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불교.명상 추천 도서

셋째 가름: 두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苦)의 생겨남"(集)[각주1] -- 1


셋째 가름: 두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苦)의 생겨남"(集)[각주1] -- 1


[각주1] <역주>  사무다야samudaya는 한역漢譯경전에서  集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 뜻은 生起, 즉 '생겨남'에 해당된다. 생겨나는 현상 모두가 '모여서'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集이라는 말은 빈번히  '집착執着'이라는 단어와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소리가 같기 때문이다.  물론 넓게보아 "두 번째  거룩한 진리"(集聖諦)안에 집착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 '集' 자체를 집착으로 한정하는 일은 없어야겠다. 


두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苦)의 생겨남, 또는 둑카의 기원이다.(Dukkhasamudaya-ariyasacca;集聖諦) 두 번째 거룩한  진리에 대한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정의는 원전의 수 없이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다시 존재함과 다시 생성함을 야기하는 것(ponobhavika), 그리고 열렬한 탐욕에 구속되게 하는  것(nandiragasahagata), 그리고 여기저기서 신선한 환희를 찾게 하는 것(tatratatrabhinandini), 그것은 "목마름"(열망:tanha;渴愛)이다. 즉, ⑴감각적 쾌락에 대한 목마름(kama-tanha;慾愛)이며, ⑵존재하려고 하고 생성하려고 하는 목마름(bhava-tanha;有愛), ⑶존재하지 않으려는(자기 파괴의) 목마름(vibhava-tanha;無有愛)이다.'

 

모든 형태의 괴로움을  불러일으키고 존재가 계속되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 "목마름",  욕구, 탐욕 열망이다. 그러나 그것을 제일원인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것이 연관되어있고 상호의존적이라서 제일원인이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둑카의 원인이나 기원으로 여겨지는 목마름도 다른  어떤 것에 그 발생(集)을 의존한다. 그것이 감각(vedana;受)이다. 그리고 감각은 〔감각기관이 대상에〕접촉함(phassa;觸)에 의존하여 일어나며, 그런 등등이 "조건 따라 생겨남"(緣起)라고 알려진 동그라미를 이룬다.  거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목마름"이 둑카를 불러일으키는 최초 또는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뚜렷하고 직접적인 원인이다. 즉, '주요한 것'이고 '두루 만연한 것'이다. 그래서 빨리원전의 어떤 곳에서는 '둑카의 기원'(集)에 대한 정의  자체에, 항상 처음 위치로  주어지는 "목마름"에다 오염과 더러움(kilesa;煩惱,sasava dhamma;有漏法)을 덧붙여 포함시킨다. 불가피하게 지면이  제한된 우리 논의에서는  무명無明으로부터 일어나는 거짓된 자아관념이 이 "목마름"의 중심을 차지한다고 기억해두면 족할 것이다. 

 

여기 "목마름"이란 용어에는 감각적 쾌락과 부와 권력을 바라고 집착하는 것만이 아니라 관념과 이상, 견해, 주장, 이론, 개념그리고 신앙을 바라고 집착하는 것(dhamma-tanha;法愛,法執)도 포함된다. 부처의 분석에 의한다면 가족들간의 사소한 개인적  불화로부터 나라들간의 엄청난 전쟁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갈등과  분쟁이 이런 자기 본위의 "목마름"에서 비롯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이 모두 이런 자기 본위의 "목마름"에 근원을  두고 있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논의와 대화를 경제적, 정치적  용어만으로 해결하려고 드는 거물급 정치가들은 수박 겉만을 핥을 따름이며, 결코 문제의 진정한 근원에 파고들지 못한다. 부처가 랏타빨라에게 말했듯이  '세상은 궁핍한 것인데도 갈망하고들 있다. 그래서 "목마름"의 노예(tanhadaso)가 된다.'

