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가름: 세 번째 거룩한 진리: "둑카가 그침"(滅) -- 1
세 번째 진리는 고통으로부터, 둑카의 계속됨으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울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둑카가 그침"이라는 "거룩한 진리"(Dukkhanirodha-ariyasacca;滅聖諦)이다.
그것이 바로 닙바나Nibbana, 즉 열반涅槃이다. 대중적으로는 산스크리트어의 니르바나Nirvana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둑카를 완전히 제거키 위해서는 둑카의 근본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그 근본이란 것은 "목마름"이다.
그래서 열반은 또한 "목마름의 소멸"(Tanhakkhaya;愛盡)이라는 용어로 알려져있다.
그럼 당신은 물으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열반이 무엇인가? 이 아주 자연스럽고 단순한 질문에 대답하려고 여러 문헌들이 쓰여졌다. 그것들은 그 문제를 밝혀주기보다는 더더욱 혼란시키기만 했다. 그 질문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말로는 절대로 완전하고 만족스럽게 대답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열반이라는 '절대진리' 또는 '궁극적 실재'의 진정한 성질을 표현하기에는 인간의 언어가 너무나도 빈약하기 때문이다. 언어는 감각기관과 마음으로 경험하는 사물과 관념을 표현하려고 인간 대중들이 창조하여 사용한다. '절대진리'같은 초월적 경험은 그런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경험을 표현할 말이 있을 수 없다. 마치 물고기가 자기 어휘 안에 굳은 땅의 성질을 표현할 말을 갖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 거북이가 친구 물고기에게 뭍을 걸어서 못에 돌아온 참이라고 말하였다. 물고기가 말하였다. "물론, 헤엄쳤다는 뜻이겠지." 거북이는 뭍에서는 헤엄칠 수가 없다, 그것은 굳어서 그 위로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런게 어딨느냐, 자기 연못같이 물이 분명하다, 일렁이며, 거기에 들어가 헤엄칠 수 있을 뿐이라고 우겨댔다.
말은 우리가 아는 사물과 관념을 상징하는 기호이다. 그리고 이 기호들은 보통 사물에서조차 그 진정한 성질을 전달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다. 언어는 진리를 이해하는 관건으로 착각되어 그릇되이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무지한 사람은 수렁에 빠진 코끼리처럼 말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된다'고 《능가경楞伽經》(Lankavatara-sutra)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언어없이 무언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열반을 긍정적인 용어로써 표현하여 설명한다면 우린 당장에 그런 용어와 어우르는 관념으로 파악할 것이다. 그런 관념은 아예 뒤바뀐 것이기 쉽다. 그래서 부정적인 용어로 표현되는 것이 보통이다.―아마도 덜 위험한 형식이리라. 그래서 "목마름의 소멸"(愛盡), "합성되지 않음", "조건에 구애되지 않음"(Asamkhata;無爲), "탐욕이 없음"(Viraga;離貪,離慾), "그침"(Nirodha;寂滅), 열반涅槃(Nibbana), 즉 "불이 꺼짐"이나 '소멸' 같은 부정적 용어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빨리원전에 보이는 대로 열반에 대한 몇 개의 정의와 묘사를 고려해 보기로 하자.
'그것은 바로 이 "목마름"이 완전히 그치는 것이다. 목마름을 포기하는 것이다. 목마름을 단념하는 것이다. 목마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목마름에서 떠나는 것이다.'
'조건 따라 있는 것이 모두 고요해지고, 모든 더러움을 포기하고, "목마름"을 소멸하고, 떠나고, 그치는, 그것이 열반이다.'
'오! 비구들이여, 무엇이 '절대적인'("조건에 구애되지 않는":無爲) 것인가? 오! 비구들이여, 그것은 탐욕(ragakkhayo;貪)의 소멸, 증오(dosakkhayo;瞋)의 소멸, 미혹(mohakkhayo;痴)의 소멸이다. 오! 비구들이여, 이것을 '절대적인' 것이라 부른다.'
'오! 라다Radha야, "목마름의 소멸"(愛盡)이 열반이다.'
