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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불교.명상 추천 도서

마음 길들이기 - 아잔 차 스님


The Training of the Heart


아쟌주1) 챠 . 지음
김 용 호. 옮김

Venerable Ajahn Chah

(Bodhi Leaves No.107)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Sri Lanka

  

저자에 관하여

저자 아쟌 챠 스님은 태국 왓빠뽕 절의 주지 스님으로 상좌부 불교(남방불교)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큰스님 가운데 한 분이다.
여기 소개하는  마음 길들이기(The Training of the Heart)]는 서력 1977년 3월 방콕의 왓 보보르니베스 절에서 온 서양 스님들과 그 제자들에게 베푼 설법 내용이다.
이 글은 본래  보디니야나(Bodhinyana)]지(誌)에  아잔 챠 스님의 가르침 이란 제목으로 실렸던 것인데, 이번에 왓 빠나 나차트 절의 주지 스님이 쾌히 허락해 주어 본 문고본으로 내게 되었다.



마음 길들이기

(여기서 사용된 `마음(heart)'이란 말은 `정신(mind)'으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아쟌 먼주2) 스님과 아쟌 사오 스님께서 사시던 시대는 오늘날에 비해 생활이 훨씬 단순하고 덜 복잡했습니다. 그 시절은 스님들이 해야 할 일이나 집전할 의식이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렇다 할 거처도 없이 숲속에서 살았습니다.주3) 그곳에서 그들은 선정공부에 전심전력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사치하는 법도 없었습니다. 요즘은 너무나 만연되어 버린 사치풍조이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은 찾아 볼래야 볼 수가 없었습니다. 스님들은 대나무로 물컵이나 타구(唾具)를 만들어 썼고, 신도들의 내왕도 별로 없었습니다. 수행자들은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 기대하지도 않아 가진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선정을 숨쉬며주4) 삶을 즐겼습니다.

그렇게 살아가자니 자연히 수행자들은 갖은 궁핍을 다 겪어야 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학질에 걸려 약을 구하려면 스승은 "자네에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야. 공부나 계속하게"라고 꾸짖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지금처럼 약을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숲에서 자라는 약초나 풀뿌리가 고작이었습니다. 환경이 그러했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극도의 참을성과 견딜 힘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웬만한 병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디가 조금만 아파도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는 실정입니다!

때로 스님들은 탁발을 하기 위해 3km 내지 5km에 이르는 먼 숲속 길을 걸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날이 밝자마자 길을 떠나서 오전 10시나 11시가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습니다. 게다가 탁발한 것이래야 보잘 것 없어서 쌀과 소금 내지는 고추 몇 개가 고작이었습니다. 반찬을 얻느냐 못 얻느냐는 아예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형편은 정말 이처럼 어려웠습니다. 아무도 감히 배가 고프다느니 지쳤다느니 하고 불평할 엄두를 못 내었고, 불평하려 드느니 차라리 스스로 몸을 돌보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변에 잠복해 있는 갖가지 위험을 줄곧 참을성으로 견뎌내면서 숲속 정진을 해냈습니다. 정글 속에는 사나운 맹수가 우글거렸고 뿐만 아니라 승려들의 두타행 내지 숲속 거주에 따르는 육체적 정신적 고난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정말 그 시절의 스님들의 참는 힘은 이처럼 대단하였습니다. 이것은 주위 환경이 그렇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주위 환경이 우리를 정반대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누구나 걸어서 다녀야 했지만 그후 우마차가 생겨나고 또 그 다음에는 자동차가 출현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눈도 높을 대로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이젠 자동차마저도 냉방이 안돼 있으면 타려고 들지도 않습니다. 냉방 장치도 안 된 차로 어디를 가겠느냐 이거지요! 이렇듯 참을성과 견딜성이라는 미덕은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선정과 수행의 규범은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져 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요즘 수행자들은 수행조차도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욕구에 따라서 하려 들기에 이르렀습니다. 노스님들이 옛 시절을 얘기해 주면 마치 신화나 전설을 듣는 양 합니다. 그저 무관심하게 들을 뿐 이해하려 들지 않습니다. 도무지 가슴에 가 닿지를 않는 겁니다.

 

 

옛 수행 전통대로라면 수행승은 적어도 5년은 스승과 함께 지내야 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때는 묵언을 해야 하기도 합니다. 너무 많이 말하지 말라! 책을 읽지 말라! 그 대신 너 자신의 마음을 읽어라!