 

누구라도 이기적 욕망이 세상의 모든 해악을 만들어낸다고 인정할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목마름"이란 욕망이 어떻게 다시 존재하게끔 하고 다시금 생성(ponobha-vika)할 수 있게 하는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이다. 이제 "첫 번째  거룩한 진리"의 철학적 측면에 대응하는 "두 번째 거룩한 진리"의 철학적 측면을 더욱 깊이 논의하여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업과 다시  태어난다는 이론의 개념을 좀 알아야 한다. 

 

존재들이 존재하여 지속되기에 필요한  '원인' 또는 '조건'이란 의미에서의 네 가지 "영양분"(ahara;食)이 있다. 그것은 ⑴보통의 물질적인 음식(kabalinkarahara;段食), ⑵우리의  감각기관(마음도 포함해서)이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것(phassahara;觸食), ⑶식識 (vinnanahara;識食), 그리고 ⑷의도 또는 의지(manosancetanahara;意思食)이다.   이들 네 가지 중에 마지막으로 말한  의도는 살려고 하고, 존재하려 하고, 또다시 존재하려고 하고, 계속 있으려 하며, 자꾸자꾸 생성되려는 의지이다.

 

[각주2] 그것은 존재와 지속의 근원을 지어내는 것으로서 유익하고 해로운 행위들(kusalakusalakamma;善不善業)을  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먹기"(cetana;思)와  같다. 우리는 부처가 정의한대로 "마음먹기"가 업業임을 앞에서 보았다. 바로 위에서 말한 "마음먹기"에 대해서 부처는 다음같이 말한다. '"마음먹기"의 영양분을 이해하면 세 가지  형태의 "목마름"을  이해한다.'[각주3] 그러므로  "목마름", "의도", "마음먹기" 그리고 '업'이란 용어는 모두 같은 것으로 정의된다. 그것들은 생겨나려 하고, 존재해 있으려 하며, 다시금 존재하려 하며, 자꾸자꾸 생성되려 하고, 점점 더 자라나고, 점점 더 쌓아두려 하는 의지, 즉 욕망으로 정의된다. 이는 둑카를 일으키는 원인이며,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지 모임"의 하나인 "정신이 형성한 것들의 모임"(行蘊)에 근원을 두고 있다.

 

[각주2] 이  "의도"를 현대 심리학의 '리비도libido'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역주> 리비도는 엄밀히 말해서 심리학(psychology)이 아니라 정신분석학(psychoanalysis)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성적性的 본능의 에너지로서 생애를 통하여 새로운  대상들에 부착하게 하고, 여러 형태의 동기화된 행동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각주3] "목마름"(tanha;渴愛)의 세 가지 형태는 ⑴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⑵존재하려 하고 생성하려 하는 욕망, ⑶존재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이들은  위에 주어진 "둑카의  생겨남"(samudaya;集)에 대한 정의이다

 

부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둑카가 생겨나는 원인, 그  싹이 둑카 자체에 있는 것이지 둑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님을 명확하고 주의 깊이 주목하여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둑카를  그치게 하는 것, 둑카가 부서지게 하는  원인, 그 싹 역시 둑카 자체에 있는 것이지 둑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님도 똑같이 잘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빨리원전에서 자주 나오는 유명한 문구, '생겨나는 성질이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치는 성질이 있다'(Yam kinci samudayadhammam sabbam  tam nirodhadhammam)가 의미하는  바이다. 어떤 존재, 어떤 것, 또는 어떤 체계가 생겨나는 성질, 존재하려는 성질을 그 자체에 지녔다면 스스로 그치고 파괴되는 성질, 그 싹 또한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둑카(다섯 가지 모임)는 스스로 생겨나는 성질을 그 자체에 지녔으면서 스스로 그치는 성질 또한 그  자체에 지니고 있다. 이 점은 "세 번째 거룩한 진리", 즉  적멸寂滅(Nirodha)에 대한 논의에서 다시 다루어질 것이다.

