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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추천 도서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 1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 1


부처는 말했다. '오! 비구들이여, 두 가지 병이 있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육체의 병과  정신의 병이 그것이다. 일년 동안  또는 2년 동안, ..... 심지어는 백년 동안이나, 아니 그보다 오래도록 육체가 병에 걸리지 않는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오! 비구들이여, 정신적 더러움에서 벗어난 사람을 제외하고는 (즉, 아라한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에 단 한 순간이라도 정신이 병들지 않는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이 드물구나.'

 

부처의 가르침은, 특히 '명상'하는 방법은 정신이 평안하여 완전히 건강한 상태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불제자건 불제자가 아니건 간에 부처가 가르친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명상'에 대해 아주 심하게 오해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명상'이란 말을 듣는 순간 일상의 활동에서 도피하는 것을 생각한다. 사회와 단절된 좀 먼 곳에서, 어떤 석굴이나 절간의 불상같이 특별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예상한다. 그리고 신비스런 것이나 비밀스런 사상이나 황홀경에 몰두하는 것을 예상한다. 진정한 불교의 '명상'은 전혀, 이런 류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주제에 있어서 부처의 가르침은 아주 잘못 이해되거나 아니면 아주 조금만 이해되어서, 후대에는 '명상'의 방법이 판에 박힌 거의 전문적 의례나 예식의 한 종류로 전락하여 타락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갖지 못한 제 3의 눈같은 좀 영적이고 신비적인 힘을 얻기 위한 '명상'이나 요가yoga에  흥미가 있다. 얼마 전에 인도에는 온전한 시력을 지녔으면서도 귀로 보는 능력을 개발하려 애쓰는 비구니가 있었다! 이런  종류의 생각은 '영적 도착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욕망이 일으키는 문제이다. 즉, 능력에 대한 "목마름"이다. 

 

'명상'이란 말은 바바나bhavana(修行)라는 원어에 대해 매우 빈약한 상당어이다. 바바나의 원 뜻은 '수양'  또는 '개발', 즉 정신수양이나 정신개발을 의미한다. 불교의 바바나는 제대로 말하자면 그 용어의 완전한 의미로서의 정신수양이다. 그것은 애욕, 증오, 악의, 게으름, 걱정과 불안, 회의적인 근심들 같은 더러움과  흔들림으로 가득찬 마음을 정화하고, 정신집중, 일깨우기, 지성, 의지, 활력, 분석 능력, 자신감, 즐거움, 안정 같은 성질의 배양을 목적한다. 궁극적으로는 사물들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는 최고의  지혜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한다. 그래서 '궁극적 진리' 즉 열반을 깨닫는다. 

 

두 가지 형태의 '명상'이 있다. 그 하나는 경전에 기술된 여러 방법대로 정신집중력(samatha;止,奢摩他  또는 samadhi;定,三昧,三摩地)을 개발하는, 즉 마음을 한 점으로 모으는 것(빨.cittekaggata, 산.cittakagrata;心一境性)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영역"(無所有處)이나 "지각하지도 지각하지않는 것도 아닌 영역"(非常非非常處)같은 최고의 신비로운 경지에 이끄는 것이다. 부처에 의하면 이 모든 신비로운 경지는 마음이 창작해낸 것이고,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며, 조건에 따르는 것이다.(行) 그것들은 실재, 진리, 열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형태의 '명상'은 부처 이전에도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순전히 불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 '명상'의 장외로 배제시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열반을 깨닫는데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부처 자신이 깨닫기 전에 다른 스승 밑에서 이런 요가 수행을 하였고 최고로 신비로운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부처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완전한 해방을 주지 못했으며, '궁극적 실재'에 대한 통찰력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처는 이 신비로운 경지들이 단지 "이대로 행복하게 사는 것"(ditthadhammasukhavihara;現法樂住)이나 "평화로운 삶"(santavihara;寂靜住)에 지나지 않으며 그 이상은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비빠사나vipassana(산.vipasyana 또는 vidarsyana;觀,毗鉢舍那)로 알려진 다른 형태의 '명상'을 개발하였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을 '통찰'하는 것인데 마음이 완전히 해방되게 하고 궁극적 진리, 열반을 실현토록 이끌어준다. 이것이 핵심적인 불교의 '명상', 불교의 정신 수양법이다. 그것은 마음이 깨어있기, 일깨우기, 주의집중, 관조觀照에 기초를 둔 분석적인 방법이다.[각주1]

