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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추천 도서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1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1


일반적으로 '영혼', '자아', '자기'라고 내세우는 것이나, 산스크리트어로 아뜨만Atman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사람안에 영원하고, 늘 그러하며, 절대적인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그 실재란 것은 변화하는 현상적 세계 배후에 있는 변화하지 않는 실체이다. 어떤 종교들에 의하면 각자 개인은 신이 창조한 개별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죽은 뒤에는 천국이나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 영혼의 운명은 창조자의 심판에 좌우된다. 또 다른 종교들에 의하면 영혼이 완전히 정화되어 마침내 영혼이 기원되어 나온 신이나 범천梵天이나 우주적 영혼 또는 아뜨만과 하나가 되기까지 여러 생애를 거친다. 사람의 이 영혼이나 자아는 사상을 생각하는 자이고, 감각을 느끼는 자, 모든 좋고 나쁜 행위에 대하여 보상과 처벌을 받는 존재이다. 그런 개념은 자아관념이라 부른다. 

 

불교는 그런 영혼이나 자아 또는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데서 인류의 사상사에서 독특한 입장에 서 있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자아관념은 환상이며, 실재와 상응하지 않는 거짓된 신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 그리고 '내 것', 이기적 욕망, 열망, 집착, 증오, 악의, 잘난척, 자만심, 이기주의, 그리고 다른 더러움과 오염과 문젯거리 같은 해로운 생각들을 낳는다. 그것은 개인적인 갈등에서부터 나라들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불화의 근원이다. 간단히 말해서 세상의 모든 해악이 이 거짓된 견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관념이 심리적으로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은 자기보호와 자기보존이다.  사람은 자기보호를 위하여  신을 창조하였다. 자기자신의 보호와 안전과 안녕을 위하여 신에게 의존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엄마, 아빠에게 의존하듯이. 사람은 자기보존을 위하여 영원히 사는 불사의 '영혼' 또는 아뜨만의 관념을 품어 왔다. 무지와 나약함과 두려움과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달래려고 이 두 가지를 갈구한다. 그래서 그것들에 깊이 그리고 열광적으로 달라붙는다. 

 

부처의 가르침은 이런 무지와 나약함, 두려움 그리고 욕망을 떠받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제거하고, 부수고, 바로 그 뿌리를 잘라서 깨달은 사람을 만들고자 목적한다. 불교에 의하면 우리의 '신'과 '영혼'에 대한 관념은 거짓이고 헛된 것이다. 이론적으로 고도로 발달하였다 하여도 그것들은 모두 똑같이 복잡한 형이상학적, 철학적 미사여구로 옷입힌, 극도로 섬세한 정신의 "내어 비춤"이다. 사람에게 이 관념들은 아주 깊이 뿌리 박혀서 그렇게 친밀하고 그렇게 소중하며, 그것에 반대되는 어떤 가르침도 들으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부처는 이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실상 그는 자기 가르침이 "흐름을 거스르는 "(patisotagami;逆流行), 즉 사람의 이기적 욕망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깨달은 뒤 네 주가 지나고 나서 반얀나무[각주1] 아래 앉아서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는 심오하고, 알기 어려우며, 이해하기 어려우며, ..... 오로지 지혜로운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 진리를 깨달았다. ..... 욕망에 지배되며 우매한 대중에 둘러 쌓인 사람은 이 진리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고, 고귀한 것이며, 심오하고, 섬세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각주1] <역주> 반얀나무banyan(榕樹)는 나무  한 그루가 숲을 이루는 신비로운 나무이다. 이 나무의 특징은 가지에서 뿌리가 내려 땅에 닿으면 그대로  줄기가 되어 퍼져나간다. 법정, 《인도紀行》(서울:샘터사,1991), 29~33쪽에 자세한 설명과 사진이 나와 있다.


부처는 마음에 이런 생각을 품고서 그가 마악 깨달은 그 진리를 세상에 가르치려는 시도가 헛되지 않을까하고 잠시 망설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연꽃 웅덩이에 비교해 보았다. 연꽃 웅덩이에는 아직 물 속에 완전히 잠겨있는 연꽃들이 좀 있다. 수면에 올라와 있는 다른 것들이 있다. 물위에 서 있는 다른 것들이 또 있으며 그 연꽃에는 물이 닿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도 똑같이 발달의 수준이 다른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진리를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그것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

 

"나 없음" 또는  "영혼이 없음"이란 교리는 "다섯 가지 모임"(五蘊)에 대한 분석과 "조건 따라 생겨남"(Paticca-samuppada;緣起)이란 가르침의 당연한 결과 또는 필연적 귀결이다.

 

앞에서 "첫 거룩한 진리"(둑카;苦)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우리가 하나의 존재 또는 개체라고 부르는 것은 "다섯 가지 모임"으로 구성되었고, 이것들을 분석하여 설명할 때 그 배후에 '나', 아뜨만 또는 '자아' 또는 어떤 변화하지 않고 영속하는 실체가 없음을 보았다. 그것은 분석적인 방법이다. 종합하는 방법인 "조건 따라 생겨남"이란 교리를 통해서도 같은 결과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에 의하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조건에 따르고,  관련되고, 상호의존하고 있다. 이것이 불교의 상대성이론이다.[각주2]

 

[각주2] <역주>  이런 표현이 있다고  해서 아인슈타인Einstein,Albert의 상대성이론을 떠올려서는 안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여기서의 의미와는 다르다. 그것은 모든 사물이 연기론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고전역학에서 '절대적'이라고만 여겨지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질량이 관측자의 속도나 관측자가 받는 중력에 따라서 '상대적'으로 다르게  측정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2


우리가 바로 "나 없음"(Anatta;無我)이란 문제를 정확히 다루기 전에 "조건 따라 생겨남"의 간추린 개념을 알아두는 것이 유용하다. 이 교리의 골자는 짧은 사행시 형태로 주어진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Imasmimsati idamhoti)
이것이 생겨나서, 저것도 생겨난다.(Imassuppada idamuppajjati)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다.(Imasmimasati idamnahoti)
이것이 그쳐서, 저것도 그친다.(Imassanirodha idamnirujjhati)[각주1]

 

[각주1] 이것을 현대적인 형태로 고치면 
A가 있을 때는, B가 있다. 
A가 일어나, B는 일어난다.
A가 없을 때는, B가 없다.
A가 그쳐서, B가 그친다.