'오! 비구들이여, 조건에 따른 것이거나 조건에 따르지 않는 것이거나 간에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여의는 것이(離慾)이 최상의 것이다. 말하자면 자만에서 벗어나는 것, 목마름을 부수는 것, 집착을 뿌리뽑는 것, 계속됨을 끊어 버리는 것, "목마름"을 소멸시키는 것, 집착을 여읨, [둑카의〕그침, 그것이 열반이다.'
한 "방랑수행자"(Parivrajaka)가 "열반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했을 때 부처의 수제자 사리뿟다Sariputta(사리불舍利佛)의 대답은 부처가 (위에) 설정한 "조건에 구애되지 않음"의 정의와 같았다. 즉, '탐욕의 소멸, 증오의 소멸, 미혹의 소멸'이었다.
'탐욕과 이 "집착하려고 하는 다섯 가지 모임"(五取蘊)에 대한 열망을 버리고 부수는 것, 그것이 둑카를 그치게 한다.' [사리뿟따의 말] '계속됨과 생성(Bhavanirodha)을 그치는 것이 열반이다.'[또 다른 제자 무실라의 말]
그리고 더 나아가, 부처는 열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오! 비구들이여, 태어나지 않고, 자라지 않으며, 조건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있다. 태어나지 않고, 자라지 않으며, 조건에 구애되지 않는 것이 없다면, 태어나고, 자라고, 조건에 따르는 데서 벗어날 수 없다. 태어나지 않고, 자라지 않으며, 조건에 구애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태어나고, 자라고, 조건에 따르는 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단단함(地), 유동성(水), 열(火), 그리고 운동(風)의 이 네 가지 원소(四大)는 있는 곳이 없다. 길이와 너비, 미세함과 거대함, 이로움과 해악, 이름과 형상, 등등의 개념은 모두 허물어졌다. 또한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서있는 것도, 죽음도 태어남도, 감각의 대상들도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열반이 부정적인 용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라는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되고, 자아를 멸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많다. 열반은 분명히 말하건데 자아를 멸하는 것이 아니다. 멸할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그런 뜻이 있다면 자아에 대한 미혹이나 거짓된 관념을 멸한다는 것이다.
열반이 긍정적이다, 또는 부정적이다라 말하는 것은 틀린 것이다. '부정적'이나 '긍정적'이라는 개념은 상대적이며 양분되는 것의 영역에 들어있다. 이 용어들은 열반에 적용될 수 없다. 절대진리는 양분되는 것과 상대성을 떠나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단어가 반드시 부정적인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건강에 해당하는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단어는 아로갸arogya(無病)라는 부정적인 용어인데 직역하면 '병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로갸는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불멸의 존재"(산.Amrta,빨.Amata;不死)라는 단어 또한 열반의 상당어인데 부정적이다. 부정적 가치에 대한 부정은 부정이 아니다. 열반에 대한 잘 알려진 동의어의 하나가 '자유'(빨.Mutti,산.Mukti;脫)이다. 아무도 자유가 부정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자유에 있어서도 부정의 측면이 있다. 자유는 언제나 방해되는 것, 해로운 것, 부정적인 것들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자유는 부정적이지 않다. 그래서 뭇띠(Mutti;脫) 또는 비뭇띠(Vi-mutti;解脫), 즉 '절대적 자유'인 열반은 모든 해악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열망과 증오와 무지로부터의 자유로움, 모든 양분되고 상대적이며 시간과 공간의 구속을 받는 모든 용어에서 벗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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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지마-니까야》(中部)의 《다뚜비방가-경Dhatuvibhanga-sutta》(M.140)[分別六界經(中阿含162)]에서 완전한 진리로서의 열반 개념을 약간 얻을 수 있다. 이 최고로 중요한 교설은 부처가 뿍꾸사띠에게 전해준 것이다. 한밤중에, 옹기장이의 헛간에서 스승은 그가 이지적이고 열성
적인 것을 알고서 설법을 하였다. 경에서 해당되는 부분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여섯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즉, 단단함, 유동성, 열, 운동, 공간과 의식이다. 그는 그것들을 분석하여 그것들 중에는 '내 것'이니 '나'니 '내 자신'이랄 것이 없음을 밝혀 내었다. 그는 의식이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는가, 기쁘고 불쾌하고 또 그도 저도 아닌 감각이 어떻게 나타나고 사라지는가를 이해하였다. 이 앎을 통해 그의 마음은 집착을 여의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순수한 평온함(upekha;捨)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고한 정신적 경지를 성취하도록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순수한 평온함이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생각한다.