이곳 왓빠뽕을 한 번 예로 들어 봅사다. 요즘 많은 대학 졸업자들이 수계하고자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경전 읽는데 시간을 다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해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책만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책 읽을 기회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으나, 그들 자신의 마음을 읽을 기회는 너무 적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태국 관습에 따라 수계하러 오면 3개월 동안 책이든 지침서든 일체 펴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결제 기간 동안 그들은 마침내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참으로,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이 마음은 그 자신의 길들지 못한 습관에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뜁니다. 흥분해서 마구 쏘다니는데 그것은 마음이 결코 길들여져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을 길들여야 합니다. 불교의 선정은 마음을 대상으로 합니다. 즉 마음 혹은 정신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마음을 길들이는 일은 불교에서 제일 강조하는 요점입니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입니다. 오직 그 뿐입니다. 마음을 향상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은 곧 불교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이 마음은 짐승 우리 속에 갇혀 삽니다. 게다가 그 우리 속에 갇힌 마음은 성난 호랑이와 같습니다. 만약 이 설쳐대는 마음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말썽을 일으키고 맙니다. 그 마음을 여러분은 선정, 즉 사마디(samadhi, 三昧)로 길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마음 길들이기'라 부르는 것입니다. 길들이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수행의 기반으로서 도덕적 계율(sila)부터 확립시켜야 합니다. 계율은 몸(身)과 말(口)의 길들이기입니다. 여기에서 갈등과 혼란이 발생합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하지 않으려 애쓸 때 거기에 갈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적게 먹으라! 적게 자라! 말을 적게 하라! 세속의 습관이라면 무조건 줄이고, 그 힘에 거역하라. 마음이 내킨다고 해서 그대로 행하지 말고, 생각이 흐르는 대로 좇아가지 말라. 이런 노예적 추종을 그만 두라. 언제나 무명(無明)의 흐름에 거슬러 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계율'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계율로 마음을 길들이려 하면 마음은 대단히 불만스러워져서 투쟁을 시작합니다. 제약되고 억압당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마음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되면 방황하고 투쟁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고(苦, dukkha)주5)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 고, 즉 두카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중에 첫번째 진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고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고도 결코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바로 이 고가 우리에게 지혜를 가져다 줍니다. 고통이 있을 때 우리는 그 고통을 응시하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樂, sukha)은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합니다. 행복은 결코 인간들로 하여금 참을성을 키우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편안함과 행복 때문에 우리는 부주의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고(苦)와 낙(樂) 두 가지 번뇌 중에서, 더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 고입니다. 따

라서 우리는 고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바로 고를 들춰내야 합니다. 무엇이 고인지부터 먼저 알아야 우리는 그 다음에 선정 닦는 방법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선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마음을 길들여야 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무엇이 요점인지 영문을 잘 모르겠지만, 스승이 뭔가를 하라고 할 때는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참을성과 견딜성의 미덕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여러분은 그것을 참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생길만 해서 생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삼매 수행에 들어갈 때 여러분은 평화와 평온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막상 해보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수행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못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말합니다. "나는 평온을 얻을 때까지 앉아 있으리라." 하지만 평온이 생겨나지 않으면 여러분은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괴로움이 있게 되면 벌떡 일어나 달아나 버립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은 마음을 향상시키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포기'라 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기분을 좇는 대신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법(Dhamma) 주6) 으로 자신을 길들여야 합니다. 게으르게 하든, 부지런하게 하든 그저 계속 정진하십시오. 그 길이 훨씬 낫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다른 길은, 즉 당신 기분을 좇아다니는 길은 아무리 헤매어 봐도 결코 법에 다다르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법을 닦는다면, 그 때는 기분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끊임없이 정진을 하게 됩니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 즉 제멋대로 공부하는 길은 부처님이 가르치신 길이 아닙니다. 수행에 대해서 또 법에 대해서 나름대로 낸 소견을 따른다면, 우리는 곧 무엇이 올바르고 무엇이 그른지 명확히 분별하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마음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의 가르침에 다라 수행하는 것은 가장 느린 방법입니다. 부처님의 법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지름길입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게으를 때도 수행하고 있고 부지런할 때도 수행하고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이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을 향하고 있는지 항상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계발'이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견해를 따라 수행하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많은 의심을 하게 됩니다. "난 별로 소질이 없나봐. 행운도 없어. 벌써 몇 년이나 공부를 했는데도 아직 깨닫지 못했어. 난 아직 법을 보지 못했어."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로 수행하는 것을 `마음의 계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재앙의 개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이 그와 같다면 즉 아직도 뭐가 뭔지를 알지 못하고 보지를 못하는 수행자라면 또 아직까지 스스로를 새롭게 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그릇되이 공부해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난다야, 부지런히 수행을 해라! 너의 수행을 끊임없이 향상시켜라! 그러면 너의 모든 의심도, 너의 모든 불안도 사라지리라."
의심은 생각이나 이론으로,사변이나 토론으로 없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번뇌는 오로지 바른 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향상시키는 것에 의해서만 없어집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마음을 계발하는 방법은 세속의 방법과는 정반대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가르침은 청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번뇌를 떨어낸 청정한 마음이 바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의 길입니다.

