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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이야기

불교의 수행법 - 삼학을 중심으로



불교의 수행법 - 삼학을 중심으로


이 정 모(태원)/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 목 차 • 

Ⅰ. 서론

Ⅱ. 삼학에 의한 수행

   1. 삼학의 근원과 발전

   2. 계율의 수행

   3. 선정의 수행

   4. 지혜의 발현

Ⅲ. 맺음말

 

Ⅰ. 서 론


인간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종교의 문을 두드려 길을 찾으려는 것이라 본다. 이 행복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는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여러 가지의 답이 있을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내면으로는 마음의 안정, 밖으로는 안정된 삶 속에 즐거움이 흐르는 상태가 행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이에 ‘安樂’이라는 단어가 적당할지 모르겠다. 안과 밖이 안락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반되어야 할 것이 마음의 안정이라 본다. 마음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밖으로 한없는 욕망을 쫓아가기 보다는 안으로 이 욕망을 제어하면서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불교의 수행은 이 마음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을 제어하면서 정화하여 나아가는 것이며, 이 수행의 방법이 많기 때문에 팔만사천 가지라 한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이 설하신 모든 것이 수행의 길이기 때문에 단적으로 어느 한 가지를 들어 이것이 불교의 바른 수행법이라 주장한다면 오류를 범할 것이고, 자기의 독선에 빠질 수 있다. 

  

원시불교에서는 석존께 귀의하여 법을 듣는 것도 하나의 수행법이고, 다른 사람을 위해 법을 설하는 것, 내 힘을 조금이라도 보태어 없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팔정도의 실천, 12연기를 깨닫는 등 이밖에 모든 것이 수행법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그 가운데 6바라밀과 10바라밀의 수행하는 보살도 수행이 있는가 하면 각 종파마다 각기 다른 색깔의 수행법을 주장하고 있다. 즉 선종의 참선, 정토종의 염불, 진언종의 주력, 천태종의 지관수행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본 논고에서는 삼학을 중점적으로 논하면서 남방불교의 수행, 대승불교에서의 수행의 관계를 논할까 한다.   


Ⅱ. 三學에 의한 수행


1. 삼학의 근원과 발전

불교에 처음 입문하여 기초 교리를 배울 때 마땅히 배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하여 戒․定․慧 三學을 강조한다. 이 삼학은 불교 수행의 근간으로 그 어떤 수행도 이 삼학에 근본을 두고 있다고 본다. 그러기에 본 논고에서는 삼학을 중점적으로 검토해볼까 한다. 흔히들 계의 수행으로 인해 선정이 생기고, 선정에 의해 지혜가 있으며, 이 지혜에 의해 수행의 목적지인 깨달음을 완성하여 성불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삼학이라는 단어를 원시경전인 아함경에서 찾아보면 『잡아함경』 가운데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서는 부처님이 기원정사에 계실 때 모든 비구들에게 삼학의 수행을 하라고 강조하였다. 이 가운데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느 때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세 가지 배워야 할 것이 있는데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이른바 增上의 戒學, 增上의 意學, 增上의 慧學이니라.” 그 때 세존께서 곧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세 가지 배움을 완전히 갖추면 그것이 비구의 바른 행이네 증상의 계율과 마음, 지혜의 세 가지 법을 닦아 꾸준히 나아가라.

 

라고 하여 이 삼학을 수행자가 쉬지 않고 꾸준히 닦을 것을 강조하였다. 이 삼학은 한 경을 설하듯이 ‘如是我聞’으로부터 ‘歡喜奉行’으로 끝나는 짧은 경전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이어서 나오는 경전에서는 어떤 것이 삼학인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增上의 戒學에 대해서는 “프라티목크사(波羅提木叉)의 律儀로 계율답고 위엄 있는 태도와 행동을 완전히 갖추어 아주 적은 죄를 보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계학을 수지해야 한다.”고 하였고, 增上의 意學에 대해서는 “비구가 욕심과 악하고 착하지 않는 법을 떠나고, 나아가서 네 번째 선정에 완전히 머무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增上의 慧學에 대해서는 “이것은 苦聖諦라는 것을 여실히 알고, 그리고 集聖諦, 滅聖諦, 道聖諦를 여실히 아는 것이다.”라고 하여 고집멸도의 4성제를 바로 아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삼학 가운데 ‘定’을 ‘意’라고 하여 마음이 욕심을 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악한 행동을 하지 않고 선정에 머무는 것이라 하여 마음의 작용을 말하였다. 즉 ‘定’은 결과의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이며, ‘意’는 결과가 있기 전의 마음가짐에 입장에서 말한 것이라 본다. 

  

『장아함경』에서는 이 三學이라는 단어는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네 가지 깊은 법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삼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부처님이 모든 비구에게 이르기를 네 가지 깊은 법이 있는데, 첫째는 聖戒요, 둘째는 聖定이며, 셋째는 聖慧며, 넷째는 聖解脫로 이 법은 미묘한 것으로 알기 어렵다. 나와 너희들은 밝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생사에 있으면서 유전하는 것이 끝이 없다.”라고 하여 우리가 수행의 목적인 해탈을 하기 위해서 삼학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네 가지 깊은 법을 말하였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앞에 나오는 삼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원인의 수행이며, 마지막 나오는 해탈은 수행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장아함경』에서 “戒를 닦아 定을 얻으면 큰 과보를 얻게 되며, 定을 닦아 慧를 얻으면 큰 과보를 얻게 되고, 지혜를 닦아 마음이 깨끗하면 等解脫을 얻어 欲漏, 有漏, 無明漏 등 三漏를 다 제거한다.”고 하여 持戒 → 禪定 → 智慧 → 解脫이라는 수행의 점차를 알 수가 있다. 이런 『장아함경』의 수행사상은 『열반경』으로 이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일체 세간의 중생들이 어떤 방편을 닦고 익혀야 알고보고 깨닫게 되겠는가에 대해 설하신 것이 삼학이라 전제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계율이 깨끗하므로 몸이 가벼워지고 입에 허물이 없다. 그 때 보살이 만약 보거나 듣거나 맡거나 맛보거나 접촉하거나 안다면 모든 나쁜 일들이 없을 것이다.  곧 나쁜 일이 없으므로 마음이 안온해지며 안온하므로 고요한 선정을 얻는다. 곧 고요한 선정을 얻으므로 진실하게 알고 보며 진실하게 알고 보므로 생사를 싫어하여 여의었다.  생사를 여의었으므로 해탈을 얻고 해탈을 얻으므로 불성을 보며 불성을 보았으므로 대열반을 얻는다.


라고 하여 『아함경』의 持戒 → 禪定 → 智慧 → 解脫과 같은 순서를 말하고 있는데 『열반경』에서는 아함경보다 삼학을 자세히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계에 대해, 


오직 깊은 마음으로 깨끗한 계율(淨戒)을 닦아 지녀야 한다. 선남자야, 그 때 보살이 이러한 인연으로 미래 세상에 태어나는 곳마다 항상 계행이 청정할 것이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계행이 깨끗하기 때문에 태어나는 곳마다 교만이나 삿된 소견이나 의심이 없다.


라고 하여 淨戒를 수지하는 공덕에 의해 다가오는 미래세에 교만이나 邪見, 그리고 의심이 없는 수행을 한다고 하였고, 선정에 대해서는


또 계행이 이미 청정하므로 다시 선정을 닦는다. 선정을 닦았기 때문에 태어나는 곳마다 바르게 기억하고 잊지 않는다. 곧 모든 중생들이 다 불성이 있는 것과 십이부경과 여러 부처님․세존의 常․樂․我․淨과 모든 보살들이 방등 󰡔대열반경󰡕에 안주하여 모두 불성을 보는 것 등을 기억하고 잊지 않는 것이다.


라고 하여 선정 가운데 總持와 常․樂․我․淨의 사무량심과 佛性을 보는 이익을 말하였으며, 지혜에 대해


계행과 선정을 이미 구비하고 나서 다음에는 깨끗한 지혜를 닦아야 한다. 곧 지혜를 닦았기 때문에 처음부처 몸속에 내가 있다거나 내 속에 몸이 있다거나 하지 않는다.  또 이것이 몸이고 이것이 나라든가, 이것이 몸이 아니고 이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깨끗한 지혜를 닦는다고 한다.


