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다큐] The Life Of Buddha - 붓다의 생애
BC 500년 경, 한 젊은 왕자가 여행을 시작했다. 그는 고통과 번뇌를 지나 열반으로 향하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영원한 지복(至福)을 향해. 평화의 상징, 자비의 상징, 비폭력의 상징. 그는 붓다였다.
그는 호화로운 궁전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그가 가진 특권은 원하는 모든 탐닉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궁극의 지혜를 얻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는 마음 속의 어두운 회랑을 여행하여 마음 속에 있는 악과 직접 대면했다. 그는 첫 세계 종교를 창시했다. 오늘날 4억 명의 신도가 따르는 종교, 명상을 통하여 완전한 평화와 행복에 도달하는 종교, 궁극적인 실재를 깨닫기 위한 우리 자신의 잠재력, 우리 자신의 노력 그리고 그의 삶에 관한 일들은 가장 위대한 이야기를 만들었고 붓다를 세계 최고의 불멸의 아이콘으로 남게 했다. 입멸한지 2500여年 후에도 붓다의 가르침은 여전히 살아있다.
높은 정신적 평온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과 명석함은 혹자에겐 종교로, 혹자에겐 철학으로, 심지어 정신 치료법으로까지 보이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묘사한다. 불교는 마음에 관한 과학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붓다의 가르침은 2500여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시대에 유효하게 상응한다. 다른 종교들과 달리, 불교는 마음에 집중할 뿐, 절대적 신이란 존재를 가지지 않는다. 대신에 위대한 스승, 붓다나 깨달은 자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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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는 붓다를 '평화의 상징, 자비의 상징, 비 폭력의 상징'으로 이야기 한다. |
# 고고학적으로 발견한 붓다
100여년 전까지 붓다의 삶은 서구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대영 제국이 인도를 점령하고 식민지화 했을 때 붓다가 태어난 그 나라에선 불교가 거의 쇠퇴하였으며 힌두 왕들과 무슬림 침략자에게 이미 파괴된 상태였다. 붓다 기원과 그의 삶이 있었던 장소들은 모든 이들에게 잊혀져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 고고학자들의 인도 북부에 대한 탐험이 시작되고서야 비로소 그들의 발견들을 통해 붓다의 삶이 역사적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1860년경, 한 무리의 고고학자들이 붓다의 삶과 관련된 장소들을 확인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 곳은 붓다가 실지로 태어난 곳인 룸비니, 또 하나는 붓다가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인 가필라國(Kapilavastu)였다.
네팔의 국경 지역에서 좀 떨어진 마을에서 석주(石柱)가 발견되었다. 석주의 문장은 고대 바라문 문자로 적혀있었고 언어는 인도 북부의 지방 방언이었다. 해독된 비문의 내용에 따르면 비문이 새겨진 석주가 있는 바로 그곳이 붓다, 그 깨달은 자가 태어난 곳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것은 붓다가 단순한 전설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의 첫 번째 조각이었다. 그는 실존 인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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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국경 부근에서 발견된 석주 |
# 붓다의 탄생과 그에 대한 예언
2500여 년 전, 인도 북부는 여러 왕국과 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붓다의 아버지, 슈도다나(Sudhodana, 정반왕 淨飯王)는 샤키아족(석가족釋迦族)의 왕이였다. 그는 히말라야 산기슭 근처의 왕궁에서 왕국을 다스렸다. 그의 부인은 마야 왕비였다. 전설에 의하면 보름달이 뜬 밤에, 먀야 부인은 특별한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꿈은 붓다로 알려진 특별한 존재가 곧 지상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사천왕이 마야 왕비를 침대에서 히말라야 산으로 모시고 올라갔고 사천왕은 마야 왕비를 신성한 향수를 뿌려주고 천상에 피는 꽃들로 장식해주었다고 한다.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하얀 코끼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상아에 연꽃을 꽂은 채 마야 왕비의 태내로 들어갔다고 한다. 붓다가 마야 부인에게서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붓다는 태어날 시간과 장소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남자 아이의 이름은 싯타르타였는데,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싯타르타의 어머니는 출산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싯타르타는 이모에게서 키워졌다. 가족들은 브라만 성직자들과 믿을만한 왕궁의 한 예언자를 불러서 어린 왕자의 미래를 점치게 했다. 그는 싯타르타의 몸에서 위대한 표식들 - 길상(吉相)을 찾아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싯타르타의 발에 있는 바퀴 문양(법륜法輪)도 있었다. 붓다는 출생할 때 몸에 소위 32가지 길상(吉相)을 지니고 태어났다고 한다. 그런 길상들은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의 몸에만 나타난다고 한다. 하나는 붓다가 될 사람, 다른 하나는 세계를 지배할 황제...
