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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지구별 여행자外_류시화님

이름 붙여주기



인도를 여행하다 보면 게스트하우스의 방마다 어김없이 기다리는 손님이 있다. 다름 아닌 도마뱀이다. 현지에선 ‘칩칼리’라 부르는 이 불청객들은 낮에는 밖에서 일광욕을 즐기다 저녁이면 벽의 구멍으로 들어와 천정과 벽에 달라붙어 있다. 날벌레를 잡아먹기 때문에 전구 옆에서 시끄럽게 싸우기까지 한다. 누워 있는 내 얼굴 위로 추락한 적도 있다. 크기가 작기 때문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는 말은 순 거짓이고, 노란색 파충류가 살에 닿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했다. 물론 도마뱀이 더 많이 놀랐다. 그 후 잠들면서도 녀석들의 위치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게스트하우스 주인들은 투숙객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들에 너그럽거나 무관심해서 도마뱀을 쫓아내지 않는다. 한번은 배낭 속에 웅크리고 있는 녀석을 발견한 적도 있다. 하마트면 한국까지 데려올 뻔했다. 이 침입자들과 친해지기 위해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이다. 도깨비, 도토리, 도망자, 도루묵 등이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안녕, 류시화~ 어딜 부질없이 다니시나?” 하고 묻는 도마뱀들에게 나도 인사를 한다. “루묵, 안 싸우고 잘 지냈어? 토리와 망자도?” 그럼 알아듣기라도 하듯 똑똑단추처럼 생긴 눈을 연신 굴린다.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우호적이 되고 사이 좋은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이름 붙여 주기(naming)’는 명상의 한 방법이다. 마음은 게스트하우스와 같아서 여러 감정들이 번갈아가며 찾아온다. 반가운 손님도 있지만 어떤 감정들은 불청객이다. 마음의 방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소란을 피우고, 불평하고, 문을 발로 차서 하루를 망친다. 잠들 때까지 주인의 영혼을 괴롭히는 감정들도 있다. 무의식에 난 틈새로 나타나기 때문에 쫓아내기도 어렵고 가둬 둘 수도 없다.

마음챙김 명상에서는 그것들에게 이름을 붙여 줄 것을 권한다. 슬픈 감정이 오면 “슬픔, 너구나. 어서 와.” 하고 이름을 불러 준다. 불안과 두려움에게도 “안녕, 불안. 안녕, 두려움.” 하고 말해 준다. 고통스러운 기억과 함께 분노가 일어나면 얼른 이름을 불러 준다. “안녕, 기억. 안녕 분노. 어서 와. 또 왔네.” 하고.

이 명상법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호흡과 함께 ‘불안, 불안’, ‘분노, 분노’, 혹은 ‘계획, 계획’이라고 두세 번 이름을 불러 주는 것만으로 그것들에 휩쓸리지 않고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명상 중에 신체적인 감각이 느껴질 때 마음속으로 ‘가려움, 가려움’, ‘두통, 두통’ 하고 이름을 붙여 주면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산만한 생각들과 부정적인 감정의 희생자가 되지 않는 방법이다. 고대의 샤먼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의 이름을 알면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쇼펜하우어와 니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최고의 인간’으로 묘사한 붓다는 이름을 불러 주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명상 중에 마라가 대결을 시도하며 나타나자 오랜 친구처럼 반갑게 이름을 부르며 맞이했다. 그리고 마라에게 차를 권했다.
“어서 와, 마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마라는 마음을 방해하고 고통에 빠뜨리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가리키는 말로, 산스크리트어로 ‘망상’을 의미한다. 이름을 불러 주고 다르질링 차까지 권하는 환대에 마라는 어리둥절해져서 대결 의지를 상실하고 소멸되었다. 붓다는 죽기 직전까지 전 생애에 걸쳐 수시로 마라와 마주쳤는데, 한 번도 마라를 무시하거나 때려눕힌 적이 없다. 불교 경전에는 언제나 붓다와 마라의 만남이 평화롭게 묘사되어 있다. 붓다가 깨달음을 방해하러 온 마라에게 차를 대접했다는 이야기는 매우 사실적이다. 감정과 사념이 밀려올 때 차 한 잔을 음미하는 것은 평화로운 해결 방법이다. 그런 다음 붓다는 일어나서 보리수 주위를 걸었다.

‘이름 붙여 주기’는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들에게 “어서 와.” 하고 환영하고 차를 권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깨어 있을 수 있다. 그것들과 나의 자각 사이에 공간이 생겨난다.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나는 내가 화가 나 있음을 자각한다.’, ‘나는 내 왼쪽 발바닥이 가렵다는 것을 자각한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이 일 때 자신이 나무 아래 앉아 명상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나마스테, 열등감! 타시델레, 공격성!” 하고 이름을 붙여 줘 보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이것이 고대부터 전해져 오는 ‘부처의 미소’이고 ‘마음챙김의 기술’이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나는 잠시 화가 났을 뿐이지 화가 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잠시 두려울 뿐이지 두려운 사람이 아니며, 잠시 슬플 뿐이지 슬픈 사람이 아니다. 잠시 외로울 뿐 외로운 사람이 아니다. 본래의 나는 맑고 고요한 존재이다.

마음속에 찾아오는 사념과 감정들을 적으로 여기지 말고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 명상의 기술이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는 데 도움을 주는 협력자로. 다정하게 맞이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어둠 속에 갇혀 괴물이 된다. 여인숙의 루묵이와 망자와 토리가 불을 끄면 공포의 괴물로 변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photograph_Gabriel Is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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