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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초기불교 순례_임승택 교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순례 21-30


21. 제식주의의 업業

 내면 일깨우면 삶 변화시킬 수 있어

  제식주의에서 업을 어떻게 보는가. 초기불교가 출현하기 이전 고대 인도사회를 지배했던 바라문교에서는 제사의 실천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바라문교에서는 격식에 따라 잘 치른 제사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합당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르쳤다. 제사는 인간의 소망을 이루어주는 효력을 지닌 것으로 믿어졌다. 세습적인 제관이었던 바라문교의 사제들은 엄격한 절차의 제사의례를 주관하였다. 그들은 제사의 집행을 통해 인간의 길흉화복을 조절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제사는 원래 신에 대한 공경과 숭배에서 기원하였다. 신의 은총을 통해 소원을 성취하려는 의도가 제사라는 형식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제사 관념이 정교해지기 이전에 신봉되었던 신들은 제사의 형식에 묶인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인간에게 자비와 은총을 베풀 수 있었다. 따라서 설령 훌륭한 제사를 지냈다고 하더라도 제사 자체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은 언제나 제사의례 너머에 머무는 초월적 존재였다. 신은 인간 위에 군림하였고, 인간으로서는 그의 능력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그러나 제사의 의례까 전문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신 관념에 변화가 발생한다. 정교한 절차에 따라 바르게 치러진 제사는 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생각이 우세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백 년의 시간이 흘러가면서 신은 제사의례에 종속되고 만다. 이제 신이라는 존재는 제사의 효력을 보존하였다가 미래의 어느 때에 그 영향력을 전달해주는 비인격적·중성적 원리로 해석되기에 이른다. 세계의 운행에는 초월적인 인격신이 개입될 여지가 없게 되었으며, 제사라는 행위에 의한 결과만이 법칙적으로 뒤따를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인도철학에서 나타난 최초의 업의 관념이다.

 

  이러한 제식주의의 업 관념은 초기불교가 출현하기 직전에 등장했던 '우빠니샤드' 문헌에 의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다듬어진다. 당시의 진보적이 지식인들은 제사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육체적·정신적 행위가 우주의 운행에 관여된다고 보았다. 우주적 자아인 브라흐만과 개체적 자아인 아뜨만이 동일하다는 범아일여의 교설이 그 근거가 되었다. 범아일여의 논리에 따르면 개인의 행위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반영하며 또한 그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굳이 제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행위는 자연의 운행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빠니샤드'의 가르침은 제사만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행위가 미래의 삶을 규정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예컨대 "이 세상에서 좋은 행우를 행한 자들은 바라문이나 끄샤트리야나 바이샤의 모태와 같은 좋은 모태에 들어갈 것이다"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과거의 행위는 미래의 태생과 가문을 결정한다고 믿어졌다. 이와 같이 '우빠니샤드'에 이르면 업 관념은 더욱 분명해졌고, 또한 윤회사상과도 밀접히 결부되었다.  바로 이것이 보다 정교한 형태로 나타난 바라문교의 두 번째 업 관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업 관념들은 행위의 형식적 측면에 치우치는 약점을 보인다. 형식주의적 업 해석에 따르면 과거에 지은 업은 현재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의 삶 전체를 규정한다. 이것은 제사를 통한 것이든 제사라는 형식을 벗어난 일상의 행위이든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과거 업의 결과를 수용하는 것뿐이다. 이점은 고대 바라문교와 그 전통을 계승하는 힌두교가 카스트제도에 의한 

  "나는 의도(사思, cetan-a)를 업이라고 말하나니, 의도하고 난 연후에 신체와 언어와 마음에 의한 업을 짓는다."

 

  붓다는 우리가 지닌 내면의 의도를 일깨움으로써 우리의 삶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분명히 하였다.