<역주> 이 주석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리의 일상적 사고 습관 때문에 A를 선행하는 것으로 B를 나중에 오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A와 B에는 어떤 것이라도 대응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있으면 자식이 있다. 부모가 없으면 자식도 없다'라고만 생각하고 '자식이 있으면 부모가 있다. 자식이 없으면 부모도 없다'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식을 낳아야 비로소 부모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이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서로 관련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연기는 사슬이 아니라 원으로써 이해되어야 한다고 지은이는 분명히 말한다.


조건에 따름과 상대성 그리고 상호의존의 이 원리에 입각해서 삶 전체의 실존과 연속, 그리고 그 그침을 세분된 형태로 설명한다. 그것을 "조건 따라 생겨남"(緣起)라 부르는데, 열두 개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무명無明에 의하여 의도적 행위나 업 형성(行)의 조건이 마련된다. (Avijjapaccaya samkhara)
2.  의도적 행위에 의하여 의식(識)의 조건이 마련된다. (Samkharapaccaya vinnanam)
3.  의식에 의하여 정신적, 육체적 현상(名色)의 조건이 마련된다. (Vinnanapaccaya namarupam)

4.  정신적, 육체적 현상에 의하여 여섯 감각능력(六處: 즉, 신체의 다섯 감각기관과 마음)의 조건이  마련된다.(Namarupapaccaya salayatanam)

5.  여섯 감각능력에 의하여 (감각적,  정신적)접합(觸)의 조건이 마련된다. (Salayatanapaccaya  phasso)

6.  (감각적,정신적)접합에 의하여 느낌(受)의 조건이 마련된다. (Phassapaccaya vedana)
7.  느낌에 의하여 욕망, 즉 "목마름"(愛)의 조건이 마련된다. (Vedanapaccaya tanha)
8.  욕망, 즉 "목마름"에 의하여 집착(取)의 조건이 마련된다. (Tanhapaccaya upadanam) 
9.  집착에 의하여 생성 과정(有)의 조건이 마련된다. (Upadanapaccaya bhavo)
10.  생성 과정을 통하여 태어남(生)의 조건이 마련된다. (Bhavapaccaya jati)
11.  태어남을 통하여 (12)늙고 죽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등등(老·死· 憂·悲·惱·苦)의 조건이 마련

된다. (Jatipaccaya  jaramaranam .....)[각주2]

 

[각주2] <역주> 이것이 우주의 기원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시도가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연기론緣起論은 다만, 삶의 고통을 제거하려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윤회와 둑카(苦)의 원인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근본불교의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대한  보다 자세한 해설은 Narada,M. The Buddha and His  Teachings (Kandy: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88),Ch.25, pp.240~249을 참고하라.


바로 이것이 삶이 어떻게 생겨나는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어떻게 지속되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가 이 형식을 반대 순서로 취한다면 그 과정이 그치는데 이를 것이다. 즉, 무명이 완전히 그쳐서 의도적 행위나 업 형성이 그친다. 의도적 행위가 그쳐서 의식이 그친다. ..... 태어남이 그쳐서 늘고 죽고 슬프고 그런 등등이 그친다. 

 

  이 요소들은 서로 조건짓고(paticcasamuppada)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의 조건을 받고도(paticcasamuppanna) 있음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절대적인 것이나 독립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불교는 제일원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조건 따라 생겨남"은 원으로 여겨야하지 사슬로 여겨서는 안 된다.

 

'자유의지'(Free Will)에 대한 문제가  서구의 사상과 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그러나 "조건 따라 생겨남"에 의한다면 불교철학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고 또, 발생할 수도 없다. 존재하는 것 모두가 상대적이고, 조건에 따르며, 상호의존적이라는데, 어떻게 홀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네 번째 "모임", 즉 "정신이 형성한 것들의 모임"(行蘊)에 속하는 의지는 다른 모든 사상처럼 조건에 따라서(paticca-samuppanna) 있다. 

 

이 세상에서 이른바 '자유'라 부르는 것 자체가 절대자유는 아니다. 그 또한 조건에 따르고 상대적이다.  물론 그런, 조건 따른 상대적인 '자유의지'란 것은 있지만, 그것은 조건에 구애되지 않은 것,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조건에  따르고 상대적이라서 이 세상에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절대 자유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자유의지'라는 말에 조건들로부터 독립된 의지, 원인과 결과로부터 독립된 의지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 모든 존재가 조건에 따르고 상대적인데, 어떻게 의지나 어떤 물질 같은 것이 조건없이 생겨나고, 원인과 결과를  떠나서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인가?[각주3] 여기서 다시 말하건대 '자유의지'에 대한 관념은 근본적으로 '신'과 '영혼', 정의, 보상과 처벌의 관념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유의지라는 것만이 자유롭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자유의지'의 관념 자체도 조건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각주4]

 

