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순례
임승택 교수는 동국대 인도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경북대 철학과에 재직 중이시다. 오랫동안 요가수행을 지도했으며, 미얀마의 위빠사나 센터에서수차례에 걸쳐 안거를 마쳤다. 인도의 고전인 '바가바드기타 강독'을 비롯해'빠띠삼비다막가 역주'등 40여 편에 이르는 역·저서와 논문을 집필하셨답니다.
47회에 걸쳐 타자사경打字寫經할 예정입니다.
1.초기불교 특징
초기불교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역사적 사실만을 말하자면2500년 전쯤 인도에서 시작되었으며,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인물과 그의 제자들에의해 주도된 개혁적 종교라고 할 수 있다.남방의 상좌부에서는 바로 이것만을 순수한 불교로 간주하고서 그 이외의 가르침들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불교라는 흐름이 시작된 최초의 발원지로만 여기고서 오히려 그 이후에 성립된 가르침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한편더욱 후대의 밀교 등에서는 초기불교의 역사성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석가모니 부처님 또한 비로자나불의 한화신化身으로 간주할 뿐이다.
세계의 종교사를 통틀어 불교만큼 스스로에 대해 이와 같이 다양한 시각을 용인하는 종교는 없을 것이다. 불교는 마치 거대한 대양처럼 여러 이질적인 사상과교리를 흡수하면서 오늘에이르고 있다. 한쪽에서는 무아와 공의 가르침을 통해그릇된 견해와집착을 해체하는 데에 주력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불성이라든가 여래장 혹은한마음(一心)과 같은 포용의 논리로써 각박해진 마음을 다독인다. 이러한 양상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혼란스러움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입장들은 스스로에 대해 불교라는 명칭을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은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대책 없는 상대주의'라는 또 다른 편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상대주의에서는 동일한 사태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주장들을용인한다.
"너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정답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정답이다."
그러나이러한 상대주의적 논리는 결국 있으나 마나 한 것이 되고 만다. 상반되는 입장들을 무차별적으로수용하다보면 보편적 진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것은 일관된 목적과 방향을 흩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다면 불교라는 단일한 이름 아래 전해지는 다양한 이질적가르침들은 심각한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다."이들 중에서 과연 어떤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실로 잇는가." "만약 부처님이 계신다면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떻게말씀하실까." "불교에서도 다른 종교들과마찬가지로 이단사냥에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초기경전에는 이러한 고민을 말끔히 씻어 줄 가르침이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四聖諦이다. 즉 모든 인간이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고성제苦聖諦),그것의 원인은 내면의 탐욕과 무지에 있다는 것(집성제集聖諦),그러한 괴로움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멸滅聖諦),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존재한다는 것(道聖諦)이다. 사실 사성제는 모든 유형의 불교적 가르침에서 전제가 되는 것으로, 이것만큼은 상대주의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괴로움을 극복하는 데에 오로지 주력해 온 불교라는 종교의 보편적 성격을 확인한다.
시대를 관통하는 불교의 궁극 목적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극복케 하고 즐거움을 얻도록 하는 것(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몸이 아플 때 우리는 병원에 간다. 그런데 병원에서의 처방은 매번 다르다. 몸의상태라든가 질병의 경과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중생구제라는 일관된 목적 아래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 왔다. 시대적으로 혹은 지리적으로 각기다르게 나타난 불교적 가르침들은 결국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앞으로 살펴보겠지만,초기불교의 특징 또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은 간명하면서도 구체적이다.어느 불교에서보다도 단순하고 직접적으로괴로움의 대처 방안을 제시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초기불교에 대해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2. 붓다의 진리관
사변적 논쟁,번뇌 해결에 도움 안돼
진리란 무엇인가. 인류 역사상 무수한 종교가 혹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제각기진리를 역설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오직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 그들 중에서 어느 하나가 옳다면 필시 다른 나머지는 저절로 거짓일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가르침을 참된 진리로받들어야 할까?
도대체 진리와 진리 아닌 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무수한제각기의 진리들을 보면서 오히려 당혹해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는 어떻게방향을 가늠해야 할까. 과연 무엇에 의지하며 거칠고 험난한 인생길을 헤쳐 나가야 할까.