 

 

22. 자이나교의 업業

  자이나교에서는 업을 어떻게 보는가. 자이나교는 초기불교와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개혁적 종교이다. 초기불교와 유사한 가르침을 펼쳤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자이나교는 초기불교와 함께 바라문교의 권위주의에 맞섰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이나교는 업을 미세한 물질입자의 일종으로 이해했다. 인간이 행한 모든 행위는 미세한 물질입자의 형태로 남아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금욕과 고행을 통해 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자이나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순수·청정한 영혼j-iva을 지닌다고 보았다. 그들에 따르면 영혼이란 전지全知하며 과거·현재·미래에 대해 막힘 없는 앎을 지닌다. 영혼은 스스로 지닌 완전한 능력으로 감관이라든가 추리 따위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사물의 참된 모습을 꿰뚫어 알 수 있다. 자이나교에서는 이러한 영환 본래 상태를 회복하는 데에 수행의 목적을 두었고, 바로 그것을 위해 엄격한 고행의 실천을 권장하였다. 업이란 영혼의 전지한 능력을 가리는 불순물과 같으며, 고행이란 영혼에 달라붙은 업의 불순물을 닦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자이나교에 따르면 업을 구성하는 물질입자는 신체身와 언어口와 마음意에 의한 행위를 생성된다. 그들은 바로 이것이 영혼과 뒤엉킴으로써 '업에 의한 육신業身'을 형성시킨다고 보았다. 그 결과 순수·청정한 영혼이 고통스러운 현상계에 묶이게 되며 윤회의 속박 아래에 놓이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자이나교의 업 해석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인간 존재가 업의 속박에 무력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엄격한 금욕적 삶을 통해 새로운 업의 축적을 막을 수도 있고, 또한 강력한 고행을 통해 그것을 소진시켜 해탈의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았다.

 

  자이나교에서는 업을 물질입자로 이해했다. 따라서 그것의 유입을 막거나 소진시키기 위한 방법 또한 물리적인 구체성을 지녀야 한다고 보았다. 기존에 지은 업에 대해서는 그것의 정도에 해당하는 만큼의 육체적 고행을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해야만 완전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상계의 속박과 고통은 누적된 업의 총량에 비례하며, 실천·수행에서의 진전과 해탈 역시 그것에 의해 정확히 판가름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이나교는 업에 의한 지음과 받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관념을 각인시켰다.

 

  자이나교에서의 업은 불변적 법칙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어쩌면 자이나교의 끈질긴 생명력은 이러한 고지식한 업 해석과 함께 그것에 의한 속박을 극복하기 위한 철저한 수행의 힘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업 해석은 간과할 수 없는 취약점을 안고 있다. 업에 대한 지나친 실체화는 내면적인 의도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하였고, 행위의 형식성만을 따지게 만드는 문제점을 노출하였다. 바로 이것은 그들이 저항했던 바라문교의 형식주의적 업 해석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하여 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존재를 전문적인 출가 행자들에게 국한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와 관련해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군가 말하기를 '사람이 어떤 업을 지었건 그것을 그대로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면 청정한 삶도 가능하지 않고 바르게 괴로움을 종식할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 여기어떤 사람이 모자람 없이, 위대하게, 한량없이, 몸을 닦고, 계를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아 머문다면 그러한 현세에서 겪게 될 작은 악업의 지음은 있을 수 있다. 그 사람에게는 내세에 경험하게 될 약간의 악업도 남지 않는다."

 

  붓다는 과거의 업에 연연하기보다 그것을 능가하는 많은 훌륭한 업을 짓게 하는 데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이러한 혁신적 업 해석을 통해 소수의 고행자나 바라문 사제들에게 국한되었던 업으로부터의 해탈 가능성을 모든 이들에게 개방시키고자 하였다.




23. 초기불교의 업業

  해탈·열반으로 나아가는 극복의 대상

  ​

  초기불교에서는 업을 어떻게 보았는가. 인도철학사에 등장했던 다른 종교적 업과 윤회를 인정했다. 사실 업과 윤회는 붓다의 가르침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업이란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행위를 일컫는 것으로, 바로 이것이 미래의 삶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졌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중생은 업의 상속자이며, 업을 모태로  삼아 태어났으며, 또한 업을 의지처로 삼는다." 이렇듯 업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주요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업과 윤회는 괴로움에 노출된 현실의 세계를 대변하는 두 용어이다. 한편 해탈과 열반이란 업과 윤회를 벗어난 경지에 다름이 아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업과 윤회에 의해 속박된 세계로부터 벗어나 해탈·열반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는 데 목적을 둔다. 초기불교는 이러한 기본 입장에 근거하여 숙명론과 대조를 이루는 방식으로 업에 대한 가르침을 구체화한다. 즉 과거에 지어 놓은 업을 인정하되, 오히려 그것을 극복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는 업의 과보를 부인할 수 없는 윤회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만, 그것을 넘어선 해탈·열반의 경지를 희망할 수 있게 된다.

