될 것이다. 그 때가 현세가 되든, 바로 다음 생이 되든, 더 먼 미래 생이 되든 간에.

增支部 III 33. AN I, 135.

대해(大海)도 말라버려, 고갈되어 물 한 방울도 남지 않는 때가 올 것이다. 그리고 이 대지도 불에 의해 타버려 파괴되어 온전히 사라져 버릴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음(無明)에 가려져, 갈애에 빠져서 생사의 굴레에서 이리저리 바쁘게 헤매고 다니는 중생들의 괴로움은 다 할 날이 없을 것이다.

相應部 XXII 99. SN III, 149-150.

[* 하지만, 갈애가 모든 악행의 유일한 원인이어서 현세의 삶과 다음 생에서의 모든 괴로움과 재앙의 유일한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하더라도 갈애가 있다면 바로 그 갈애를 원인으로 해서 괴로움과 재앙을 만들어 내는 시기, 분노, 증오 등의 온갖 나쁜 것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이기적이며 생을 움켜잡는 강한 충동과 행동들은, 지금 이 생과 다음 생에 생겨날 갖가지 재앙과 함께 그리고 심지어는 내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무더기[五蘊]조차,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몽매함과 어리석음[無明]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두 번째 고귀한 진리는 또한, 이 세상에 원인[kamma; 業]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는 설법(法을 설명함)을 통해서 언뜻 보기에는 생래적으로 불공평한 것들의 원인을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잠재적인 성향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운명(?), 모든 행복과 불행이, 부분적으로는 이 생에서 또 다른 부분은 지난 생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원인들[業]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러한 원인들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행위[業]들이며, 생을 움켜잡는 행위[業]들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 행위[業]가 모든 존재의 성향과 운명(?)을 결정한다. 깜마[kamma, 業, 산스트리트.카르마karma]에 대하여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면, 윤회와 연결되어 있는, 선악의 의지작용을 말한다. 따라서 존재 또는 더 적절한 표현으로는 존재로 되어 가는 과정[有; bhava]은, 조건 지어지고 활성화되는 업의 발현 과정[kamma-bhava]과 그것의 결과인 다시 태어남의 과정[upapatti-bhava]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업[kamma; 業]을 생각할 때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존재의 비실체성[anattata; 無我性]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바다의 표면을 휘몰아치며 흘러가는 것은 하나의 특정한 파도(identical wave, individual wave)가 아니라, 파도를 구성하는 물 분자 덩어리의 부침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사의 바다 위를 떠다니는 것은 특정한 어떤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그것들을 구성하는 오온의 작용으로서의 행위에 따라서, 이 생에서는 인간으로, 저 생에서는 짐승으로, 또 다른 생에서는 범천으로, 또 다른 곳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색계의 어떤 존재로 유전하는, 생명(유정)이라는 현상의 파도일 뿐이다.

여기에서 한 번 더 강조해두고 싶은 것은 '업[kamma; 業]‘이라고 하는 용어는 오직 앞에서 언급했던 (의지적, 의도적) 행위만을 의미하지, 그 결과를 의미하거나 그 결과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업[kamma; 業]에 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Buddhist Dictionary(https://what-buddha-said.net/library/Buddhist.Dictionary/index_dict.n2.htm)를 참조하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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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苦滅聖諦)

3.1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의 정의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苦滅聖諦)란 무엇인가? 탐욕을 버림(無貪)에 의한, 저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 떠남, 완전한 파기, 해탈, 무집착 -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라 한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 갈애는 어디에서 버려지며, 어디에서 소멸해버리는가? 이 세상에서 즐거운 대상, 또는 즐길만한 대상이 있는 곳에서 이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한다. 이 세상에서, 눈, 귀, 코, 혀, 몸, 마음(六根;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즐겁거나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한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맛, 육체의 촉감, 마음속의 현상(정신 감각)들’[六境;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한다. 

그리고 각각 여섯 가지 인식작용(六識), 여섯 가지 접촉(六觸), 여섯 가지 접촉에서 생긴 느낌(六受), 여섯 가지 표상작용(六想), 여섯 가지 의지작용(六行), 여섯 가지 갈애(六愛), 여섯 가지 거친 사색작용[위딱까; 불선한 마음 작용](六尋), 여섯 가지 미세한 사색작용[위짜라](六伺)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苦滅聖諦)라고 한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0-11.

비구들이여, 과거의 것이거나, 현재의 것이거나, 미래의 것이거나, 이 세상에서 즐거운 대상, 또는 즐길만한 대상에 대해서, '그것은 항상하지 않다(無常), 비천하고 고통을 품고 있는 것이다(苦),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다(無我), 질병이다, 두려움이다'라고 보면, 저 갈애는 끊어져 버린다. 갈애가 끊어져 버리면, 집착(upadhi)이 끊어져 버린다. 집착이 끊어져 버리면, 괴로움이 끊어져 버린다. 괴로움을 끊어버린 사람은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우수로부터 해탈하게 된다. 이것을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이라고 나는 말한다.

