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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초기불교 순례_임승택 교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순례 31-40

31. 세계의 구성

삼계·육도는 마음이 만들어 낸 세상 

세계(世界, loka)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세간(世間)으로도 옮겨지는 이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반영하여 여러 차원으로 나뉘어 설명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계란 우리에게 해석된 결과로서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란 우리 자신의 정신적인 역량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고 세계란 단순히 환상이나 허구가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계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세계에 대한 이해와 견해를 성숙시켜 왔으며 또한 그 속에서 각자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초기불교의 세계관은 고대 인도의 그것을 계승한다. 전통적인 분류에 따르면 세계는 욕망에 지배되는 세계(欲界), 순수한 물질현상의 세계(色界), 물질현상을 벗어난 세계(無色界) 등으로 구성된다. 욕망에 지배되는 세계 중에서도 지옥계․아귀계․축생계․수라계 등의 넷은 괴로움으로 점철된 세계이다. 한편 인간계․천상계 등의 둘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뒤섞인 세계로 간주된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된 3가지 차원에 속한 6가지 부류의 세계에 머문다. 이들 각각의 세계는 초기경전 도처에 산발적으로 등장하며, 부파불교에 이르러 삼계(三界)와 육도(六道, 六趣)로 정형화된다.

삼계와 육도의 세계는 얼핏 비합리적이고 신화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세계관은 인간의 심리상태를 투사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자신의 내면을 돌이켜 보도록 유도하는 교훈적 성격이 강하다. 우리는 순간순간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굴레에 묶이곤 한다. 그러한 부정적 정서와 사고의 심층부에는 ‘나’라는 관념이 굳건히 자리한다. ‘나’를 내세우고 ‘나 아닌 것’을 배척하는 가운데 우리는 탐냄과 성냄 따위에 빠져든다. 바로 이것이 삼계와 육도가 전개되는 원리이다.

탐냄과 성냄에 휘둘릴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메말라가고 비참해진다. 바로 그 극한에 지옥계가 자리한다. 지옥계가 만들어지는 조건은 잔인함과 살생이다. 여기에 속한 이들은 분노와 공포에 지배되어 모진 괴로움에 시달린다. 축생계는 어리석음과 식욕 따위를 생성의 조건으로 한다. 여기에 속한 이들은 본능적 욕구에 압도되어 감각적 쾌락만을 추구한다. 아귀계에 속한 이들은 끝없는 공허감에 사로잡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이 세계는 집착과 인색을 조건으로 한다. 수라계에 속한 이들은 자신에게 거슬리는 일체의 장애물을 파괴하려는 공격적 본성에 지배된다. 이 세계는 성냄을 조건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인간계에서는 타인과의 갈등이 부각되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성향이 문제시된다. 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살생이라든가 도둑질 따위를 하지 않는 계율에 대한 인식이 요구된다. 천상계에 속한 이들은 감각적·심미적 쾌락에 경도되어 오랜 시간 즐거움만을 탐닉한다. 이 세계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윤리적 덕목의 준수와 함께 믿음과 보시의 실천이 필요하다. 특히 천상계 중에서도 욕망의 굴레를 벗어난 이들이 머무는 몇몇 세계는 명상의 숙련 정도에 따라 현재의 삶에서 체험이 가능하다. 순수한 물질현상의 세계(色界)와 물질현상을 벗어난 세계(無色界)에 속한 천신(天神)들의 세계가 그것이다.

삼계와 육도는 누군가가 그렇게 태어나도록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상태에 따라 자명한 이치로서 드러나는 세계이다. 초기불교에서 이 가르침이 지향했던 원래의 의도는 스스로를 잘 다스려 갖가지 존재의 속박에 매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재의 삶에서 온갖 번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자는 데에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아난다(Ānanda)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봄의 ‘세계에서’ 최고의 ‘세계는 지금 이 몸으로’ 보면서 번뇌가 다할 때의 ‘세계이고’, 들음의 ‘세계에서’ 최고의 ‘세계는 지금 이 몸으로’ 들으면서 번뇌가 다할 때의 ‘세계이며’, 즐거움의 ‘세계에서’ 최고의 ‘세계는 지금 이 몸으로’ 즐거움을 누리면서 번뇌가 다할 때의 ‘세계이다’.”



32. 출세간 

출세간 참된 자유는 탐진치 사라진 경지 


출세간(lokuttara)이란 무엇인가. 