[각주3] <역주> 바로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서 오늘날  우리 앞에 닥친 가장 심각한 문제인 생태와 환경의 파괴가 유래한다고 본다. 인류의 생존이 생태계에 달려있다고 파악하지 않고, '나'의 외부 세계인 자연을 얼마든지 자기 의지대로  자유로이 해쳐먹어도 '나'에게는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이 근본 원인이다. 환경문제를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으로만 다루어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치 못할 것이다. 그것은 자연을 이해하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교정되어야 가능하다. 이미 우리에게 깊이 훈습되어 있는 서양의 인간에 대한 실존적 인식과 자연에 대한 정복의지를 연기緣起의 조화로 정화하여야 가능하다. 앞으로 불교의 연기관, 그리고 우리의 전통적 자연관에 의하여  생태와 환경문제를 고찰하고 해결하려는 시도가 적극적으로 실천되어야 할 것이다. 전경수 교수의〈엔트로피, 부등가교환, 환경주의:문화와 환경의 공진화론〉[《과학사상》(서울:범양사), 1992가을  제3호, 85~109쪽]은 '전체로서의 환경'과 '부분으로서의 문화'라는 혁신적인 시각을 제시한다. 한번 읽어 볼 것을 간곡히 권한다.

 

[각주4] <역주> 여기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견해를 '숙명'이나 '필연' 또는 '결정론'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자유'에 대한 반대 개념은 '구속'이지  '필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태길, 《倫理學》(서울:박영사,1987) 381쪽]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3

 

"다섯 가지 모임"으로 존재를 분석한 것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조건 따라 생겨남"의 교리에 의해서도, 아뜨만이나 '나', '영혼', '자아' 또는 '자기'라 불려지는 불멸의 실체가 사람 안팎에 머물러 있다는 관념이 거짓된 신앙일 뿐이며 정신을 내어 비추는 것이라 여겨질 따름이다. 이것이 불교의 "영혼 없음", "자아 없음"(Anatta;無我)이라는 교리이다.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두 종류의 진리가 있음을 여기서 언급해야겠다. 즉, 관습적인 진리(빨.sammuti-sacca,산.samvrti-satya;世俗諦)와 궁극적인 진리(빨.paramattha-sacca,산.paramartha-satya;勝義諦)가 그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나', '너', 존재', '개인' 등등의 표현을 쓸 때 그런 자아나 존재가 없다고 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세상의 관습에 따라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에 있어서 궁극적 진리에 '나'니 '존재'니 하는 것이 없다.《대승장엄경론大乘莊嚴經論》(Mahayana-sutralankara)에서 말하길, '사람(pudgala;補特伽羅)은 명칭(prajnapti)으로만 존재한다고 말하여야 한다.(즉, 관습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실재(dravya)로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불멸의 아뜨만을 부정하는 것은  소승이건 대승이건 간에 모든 교리체계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이 점에 있어 완전히 일치하는 불교전통이 부처가 원래 가르쳤던 것에서 벗어났다고 추정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최근에 몇몇 학자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자아개념을 살짝 끼워 넣으려 헛된 시도를 하는 것은 엉뚱한 짓이고 불교의 정신에 완전히 반대된다. 이 학자들은 부처와 그 가르침을 존중하고 찬미하고 존경한다. 그 사람들은 불교를 우러러 본다. 그러나 자기들이 가장 명확하고 심오한 사상가라고 여기는 부처가, 자기들이 그렇게도  바라마지않던 아뜨만이나 '자아'의 존재를 부정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무의식중에 이 영원한 존재에 대한 요구에 부처의 지지를 구하고 있다. 물론 그 사람들이 구하는 것은 소문자 s로 쓰는 사소한 개인적 자아(self)가 아니라 대문자 S로 쓰는 큰 '자아'(Self)이다.

 

자기가 아뜨만이나 '자아'에 대해 믿는다고 솔직히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또는 부처가 아뜨만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가 현존하는 원전에서 볼 수 있는 한, 결코 부처가 인정하지 않은 관념을 불교에다 도입하려고 애쓰는 일은 누구도 하지 말아야 한다. 

 

'신'과 '영혼'을 믿는 종교들은 이들 두 관념을 비밀로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그것들을 늘 반복하여 가장 웅변적인 어조로 천명하고 있다. 만약 부처가 모든 종교에서 그토록 중요시하는 이들 두 관념을 허용했다면 다른 것에 대해 말하듯 그것들을 공식적으로 천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들이 감추어져있다가 그가 죽고 25세기가 지난 뒤에야 발견될 리는 없다. 

 

사람들은 부처의 "나 없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자아가 부수어지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이 된다. 부처는 이에 무심하지 않았다. 

 

한 비구가 한번은 그에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자신속에서 영원한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경우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비구여. 그런 일이 있다'라고 부처가 대답하였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졌다. "우주는 저 아뜨만이다. 나는 죽은 뒤에 그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영원하고, 머물러 있으며, 늘 그러하고,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영원토록 존재할 것이다" 그가 모든 사변적인 견해를 완전히  부수어 버리려고 하고, .....  "목마름"이 소멸되게 하며, 집착에서 떠남, 그침, 열반을 이루게 하는 교리의 감화를 여래나 그 제자에게 받았다. 그래서 그 사람이 생각한다. "나는 파괴당할 것이다. 나는 부수어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존재치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한탄하고 자기를 걱정한다. 슬퍼하고, 흐느끼고, 가슴을 치고, 정신이 나간다. 오! 비구여, 그렇게 자신에게서 영원한 어떤 것이 발견되지 않으면 괴로워하는 경우가 있다.'

 

다른 곳에서 부처는 말한다. '오! 비구들이여, 내가 없다는(無我), 또 나는 어느 것도 가질 수 없다는(無所有) 이 생각은 배우지 못한 중생에게는 무서운 것이다.'

 

불교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부처가 존재는 물질, 감각, 감지, 정신이 형성한 것, 그리고 의식속에 있다고 분석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 중에 자아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 "다섯 가지 모임"이 아닌 사람이나 어떤 다른 곳에서도 자아가 전혀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런 입장은 두 가지 이유에서 불가하다. 