   

    '마하깜마비브항가 숫따'는 초기불교의 업 이해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만한 가르침을 전한다. 거기에서 붓다는 과거에 지은 업에 의해 좋거나 나쁜 세상에 '이미 태어났다upanna' 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거의 업에 의해 현재나 미래에 어떻게 '태어난다uppajati' 고 주장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덧붙인다. 이것은 특정한 결과를 이미 낳은 업만을 확정된 사실로 인정할 뿐, 미래나 현재의 삶까지 그것에 의해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하되, 조금이라도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들에대해서는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설령 잘못된 행위를 했더라도 스스로를 방기해서는 안 되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야 한다. 이렇게 할 떄 아직 결정되지 않은 현재와 미래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업을 하나의 조건으로 이해하게 되고, 또한 미래의 삶을 위한 발판으로 여기는 계기를 마련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분수와 역량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곧 업의 결과인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 안주하라거나 혹은 미래에 대한 꿈을 접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스스로를 잘 이해하고 현실 여건을 잘 파악하여 적극적으로 살아나가라는 뜻이다.

   

    한편 붓다의 업 해석은 내면적인 의도를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예컨대 불건전한 의도를 가졌다면 아직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업이 발생한다고 가르쳤다. 이 점은 구체적인 행위가 있어야만 업의 과보가 뒤따른다고 보았던 바라문교라든가 자이나교의 형식주의적 업 해석과는 전혀 다르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내면의 의도(사思 cetana) 자체를 업으로 규정하였다. 즉 의도를 지님으로써 신체와 언어와 마음에 의한 업이 발생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업 관념은 외부의 형식적인 행위만이 아닌 내면의 심리까지를 포함하는 내용적 전환을 이루게 된다.

   

    내면의 의도를 중요시한 붓다의 업 해석은 '베다'의 제식주의라든가 자이나교의 금욕주의가 갖는 형식주의적 업 해석과 분명한 차별성을 지닌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밖으로 드러난 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부여 받는다.

   

    내면의 속삭임은 본능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이상적 삶의 방향을 모색하게 한다. 의도로서의 업은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분명히 해주는 동시에 그것에 대한 닦음의 필요성을 일깨운다. 또한 이것은 어떠한 여건에도 굴하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24. 요가와 불교

   요가적 명상서 사마타·위빠사나 발전

  ​

  요가yoga란 무엇인가. 고대 인도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수행 전통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교 또한 넓게 보아 요가적 흐름의 한 갈래로 귀속시킬 수 있다.  흔히 대승불교의 유식학파唯識學派를 일컬어 유가행파瑜伽行派yogacara 라고 부른다. 이것을 그대로 번역하면 '요가의 실천'이 된다. 이러한 용례는 요가라는 명칭이 종교라든가 학파의 구분을 넘어 일반적으로 통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몸과 마음을 잘 다스려 이상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실천적 모색들을 요가의 범위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


    요가는 5,000년 전부터 행해져 왔던 듯하다. 예컨대 그 무렵의 인더스 문명 유물 가운데에 요가 포즈를 취한 신상神像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그때부터 요가가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한편 요가라는 말의 최초 용례는 기원전 5~6세기 무렵의 우빠니샤드Upanisad 문헌에 나타난다. "참나自我를 마차의 주인으로 알고 육체를 마차로 알라. 지성知性을 마부로 알고 마음意을 고삐로 알라. [다섯의]감각기관을 말로 알고, 그것의 대상을 말이 달리는 길로 알라...... 감각기관이 마음과 함께 쉬고 지성도 작용을 하지 않을 때, 이것을 최고의 경지라고 한다. 이렇게 감각기관을 확고하게 억제하는 것을 요가라고 한다."

   

    요가란 감각기관·마음·지성 등을 억제하여 동요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듯 외부적 여건에 동요하지 않도록 내면의 심리와 정서를 억제하고 다스리는 것이 요가의 원래 의미이다. 초기불교 또한 이러한 요가의 가르침에 적지 않는 영향을 받았다. 출가 후 붓다는 당시 유명했던 수행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가르침을 경청했다. 요가의 스승들은 괴로움이 발생하는 이유를 인간의 내면에서 찾았다. 또한 그것을 해소하는 방법 역시 스스로를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있다고 가르쳤다.