일체의 세간적(lokiya) 존재 양태를 벗어난 경지를 가리킨다. 범부 중생들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갇혀 자신들만의 특정한 존재 방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계 등이 그것이다. 육도윤회(六道輪廻)란 이러한 6가지 굴레에 얽매여 맴도는 것을 말한다. 지옥계에 속한 이들은 분노와 공포에 붙잡힌 채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며, 천상계에 속한 이들은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심미적 쾌락에 심취하여 자신을 보존해 나간다.

출세간이란 그러한 일체의 상태로부터 벗어난 열반(nibbāna)을 의미한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세계의 발생과 유지에는 ‘나’라는 관념이 전제된다. 육신(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따위의 경험적 요인(五蘊)에 대해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또한 그렇게 이루어진 ‘나’를 통해 주변의 일체에 대한 관념을 형성시켜 이루어 낸 것이 곧 세계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세계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는 여섯(의 감각영역) 안에서 생겨나며 여섯(의 감각영역) 안에서 알려진다. 실로 세계는 여섯(의 감각영역) 안에서 발생하여 여섯(의 감각영역) 안에서 사라진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죽고 난 이후 새롭게 태어날 세계에 대해 가르친다. 절대자(神)를 믿는 종교에서는 자비로운 신의 은총에 의해 죽고 난 이후의 세계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신적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무신론적 종교들에서는 스스로 지은 행위에 의해 내세가 선택된다고 본다. 그들 모두는 신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교리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보다 행복하고 즐거운 내세를 희망한다. 더불어 그러한 희망 속에서 자신을 잘 다스려 바람직한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초기불교 또한 천상계라는 행복한 세상에 대해 가르친다. 그리하여 도덕적·정신적 가치를 신뢰하라고 이른다. 또한 살생하고 훔치고 거짓말하는 등의 해로운 생활을 멀리하고, 재화에 대한 애착과 망상에서 벗어나 관용과 보시를 행할 것을 권장한다. 물론 이러한 실천적 행위들이 지금 당장 어떤 특정한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우리는 정신적인 가치와 내면의 풍요로움에 눈을 뜨게 될 수 있다. 설령 내세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일관할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이미 행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여기에서 그친다면 다른 수많은 종교와 특별한 차이가 없을 것이다. 붓다는 천상계에 관한 가르침을 자아의 장벽을 넘어서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하였다. 도덕적·정신적 가치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우리의 시야를 유한한 경험세계 너머로까지 확장시켜 준다. 계율의 준수와 보시의 실천은 자신의 이익만을 따지는 옹졸함을 벗어나 더불어 살아가는 넉넉한 마음을 일깨운다. 붓다는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궁극의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면적인 여건을 조성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출세간의 참된 자유를 제시하였다.

출세간이란 초기불교가 지향하는 최종 목적에 해당한다. 이것을 편안하고 즐거운 세상으로 알려진 천상계 따위와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천상계란 결국 감각적·심미적 경험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출세간에 대한 묘사는 경험세계의 근거가 되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사라진 경지로 한정되어야 한다. 출세간은 부정적인 정서와 사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들에 대해 어떠한 상상이나 추측마저 거부한다.

이와 관련하여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출세간에 이른 자에 대해서는 존재한다거나 혹은 온전하다는 따위를’ 말할 만한 ‘근거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법이 완전히 끊어졌고 논쟁의 길 또한 완전히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다.”



33. 탐냄

빠지지 않되 건전한 욕구는 즐겨야


탐냄이란 무엇인가. 

무언가를 가지거나 차지하려는 마음을 말한다. 이것은 즐겁거나 매혹적인 대상과의 접촉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주변의 끌리는 현상들을 마주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탐냄에 물든다. 실제로 탐냄의 원어는 빨리어(Pāli)로 라가(rāga)인데 이것은 ‘물들다’라는 뜻으로부터 유래하였다. 한편 라가와 동의어인 로바(lobha)는 그렇게 해서 ‘몹시 탐내는 상태’를 가리킨다. 탐냄이란 마치 끈끈이처럼 좋아하는 대상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는 심리이다.

탐냄은 성냄(dosa) 및 어리석음(moha)과 더불어 깨달음의 장애를 이루는 근본 번뇌가 된다. 바로 이들에 얽매이는 까닭에 우리는 스스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는 윤회의 바퀴 안을 맴돌게 된다.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내면에서 자라나 스스로를 옭아매는 족쇄가 된다. 그리하여 본능에 압도된 동물적 삶으로 내몰기도 하고, 분노와 공포의 도가니에 빠뜨리기도 하며,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쾌락에 취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들 셋은 공히 중생들을 괴롭히는 악의 근원이 되는 까닭에 ‘3가지 독(三毒)’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일컬어지기도 한다.