라고 하여 지혜에 의해 이 몸에 착하지 않고 分別心을 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처럼 삼학의 중요성은 석존이 열반하실 때 말씀했다는 유언의 경인 『유교경』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계율을 의거함으로 해서 모든 선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일체의 고통이 사라지고 지혜가 저절로 발로되게 되는 것이니라. 이러한 까닭으로 모든 비구들이여! 너희들은 응당히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되 절대로 깨뜨려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만약에 누구든지 적극적으로 이 계율을 잘 지켜 나간다면 이러한 사람에게는 선법이 풍성하게 일어나게 될 것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모든 선법의 공덕이 하나도 생겨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계율은 최고로 편안하고 안온한 공덕이 생장될 수 있는 제일의 터전이 된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할 것이니라.


여기서는 삼학의 수행 순서를 열거하면서 계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대애경』에서는,


보살에게는 네 가지 事莊嚴이 있는데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戒莊嚴으로 일찍이 禁戒를 파하지 않았음이요, 둘째는 定意莊嚴으로 뜻을 일찍이 산란하지 않았음이며, 셋째는 지혜장엄으로 마음에 장애가 없는 것이고, 넷째는 總持莊嚴으로 듣는 것을 모두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事莊嚴이다.


고 하여 네 가지 장엄을 이야기하면서 삼학 하나하나의 수행에 의해 장엄이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다. 이 장엄이란 중생을 구원하기 위한 자비심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삼학의 수행은 자비의 이타심이며, 이 삼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엿볼 수 있다.


이상으로 보면 원시경전인 『아함경』에서부터 마지막 유언경인 『유교경』에까지 삼학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삼학이 얼마나 중요함을 알 수 있고, 불교의 모든 수행의 근간은 삼학을 근본으로 한 것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삼학이 중요하기 때문에 세존이 수발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이 스물아홉에 집을 떠나 착한 도를 구했다. 수발아, 나는 부처가 된지 이제 50년이다. 계와 정과 지혜의 행을 홀로 깊이 생각했나니 이제 법의 중요함을 말했노라 이 밖에는 다른 사문의 법이 없다.”고 한 것은 석존이 성불하여 50년이 지나 열반에 드시기 전에 생각해 보니 자신도 삼학의 수행에 의해 善道를 이루었기에 이 중요한 길을 다시 한 번 너희들에게 강조하여 말하니 너희들은 이 삼학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내용이라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삼학의 내용을 하나씩 검토해 볼까 한다.  


2. 계율의 수행

그러면 삼학 가운데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것은 계이기 때문에 계율에 대해 알아보자. 이 계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듯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계율을 잘 지켜야 수행의 기초가 튼튼해져 선정과 지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계율이 무너지면 선정이 생길 수 없고, 지혜가 떠오를 리 없기 때문에 이 계율을 지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는 아니다.  

  

戒에 대한 한자의 의미를 보면 ‘경계하다, 조심하고 주의하다, 삼가다, 타이르다’ 등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 견책하는 의미도 있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는 훈계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 보면 6근의 감각기관이 6경의 대상에 접할 때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고 주의하여야 한다’는 것이 계를 지키는 근본 자세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개 조심, 불조심, 낙석 조심, 물 조심, 괴한 조심’ 등 경계하라는 많은 문구를 볼 수 있다. 사나운 개가 있으니 개를 조심하면 물리지 않을 것이고, 전기불이나 가스 불을 조심하면 화재로 인한 많은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횡단보도와 차선 등 다른 것을 조심하여 운전하면 교통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이렇듯이 인간이 인식하는 6근의 감각기관이 인식의 대상인 6경을 대할 때 경계하고 조심하면 6식의 작용이 혼란하고 번민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안정을 줄 것이다. 그러기에 계를 지키는 것은 다가 올 재앙을 미리 막는 길이며, 앞으로 순조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고,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이다. 

  

남방에서 주로 하는 수행은 위빠사나인데 이 수행을 초기불교의 수행이라 할 수 있다. 이 수행에서도 戒 · 定 · 慧 등 三學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선정과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지계가 그 전제 조건이 되어야만 한다. 간혹 계와 정이 없이도 觀法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는데 제일 중요한 조건은 지계다. 이러한 내용을 남전 파리어 장경에서 보면,


한때 우띠야(Uttiya)는 세존이 계신 곳에 가서 예배하고 한 쪽에 앉아 세존께 사뢰기를, 

“세존이시여! 원컨대 나를 위해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십시오. 나는 세존으로부터 법을 듣고 홀로 조용히 앉아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우띠야여, 너는 선법의 처음을 청정히 해라. 무엇을 선법의 처음이라고 하는가. 청정한 계를 잘 지키는 것과 정직하게 보는 것이다. 우띠야여, 너는 계를 청정히 하고, 정견을 수행하여 얻으면 너는 계를 의지하여 사념처를 닦아라.”


라고 하여 淸淨戒와 正見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면 선법의 처음은 계와 정견으로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 어느 하나도 얻을 수 없기에 수행자는 이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남방의 수행법 가운데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身念處, 느낌에 대한 마음 챙김의 受念處, 마음에 대한 마음 챙김의 心念處, 법에 대한 마음 챙김의 法念處 등 四念處인데 이 사념처를 수행하기 전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은 계와 정견으로 청정계를 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남전대장경과 북전에서 보면 먼저 남전대장경에서는


波羅提木叉란 모든 善法의 처음이고, 얼굴이며, 上首이다. 이것에 의해서 波羅提木叉라 한다.


라고 하였고,  『五分律』에서는


이 가운데 波羅提木叉는 계로서 모든 根을 防護하고 善法을 증장시키는 것으로 모든 善法에 의해서 가장 初門이 되기 때문에 이름하여 波羅提木叉라 한다.


라고 하였다. 또 『四分律』에서는


波羅提木叉는 계이다. 스스로 위의를 攝持하고, 住處・行根・面首로서 여러 가지 善法을 모아 삼매를 성취하기에 나는 마땅히 설하며, 마땅히 결집하고, 마땅히 發起하고 연설하여 베풀며, 開現하고 반복하여 分別할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모든 대덕이여 나는 이제 마땅히 계를 설하리라.


라고 하였다. 이 모든 율장에서 말하는 계의 역할이라는 선법을 얻는데 기초가 되는 초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갈 때는 출발점이 있을 것이다. 이 출발점 없이 목적을 향할 수 없듯이 마음의 평온을 얻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持戒淸淨이 출발점이다.

  

계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말하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이것이 배제되면 상하의 질서가 파괴되고 사회가 혼탁하게 되어 인간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길은 멀기만 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불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데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적인 행위를 어긴다면 그 어떤 깨달음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석존께서는 ‘선법의 처음을 청정히 하라’고 하였고, 이 선법의 처음을 청정히 하는 것은 ‘계를 잘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계를 잘 지키는 것이 불자의 근본 도리이며 이것이 불자의 도덕적인 행위다. 

  

이 계에 대해 『열반경』에서는 세간의 계와 출세간의 계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세간의 계를 보면,


선남자야, 세간의 계율은 청정하다고 이름 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세간의 계율은 어떤 것을 위하기 때문이며 성품을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끝까지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을 널리 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뜻으로 이름 하여 깨끗하지 못하다고 한다. 곧 깨끗하지 못하므로 뉘우치는 마음이 있고, 뉘우침이 있으므로 마음에 기쁨이 없다.


곧 기쁨이 없으므로 즐겁지 못하고 즐겁지 못하므로 안온하지 못하다. 안온하지 못하므로 동요하지 않는 선정이 없으며 동요하지 않는 선정이 없으므로 진실하게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 진실하게 알지도 보지도 못하므로 싫어함이 없고 싫어함이 없으므로 해탈이 없다.  해탈이 없으므로 불성을 보지 못하고 불성을 보지 못하므로 마침내 대반열반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간의 계율은 이름 하여 청정하지 못하다고 한다.


