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정각(正覺)에 이르는 바른 실천 [팔정도 바와나의 완성 단계]



■ 정각(正覺)에 이르는 바른 실천 [팔정도 바와나의 완성 단계] 

몸과 마음의 '행(行)을 닦음(修)'이라는 뜻을 지닌 수행(修行)은 '경작하다, 계발(열고 발전향상)하다'라는 뜻을 지닌,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바와나(bhāvanā)'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수행이라는 말이 매우 익숙하니 바와나는 '계발 수행', 팔정도 바와나는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 또는 '정각으로 가는 여덟(八) 부분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을 계발하는 수행'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하다.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수행(팔정도 바와나)의 바른 이해와 바른 실천을 위해, 빠알리어(갠지스 강 유역의 고대인도의 민중어 중 하나로 부처님 말씀을 경전으로 기록하던 당시에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고대인도 민중어)로 기록된 경전모음인 니까야와 한문 번역 경전인 아함경 그리고 한글과 영어 번역 경전 등의 관련 내용을 참조하여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팔정도 바와나의 완성' 단계와 관련된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을 오늘날의 용어를 사용해서 소상히 옮기면 다음과 같다

.
[5] 팔정도 바와나(계발 수행)의 완성 단계

부처님께서는 팔정도 바와나를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순환하며 구르는 것'에 비유하셨다. 훗날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법륜(法輪; 법의 바퀴)은 불교(佛敎; 부처님 가르침)의 상징(symbol)이 되었다

마치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순환'하며 구르듯이 실라('계; 정어·정업·정명' 바와나)-사마타('정;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혜; 정견·정사유' 바와나)를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방식으로 반복 '순환'해서 바르게 실천함으로써 팔정도의 여덟 부분(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계발(열고 발전향상)하여

결국에는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註1]으로 정각(正覺)[註2]을 증득함과 함께 팔정도 전체와 바른 지혜(반야, 빤냐;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바른 지혜)와 바른 사랑(자비, 멧따-까루나; '나我'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을 완성하고, 완전한 자유(해탈; 모든 번뇌, 괴로움, 苦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평화와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
부처님께서는 '팔정도 바와나(계발 수행), 계(戒, 실라; 정어·정업·정명)-정(定, 사마디; 정정진·정념·정정)-혜(慧, 빤냐; 정견·정사유) 계발 수행, 실라-사마타-위빠사나'가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방식'의 바와나(계발 수행)라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실라('계; 정어·정업·정명' 바와나)-사마타('정; 정정진·정념·정정' 바와나)-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혜; 정견·정사유' 바와나)가 마치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구르듯이 연기방식으로 구르면서 정각을 향해 굴러간다.

팔정도의 여덟 부분의 순서는 팔정도 바와나에서 의미가 있기도 하고 의미가 없기도 하다. 동시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어느 한 방향에 무게 중심을 둘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근기(根機)[註3]나 처한 환경 등의 조건에 따라 스스로 결정할 문제다

달리 표현하면 '팔정도는 정각을 향해가는 팔차선 도로'다. 정견을 완성한 후에 정사유를 완성하고 정사유를 완성한 후에 정어를 완성하는 식의 '직렬 방식의 일차선 도로'가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직렬 방식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상호 의존(연기)해서 함께 발전 향상해 가는 '병렬 방식의 팔차선 도로'다

팔정도의 여덟 부분 각각이 연기(조건에 따라 서로 상호 의존)하여 서로를 계발(열고 발전향상)시키고 반야(빤냐; 바른 지혜)와 자비(멧타-까루나; 바른 사랑)를 계발시켜서 결국에는 팔정도 전체의 완성과 함께 정각을 이루고 반야와 자비가 함께 완성되는 것이다

.
--

[註1]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 : 삼명(三明)이란 정각(또는 아라한과)을 성취한 사람이 갖게 되는 세 가지 밝은 지혜다. 삼명(三明)을 이루면 정각을 증득한 자(부처, 아라한)가 된다. 