 

그 하나는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존재는 오로지 이 "다섯 가지 모임"로 구성된 것이며, 그 밖에 다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서도 부처가 어떤 존재에 대하여 이들 "다섯 가지  모임"이 아닌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 곳이 없다. 


둘째 이유는 부처가 무조건적으로 아뜨만이나 영혼, 자아, 자기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부처는 단호한 어조로 한군데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번, 사람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간에, 우주의다른 어떤 곳에 있거나 간에 그것들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예를 좀 들어보자.

 

《법구경法句經》(Dhammapada)에 부처의 가르침에서 극도로 중요하고 필수적인 세 구절이 있다. 그것들은 스무째 가름의 5, 6, 7번이다.(또는 277,278,279절) 그 첫째 그리고 둘째 구절은 말한다.

 

 '조건 따라 있는 것은 모두 다 늘 그러하지 않다.'
  (Sabbe SAMKHARA anicca; 諸行無常)
 '조건 따라 있는 것은 모두 둑카이다.'
  (Sabbe SAMKHARA dukkha; 一切皆苦)
 셋째 구절은 말한다. 
 '모든 법法에는 자아가 없다.'
  (Sabbe DHAMMA anatta; 諸法無我)

 

여기서 첫째, 둘째 구절에는 "조건 따라 있는 것"(samkhara;行)이란 단어가 쓰인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러나  셋째 구절에는 그 자리에 법法(dhamma)이란 단어가 쓰였다. 왜 셋째 구절에서 앞의 두 구절과 같이 "조건 따라 있는 것"(samkhara)이란  단어가 쓰이지 않았는가? 그리고 왜 법이란 단어가 대신 쓰였는가? 여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요점이 있다. 

 

상카라samkhara(行)라는 용어는 "다섯 가지 모임", 즉 육체, 정신 모두를 막론하고 조건에 따르고, 상호의존하며, 상대적인 모든 사물들과 상태로 정의된다. 만약 셋째 구절이 '모든 조건 따라 있는 것에는 자아가 없다'라고 말한 것이라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비록 조건에 따르는 것은 자아가 없지만  조건 따라 있는 것 외에서는, 즉 "다섯 가지 모임" 밖에서는 '자아'가 있을 수도 있다. 법이라는 용어가 셋째 구절에 쓰인 것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법이라는 용어는 상카라라는 용어보다 훨씬 광범위한 의미이다. 불교용어 중에 법보다 넓은 의미의 용어는 없다. 그것은 조건 따라 있는 것들과 상태들뿐만이 아니고 조건에 따르지 않는 것들, 절대적 진리, 열반까지도 포함한다. 우주안이건 밖이건, 좋건 나쁘건, 조건에 따르건 조건에 따르지 않건, 상대적이건 절대적이건 간에 이 용어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이런 말, 즉 '모든 법에 자아라는 것은 없다'에 의한다면 "다섯 가지 모임" 안에서만 아니고 그 밖에 어떤 곳에서도, 즉 "다섯 가지 모임" 밖에서도, 또는 "다섯 가지 모임"과 유리되더라도 '자아'가 없고 아뜨만이 없음이 아주 분명해 진다.

 

상좌부上座部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는 각 개인에서건 법에서건 간에 자아가 없음을 의미한다. 대승불교 철학은 이점에 있어서 "개인적 차원의 나 없음"(pudgala-nairatmya)뿐만 아니라 "전 우주적 차원의 나 없음"(dharma-nairatmya)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어떤 차이점도 없이 정확히 같은 입장을 견지한다.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4


《마지마-니까야》의 《알라갓두빠마-경Alagaddupama-sutta》(M.22; {阿黎咤經},中阿含200)에서 부처가 제자에게  설법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영혼설(Atta-vada)을 받아들여서 슬픔과 비애, 괴로움, 고통 그리고 흔들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받아들여라. 그러나 오! 비구들이여, 너희는 보았느냐? 받아들여서 슬픔과 비애, 괴로움, 고통 그리고 흔들림이 일지 않는 그런 영혼설을.'

'정말로 보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훌륭하다. 오! 비구들이여, 나 역시 받아들여서 슬픔과 비애, 괴로움, 고통 그리고 흔들림이 일지 않는 그런 영혼설을 보지 못하였다.'

 

만약 부처가 인정한 어떤 영혼설이 있다면 여기서 그것을 설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비구들에게 괴로움을 일으키지 않는 영혼설은 받아들이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의 견해로는 그런 영혼설이 없다. 그리고 사소한 것이든 거창한 것이든 간에 어떤 영혼설도 거짓되고 환상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온갖 문제들을 만들어 내고 슬픔과 비애, 괴로움, 흔들림과 걱정을 줄줄이 엮어낸다

 

같은 경에서 계속 설법하며 부처는 말한다. 

 

'오! 비구들이여, 자아도, 자아에 속하는 어떤 것도 정말로 찾아내지 못했으면서 "우주는 저 아뜨만('영혼')이다. 나는 죽은 뒤에 영원하고, 머물러있으며, 늘 그러하고, 변치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실재로서 존재할 것이다" 이런 사변적인 견해, 그것은 완전히 바보스러운 것이 아니냐?'[각주1]

 

[각주1] S.라다크리슈난Radhakrishnan은 이 문구에 대해 말하길, '부처가 반박한 것은 작은 자아가 영구히 계속된다고 떠드는 거짓된 견 ㎖이다'(《인도철학》(Indian Philosophy),Vol. I, London, 1940, p.485)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부처는  여기서 말하는 보편적인 아뜨만이나  영혼을 반박하였다. 우리가 바로 지금 앞문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크건 작건 간에 그 어떤 자아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부처의 견해로는 아뜨만에 대한 모든 이론은 거짓된 것, 즉 정신의 "내어 비춤"이다.