    당시 붓다가 배웠던 요가의 방법들은 부정적이 사고와 정서를 가라앉히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컨대 요가에서는 정서적 동요를 가라앉히는 방법의 하나로서 마시는 숨은 짧게 하고 내쉬는 숨은 길게 하는 호흡법을 가르친다. 혹은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떠올려 거기에 몰입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한 기법들은 생리적·정서적 변화를 일으켜 내면적인 평안의 느낌을 가져올 수 있다. 실제로 붓다는 그러한 기법들을 짧은 시간 동안에 체득하였고, 또한 그것을 전수해 준 스승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훗날 붓다는 이와 같은 요가적 명상을 사마타(지止 samatha)로 분류한다.  사람을 일컬어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은 감정적·정서적 요인들에 더 많이 좌우되곤 한다. 특히 탐욕이나 분노 따위에 휩쓸리게 되면 주변의 충고를 거부하고서 비합리적으로 처신하기 일쑤다. 사마타는 그러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 일시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그렇게 해서 얻어진 고요함이 언제까지라도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한때 평온해진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따라서 붓다는 위빠사나(관觀,vipassa)라는 새로운 명상 방법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위빠사나란 주관적인 바람이나 의지를 배제하고서 있는 그대로를 여실하게 통찰한다는 의미이다. 위빠사나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탐욕과 불만 따위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메카니즘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탐욕도 분노도 불필요하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고, 종국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 사성제 등의 가르침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얻게 되는 교리적 내용에 해당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위빠사나라는 사마타를 통해 얻어진 내면의 평안을 확고하게 해줄 수 있다. 이와 같은 붓다의 방법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다른 종파의 명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듯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요가라는 토양 위에서 발생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독특한 측면을 지닌다.  실재reality에 대한 통찰만이 내면을 다스리는 영속적인 처방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요가계 전반에 확산시켰다.




25. 철학과 불교 

깨달음에 대한 믿음으로 철학의 범주 넘어

 

불교는 철학(哲學)인가. 많은 연구자들이 불교에 대해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불교가 철학의 일종으로 해석될 여지는 많다. 붓다는 어느 종교가보다 철학적으로 뛰어난 면모를 보였고, 당시 유행했던 사상적 경향들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그의 가르침은 합리적 사고의 토대 위에서 제시되었고, 경험세계에 대한 분석과 해명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결코 철학적 측면에 한정될 수 없다. 그는 일방적인 사변적 견해의 추구가 바른 깨달음을 얻는 데에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주지하듯이 철학이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사랑(philoso)과 지혜(sophia)의 합성어로서, 온전히 번역하자면 ‘지혜에 대한 사랑’이 된다. 철학이란 단순한 지식이나 정보의 축적이 아니며,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역동적·창조적·체계적 사유를 가리킨다. 철학이라는 용어는 바로 이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고안된 번역어로 풀이하자면 ‘배움에 밝다’ 혹은 ‘배움을 밝히다’의 의미가 된다. 즉 철학이라는 번역에는 단순한 배움 혹은 지식만이 아닌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사유 과정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필로소피아의 원래 뜻을 비교적 잘 반영한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이라는 용어가 불교적 가르침의 한 단면을 가리키는 것은 사실이다. 붓다는 당시의 사상가들에 대한 첨예한 비판의식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구체화하였다. 붓다의 뒤를 이은 제자들 또한 각자 자신의 입장에 근거하여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부파·중관·유식불교 등의 새로운 흐름들이 그렇게 해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문적 흐름들은 불교의 궁극 목적을 완전히 충족하지 못한다. 이들 각각의 불교는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으며, 깨달음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 인도에서는 철학이라는 낱말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싯단따(siddhānta)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말은 성취(siddha)와 궁극(anta)의 합성어로서, 온전히 번역하자면 ‘궁극의 성취’가 된다. 인도인들은 궁극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전통적인 배움 혹은 학문적 가르침에 접근하였다. 또한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다양한 연구의 성과를 일구어 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개념적·사변적 지식은 어디까지나 궁극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그들은 단순한 지혜의 추구에 매몰되지 않았으며, 궁극적 이상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그것마저 넘어서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싯단따라는 표현은 불교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붓다와 그의 제자들이 가졌던 주된 관심은 언제나 인간의 실존에 있었다. 그들은 항상 실제 삶과 연관하여 현실을 통찰하였고, 머리만이 아닌 가슴과 더불어 진리에 접근해 나가는 길을 걸었다. 이점에서 불교의 학문 전통은 지혜 일변도의 발달 여정을 밟아 온 서양에서의 철학과 다른 특징을 지닌다. 간혹 서구 전통에 속한 철학자들 중에는 사고와 행동이 일치되지 않았던 인물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초기불교 이래로 불교의 학문 전통은 중생구제라는 일관된 방향성 아래 교리와 실천이라는 두 측면을 놓친 적이 없다.