붓다는 이와 같은 문제를첨예하게 의식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시까지 내려온여러 유형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정통해 있었다. 최초로 결집된 경전인 '범망경梵網經'에서는당시 존재했던 사상을 62가지로 분류하고 그들 하나하나를 고찰한다. 거기에는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는 상주론常住論이라든가,죽고 나면 모든것이 소멸되어 없어진다는 단멸론斷滅論,조물주에 의해 세상이 창조·유지된다는 일분상주론(一分常住論)등이 포함된다. 사실 이들은 동서고금의 형이상학적 논의에서 끊임없이 쟁점이되어 왔다. 그러한 주장들에 대해 붓다는 치우침 없는 반성적 태도로 일관한다.
붓다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지하거나 혹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형이상학적 추구가 내면의 탐욕과 집착에 연결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즉 경험 세계를 벗어난 문제들에 대한 견해나 주장은 집착이라든가불안과 같은 심리적 요인에 뿌리를 둔 것일 수 있다고 환기시킨다.
예컨대 영혼의 불멸에 대한 주장은 현재의 자기를 영속화하려는 집착의 산물이며,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단멸론은 현실의 불만에 대한 자포자기적 심리를 반영한다. 이것은 조물주에 의해 세상이 창조·유지된다는 견해에도 마찬가지이다. 초월적 절대자에 대한 주장 역시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나 주장들은 개인적인 신념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즉 특정한 견해를 확신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하려 든다. 그리고 바로 이것은 지난 수 천 년 동안 목격되어 온 비극적 인류 역사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역사상 대규모로 자행된 거의 모든 종류의 핍박과 박해에는 이와 같은 특정 견해에 대한 요지부동한 확신과 강요가 전제되어 있었다. 초기경전에서는 그것이발생하는 양상을 다음과 같은 소박한 문구로 정형화한다.
"그대는 그릇된 길을 가는 자이고 나는 바른 길을 가는 자이다. 나의 주장은 옳고 그대의 주장은 그릇되었다."
붓다는 누구보다 일찍 교조적 신념체계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간파하였다. 형이상학적인 견해나주장들은 증명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힘의 논리로써 정당화되기 마련이며 종국에는 타인을 억압하고 스스로를 경직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붓다는 경험 영역을 벗어난 문제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무기無記avyakata)한다. 그는 우리의 삶이 황폐해지는 중요한 원인이 스스로의 한계를 망각하고서독단獨斷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데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이유에서 붓다는 내면에 도사린 편견과 집착부터가라앉힐 것을 권한다.
45년에 이르는 붓다의 설법 여정에서 우리는 깨달음에 관련한 여러 내용을 듣는다. 그러나 '상적유경'에 제시되듯이 그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四聖諦로 집약될 수 있다.괴로움이라는 현실(고)과, 그것의 원인으로서의 탐욕(집)과, 괴로움이 소멸된 경지(멸), 거기에 도달하는 길(도)이라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諦,sacca)가 그것이다.붓다는이러한 사성제에 대해서만 삿짜sacca즉 진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이와 같이 중생들의 괴로움 해소라는 현실적 문제에오로지 주력했으며, 여타의 사변적 견해들에대해서는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였다.바로 여기에서 우리는다른 종교가 혹은 사상가들과 구분되는 붓다만의 독특한 진리관을 보게 된다.
3.붓다의 생애
무아無我의 진리를 삶으로 가르치다
붓다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우리는 붓다의 행적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또한거기에서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붓다의 초상은 보는이의 눈높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그려질 수 있다. 일부에서는불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교주로 부른다. 다른 일부에서는 해박하고 냉철한 사상가 혹은 철학자 정도고 이해한다. 또 다른 일부에서는 초능력자 혹은 신神적 존재로까지묘사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상담가·명상가·심리치료가 등의 여러 수식어들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다채로운 그의 행적은 어느 특정한 명칭만으로 그의 삶 전체를드러내는 데에 부족함을 느끼게 만든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붓다는 샤카족 출신으로서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오늘 날의 네팔과 인도 국경 부근에서 왕족 계급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을 비교적 유복한 환경 속에서 보냈으며, 장래의 통치자에게 요구되었던 제반 학문 분야와 전투술 등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열여섯에 혼인하여 라훌라라는 아들을 얻었지만 죽음의 공포와불안을 극복하려는 열망으로 스물아홉의 나이에 출가를 단행하였다. 이후 육년에 이르는 치열한 구도 끝에 서른다섯에 깨달음을 얻었고, 45년의세월 동안 교화에 전념하다가 여든의 나이로 입멸했다고 전해진다.