라고 하여 세간의 계율을 지키는 것만으로 청정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즉 세간의 계율은 세속의 욕망을 위한 행위이기 때문에 청정하지 못해 이 계율을 실행하드라도 후회하는 마음이 생길뿐만 아니라 이에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다. 그리고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태어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해탈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와 반대로 출세간의 계율에 대해서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의 청정한 계율이라는 것은 계율이 아니기 때문이며, 어떤 것을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끝까지 이르기 때문이며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름 하여 보살의 계율은 청정하다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청정한 계율 속에서 뉘우침이 없는 마음을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뉘우침이 없는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선남자야, 마치 어떤 사람이 밝은 거울을 들고 있으면 얼굴을 보려고 하지 않아도 얼굴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또 농부가 밭에 씨를 심으면 싹이 나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싹이 저절로 나는 것과 같다. 또 등불을 켜면 어둠을 없애려고 하지 않아도 어둠이 저절로 없어지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깨끗한 계율을 가지면 뉘우침이 없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도 그와 같다. 곧 깨끗한 계율을 가지므로 마음이 기쁘게 되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단정하게 생긴 사람이 자기의 얼굴을 보면 기쁜 마음이 생기듯이 깨끗한 계율을 가지는 것도 그와 같다. … 내가 지금 깨끗한 계율을 닦는 것으로 열반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인연으로 곧 마음이 즐겁게 된다.


라고 하여 출세간의 계율이 세간의 계율과의 차이가 어떤 것인가를 비유를 들어가면서 자세히 설하였다. 출세간의 계율이란 세속적인 욕망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고 이런 욕망을 제거하고 마음을 비우는 행위를 위한 계율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잘못했다는 뉘우침이 있을 수 없고 출세간의 계율을 수지하면 반드시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 그리고 출세간의 계율이란 중생을 구원해야 한다는 자비심이 근본이 되기 때문에 청정한 계율을 수지한 사람은 자연히 열반에 도달하여 중생을 구제하게 된다. 

  

앞에서 여러 번 불교의 계를 청정계라고 한 것은 어떤 세속적인 욕망을 이루는데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어떤 한 집단을 유지하고, 어떤 이념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마음을 비우는데 역할을 하고 지혜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청정하지 않으면 선정이 있을 수 없고 여기에 지혜는 생기지 않기에 출세간의 계를 청정계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유교경』에서, “부처님의 계율은 작은 계율이라도 참으로 귀중하게 잘 지켜야 한다. 어두움 속에서 만난 빛처럼, 가난 속에서 얻은 보물처럼 참으로 귀중하게 잘 지켜야 한다. 계율이야말로 참으로 큰 스승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세상에 더 머물더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즉 계율 하나만 잘 지키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지름길이며, 계율 하나만 잘 수지하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안 계셔도 정법이 바르게 실천하게 되어 부처님이 우리 앞에 계시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만큼 계를 수지하는 것은 그 어떤 수행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계를 지킴으로 인해 身口意 삼업을 청정하게 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남방의 수행인 위빠사나뿐만 아니라 북방의 수행인 염불, 참선, 주력 등 여러 가지 수행에서 마음을 집중하여 더 향상된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 계를 수지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행위가 청정해질 때 마음은 고요하고 맑아지며 행복해진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인 행위의 청정을 이루어야만 비로소 마음의 청정, 즉 心淸淨(citta-visuddhi)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도덕적 행위의 청정은 수행자가 향상을 이루기 위해 갖추어야 할 선결 조건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열반경』에서는 “계는 온갖 선법을 짓기 위해 올라가는 계단이 되는 것이며, 선법이 생겨나도록 하는 근본이 된다. 마치 땅이 온갖 수목을 생기게 하고 장육시키는 것과 같다”고 하셨듯이, 계율은 단지 선정에 들어갈 수 있는 토양을 확실하게 만들어 주는 바탕이 된다.

  

계를 실천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선정과 지혜인데 『대애경』에서는 계의 수행에 의한 열 가지 장엄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그 몸을 장엄한 것으로 모든 모습을 구족하게 갖추고, 둘째는 입을 장엄한 것으로 언행이 서로 도우며, 셋째는 그 마음을 장엄한 것으로 그릇됨이 없다. 넷째는 국토를 장엄한 것으로 원한 바를 구족하고, 다섯째는 중생을 교화하는 장엄으로 뜻이 청정하며, 여섯째는 태어난 곳이 장엄되어 있어 모든 여러 가지 악을 범할 것이 없다. 일곱째는 보살행의 장엄으로 如來行을 배우고, 여덟째는 聖慧莊嚴으로 스스로 큰 것을 무너뜨리지 않으며, 아홉째는 道場莊嚴으로 여러 가지 덕을 갖추기를 권하고, 열째는 힘인 無所畏, 不共法으로 장엄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계를 수지함으로 인해 몸과 마음, 그리고 국토와 수행하는 도량이 청정하게 장엄이 될 뿐만 아니라 여래행으로 무소외와 불공법을 증득하는 장엄까지 강조한 것은 계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하며, 수행자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선정의 수행


1) 지계에 의한 욕망 제거

앞에서 이야기한 계의 실천은 악한 업을 짓지 않고 착한 선행을 하여 선업을 지으라는 것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마음이 六塵의 경계에 유혹되어 객관의 대상을 쫓아가지 않고 주관인 내면의 세계인 마음을 고요히 갖게 하기 위한 것에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구족계인 네 가지 바라이(斷頭罪) 가운데 첫째인 不淫戒의 경우를 보면 음행이란 남녀 간에 성행위를 하는 것으로 이는 후대의 생명을 생산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생명이 생겨난다는 것은 생겨난 이 생명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가장 큰 고통으로 간주하는 네 가지 고통 가운데 생과 사의 두 가지 고통이다. 


다시 말하면 성행위는 생사의 고통을 만드는 것으로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다. 요즈음 21세기에 들어와서 매스컴에서 이 성행위를 하나의 오락으로 생각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를 추구하는 것은 성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의 안정을 찾아 고요함을 유지하여 선정을 얻기 위해서는 출가자에게는 不淫戒, 재가자에게는 不邪淫戒를 지켜야 한다. 이 밖에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 생명을 죽이는 행위, 남을 속이는 행위 등은 자기의 이익을 원하는 욕심에 의해 남에게 큰 피해를 주는 행위이며, 이 욕심은 하나의 대상에 집착하여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행위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불러들이는 것이며,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과는 거리가 멀어 선정을 갖기는 요원하다. 그래서 이 계를 수지하는 것은 선정을 얻기 위한 첫 단계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선정이란 이 육체의 감각기관인 眼耳鼻舌身意의 6根이 객관의 세계인 色聲香味觸法의 6塵에 이끌려 집착하지 않음과 동시에 마음에 산란심이 없이 고요하여 적정한 상태라 본다. 이러한 상태를 『장아함경』에서는 한 바라문이 세존의 얼굴을 보니 “용모가 단정하고 諸根이 寂定하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諸根寂定’은 세존께서 6근이 6진에 물들지 않으신 자유로운 상태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6근이 6진에 물들지 않기 때문에 용모가 단정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어 친견하는 이들은 이를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경우를 『잡아함경』에 보면 세존께서 어떤 나무 밑에 앉아 선정에 들어 계시는데 “엄숙한 얼굴은 세상에 뛰어나시고 諸根이 澄靜하고 그 마음은 寂定하여 가장 잘 조복하여 正觀을 성취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諸根이 澄靜’이라는 것은 계를 수지하는 공덕에 의해 6근이 맑고 깨끗한 청정한 것을 말하고, ‘그 마음은 寂定하여’라는 것은 계의 수행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잘 조복시켜 나타난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며, ‘正觀을 성취하였다’는 것은 선정을 성취하여 나타난 지혜의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 본다. 그러기에 선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계의 수지를 근본 바탕으로 하여 집착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아가야 한다. 이 집착을 하나하나 제거하려고 하면 집착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확연히 알아야 집착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집착의 결과에 대해 살펴보자. 