싯타르타의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흥분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위대한 통치자가 되기를 바라며, 종교적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것들을 볼 수 없게 막는데 노력을 기울인다.
# 붓다, 유년기의 명상 체험과 청년기의 깨달음
싯타르타가 9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매년있는 경작 축제를 축하를 위해 나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는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왕궁 성벽 너머의 현실에 관한 첫 견문은 싯타르타가 세상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하는 문을 열어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삶의 전향점이 되었다. 싯타르타는 밭을 가는 농부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흙과 노력, 몸부림 그리고 이런 고된 일의 반복을 보게 된다. 이것은 왕궁에서는 결코 보지 못한 것이었다. 축제에서 슬쩍 빠져나온 그는 혼자가 되어 명상에 잠긴다. 그는 마음이 명상에 잠기게 됨을 느꼈다. 농부가 쟁기질을 하지 않았더라면 새는 벌레를 먹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것들이 연관되어 있고 모든 행동들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단순한 관찰이 나중에 후에 카르마(업業)로 알려진 그의 가르침의 중요한 초석이 된다. 이런 심오한 생각들에 싯타르타의 마음이 집중되자 그는 후에 깨달음으로 향하는 첫걸음이 된 무아지경의 경지로 빠져들게 된다.
젊은 왕자의 행동은 왕을 크게 동요시켰다. 싯타르타가 세상을 통치하는 군주가 되던지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가 된다는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싯타르타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을 물려받아 왕이 되기를 바랬다. 싯타르타가 성장해 감에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이 왕궁 내에만 머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모든 것들을 했다. 아들이 살기에 완벽하게 매혹적인 세상을 궁궐 내부에 창조하려고 하였다. 왕자가 성년에 이르자 아름다운 시녀들이 제공되었다. 음악과 육체적 아름다움으로 왕자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였다. 싯타르타가 16세가 되었을 때 왕은 야소다라 공주라는 왕자의 아름다운 신부감을 발견했다. 싯타르타는 그녀의 선택을 받기위해서 경쟁해야했다. 왕은 그의 아들이 뛰어난 솜씨로 경쟁에서 싸워 이기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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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타르타의 아버지는 그에게 아름다운 시녀들을 제공하여 세상의 즐거움을 탐닉하게 했다. |
싯타르타는 왕에게 궁궐 밖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아들의 소원을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이 힘들어지자 왕은 생각다못해 왕궁의 주변에 있는 아들의 눈에 거슬릴만한 모든 것들을 안보이도록 만들었다. 마치 헐리우드 영화 셋트장처럼 병자, 빈민, 노인들은 모두 치워졌다. 젊은 왕자에게는 고통없는 환상적인 것만 보여지도록 한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싯타르타의 바깥세상의 첫 체험은 준엄한 현실을 드러나게 했다. 순진한 동심을 가지고 그는 차나(Chana)와 함께 나섰다. 차나는 왕자의 마부이자 가이드였다.
왕자는 네 번의 여행을 하고 네 가지 징후를 볼 것이라고 왕궁의 예언자에 의해 예지되었다. 초기의 불교 경전은 이 이야기에 큰 중요점을 두고 있다. 각각의 여행이 싯타르타에게 그에게는 숨겨져왔던 삶의 일면들을 드러내게 되었다
첫 번째 여행에서 싯타르타는 그의 아버지 영향권에서 떨어져 있는 나라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노인이 고통스럽게 마을을 걸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차나에게 저 노인은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차나는 인간이 늙어가는 생리를 설명했다. 싯타르타는 놀랬다. 늙는 것은 피할 수 없고, 우리 모두에게 일어남을 알았기에... 싯타르타에게 있어서 현실이 잔인한 세상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불행과 고통이 삶의 모든 면을 지배하는 듯 보이는 세상의 모습을...
두 번째 징후는 싯타르타가 질병에 찌들린 모습의 병자를 만나게 되면서 부터였다. 차나에게 누구나 병에 걸리는가를 물어보고 그는 또다시 충격을 받았다. 우리 모두가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잔인한 진실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를 둘러쌌던 환상의 보호벽들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젊은 왕자가 더 멀리 나갈수록, 더욱 끔찍한 삶의 모습들을 직면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거적에 매어진 시체를 보게 되는데 이 시체가 화장(火葬)용 장작더미로 옮겨지는 것을 목격한다. 이 이야기는 싯타르타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알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사후에 누구나 윤회를 겪는다는 브라만교의 믿음을 알게했다고 한다. 고통과 죽음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윤회. 거기에는 어떤 끝도 없어보이고, 끔찍하고 불가피한 삶의 반복에 어떤 해결책도 없어 보인다.