법을 수행하려면 여러분은 반드시 마음을 숙여 법 앞에 절해야 합니다. 법이 여러분에게 절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렇게 할 경우에는 반드시 고가 생기고 맙니다. 이 고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수행을 시작하려 하면 바로 그때 고가 그곳에 나타나 버티기 때문입니다.

선정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꼭 지켜야 할 의무는 정념(正念), 침착 그리고 지족(知足)입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멈추어 줍니다. 길들여진 적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의 습성을 멈추어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성가시게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걸까요? 마음을 길들이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 마음은 타고난 그대로 거치른 채로 남아 있게 됩니다. 원래 마음의 성품은 이롭게 쓰일 수 있도록 길들여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무의 예에 견줄 수 있습니다. 나무는 집을 짓는 재목이지만, 다듬지 않는 자연 상태 그대로는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집 짓는데 소용되는 널빤지로도 다른 무엇으로도 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수가 집을 지으려고 한다면 그는 바로 이런 나무를 찾을 것입니다. 그는 이 원자재를 가지고 필요한 대로 깎고 자르고 해서 용도에 맞게 활용할 것입니다. 단시간 내에 그는 훌륭히 집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선정이나 마음 계발도 이와 비슷합니다. 숲속에서 자연 상태의 나무를 취하듯이 길들여지지 않은 이 마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자연 상태의 마음을 보다 품위 있게, 보다 스스로를 잘 알고 감수성도 더욱 예민하게 되도록 길들여야 합니다. 모든 것은 원래 자연 상태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가 그 본연의 성질을 알게 되면 그때는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로부터 떨어질 수 있으며, 그것을 놓아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괴로움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원래 성질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이 마음이 어떤 대상에 집착할 때에는 반드시 동요와 혼란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마음은 처음에는 이곳을 방황하다가 그 다음에는 저곳을 방황합니다. 이같이 동요하는 모양을 관찰하다 보면 마음을 길들인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고, 그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마음의 평화를 얻어려고 애써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도 생각과 감정은 이처럼 배회합니다. 마음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마음의 성질을 거듭해서 잘 살펴 보면 마음은 원래 그런 것이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성질입니다. 이를 분명하게 볼 수 있으면 우리는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헤어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놓고 우리 스스로에게 `그건 원래 그런 거야'라고 꾸준히 되뇌일 수만 있으면 그 대상에 대해 더 이상 아무 것도 덧붙일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모든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마음은 그것들을 놓아버리게 됩니다. 사유와 느낌이 아직 남아 있긴 하겠지만 그 사유와 느낌 자체가 이미 힘을 잃은 상태입니다.


이 마음은 비유컨데 다음의 어린애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어린애는 까불며 놀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이 지나쳐 우리의 신경을 거슬렸다 해서 이 애를 야단치고 때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마땅히 어린애들은 원래 그렇게 행동하기 마련이라 이해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일단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아이가 제멋대로 놀도록 내버려 두게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풀려 버립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린 아이의 방식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사고 방식이 변하여 사물의 참 성질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 둡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더욱 평안해집니다. 우리는 `바른 견해(正見)'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릇된 견해를 지니고 있는 한, 깊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살아도 혼돈이고 하늘 높은 곳에서 살아도 혼돈입니다. 바른 견해가 있을 때만이 마음은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때는 더 이상 풀어야 할 수수께끼도, 더 이상 생겨날 문제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떨쳐버립니다. 여러분은 놓아버립니다. 집착하는 감정이 일어나면 그때마다 우리는 그 집착감이 원래 그렇게 존재할 따름이라는 것을 알고 거기서부터 헤어나옵니다. 그 집착감은 특별히 우리들을 성가시게 굴려고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사실은 원래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새삼 정색을 하고 그걸 깊이 숙고해 봐도 여전히 집착감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집착감을 놓아버리면 그때 색깔은 단지 색깔이고 소리는 단지 소리이고,향기는 단지 향기이고, 맛은 단지 맛이고, 감촉은 단지 감촉이고 마음은 단지 마음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각기 물과 기름처럼 별개입니다. 설혹 여러분이 물과 기름을 같은 병 속에 넣어도 각기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뒤섞이지 않습니다.