붓다는 믿음(信, saddhā)이라는 항목을 간과할 수 없는 실천적 요소로 언급한다. 우리는 붓다의 완전한 깨달음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올바른 실천에 전념할 수 있다. 믿음은 의심에 찌든 마음을 정화하여 불신과 불안의 늪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믿음이 수반되지 않은 지혜는 교만과 방탕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믿음이 뒷받침되지 않은 지혜는 오히려 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극약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초기경전에는 “목숨을 다해 귀의합니다(pāṇupetaṃ saraṇaṃ gataṃ)”라는 제자들의 믿음의 맹세가 도처에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의 완전한 깨달음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종교로서의 불교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을 철학이라는 테두리에 한정할 수 없는 이유다.





26. 무상(無常)의 가르침 

“항상하지 않는다”는 변혁의 메시지

 

무상(無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항상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모든 것이 변화의 여정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우리는 나날이 변해가며 또한 새롭게 태어나고 죽어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현재의 ‘나’가 10년 후 혹은 100년 후까지 지속되지는 않는다.


불교에서는 바로 이 변화한다는 사실만큼은 고정불변의 진리로 여긴다. 따라서 진리의 인장 즉 법인(法印)이라는 표현으로써 이것을 분명히 한다. 무상의 진리는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 가운데 최초의 것에 속한다. 초기불교는 이와 같이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진리에 근거한다.


무상의 진리는 결코 난해한 것이 아니다. 사실 변화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소중히 여기는 재산이나 명예 혹은 가치 따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러한 요인들에 약간이라도 변화가 발생하면 안절부절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는 의연하게 대처하다가도 막상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평정심을 잃기 일쑤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무상의 가르침에 투철하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붓다 당시 쭐라빤타까라는 머리 나쁜 출가수행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기억력은 단 한 구절의 경전도 외울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먼저 출가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형님이 계셨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형조차 그의 어리석음에 실망하여 환속을 종용했다고 한다.


절에서 쫓겨나 울고 있는 그를 발견한 붓다는 우선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으라고 일렀다. 그런 다음 ‘먼지 닦음(rajoharaṇaṁ)’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도록 하였다. 그러자 쭐라빤타까는 먼지가 닦이어 없어지듯이 마음의 번뇌와 어리석음도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쭐라빤타까는 무상의 도리를 깨우치게 되고 마침내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 궁극의 깨달음이 머리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붓다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이지적인 능력보다 심리적인 안정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즉 어떠한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고력보다는 그것에 접근해 나가는 심리적 태도와 마음가짐의 문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현실의 삶에서 그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갖가지 문제들에 노출되어 괴로움을 겪곤 한다. 그러나 탐욕 따위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당장 사라져 갈 분노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상처 입히는 사례가 그러하다. 그러한 격정의 와중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마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오로지 분노하고 있는 상황 자체와 하나가 될 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탐욕과 분노의 충실한 노예가 되고 만다. 이렇듯 우리는 정서적인 장애들로 인해 스스로의 생각과 입장에 사로잡히게 되며, 또한 그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마저 수용하지 못하곤 한다.


무상의 가르침은 외부의 객관적 실재에 대한 언급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의 뜻이 강하다. ‘나’의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갖가지 느낌과 생각과 충동과 이미지들에 대해 돌이켜 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과 정서에 휘둘리지 않는 여유와 인내를 배우게 된다. 또한 이것이 전제될 때 특정한 문제에 대해 올바른 해결책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초기불교에서 제시하는 무상의 진리는 ‘나’ 스스로의 생각과 태도에 자리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데에 초점을 모은다. 따라서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변혁의 메시지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27. 괴로움에 대한 가르침

   현상에 집착하는 자신을 먼저 돌이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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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로움苦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의미이다. '나' 자신을 구성하는 육신色 괴로움에 대한 가르침 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의 5가지 경험적 요인들, 즉 오온五蘊이 그렇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다섯 요인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나의 몸, 나의 느낌, 나의 이미지, 나의 충동, 나의 인식이라는 방식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그러나 이들은 원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며, 또한 맘대로 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 지극히 무력하기만 하다.