<역주> 부처의 가르침이 다른 인도철학, 특히 요즘 잘나가는 인도의 명상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명상으로 얻어진다는 대아大我 또는 '참 나'라는 신비한 경지도 다만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113,171쪽을 참조하라), 거기에 의존하려거든 차 라리 지금 소박하게  느끼는 현실의 자기자신을 의지처로 삼는 편이 낫다고 가르친다.(이하 참조)


여기서 부처는 아뜨만이니 영혼이니 자아니 하는 것은 실재로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자아를 구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처음부터 잘못 번역하여, 잘못 해석해 버린 몇 가지 예를 인용한다. 그것들 중에 하나가 《법구경》의 유명한 구절 'Atta hi attano natho'(열두째 가름 4번, 또는 160번 시문)인데, "자기는 자기의 주主님이다"로 번역하여, "큰 나는 작은 나의 주님이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우선 그 번역부터가 정확치 않다. 여기서 앗따Atta는 영혼이란 의미에서의 '자아'를  뜻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빨리어의  '앗따'라는 단어는 우리가 앞에서 본 것과 같은, 특정적으로 그리고 철학에서 영혼설을 언급하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동적이며, 한정적이지 않은 대명사[각주2]로 사용된다. 그런  영혼설을 언급하는 경우와 달리 이 시구가 나오는 《법구경》의 열 두째 가름 같은 일반적 용법에서, 그리고 다른 많은 곳에서는 '나  자신'(myself), '너 자신'(yourself),  '그 자'(himself), '어떤 이'(one), '어떤 이 자신'(oneself) 등등을 의미하는 유동적이고, 한정적이지 않은 대명사로 쓰인다.[각주2] <역주> 즉, 재귀대명사(reflexive pronoun)와 부정대명사(indefinite pronoun).


다음에 '나토natho'라는 단어는 '주님'을 의미하지 않고 '피난처', '지원', '도움', '보호'[각주3]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실은 'Atta hi attano natho'가 '자기가 자기의 피난처이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돕는 이다.' 또는 '의지처'를 의미한다. 그것은 결코 어떤 형이상학적 영혼이나 자아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의지해야지 남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각주3] 《법구경》의 주석서에서는 '나토는 의지처(피난처, 도움, 보호)를 뜻한다' (Natho'ti  patittha)라고 말한다.(DhpA.II,PTS,p.148) 고대 싱할리Sinhale어《법구경》주석서(Sannaya)는 'natho'를, '그것은 의지처(피난처,도움)이다'(pihitavanneya)라고 의역하고 있다.(Dhammapada Puranasannaya, Colombo,1926,  77쪽) 만약, 우리가 'natho'의 부정형을 취한다면 이 뜻이 더욱 확고해진다. 'Anatha'는 '주님이 없는'이란 의미가 아니라 '도움 없는', '의지할 데  없는', '보호받지 못한', '가난한'이라는 의미이다.  빨리성전협회(PTS)의 빨리어 사전에서도 'natha'를  '보호자', '피난처', '도움'이라고 설명하지 '주主'라고 하지 않는다. 'Lokanatha'라는 단어를 '구세주'라고 번역하는 것은 완전히 통념적인 기독교적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서 아주 잘못된 것이다. 부처는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진실로 '세상의 피난처'를 뜻한다.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5


부처의 가르침에 자아의 관념을 도입하려고 시도하는 다른 예는 유명한 말, 'Attadipa viharatha, attasarana anannasarana'이다. 이것은 《마하빠리닙바나-경》의 구절에서 취한 것이다. 이 구절은 직역하면 '네 자신을 너의 섬(의지처)로 만들어서, 네 자신을 너의 피난처로 만들어 살아가라. 그리고 다른 이를 너의 피난처로 만들지 말아라'를 뜻한다. 불교에서 자아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앗따디빠attadipa'와 '앗따사라나attasarana'라는 말을 "자아를 등불로  삼아라", "자아를 피난처로 삼아라"로 해석하고 있다.[각주1]

 

[각주1] 여기서 'Dipa'는 등불을 뜻하지  않고 분명히 '섬'을 뜻한다. 《 디가-니까야》의 주석서(DA. Colombo ed., p.380)에서는 여기 'Dipa'라는 단어에 다음같이 주석을 붙이고 있다. '네 자신을 섬, 마치 망망대해에 섬같은 의지처(쉼터)로 만들어서 살아가라.'(Mahasamuddagatam dipam viya attanam anam dipam patittham katva viharatha)윤회輪廻(samsara), 즉 "존재의 지 속"은 보통 바다(samsara-sagara)에 비유된다. 그리고 대양에서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것은 섬 같은 단단한 땅이지 등불이 아니다.

 