탐냄의 해악이 어떠한가에 관한 좋은 예화가 있다. 옛날에는 원숭이를 잡을 때 나무통 안에 끈끈한 송진을 담아 두었다고 한다. 그러면 호기심 많은 원숭이가 거기에 한쪽 손을 넣었다가 달라붙어 빼내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아무리 애써도 그 손이 빠지지 않으니까 다른 한 손을 또 넣게 된다. 그래도 안 나오면 발까지 넣는다. 마지막으로는 주둥이까지 넣어 옴짝달싹 못하게 되고 만다. 이 이야기는 탐냄이라는 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옭죄게 되는가를 잘 묘사한다. 탐냄이란 처음에는 작게 시작되지만 점점 커져 우리의 온 존재를 삼키고 만다.

탐냄은 마음에 드는 대상과의 접촉으로부터 발생한다. 따라서 외부 대상과의 접촉마저 피해야 하는가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문고리를 걸어두고 아예 문밖을 나서지 않는다면 괴로움의 씨앗이 되는 모든 유혹을 미리 차단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외부 대상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회피는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코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우리는 외부적으로 접하거나 내부적으로 느끼는 현상들의 발생과 소멸에 대해 무력하다. 누구도 생(生)·노(老)·병(病)·사(死)를 멋대로 조작하거나 피해 나갈 수 없다.

탐냄의 원인이 되는 안팎의 현상은 억지로 제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해진다. 그러한 현상들을 접하되 물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붙잡을 수도 없고 붙잡아서도 안 되는 것이라면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둔 채 상대해야 한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은 외부 대상을 거부하거나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일에 초점을 모은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은 가감 없이 인정하도록 하되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친다. 자연적인 현상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탐냄이라는 정서는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탐냄을 버리라는 가르침은 모든 욕구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의미가 아님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적당한 수준의 욕구(chanda)는 필요하다. 건전한 욕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로움으로 이끌 수 있고, 또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는 탐냄과 욕구를 엄격히 구분한다. 바른 욕구는 올바른 실천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지혜와 해탈에 이르게 하는 추진력이 될 수 있다. 탐냄을 야기하는 외부 대상과의 접촉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바르게 살아가려는 욕구는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이 있다. 즐기되 물들지 않을 수 있다면 굳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34. 성 냄

자신만 옳다는 잘못된 견해서 비롯


성냄이란 무엇인가. 

노여워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마음에 들지 않은 대상과의 접촉에서 발생한다. 안팎의 거슬리는 현상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가운데 미움과 노여움의 마음이 싹튼다. 거슬리는 현상에 대해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강할수록 그것의 지속에서 오는 내면의 동요는 더욱 크다. 그리하여 더 이상 참기 힘든 상황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표출되는 감정이 곧 성냄이다. 

 "저리 가! 지긋지긋해! 더 이상 견딜 수 없단 말이야!" 이러한 방식으로 성냄은 내면의 평온을 무너뜨리고 자신을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긴다. 

성냄은 빨리어Pali어로 도사dosa 라고 하며 '미워하다'라는 뜻으로부터 유래하였다. 한편 이것과 동의어로 빠띠그하patigha 라는 단어도 사용되는데, 이것은 '대립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도사라는 용어는 두들겨 맞은 독사에 비유되곤 한다. 바짝 약이 올라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서 노려보는 독사와 같은 마음이 곧 도사이다. 그리고 빠띠그하는 이러한 대면의 상태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냄이란 기회를 포착한 원수와 같이 기민하게 움직인다. 또한 성냄의 독은 물린 상처를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간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원한과 증오의 괴로움을 겪게 된다.​

성냄은 탐냄raga 및 어리석음moha과 더불어 깨달음의 장애를 이루는 근본 번뇌로 일컬어진다.

"거치적거리는 이 모든 것이 씨도 안 남기고 모조리 파괴되기를!"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악한 마음을 지님으로 인해 행복하지 않은 곳 혹은 지옥에 태어나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심보를 지닌 채 살아간다면 굳이 다음 세상을 기약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미 그 자체로서 지극한 불행이 아니겠는가.