 

[각주1]<역주> 이 두 가지  형태의 명상법을 흔히 여래선如來禪이라고 부른다. 천태종天台宗에서는 "평정과 통찰"(지관止觀)이라고 한다. 《天台小止觀》이라고 알려진 즈이(智의)의 《修習止觀坐禪法要>>는 선수행의 입문서로서 유명하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의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서 지관에 대해서 대단히 명철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 머리 구절은 지금까지의 내용과 일치한다.


'어떠한 방법으로 마음의 산란함을 막고 도리를 살필 것이냐? '止'라는 것은 모든 그릇된 대상을 설정하는 짓을  멈추는 일이니, 본래 사마타의 방법을 따라하는 것이며, '觀'이라는 것은 무슨 원인과 동기로 이와 같은 마음의 동요가 생겼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하면 없어지는가 하는  것을 분별적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본래 인도말로 비빠사나라 불리우는 관찰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기영, 같은책 375쪽에서 인용]

원효와 의상義相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탕唐의 대 학승學僧 화짱法藏(643~712)은 《般若心經》의  유명한 구절 '색즉시공色卽 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수행에 대한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색色이 곧 공空임을 관찰함으로써 지행止行을 이루고, 空이 곧 色임을 관찰하여서 관행觀行을 이룬다. 空과 色은 둘이 아니어서, 한 순간의 생각에 둘이 다같이 현현한다. 따라서, 止와 觀을 함께 갖추어서 행할 때,  비로소 궁극적인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2) 色이 곧 空임을 보아 큰 지혜를 이루어서, 삶에도 죽음에도 머무르지 않게 된다. 空이 곧 色임을 보아 큰 자비를 이루어서, 열반에 머무르려 하지도 않게된다. 色과  空의 경계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큰 지혜와 큰 자비의 생각이  다르지 않게되고, 머무름이 없는 실천을  이루게 된다.'


《대승기신론소》에서 止와 觀의 두 가지 방법으로써 설명한 원효의 수행관은《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거기서 진정한 선정, 진정한 삼매인 '금강삼매'에서는 결코 우리의 현실 생활과 진리의 세계는 둘이 아니며, 동動과 정靜도 둘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중국에서 교조화된 선종禪宗이 유행하기훨씬 이전에 이미, 선에만 머무르려 하기  쉽상인 수행자들의 태도에 대해 누누히 경고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 불교에서는 화두話頭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화두는 집착을 여의기 위한 방편일 터인데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뗏목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시 석가모니 부처가 가르쳐 준 방법으로 돌아가서 禪의 근본을 살피고, 원효가 제시한 수행 방법을 오늘날의 사정에 응용하여 새로운 우리의 禪문화를 재창조 해내려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할 것이다.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 2


몇 쪽에다 그런 광범위한 주제를 정확히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실천적인 방법으로, 정신수양 또는 정신 개발법인 진정한 불교의 '명상'에 대해 아주 간략히 개괄적인 개념을 알아보기로 하자. 

 

정신개발('명상')에 대해 부처가 해준 설법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띠빳타나-경Satipatthana-sutta》({念處經}(中阿含98))이라 일컬어진다. 이 설법은 전통적으로 아주 높이 숭상되어서 불교사원에서 일과적으로 낭송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교 가정에서 가족들이 둘러앉아 깊은 애정으로 경청하면서 낭송되고 있다. 아주 흔히  비구들이 죽어 가는 사람의 침상 곁에서 그 사람의 마지막 생각을 정화하려고 이 경을 낭송한다. 


이 설법에서 가르쳐준 '명상'의 방법은 생활을 저버리지 않고, 회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명상'들은 모두 다 우리 생활에 연관되어 있다. 우리의 일상 활동과, 우리의 슬픔과 즐거움, 우리의 말과 생각, 우리의 도덕적 그리고 지적 의무들에 연관이 있다. 