'내가 "무한한 공간의 영역"(空無邊處)에서 이 정화되고 더럼 없는 평온함에 집중하고, 그리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마음을 개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신이 만들어 낸 것(samkhatam;行)에 지나지 않다.[각주1] 내가 "무한한 의식의 영역"(識無邊處)에서 이 정화되고 더럼 없는 평온함에 집중한다 하더라도, ..... 내가 "아무것도 없는 영역"(無所有處)에서, ..... 또는 "지각하지도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영역"(非想非非想處)에서 이 정화되고 더럼 없는 평온함에 집중하고, 그리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도록 마음을 개발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신이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다.' 그리하여 그는 지속과 생성(bhava;有) 또는 소멸(vibhava;無有)을 정신적으로 창조하거나 의도하지 않게 된다.[각주2] 그는 지속과 생성 또는 소멸을 구성하거나 의도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 걱정이 없기에, 내면이 완전히 고요해 졌다.(스스로 반열반에 들어서 불이 완전히 꺼졌다.: paccattamyeva parinibbayati) 그래서 '태어나는 일은 다시없다. 성스럽게 살아왔으며, 해야될 일은 다하였다. 이 때문에 해야할 일이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라고 알게 된다.
[각주1] 모든 정신적이고 신비로운 경지들은 그것이 순수하고 지고하다 하여도 정신의 창작물이고, 마음이 만든 것이며, 조건에 따라 있는 것이고, 구성된 것(samkhata;行)임에 유의하라. 그것들은 '실재'가 아니며, '진리'(sacca;諦)가 아니다.
[각주2] 이것은 그가 새로운 업業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제 그는 "목마름", '의도', "마음먹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기쁘거나, 불쾌하거나 또는 그도 저도 아닌 감각을 경험할 때에는 그것이 늘 그러하지 않음을, 그것이 자기를 묶고 있지 않음을, 그것을 욕망에 의해 경험하지 않게 돛밗알게 된다. 어떤 감각이 있더라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감각을 경험(visam-yutto)한다. 그는 몸이 해체되면 모든 감각이 평화로워진다는것을 안다. 마치 호롱의 불꽃이 기름과 심지가 다하였을 때 꺼져 버리듯이.
'오! 비구여, 그러므로 그런 깨달음을 얻은 이는 절대적 지혜를 얻은 것이다. 모든 둑카의 고갈이 거룩한 절대적 지혜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진리에 기초한 이런 그이의 해방은 흔들릴 수 없다. 오! 비구여, 그것이 비실재적이라는 것(mosadhamma;虛妄法)은 거짓이다. 그것이 실재라는 것(amosadhamma;不妄法), 즉 열반이라는 것은 '진리'(Sacca;諦)이다. 오! 비구여, 그러므로 그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이 '절대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이며 거룩한 진리'(paramamariyasaccam)는 열반이다. 그것은 '실재'이다.'
다른 곳에서 부처는 분명히 열반이란 말이 들어갈 장소에 '진리'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진리와 진리에로 인도하는 길을 가르치겠노라.' 여기서 '진리'는 분명히 열반을 의미한다.
그러면 '절대진리'란 무엇인가? 불교에 의하면 '절대진리'란 세상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조건에 따라서 있고 영원하지 않다. 그래서 내면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건 간에 '자아'니, '영혼'이니, '아뜨만'이니 하는 변화하지 않고, 무궁하며, 절대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절대진리'이다. '진리'는 부정적 의미의 진리로서의 대중적 표현법이 있더라도 결코 부정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 진리의 깨달음, 즉 미혹이나 맹됨(無明)없이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如實하게) 보는 것은 열렬한 목마름을 고갈(Tanhakkhaya)시키고 둑카를 그치게 하는 것(Nirodha)이다. 그것이 열반이다. 여기서 열반이 윤회輪廻와 다르지 않다는 대승불교의 견해를 기억하는 것은 흥미있고 유용하다.[각주1] 윤회나 열반은 당신이 보는 방법―주관적으로, 또는 객관적으로―에 따라서 같은 것이 된다. 이 대승불교의 견해는 아마도 바로 우리의 개략적인 논의에서 참조하고 있는 정통 상좌부의 빨리원전에 보이는 개념들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 같다.