성냄의 이면에는 자신만이 옳고 타인은 그릇되었다는 잘못된 견해가 도사린다. "그대는 그릇된 길을 가는 자이고 나는 바른 길을 가는 자이다. 나의 주장은 옳고 그대의 주장은 그릇되었다." 이러한 견해의 문제가 개입되면서 성냄은 그 파괴력을 더해 간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우리의 행동은 더욱 과감해지고 또한 거칠어진다. 바로 그러한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세계가 수라계修羅界이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아수라의 무리들은 스스로에 대해 항상 옳다고 확신한다. 그러한 신념은 그들에게 거슬리는 일체의 대상을 향해 스스럼없는 파괴적 공격성을 갖게 한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은 끝없는 불안과 긴장을 조장하며 아만과 독선의 수렁에 빠뜨린다. 성냄이란 바로 그러한 상태에 빠져 타인과 주변의 여건을 수용하지 못해 발생하는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너그러운 마음을 키워야 한다. 살다보면 누구든 실수를 범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에도 허점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과 타인 모두에 대해 너그러워지는 연습을 통해 성냄의 칼날을 무디어지게 할 수 있다. 또한 성냄의 순간에 대한 명확한 알아차림은 막무가내로 분출되는 감정의 회오리를 누구러뜨리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성냄의 양상을 다양하게 설명하며, 무작정 제거해야만 하는 것으로는 말하지 않는다.바위에 새기는 것과 같은 화kodha, 땅에 새기는 것과 같은 화, 물에 새기는 화에 대한 언급이 그것이다. 바위에 새긴 것과 같은 화는 오래간다. 그것은 마치  바위에 새긴 각문이 세월의 흐름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과 같다. 땅에 새긴 것과 같은 화는 땅의 자취가 바람이나 물에 지워지는 것처럼 오래가지 않는다. 한편 물에 새기는 것과 같은 화는 물위의 자취가 즉시 없어지는 것과 같이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굳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혹은 선의의 화냄이 방편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라면,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가르침일 듯하다. 



35. 어리석음

어리석음의 반성 통해 괴로움 극복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 

슬기롭지 못한 둔한 마음을 가리킨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서 아둔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어리석음으로 인해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집착하고 부정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부정하려 든다. 그 결과 꿀 속에 빠져드는 파리처럼 혹은 불 속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탐냄과 성냄의 덫에 걸리고 만다. 탐냄과 성냄이 발생하는 경우 거기에는 반드시 어리석음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어리석음은 '3가지 독(삼독三毒)' 가운데서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띠붓따까'에서는 어리석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어리석음은 불행을 만든다. 어리석음은 마음을 교란시킨다. 사람들은 이것이 안으로부터 발생하는 두려움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리석음에 빠진 이는 이로움을 알지 못한다. 어리석음에 빠진 이는 법을 보지 못한다. 어리석음에 지배된 사람에게는 어두움과 암흑만이 있게 된다. 어리석음을 제거한 사람은 어리석음에 빠지게 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난다.그러한 사람은 떠오르는 태양이 암흑을 제거하듯이 모든 어리석음을 제거한다."

어리석음이란 빨리어Pali로 모하moha라고 한다. 이것은 '멍한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어리석음의 원래 용도는 정서적 ·감정적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주변의 현상에 대해 무감각하기 십상이다. 심지어는 스스로의 행동이나 처신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아차리니 못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분명히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어리석음은 정서적 차원에서 출발하여 인지적 측면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실제로 이것은 무지annana와 동일시되며, 잘못된 견해micchaditthi 혹은 무명avijja과 혼용되기도 한다. 경전에서는 잘못된 견해로서의 어리석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보시의 공덕도 없고, 공양의 공덕도 없고, 제사의 공덕도 없고, 선행이나 악행의 결과도 없고,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고, 윤회고 없고, 뛰어난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말하는 훌륭하고 바르게 수행하는 사문이나 바라문도 이 세상에 없다고 말한다"잘못된 견해는 단순히 무감각한 상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며 바른 가치를 저버리게 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패륜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드는 능동적인 힘을 지닌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편 무명과 동일시되는 어리석음은 사성제四聖諦에 어두운 경우를 말한다.