 

그 설법은 네 가지 주요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그 첫 부분은 우리의 몸(kaya;身)을 다룬다. 둘째는 우리의 느낌과 감각(vedana;受)을, 셋째는 마음(citta;心)을, 넷째는 여러 가지 도덕적, 지적 주제들(法)을 다룬다. 

 

어떤 형태의 '명상'이든지 그 필수적인 것은 "마음이 깨어있기" 또는 정신차리기(sati;念)이며 주의집중 또는 지켜보기(anupassna;隨觀)임을 명확히 마음에 새겨야 한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의 하나로서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몸에 관계된 '명상'의 예는 '들숨과 날숨에 대해 마음이 깨어있기 또는 일깨우기'(anapanasati;安般守意)라고 부른다. 경에서 특수하고 제한적인 자세를 취하라고 기술한 것은 오직 이 '명상'에 대한 것뿐이다. 이 경에 주어진 다른 형태의 '명상'은 당신이 좋을 대로 앉거나, 서거나, 걷거나, 또는 눕거나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에 의하면, 들숨과 날숨에 대해 마음이 깨어있는 수행을 위해서는 앉아서, '다리를 교차시키고, 몸을 곧추세워 두고, 마음을 깨어있게' 해야 된다. 그러나 다리를 교차시키고 앉는 것(跏趺坐)이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것은 아니며, 쉽지 않다. 특히 서양 사람들에게 그러하다. 그래서 다리를 교차시키고 앉는 것이 힘든 사람은 의자에 앉아도 좋다. '몸을 곧추세워 두고 마음을 깨어있게 한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곧추세워 앉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수행에 있어서 아주 필수적이다. 그러나 뻣뻣하게 긴장하는  것이 아니다. 손을 무릎 위에 편안히 올려놓는다. 그렇게 앉아서 당신이 편한 대로 눈을 감거나 코끝을 응시한다.

 

당신은 하루 종일 숨을 들이쉬고 내쉬지만 결코 그것을 염두에 두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당신은 단 일초라도 숨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바로 그것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노력도, 어떤 억제도 하지 말고, 평소처럼 들이쉬고 내쉬어라. 이제 마음을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고 숨이 들고나는 것을 지켜보고 관찰하여, 숨이 들고나는 것을 마음이 알아차리고 경계하도록 하라. 당신이 숨을 쉴 때에 어떤 때는 깊은 숨을 쉴 것이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것 모두 상관할 필요가 없다. 평범하고 자연스럽게 숨쉬어라. 다만 할 일은, 깊은  숨을 쉴 때 그것이 깊은 숨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다른 숨도 이와 같다. 달리 말하자면, 당신의 마음이 숨에 완전히 집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움직임과 변화를 알아차려야 한다. 주변환경 같은 다른  모든 것은 잊어버려라. 눈을 들어 어떤 것을 쳐다보거나 하지 말라. 5분이나 10분 동안 이것을 하도록 시도하라.

 

처음에 당신은 집중하기위해 숨에 마음을 가져다두는 것이 엄청나게 어렵다고 느낄 것이다. 마음이 어찌나 잘 달아나 버리는지에 놀랄 것이다. 마음은 가만있질 않는다. 당신은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밖에서 나는 소리들을 듣게 된다. 마음은 소란스럽고 산만해 진다. 당신은 당황하여 실망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수행을 하루 두 번 아침과 저녁에, 한번에 오 분이나 십 분 가량을 계속해 나간다면, 점점 마음이 숨에 집중되기 시작할 것이다. 일정 기간이 지난뒤에 당신의 마음이 완전히 숨에 집중되는, 즉 가까이서 나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당신에게 아무런 외부세계가 존재치 않는 그런 순간이 닥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짧은 순간은 엄청난 경험이다. 즐거움과 행복, 평안이 가득하여, 그것을 지속하고 싶어 하는 경험이다. 그러나 아직은 지속할 수가 없다. 그렇더라도 이것을 규칙적으로 수행한다면 자꾸자꾸, 그리고 점점 더 긴 시간 동안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숨에다 마음을 두어 당신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순간이다. 자신을 의식하는 한 결코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이 숨에 마음이 깨어있게 하는 수련은 가장 간단하고 쉬운 수행의 하나인데 지고한 신비적 경지(dhyana;禪)[각주2]에 도달하도록 이끄는 집중력의 계발을 의미한다. 그 밖에, 집중능력은 어떤 종류의 깊은 이해에 있어서나 필수적이다. 꿰뚫음에 있어서도, 사물의 본성에 대한 통찰력에 있어서도, 열반의 깨달음까지 포함해서도 그러하다. 