  

원시경전을 읽다보면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일깨워주신 것은 태어남도 고통이요, 늙음도 고통이요, 병들음도 고통이요, 죽음도 고통이며, 슬픔과 통곡, 육체적인 아픔, 절망과 좌절들 또한 고통이요, 싫어하는 것과 만남도 고통이며, 좋아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 등 여덟 가지 고통을 자주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의 원인을 간단히 말하면 五蘊의 집착이다. 즉 물질인 몸에 대한 집착, 물질이 아닌 느낌인 受에 대한 집착, 관념인 想에 대한 집착, 생각의 구성인 行에 대한 집착, 인식인 마음의 識에 대한 집착으로 이에 의해 위에서 언급한 8苦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면 이러한 집착을 제거하여 선정을 얻으려고 하면 이 집착하는 다섯 가지 대상이 무상한 줄 깨달아야 한다. 즉 물질인 몸도 無常한 것이요, 물질이 아닌 느낌인 受도 무상한 것이며, 관념인 想도 무상한 것이요, 생각의 구성인 行도 무상, 인식인 마음의 識도 무상하다고 한 諸行無常을 깨달아야 한다. 즉 이 몸의 현상은 한 조각 거품이요, 느낌인 受는 하나의 물방울 같으며, 관념인 想은 한 조각 아지랑이 같고, 생각의 구성인 行은 파초나무 같으며, 인식은 마치 요술과 같은 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물질인 몸도 自我가 없으며, 물질이 아닌 느낌도 자아가 없고, 관념인 想도 자아가 없으며, 생각의 구성인 行, 인식인 마음의 識도 자아가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달으면 선정을 이룬다. 즉 諸行無常과 諸法無我에 의해 선정을 이루고, 이 선정에 의해 나타난 경지가 涅槃寂靜이다. 이 五蘊뿐만 아니라 남전대장경 提婆陀訶品에서는 色聲香味觸法 6塵의 경계도 無常하며 無我하기에 證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것을 흔히들 삼법인이라고 하는데 이 삼법인의 관계는 諸行無常과 諸法無我는 욕망을 없애고 집착을 끊는 수행이고, 뒤에 나오는 涅槃寂靜은 앞의 수행의 결과다. 이 삼법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잡아함경』에서도 엿볼 수 있다.


모든 지어감은 덧없는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느낌은 다 괴롭다 말하나니 바르게 깨친 이는 아시는 것이니라. 비구여, 지혜를 가져 흔들리지 말라. 일체의 느낌에 대하여 슬기로운 사람은 밝게 아나니, 일체의 느낌을 다 알고 나면 일체에 있어서 모든 번뇌가 다하고 죽은 뒤에는 여러 가지에 떨어지지 않고 영원히 대열반에 머물러 사느니라.  


여기서 ‘모든 지어감은 덧없는 것이어서 변하고 바뀌는 법’이라고 말한 것은 諸行無常과 諸法無我를 말하는 것이고, 뒤에 나오는 ‘영원히 대열반에 머물러 사느니라.’는 涅槃寂靜이다. 그래서 남전대장경의 無常品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이르기를 일체는 無常이며, 苦이고, 無我이기 때문에 이것을 다 알아야 하고 證得해야 한다고 강조했는지 모른다. 여기에서 말하는 無常과 無我를 깨닫기 위해서는 초기 경전에 말하는 열두 가지 연기법, 즉 無明에서 시작하여 태어나 늙고 죽는 것까지 또는 열두 가지 연기법을 역으로 잘 관하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

  

대승불교에 들어와서 반야사상에서는 욕망에 의한 집착을 없애기 위해 나타난 것이 空思想이며, 無相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금강경』이다. 이 경에서는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 하여 그 어떤 곳에도 마음을 두어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내라 하였으며, 이것을 더 구체화하여 ‘菩薩應無所住 行於布施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라 하여 보살은 6塵의 대상에도 머물지 않고 보시를 하라 하였다. 이러한 無執着의 수행이 익숙해지면 결국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로 모든 모습이 참된 모습이 아닌 줄 알게 되면 여래를 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삼법인에서 말하는 無常과 無我의 발전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감각기관으로 즐겁다고 느끼는 五欲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고통이 내재된 것으로 완전한 즐거움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것을 깊게 자세히 보아 살피지 않으면 선정의 언덕에 이르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잘 살피는 것에 대해 『유교경』에서, 


너희 비구들이여!  너희들이 이미 내가 제정한 계율을 잘 지키고 있다면, 이제 마땅히 너희들의 눈과 귀, 코, 혀, 몸을 잘 다스려 오욕의 즐거움에 빠져 방탕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니라. 비유하자면, 소를 기르는 목동이 막대기를 들고 소들을 잘 지켜서 사람들의 논밭에 들어가 곡식을 먹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과 같이 너희들의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니라. 만약 오관의 감각기관이 원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면 오욕의 즐거움에 빠져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수많은 욕망의 늪에 떨어지게 되니 가히 제어해야 하지 않겠는가. 욕망은 다스려야 되는 것이니라. 이것은 야생마와 같아 거세게 날뛰기 때문에 반드시 재갈을 물리어 잘 훈련시켜 놓지 않으면 결국에는 주인을 끌고 가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하고 말 것이니라.


라고 하여 자기의 마음이 오욕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칼을 든 도적에게 겁탈을 당하면 그 슬픔의 고통이 한평생으로 끝나게 되지마는 욕망의 도적으로부터 피해를 입으면 그 재앙이 누대로 이어가게 될 것이니라. 그 해악이 이렇도록 심하고 깊으니 단연코 삼가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라.


라고 하여 욕망의 재앙이 현생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여러 생으로 연결됨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잘 제어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주체의 주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즉 오욕으로 인해 즐겁다고 느끼는 것을 좀 깊이 숙고하면 괴로움이 내재한 즐거움을 착각한 것인 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불자는 욕망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 욕계에 사는 중생들에게 치솟는 욕망은 끝이 없기에 반드시 도적을 잡아 가두어 놓듯이 잘 감시해야 하며, 제멋대로 방종하게끔 내버려두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를 감시하고 제멋대로 방종하지 않게 하는 것은 계율을 수지하는데서 비롯되기 때문에 앞에서 이야기한 계율 수지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신체의 감각기관이 항상 외부의 조건과 환경을 쫓다 보니 감각적 욕구가 반연되어 마음을 흔들어 놓기 때문에 6根이 6境에 의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持戒가 필요하다. 

  

6根의 주체는 마음이고 이 마음에 나타난 감각기관으로 객관의 대상을 쫓아 한없는 쾌락을 누리는 것이다. 이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은 지계를 근본으로 한 선정의 수행이다. 이 선정의 수행에 대해 󰡔유교경󰡕에서는 “그 마음을 한곳에 잘 붙들어 매어두면 무슨 일이든지 그 앞날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는 공덕의 힘을 일으키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 한눈팔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서 죄업으로 뭉쳐진 너희들의 그 마음을 반드시 꺾어 버려야 할 것이니라.”라고 하여 ‘마음을 한 곳에 매어두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남방에서 수행하는 위빠사나나 북방에서 하고 있는 간화선의 참선, 염불, 주력 등 여러 가지 수행법이 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법과 북방의 염불 수행법을 조금 언급할까 한다.