우리가 이 단어들이 말해진 배경과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부처가 아난다에게 해준 충고의 완전한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할 수 없다.그때 부처는 벨루바Beluva라고 부르는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반열반)전에 석달 동안이었다. 이때 그는 여든 살이었고 매우 심한 병으로 괴로워하고 있어서 거의 죽게(mara-nantika) 되었다. 그러나 그를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자아를  없애 주지 않고 죽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마음을 단단히 먹고 모든 고통을 참고 병세를 호전시켜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건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회복이 된 뒤, 하루는 거처 밖의 그늘에 앉아 있었다. 부처의 가장 헌신적인 시자 아난다는 사랑하는 스승에게 다가가서 곁에 앉아 말하였다. '선생님. 저는 세존의 건강을 보살펴 왔습니다. 저는 세존께서 편찮으셔서 돌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존의  병색은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제 능력으로는 더 이상 낫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작은 위안이 있습니다. 저는 세존께서 "동아리"를 감동시키는 가르침이 남아있는 동안엔 떠나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처는 연민에 가득 차 인간적인 정으로, 헌신적이고 사랑하는 시자侍者에게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아난다야. "동아리"가 내게서 무얼 기대하느냐? 나는 드러낼 것과 감출 것을 구분하지 않고 법을 가르쳐왔다. 진리(法)에 있어서 여래에게 스승의 움켜쥔 주먹(師拳)같은 것은 없다. 물론, 아난다야. 동아리를 이끌어가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동아리는 그에게 기대야 한다. 그의 가르침을 펴게 하라. 허나 여래는 그럴 생각이 없구나. 그러면 왜 그가 동아리를 지도해야 하는가? 나는 이제 늙었다. 아난다야. 내 나이 여든이다. 낡은  수레는 수선해야 다닐 수 있듯이 내게도 그러하구나. 여래의 몸은 수선해야 계속될 수 있다. 그러하니 아난다야. 네 자신을 너의 섬(의지처)으로 만들어서 살아가라.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자신을 너의 피난처로 만들어라. 법法을 너의 섬(의지처)으로 만들어라. 법을 네 피난처로 만들어라. 다른 어떤 것도 네 피난처가 아니니라.'

 

부처가 아난다에게 전하려 한 것은 아주 명백하다. 아난다는 슬프고 우울하였다. 아난다는 위대한 스승이 죽은 뒤에 제자들이 피난처도 없고 지도자도 없이 모두 외로워하고 도움 받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처는 제자들이 자기자신들에게, 그리고 자기가 가르친 법法에 의존해야하고 남이나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서 아난다에게 위안과 용기와 확신을  주었다. 여기서 분명 형이상학적 아뜨만이나 '자아'의 문제는 그 관점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더 나아가, 부처는 아난다에게 자기자신이 어떻게 자기의 섬이나 피난처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법을 자신의 피난처나 섬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몸과, 감각과, 마음과, 마음의 대상들(사염처四念處;Satipatthana)에 마음을 두는 것, 즉 일깨우는 수련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어느 곳에도 아뜨만이나 자아에 대해서 말한 바가 없다.

 

자주 인용되는 또 다른 문헌이 있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아뜨만을 찾으려 애쓰는 사람은 그것을 이용하곤 한다. 부처는 바라나시에서 우루벨라Uruvela로 가는 길목의 숲속에서 한 나무 밑에 앉아있었다. 그날, 젊은 왕자들이 서른 명의 친구로 모여 아내를 데리고 그 숲으로 소풍을 왔다. 아직 총각이었던 한 왕자는 기생을 데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노는 동안, 그 기생은 값나가는 물건을 훔쳐서 도망가 버렸다. 그들은 그 숲에서 기생을 찾다가 나무 밑에 앉아있는 부처를 보고는 한 여자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부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부처는 그들에게 물었다. '젊은이들이여. 어떻게 생각하시오? 무엇이 그대들에게 더 나은가요? 여자를 찾는 것과 그대 자신을 찾는 것과?'


여기서도 역시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부러 형이상학적인 아뜨만이나 '자아'라는 멀리서 가져온 관념을 도입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다. 그들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이 더 낫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부처는 앉으라 권하여 설법을 해 주었다. 현존하는 증거로는 그가 가르쳐 준 것의 원전에 아뜨만에 대해 언급한 말이 없다.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6


밧차곳따Vacchagotta라는  "방랑수행자"(Parivrajaka;遊行者)가 아뜨만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을 때 부처가 침묵하였다는 소재에 대해 쓴 것이 매우 많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밧차곳따가 부처에게 와서 물었다. 
'고따마 선생님. 아뜨만이 있습니까?'
부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고따마 선생님. 아뜨만이 없습니까?'
역시 부처는 묵묵부답이었다. 
밧차곳따는 일어나서 가 버렸다. 

 

그 방랑수행자가 가 버린 뒤에 아난다는 부처에게 왜 밧차곳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부처는 자기 입장을 설명하였다. 

 

'아난다야, 방랑수행자 밧차곳따가 "자아가 있습니까?"라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영원주의 이론(sassata-vada;常住論)에 집착하는, 사문과 바라문의 편을 드는 것이다.' '그리고 아난다야, 그 방랑수행자가 "자아가 없습니까?"라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없다"고 대답했다면  소멸주의 이론(uccheda-vada;斷滅論)[각주1]을 신봉하는 사문과 바라문의 편을 드는 것에 불과하다.'[각주2]

 

[각주1] <역주> 상주론常住論은 형이상학적으로 영원한 실체가 있다고 하는 이론이다. 단멸론斷滅論은 반대로 세상의 모든 것은 소멸되어 없어지게 되어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水野洪元, 김현 옮김, 《原始佛敎》(서울:지학사) 71~76쪽을 보라.


[각주2] 다른 기회에 부처는 그 밧차곳따에게 '여래에겐 학설이 없다. 사물들의 본성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주었다.(M. I PTS, p.486) 여기서도 부처는 어떤 이론가들에도 부응하려 하지 않았다.


'또 아난다야, 밧차곳따가 "자아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했다면 모든 법에는 자아가 없다는 내 앎과 일치하겠느냐?'

'분명 아닙니다, 선생님.'
'그리고 또 아난다야, 그 방랑수행자가 "자아가 없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내가 "자아는 없다"라고 대답했다면 이미 혼란스러워하는 밧차곳따에게 더욱 엄청난 혼란을 줄 것이다.[각주3]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정말 나는 아뜨만(자아)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걸 잃어버렸다."'