(영리한 젊은이로 성장하였음에도 그런 것들을 하나도 몰랐다는 것은 개연성이 떨어져 보일수도 있다. 보다 중요한 점은 직접 대면할 인간이란 존재가 지닌 근본적 문제들로 인해 우리에게 닥쳐올 엄청난 충격을 전해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장 무언가를 해야할 정도로 매우 위급한 것이다)
그러나 네 번째 징후는 명확히 싯타르타의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그 징후는 남루한 옷차림으로 바루를 들고 구걸을 하러가는 남자였다. "왜 어떤 자는 구걸하고 방랑하기 위해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하는가?" 왕자가 물었다. 차나는 그 사람은 실재와 부딪히기 위해서 그런 즐거움들을 포기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 고통스런 존재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네 가지 징후에 관한 이야기(사문유관四門遊觀)는 어떤 존재론적 절감을 삽입하기 위한 효과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우리 모두는 늙을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병들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머리 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하루동안 앉아서 가슴으로 절감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타인이 병들고 죽는 것과는 다르다. 내가 늙고, 내가 병들고, 내가 죽을 것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존재론적 절감을 처음 접하는 순간을 묘사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당신은 죽게 될 것이고, 그것을 알고 있으며 맛보게 될 것이다.”
# 속세를 버리고 깨달음을 향하여...
네 번째의 여행 후 싯타르타가 왕궁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마음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동요했다. 그는 무상함의 의미를 배웠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무상함을 보았다. 싯타르타는 그의 가족들을 떠나야함을 알게 되었다. 그를 괴롭히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싯타르타는 삶의 고통에 대한 스스로의 답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났다. 어느 이야기에서는 잠들게 되는 안개가 보내져서 경비병을 잠들게 하고 차나와 함께 왕궁의 동쪽을 통해 탈출했다고 전한다. 아노마 강변에서 그는 보석 장신구를 떼어내고 옷을 넝마로 바꿔입고 긴머리를 잘랐다고 전해진다. 그는 차나에게 그것들을 왕궁으로 돌려주라고 말했다. 싯타르타는 처음으로 혼자였다. 그는 마침내 왕궁 생활의 거짓된 세계에서 탈출한 것이다. 고통이 보이지 않도록 치워져있는 거짓된 세계를 벗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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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를 떠나는 싯타르타.. |
싯타르타는 알게 되었다. 그를 둘러싼 고통들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이들을 규율하고 있는 브라만교에 도전해야한다는 것을... 브라만 계급의 사회적 위치는 새로운 사조가 도전해오기 전까지는 확고한 채로 남아있었다. 힌두교의 모태인 브라만교에 의문이 제기되는 때가 온 것이다.
붓다는 브라만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도 브라만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했으며, 누구라도 바르게 살면 브라만이 될수 있다고 말했다. 누구도 천민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고 그르게 살게됨으로써 천민이 될 뿐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현대 우리 사회의 속담인 “진정한 신사는 특별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다만 훌륭하게 행동하는 사람일뿐이다”라는 것과 흡사하다.
싯타르타는 북부 인도 멀리까지 구도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는 대안이 될 삶의 방식을 찾고 있었다. 주위에서 목격해온 고통들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그는 명상의 방법에 집중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당대의 최고 스승들을 찾아나선다. 싯타르타는 명상에 있어서 큰 진전을 보여서 다섯 명의 추종자가 생길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가혹한 고행과 금욕을 시도했다. 단식과 씻지 않음, 장시간 숨을 멈춘 채로 명상하는 것들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는 아사 직전에 단식을 포기했다. 싯타르타의 다섯 추종자들은 단식을 중단한 것을 보고 그를 버리게 되었다. 그제서야 그는 어린 시절의 명상을 기억해 낸다. 그가 찾던 마음의 상태에 이르도록 할수 있는 것은 중도(中道)였던 것이다.