"괴로움에 대해 무지하고, 괴로움의 원인에 대해 무지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무지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길에 대해 무지하고, 과거에 대해 무지하고, 미래에 대해 무지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해 무지하고, 연기緣起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한 것, 이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우리를 괴로움의 현실에 머물게 하는 근본적 원인이 된다. 붓다는 이처럼 치명적인 덫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괴로움을 인지하니 못하는 이에게 괴로움 제거를 위한 처방은 무용지물일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을 인식하는 이는 언젠가는 그것의 소멸을 향해 나서게 될 것이다. 따라서 괴로움의 극복은 스스로의 현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이켜 반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사슬로부터 빠져 나가는 단초를 마련하게 된다. 초기불교의 궁극 목적으로 이야기되는 열반nibbana 또한 이것의 연장선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리불Sariputta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벗이여, 탐냄의 소멸과 성냄의 소멸과 어리석음의 소멸 바로 그것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36. 해탈

탐진치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의 성취


해탈解脫이란 무엇인가.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무언가에 구속된 상태로부터 풀려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부정적인 정서와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탐냄·성냄·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들이 엮어내는 윤회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해탈nibbana이란 궁극의 목표인 열반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감각적 욕망이 빚어내는 번뇌를 가라앉히고, 존재로 인해 야기되는 번뇌를 소멸시키고, 무지로 인해 발생한 번뇌들로부터 벗어난 경지가 곧 초기불교에서 지향하는 해탈의 이상이다.

  해탈에 해당하는 빨리어Pali 용어로서 위목카vimokkha와 위무띠vimutti 가 있다.​ 위목카는 세속을 초월한 지고한 경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수행이 진척되어 나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최종적인 지혜를 얻지는 못했지만 명상에 몰입하여 그때그때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경우가 있다. 혹은 여전히 번뇌가 남아 있지만 수행이 깊어감에 따라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폭넓게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 위목카이다. 이것의 용례로는 세간적인 해탈(世間解脫,lokiya-vimokkha)이라든가 명상의 깊이에 따른 여덟단계의 해탈 attha-vimokkha 따위가 있다.

위목카는 해탈이라는 것이 고원한 경지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우리는 시시각각으로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낡은 사고와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과 주변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혹은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싫어하는 이미지들로부터, 혹은 내면에 간직해 둔 바람이나 욕구들로부터,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혹은 밖으로부터, 혹은 안팎 모두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위목카라는 표현은 이러한 모든 경우에 적절히 사용될 수 있다. 위목카는 현실적인 삶의 지평에서 점진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그러한 해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위무띠는 이상의 과정을 통해 얻는 결과로서의 해탈이라고 할 수 있다. 위무띠는 초기불교 경전에서 더욱 빈번한 용례를 보이며, 보통 마음의 해탈(심해탈深解脫, cetovimutti), 지혜의 해탈(혜해탈慧解脫pannavimutti), 양자를 구비한 해탈(양분해탈兩分解脫, ubhatobhagavimuti) 등으로 나뉜다.   

마음의 해탈이란 내면을 고요히 하는 것을 통해 탐냄 따위의 부정적 정서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가리킨다. 지혜의 해탈이란 지혜로써 온갖 잘못된 견해와 무지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양자를 구비한 해탈이란 부정적 정서로부터 벗어나는 동시에 지혜를 갖추는 방식으로 둘 다를 완비한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세 가지 위무띠 가운데 지혜에 의한 해탈과 양자를 구비한 해탈은 곧 아라한의 경지를 의미한다.

예컨대 아라한이라는 성위聖位에 도달한 이가 있다면 이들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의 해탈을 성취한 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해탈은 위목카의 사례에서 언급했듯이 일시적으로 얻어진 평온의 상태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마음의 해탈만으로는 궁극의 자유에 도달하지 못하며, 진리를 꿰뚫는 지혜가 최종의 목표인 열반의 경지를 이르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불교 수행의 관건은 결국 지혜의 완성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탈을 성취하는 방법에 관련하여, 이것이 이루어지는 다섯 장소 오해탈처五解脫​​處)에 대한 언급이 있다. 첫째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듣는 것, 둘째 다른 사람을 위해 스스로 배운 내용을 가르치는 것, 셋째 배우거나 들은 법을 그대로 익히는 것, 넷째 배우​거나 들은 법을 깊이 사유하는 것, 다섯째 적절한 명상의 대상을 찾아 마음을 모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언급대로라면 해탈이 이루어지는 여건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하다고 할 수 있다. 해탈의 여정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될 수 있는 점진적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37. 깨달음

  "깨달음은 전망대 오르듯 위로 갈수록 잘 보여"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모르던 사실을 궁리 끝에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수행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일상에서도 자주 경험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누가 가르쳐 주어도 피상적으로만 와 닿을 뿐이고 고민을 거듭해 보지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다가 때가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무릎을 치면서 '아! 그렇구나'라고 깨닫게 된다. 깨달음과 더불어 우리는 기존의 낡은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깨달음의 내용이 어떻든 깨닫고 난 연후에는 인식과 실천에 변화가 따라온다. 예컨대 우리는 불필요한 오해와 편견으로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있다. 미워하던 그 사람이 오히려 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 기존의 편견과 거부감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자신이 저질렀던 그간의 무례에 고개를 숙이며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전혀 다른 눈길로 대하게 된다. 이것은 인간관계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특히 삶의 근원적 문제에 관한 깨달음은 우리의 인생을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 수 있다. 깨달음의 빨리pali 원어는 보디bodhi이다. '깨달은 분'이라는 의미의 붓다Buddha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였으며, 불교buddhism라는 종교의 명칭 또한 여기에 근거를 둔다.