[각주1]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菩薩)는 '윤회는 열반과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열반은 윤회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中論頌》25.19)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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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이 열망의 고갈로부터 얻어지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열반은 그 어떤 것의 결과도 아니다. 만약 그것이 어떤 결과라면 원인이 만들어 내는 효과이어야 한다. 그것은 '만들어진 것'이고 "조건 따라 있는 것"(行)이다. 열반은 원인도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를 떠나있다. 진리는 결과도 효과도 아니다. 그것은 선정禪定이나 삼매三昧라는 신비로운 정신적 경지 같은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그냥 있다. 열반은 그냥 있다.[각주1] 유일하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열반을 깨닫도록 인도하는 길이 있다. 그러나 열반이 이 길의 결과는 아니다. 당신은 길따라 산에 오른다. 그렇다고 산이 길의 결과이거나 길이내는 효과는 아니다. 당신은 빛을 본다. 그러나 빛이 당신 시력의 결과는 아니다.
[각주1] <역주> 원문에는 'TRUHT IS. NIRVANA IS.'로 되어있다.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열반 다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런 질문은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열반은 '궁극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궁극적'이라면 그 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열반 뒤에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궁극적 진리'가 아닐 것이며, 열반이 아닐 것이다. 라다라는 승려가 부처에게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질문하였다. '열반의 목적(또는 결과)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어떤, 열반의 목적이나 결과를 믿어 의심치 않아서 열반뒤의 어떤 것을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대답하였다.
'오! 라다야, 그 질문은 한계를 벗어났구나.(즉, 관점에서 벗어났다.) 열반과 더불어 거룩하게 사는 이는 열반을 (완전한 진리속으로 들어가는) 삶의 마지막 관문으로 여기고, 삶의 목표로 하고, 삶의 궁극적 결말로 여긴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신 뒤 열반 또는 반열반般涅槃(Parinirvana)에 드셨다' 같은 통속적이고 부정확한 몇몇 구절들은 열반에 대하여 많은 허구적 추측을 불러일으켜 왔다.[각주2] 당신이 '부처님이 열반이나 반열반에 드셨다'라는 구절을 듣는 순간 열반이 어떤 상태, 또는 어떤 영역, 아니면 어떤 위치로, 그렇게 어떤 류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이 아는 바에 따라 '존재'라는 단어의 용어상의 의미로 열반을 상상해 내려고 애쓴다. '열반에 들었다'는 이 통속적인 표현은 원전과는 다른 것이다. 원전에는 '죽은 뒤 열반에 들었다' 같은 것이 없다. 부처의 죽음을 정의하거나 열반을 실현한 아라한을 정의하는데 쓰이는 반열반(parinibbuto)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그것은 '열반에 들다'를 뜻하지 않는다. 반열반은 간단히 말해서 '완전히 지나가 버림', '불이 완전히 꺼짐' 또는 '완전히 고갈됨'을 뜻한다. 부처나 아라한에게는 죽은 뒤에 다시 존재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각주3]
[각주2] '부처님의 반열반 뒤에' 대신 '부처님의 열반 뒤에'라고 쓰는 사람들이 있다. '부처님의 열반 뒤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표현은 불교 문헌에서 알려져 있지 않다. 언제나 '부처님의 반열반 뒤에'라고 쓰여있다.
[각주3] <역주> 열반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완전한 죽음"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것은 전혀 옳지 않다. 열반은 삶과 죽음,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개념은 양분되고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열반을 죽음과 관련지어 오해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부처나 승려의 죽음을 '열반'이라고 잘못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삶과 죽음의 세계에서 열반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열반의 세계에서 삶과 죽음을 바라본 말을 듣는다면 이런 오해는 풀릴 것이다. 열반의 세계에서 삶을 바라보는 말로서는《삼국유사》의 '사복설화' 만큼 여실 如實한 것은 다시없다.