# 명상을 통하여 깨달음으로...
붓다가 택한 방법은 소위 “몸에 대해 알아차리기”라고 한다(위빠사나Vipassana로 보임). 이것은 몸을 무시하지도 않고, 강하게 얽매이지도 않는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인 것이다. 싯타르타는 부다가야라는 곳에 이르렀다. 여기서 그의 고행은 끝을 맺는다. 그는 나무 아래에 앉아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결코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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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래에서 명상하는 싯타르타... |
“살이 썩고, 뼈가 부러지더라도 깨달음으로 이르는 길을 발견할 때까지는 절대로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그는 더 이상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지 않았다. “더 고통스럽게 하지 않더라도 삶은 이미 고통스럽다”, “"오직 고요히 만물을 생각하고 삶을 생각하게 하자”. 들숨과 날숨의 서서한 움직임에 주목함으로써 그는 마음에 촛점을 맞추기 시작했고 단지 코 주위의 몸 안에 존재하는 섬세한 감각에만 집중한다. 이런 방법으로 마음을 조용하게 이끌고 고요하고, 안정되고, 집중되고, 정화되도록 했다. 싯타르타의 마음은 아주 집중되어 무의식의 어두운 곳까지 성공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지막 최대의 고통과 직면하게 된다. 마왕 마라(Mara) - 자아의 제왕이자 환영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왕 마라가 기독교의 사탄과 다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유혹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고 유일신에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라는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저항력이다.
마라는 마군(魔軍)들을 풀어 싯타르타를 공격하였다. 그들은 불화살을 그에게 쏘았다. 그러나 날아오는 도중 싯타르타는 그것들을 연꽃으로 변하게 했고, 해를 끼치지 못하고 그의 주위에 떨어졌다. 실패를 하자 마라는 싯다르타를 유혹하기 시작한다. 그는 매혹적인 딸들을 이용하였다. 싯다르타는 죽음이면서 동시에 욕망이기도 한, 마왕 마라에게 공격당했다. 프로이드적인 관점에서 보면 욕망은 죽음이고, 죽음은 곧 욕망이다. 사실 마왕 마라는 그에게 세 딸들을 제시했다. 이들은 욕망과 혐오를 동시에 나타내는데 이것은 둘 다 똑같이 나쁜 것입니다. 수치로 인해 멀리한다면 혐오가 될 것이고, 반대라면 욕망의 노예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완벽하게 고요하고 무관심할 수 있었다. 어떤 끌림도 거부도 없이 그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마라의 딸들의 얼굴은 싯타르타의 눈앞에서 썩어가기 시작했다. 마왕의 딸들은 그런 후 땅속으로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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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딸들에 의해 유혹을 받고 있는 싯타르타... |
사실 붓다의 인식한 마라는 붓다 자신의 일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모든 인식이 그의 깨달음이었다. 그가 마왕을 물리쳤을 때 땅이 떨렸다고 전해진다.
# 깨달음, 그 이후...
싯타르타가 35세가 되었을 무렵에 네 가지 Jana를 통과하여 깨달음에 이른다. 그리하여 붓다 즉, 깨달은 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절대적 지복의 상태로 나무 밑에서 7일을 더 보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제되고 감도높은 마음의 상태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높은 경지에서 붓다는 생노병사의 불가피한 윤회를 벗어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집착을 제거한다면 불만과 고통도 삶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의 고통과 좌절의 주요 원인은 욕망과 집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하는 것과 실제 사이에는 항상 불일치가 생긴다는 것이다. 붓다가 나무밑에서 얻은 통찰은 불교의 창시가 되었다.
붓다는 그의 지혜를 4가지 진리, 사성제(四聖諦-苦集滅道)로 요약했다. 이것은 모든 불교도의 믿음의 근간이 되었다. 첫 번째 진리는 인생은 고통이란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苦-고통). 두 번째 진리는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이다(集-집착). 세번째 진리는 의사와 같은데 붓다는 집착에 대한 치유법이 있음을 밝힌다(滅-멸). 네 번째 진리는 처방을 내리는 것이다(道-도). 어떻게 병을 치료하고 깨달음 또는 열반에 들것인지를 가르친다. 궁극적인 목적은 집착, 무지, 탐욕, 증오, 망상에서 해방되는 완전한 大자유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윤회의 모든 원인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깨달은 자가 죽게될 때에는 시공과 인과를 초월하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을 大자유의 상태라고 한다.
그의 추종자들이 늘어가자 승가(僧伽, Sangha)라고 불리는 공동체가 설립된다. 불교도들은 깨달음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불경을 암송하는 것을 수행에 특별한 효험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부지런히 수행하고, 항상 깨어있으라’
불교를 두 마디로 설명해 본다면, “깨어있음을 수행하라” 이다. 깨달음으로 이르는 길은 마음에 집중하는 것과 그리고 계율을 엄수함으로부터 시작한다.