   

    삼법인三法印의 두 번째 진리에 해당하는 괴로움이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며, 또한 원해서 병에 들거나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느낌에 대해서는 항상 있어 주기를 갈망하고 싫어하는 느낌은 당장이라도 없어져 주길 바란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가. 우리는 좋든 싫든 갖가지 느낌과 노출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 집착하거나 거부하는 가운데 스스로의 괴로움을 키워 나간다. 집착하거나 거부하는 마음이 강할수록 그것의 상실 혹은 지속에서 오는 내면의 격정과 괴로움은 커져만 간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이란 외부의 사물에 대한 객관적 언명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육신·느낌·지각 따위는 타인의 몸이나 마음에 속한 것이 아니며, 지금 이순간 '나'의 실존을 구성하는 경험적 내용을 가리킨다. 붓다는 바로 이러한 현상들에 집착하여 얽매이는 것을 괴로움으로 규정한 것이다. 따라서 붓다가 말하는 괴로움이란 '너'라든가  '그'  혹은 '우리' 가 아닌 바로 '나' 자신에 일단의 초점을 모은다고 할 수 있다. 괴로움이라는 가르침 역시 '나' 자신에 대해 돌이켜 보라는 실천적 메시지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채 타인에 대해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타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나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배려에 앞서 더욱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마음가짐이다. 자신만의 느낌과 생각에 사로잡혀 베푸는 보시는 오히려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해로운 독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이 겪고 있는 내면의 장애와 괴로움이 과연 무엇인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타적 삶의 출발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되면서 생겨난 중대한 오해가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염세주의厭世主義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사실 불교에서는 인간의 현실을 괴로움으로 파악한다. 또한 붓다는 바로 이것을 직시하라고 이른다. 이러한 가르침은 삶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언뜻 생각하면 세상에는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이 부지기수이며 그러한 즐거움만을 추구하기에도 바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괴로움으로 규정하는 붓다의 가르침은 염세적 색채를 지닌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이 괴로움을 드러내는 데서 그쳤다면 염세주의라는 평가는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괴로움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붓다는 결코 괴로움만을 드러내는 데에 매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넘어선 영속적인 행복의 경지를 알리는 데에 주력하였다.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로 표현되곤 하는 해탈 혹은 열반이 바로 그것이다. 붓다는 모든 괴로움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보았으며, 바로 그것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해소의 과정은 시작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느낌이나 지각 따위의 실제를 통찰하게 함으로써 그들로 인해 파생된 동요와 격정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일깨운 것이다.​​

   

    해탈 혹은 열반의 경지는 그렇게 해서 도달된 궁극의 이상적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 내용이 포함되는 한 붓다의 가르침을 염세주의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28. 무아無我의 가르침

  오온은 '나' 아닌 벗어나야 할 대상

  ​   

  무아無我란 무엇인가. '나' 를 구성하는 육신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의 5가지 요인들, 즉 오온五蘊이 '나' 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들 모두가 '나의 것' 도 아니고 '나의 자아' 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다섯 요인을 우리 자신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갖가지 충동과 이미지 따위에 일희일비의 시간들을 탕진한다. 분노가 일었을 땐 분노와 하나가 되고, 탐욕이 일었을 땐 탐욕 자체와 하나가 된다. 스스로의 이미지를 생명처럼 간주하고서, 그것의 손상에서 오는 괴로움에 대해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곤 한다.

   

    물론 자신의 육신이나 느낌 혹은 지각이나 이미지 따위는 잘 다스려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적 요인들을 막무가내로 사라지게 할 수도 없고, 또한 영원히 지속되도록 붙잡아 둘 수도 없다. 경전에 묘사되듯이 "나에게 이러한 느낌은 있어라, 저러한 느낌은 있지 말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이와 같은 현실에 비추어 오온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수긍해야  한다. 다만 이들은 삶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스려 나가야 할 현상들에 불과하다.