 

2) 위빠사나 수행법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챙김(sati)과 알아차림(sampajaṅṅa)이다. 이것은 늘 마음을 챙겨 지금 자신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북방의 수행 중에 주류를 이루고 참선이나 염불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즉 참선하는 사람이 화두를 들거나 염불하는 사람이 부처님의 명호를 놓치지 않고 늘 챙기는 것이 sati가 아닌가 생각하고, 화두를 드는 것이 지속되고, 부처님을 염하는 것이 지속되는 것이 정토수행에서 이야기한 念念相續이라 본다. 이 염념상속이 위빠사나에서는 지속하려고 노력하는 sati이고, 이 가운데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등 변화를 관찰하는 것이 알아차림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수행을 할 때 昏沈의 상태에 있는지, 妄想속에 헤매는지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 챙김이 지속적으로 現前하면 자연히 마음이 안정되고 삼매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 챙김은 불교수행 전반에 걸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남방의 수행에서는 sati를 중심으로 지혜 수행을 하는 것을 vipassana라 하고, 또 sati를 중심으로 삼매 수행을 하는 것을 samatha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전자는 지혜의 계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후자는 마음의 고요와 평안에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vipassana란 문자 그대로 모든 물심의 현상을 분석해서 안으로 깊이 통찰한다는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현상의 본질을 무상․고․무아로 隨觀하는 것이다. 반면에 찰나에 없어지고, 찰나에 일어나는 마음(citta)들이 호흡이나 몸의 단일한 현상에 몰입되어 어떤 다른 대상에 의해 동요되지 않고 생멸하는 마음이 순일하게 흐르는 상태를 삼매라 한다. 또한 맑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사마타 행법이라 한다.


☆ 앉아서 하는 수식관 수행

① 편안한 마음으로 양 다리를 서로 엇질러 앉는다. 그렇게 앉기 어려우면 달리 앉아도 좋다. 허리가 아픈 사람은 의자에 앉아도 된다. 왜냐하면 마음이 편안하려면 우선 몸이 편안해야 하기 때문이다. 

② 허리를 쭉 펴고 앉아 시선은 바닥으로 향하되 긴장하지 말라. 똑 바로 앉는 이유는 보기 쉽게 하기 위함이고, 구부정하게 앉으면 이내 불편하다.

③ 눈은 감는다. 이제 배의 불룩한 부분 아랫배에 마음을 둔다. 보통 때처럼 숨을 쉰다. 억지로 늦추지도 서두르지도 말라. 현재 배가 부르고 꺼지는 것을 느껴야지 ‘왜’라는 의심을 갖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④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의 느낌을 보라. 중간쯤 불러올라, 막바지까지 놓치지 말라. 이제 배가 내려앉기 시작한다. 중간쯤 가라앉히며 완전히 가라앉는 마지막까지 놓치지 말고 보라.

⑤ 배가 일어 남, 일어 남… 내려 감, 내려감 등으로 알아차림을 해야 한다.

⑥ 이와 같은 훈련은 눈, 귀, 코, 몸, 마음 등 여섯 감각의 문으로 들어오는 어느 대상에도 적용시켜야 한다.

  

이때의 몸의 자세는 편안하고 바른 자세(결가부좌, 반가부좌)가 좋으며, 하나의 대상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는다. 호흡은 자연호흡으로 코 → 기관지 → 허파 → 횡격막 → 신장의 중간 부분 → 전체를 관하는 것도 좋고, 복부부분을 집중적으로 관하는 것도 좋다. 또는 배가 부르고 꺼지는 것을 관하는 것도 좋으며, 여자들은 배에 손을 얹어 놓고 느끼는 것도 좋다.


☆ 몸과 마음의 현상 관찰

vipassana는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관찰하는데 그 존재의 실체를 관찰하면서 이것이 참 성품을 인식하려고 해야 한다. 즉 ‘갑’이란 현상이 일어날 때 → 알아차린다. → 현상에 명칭을 붙인다.(보다 큰 자극을 주기 위해서) → 마음을 붙인다.(마음 집중, 마음 챙김)→ 그 현상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알아차린다.(관찰) → 이 때 무엇을 알려고 하면 안 되고 자동적으로 무엇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 그리고 종국에는 명칭을 놓아야 한다.

 

• 몸을 관할 때 : 몸의 움직임이 있으면 이에 집중하면서 움직이는 현상 춥다든가 덥다든가 부드럽고 딱딱하다든가 온화하다든가 하는 촉감에 집중한다.

• 마음을 관할 때 : 마음은 빨리 변화한다. 섬세하다. 어떠한 자극을 향해 달려간다. → 이 때 이것을 알아차린다. → 현상이 두 개 이상 일어날 때 강한 것에 집중(망상도 중요한 하나의 vipassana의 대상이다.)

• 마음이 방황할 때는 방황 방황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즉 방황하는 마음을 알아차린 후 시간이 지나면 방황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다시 아래  배의 일어나고 사라짐에 집중한다.

• 알아차림이 강하면 번뇌가 생길 수 없다. 마음에 번뇌가 없으면 홀가분해지며 밝고 행복해진다.


☆ 걸으면서 하는 수행

• 경행은 집중력이 탄탄해지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알아차림이 균형을 이루고 치밀해지도록 한다.

• 경행하지 않고 좌선만 하면 배터리가 나간 자동차와 같다.

• 걷는 과정에 주의를 집중 → 빨리 걸을 때 움직임을 주시하며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하고 다리 전체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따라간다.

• 천천히 걸을 때는 다리를 들어 올림, 앞으로 나아감, 다리를 내려놓음

• 한 걸음 들고 내려놓는 것에 집중 → 듦, 놓는다. → 들어서 앞으로 나가서 놓는다.

• 여섯 부분에 집중 → 드는 시작과 끝, 놓는 시작과 끝, 닿는 시작과 끝.

• 마음 → 들려고 함, 나아가려고 함, 놓으려고 함, 닿으려고 함(방바닥) 

• 움직임에 대한 인식(느낌) 무게의 경중 → 변화

• 벽 쪽에 다 오면 돌려고 하는 의도 → 위에서 아래까지 서 있는 느낌(逆과 順으로 번갈아 가면서 느낌) → 서 있는 것에 대한 관찰


☆ 누어서 하는 수행

• 누워있는 모습을 위에서 아래까지 생각

• 바닥에 닿는 부분을 느낌

• 일어나 앉고 서는 느낌


☆ 음식 수행

• 씹는 동작 → 삼키는 동작 → 각 음식의 맛 → 젖 가락과 수저가 갈 때의 마음에 집중


☆ 말할 때 수행

• 말하려 하는 의도 → 말할 때 심적인 상태 → 말의 강약


☆ 일상생활

• 마음의 상태(화, 평온, 지루한가, 조바심이 일어나는가 등)

• 이 상태의 원인 → 무엇에 의해 작용하는가?

• 그냥 들여다보는 것에 계속 집중한다.


☆ 혼침

• 희미한 상태(수행의 적), 관찰이 대상이 정확하지 못하고, 이미 형성된 관념으로 할 때 → 알아 차려야 한다.(이 때 크게 하품을 하면 효과가 있고, 물건을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든가, 行禪을 하면 효과가 있다.)

• 정 해결이 안 되면 한 10분간 잔다.(이 때 마음을 정하고 잔다)


위에서 이야기한 위빠사나를 행할 때 항상 바른 생각(正思)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때 주관과 객관이 일치하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이를 알아차리며 느껴야 한다. 좋은 생각이 일어날 때는 들여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수행을 할 때는 반드시 계를 수지해야 하고, 법문을 듣거나 경전을 보고 알게 된 것을 조심스럽게 응용해 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스승의 인도 하에 수행의 잘못 된 점을 지적받아 바른 수행을 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것들은 집중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이렇게 마음을 예리하게 겨냥하고 힘차게 나가면 탐심, 증오, 미혹 등이 끼어들 틈이 없게 되고, 마음이 평화로워지는데 여기에서 생겨나는 집중의 즐거움이나 환희 등에 빠져 머물지 않고 힘차게 다음 단계로 나가는 명상이 필요하다.