살생하지 말라(不殺生), 도둑질 하지 말라(不偸盜), 음행을 하지 말라(不邪淫),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 술을 마시지 말라(不飮酒). 이는 첫 승가(僧伽, Sangha)에서 붓다가 확립한 오계(五戒)이다.
9년이 지난 후에 그가 버렸던 왕궁과 가족들에게 돌아갔다. 아버지는 붓다가 끼친 마음의 깊은 상처에 대해서 용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도다나王(정반왕淨飯王)은 아들의 구도가 중요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의 계모(이모)조차 승가에 참여하길 간청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역사상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다. 붓다는 그의 가족들을 다시 한 번 버렸다. 그는 가르침을 위해 나섰고, 사십년간 이어졌다. 보리수 아래에서 얻었던 지혜를 그의 제자들에게 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 그는 아들을 승려로서 받아들였다. 붓다는 그의 추종자들을 승가에서 모여 살도록 했다. 그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승려는 독신이어야하고 모든 개인적인 욕망을 포기해야한다.
수세기에 거쳐서, 그의 메세지는 여러 가지 다른 전통들에 의해서 각각의 여러 번역들과 수도(修道) 관습들로 변해왔다. 붓다는 비록 속가 신도라 할지라도 영원한 지복(至福)과 궁극의 지혜에 이르는 길을 따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대다수의 서구인들은 출가를 통해 불교에 입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속세에서도 수행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인, 명상을 통해 입문한다. 많은 서구인들이 불교의 명상에 특별히 끌려한다.
어떤 불교 학교들은 붓다는 초인(超人)이고 神에 필적하는 신비한 인물이며 기적을 행했던 자라고 믿고 있다. 다른 학교들은 붓다는 단지 인간일 뿐이고 바로 그 점이 그의 가르침에 힘을 더하게 된다고 믿고 있다.
# 붓다의 말년, 그 이후... 세계 종교로 성장
붓다는 말년에 척추 통증으로 겪게된다. 그는 다양한 육체적 병과 쇠약도 겪게된다. 붓다는 80세에 이르러 보편적인 질병인 식중독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사망 직전 그는 이 세상에서 열반으로 향한 여정의 깊은 삼매(三昧)에 빠져들었다고 말해진다. 붓다 입멸 후, 그의 가르침을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기 위한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들은 여러 세대의 승려들에 의해서 수세기에 걸쳐서 성심으로 배워지고 전수되었다. 붓다의 시신은 화장(火葬)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리들은 보존되었다. 사리들은 200년 후 불교에 귀의한 인도의 첫 황제 아쇼카 왕에 의해서 소중히 안치되었다. 그는 방대한 기념물과 탑을 건설했고 붓다의 일생과 관련된 중요한 장소를 표시하기 위해 기둥을 세웠다. 아쇼카왕은 불교의 실질적인 전파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대에 불교에 귀의한 아시아의 통치자들이 본받아야할 귀감이 되었다. 후대의 아시아 통치자들은 아쇼카를 이상적인 왕이자 불교의 후원자로 여기게 되었다.
수세기동안 한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퍼지는 식으로 불교는 성공적으로 전파되고 자리잡게 되었다. 오늘날 붓다의 삶과 관련된 성지들은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 들인다. 순례자들은 부다가야에 모여들어 붓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 그가 그랬듯 영원한 평화와 행복, 고통과 죽음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를 희망하고 있다.
의식(儀式)이나 개인 숭배의 무용함을 설법했던 붓다가 사후에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이다. 그것도 역사상 현존하는 가장 큰 개인 숭배가 되었으니 말이다. 불교 사원들은 세계 각처로부터 각자의 다른 전통을 대표하여 부다가야에 세워지게 되었다. 불교는 그 모든 각기 다른 형태에도 불구하고 보리수 나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 왕자가 견성을 하고 성불한 바로 그 장소로...
붓다는 찰나(刹那)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눈 깜짝할 순간에, 찰나(刹那)는 깨닫는 그 순간이다. 그 순간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 특별한 순간은 첫 세계 종교를 탄생시켰다. 神이 없는 종교, 열반에 이르는 길이 누구에게나 각자의 마음 속에 있음을 알리는 종교의 탄생이었다.
출처 : http://blogger630.blogspot.com/2017/04/bbc-life-of-buddh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