 

셋째 가름: 두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苦)의 생겨남"(集) -- 2


빨리어로 깜마kamma 또는 산스크리트어로 까르마karma('하다'라는 의미의 어원 "끄리kr"에서 왔다)인  업業은 문자상으로는 '동작' 또는 '하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업이론은 독특한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단지 "마음먹은 행위"를 의미하지 모든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틀리게 제멋대로 사용하듯이 업이란 것은 업의 결과를 의미하지 않는다.[각주1] 불교용어로서의 업은  결코 그것의 효과를 의미하지 않는다. 업의 효과는 업의 "열매"(kamma-phala;業果) 또는 "결과"(kamma-vipaka;業報,業異熟)로 알려져있다.

 

[각주1] <역주> 우리도 업이라는 용어를 흔히 잘못 사용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업의 굴레'라는 말이다. 그와  같이 업을 무슨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업은 행위 그 자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업이라고 잘못 아는 그것은 '업의 결과'(業報)이다. '전생前生의 업 때문에 .....'라는 말은 원래의 의미를 잘 반영한다. 그러나 그 역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불교에서 뿐만이 아니라 동양사상 전체에서 그런 피할 수 없고 정해져있는 운명이란 것은 없다. 운명이란 말 자체가  命이 '변화'(運)함을 의미하는데 의미가 왜곡되어 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그것은 단지 과거에 행한 업이 인연따라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현재의 바른 업과 바른 인연으로써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마음먹기"는 욕망이 상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으로만 좋거나 나쁜 것이다. 따라서 업은 상대적으로만 좋거나 나쁜 것이다. 좋은 업(kusala;善業)은 좋은 효과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나쁜 업(akusala;不善業)[각주2]은 나쁜 효과를 만들어  낸다. "목마름", 의도, 업은 이롭거나 해롭거나 간에, 그 효과를 내는 하나의 힘을 갖고 있다. 즉, 계속되게 하는 힘, 좋은 방향 또는 나쁜 방향으로 계속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간에 업은  상대적이며 "계속되는 순환"속에 있다. 아라한은 행위를 하더라도 업을 쌓지 않는다. 아라한은 거짓된 자아관념에서 벗어났으며, 계속되려 하고 생성하려 하는 "목마름"에서 벗어났으며, 다른 모든  더러움과 오염(煩惱,有漏法)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에겐 "다시 태어남"이 없다. 

 

[각주2] <역주> 흔히 '악업惡業'이란 말을 함부로 쓰는 데, 아꾸살라akusala의 의미는 꾸살라kusala, 즉 선善의 부정태, 결여태인 불선不善이지  악이 아니다.[水野弘元, 《パ一リ語辭典二訂》(東京:春秋社,1981), 2쪽 참조] 동양에서는 원래 선에  반대되는 말이 악이 아니라 선의 부정형태, 즉 선의 결여태인  불선이다. 악이라는 말 자체도 기독교에서 선에 대비시키는 그러 악이 아니라 아름답지 않고, 싫은 것을 가리킨다. 동양에서는 선과 악을  구분 지우는 절대신 같은 심판자가 없기 때문이다. 악의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는 우리말 용례의 하나가 '악필惡筆'이라는 말이다. 그  의미는 좋지않은 것을 뜻하지 악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옮긴이는 'good and bad'와 'good and evil'을 善과 惡이라고 옮기지 않았다.

 