역사적 사실로서 불교라는 종교단체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모여 형성된 공동체이다. 따라서 그를 일컬어 불교를 창시한 교주로 칭하는 것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교주로서의 모습은 여느 종교에서 나타나는 양상과 사뭇 다르다.
그는 맹목적인 믿음보다는 바른 이해에 기초하여 현실을 살아갈 것을 권하였다. 또한 어떠한 권위와 전통에도 굴복하지 말라고 일렀고, 심지어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으로 이끌리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올바른이해에 기초하여 받아들여지기를 희망했고, 또한 그것과 더불어 삶의 버팀목이 될수 있기를 바랐다.
이러한 붓다의 모습은 교주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상가 혹은 철학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초기경전에 묘사된 그의 가르침은 고도로 발달된 형이상학적 사색들을 포함한다. 거기에는 세계의 기원이라든가 본질 혹은 궁극의 목적이라든가 사후 세계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사변적 견해들이 우리 스스로를 경직시키고 부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말하자면 형이상학적 사고의 해제를 통해 현실 삶을 회복하려는 매우 독특한 철학적 입장을 취하였다. 바로 이점에서 그는 2500년이라는 세월을 건너뛰는 최첨단의 비판철학자로서의 면모를 지닌다.
그러나 그는 결코 메마른 이지적 지혜의 추구에 매몰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를여늬 철학자들과 동일시하는 것 또한 타당하지 않다. 오랜 교화활동에서 나타난 붓다의행적은 때로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자상한 상담가로, 때로는 불가사의한초능력자로, 때로는 부당한 사회적 관습에 맞서는 개혁가로 묘사된다. 한편 오늘날 서구의 심리치료계에서는 그가 가르친 명상의 치료적 효능에 주목하여 심리치료자로의 붓다를 강조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과 타인의 정신적 진보를 위해 임종의 순간까지 방일하지 않았던 수행자로서의 면모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묻게 된다. 우리는 붓다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또한 그를 어떠한 인물로 간주해야 할까? 그의 삶은 그 자체로서 무아無我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엄숙하고 진지한 삶을 일관했지만 스스로를 특정한 모습으로한정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마치 그물에걸리지않는 바람처럼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행적은 '나' 혹은 '나의 것'에 붙잡혀 끝없는 갈등과 불안 속에 살아가는 범부들과 대조를 이룬다. 만약그가 어떠한 위치나 명예에 안주했더라면 우리는 그를 여느위인들과 다르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존귀한 분(세존世尊), 공양 받을 만한 분(아라한阿羅漢), 그와 같이 오신 분(여래如來)등의호칭을 사용하는 것에 주저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4. 붓다의 출가와 수행
있는 그대로를 인정함으로 깨달음을 얻다
붓다의 출가와 수행 여정은 어떠했는가. 유년기의 붓다는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그는 유복한 환경 속에서 살았지만 감각적 쾌락에 매몰되지 않았고 오히려그것의 덧없음과 권태로움에 더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전승에따르면 그는그가 살던 도시의 네 성문 밖으로 나가 인간의 생로병사를 차례대로 목격했다고 한다.
동문에서는 나이 든 노인을, 남문에서는 병들어 괴로워하는 환자를, 서문에서는 싸늘히 죽은 시체를, 북문에서는 출가 생활을 하는 사문을, 이러한 경험은 인간의 삶이 괴로움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일깨웠고 또한 먼 훗날 출가를 선택하게 된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붓다의 전기는 그의 인격적 성향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기질적으로 그는 세속적 성공이나 출세를 갈망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과 달랐다. 그는 대다수 사람들과 달리 들뜬 희열보다는 고요한 행복에 더욱 친화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성향은 구도의 과정에서만이아니라 이후의 전법 활동에서도 계속되었다. 붓다는 세속적인 삶을 벗어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에 주목했고,또한 그렇게 해서 도달되는 평안의 경지를 나누고자 하였다. 우리는 바로 이것이 초기불교의 가르침에서 풍겨나오는 기본 분위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출가 직후 붓다는 유명한요가수행자였던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찾아간다. 그리하여 '아무 것도 없는 선정(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혹은 '지각이 있는 것도없는 것도 아닌 선정(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등을 배운다. 이들은 고도로 집중된 의식 상태로서 당시 엘리트 명상가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수준 높은삼매의 경지였다. 그러나 그는 그 체험이 일시적이고 가식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독자적인 길로 나서게 된다. 그가 선택한 두 번째 방법은 엄격한 육체적 고행을 통해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구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육년 동안 극소량의 음식만을 섭취하면서 가혹한고행을 감행한다. 그 결과 팔다리는시든 갈대처럼 되었고 배를 만지면 등뼈가 만져질 정도로 여위게 되었다고 한다.