[註2] 정각(正覺) : 정각(正覺)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또는 無上等正覺; 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의 줄임말이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은 고대인도어 'Anuttara-samyak-sambodhi'(한문 음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한문으로 번역(의역)한 것이다. 여기서 「아」는 무無, 「뇩다라」는 상上,「삼」은 정正,「먁」은 등等,「보리」는 각覺이라는 뜻이다.

[註3] 근기(根機) : 근기(根機)는 고대인도어 'indriya paṭicc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살아온 경험, 수행한 경험 등등의 모든 경험과 그로 인해 형성된 소질, 적성, 성향, 성격과 여러 가지 능력(이해력, 집중력, 인내력..) 등을 통칭하여 'indriya paṭicca'라고 한다.

.
____________________

🌳 부처님의 성도(成道; 정각 이룸, 팔정도 바와나의 완성)와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註] 

부처님께서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를 완성하셔서 정각을 이루시기 전후의 과정, 이른바 부처님의 성도 과정은 맛지마 니까야(中部)의 36번째 경(M36)인 <삿짜까 경, Saccaka Sutta, M36>에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이 경(삿짜까 경)은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의 제자인 삿짜까가 질문한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에 관한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경이다. 이 질의 응답 중에 부처님께서 당신이 깨달음을 이루는 전후 과정을 삿짜까에게 설(설명)하신 내용이 있다.

이 경전(삿짜까 숫따)에 있는 부처님의 성도 과정에 관한 내용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행자를 위한 '4념처-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사띠 확립'의) 단계별 길들임 경, Dantabhūmi Sutta, M125>과 <성구경(聖求經; 성스러운 참구의 경), Ariyapariyesanaa Sutta, M26>을 함께 반영해서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고타마 보살은 출가하여 찾아갔던 (삼매에 의한 해탈을 가르치는 요가수행자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라는 두 분의 스승에게서 삼매(사마디, 定)에 드는 수행을 배워서 두 분 스승이 성취한 경지(단계)의 삼매를 모두 성취했다.

"가장 높은 경지(단계)의 삼매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매에서 나온 후 시간이 지나면 여전히 번뇌는 되살아나고 생사의 의문도 여전히 풀리지 않으니, 이는 완전한 해탈과 열반이 아니다. 이 법은 완전한 빤냐(반야; 바른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완전한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못 된다.”

- <성구경(聖求經; 성스러운 참구의 경), Ariyapariyesanaa Sutta, M26>

그 후 고타마 보살은 고행에 의한 해탈을 가르치는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고통스러운 수행을 하였으나 완전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 고타마 보살은 자신의 수행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해탈과 열반)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수행을 모색했다. 부처님이 되신 후, 당신께서 정각을 이루기 위해 하신 수행을 시행착오를 빼고 '경험적+합리적'으로 정리하시어 '팔정도(다른 표현으로 중도中道) 바와나(계발 수행)'라 칭하시고, 사람들에게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셨다.

.
"이제 나는 우유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모든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마음의 탐색적 작용(위딱까)과 회귀반성적 작용(위짜라)이 아직 있는 상태(마음의 미세한 진동 또는 동요가 아직 있는 상태)에서, 신체 감각(오감각)을 멀리 떠난 삼매에서 생겨난 희열(삐띠)과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를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위딱까-위짜라(마음의 미세한 진동, 동요)를 가라 앉힌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삐띠)과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만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비교적 거친) 희열(삐띠)을 가라 앉힌 삼매에서 생겨나는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만을 갖춘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괴로움(둑카)도 즐거움(숙카)도 뛰어넘은 깊은 삼매에서 생겨나는 깊은 고요함(평정심; 우빽카)과 깊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만을 갖춘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이와 같은 선정에 들었다 나옴으로써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와 같이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상기하여 관찰했다. 한 생, 두 생, 열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우주)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여러 겁의 여러 삶들을 관찰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용모, 신체)을 가졌고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행복과 어떤 고통을 경험했고 어떤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과 모습을 가졌고... 이처럼 한량없는 인과 연기적인 전생의 삶들을 상기하여 깊이 관찰했다. …그리고 이렇게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 이것이 내가 초경(初更)에 도달한 첫 번째 지혜다." [이른바 숙명명(宿命明)]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이러한 지혜(숙명명)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 삶(유정, 중생; 생명의 무리)과 모든 존재(유정과 무정)들의 생기 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한 눈으로 인간을 뛰어넘어 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 이것이 내가 이경(二更)에 도달한 두 번째 지혜다." [이른바 천안명(天眼明)]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에 대한 관찰과 사유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것이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의 실존 양상(실상)인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삼사라(순환; 윤회)다'[고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중생의 실존 양상(고苦의 순환)이 발생하는 원인이다'[집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와 삼사라(순환; 윤회)의 소멸이다'[멸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와 삼사라(순환; 윤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도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이른바 아라한도의 혜慧 해탈),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했다(이른바 아라한과의 심心 해탈). 그리하여 모든 욕망(탐)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혐오(진)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치)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다(이른바 아라한과의 혜慧 해탈).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생사 순환(삼사라;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나는 분명히 알았다. 이것이 내가 삼경(三更)에 도달한 세 번째 지혜다." [이른바 누진명(漏盡明)]

