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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추천 도서

다섯째 가름: 네 번째 거룩한 진리: "길"(道) -- 1


다섯째 가름: 네 번째 거룩한 진리: "길"(道) -- 1


"네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苦)의 그침"에 인도하는 "길"이다.(Dukkhanirodhagaminipatipada-ariyasacca;道聖諦)  이것은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기에 "가운데 길"(Majjhima Patipada;中道)로 알려져 있다. 그 한 극단은 감각적 쾌락을 통해서 행복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등하고, 천하며, 무익하다. 그리고 그저 그런 사람이 가는 길이다.' 다른 것은 여러 형태의 금욕주의로서 자기를 학대(苦行)하여 행복을 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무가치하며, 무익하다.' 처음에 부처는 자기 스스로 이 양극단을 시도해보았다. 그래서 그것이 쓸모 없음을 깨달았고, 개인적 체험을 통하여 '눈뜸과 앎을 주고, 고요함과 통찰력, 깨달음 그리고 열반에 인도하는' "가운데 길"을 발견하였다. 이 "가운데 길"은 일반적으로 "거룩한 여덟 길"(Ariya-Atthangika-Magga;八正道)이라고 언급된다. 그것은 여덟 범주 또는 여덟 갈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1. 바른 이해(Sammaditthi;正見)
2. 바른 생각(Sammasankappa;正思惟)
3. 바른 말(Sammavaca;正語)
4. 바른 행위(Sammakammanta;正業)
5. 바른 생계수단(Sammaajiva;正命)
6. 바른 노력(Sammavayama;正精進)
7. 바르게 마음을 일깨우기(Sammasati;正念)
8. 바른 정신집중(Sammasamadhi;正定)


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로 부처가 45년  동안 몸바친 가르침 전부가 이 "길"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발달상태와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방법과 다른 말로 설법하였다. 그러나 불교 문헌들에 흩어져있는 그들 수많은 법문의 진수는 "거룩한 여덟 길"에 기초를 두고 있다.

 

"길"의 여덟 범주 또는 갈래를 위에 있는 일반적인 조항번호 순서대로 하나하나 차례대로 따르고 실천해야만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각 개인의 능력이 허용되는 정도에 따라 더 많이또는 그보다 적게, 동시에 발달시켜야 한다. 그것들은 모두 서로서로 연결되어 각기 다른 것들을 수행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여덟 요소는 불교 수행과 교육의 세 가지 진수(三學), 즉 ⑴윤리적 행위(Sila;戒), ⑵마음 닦기(Samadhi;定), ⑶지혜(Panna;慧)를 증진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 항목에 따라서 길의 여덟 갈래를 무리 짓고 설명한다면 명확하게, 더 잘 이해하는데 보다 도움이 될 것이다. 

 

'윤리적 행위'(戒)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자비라는 광대한 개념으로 짜여있다. 그것은 부처가 가르친 토대 위에 있다. 많은 학자들이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쓸 때에 부처가 가르친 이 위대한 이상을 잊고서 메마른 철학적, 형이상학적 헤메임에만 탐닉하고 있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부처는 '많은 이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이의 행복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한 자비심에서'(bahujanahitaya bahujanasukhaya lokanukampaya) 가르침을 폈다. 

 

불교에 의하면 완전해지려 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발전시켜야될 두 가지 성품이 있다. 하나는 자비(karuna;悲)[각주1]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panna;慧)이다. 여기서 자비는 감정적 측면 또는 가슴에서 우러나온 성품인 사랑, 박애, 친절, 너그러움, 그리고 그런 류의 거룩한 성품들을 대표하는데 비하여 지혜는 지적 측면 또는 정신적 가치들의 입장에 서 있다. 만약 누가 지적인 면을 소홀히 하고 오로지 감정적인 측면만을 발달시킨다면 그는 맘씨 좋은 바보가 된다. 한편 감정적 측면을 소홀히 하고 지적 측면만 발달시키는 것은 다른 이에 대한 정이 없는 차가운 마음의 지성인이 된다. 그러므로 완전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둘 다 동등하게 발달시켜야만 한다. 그것이 불제자가 사는 길이 가 닿는 곳이다. 즉,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지혜와 자비는 나눠지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주1] <역주> 여기서의 悲를 '슬플비'라고  읽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음을 함께 하는 것, 즉 자비를 뜻한다. 한역 불교문헌에서 등장하는 한자는 여타의 문헌과 다른 뜻, 다른 음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먼저, "거룩한 여덟 길"의 세 가지 요소가 사랑과 자비에 기초한 "윤리적 행위"(戒)에 속해 있다. 즉, "바른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태도"가 그것이다.(조항의3,4,5번)

 