   

    우리는 대개 자신이 연루된 특수한 상황이나 사태에 대해서는 초연한 마음을 갖지 못한다. 주관적인 바람이나 의지 따위가 개입이 되기 때문에다. 다시 말해서 자신만의 느낌이나 인식에 갇혀 있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판단하거나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현실이 우리의 의지대로 따라와 주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 잘못 기대한 정도만큼 혹독한 대가가 기다리기 십상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관점을 상태에서 문제의 상황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더 이상 '나'를 개입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직시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심리학자는 "통찰이란 '생각하는 사람'의 존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가장 잘 떠오른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즉 특정한 생각이나 판단에 사로잡히지 않은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있는 그대로를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언급은 초기경전에서 설하는 무아의 가르침에 매우 근접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자신이 마주하는 경험적 현실, 즉 오온이라는 족쇄로부터 벗어나 보다 넓은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서 고정된 존재로서 '나' 혹은 '나의 것' 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의 가르침은 매우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다.

   

    무아의 가르침이 현실적인 삶의 맥락을 벗어나게 되면 형이상학적 원리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리하여 일상의 자아마저 부정하고 일체의 모든 것을 무화無化시키는 사변적 논리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한 무아 해석은 단멸론斷滅論과 다를 바 없으며,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소멸한다" 라는 방식으로 허무주의를 조장한다. 그러나 초기경전 도처에서 붓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전생轉生에 관한 이야기를 상세하게 전한다.​ 무아란 '나의 없음' 이라는 형이상학적 주장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온이  '나' 아님을 밝히는 경험적 가르침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무아의 가르침은 '나', '나의 것', '나의 자아' 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하는 데에 그 취지가 있다. 오온이라는 족쇄에 붙잡혀 있는 한에서, 우리는 끝없는 갈등과  번민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 윤회輪廻의 세계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지 모소한 범부들은 오온이 만들어 내는 갖가지 불안과 공포, 생리적 욕구와 감각적 쾌락 따위를 자기 자신과 일치시키며 살아간다. 붓다는 이러한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오온 하나하나가 과연 '나의 것' 혹은 '나의 자아' 인지 확인해 보도록 권한다.  그리하여 고정된 실체로 믿어왔던 '나' 가 허상에 불과하며, 또한 문제의 상황에 처한 '나' 자신이 본래적이지 않다는 자각을 일깨운다.   




29. 견해의 위험성

견해도 욕망의 투영… 마음 비워야 바른견해

    

     견해ditthi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그것은 왜 필요하며 또한 그 위험성은 무엇인가. 우리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견해를 지닌다. 험난한 인생의 여정에서 견해를 바로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바른 견해는 우리로 하여금 나아가야 할 목적지를 분명히 해준다. 만약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견해가 없다면 동물적 본능만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바른 견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를 다잡는 올바른 견해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견해의 위험성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인간은 본능이 요구하는 이상의 행위들에 전념하곤 한다. 단순히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와 같은 고상한 행위들이 상충하는 견해와 부딪쳤을 때 발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에 대해 불편해 한다. 심지어는 더 이상의 견해의 일치를 얻어내기 어렵다고 여겨질 경우 적으로까지 간주한다. 엄청난 규모로 자행된 종교전쟁이라든가 이념적 충돌이 그렇게 해서 야기되었다. 견해의 차이에서 오는 불화와 갈등은 멀쩡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견해를 지녀야 할 것인가 버려야 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붓다는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팔정도八正道로 집약되는 실천적 가르침에서 바른 견해sammaditthi는 첫 출발점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붓다는 바른 견해와 더불어 일체의 그릇된 사고와 행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는 견해 자체가 지니는 문제에 대해서도 예리하게 비판한다. 많은 경우 우리의 견해는 믿음saddha이나 기호ruci 혹은 전승anussava 따위로 야기된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형성된 갖가지 견해들로 인해 자신과 타인을 억압하기 일쑤다.

    

     인류 역사상 등장했던 수많은 사상가 혹은 종교가들은 스스로에 대해 한결 같이 진실만을 따른다고 강변하였다. 나아가 자신들과 반대되는 견해에 대해서는 집요한 반론과 공박을 펼치는 가운데 스스로의 입장을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붓다는 내면의 정화가 전제되지 않는 한 그러한 행위들은 오히려 오만과 독선만을 조장할 수 있다고 보았다. 입증될 수 없는 논리로써 변화무쌍한 경험세계를 한정짓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이점에서 붓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독특하고 분명한 태도로 인간의 견해와 인식이 지닌 한계를 지적했던 냉철한 지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주변의 사상가들과 달리 인간의 심리 혹은 마음을 분석함으로써 다양한 견해들이 발생하는 이유를 해명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것을 통해 갖가지 독단적인 사고와 견해의 족쇄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붓다는 별도의 형이상학적 견해를 내세우는 작업을 단념하고서, 과연 인간의 실존이 어떠한 방식을 걸쳐 괴로움의 상황에 빠져들게 되는지를 규명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유형의 형이상학적 견해들에는 내면의 분노라든가 두려움 따위와 같은 정서적 요인들이 그 추동력으로 ​은밀히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게 되었다.