  

이외 궁극적인 실제를 꿰뚫어 보는 데는 신심, 노력, 알아차리는 힘, 집중, 지혜 등 다섯 가지, 적절한 수행의 조건, 고통이 생길 때 대처하는 방법, 자기 수행의 점검, 등 다른 것들이 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3) 念佛과 三心法


(1) 염불의 의미와 방법

念佛 가운데 ‘念’이란 산스크리트語로 Smṟti, Smsraṇa, manasi-kāra, atarkika, citta, kṣama, 파리語에서도 sati, samannāhāro, hoti, so evam pajānāti, cetaso parivitakka, cetanā, manas 등이지만 이것은 대개 의미는 그 어떤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憶念, 어떤 것을 잊지 않기 위해 계속 생각을 지어가는 作意 등의 의식작용이다. 이것을 다른 면에서는 觀念․心念․思念․稱念 등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앞에서 말한 억념이나 작의와 같이 어떤 대상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잊지 않으려는 의식작용이다. 다음 염불 가운데 ‘佛’이란 buddha로 진리를 깨달은 분으로 스스로 깨달았다는 自覺과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한다는 覺他의 부처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부처란 깨달음의 기능이 전지전능하게 충만하다는 覺行圓滿의 뜻이 담겨 있다. 부처를 단적으로 표현하면 모든 진리를 깨달아 이 깨달은 진리를 중생들에게 전하여 미혹의 바다에서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 분이다. 그래서 염불이란 覺行圓滿한 부처를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흔히들 말하는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이 있듯이 부처님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는 수행을 하는 사람은 부처님과 같은 마음을 갖게 되며 부처님과 같은 행동을 하려고 하게 되어 결국에는 부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불 수행은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염불하면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하는 稱名念佛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염불이란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간직하여 잊어버리지 않고 잡된 생각이 끼어들지 않게 전일하게 하여 선정에 드는 것이다. 그러면 이 칭명염불의 바람직한 수행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이 칭명염불을 소리를 크게 하면 열 가지 이익이 있다고 하는 高聲念佛 十種功德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염불하는 소리가 억념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으면 口佛에 지나지 않는다. 명호를 부르는 칭명이 억념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소리가 자기의 귀에 들려야 하고, 들리는 명호가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 염이 지속되는 습관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이 명호의 소리가 자기 귀에 뚜렷하게 들려야 하고 6자명호가 마음속에 연상되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다른 잡념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마음속에 전일하고 오롯하게 남을 때 주관과 객관은 하나가 되고 마음은 고요하여 평온하며 선정을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정을 증득하기 위해서 정토사상에서는 염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말하고 있다. 즉 부처님이 갖추고 있는 32相 80種好를 관하는 色身念佛, 부처님만이 구족하고 있는 진리인 40불공법을 관하는 法身念佛, 색신과 법신에도 집착하지 않고 능히 모근 진리의 근원을 알아 영원히 고요함을 허공과 같이 하는 實相念佛, 처음 발심한 보살은 여래십호의 묘상으로써 염하는데 이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마치 거울 속에 나타난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이 하는 十號念佛 등 이외에도 많다. 용수보살은 이 네 가지 염불하는 순서에 대하여 처음 발심한 보살은 색신염불에서 힘을 얻으면 법신염불을 하고, 법신염불에서 힘을 얻으면 실상염불로 들어가라고 하면서 만약 이 세 가지 염불이 순일하지 못하면 네 번째 십호염불만 해도 선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속에 부처님을 억념하여 선정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다음과 같은 수행법을 인용할 수 있다. 즉 날짜를 정해 놓고 하는 期日念佛,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時間念佛, 염불하는 수를 헤아리면서 하는 數量念佛,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를 지키면서 하는 持戒念佛, 과거에 잘못한 일을 깊이 참회하고 앞으로는 다시 이런 잘못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懺悔念佛, 부처님의 명호와 공덕을 찬탄하면서 예배하는 예참염불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고요히 앉아 부처님의 형상을 관념하는 觀想念佛,  좌선할 때처럼 선정에 들어서 부처님을 관하는 定業念佛, 걷거나 서있으나 앉으나 누우나 등 일상생활을 하면서 한결같이 염하는 散業念佛, 윤회하는 삼계와 오탁악세를 싫어하고 윤회가 없고 법의 희열만이 넘치는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구하듯이 한 대상을 태어나기를 정하고 염하는 有相念佛, 비록 염불하여 정토를 구하나 자기 몸이 곧 정토라고 보고, 이 마음이 곧 부처라고 염하면서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 無相念佛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정하여 자기의 근기에 맞게 수행할 수 있다. 

  

마음속에 부처님을 간직하기 위한 방법으로 한 가지 예를 들면, 8세기 경 중국의 법조는 五會念佛法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새로운 각도에서 논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속도와 음률을 달리하는 것으로 처음 시작할 때는 낮은 음성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느리게 부르다가 제2회는 약간 음을 높여서 역시 느리게 부르며, 제3회는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게 부른다. 제4회에는 점점 급하게 부르다가 제5회에는 앞뒤 사이의 간격이 없이 ‘아미타불, 아미타불 ….’네 글자만을 부르는 것이다. 이 때 한숨에 108번 이상 ‘아미타불’을 염할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이미 염불로 인한 念力이 생긴 자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염불수행을 지속적으로 하여 염하는 상태가 無後念, 無間念이 되면 그에게 염불로 인해 선정을 이루는 것이 가깝게 된다.


(2) 갖추어야 할 삼심 

위에서 이야기한 염불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마음을 누구나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어떤 수행을 하던 계를 수지해야 하듯이 염불로 수행하는 사람은 계를 수지하는 외에 이 세 가지 마음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삼심을 말한 경전은 『관무량수경』이다. 이 경 상품상생에서는 “저 국토에 태어나고자 원하는 중생이 이 세 가지 마음을 일으키면 곧 왕생한다. 무엇을 세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至誠心이요, 둘째는 深心이며, 셋째는 廻向發願心이니라. 이 세 가지 마음을 구족한 사람은 반드시 저 국토에 태어나게 되느니라.”고 한 것을 선도가 이를 체계화시켜 염불수행자가 이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즉 선도는 『관무량수경』의 설을 인용하여 三心의 정의에 대해 「왕생예찬」에서 “반드시 저 국토에 태어나고자 한 사람은 관경의 설과 같이 이 三心을 구족하면 반드시 왕생한다.”라고 하였으며, 또 「관무량수불경소」에서는 “三心을 밝히면 결국 이것은 正因이 된다.”고 하여 三心을 왕생의 正因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담란, 정영사 혜원, 가상사 길장, 국청사 지의, 신라의 원효 등이 發菩提心을 가지고 正因으로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선도의 三心釋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염불이라고 하는 실천과 관련시켜 논하였다. 이것은 선도만이 해낼 수 있는 것으로 그의 크나큰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첫 번째 至誠心 가운데 ‘至’란 거짓이 없고 진실하고[眞] 지극한 것이고, ‘誠’이란 허망하지 않고 실다운[實] 것이다. 이 지극하고 진실한 마음과 거짓이 없이 실다운 마음을 갖고 아미타 부처님을 관하고 염하는 것이 지성심이다. 이 至誠心이란 진실한 마음을 근본으로 하여 지극하게 아미타불을 염하는 것이다. 마치 임종을 앞둔 사람이 재산과 권력, 사업과 처자식을 걱정하지 않고 내세의 양식을 위해 오로지 부처님을 염하려고 하는 것이 지성심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할 때 이 마음이 지심이며, 이러한 마음이 이어지는 것을 十念相續이다. 어떤 사람의 머리위에 숯불 덩이가 떨어질 때 화상을 입지 않으려고 피하는 마음이 지심이며, 이것이 無間心이며,  無後心이다. 불교의 어떤 수행이든지 이러한 지심은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면 정토에 왕생하는 길은 열릴 것이고, 선정을 얻어 깨달음의 문에 도달하리라 생각된다.