옛날 경주에 어느 과부가 남자와 통하지도 않고 잉태하여(不夫而 孕)* 아이를 낳았는데 열 두 살까지는 말도 못하고 걸어다니지도 못하였다. 그래서 사동蛇童(때로는 사복蛇卜이라고도 한다)이라고 불렸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사동은 원효를 찾아갔다. 원효가 예를 다하여 인사하였으나 답례도 않고서, '"자네와 나의 지난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그 소가 죽었으니 장사지내러 가지 않겠느냐?"라고 하여 원효가 "좋다"라고 말했다. 집에 도착하여 원효에게 포살수계布薩受戒(참회의식)를 행케하여, 원효가 시체에 축원을 드리며 가로되 "나지 말아라! 그로 인한 죽음이 고苦 (둑카)니라. 죽지 말아라! 그로 인한태어남이 고니라"라고 하였다. 사동이 "제문이 번거롭다"고 하며 고쳐 말하였다. "죽음과 남이 모두 고니라!"'
이제 또 다른 의문이 일어난다. 부처나 아라한에게는 죽은 뒤, 즉 반열반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나? 이것은 대답되지 않는 질문의 범주(avyakata;無記)에 들어간다.y부처는 이것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우리 어휘중의 말로는 아라한의 사후에 일어나는 것을 표현할 수 없다고 지적하였다. 부처가 밧차Vaccha라는 한 "방랑수행자"에게 대답할 때 아라한의 경우에는 '태어남'이나 '태어나지 않음' 같은 용어가 적당하지 않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태어남'과 '태어나지 않음'에 어우러지는 물질, 감각, 감지, 정신의 활동, 의식(識)같은 것들이 완전히 부수어지고 뿌리뽑혀서, 죽은 뒤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죽은 뒤의 아라한은 나무의 공급이 그쳐서 꺼진 불이나, 심지와 기름이 다되어 꺼진 호롱의 불꽃에 자주 비유된다. 여기서 꺼진 불꽃이나 불에 비유되는 것은 열반이 아니고 열반을 실현한 사람의 "다섯 가지 모임"으로 이루어진 '존재'임이 어떤 혼동됨 없이 명확하고 분명히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을 강조해야겠다.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대 학자들까지도 열반에 대한 비유를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열반은 결코 꺼진 불이나 꺼진 등에 비유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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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통속적인 질문이 있다. 자아가 없고 아뜨만이 없다면 누가 열반을 깨닫는 것일까? 열반까지 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자아'가 없다면 지금 생각하는 이는 누구인가? 우리는 앞에서 생각하는 것은 사고 그 자체일 뿐이고 사고 배후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없음을 보았다. 그와 똑같이 깨닫는 것은 지혜, 깨달음 그 자체이다. 깨달음 배후에 있는 다른 자아 같은 것은 없다. 둑카의 기원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는 존재건, 사물이건, 또는 체계건, 그 어떤 것이든지 발생하는 성질이 있으면 그 자체에 그치고 파괴되는 성질과 싹이 있음을 보았었다. 그래서 둑카, 즉 "계속되는 순환"인 윤회에는 생겨나는 성질이 있다. 그것에는 역시 그치는 성질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둑카는 "목마름"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지혜(般若) 때문에 그친다. "목마름"과 지혜는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 둘 다 "다섯 가지 모임"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생겨나는 싹뿐만 아니라 그치는 싹도 "다섯 가지 모임"속에 들어있다. 이것이 다음과 같이 부처가 말한 유명한 격언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 육척 단신의 감각할 수 있는 몸 그 자체로 나는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그침과, 세상이 그치도록 이끄는 길을 분명히 알았다.' 이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전부가 "다섯 가지 모임"에 기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 자신에 기초함을 의미한다.(여기서는 "세상"(loka;世間)라는 말이 둑카가 있어야 할 곳에 쓰여졌다.) 이는 또한 둑카의 생겨남과 그침을 낳는 외적인 힘이 없다는 의미이다.
"네 번째 거룩한 진리"(다음 가름에서 다루어질 것이다)에 의해서 지혜를 개발하고 수행을 할 때 삶의 비밀을 보며, 사물의 실재를 그 자체로서 보게 된다.[각주1] 비밀이 벗겨졌을 때, 진리를 보게 될 때, 미혹 속에서 열심히 윤회의 지속을 만들어 내는 모든 힘들이 잠잠해지고, 더 이상 업이 형성한 것을 양산해 내는 짓도 할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미혹이 없으며, 더 이상 계속될 "목마름"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울증의 원인이나 비밀을 환자가 발견하여 알았을 때 치료되는 정신병과 같다.