"바른말"(正語)은 ⑴거짓말, ⑵험담과 중상 그리고 개인과 집단들 간에 증오심, 적의, 분열, 불화를 일으킬  만한 말, ⑶거칠고, 무례하고, 경박하고, 심술궂고, 악의 있는 말, ⑷어리석고 쓸모 없고 바보 같은 수다와 잡담을 금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형태의 그릇되고 해로운 말을 금기시한다면 자연히 진실을 말하게 되고, 친절하면서 상냥한, 쾌활하면서도 점잖은, 뜻 깊고도 쓸모 있는 말을 쓰게  된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바른 때와 바른 장소에서 말을 해야 한다. 만약 쓸모 있는 것을 말할 수 없다면 "거룩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바른 행위"(正業)는 도덕적이고, 존경할 만하고, 그리고 평화스러운 행위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생명의 파괴, 도둑질, 정직치 못한 태도, 부정한 성관계를 금기시 해야 하며, 남이 올바르게 평화롭고 존경할 만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일깨운다. 

 

"바른 생계수단"(正命)은 남에게 해를 주는 직업, 즉 무기와 살상 병기, 취하는 음료, 독극물, 등을 거래하는  것과, 짐승을 죽이는 것, 사기 등등을 하는 직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지 말아야되며, 명예스럽고, 부끄럽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직업으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해악을 주며, 바르지  못한 생활 수단인 무기와  살상무기의 거래를 금하는 것을 볼 때 불교가 어떤 종류의  전쟁도 강력히 부인하는 것을 여기서 명확히 알 수 있다. 

 

"여덟 길"의 이 세 가지 요소("바른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수단")는 "도덕적 행위"를 구성한다. 불교의 윤리적, 도덕적 행위는 개인과 사회 모두에 걸쳐 행복하고 조화로운 생활의 증진을 목적으로 함을 알아야 한다. 이 도덕적 행위는 모든 지고한 정신적 성취를 위한 불가결한 기초로 여겨진다. 이 도덕적 토대없이 정신의 발전은 가능치 않다. 

 

다섯째 가름: 네 번째 거룩한 진리: "길"(道) -- 2


다음은 "마음 닦기"(Samadhi;定)의 차례이다. 그것에는 "여덟 길"의 다른 세 요소가 속한다. 즉,  "바른 노력", "바르게 마음을 일깨우기"(또는 "주의하기"), 그리고 "바른 정신집중"이다.(조항의6,7,8번)  "바른 노력"(正精進)이란 활기찬 의욕이다. ⑴해롭고 불건전한 상태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의욕, ⑵이미 일어난 그런 해롭고 불건전한 상태를 제거하려는 의욕, ⑶이제까지 일어나지 않은 유익하고 건전한 상태의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고, 계기를 부여하는 의욕, ⑷이미 존재하는 유익하고 건전한 상태의 마음이  완전해지도록 발전시키고 완전하게 하려는 의욕이다. 

 

"바르게 마음을 일깨우기(또는 "주의하기")"(正念)는 ⑴몸의 동작(kaya;身), ⑵감각이나 느낌(vedana;受), ⑶마음의 활동(citta;心), ⑷관념과 사상, 개념, 그리고 사물들(dhamma;法)에 대하여 부지런히 일깨우고 염두에 두며 주의하는 것이다. 

 

숨쉬기에 정신 집중하는 수행(anapanasati;安般守意)은 유명한 수련법의 하나인데, 정신 개발을 위한, 몸에 관계된 수행법이다. 몸에 관계해서 주의력을 발달시키는 몇 개의 다른 방법이 있다. 그것은 '명상'의 한 형태이다.

 

감각과 느낌에 대해서는 유쾌하고, 불쾌하고, 그도 저도 아닌 모든 형태의 느낌과 감각에 대해, 또 그것들이 자신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는가에 대해 명확히 알아차려야 한다. 

 

마음의 활동에 대해서는 마음이 음란한지 아닌지, 증오에 차있는지 아닌지, 미혹에 젖어있는지 아닌지, 마음이 산만한지 집중되어 있는지, 등등을 지각하여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마음의 모든 움직임, 그것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는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관념들과 사상과 개념과 사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의 성질과, 그것들이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는가, 그것들이 어떻게 발전되는가, 그것들이 어떻게 억제되고 파괴되는가, 그런 등등의 성질을 알아야 한다.

 

이 마음 닦기 또는 명상의 네 가지 형태는《사띠빳타나-경Satipatthana-sutta》(念處經; "마음을 일깨우기")에 자세히 다루어져있다.