 

물과 기름이 다른 것처럼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도 다릅니다. 부처님도 색깔과 소리, 냄새, 맛, 촉각, 생각의 여섯 가지 대경(對境)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아라한(깨치신 분)이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쪽으로 살았습니다. 그분은 마음이 단지 마음이고, 생각이 단지 생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이것들을 돌아 보지 않고, 조금씩 멀리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은 그것들에 혼동되지 않았고 또 그것들을 뒤섞어 놓지도 않았습니다.
마음은 단지 마음이며, 생각과 감정은 단지 생각과 감정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놓아 두십시오! 색깔을 단지 색깔로, 소리를 단지 소리로, 생각을 단지 생각으로 놓아 두십시오. 왜 우리가 그것들에 매달려서 신경을 써야 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놓아버리는 식으로 사유하고 느끼게 되면 그때 우리는 그것들과 떨어져서 따로 설 수 있게 됩니다. 즉 우리들의 생각과 감정이 한쪽에 서게 되고 마음은 다른 쪽에 서는 것입니다. 이 상태는 마치 물과 기름이 같은 병 속에서도 따로 나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과 깨달은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 일반 사람들과 같이 사셨습니다. 같이 살았을 뿐 아니라 이들 평범하고 깨닫지 못한 무지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고귀하고, 깨달은,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가르쳤습니다. 그분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수행 방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내가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이것이 오로지 마음의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선정 수행이 진전되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이것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출가하여 승단에 들어온 것은 미혹에 빠져 헤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또 비겁해서이거나, 두려움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출가는 우리 자신을 길들이고,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이같은 이해를 확고히 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따를 수 있습니다. 법은 더욱 더 명명백백해질 것입니다. 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해합니다. 또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법을 이해합니다. 
요즈음은 결실을 맺을 수 없는 법의 찌꺼기만이 규범으로 받아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법은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따라서 법을 찾아 어떤 다른 곳에서 헤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지혜를 통해 벗어나십시오. 지성을 통해 벗어나십시오. 좋은 방편을 통해 벗어나십시오. 무지의 어리석음(無明) 속으로 도피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이 평화를 원하거든 지혜로운 평화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법을 바로 볼 때만이 거기에 바른 길이, 바른 도가 나타납니다. 번뇌는 단지 번뇌일 따름이며 마음은 단지 마음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사물로부터 떨어져 따로 설 때 사물은 진정한 실상 그대로이게 되면서 우리에게는 단순한 객체로 머물게 됩니다. 우리가 바른 길을 걷는 한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 언제나 거기에는 열린 마음과 자유가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내 말을 주의깊게 들어라. 그대들은 어떤 법(dhamma)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체의 모든 것을 말합니다. 이 법이 아닌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과 증오도 법이며, 즐거움과 괴로움도, 좋아함과 싫어함도 법입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이 모든 것들이 법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dhamma)을 실천할 때 그래서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잡고 있던 것을 놓아 줄 수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떤 법(dhamma)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생겨나는 모든 조건들, 우리 정신의 모든 조건들, 우리 몸의 모든 조건들은 항상 변화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들 가운데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할 것이며 더 이상 무엇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우리는 올바르게 됩니다. 우리는 올바르지만 문제는 또 있습니다. 문제에 부딪치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번뇌입니다. 즉 번뇌란 놈이 스스로 골치 아프게 되어 우리를 방해하고 온갖 문제를 야기시키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번뇌를 번뇌인 줄 모르고 내 마음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 대로 충실히 따르면 결코 어떤 문제거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부처님의 도에 매달리면 어던 고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도는 현상을 이루는 모든 법을 하나하나 풀어 `놓아버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선정의 최상의 수행법으로서 부처님께서는 `놓는' 공부를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것도 지니지 마십시오! 떨쳐 버리십시오! 좋은 일을 보아도 놓아버리십시오. 옳은 일을 보아도 놓아버리십시오. 이 `놓는다'는 말이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놓아버리는' 방법 그 자체를 따라 수행을 해 나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을 주의깊게 살피라고 가르치셨으며 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살핌으로써 도(道) 공부를 바르게 지어나가라고 하셨습니다. 법은 다른 데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과 마음 속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선정을 닦는 사람은 힘있게 정진해야 합니다. 마음이 더욱 커지고 밝아지도록 하십시오. 마음이 자유롭고 독립되도록 하십시오. 선행을 하고 나서 그것을 마음 속에 지니지 말고 놓아버리십시오. 나쁜 행위를 삼가하고서도 그것을 놓아버리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현재의 이 순간에,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과거 속으로, 혹은 미래 속으로 여러분 자신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어 하고 또 그들이 원래 갖고 있던 생각과 가장 상충되는 가르침이 바로 이 `놓아라'라든가 `빈 마음으로 일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법의 언어(dhamma language)라 합니다. 이를 세속적인 용어로 받아들이면 혼동에 빠지게 되어, 마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좋다는 말로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질 소지도 없지는 않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가까운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지금 무거운 바위를 끌고 간다고 칩시다. 조금 지나자마자 우리는 그 바위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합니다만 그것을 어떻게 놓아버려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던져버리라고 말하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이걸 던져 버리면 나에게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쟎아!" 그걸 던져 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어떤 것이 라는 얘기를 들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걸 믿지 않은 채 "내가 이걸 던져 버리면, 난 아무 것도 없게 돼"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쳐 허약해져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그 무거운 바위를 끌고 가다가는 마침내 힘에 겨워 떨어뜨리고 맙니다.