相應部 XII 66. 『접촉(接觸)經』 SN II, 109.

3.2 모든 현상의 조건에 의한 소멸

탐욕을 버림(無貪)에 의해, 저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에 의해 집착(取)이 소멸한다. 집착의 소멸에 의해, (새로운) 존재경향(有)이 소멸한다. 존재경향의 소멸에 의해, 태어남이 소멸한다. 태어남의 소멸의 의해,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우수가 소멸한다. 이와 같이 괴로움의 전체 무더기의 소멸이 있게 되는 것이다.

相應部 XII 43. 『苦經} SN II, 70.

물질작용(色)의 소멸, 적멸, 종식, 감수작용(受)의 ... 표상작용(想)의 ...형성작용(行)의 ... 인식작용(識)의 소멸, 적멸, 종식, 이것을 괴로움의 소멸, 질병의 적멸, 늙음과 죽음의 종식이라고 한다.

相應部 XXII 30. 『生經』 SN III, 32.

[우리들이 파도라고 부르는, 바람에 의해 생겨나서 그 힘에 의해 커져서, 모아진 에너지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출렁이는 물의 움직임에 대해 어리석은 사람은, 호수의 표면 위를 하나의 똑같은 파도가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바람이 멈춘 후, 다시 새로운 바람이 호수의 표면 위로 불지 않는다면, 모아진 에너지도 점차로 고갈되어 버려, 마침내는 물의 전체적인 출렁임도 그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연료를 공급하지 않으면, 남은 연료가 다 타버릴 때, 불은 꺼져 버리고 만다.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아라는 실체관념을 만들어낸,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의 생멸(생기 소멸) 흐름은 갈애에 의해 생겨나서, 그 힘에 의해 커져서, 모아진 에너지에 의해서 일정한 기간 지속하게 된다. 자 이제, 갈애라고 하는 연료가 끊어지고, 더 이상의 갈애가 다섯 무더기(五蘊)의 흐름에 부어지지 않으면, 생명은, 저장된 에너지가 있는 동안만 지속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의 죽음 순간에 다섯 무더기(五蘊)의 흐름은 마지막 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열반[nibbāna; 어원적으로 '불어서 꺼진 상태']은 두 측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

(1) ‘번뇌의 완전한 소멸[kilesa pari-nibbāna]’의 의미로,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를 말하는데, 이 상태는 일반적으로 살아있을 때, 체험된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상태의 열반을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 또는 유여열반; saupadisesa nibbāna]'이라고 하는데, '아직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의 인연조건이 남아있는 열반'이라는 뜻이다.

(2) ‘오온(五蘊)의 완전한 소멸[khandha pari-nibbāna]’의 의미로, 아라한의 죽음의 순간에 얻어지는 열반으로, 경전에서는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또는 무여열반; an-upadisesa nibbāna]' 또는 '빠리닙바나[pari-nibbāna; 완전한 열반; 한문 음사는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가 남아있지 않은 열반이라는 뜻이다.]

3.3 열반[nibbāna]

실로 이것은 평온이며, 뛰어난 것이며, 모든 형성작용(諸行)의 종식이며, 모든 존재의 의지처[upadhi]의 파기이며, 갈애의 소진(消盡)이며, 무탐[無貪; viraga]이며, 멸[nirodha]이며, 열반[nibbāna]이라고 한다.

增支部 III 32. AN I, 133.

바라문이여, 탐욕에 물든 마음에 정복되어, 성냄에 의한 악한 마음에 정복되어, 무지에 의한 어리석음에 정복되어, 사람들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며, 다른 이들을 파멸로 이끌고, 자신과 다른 이 둘 다를 파멸로 이끌어, 정신적인 고통과 슬픔을 겪는다. 하지만, 탐욕과 성냄과 무지를 버릴 때, 사람들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지 않으며, 다른 이들을 파멸로 이끌지도 않고, 자신과 다른 이 둘 다를 파멸로 이끌지 않아서, 정신적인 고통과 슬픔을 격지 않는다. 이처럼 바로 현세에서 증득될 수 있는, 이 열반은 먼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매력이 있는 것이며, 지혜로운 자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增支部 III 55. AN I, 159.

벗이여, 탐욕의 소진, 성냄의 소진, 무지의 소진, 이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相應部 XXXVIII 1. 『열반경(涅槃經)』 SN IV, 251.

3.4 아라한

바르게 완전히 해탈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있어서는 의존할 것도, 해야 할 것도 없다. 반석이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 소리, 냄새, 맛, 접촉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또한 바람직한 것에 의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에 의해서도 이런 사람은 동요되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굳게 서있고, 완전한 해탈을 얻었기 때문이다.