 

[각주3] 사실은 그 이전이 분명한 다른 때에 부처가 어떤 깊고 미묘한 문제―아라한이 죽은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문제―를 설명해 주었을 때 밧차곳따는 말했다. '고따마 선생님, 여기서 저는 무지에 빠져 버렸습니다.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고따마 선생님과 이야기를 시작할 때 가졌던 아주 작은 믿음 마져도 지금은 달아나 버렸습니다.'(S. IV PTS, p.487)  그래서 부처는 그를 또다시 혼란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부처가 왜  침묵하였는가는 명백하다. 그래서 우리가 전체적인 배경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부처가 질문과 질문자들을 다루는 방법―이런 문제를 논하는 자는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을 고려한다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부처는 누가 질문하건 간에 어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아무 생각도 없이 대답을 해주는 컴퓨터가 아니었다. 그는 자비와 지혜 가득한 현실적인 스승이었다. 그는 자기 지식과 지성을 내세우려고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으며, 깨달음의 길을 가는 질문자를 도와주기 위해 대답하였다.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발달 수준과 경향, 정신의 완성도, 성격, 특별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였다.[각주4]

 

[각주4] 부처의 이 앎을 '감관을 초월하여 아는 지혜'(Indriyaparopariya ttanana)라고 부른다.


부처에 의하면 질문을 다루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⑴어떤 질문은 바로 대답해 주어야 한다. ⑵다른 것은 그것들을 분석하는 방법으로 대답하여야 한다. ⑶그러나 다른 것은 반문하여서 대답하여야 한다. ⑷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쳐놓아야 할 질문이 있다.

 

질문을 제쳐놓는 데는 몇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 하나는 특정한 질문은 대답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가 바로 이 밧차곳따에게 이런 말을 해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듯이, 우주는 영원한가 아닌가 등등의 유명한 문제들을 부처에게 질문했을 때 그렇게 대답한다. 같은 식으로 부처는 말룽꺄뿟따와 다른 이들에게 대답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아뜨만(자아)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같은 것을 또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을 항상 논하고 설명했었기 때문이다. 부처는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모든 법에는 자아가 없다'라는 그의 앎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아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은 예전에  자아가 없음을 받아들여서 이미 혼란스러워하는 불쌍한 밧차곳따를 같은 문제를 가지고 불필요하게, 아무 목적도 없이 혼란스럽게 하고 동요를 일으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나 없음"이란 개념을 이해하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특별한 경우에는 침묵으로 질문을 제쳐두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것이었다. 

 

우리는 또한 부처가 밧차곳따를 오래 전부터 아주 잘 알고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캐묻기 좋아하는 이 방랑수행자가 그를 보러온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지혜롭고 자비로운 스승은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구도자를 위하여 많은 사상을 가르쳐주고 엄청난 배려를 해주었다. 빨리원전에서는 이 밧차곳따 같은 방랑수행자들이 돌아다니다 자주 부처와 부처의 제자들을 만나러와서 같은 종류의 질문을 자꾸자꾸 던지는 것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분명히 그들은 이 문제들에 거의 강박관념이 되어서 아주 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부처의 침묵은 밧차곳따에게 그 어떤 웅변적인 대답이나 토론을 해주는 것보다도 훨씬 큰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각주5]

 

[각주5] 그 이유는 나중에 밧차곳따가 다시 부처를 만나러 오지만 이번에는 늘 하던 질문을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제가 고따마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고따마 선생님께서 좋고 나쁜  것(kusala kusalam)을 간단히 가르쳐 주신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부처는 그가 설명해 달라고 간청한 그 좋고, 나쁜 것을 간단하게, 그러면서도 상세히 말해주었다. 그래서 밧차곳따는 그것을 실천하였다. 결국  밧차곳따는 부처의 제자가 되어,그의 가르침에 따라 "아라한의 지위"(阿羅漢果;應供位)에 도달하였으며 '진리', 즉 열반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아뜨만에 대한 문제와 다른 문제들은 더 이상 밧차곳따를 괴롭히지 않게 되었다.(M. II, PTS, p.489과 그 아래.)

 

여섯째 가름: 영혼이 없다는 교리: "나 없음"(無我) -- 7


어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아'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나 '의식'으로 알려진 것을 의미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부처는 사람이 마음(心)이나 사상(意)이나 의식(識)보다는 육체적 몸(kaya;身)을 자아로 여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몸은 마음 같은 것보다는 고정적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나 사상, 관념은 몸보다 빨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늘 변화하기 때문이다.[각주1]

 

[각주1] 어떤 사람들은 대승불교의 '아뢰야식阿賴耶識'( laya- vijnana), 즉 "저장의 의식" (藏識:여래장如來藏;Tathagatagarbha)을 '자아'와 같은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능가경楞伽經》은 그것이 아뜨 만이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Lanka. pp.78~79)


<역주> 지은이는 아뢰야식과 여래장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학파에 따라서는 그 둘을 다르게 보는 경우가 있었으나, 원효를 비롯하여 우리의 전통에 이어지는 사람들은 그 둘이 같다고 말한다. 아얄라식은 세간의 망상과 번뇌들이 쌓이는 "저장의 의식"이다. 여래장이란 중생 모두가 감추고 있는 본래 성품(즉,  부처)을 말한다. 이 둘이 현상적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근본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인 실천에 임할 수가 있게 된다. '흙덩이와 흙먼지는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것도 아니다. 금과  금세공품도 이와 같다.

'(譬如泥團微塵 非異非不異 金莊嚴具亦如是) [《大乘起信論疏記會本》, 韓國佛敎全書 1책 746쪽b]원효의 여래장사상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은 이기영, 《元曉思想》(서울:홍법원,1967) 127~140쪽을 참고하라.


대응되는 실재가 없는 자아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나는∼'[각주2]이라는 막연한 느낌이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열반을 깨닫는 것인데 그렇게 쉽지는 않다. 《상윳따-니까야》에  케마까Kemaka라는 비구와 한 무리의 비구들 간에 이 점에 대한 깨달음의 대화를 한 것이 있다. 