고대 인도에서는 고행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하려는 수행전통이 유행하였다. 고행은 오늘날에도 일부 전해지는데, 단식이라든가 삼천 배 혹은 만배 정진 등이 그것이다. 적당한 고행은 해이해진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결의를 굳건히 하는 데 유효할 수 있다. 또한 정진의 힘을 북돋고 강화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그러나 지나친고행은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고 오히려 아만을 높이는 부작용을초래할 수 있다.붓다는 오랜 고행 끝에 이러한 문제점을 알게 되었고, 고행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붓다에게 깨달음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은 요가도 아니었고 고행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서 나섰던 농경 축제에서 홀로 나무 밑에 앉아 우연히 경험했던 '첫 번째 선정(초선初禪)'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는 첫번째 선정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마음 상태에서 감각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데 따른기쁨과 즐거움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깨달음의 길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는 그 확신을 바탕으로 지극히 맑고 청정한 마음지킴(염念,sati)의 상태인'네 번째 선정(제사선第四禪)'에 이르게 되었고, 마침내 거기에서 번뇌의 씨앗이완전히 사라진 지혜(누진지漏盡智)를 얻게 된다.
이상이 가장 널리 인정되는 붓다의 수행 여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붓다는 먼저전문적인 요가수행을 하였고 이후 고행을통해 육체적인 한계에 도전하는 방법으로나아갔다. 그는 그러한 절차를 겪고 나서 다시 일상의 마음으로 돌아와 깨달음의 인연을 만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수행 여정을 중도中道로 부르게 되었고, 쾌락에도 얽매이지 않고고통에 이끌리지도 않는 가운데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중도란 세속적 삶에 대한 반성은 물론 타성화된 수행전통에 대한 반성까지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어떤 특정한 방법을 무작정 강제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인정하고 수용할 때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다.
5. 붓다의 깨달음
괴로움의 실체를 밝혀 완전히 소멸시켜
붓다는 과연 무엇을 깨달았을까. 우리는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또한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이 분명할 때 올바른 실천에 전념할 수 있다. 물론 깨달음의 문제를놓고서입으로만 왈가왈부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면 바른 실천이란 아예 존재할 수 없다. 붓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에 대해다음과 같은점진적 과정으로 언급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완전한 지혜(anna)의 성취가 단번에 이루어진다고 말하지않는다. 비구들이여, 그와 반대로 점차적으로 배우고 점차적으로 실천하고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완전한 지혜의 성취가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붓다는 점차적으로 무르익는 깨달음을 가르쳤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깨달음에 관한 경직된 태도들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극단적인 고행이라든가, 전문적인 요가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깨달음에 접근할 수 있다는 희망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일상의 삶과 더불어 깨달음에 관해 말할 수있어야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내용은 과연 어떠할까. 초기경전에서 중도中道를 깨달았다고도하고, 연기緣起혹은 사성제四聖諦를 언급하기도 한다. 이들은 다소 전문적인 용어들로서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그러나 알고 보면 그다지 어려운 내용이 아니며 또한 서로 중복되는 특성을 지닌다. 예컨대 중도란 바른 견해(正見)·바른 의향(正思惟)·바른 언어(正語)·바른 행위(正業)·바른 삶(正命)·바른 노력(正精進)·바른 마음지킴(正念)·바른 삼매(正定)로 구성된 팔정도八正道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팔정도는사성제의 마지막 항목인 도성제道聖諦의 실제 내용을 구성한다.한편 모든 현상이 서로의존하여 발생하고 소멸한다는 연기의 교설 또한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 과정을 밝히는 것에 다름이 아니며, 결국 사성제의 집성제集聖諦와 멸성제滅聖諦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전법륜경'에는이러한 사성제에 대해 12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깨달음을 심화해 나가는 양상(삼전십이행상三轉十二行相)이 묘사된다.예컨대 모든 존재가 괴로움에 노출되어 있다는사실에 대해서는이해했고(고苦聖諦), 그것의 원인인 갈망을 끊었으며(집集聖諦), 그렇게 해서 소멸된 경지를 실현했고(멸滅聖諦), 거기에 이르는 길은 닦았다(도道聖諦)는 네 과정이 세 차례씩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이것은 붓다의 깨달음이 일회적으로 단박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또한 해당 경전에서는 바로 그러한 과정을 걸친 연후에 비로소 '위없는 바른 깨달음anuttaram sammasambodhi'을 선언했다는 언급도 나타난다.