增支部 VII 55. AN III, 378-9.

이 세상에 있는 이런 저런 것들을 잘 살펴보아,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동요되지 않고, 평온하며, 성냄의 불길이 꺼져 있고, 슬픔과 욕심이 없는 사람, 그는 태어남과 늙음을 벗어났다고 나는 말한다.

增支部 III 32. AN I, 133. 『숫따니빠따[Sutta-Nipāta]』 Sn 1048.

3.5 벗어나는 것

비구들이여, 실로 지수화풍 사대 작용도 없는 곳, 공무변처도 없고, 식무변처도 없고, 무소유처도 없고, 비상비비상처도 없는 곳, 이 세상도 아니고 저 세상도 아닌 곳이 있다. 그것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것도 아니고,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죽는 것도 아닌 생사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끝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은 것, 생겨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형성되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만일 태어나지 않은 것, 생겨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형성되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면, 태어난 것, 생겨난 것, 만들어진 것, 형성되어진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은 것, 생겨나지 않은 것, 만들어지지 않은 것, 형성되어지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태어난 것, 생겨난 것, 만들어진 것, 형성되어진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다.

『우다나[Udana; 自說經]』 VIII, 1-3. Ud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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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고귀한 진리(苦滅道聖諦)

4.0 두 가지 극단과 중도(中道)

비구들이여, 감각적인 욕락의 생활에 빠져있는 사람은 저급하며, 속되고, 고귀하지 않고, 이로움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 한편으로 결과 없는 고행을 일삼는 사람은 고통스럽고, 고귀하지 않고, 이로움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 극단 모두를 버리고, 여래[如來]는, 보는 눈을 주고, 앎을 주는 중도, 평온에 이르게 하고, 뛰어난 앎을 얻게 하며, 깨달음을 이루게 하고, 열반을 얻게 하는 중도를 발견하였다.

<역주 : 여래[如來]는 부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쓰신 호칭이다. 여래[如來]는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에 따라 그렇게 온 자(또는 그렇게 간 자)’라는 뜻을 지닌 고대인도어 따타가따[tathāgata; tathā­+gata, or tathā+āgat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4.0.1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고귀한 바른 길 [八支聖道, 八正道]

비구들이여, 그 중도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고귀한 바른 길[Ariya-atthangika-magga; 八支聖道, 八正道]이다. 그 여덟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삼마[Sammā] 딧티[Diṭṭhi], 정견[正見] 
(2) 삼마[Sammā] 상깝빠[Saṅkappa], 정사유[正思惟]
(3) 삼마[Sammā] 와짜[Vācā], 정어[正語] 
(4) 삼마[Sammā] 깜만따[Kammanta], 정업[正業] 
(5) 삼마[Sammā] 아지와[Ajīva], 정명(正命)
(6) 삼마[Sammā] 와야마[Vāyāma], 정정진[正精進]
(7) 삼마[Sammā] 사띠[Sati], 정념[正念] 
(8) 삼마[Sammā] 사마디[Samādhi], 정정[正定]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발견한, 보는 눈을 주고, 앎을 주는 중도, 평온에 이르게 하고, 뛰어난 지혜를 얻게 하며, 정각을 이루게 하고, 열반을 얻게 하는 중도이다.

相應部 56:11.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SN V, 42.

<역주 : 부처님께서는 팔정도의 여덟 부분을 바와나[bhavana; 계발 수행]의 관점에서 실라(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정진·정념·정정), 빤냐(정견·정사유) 세 그룹으로 그룹핑하셨다.

• 빤냐[Panna, 혜慧; 지혜]
1) 정견[正見], 삼마[Sammā] 딧티[Diṭṭhi]
: 바른 '봄, 관찰, 통찰(깊은 관찰), 조사; 앎, 이해, 견해'
2) 정사유[正思惟], 삼마[Sammā] 상깝빠[Saṅkappa]
: 바른 '생각, 사유, 분석'

• 실라[Sila, 계戒; 계율]
3) 정어[正語], 삼마[Sammā] 와짜[Vācā]
: 바른 '언어, 말, 글' 
4) 정업[正業], 삼마[Sammā] 깜만따[Kammanta]
: 바른 ‘업(業), 행위, 행동’
5) 정명(正命), 삼마[Sammā] 아지와[Ajīva]
: 바른 '삶, 생활, 생계'

• 사마디[Samadhi, 정定; 고요집중]
6) 정정진[正精進], 삼마[Sammā] 와야마[Vāyāma]
: 바른 '노력, 정진' 
7) 정념[正念], 삼마[Sammā] 사띠[Sati]
: 바른 ‘사띠;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전념하여 또는 마음챙겨 알아차림, 삼빠자나[sampajāna;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 빤냐로 봄/앎], 깨어있음'
8) 정정[正定], 삼마[Sammā] 사마디[Samādhi]
: 바른 ‘삼매, 몰아(沒我) 고요집중’

실라[Sila]는 한문 경전에서 계(戒), 계행(戒行), 습관(習慣), 도덕(道徳)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 경전에서는 code of morality, habit, moral practice 등으로 번역한다.