 

[각주2]<역주> 선禪은 댜나dhyana의 음역이다.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래되면서 선은 독특한 문화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가 주위에서 접하는 선은 여기서와 같은 신비적 경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 가름 전체의 내용을 포괄하는 것으로 발전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과는 별도로 이 숨쉬기에 대한 수련은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다준다. 육체적인 건강과 긴장이완과 숙면 그리고 일상 업무에서의 능률에 있어 유익하다. 그것은 당신을 고요하고 안정되게 만든다. 신경성이 되거나 흥분이 되어 있는 순간이라도 이것을 단 2분만 수행한다면 당신 스스로 즉시 고요하고 평화로워짐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깨어난 것같이 느낀다.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 3


또 다른 아주 중요하고 현실적이며 유용한 형태의 '명상'(정신개발)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건 간에, 즉 몸으로 하건, 말로 하건, 생활에서 사사로운 일을 하건, 공적인 일을 하건, 직업적인 일을 하건 간에 하루의 일과를 하는 동안 알아차리고 마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잠자거나 간에, 팔·다리를 뻗치거나 굽히거나 간에, 주위를 바라보거나, 옷을 입거나, 말을 하건 침묵을 지키건, 먹건 마시건 간에, 심지어는 똥누고 오줌눌 때에도―이런 행위들을 하거나 다른 행위를 할 때에 행위하는 그 순간에 완전히 일깨워 마음이 깨어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당신은 현재 순간에, 현재의 행위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이것은 과거와 미래를 전혀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현재 순간과 현재의 활동에 관련시켜서 그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행위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 그들은 과거나 미래에 산다. 지금  여기서 어떤 일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은 생각 속, 상상하는 문제들과 걱정들 속 같은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 보통 과거의 기억 속이나 미래에 대한 욕망과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자기들이 일하는 그 순간에서 살지 못하고, 그것을 즐기지도 못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손에 잡은 일이 행복하지 않으며 불만스럽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지금하고 있는  일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다. 

 

언젠가 식당에서 식사하면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은 흔한 광경이다. 그는 밥 먹을 시간도 없는 매우 바쁜 사람이란 인상을 준다. 당신은 그가 밥을 먹는지, 책을 보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누구는 그가 한꺼번에 두 일을 한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사실, 그는 일하지도 못하고, 즐거움을 맛보지도 못한다. 그는 긴장되어 있으며 마음이 흐트러져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하는 일을 즐기지도 못한다. 그의 삶은 현재의 순간에 살고 있지 않으며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어리석게도 생활에서 도피하려고 한다.(그렇다고 이 말이  점심, 저녁을 먹으면서 친구와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당신이 애쓴다고 생활로부터 도피할 수는 없다. 당신이 살아있는 한, 시내에 있건 동굴 속에 있건 간에  삶에 부대껴서 살아가야만 한다. 진정한 삶은 현재 순간에 있다. 그것은 스러져 가 버린 과거의 기억 속에 있는 것도 아니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꿈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순간 속에 사는 이는 진정한 삶을 영위하며 행복하기 그지없다. 

 

하루에 한끼만 먹으면서 소박하고 조용한 삶을 사는 부처의 제자들이 왜 그렇게 밝은 모습인지에 대해 물었을 때, 부처는 '그들은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밝은 모습이오. 미래를 걱정하고 과거를 후회하는 바보들은 베어진 푸른 갈대같이 (볕 속에서)말라 버린다오'라고 대답하였다.