    

     붓다에게 바른 견해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변이 아니며,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지침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맥락에서 붓다는 진리 추구의 와중에 무엇보다도​ 심리적·정서적 안정을 중요시 한다. 그는 내면의 정화를 통해 번뇌를 가라앉힌 연후라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의 실재를 파악할 수 있고, 또한 견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과 타인의 영속적인 행복으로 이끌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체의 망상적 견해들에 대해 환대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면, 결국 탐냄·의혹·자만·무명 등의 잠재적 성향이 사라지고, 싸움·분쟁·언쟁 등의 사악하고 불건전한 법들도 남김없이 사라진다."

    

    


30. 마음과 세계

"마음의 원리가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한다"   

    

     마음citta은 무엇이고 세계loka란 무엇인가. 또한 이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란 대상arammana에 반응하여 일으키는 내면의 인식과 정서를 가리킨다. 그리고 세계란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혹은 주변의 현상을 망라하여 일컫는 명칭이다.  서구적 사고에 친숙한 현대인은 이들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마음과 세계가 별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외부의 물리적 세계는 마음과 무관하게 실재하며, 바로 그것에 반응하여 내면의 마음이 발생한다는 것이 상식화된 사고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는 이러한 사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우리에게 경험되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 의 실재를 의미하는가. 마음과 세계의 본질은 무엇이며, 이들을 따로 구분해서 보는 것은 타당한가.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붓다는 동일한 현상에 대해 다양한 견해와 주장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입장과 태도에 따라 외부의 사물이 각기 다르게 이해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예컨대 어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인 황금이 어린 아이에게는 단순히 노랗고 단단한 물체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붓다에 따르면 경험 영역에 드러나는 모든 사물은 우리 자신의 인식 과정을 걸친 연후의 것이다. 따라서 외부에 실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란 실상 내부적으로 인식되고 해석된 결과로서의 세계에 지나지 않다. 이렇듯 외부적 현상으로서의 세계와 내부적 흐름으로서의 마음은 뒤섞여 있으며 서로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붓다는 세계의 발생과 소멸을 우리 자신과 연계시켜 말한다.​

    

     "나는 지각을 지니고 마음기능을 지닌 여섯 자 길이의 이 육신 안에 세계의 끝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나는 이 육신 안에)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세계란 현상계 너머의 초월적 실재와 연관된 형이상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며, 우리 자신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외부의 객관적 대상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가능케 하는 지각sanna 마음기능manas이 작동하는 한에서 발생하고 소멸한다. 따라서 세계란 우리 자신의 태도와 정신적 역량에 따라 각기 다른 차원으로 전개될 수 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음이 세계를 인도하고 마음에 의해 (세계는) 이끌려 다닌다. 마음이라는 하나의 원리가 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러나 세계는 단순히 비실재적이거나 환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들을 멋대로 변형시키거나 달라지게 할 수 없다. 예컨대 세계를 이루는 물질현상에 대해 "나에게 이러한 물질현상은 있어라 저러한 물질현상은 있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세계는 우리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는 우리의 인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살아갈 수도 없다. 마음과 세계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아예 하나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들은 서로 의존해 있으며, 삶이 유지되는 한 함께 가꾸고 다스려 나가야 할 내용이 된다.​

    

     마음과 세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스스로를 다스리는 과정을 통해 세계의 발생과 소멸에 개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한다. 실제로 초기불교에 따르면 수행yoga은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예컨대 욕망에 지배되는 세계(욕계欲界), 순수한 물질 현상의 세계(색계色界), 물질현상을 벗어난 세계(무색계無色界) 따위의 삼계三界는 죽고 난 이후 다시 태어나는 세계일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들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는 삼계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난 해탈·열반의 경지에 머물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을 가능케 하는 실천·수행은 다양한 맥락으로 시도될 수 있을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차원의 밝은 세계를 열어가는 주인공이라는 자각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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