.
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고타마 보살은 먼저 사선정(四禪定)에 들었다 나와서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고, 맑고, 밝고, 더러움이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고타마 보살은 인과 연기적인 과거 생의 일들을 상기하여 깊이 관찰하고, 뭇 삶과 모든 존재(유정과 무정)들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깊이 관찰하고, 번뇌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깊이 관찰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과 세상(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실상(실제 모습, 실존 양상)을 '있는 그대로' 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달리 표현하면, 고타마 보살은 먼저 사선정(四禪定)에 들었다 나와서 네 번째 선정 삼매에서 극대로 계발되어 한시적으로 유지되는 고요집중의 사띠와 우뻭카(평정심; 탐진치에서 한시적으로 벗어난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 상태)를 이용해서,

신수심법(身受心法;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거친 것에서부터 미세한 것, 현재에서부터 과거(12연기 순관), 현재에서부터 미래(12연기 역관), 안과 밖,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 저열한 것과 수승한 것을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한 것을 깊이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했다.

이런 과정으로 고타마 보살은 자신과 세상의 실상과 진리를 여실히(있는 그대로) 꿰뚷어 아는 통찰지(통찰지혜)를 계발했다. 그리하여 고타마 보살은 초경에 첫 번째 밝은 지혜(명지明知)인 숙명명을 이루고, 이경에 두 번째 명지인 천안명을 이루었다.

그리고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한 후, 삼경에는 지고(至高)의 밝은 지혜(명지明知)인 누진(멸진)명을 이루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게 되었다.

.
이렇게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註]으로 정각을 증득한 후, 반조에 들어가서 4주(또는 7주) 동안, 모든 고(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지고의 행복(至福), 완전한 행복, 열반락 속에서 좌선과 경행을 반복하며 반조하고,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의 성취를 반복하며 정각의 증득을 반조했다. 이렇게 고타마 보살은 고타마 붓다가 되셨던 것이다.

부처님의 성도(정각 이룸; 팔정도 바와나의 완성)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모든 괴로움과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벗어남, 자유)의 완성이며 현세에 있어서 열반(涅槃, 닙바나Nibbana, 니르바나Nirvana, 완전한 행복)을 실현한 것이다. 성도하기 이전의 고타마를 보살이라고 하고, 붓다(Buddha, 부처; 깨달은 자)가 되신 후에는 세존(世尊, 바가와Bhagavā, 바가바트Bhagavat)이라고 존칭(尊稱)되었다.

보살(菩薩)은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고대인도어 보디삿따(Bodhisatta,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한문으로 음사한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줄임말이다. 보디삿따(보디사트바; 보리살타, 보살)는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자'를 지칭하는 고대인도어다.