초기경전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주로 사성제와 관련해서 등장한다. 이점은 불교의 궁극 목적이 다름 아닌 사성제의 깨달음과 실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우리는 이러한 사성제가 반드시 점진적인 과정으로 묘사된다는 점에 다시 한 번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초기불교의 여러 경전에서는 사성제를 사다리에 오르는 과정 혹은 계단에 오르는 과정에 비유한다. 그리하여 괴로움의 현실을 밝히는 고성제로부터 시작해서 차례대로 하나씩 깨달아 나갈 것을 가르친다.
불교하는 종교에서 깨달음이란 최고의 과제이며, 그 구체적 내용은 다름 아닌 사성제이다. 즉 모든 존재가 괴로움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괴로움의 원인은 탐욕이라는 것, 괴로움은 극복될 수 있다는 것, 괴로움을 극복하는 길은 존재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깨달음이란 현실과 유리된 고립무원의 초월적 경지가 아니며, 단박에 성취하고 나면 그것으로 그만인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실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탐욕과 집착이 남아있는 한에서 끊임없는 반성과 닦음을 요구하는 그러한 과제이다.
6. 붓다 가르침의 특징
정서적 안정을 통해 지혜를 개발하다
붓다는 무엇을 가르쳤을까? 그의 가르침은 과연 어떠한 특징을 지닐까.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음의 게송을 읊었다.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 왜 내가 가르쳐야 하는가. 탐욕과 분노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깨닫기 어렵네. 흐름을 거슬러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진리를 보기 어렵네. 어둠에 싸여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이것을 읊고 나서 붓다는 전법傳法을 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그의 가르침이 다른 사람들에게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또 다른 상처와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였다.
붓다는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요인으로 탐욕과 분노를 꼽고 있다. 이점은 그의 깨달음이 단순히 이지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흔히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붓다는 우리가 진리를 깨치지 못하는 이유를 이성이 아닌 정서적 측면에서 찾는다. 즉 탐욕에 눈이 멀고 분노에 귀가 가려 있는그대로(여여如如)의 진리로부터 벗어난다고 보았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는 머리의 좋고 나쁨에 있는 것이 아니라마음이 정화되어 있느냐 그러지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전법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울던 붓다에게 하늘의 신(천신天神)이 나타나 간곡히 가르침을 청한다.
"이 세상에는 더러움에 거의 물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풀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바른 가르침을 접하지 못한다면 다시 더럽혀지고 말 것입니다."
붓다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비추어 본다. 그리하여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연꽃처럼 오염된 세상에 젖지 않고 살아가는 중생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에 대한 자비의 마음으로 전법에 나서게 된다.
"죽지 않음의 문이 열렸도다. 듣는 자들은 스스로의 잘못된 믿음을 버려라." 라는 게송과 함께.
이렇게 시작된 가르침의 여정에서 붓다는 항상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였다.그는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뿐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펼쳤다.이와 관련하여 머리 나쁘기로 유명한 쭐라빤타까라는 수행자의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의 기억력은 단 한 구절의 경전도 외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고 한다. 그러한 그에게 붓다는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으로고 권하면서 '먼지 닦음'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이도록 하였다. 얼마 후 쭐라빤타까는 먼지가 닦이어 없어지듯이 마음의 번뇌와 어리석음도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무상의 진리를 자각하게 되고 마침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쭐라빤타까가 깨달은 무상의 진리는 결코 난해한 것이 아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곧 변화한다는 것으로,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삶에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명예라든가 신념혹은 가치 따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경우가 그러하다.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지 못하고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또한 그것이다. 바로 거기에는 있는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탐욕과 분노가 도사리고 있다.특히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과 불화는 이러한 감정적·정서적 문제들로 인해 막다른 길로 치닫기 일쑤다.