"붓다라는 이름은 어머니가 지어 준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지어 준 것도 아니다. 형제가 지어 준 것도 아니고 자매가 지어 준 것도 아니다. 친구가 지어 준 것도 아니고 친척이 지어 준 것도 아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 지어 준 것도 아니고 하늘의 신이 지어 준 것도 아니다. 이것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해탈을 이루어 일체를 아는 지혜와 함께 얻은 진실한 명칭이다."

 그렇다면 붓다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을까.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붓다가 될 수 있었을까. 초기불교 경전에는 깨달음에 대해 각기 다르게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 전해진다. 그러나 '상적유경'에 제시되듯이 붓다의 깨달음은 사성제四聖諦로 집약할 수 있다. 즉 모든 인간이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四聖諦), 그것의 원인은 내면의 탐욕과 집착이라는 것(집성제集聖諦), 그러한 괴로움을 극복한 경지가 있다는  것(멸성제滅聖諦), 그것을 이루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도성제道聖諦)을 깨달았던 것이다. 붓다는 바로 이것을 깨달아 실현하고서 주변에 알리는 것으로 평생을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사성제를 내용으로 하는 깨달음의 발현 양상은 어떠한가. 다음의 경구는 이 문제에 관한 초기불교의 입장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anna의 성취가 단번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반대로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실천하고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완전한 지혜의 성취가 있게 된다." 이렇듯 붓다는 점차적인 닦음에 의해 점진적으로 ​무르익는 깨달음을 가르쳤다. 초기불교에서 가르치는 깨달음이란 높은 전망대에 올라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발을 내딛는 위치가 높아지면 그만큼 보이는 범위가 더 넓어지는 것과 같다.

  '삿짜 상윳따'에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와 견해가 청정해진 연후에야 비로소 신과 인간들에 대해 위없는 바른 깨달음​anuttaram sammsambodhi을 얻었다고 선언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된다. 나아가 과거세·미래세·현세를 막론하고 어떠한 사문이나 바라문이든지 깨달은 내용을 그대로 말한다면 곧 사성제이니 바로 이것을 힘써 닦으라는 가르침이 반복된다.  사성제는 괴로움의 현실을 인식시키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점진적인 자각의 여정을 밝힌다. 따라서 이것은 '괴로움을 극복하고 즐거움을 얻는 과정(이고득락離苦得樂)'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존재 이유이다.



38. 보시布施에 대한 가르침

  삼독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가는 첫 단계


보시dana란 무엇인가. 

베푸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거나 승가에 바치는 행위를 가리킨다. 보시는 남을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기쁘게 한다. 베풀 때 느끼는 즐거움은 그 자체로서 보시의 큰 공덕이 될 수 있다.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 굶주림과 가난의 공포에 압도당하지 않으며 항상 주변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발휘한다. 이것은 보시로써 스스로를 길들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또한 보시에는 좋은 결과가 뒤따른다. 이것은 현세에서 풍족한 삶으로 이끌어주고 내세의 행복을 보장한다.

  붓다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가르침을 펼쳤다. 보시에 관한 가르침(시론施論), 계율에 관한 가르침(계론戒論),천상세계에 관한 가르침(생천론生天論), 사성제에 관한 가르침(四聖諦)이 그것이다. 붓다는 처음 만난 사람을 지도할 때 이러한 순서를 지켰다. 우리는 보시를 통해 인색과 탐욕에서 벗어나게 된다. 보다 넓은 눈으로 자신과 주변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붓다는 이러한 내면의 조건을 갖추어 졌을 때 비로소 더 나은 수승한 가라침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보시는 붓다의 가르침을 실현하기 위해 닦아야 할 첫 번째 덕목이 된다. 깨달음의 여정은 보시의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인도의 '우빠니샤드' 경전에서는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죽음의 신(사신死神)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전한다. "재물에 눈이 어두운 미혹한 이에게는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세상이 있을 뿐 다른 세상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나의 지배 아래에 떨어질 것이다." 욕심에 빠진 사람은 욕심 너머에 자리하는 평안의 경지를 알지 못한다. 스스로 재물의 노예가 되어 끊임없이 주변을 의심하고 경계하면서 불안에 빠진다. 인색한 사람에게는 가는 곳마다 굶주림과 목마름과 죽음의 공포가 기다린다.