 

[각주2] <역주> 원문은 'I AM'.


이 비구들은 케마까에게 "다섯 가지 모임" 중에 자아나 자아와 관계된 어떤 것이 보이는지 아닌지를  물었다. 케마까는 '안 보인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비구들은 만약 그렇다면 케마까가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난 아라한이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케마까는 자기에게는 "다섯 모임" 속에서 자아나 자아와 관계된 어떤 것을 어떤 것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내가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난 아라한은 아니다'라고 고백하였다. '오! 벗들이여. "집착하려 하는 다섯 가지 모임"(五取蘊)에 있어서 '나는∼'이란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나다'라고  보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나서 케마까는 자기가 '나는∼'라 부르는 것이 물질(色)도, 감각(受)도, 지각(想)도, 정신이 형성한 것(行)도,  식(識)도, 또 그 밖에 어떤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나다'라고 보는 것은 분명 아니더라도, 그는 "다섯 가지 모임"에 있어서, 단지 '나는∼'이란 느낌이 있었다.[각주3]

 

[각주3]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자아를 일컬어 말하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꽃향기와  같다고 말한다. 그것은 꽃잎의 향기도, 색깔의 향기도, 꽃가루의 향기도 아니다. 단지 꽃의 향기일 뿐이다. 

 

케마까는 더 나아가 깨달음의 처음 단계에 도달한 사람에게도 '나는∼'이란 느낌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그가 더욱 발전하였을 때 '나는∼'이란 느낌이  완전히 사라진다. 마치 깨끗하게 빨래한 옷감의 세제 냄새가 상자 속에 넣어두고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듯이. 이 토론은 아주 쓸모가 있어서 토론이 끝나자  그들은 깨닫게 되었다. 경經에서 말하길 케마까를  포함한 그들 모두가 모든  더러움에서 벗어난 아라한이 되었다. 결국, '나는∼'이란 느낌이 제거되었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나는 자아를 가졌다"(상주론자常住論者의 이론)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자아를 가지지 않았다"(단멸론자斷滅論者의 이론)라는 견해를 주장하는 것도 그릇 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둘 다 족쇄이고 그 둘 다  '나는∼'이라는 거짓된 관념에서 발생되어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없음"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어떤 주장이나 견해도 취하지 말고, 단지 사물들을 정신을 내어 비추는 일없이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나' 또는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단지 육체적, 정신적 "모임"(蘊)들의 결합체로 보는 것이다. 그 모임들이 순간적인 변화의 흐름 속에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서로 상호의존하며 작용하는 것이라고 아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 중에 영원하고, 늘 그러하며, 변화하지 않고, 무궁한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 "나 없음"의 문제에 대한 올바른 태도이다. 


여기서 자연스레 한 의문이 일어난다. "아뜨만이나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작용)의 결과를 받게 될까?" 아무도 이 질문에 부처 자신보다 나은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비구에게 이 의문이 일었을 때 부처가 말하였다. '나는 너희들을 이렇게 가르쳐왔다. 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이 그 어디서나 조건에 따라 있음을 보아라.'[각주]

 

[각주4] <역주> 과거에 만들어진 조건에 따라서 현재의 상태가 존재한다. 현재의 조건에 따라서 미래의 상태가 존재하게 된다. 사물은 단지 원인에 의한 결과로서 존재할 따름이고 존재를 결정하거나 부여받는 근본실체란 없다. 즉, 사람에게 있어서 업의 결과를 받는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이다.


"영혼 없음" 또는 "자아 없음"에 대한 부처의 가르침을 부정적인 것이나 단멸론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열반과도 같이 그것은 진리이고 실재이다. 그리고 실재는 부정적일 수 없다. 부정되는 것은 존재치 않는 허구적 자아에 대한 거짓된 믿음이다. "나 없음"(Anatta;無我)에 대한 가르침은 거짓된 믿음의 어둠을 몰아내고 지혜의 빛을 발한다. 그것은 아상가가 아주 적절히 말한 대로 부정적이지  않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nairatmyastita)[각주]

 

[각주5] <역주> 아상가Asanga(약 4세기)는  간다라 지방의 바라문 출신으 로 처음엔 소승교단에 출가했으나 나중에 마이뜨레야Maitreya(彌勒尊者;약 4세기 초)를 만나 대승에 귀의한다. 아상가의 동생 바수반두Vasubandhu(世親;약4,5세기)는 원래 소승불교철학(俱舍論)의 대가였으나 형 아상가의 영향을 받아 대승으로 전향하게 된다. 이들을 요가짜라Yogacara(瑜伽師)라 불렀는데, 이 말은  곧 '요가', 즉 명상수련을 뜻한다. 바수반두는 이  학파의 교의를 유식唯識(Vijnaptimatra)이라 이름 붙였다.


유식철학은 워낙 방대하고  난해하여 여기서 간단히 말할  수 없으나, 거츨게 말해서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실체가 없으며 인식작용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는 철학이다. 이를 '지각되는 것은 존재하는  것'(esseestpercipi)이라는 버클리Berkely류의 주관적 관념론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으나, 여기서의 '인식'이란 서양철학에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도 대상을 지각하는 주체로서의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실체로서의 내가  실체로서의 대상에 접하여 인식작용이 있게 된다거나, 이 세계는 내 사유의 투사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자아'가  있다고 여겨야만 가능해진다. 유식학에서는 인식의 성립이 실체와 실체의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유假有(幻色)와 가유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고정된 실체끼리의 만남이 아니기 때문에 그 관계는 역동적이며, 상호적이며, 능동적일 수 있게 된다. [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양평:통나무,1986), 83~84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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