붓다는 처음 수행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이지적 능력보다 심리적안정을 더욱 강조하였다. 내면적인 감정과 충동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붓다는 그러한 연후라야 비로소 참된 지혜가 발현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의 특징은 정서적 안정을 통해 지혜의 개발로 나아가는양상을 띤다.지혜의 개발로 나아가는 사마타(지止)와 지혜를 의미하는 위빠사나(관觀)는 바로 이러한 과정을 집약하는 불교 수행의 양 날개라고 할 수있다.
7. 붓다의 최초 설법
"쾌락도 고행도 아닌 중도의 길을 가라"
붓다의 최초 설법은 어떠했을까. 항상 모든 사람들을 감복시키는 탁월함을 보였을까.붓다의 전법은 깨달음을 얻은 이후 여든의 나이로 입멸에 들 때까지 쉼 없이계속되었다. 그런데 문헌에 따르면 그의 최초 설법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는그의 가르침을 알아들을 만한 첫 번째 인물들로 한때 자신에게 요가를 가르쳐주었던 알라라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를 떠올렸다. 그러나그들은 연로하여 이미죽고 없었다. 그러자 그는 한 동안 도반으로서함께 고행을 닦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을 생각해 낸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먼 전법여행에 나선다.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었던 곳과 다섯 수행자들이 머물던 지역은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다.그는 그곳으로 가던 도중 어떤 외도 수행자를 만나 가르침을 설했지만 공감을 얻지 못한다. 홀로 수행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붓다의 말에 그 외도 수행자는"그럴 수도 있겠지요." 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어렵게 재회한 다섯 수행자들도 처음에는 그의 가르침을 완강히거부했다고 한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붓다는 "내가 예전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라는표현을 써 가며 그의 가르침에 경청할 것을 요구했다.
붓다의 최초 설법에서는 치밀하게 구성된 철학적 논변도 불가사의한 초능력도사용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쾌락적인 삶도 버리고 고행에 대한 탐닉도 벗어나 중도中道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역설했다.그러한 중도란 다름 아닌 바른 견해·바른 결심·바른 언어·바른 행위·바른삶·바른 노력·바른 마음지킴·바른 삼매의 팔정도이다.그는 이 중도의 길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진리인 사성지를 깨달아야 한다고가르쳤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꼰단냐 존자에게"모든 일어난 현상은 소멸한다"는 깨우침이 있었고, 순차적으로 다섯 비구 모두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첫 번째 설법이 성공한후 비로소 붓다의 교화 활동은 탄력을 얻게 된다. 붓다를 포함한 여섯 명의 아라한들로 구성된 최초의 비구 승단이 형성된 것이다.아라한 제자들은 붓다와 동일한 인격을 이룬 존재로 인정되었고, 또한 그들의 깨달음을 다른 이에게전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율장'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하늘과 땅이 진동했다고 기술한다. 땅의 신(지신地神)들과 하늘의 신(천신天神)들이 등장하여 "세존께서 굴리신 최상의 법의 수레바퀴는사문·바라문·데바·마라·범천 등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뒤로 물러나지 않게되었다"고 노래하였다.