  한편 붓다는 보시를 통해 죽음마저 넘어설 수 있다고 가르친다. "험한 길을 함께 가는 좋은 벗처럼 조금 있어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죽는자들 가운데서 죽지 않나니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 이렇듯 보시의 공덕은 유한한 삶을 무한한 지평으로 확장시켜 줄 수 있다. 보시로 얻어진 넉넉한 마음은 다른 사람의 이익과 기쁨마저 자신의 것으로 누리게 한다. "베푸는 것은 좋은 것이니 조금 있어도 베푸는 것이 좋고 또한 믿음으로 베푸는 것이 좋다. 보시는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비유할 수 있으니 조금 있어도 믿음으로 보시하면 참으로 다른 사람의 이익에도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보시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음식을 베푸는 사람은 힘을 주는 사람이고, 의복을 베푸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주는  사람이고, 탈 것을 베푸는 사람은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고, 등불을 베푸는 사람은 밝은 눈을 주는 사람이고, 살 집을 베푸는 사람은 모든 것을 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르침을 베푸는 사람은 죽지 않음(불사不死)을 주는 사람이다."

보시란 단순히 재물을 나누어주는 행위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 처한 여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베풀 수 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곧 보시이다. 그 중에서 최고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베푸는 자와 받는 자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목에 대해 언급한다. ​베푸는 자는 보시하기 전에 마음이 즐겁고, 보시할 때 마음이 깨끗하고, 보시한 뒤에도 마음이 흐뭇해야 한다. 한편 받는 자는 탐냄을 여의었거나 탐냄을 다스리는 실천을 하며, 성냄을 여의었거나 성냄을 다스리는 실천을 하며, 어리석을 여의었거나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실천을 해야 한다.

  이러한 덕목이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보시는 자신과 남 모두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보시는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의 마음을 정화하여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게 한다.



39. 계율에 대한 가르침

타인의 보호와 자신의 평화위한 실천지침


계율이란 무엇인가.

붓다의 제자로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을 가리킨다. 계율이라는 용어는 빨리어Pali 계(戒,sila)와 율(律,Vinaya)을 함께 일컫는 복합어이다. 이들은 원래 별개의 쓰임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계란 스스로 맹세하여 지키는 규칙을 의미하며, 율이란 승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규약이다. 따라서 계는 자율적인 반면에 율은 타율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이들은 별개일 수 없다. 계와 율 모두는 각자의 여건 속에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따라야 할 실천적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가르침을 펼쳤다. 그는 먼저 보시에 관한 가르침(시론施論)을 펼쳤다. 그리하여 인색함과 옹졸함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 졌을 때 비로소 계율에 관한 가르침(계론戒論)으로 넘어갔다. 이때의 계율이란 일상을 살아가면서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항목들로 구성되며, 각자 스스로 맹세하여 따르겠다는 결의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결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 그 사람의 인격을 다듬고 고양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계율은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한 방책이 된다.

재가자가 지녀야 할 계율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첫째, 생명을 빼앗는 행위로부터 물러나는 배움의 항목을 준수하겠습니다. 

  둘째,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행위로부터 물러나는 배움의 항목을 준수하겠습니다.

  셋째, 청정하지 못한 성적 행위로부터 물러나는 배움의 항목을 준수하겠습니다.

  넷째, 거짓된 말로부터 물러나는 배움의 항목을 준수하겠습니다.

  다섯째, 곡주나 과일주 등에 취한 방일한 생활로부터 물러나는 배움의 항목을 준수하겠습니다."