 

마음 닦기의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요소는 일반적으로 황홀경 또는 무아경이라 부르는 선정禪定의 네 가지 경지(四禪, 四靜慮)에 이끄는 "바른 정신집중"(正定)이다. 선정의 첫 경지에서는 감각적인 욕정, 악의, 게으름, 걱정, 불안정, 냉소적 의심 같은  열렬한 욕망과 어떤 불건전한 생각이 버려지며, 어떤  정신적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즐거운 느낌과 행복이 유지된다. 두 번째 경지에서 모든 지적 활동이 억제되며 평안한 마음과 '정신통일'이 개발된다.  그리고 즐겁고 행복한 느낌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세 번째 경지에서는 즐거운 느낌, 그것은 동적인 감각인데, 그 또한 사라진다. 이때에는 마음 가득한  평온함과 더불어 행복한 성품이 그대로 있다. 선정의 네 번째 경지에서는 행복하거나 불행하건 간에 즐겁고 슬픈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순수한 평온과 각성만이 남는다. 

 

그렇게 마음을 "바른 노력", "바르게 마음이 깨어있기", 그리고 "바른 정신집중"으로 훈련하고 닦아서 개발한다. 

 

남은 두 가지 요소, 즉 "바른  생각"과 "바른 이해"는 '지혜'(慧)를 구성하게 한다. 

 

"바른 생각"(正思惟)은 사심 없는 자제와, 집착을 여읨과, 사랑의 생각, 비폭력의 생각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모든 존재들에게로 확대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심 없는 집착의 여읨, 사랑 그리고 비폭력이 지혜의 측면으로 분류된 것에 주의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고 중요하다. 이는 진정한 지혜가 이 거룩한 성품들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과, 이기적인 욕망과 악의, 증오와 폭력적인 생각 모두가 지혜의 결핍이  초래한 결과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이거나 간에 모든 삶의 마당에서 그러하다. 

 

"바른 이해"(正見)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다.[각주2] 그리고 사물을 진정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바른 이해"는 결국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이런 이해는 '궁극적 실재'를 보는 최상의 지혜이다. 불교에 의하면 이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라 부르는 것은 지식이다. 그것은 기억의 집적이며 어떤 주어진 데이터에 의해 주제를 이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것은“〔조건에〕따른 앎"(anubodha;隨覺,了悟)이다. 그것은 그리 깊지 않다. 진정 심오한 이해는 "꿰뚫음"(pativedha;貫通,通達)이라 부른다. 그것은 이름과 라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진정한 본성으로서의 사물을 보는 것이다. 이런 꿰뚫음은 마음이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나고, 명상을 통하여 충분히 개발되었을 때만이 가능해진다.

 

[각주2] <역주> 이런  점에서 불교를 훗설Husserl,Edmund의 현상학現象學에 관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섣부른 견해이다. 훗설에게 있어서 '내가 존재한다'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의심의 가능성도 배제하는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윤명로, <훗설에 있어서의 現 象學의 構想과 志向的 含蓄〉,  한국현상학회 편, 《現象學이란 무엇인가》(서울:심설당,1983), 29쪽] 훗설은 '선험적 자아'의 확립을  통하여 과학의 발달에서 야기되는 인간성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식의 가정이나 해결 태도는 불교철학과 전혀 관련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길"에 대한 이 짧은 논의로부터 그 길이 각자가 스스로 따르고 실천하고 발전시켜야 할 생활방식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것은 몸과 말과 마음에서의 자기 수양이며 자기 개발이고, 자기 정화이다. 그것이 신앙, 기도, 예배나 의식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길"은 통념적으로 '종교'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완성을 통하여 '궁극적 실재'를 깨닫도록, 자유와 행복과 평화를 완성시키도록 이끄는 길이다. 

 

불교국가에서는 종교적인 절기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풍습과 의식이 있다. 그것들은 진정한 "길"과는 상관이 적다. 그러나 어떤 종교적 감흥을 만족시켜주고, 발전이 덜된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이며, 그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길"을 따르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그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거룩한 네 가지 진리"와 관련해서 우리에게는 실천해야될 네 가지 임무가 있다. 

 

"첫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苦)이다. 그것은 삶의 본성이다. 그것은 괴롭고, 슬프면서도 즐겁고, 불완전하면서 불만족스러우며, 늘 그러하지 않으며, 안정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과  관련된 우리의 임무는 삶을 사실 그대로 명확하고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이다.(parinneyya;遍知)

 

"두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의 기원"(集)이다. 그것은 욕망이며, "목마름"이며, 다른 모든 열망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고, 오염이며 더러움(煩惱)이다. 이 사실을 그냥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여기서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버리고, 제거하고, 부수어서, 뿌리뽑는 것이다.(pahatabba;滅作)

 

"세 번째 거룩한 진리"는 "둑카가 그침"(滅), 즉 완전한 진리, 궁극적 실재인 열반이다. 여기서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sacchikatabba;應作)

 

"네 번째 거룩한 진리"는  열반을 깨닫도록 인도하는 "길"(道)이다. 그러나 "길"을 그저 아는 것만으로는 "길"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의 임무는 그것을 따라가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다.(bhavetabba;修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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