첫 번째 설법의 성공은 붓다 자신의 깨달음 이상의 의의를 지닌다. 그것으로인해 붓다의 깨달음은 다른 이들의 괴로움을 제거할 수 있는 보편적 능력을 지닌 것으로 입증되었다.이후 입멸에 이를 때까지 그의 제자로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분은 통상 천이백오십명으로 거론된다. 세계의 종교사를 통해 이처럼 많은 제자들이 최초로 가르침을 펼친 스승과 동일한 성취를 이룬 사례는 찾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초기경전에는 냐띠까라는 촌락에서만 무려 500명 이상의 재가자들이 수다원(sota-patti) 이라는 성인聖人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다섯 비구들에 대한 설법 이후,붓다는 재가자인 야사와 그의 친구들을 상대로 가르침을 펼친다.그는 우선 보시에 관한 가르침(시론施論),계율戒律에 관한 가르침(戒論),천상세계에 관한 가르침(生天論)을 들려주었고,그런 연후 듣는 사람의 상태를 충분히 고려하여 사성제를 가르쳤다. 마치 더러움이 없는 깨끗한 천으로물감을들이듯이,마음을 정화하는 가르침을 먼저 펼친 다음 사성제로 넘어갔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붓다의 전법은 스스로의 깨달음의 여정과 마찬가지로 점차적으로다듬어지는 과정을 걸쳤다고 할수 있다. 또한 이러한 전법 양상은 지극히 인간적인 붓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모든 이들이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8.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
자신과 법을 귀의처 삼아 수행해야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은 어떠했을까. 그는 스스로의 임종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한어떤 자세로 임하였을까. 우리는 붓다의 마지막 모습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며, 그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할까.
붓다의 최후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붓다의 열반은 그가 가르친 무상無常의 진리처럼육신의 덧없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그러나 또한 그것은 참된 진리란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우기도 한다. 우리는 이천오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대반열반경' 은 3개월에 걸친 붓다의 마지막 행적을 소상하게 전한다. 벨루와가마라는 곳에서 위중한 병에 걸려 고통을 겪던 붓다는"비구 승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반열반에 드는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음지킴(念)과알아차림(知)으로 동요 없이 머물면서 견디어 냈다고 한다. 그때 붓다는 아난에게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안과 밖이 없이 가르침을 설했다. 여래의 가르침에는 비밀스러운 것이없다."
이후 붓다는 자신의 마지막을 덤덤히 수용하면서 그간의 가르침에 관한 제자들의의심을 풀어주는 데에 주력하였다.
그는 우선 자신과 승가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비구 승가를 거느린다거나, 혹은 비구 승가가 나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그리고 다음의 유명한 가르침을 덧붙인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그는 자신을 따르던 비구들이 각자 자율적인 의지와 인격으로 수행해 나가기를 바랐으며, 결코 어떠한 권한이나권리도 행사하려 하지 않았다.이러한 모습은 '나' 혹은 '나의 것' 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만이 지닐 수 있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는 구체적인 수행 방법과 관련하여 스스로의 몸과 마음에 대해 지속적으로 깨어 있을 것을 가르쳤다.무익하고 허황된 욕망과 근심 따위에 끌려 다니지 말고 현재의순간순간을 분명한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으로 살아가라고 일렀다.바로 이 방법이'몸·느낌·마음·법의 네 가지에 대한 마음지킴' 즉 사념처四念處이다.이러한사념처는 오늘날 위빠사나 명상으로 널리 알려진 남방불교 수행의 원형이 된다. 붓다는 누구든지 이 방식으로 수행해 나간다면 최고의 수행자가 될 수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과거와 미래를 쉴 새 없이 넘나든다. 그러한 와중에 부지불식간에 과거에 대한 회한과 미래에 대한 중압감에 휘둘리게 된다.사실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괴로움은 현재의 순간을 벗어남으로써부풀려진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직면하는 별 볼일 없는 일들에 대해 지레 겁을 먹고 허둥대는 양상이다. 따라서명확한 알아차림과 마음지킴으로 현재에머물 필요가 있다.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자기 자신과 사물의 본래 모습에 충실히 마주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붓다의 유훈으로 전해지는 사념처 위빠사나의 실제내용이다.
이후 붓다는 춘다라는 대장장이에게 마지막 공양을 대접받은 수 살라나무 그늘에서마지막 순간을 맞이한다. 그는 임종에 임박해서도 스승으로서의 모습을 흩뜨리지 않았다. 그리하여"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는 말로써 그가 떠난 이후의 공백을 메우고자하였다.
또한 붓다는"내가 가고난 뒤에 후회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의문이 남아 있다면지체 없이 물으라"며 주위의 제자들에게 세 차례나 권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의심이 있거나 혼란이 있는 제자가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완전한 열반에들어간다. 그가 남긴 임종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당부하노라. 조작된 모든 것들은 소멸한다.게으름 없이 뜻하는것을 이루어라."