[각주1] <역주> 칸트Kant,Immanuel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사물들 그 자체(Ding an sich)를 보게 된다." 그러나 칸트는 인간이 '사물들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물들 그 자체'는 오직 '예지적인 직관', 즉 신의 직관만이 인식할 수 있고 인간의 오성으로는 감성에 의해 경험되는 현상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下)》,472 ~473쪽 참고]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최고선'(summum bonum)이 죽은 뒤라야 성취될 수 있다. 그러나 열반은 바로 이 생애에서 실현할 수 있다. 당신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진리', 즉 열반을 깨달은 이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는 모든 '정신 장애'와 강박 관념에서 자유롭고, 다른 사람들은 괴로워하는 걱정과 분쟁에서 자유롭다. 그의 정신 건강은 완벽하다. 그는 과거를 후회치 않으며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재에서 충만된 삶을 산다. 그래서 자아를 내어 비추는 것이 아닌 순수한 감각으로 사물을 음미하고 즐긴다.[각주2] 그는 즐겁고, 고취되 있으며, 순수한 삶을 즐긴다. 그의 감각기관은 상쾌하고 고통에서 자유로우며, 청정하고, 평화롭다. 그는 이기적 욕구와 증오, 무지, 잘난척, 자만심, 그리고 그런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순진무구하고, 부드러우며, 보편적 사랑과 자비, 친절, 동정심, 이해심, 그리고 너그러움이 가득하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봉사는 순수하기 그지없으며, 그것은 자기에 대한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심지어는 어떤 정신적인 것도 쌓아두지 않는다. 그는 '자아'에 대한 미혹과 생성하려는 "목마름"에서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각주2] <역주> 여기 "내어 비춤"이라고 옮긴 원문의 'projection'은 '투사投射'라고 번역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로서의 'projection'은 자기 속에 억압된 경향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계모가 아이를 미워하고 있는데 그 미워하는 마음이 억압을 받아서, 오히려 그 아이가 자기를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문맥을 고려할 때 'projection'이 그런 의미에만 한정된다고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번역에서는 'projection'을 그 의미에만 한정시키지 않을 것이다. 옮긴이가 "내어 비춤"이라고 옮긴 것은 '비루먹은 개 눈에는 비루먹은 개만 보인다'는 식으로 사물을 주관적으로 왜곡하여 보는 것 전부를 가리킨다.
열반은 모든 양분되고 상대적인 용어들을 떠나있다. 그래서 그것은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존재함과 존재치 않음 같은 우리의 개념들을 떠나있다. 심지어는 열반을 기술할 때 사용되는 '행복'(樂)이란 단어조차 여기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사리뿟따가 한번은 이렇게 말하였다.
'오! 벗이여, 열반은 행복이다! 열반은 행복이어라!' 그러자 우댜이Udayi가 물었다. '하지만 사리뿟따 친구여, 감각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행복일 수 있겠는가?' 사리뿟따의 대답은 고도로 철학적이며 평범한 이해를 떠난 것이었다. '감각이 없다는 것, 그 자체가 행복이다.'
열반은 논리와 이성(atakkavacara;推論)을 떠나있다. 우리가 아무리 열반 또는 '궁극적 진리' 혹은 '실재'에 대해 고도의 사변적인 논의를 한다 하여도 그것은 자주 쓸데없는 지적 유희로 전락하며, 그런 방법으로는 열반을 결코 이해치 못할 밖에 없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는 상대성이론에 대해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대신에 참을성 있게, 그리고 열심히 공부를 해나간다면 어느날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열반은 '지혜로운 이가 자신안에서 깨닫는 것'(paccattamveditabbo vinnuhi)이다. 만약 우리가 그 "길"을 참을성 있게 근면하게 따라간다면, 열심히 수련하여 우리 자신을 정화한다면, 그리고 필수적인 정신적 개발을 달성한다면, 어느날 우리 자신 안에서 열반을 깨달을 것이다. 수수께끼 같고 어마어마한 말들로 우리 자신을 짐지우는 일없이.
그러면 이제 열반을 깨닫도록 인도해주는 "길"로 넘어가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