업의 이론이 이른바 '도덕적 정의'나 '보상과 처벌'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적 정의나 상벌의 개념은 최고의 존재, 즉 절대신 개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신은 심판자이며, 입법자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려내는 이다. '정의'라는 용어는  애매하고 위험해서 그 이름으로 이로움보다 해가 인류에게 더 많이 행하여졌다. 업의  이론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 이론이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거기에 정의나 상벌개념으로 하는 일이란 없다. 모든 의도적  행위는 그것의 효과나 결과를 낳는다. 좋은 행위는 좋은 효과를 내며  나쁜 행위는 나쁜 효과를 낸다. 그것은 정의나, 당신의 행위를 심판하는 어느 누구 또는 어떤 권능이 내리는 보상이나 처벌이 아니다. 이는 그 자체의 성질, 그 자체의 법칙일 따름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어려운 것은 업이론에 의하면 죽고 난 다음의  삶에서도 의도적 행위의 효과가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에서 죽음을 무어라 하는가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앞에서 존재란 것이 정신적  육체적 힘 또는 에너지의 결합체에 불과한 것임을 보았었다. 우리가  죽음이라 부르는 것은 육신이 기능하지 않는 것이다. 육신이 기능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모든 힘과 에너지가 완전히 멈춘 것일까? 불교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존재하려 하고, 지속하려 하며, 자꾸자꾸 생성하려는 의지와 마음먹기, 욕구, 목마름은 모든 생명들과 모든 존재들을 움직이게 하며 심지어는 온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무시무시한 힘이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엄청난 힘, 가장 엄청난 에너지이다. 불교에 의하면 죽어서 몸의 기능이  사라져도 이 힘은 멈추지 않는다. 그 대신 계속 다른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어, "다시 태어남"이라 부르는 것, 즉 다시금 존재함을 이룬다. 

 

이제 또 다른 의문이 일어난다. '자아'나 '영혼'(아뜨만)같이 영원하고 변함없는 실재나 실체가 없다면 다시금 존재할 수 있는 것,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죽은 뒤의 삶을 논하기에 앞서 이 삶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삶이 지속되는 방법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이미 여러번 반복했듯이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것은 "다섯 가지 모임"의 결합, 즉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들의 결합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것들은 잇닿은 두 순간에서조차 똑같이 있지를 않는다. 그것들은 모든 순간마다 태어나고 죽는다. '"모임"들이 생겨나고 늙고 죽을 때, 오! 비구여, 이 모든 순간마다 너는 태어나고 늙고 죽는다.'

 

그러므로 이번 생애  동안에서 조차 우리는 매 순간  나고 죽고 하지만 우리는 계속 살아 있다. 우리가 이 생애에서 자아나 영혼같이 영원하고 변화하지 않는 실체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어찌 몸이 기능하지 않게 된 뒤에  그 힘들 스스로가 배후에 자아나 영혼없이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이 육신이 더 이상 기능할 수 없어졌을 때에도 그 에너지는 몸 따라 죽지 않아서 어떤 다른 모습이나 형태를  취해 계속 유지된다. 그것을 우리는 다른 생애라 부른다. 한 어린이는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능력이 연약하지만 자신 안에  다 자란 어른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른바 존재란 것을 구성하는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는 자신 안에 새로운 형태를 취할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어른이 되려고 점점 자라나고 힘을 모은다. 

 

영원하고 변치 않는 실체가 없듯이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그냥 지나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주 명백히  한 생애에서 다음 생애로 지나가거나 옮겨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지만 매순간 변화하는 한 계열이다. 그 계열은 정말, 움직이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밤새  타는 불꽃과 같다. 어느 순간에나  같은 불꽃이 아니다. 어린이가 자라 예순 살의 늙은이가 된다. 분명 예순 살의 늙은이는 60년 전의 어린이와  같지 않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다.  그와 같이 여기서 죽어 다른 데 다시 난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다. (na ca so na ca anno) 그것은 같은 계열의 연속이다. 삶과 죽음 간의 차이점은 한 순간의 생각일 뿐이다. 이  생애에서 마지막 순간에 생각은 이른바 내생에서 첫 순간 생각의 조건이  된다. 사실상 그것은 같은 계열의 연속이다. 이번 생애 자체에서도 똑같이 한 순간의 생각이 다음 순간 생각의 조건이 된다. 그래서 불교의 관점에서는  죽은 다음의 삶에 대한 의문이 대단한 미스테리가 아니며 불제자는 결코 이 문제에 대해 염려치 않는다.

 

존재하려 하고 생성하려 하는 이 "목마름"이 계속되는 한 "계속되는 순환"(윤회)은 그치지 않는다. 오로지 실재, 진리, 즉 열반을 보는 지혜로써, 이 몰아가는 힘, 즉 "목마름"을 단절시켰을 때만 멈출 수 있다.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