그걸 떨어뜨리자마자 우리는 갑자기 놓아 버리는 것이 얼마나 이로운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곧바로 가볍고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되며 바위를 끌고 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바위를 놓기 전에는 놓아버리는 이익을 좀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우리에게 놓아버리라고 얘기해 주어도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 말뜻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는 맹목적으로 바위를 붙들고 놓지 않다가 마침내 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 다음에야 할 수 없이 놓고 맙니다.
그때 그는 홀가분함과 안도감을 스스로 느끼며, 놓아버림으로써 비로소 얻게 되는 이익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거듭 짐을 지게 되겠지만 그 결과가 무엇인지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보다 쉽게 놓아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짐을 지고 다니는 것이 소용없는 짓이라는 것, 그리고 놓아버리면 편하고 홀가분해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자신을 알게 된 구체적인 한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아만 주7) 즉 `나'라는 자아의식은 바로 그 무거운 바위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바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만을 버릴 것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없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만을 결국 놓아버릴 수 있다면,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마음을 길들이는 데 있어서는 칭찬이나 비난에도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칭찬을 원하고 비난을 원치 않는 것은 세속의 길입니다. 부처님의 길은 칭찬받을 만한 때에는 칭찬을 받아들이고, 또 비난받을 만한 때에는 비난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를 키울 때 항상 야단만 친다면 이것은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나치게 야단을 칩니다. 현명한 사람은 야단칠 때와 칭찬할 때를 잘 압니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알기 위해 지성을 발휘하십시오. 마음을 보살피는 데 좋은 방편을 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마음을 닦는 데 있어 보다 현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잘 길들여지면, 그 마음 덕분에 우리는 괴로움을 면할 수 있게 됩니다. 괴로움은 바로 여기 우리 마음 속이 있습니다. 괴로움은 언제나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며,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괴로움은 바로 여기 마음에서 생겨났습니다. 또한 바로 이 마음에서 없어집니다.
마음이란 이와 같습니다. 어떤 때는 좋은 생각이 나고, 또 어떤 때는 나쁜 생각이 떠오릅니다. 마음은 속임수 투성입니다. 마음을 믿지 마십시오! 그 대신 마음 자체를 만드는 조건을 똑바로 보십시오. 그 조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 조건들은 단지 있는 그대로일 뿐입니다. 그것이 선하건 악하건 또는 다른 어떤 것이건, 결국은 그러한 방식으로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조건들을 붙잡고 있지만 않는다면 그것들은 원래 있던 그대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붙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에 물리게 되고 그래서 고통을 받게 됩니다. 