__________________

[註]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 : 삼명(三明)을 이루면 정각을 증득한 자(부처, 아라한)가 된다. 삼명이란 정각(또는 아라한과)을 성취한 사람이 갖게 되는 세 가지 밝은 지혜인데, 이를 한문 경전에서는 숙명명, 천안명, 누진명(또는 멸진명)이라고 번역했다

(1) 숙명명(宿命明) : 고타마 보살은 현재에서부터 과거를 통찰(깊이 관찰)하여 갖게 된 숙명명으로 인과 연기적인 업(業)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지나온 과거 생을 상기하여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하고 깊이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지혜로, 인과 연기적인 업(業; 깜마Kamma, 카르마Karma)에 대해 완전히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과거 여러 생에 걸친 전생을 한문으로 숙세(宿世)라고 한다. 즉 숙명명은 겹겹이 쌓인 과거 전생의 인과 연기적인 업을 '있는 그대로' 통찰(깊이 관찰)하여 완전히 바르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인과응보의 법칙 또는 업의 법칙을 여실히(있는 그대로) 꿰뚫어(통찰하여) 보고 완전히 바르게 아는 것이다

(2) 천안명(天眼明) : 고타마 보살은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을 통찰(깊이 관찰)하여 갖게 된 천안명으로 우주자연의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 자연의 이치/법칙)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거리의 가깝고 멀고에 상관없이, 일체 세간의 모든 고락(苦樂)의 모습(相)과, 유정(정신 작용이 있는 것; 생명, 생물, 생명체)과 무정(정신 작용이 없는 것; 물질, 무생물, 물체), 물질(色; 루빠rupa, 물질 작용, 물질 현상)과 정신(名; 나마nama, 정신 작용, 정신 현상)의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분석 사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지혜로, 자신과 세상(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에 대해 완전히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미시(찰나)-일상-거시(성주괴공, 일겁; 생로병사, 일생)적으로 매 순간 인과 연기적인 생멸(생기 소멸)의 순환(삼사라samsara; 윤회輪廻-바퀴처럼 돌고 돎)을 계속하는 실상(실제 모습)과 진리(자연의 이치/법칙)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꿰뚫어(통찰하여) 보고 완전히 바르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숙명명과 천안명은 자신과 인간을 포함한 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존재, 모든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 생명, 생명체)과 무정(정신작용이 없는 존재; 무생물, 물체)의 실상(실제 모습 또는 실존 양상)을 여실히(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한다.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에게는 그런 눈이 없다. 그래서 세간(감각적 욕망의 세계; 욕계)의 조건 지어진(conditioned, saṅkhāra) 부질없는 것들에 집착한다. 중생은 그런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에 무명(인식의 착각, 그리고 그로 인한 전도된 생각)과 갈애(물질, 정신적 감각에 대한 욕망과 집착)로 인해서 계속해서 생사의 순환(삼사라samsara; 윤회)을 반복하며 근원적 괴로움(둑카dukkha)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3) 누진명(漏盡明) : 고타마 보살은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여 갖게 된 누진(멸진)명으로 사성제를 완전히 바르게 깨닫고 정각을 증득한 자(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 부처)가 되었다.

이른바 숙명명으로 숙세의 연기적 인과관계(업)를 꿰뚫어 보고, 천안명으로 자신과 중생(생명의 무리)의 실존 양상(실상)을 꿰뚫어 보게 되면[고성제], 자신과 세상(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실존 양샹; 연기의 실상)과 진리(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완전히 꿰뚫어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왜 그런 실존 양상을 갖게 되는지 그 근본 원인을 완전히 꿰뚫어 보게 된다[집성제].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알기 때문에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게 된다[멸성제].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괴로움(고통, 번뇌)을 근원적으로 다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중생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부처님께서는 그 길(팔정도)을 경험적으로 합리적으로 완전히 바르게 아시게 되었던 것이다[도성제]

*
______________

위 글들은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팔정도 바와나(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의 완성' 단계와 관련된 가르침(설법; 법을 설명함)을 오늘날의 용어를 사용해서 소상히(자세하고 분명하게) 옮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누누이 강조하셨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식(교학)으로만 공부하면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른 실천법(수행법)인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팔정도 바와나)을 직접 바르게 실천하여 스스로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

사진(상) : 부처님의 성도(成道; 정각 이룸, 팔정도 바와나의 완성)

사진(하) :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법륜(法輪)
;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계발하는 수행을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바퀴가 구르는 것'에 비유하셨습니다. 훗날 여덟 개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법륜(法輪; 법의 바퀴)은 불교(佛敎; 부처님 가르침)의 상징(symbol)이 되었습니다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