사마디[Samadhi]는 한문 경전에서 정(定), 삼매(三昧; 사마디의 한문 음사), 사마지(三摩地; 사마디의 한문 음사), 등지(等持), 심일경(心一境), 정신통일(精神統一)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 경전에서는 concentration; lit. 'the (mental) state of being firmly fixed', onepointedness of the mind 등으로 번역하고, 'a concentrated, self-collected(차분한, 고요한), intent state(몰두 상태) of mind and meditation, which, concomitant with right living, is a necessary condition to the attainment of higher wisdom and emancipation(해탈)'로 그 의미를 설명한다.

빤냐[Panna]는 한문 경전에서 혜(慧), 반야(般若; 빤냐의 한문 음사), 지혜(智慧), 般若(智)慧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 경전에서는 wisdom, understanding, insight 등으로 번역한다.

부처님께서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 바와나’(사마디를 계발하는 수행), 즉 정정진(바른 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을 계발하는 수행을 사마타라고 칭하셨다. 그리고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 바와나, 즉 사마타 후에 깊은 정견(바른 관찰, 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를 계발하여 빤냐를 계발하는 수행을 위빠사나라고 칭하셨다.>

[*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고귀한 바른 길(팔지성도, 팔정도)

비유적인 표현인 '길(道)'은, 주어진 순서를 따라서, 하나에서 다음 번 것으로 하나씩 닦아가야 하는 것으로 때때로 잘못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실제의 수행에 있어서는, 윤리(戒)를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정어·정업·정명)를 제일 먼저 닦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마음집중(定)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정정진·정념·정정)를 실천함으로써 체계적으로 마음을 길들이는 데에 주위를 모아야 한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갖춘 후라야 비로소, 지혜(慧)를 구성하는 처음의 두 가지 요소(정견·정사유)를 계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맨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 있어서, 초보적인 최소한의 (지식차원의) 바른 이해(정견)가 요구된다. 그 이유는,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실천하는데 확고한 이유를 알고 고무를 받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괴로움 등의 실상과 진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 정도의 바른 이해(正見)라는 요소는 정걱(해탈, 열반)에 이르는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다른 요소들이 효과적으로 제 각각의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요구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른 이해(정견)가 팔정도에서 맨 처음의 위치에 오게 된 것이다.

법[法, 담마; 실상과 진리]에 대한 초보적인 단계의 (지식차원의) 바른 이해는, 다른 요소들의 도움과 함께 점차로 발전 향상되어가서, 궁극적으로는, 네 부류의 성인의 깨달음(四果)을 얻기 위한, 혜해탈[慧解脫; panna-vimutti]을 얻기 위한, 정각(해탈, 열반)을 얻기 위한 직접적인 조건인, 통찰지[洞察智; 예리한 관찰력으로 실상과 진리를 여실히 꿰뚫어 보는 지혜; 수행의 통찰(깊은 관찰) 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 위빠사나, 즉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정견(바른 관찰/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 계발 수행으로 생기는 지혜;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사띠를 확립하는 수행을 통해서 자신과 세상의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통찰(깊이 관찰)하고 바르게 분석 사유하는 수행의 경험에 의해서 생기는 지혜]에 이르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 길은 괴로움이 없고, 피해를 받지 않고, 번거로움이 없고, 실의에 빠지지 않는, 올바른 길이다.

中部 139. 『無諍分別經』 MN III, 231.

이것이야말로 길이다. 완전히 바르게 깨닫기 위한 다른 길은 없다.
그대들은 이 길을 따라라. 이 길이야말로 악마(세간의 유혹)를 어지럽힐 것이다.
그대들이 이 길을 가면 괴로움의 화살을 빼게 되리라.
나는 괴로움의 화살을 뺄 줄 알고, 그대들에게 이 길을 설한 것이다.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하라. 여래는 길을 설(설명)해주는 사람일 뿐,
마음을 고요히 집중해서 길을 가는 사람은 탐진치의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法句經』 Dhp 274-276.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不死)는 성취되었다. 나는 법을 드러내 보이고, 법을 가르친다. 가르침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오래지 않아, 바로 그 최상의, 청정한 삶의 완성을, 바로 이 생에서 그대들 스스로 알게 되고, 증득하게 되고, 이루어 머물게 될 것이다.

中部 26. 『聖求經』 MN I,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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