마음이 깨어있기는 '나는 이것을 한다'라든지 '나는 저것을 한다'라고 생각을 하여가지고 의식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니다. 정반대이다. 당신이 '나는 이것을 한다'라고 생각을 하는 순간 당신은 자기를 의식하게 되어, 그 행위속에 살지 못하고 '나는∼'이라는 의식 속에 살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당신의 일을 망치게 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려야 한다. 당신이 하는 일 속에서 당신 자신을 잊어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연설자가 자기를  의식하게 되어 '나는 청중들에게연설하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연설은 흐트러져서 생각의 흐름이 막히게 된다. 그러나 말할 때 자기 연설 속에서 자신을 잊게 되면 최상의 상태가 되어 말을 잘하고 명료하게 설명한다. 예술이든, 시이든, 지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간에 모든 위대한 작품은 창조자들이 자기 행위 속에서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을 때, 자기자신을 모두  잊고 자기를 의식하는 데서 떠난 그 순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부처가 가르친, 이런 우리 활동에 관련된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수행 또는 일깨우기는 현재의 순간 속에서 살고,  지금 하는 행위 속에서 사는 것이다.(이는 또한 근본적으로 이 가르침에 기초를 두는 〔동아시아의〕선禪(Zen)의 방법이기도 하다.) 여기 이런 형태의 명상에서는 "마음이 깨어있기"를 개발시키려고 어떤 별난 행위를 치뤄야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을 염두에 두고 정신을 차려야되는 것이다. 당신은 별난 '명상'을 하는데 귀중한 시간을 일초라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당신의 평범한 일상 생활의 모든  활동에 대해 낮이나 밤이나 항상 마음이 깨어서 일깨우는 수행을 해야 한다. 위에서 논한 이들 두 형태의 '명상'은 우리의 몸에 관계된 것이다. 

 

일곱째 가름: '명상' 또는 마음 닦기 -- 4


다음은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거나 간에 우리의 모든 감각이나 느낌들과  연관된 정신개발('명상')의 수행법이 있다. 그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당신은 불행하고 슬픈 느낌을 체험한다. 이 상태에서 당신의 마음은 어둡고, 흐릿하며, 명확치 않다. 그것은 풀죽은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왜  불행한 느낌이 드는지 명확히 알지 못 할 때도 있다. 무엇보다 먼저, 당신은 불행한 느낌으로 인하여 불행해지지 말아야 함을, 걱정으로 인해 걱정하지 말아야 함을  알아두어야 한다. 단지 왜, 불행하거나 걱정되거나 슬픈 감각이나 느낌이 있는지 명확히 알도록 노력하라.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즉 어떻게 그 원인이 되는가, 그것이 어떻게 사라지는가, 즉 어떻게 그치는가를 밝히도록 노력하라. 마치 과학자가 어느 대상을 관찰하듯, 어떤 주관적 작용도 배제시키고 바깥에서 그것을 관찰하는 것처럼 밝혀내려고 노력하라. 여기서 다시, '내 느낌'이나 '내 감각'으로 주관적으로 그것을 바라보지  말아야되며, 오직 '하나의 느낌'이나 '하나의 감각'으로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역시 '나'라는 거짓된 관념을 잊어야만 한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그 성질을 볼 때 당신의 마음은 그  감각에 대하여 점점 초연해지고 집착을 여의고 자유롭게 된다. 그것은 모든 감각이나 느낌에 대해 똑같이 그러하다. 

 

이제 우리 마음에 대한 '명상'의 형태를 논하기로 하자. 당신의 마음이 열렬한지 초연한지, 증오나 악의, 시기심에 정복당해 있는지, 아니면 사랑, 자비로 가득 차 있는지, 환상에 빠져있는지, 아니면 명확하고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는지, 그런 기타 등등의 사실에 철저히 주의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일이 아주 많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린 그것을 회피하려 한다.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듯 자신의 마음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비판하거나 심판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옳고, 그른 것이나 좋고 나쁜 것을 식별해내는 태도를 취하라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관찰하고, 지켜보고, 조사하는 것이다. 당신은 법관이 아니고 과학자여야 한다. 당신이 마음을 관찰해서 그 진정한 성질을  명확히 알게 될 때 그런 감정과 정서와 상태들에  대해서 초연하게 된다. 당신은 그렇게 해서 집착을 버리고 자유롭게 되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한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정말로 화가 났으며, 노여움과 악의와 증오의 노예가 되었다고 말해보자. 화난 사람이 자기가 화났다는 것을 진정으로 염두에 두어 깨닫지 못함은 엉뚱하고 역설적인 일이다. 자기 마음의 상태를 깨닫고 염두에 두게 되는 순간, 즉 자기가 화난 것을 보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끄러워져서 누그러지기 시작한다. 당신은 그 성질, 즉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다시 '나는 화나 있다'라든지 '나의 분노'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되새겨야겠다. 당신은 화난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염두에 두기만 하면 된다. 당신은 화난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조사하는 것뿐이다. 이것이 모든 정서, 감정, 그리고 마음의 상태에 대해 취할 태도이다. 


