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아슬아슬하게 경계선을 넘을 정도로 며칠씩 밤을 지새곤 했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도 생생한 꿈에 쫓기다 눈을 뜨면 2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러고는 마냥 뜬눈으로 새벽의 미명을 맞이하는 날이 반복되었다. 그 무렵 카트만두 근교 언덕에 위치한 티베트 절 코판 곰파의 명상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잠을 못 자니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명상 중에는 말 그대로 비몽사몽 상태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기쁘고 평화로운 표정의 수행자들 틈에서 나 혼자 비틀거렸다. 그렇다고 수면제에 의지하는 싶지는 않았다.
무의미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포기하고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나거나 한국으로 돌아갈까 망설이던 어느 날, 휴식 시간에 멀리 마을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가장자리에서 명상을 지도하는 티베트 승려와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당시 나는 어느 티베트 린포체에게서 ‘롭상’이라는 이름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불렸다.
그 승려가 말했다.
"롭상, 당신의 얼굴에 내면의 갈등이 드러나는군요."
나는 불면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고, 잠을 자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오히려 잠드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과 자연스럽게 잠드는 법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잠이 부족하기 때문에 까닭 모를 불안에 세상이 태양을 등진 종려나무 잎처럼 실루엣으로 어른거렸다.
그러자 그 승려가 말했다.
"우리 수행자들도 불면증에 시달리곤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렇게 합니다. 잠을 잘 때 다른 사람들처럼 베개를 베고 눕지만, 우리는 부처님의 무릎을 베고 잔다고 상상하며 잠이 듭니다. 그렇게 하면 잡념이나 번뇌에 시달리지 않고 잠이 잘 옵니다."
그것이 그해에 내가 코판 곰파의 명상 프로그램에서 얻은 최고의 가르침이었다. 물론 그 대상이 붓다의 무릎일 수도 있고, 예수의 무릎일 수도 있고, 혹은 영적 스승이나 사랑하는 존재의 무릎일 수도 있다. 그것은 내 불면증을 해결해 주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이 더 차원 높은 존재, 더 큰 자아나 세계와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면 불안에 시달리지 않고 평온해질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자기 최면이 아니라 의식의 확장이었다.
그 후 나는 종종 발견하게 되었다. 원숭이나 고양이가 불상의 무릎에 안겨 잠들어 있는 것을. 나 자신도 그 원숭이나 고양이들처럼 잠자는 시간을 제법 즐기게 되었다. 잠드는 내 머리맡에는 만년설 히말라야가 펼쳐져 있기도 하고, 갠지스강에 떠 있는 작은 배에 내 머리가 뉘어져 있을 때도 있다. 그러면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저절로 내려놓아지고, 별들이 머리속으로 지나가는 생각과 감정들을 하나씩 꺼뜨린다.
painting_Nicholas Roeri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