  

다음 두 번째 深心에 대해 살펴보면 「왕생예찬」에서 “深心은 곧 이 眞實信心이다. 자신이 번뇌를 구족한 범부이고, 善根이 적으며, 三界에 윤회하여 火宅을 벗어나지 못함을 진실로 믿고, 아미타불의 本願인 큰 서원 및 명호를 불러 적어도 十聲, 一聲만 하더라도 결정코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진실로 믿는 것이다. 이에 한 생각이라도 의심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深心이라 한다.”고 하여 두 가지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한 가지는 자기 자신이 번뇌를 구족한 범부임을 자각하고 믿는 마음이다. 우리가 마음을 고요히 하여 자신의 내면을 생각해 보면 분명히 자신은 현재 罪惡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인해 生과 死를 반복하는 범부이며, 이 생사를 한량없는 세월 동안 반복하여 지금까지 윤회하였으며, 이것이 앞으로 지속되어 죽음의 문 앞에 이르면 두려워할 것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벗어날 반연을 찾아야 한다. 이 반연이 아미타불의 본원임을 깊이 믿는 것이 深心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하나는 信機로 자기를 깊이 안으로 반성하고 이대로는 영원히 미혹의 세계를 윤회하여 生死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반연이 없음을 自覺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信法으로 아미타불 한 부처님의 本願力을 깊이 믿고 의지하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고 염하는 염불이다. 아미타불의 본원력을 깊이 믿고 염불할 때는 한 생각이라도 의심 없이 믿는 진실한 信心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즉 앞에서 말한 至誠心을 근본으로 한 진실한 信心 위에서 명호를 불러야 하는 것이다. 

  

이 믿음에 대해 선도는 「관경소」에서


분명히 깊이 아미타불이 四十八願을 가지고 중생을 攝受하신다는 것에 의심이 없어야 하며, 염려하지 말고 저 원력을 입어 분명히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또 분명히 깊이 석가모니불이 이 觀經에서 三福․九品․定善과 散善 등 두 가지 善을 설하시고, 저 부처님의 依報와 正報 등 두 가지 報를 증명하고 찬탄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기뻐하고 사모하게 하신 것을 믿어야 한다. 또 분명히 아미타경 가운데 十方의 항하사와 같은 모든 부처님들께서 일체 범부는 반드시 태어날 수 있다고 증명하고 권한 것을 깊이 믿어야 한다.


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미타불의 四十八願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大慈悲心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 추호도 의심 없이 믿는 것을 信法이라 하였다. 특히 念佛하여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에 대해 한 점의 의혹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아미타불 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이 本願에 부합하는 법이라고 하는 것이 선도의 본이다. 

 

이어서 염불 수행자가 갖추어야 할 것은 세 번째 廻向發願心이다. 여기서 말한 발원이란 어떤 목적을 설정하는 것이고, 회향이란 앞에서 이야기한 지성심과 심심에 의한 수행 공덕을 설정된 목적에 쓰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주거로 사용하는 집을 갖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이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꾸준히 노력하여 저축하지 않으면 안 되듯이 불교의 수행도 선정을 얻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수행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수행한 공덕이 있어야 선정과 지혜, 깨달음, 왕생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에 불자에게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 본다. 이것을 선도는 󰡔왕생예찬󰡕에서 “廻向發願心이란 지은 바 일체 善根 모두 다 회향해서 왕생을 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淨土家답게 극락세계에 왕생하는데 모든 선근을 회향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회향을 두 가지로 구분하면 과거로부터 금일까지 염불하여 얻은 공덕을 가지고 정토에 왕생하는데 사용하는 것을 往相廻向이라 하고, 극락세계에 태어나 무생법인을 얻고 난 후 큰 자비심을 일으켜 다시 생사의 세계에 돌아와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還相廻向이라 한다. 앞의 왕상회향은 自利的인 면만 있다고 보이나 그렇지 않고 자리와 이타가 겸비되어 있다. 왜냐하면 “願以此功德 普及於一切 我等與衆生 當生極樂國 同見無量壽 皆共成佛道”로 지금까지 염불하여 쌓은 공덕을 가지고 나와 남이 다 같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성불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정토의 왕상회향에는 반드시 利他의 정신이 있다. 

  

이 삼심에 대해 년대를 분명히 알 수 없는 善道는 『염불경』에서 身業으로 오로지 아미타불께 예배하고, 口業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며, 意業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을 信하고, 내지 정토에 왕생하여 성불할 때까지 退轉치 않는 것을 至誠心이라 하였고, 그리고 진실한 信을 일으켜 오로지 부처님의 명호를 염하고, 서원하여 정토에 태어나 성불을 기약하며, 끝까지 의심하지 않는 것을 深心이라 하였으며, 지성심과 심심에 의해 예배와 염불한 공덕을 가지고 오직 정토에 왕생하여 속히 무상보리 이루기를 원하는 것을 회향발원심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천친보살이 「왕생론」에서 말한 五念門의 수행에 대비한 것으로 至誠心에서는 身業의 禮拜, 口業의 讚歎(稱名), 意業의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것으로 하였고, 深心에서는 진실한 믿음에 의한 염불을 말하였으며, 회향발원심에서 왕생하여 무상보리를 얻는 것에 둔 것은 염불 수행자에게 이 삼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엿볼 수 있다. 이렇게 두 분의 선도가 세 가지 마음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은 선정을 얻는데 지름길이고, 정토에 왕생하는 길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염불 수행자는 반드시 이 세 가지 마음을 구비하여 정진해야 한다.

  

이상으로 알아본 수행을 하여야만 지혜를 얻어 대각을 성취할 수 있다. 이 선정을 얻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매의경󰡕에서는 “백 개의 절을 짓는 것이 한 사람을 살리는 것만 못하고, 시방의 천하의 온갖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루 동안 마음을 지켜 선정에 드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객관적인 선행보다 주관적인 마음의 선정을 얻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4. 지혜의 발현


이 지혜는 앞에서 논한 지계와 선정에 의해 나타나기 때문에 본 논고에서는 ‘지혜의 수행’이라 하지 않고 ‘지혜의 발현’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물이 맑아져야 삼라만상이 드러나는 것은 물을 맑히는 정화의 작용이 있어야 하듯이 마음을 고요히 하여야 마음속의 지혜가 발현한다. 즉 지혜의 발현은 지계와 선정의 수행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나타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발현된 지혜란 하나의 이념이나 지식, 여러 가지 다른 사상이 개입되지 않고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이다. 물에 나타난 삼라만상의 모습이나 거울에 비치는 모습들은 사실 그대로를 나타내는 것이지 여기에 다른 무엇이 작용할 수 없다. 이러한 지혜가 있으면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이며, 어떤 것이 정도이고 사도인 줄 알아 바르게 보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일반인들에게는 세상을 바르게 살아갈 수가 있고, 불자에게는 바른 수행이 지속되어 결국 無生法忍을 증득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종류가 많은데 그 가운데 문수보살을 佛母라 한다. 왜냐하면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이 지혜가 없이는 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한 손에 칼을 들고 있는데 사자는 용기를 뜻하고 칼은 兩斷을 뜻하는 것으로 무명과 번뇌를 제거하는데 용기를 갖고 한칼에 소멸하는 것은 지혜의 힘이다. 이런 지혜에 의해 성불할 수 있기 때문에 불교의 모든 수행은 선정을 이루는데 근본을 두고, 이 선정에 의해 지혜가 발현되는데 목적을 둔다. 

  

이 단락에서는 지혜의 역할과 지혜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한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지혜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면 『유교경』에서는,


지혜가 있으면 탐욕에 걸리지 않게 된다. 항상 스스로를 잘 성찰하여 지혜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부처님의 법을 통해 해탈을 이룰 수가 있게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수행자라고 할 수 없으며, 뭐라고도 할 수도 없다. 지혜는 늙음과 질병과 죽음 등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견고한 배다.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큰 등불이다. 병을 고칠 수 있는 좋은 약이다. 번뇌의 나무를 잘라버릴 수 있는 예리한 도끼다. 따라서 지혜를 받아들이고, 지혜를 생각하고, 지혜를 닦아서 지혜를 밝혀야 한다. 지혜가 밝아지면, 하늘의 눈이 없던 사람도 밝게 잘 볼 수 있게 된다.