다음으로 윤리적, 정신적, 그리고 지적 주제에 대한  '명상'의 형태가 있다. 우리의 모든 공부와 독서, 토론, 대화와 그런 주제들을 심사숙고하는 것이 이 '명상'에 속한다. 이 책을 읽고 이 책에서 논한 주제들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명상'의 한 형태이다. 우리는 앞에서 케마까와 승려 동아리 간의 대화가 열반의 실현에 이끄는 '명상'의 한 형태임을 보았다.


그래서 이런 형태의 '명상'으로 "다섯 장애"(Nirvana;五蓋)를 연구하고 생각하고 심사숙고해야 한다. 즉, 

 

1. 육체적 욕망(kamacchanda;貪慾)
2. 악의나 증오, 노여움(vyapada;瞋 엘)
3. 권태와 게으름(thina-middha;昏沈睡眠)
4. 불안과 걱정(uddhacca-kukkucca;掉擧惡作)
5. 회의적인 불안(vicikiccha;懷疑)

 

사실상, 어떤 명확한 이해를 하는데 있어서도, 어떤 발전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들 다섯 가지는 장애로 여겨진다. 그것들에 굴복당하게 되면, 그리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면 옳고 그른 것, 또는 좋고 나쁜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또한 "깨달음의 일곱 요소"(七覺分,七覺支)로써 '명상'을 할 수도 있다. 그것들은 

 

1.  마음이 깨어있기(sati;念): 즉, 우리가  위에서 논했듯이 육체와 정신 모두에 대해서 그 모든 활동과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것. 
2.  교리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조사, 연구하는 것(dhamma-vicaya;擇法): 여기에는 종교, 윤리, 철학에 대한 공부와 독서, 연구, 토론, 대화, 그리고 그런 교리적 주제와 관련된 강의를 듣는 것까지 모두 포함된다. 

3.  추진력(viriya;精進):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마음 굳게 일하는 것.
4.  즐거움(piti;喜): 염세적이나 어둡고 우울한 마음자세와는 정반대의 성질.
5.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기(passaddhi;輕安):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뻣뻣하게 긴장해서는 안 된다.
6. 정신집중(samadhi;定): 위에서 논한 바와 같다.
7. 평온함(upekka;捨): 즉,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고요하고 안정되어서 삶의 모든 흥망성쇄에 직면할 수 있도록 하기.

 

이런 성품들을 배양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것은 진실된 바램, 의지 또는 의도이다. 똑같이, 성품들 각각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다른 여러 물질적, 정신적 조건들이 경에 기술되어있다.

 

또한 우리가 앞에서 논한 대로 '존재란 무엇인가?' 또는 '나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같은 의문을 연구하는 "다섯 가지 모임"(五蘊) 같은 주제나,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해서 '명상'할수도 있다. 


그런 주제들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이 이 네 번째 형태의 명상이다. 그것은 궁극적 진리의 깨달음에 이끈다. 

 

우리가 여기서 논해온 것과는 별도로 '명상'에 대한 다른 많은 주제들이 있다. 전통적으로 40 가지가 있는데  그것들 가운데 특별히  네 가지 "숭고한 경지"(Brahma-vihara;梵住)를 언급해야겠다.

 

⑴'마치  아기 엄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듯' 한정 없는 보편적 사랑과 좋은 의도를 어떤 차별도 두지 말고 살아있는 모든 것에 확대시키는 것.(metta;慈)
⑵고통과  걱정과 시달림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자비.(karuna;悲)
⑶남이 성공하고 잘 되고 행복함에 마음을 함께 하는 즐거움.(mudita;喜)
⑷삶의 어떤 흥망성쇠에도 평온한 것.(upekkha;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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