  붓다는 이 오계五戒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선정禪定을 이룰 수 없고 또한 지혜도 계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계율은 보시의 토대 위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법이 된다. ​특히 맨 처음 수행에 입문한 사람에게 계율의 준수는 그 자체로서 다른 사람을 위한 보시가 될 수 있다. 계율을 지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협하거나 어려움에 빠뜨리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과 타인 모두를 보호하여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붓다는 계율의 준수야말로 두려움과 증오를 가라앉힌다고 말한다. 보시와 계율의 실천은 최소한 인간 이하의 비천한 태생으로 윤회하는 것을 막아 줄 수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계율의 준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노력이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 고 금하지는 않았지만, 만일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 그리고 이것을 허락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을 범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이것을 해서는 안 된다' 고 금하지는 않았지만, 만일 이것을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 때, 그리고 이것을 하는 것을 금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을 행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계율 이전에 바르게 살아가려는 태도와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율을 서약하는 데는 일정한 형식이 요구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불佛·법法·승僧의 삼보에 대한 귀의문을 낭송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부처님을 귀의처로 삼겠습니다.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겠습니다. ​승가를 귀의처로 삼겠습니다."

이것을 세 번 암송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붓다의 제자임을 확인한다. 이러한 절차에 따라 지니게 되는 계율은 이전에 지은 악업을 파괴하고 인격을 정화하는 힘을 지니며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 지속적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이후 계율 항목은 교단이 커지고 조직화됨에 따라 더욱 세분화된다. 

재가자가 특정 기간에 지키는 8가지 계율(팔재계八齋戒), 비구 와 비구니 승단을 위한 구족계具足戒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모든 계율 항목은 최초의 오계와 정신적인 뿌리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40. 천상세계에 관한 가르침

보시·지계 실천 누적으로 윤회 끊어야


천상세계에 관한 가르침(생천론生天論)이란 무엇인가. 

보시와 계율의 실천을 많이 쌓으면 죽고 난 이후 즐거운 천상세계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말한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깨달음을 성취한 아라한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존재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 어떤 이들은 널리 보시를 베풀고 스스로 지계를 갖춘다. 그러한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가 데려다 놓은 것처럼 천상세계에 태어난다고 한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인색한 마음으로 베풀 줄도 모르고 방탕한 생활만 일삼는다. 그러한 사람들은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데려다 놓은 것처럼 괴로움이 가득한 지옥에 태어난다고 한다.

'자나와사바경'에서 붓다는 나디까nadika라는 마을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전생轉生에 관해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컨대 50명이 넘는 나디까 사람들이 천상에 태어나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고, 90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번 더 이 세상에 태어나 일체의 괴로움을 종식하게 될 것이며,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최소한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갖추어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언급을 까시Kasi, 왓지Vajji, 쩨띠와방사Cetivansa, 꾸루Kuru의 사람들에게도 유사한 방식으로 되풀이된다. 이렇듯 초기불교 경전에 따르면 내세는 실재한다. 내세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은 일단 분량 면에서 방대할 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이고 생생한 방식으로 기술된다.

 이것은 결코 가설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며 깨달은 이의 통찰을 통해 드러나는 현실의 이야기다. 삼계三界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난 존재가 아닌 한, 아라한이라는 깨달음의 경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한, 죽음 이후에 대해 일말의 의심과 두려움이 남아 있는 한, 그러한 사람들에게 내세는 엄연한 사실로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실 내세는 죽고 난 이후의 세계이다. 따라서 이것의 존재 여부를 현재의 삶에서 증명해 보일 수 없다. 내세란 전적으로 믿음의 영역에 속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현세와 내세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 그러나 내세에 대한 올바른 사고는 현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죽고 난 이후를 대비하는 사람은 현재를 함부로 살지 않는다.​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안달하지 않으며 보다 넓은 눈으로 자신과 주변을 헤아린다. 이러한 사람에게 내세는 결코 가설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며 현실의 삶 자체가 된다. 붓다는 현세와 내세를  잘 살기 위한 가르침을 따로 전한다. 그리하여 우선 현세를 행복하게 잘 살려면 다음의 넷을 갖추라고 이른다.

 첫째, 직업을 가지고서 근면하게 일한다.

 둘째, 땀 흘려 벌어들인 소득을 정당하게 관리하고 보존한다.

 셋째, 바른 길로 인도해 줄 좋은 친구를 사귄다.

 넷째, 번뇌를 없애고 열반으로 이끌어주는 지혜를 닦는다.

 현세를 위한 처음의 넷은 그야말로 현세의 행복을 위해 당연히 요구되는 덕목들이다. 반면에 내세를 위한 넷은 그 결과가 당장 눈앞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내면을 맑히고 넉넉한 마음을 가꿀 수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실천의 누적을 통해 천상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은 붓다의 통찰로써 보장된 내용이다.  붓다는 이들의 실천을 통해 정화된 마음을 갖춘 사람들에 한해 사성제四聖諦라는 고귀한 진리의 가르침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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