고 하였다. 지혜는 태양보다도 더 밝다. 한 개의 태양이 나타나면 무수한 반딧불과 촛불, 횃불, 전깃불, 달, 그리고 별들의 빛은 자취를 감추어야 하듯이 지혜는 수억 겁 동안 쌓아온 모든 죄업과 인과를 일시에 쓸어내 버리는 것이 지혜의 공덕이고 역할이다. 이것을 『대애경』에서는 


첫째는 모든 의혹의 상이 꿈같음을 깨닫기 때문이요, 둘째 사상의 상이 꿈같음을 깨닫기 때문이며, 셋째 분별의 상이 아지랑이 같음을 깨닫기 때문이며, 넷째 진실다운 見이 인연의 상임을 깨닫기 때문이며, 다섯째 일의 화합이 마치 그림자의 상을 보는 것 같음을 깨닫기 때문이며, 여섯째 모든 화합이 마치 메아리로 응하는 것 같음을 깨닫기 때문이며, 일곱째 법계는 파괴 없는 상임을 깨닫기 때문이며, 여덟째 처음이 없음은 머물지 않는 상임을 깨닫기 때문이며, 아홉째 근본의 경지는 흔들리지 않는 상임을 깨닫기 때문이며, 열째 無爲는 자연의 상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열 가지를 열거하고 있다. 또 이 경에서는 이 밖에도 의심을 버리고, 애욕을 여의며,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무명을 불 살러 버리며, 애매한 일을 아주 없애 버리고, 모든 괴로움과 온갖 습기를 제거한다는 등 지혜의 공덕을 말하고 있다.

  

이 『대애경』에서 말한 지혜의 공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존재하는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지혜에 의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생각하고 그 생각에 의해 행동하는 것들의 진실한 모습이 무엇인지 알뿐만 아니라 객관세계에 나타난 존재의 근본을 알아 거기에 현혹되지 않는다. 

  

둘째는 지혜는 과거에 나쁜 업으로 인해 지금 받을 수 있는 나쁜 과보가 제거된다는 것이다. 지혜로 인해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원인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나의 잘못 된 생각과 행동으로 인해 이루어진 나쁜 업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잘못된 업에 의해 이끌리게 되면 깨달음을 얻기는 요원하기에 이 업이 소멸되어야만 바른 행을 할 수 있고, 바른 행이 지속되어야만 깨달음은 가깝기 때문이다. 

  

이 밖에 지혜의 역할에 대해서 『제법집요경』에서는 “지혜의 큰 힘에 의해 속히 청정을 얻게 한다.”고 하였으며, 또 “지혜는 날카로운 칼과 같아 저것을 능히 끊어버린다.”고 하였고, “지혜의 깊이는 바다와 같아 어떤 비방에도 흔들림이 없어 마음에 성냄과 좋아함이 없다.”고 하였다. 또 『불모출생경』에서는 “잡되고 오염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의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욕심을 내는 마음이 없고, 계를 파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화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나태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산란한 마음이 없고, 어리석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등 아홉 가지를 열거하였다. 즉 지혜를 지니고 있는 수행자에게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오직 한 마음, 그것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만 있기 때문에 오염된 마음이 끼어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 부처님의 진리를 의심한다든가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고, 계율을 잘 지키면서 욕심을 내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여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지혜의 역할이다.

  

다음은 지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선정이 필요하다. 지혜가 한 번 생기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소멸될 수 있기 때문에 대각을 얻을 때까지는 지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해 『유교경』에서는


마음을 잘 다스려 안정시켜야 한다. 마음이 안정되면 세상의 생멸을 모두 알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선정을 부지런히 닦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제방을 잘 관리하듯이, 수행하기로 한 사람은 지혜의 제방을 잘 관리해야 한다. 선정을 잘 닦아 지혜의 물이 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참으로 선정을 잘 닦아야 한다.


라고 하였다. 마지막의 글에서 말하는 ‘수행하기로 한 사람은 지혜의 제방을 잘 관리해야 한다. 선정을 잘 닦아 지혜의 물이 새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한 것은 한번 지혜가 발현된 것이 계속 유지되려고 하면 지속적인 선정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선정을 계속하지 않으면 지혜를 잃을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에서 인용한 글이지만 다시 한 번 『유교경』의 “지혜가 있으면 탐욕에 걸리지 않게 된다. 항상 스스로를 잘 성찰하여 지혜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부처님의 법을 통해 해탈을 이룰 수가 있게 된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수행자라고 할 수 없으며, 불자라고 할 수 없으며, 뭐라고 할 수도 없다.”의 말을 다른 각도에서 보자. 이 문장 가운데 ‘항상 스스로를 잘 성찰하여 지혜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한번 생긴 지혜가 없어질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인 정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지속적인 정진이 있을 때 지혜는 깊어져 확고부동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지혜의 역할이 무궁하게 되는 것이다. 진실 된 지혜의 발현이 지속될 때 불행한 사람이 행복을 얻고, 고통 속에 헤매는 사람이 즐거움을 얻으며, 생사에 헤매는 사람이 무량한 수명을 얻고, 미혹에 의한 중생이 광명을 얻어 깨달음에 도달하여 부처가 된다고 본다. 그러기에 지혜의 심오한 공능을 잘 이해하고 깊이 믿어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Ⅲ. 맺는 말  


이상에서 논한 삼학은 묻혀있는 지혜를 발현시키기는 것이고,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지혜에 의해 대각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삼학이 근본이 되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6바라밀과 10바라밀의 수행으로 발전한 것인데 이는 지계와 선정, 그리고 지혜를 구체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남방의 수행인 위빠사나, 대승불교의 참선, 염불, 주력과 중국 천태지의의 止觀修行, 한국 보조의 定慧雙修 등이 제창한 수행도 이 삼학을 근간으로 한 것이지 삼학의 정신이 빠지고 성립될 수 없다고 본다.

  

지계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남의 목숨을 죽이고, 남의 물건을 훔치며, 남을 속이는 등 계를 지키지 않으면서 위빠사나, 참선, 염불을 한다면 이는 원효가 말한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은 것으로 선정을 이루어 지혜를 발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교의 모든 수행의 목적은 선정을 이루어 지혜를 발현하는 것이기에 삼학을 근본으로 하여 그 어떤 수행도 해야 할 것이다.

  

지혜의 발현은 세속적인 지식은 필요 없다. 이것은 과학과 수학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선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데에 있다. 사실 과학적인 지식, 수학적인 사고력 등 일반적인 지식은 마음을 고요히 하기 보다는 많은 생각을 내어 마음이 더 번민하게 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선정을 얻어 지혜가 발현하는 것은 머리가 좋고 머리가 둔하고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아이큐가 높고 낮고를 불문하고 누구나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은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경쟁이 심한 것은 지식을 많이 얻기 위한 것으로 내 자식에게 많은 지식을 얻게 하기 위해 엄청난 경제를 소모하고 있다. 지식은 남의 머릿속과 책과 인터넷 등의 정보를 입수하여 연구 분석하여 얻은 것이고, 지혜는 자기 마음속에 들어있는 심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은 현상만을 볼 수 있지만 지혜는 우주법계의 본질을 투시한다. 지식은 허상만을 볼 수 있지만 지혜는 실상을 관조한다. 지식은 계산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지만 지혜는 무심으로 포용해 진리와 합일되고, 지식은 한 가정을 살리는 데도 힘든 정보이지만 지혜는 전 우주를 주무르고 남는 여력이 함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식은 촛불과 같고 지혜는 태양과 같다. 그러기에 불자는 삼학의 실천에 의해 수행자다운 모습을 지녀야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다이아몬드와 흑연은 동소체로 탄소로 이루어졌다. 같은 탄소로 이루어졌지만 환경과 조건에 따라 다이아몬드와 흑연으로 되는데 이의 가치는 엄청난 차이가 있듯이 중생과 부처가 지니고 있는 불성은 같지만 수행의 有無와 차이에 의해 부처와 중생이 되어 이들이 갖고 있는 공능의 차이는 天地懸隔이다. 무한한 공능을 가지기 위해서는 계를 잘 지켜 선정을 이루고 지혜를 발현하는 것이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이며, 부처가 되는 길이라 본다. 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열반경』에서 말한 것처럼 계율을 깨끗하게 수지하여 나쁜 일들이 없게 해야 하고, 이 지계에 의해 마음이 안온하여 고요한 선정을 얻게 되며, 이 선정에 의해 생사를 여의고 해탈을 얻어 불성을 분명하게 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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