 


`바른 견해(正見)' 주8) 를 가지면 오로지 평화가 있을 뿐입니다. 삼매가 생기게 되고 지혜가 그 뒤를 잇습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는 항상 평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여러분의 제자들에게 법을 들려 주려고 이곳에 데리고 왔습니다. 여러분들은 법문 중 일부는 이해가 되고 일부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가능한 한 쉽게 저는 선정 수행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내 말이 옳게 생각되든, 그르게 생각되든 간에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받아들여서 그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도 스승이란 입장 때문에 여러분과 비슷한 처지를 겪어왔습니다. 나 역시 어디를 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지 들을 기회는 없었기 때문에, 법문 듣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그렇듯이 이번에 여러분들도 한 선생으로부터 법문을 듣게 된 것을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여러분이 조용히 앉아 듣고 있는 동안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흐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법을 갈망하고 있으므로 이렇듯 진지하게 귀기울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남들에게 말하는 것이 즐겁지만,시간이 지나면 그 즐거움은 사라집니다.
그러면 이제는 듣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영감을 느끼게 되고 쉽게 이해가 갑니다. 여러분이 나이를 더 먹게 되고 또 여전히 법을 갈망할 때 법의 향기는 유난히 감미로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며, 다른 스님들을 대표하는 표본이 됩니다. 여러분은 제자들에게 본보기가 됩니다. 여러분은 모든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망각해선 안 됩니다. 그렇다고 또 자기 자신에 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지도 마십시오.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 그 즉시 생각을 그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법을 닦는 길은 무수히 많습니다. 선정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것도 끝이 없습니다. 또한 의심이 일어나는 것도 너무 많습니다. 이 모든 것을 계속해서 쓸어버리십시오. 그러면 더 이상의 의심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바른 이해를 갖게 되면, 어디에 앉아 있든 어느 곳을 걸어 가든 거기에는 평화와 평안이 있습니다. 어디서 선정을 닦거나 그곳은 정지(正知) 주9) 를 내는 장소가 됩니다. 선정을 앉거나 걸으면서만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그리고 모든 장소가 우리에게는 공부가 됩니다. 거기엔 항시정지(正知)가 있습니다. 거기엔 항시 정념(正念)주10) 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항상 정신과 육체의 생멸을 볼 수 있으며, 그것들 때문에 우리 마음을 흩뜨리지 않게 됩니다. 그것들을 언제나 되돌려 보내버립니다. 사랑이 오면 그것을 다시 온 곳으로 돌려 보냅니다. 탐욕이나 분노가 다가와도 다시 온 곳으로 돌려 보냅니다. 그것들을 따라가 보십시오. 그것들은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그곳으로 그것들을 잘 호송해 주십시오. 어떤 것도 지니고 있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런 방식으로 수행하면 여러분은 비어 있는 집과 같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는 빈 마음으로,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로운 비어 있는 마음입니다. 이를 `빈 마음'이라고 하지만,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악은 없어 비어 있지만 그 대신 지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지혜로써 하게 됩니다. 지혜로써 생각하고, 지혜로써 음식을 먹습니다. 오로지 지혜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가르침이며 여러분께 이것을 드립니다. 전 이것을 여러분이라는 테이프에 녹음한 셈입니다. 법을 듣고서 여러분의 마음이 평화로워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것도 굳이 기억하려 들 필요는 없습니다.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평화롭게 가지고 오로지 듣기만 하면, 지금처럼 얘기가 흘러가는 대로 그저 끊임없이 따라 가며 곰곰이 음미하면, 그때 우리는 바로 녹음기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가 지나서 다시 `틀어 놓을 때' 모든 것은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사라질까봐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녹음기를 틀자마자 모든 것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를 모든 스님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 태국 말을 잘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법의 언어를 배우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주해

1) 아쟌(Ajahn):교수 선생에 해당되는 태국어로, 이 경우에는 큰 스님이란 뜻으로 쓰이고 있다. 

2) 아쟌* 먼(Ajahn Mun)은 금세기 태국에서 존경받고 또 큰 영향을 끼친 선정 수행의 대가. 그의 지도에 힘입어 숲속 고행의 전통*은 다시금 불교의 선정 수행의 중요한 전통으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최근에 입적했거나 아직도 살아 있는 태국의 위대한 선정 대가들 중 대부분은 아쟌 먼의 직계 제자이거나 그의 가르침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분들이다. 그는 서력 1949년 11월 입적했다. 아쟌 사오(Ajahn Sao) 스님은 아잔 먼 스님의 스승이다. 


3) 숲속 고행:두타행(dhutanga kammatthana)을 말함. 두타행의 원 뜻은 `떨쳐버리는 방법', 안일하고 사치스런 마음의 때를 떨쳐 없애고 검소. 지족(知足). 청정 등을 닦아 익히기 위해 의. 식. 주의 가난. 궁핍을 감내하는 고행 정진을 말한다. 청정도론에는 13가지 두타행을 들고 있다. 
* 기운 옷을 입는 것.
* 옷을 세 벌 이상 지니지 않는 것.
* 탁발하는 것.
* 탁발하면서 어떤 집도 빠뜨리지 않는 것.
*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마치는 것.
* 바리때로만 공양(供養)하는 것.
* 간식을 일체 않는 것.
* 숲속에 사는 것.
* 나무 밑에서 사는 것.
* 노천에서 사는 것.
* 묘지에서 사는 것.
* 어떤 거처에도 만족하는 것.
* 앉아서 생활하고 눕지 않는 것(장좌불와). 

4)`선정을 숨쉰다(breathe meditation)'는 말은 표현상의 기교로, 그들의 수행이 호흡의 드나듦을 광하는 공부(出入息念)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5) 고(苦,dukkha):모든 조건지워진 현상 속에 내재된 불만족, 불충분, 불완전, 불안정성 등을 말한다. 모든 현상들은 항상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고통을 야기시킬 위험성을 갖고 있다. 또 고(苦)는 크게는 몸의 아픔과 늙고 병들고 죽는데 따르는 고통에서부터 작게는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데서 생기는 미묘한 감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형태의 불쾌함(unpleasantness)을 포괄한다. 이는 또한 우둔함, 권태, 불안, 설레임 등의 세세한 심리 상태까지도 포함한다. 고는 가장 많이 오해되고 있는 개념들 중의 하나이며, 또한 정신적 향상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6) Dhamma와 dhamma:여기서 법이란 말의 다양한 뜻에 주목해 주기 바란다. 대문자 담마(Dhamma)는 부처님이 발견하고 널리 가르친, 으ㅜ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법이고, 소문자 담마(dhamma)는 어떤 특성. 사물. 마음의 대상을 그리고 또 모든 조건지워진 혹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현상을 의미한다. 이들 담마의 의미는 때때로 중첩되기도 한다. 

7) 만(慢):mana의 한역. 영어로는 pride 또는 conceit로 번역된다. 만심. 아만. 자신이 남보다 훌륭하다고 망상하여 남에게 뽐내려 드는 방자한 마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학식이나 용모 혈통 등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 때문에 남에게 대해 우월감을 가지려 드는 마음은 교(僑)인데 반해, 만은 무조건 자기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느기는 본능적 심성이란 점이다. 따라서 교는 오히려 조복받기 쉽다고 하겠으나 만은 그 뿌리가 깊고 미묘하므로 이간의 해탈을 막는 열 가지 족쇄 중에서도 높은 수준의 마지막 다섯 가지 족쇄에 속하여 아라한과를 성취해야 비로소 완전히 소멸된다. 범어의 원래 뜻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긴 자아의식(self conception)을 가리킴. 

8) `바른 견해'는 팔정도의 제1항. 바른 견해가 확립되면 그 다음 항목들도 차례로 반드시 이루어지기 마련이란 뜻에서 팔정도 전체의 수행을 가리킴. 따라서 팔정도를 수행하면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되고 선정과 지혜가 완성된다는 뜻. 

9) 정지(正知,sampajanna):주의. 유의. 식별. 이해. 신중 등의 의미를 가졌으므로 세심하고도 정확한 살핌을 뜻한다고 일단 이해해 두자. 정념과 유사한 뜻으로 쓰여지며, 경에도 정지정념 또는 정념정지의 결합 형태로 자주 나온다. 특히 정념이 쓰인 자리에 정지정념이란 용어를 쓰게 된 데는 아비담교학적 전통의 영향이 있었지 않나 생각되며, 굳이 두 개념을 구분하자면 정지에서는 안팎 경계를 살피는 지(智)의 측면이 강조되고,정념에서는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 심화시키는 정(定)의 측면이 강조된다고 볼 수도 있겠다. 영역어는 awareness. 

10) 정념(sati):영역어는 mindfulness. 보리수 잎. 하나와 앞의 주 6번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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