9.초기불교와 그 이후의 불교
불교 전달방식 '어떻게' 서 '무엇' 으로 변화
초기불교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또한 초기불교와 그 이후 형성된 불교 사이에는어떠한 차이가 있을까.붓다에 의해 직접 주도된 불교를 두고 우리는 흔히 초기불교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근본불교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또 다른 일부에서는 원시불교, 소승불교, 상좌불교, 빨리불교 등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명칭들은 제각기 나름의 이유와 근거를 지닌다.
근본불교란 모든 불교적 가르침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표현이다.
이 명칭을선호하는 사람들은 부파불교, 대승불교 등의 역사적 흐름이 근본불교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 초점을 모은다. 그들은 근본불교의 시대적 범위를 붓다와 그의 직제자들에 의해 남겨진 불교로 한정한다. 그런데 근본불교라는 명칭에는 그 이외의 다른 불교는 근본적이지않다는 뉘앙스가 포함될 수 있다. 당연히 붓다의 참된 정신을 회복하고자 등장한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명칭을 수용하기 힘들다.
한편 원시불교라는 이름은 그와 반대되는 입장을 반영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자신들의 불교 해석이야말로 온전하며, 붓다의 가르침을 현실에 맞게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원시불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최초기의 불교는 아직 덜 성숙된 것이라는생각을 은연중에 갖는다. 이것은 소승불교라는 명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소승불교라는 표현은 오로지 대승불교에서만 유통되어 온 것으로, 오랫동안 불필요한 논쟁과 갈등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원시불교든 소승불교든 후대의입장에서 자신들에게 부합하지 않는 가르침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상좌불교와 빨리불교는 스리랑카나 미얀마 등지에서 전해지는 남방권의불교를 가리킨다. 남방의 상좌불교는 자신들의정통성을 붓다 입멸 후 100년 무렵에 있었던 제1차 결집 이전으로까지 소급해 올라간다.많은 학자들이 여기에 동조하여 상좌불교의 역사를 2300년 정도로 추산한다. 상좌불교에서는 빨리어로 기술된 경經·율律·논論의 온전한 삼장三藏문헌을 보유한다. 빨리불교라는 명칭은 바로 이것에 근거하며,현존하는 불교 가운데 가장 오랜 전통을 고수한다는 데에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상좌불교 역시 붓다의 원음만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부파불교에 이르러 구체화된 교리적 해석들을 상당 부분 포함한다.
결국 특정한 입장을 배제한 온당한 표현으로 초기불교라는 명칭이 남는다. 초기불교는 역사적인 실존 인물로서 붓다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불교를가리킨다.이러한 초기불교는 그 이후 등장한 다른 불교적 가르침들과 구분되는 독특한 색채를 지닌다. 그것은 교리적 틀에 묶이지 않고사람들의 됨됨이에 따라 가르침을 펼쳤던 붓다만의 고유한 교화방식에서 비롯된다. 붓다는 오로지 중생들의 괴로움을 해소하는 데에 주력하였고, 그러한 이유에서 상대방의 눈높이에 따른 다양한 가르침들을 펼쳤다.그는 '어떻게' 중생들이 안온해 질 수 있을까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붓다의 입멸 후 제자들의 관심사는 두 가지로 갈라지게 된다. 하나는 자신과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온전히 후세에까지 전하는일이었다. 그들은 자신과 타인의 고로움을 해소하는 일에도 태만할 수 없었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하고 체계화하는 작업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언행이 붓다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붓다의 후계자들은 불교의 가르침에서 중요한 내용은'무엇'이며, 불교와 비불교의 차이는 '무엇'인지의 문제에 천착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전개된불교의 역사적 흐름은 '어떻게'에서 '무엇'의 문제로 차츰주된 관심사를 돌리게 된다. 상좌불교를 포함한 부파불교라든가 대승불교의 번쇄한 사변적논의들은 이러한 과정을 걸치면서 구체화되었다. 우리는 초기불교와 그 이후 불교의 차이를 '어떻게'와 '무엇'이라는 잣대로써 구분해 볼 수 있다.
10. 남방불교와 북방불교
지역적 특성 위에 부처님 가르침 접목
현존하는 불교 전통을 지역별로 나눈다면 어떠한 형태가 될까. 크게 남방불교와북방불교라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남방불교는 스리랑카·미얀마·태국 등에서 전해 내려온 불교이다. 반면에북방불교는 중국·한국·일본 등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불교를 가리키며, 여기에 티베트와 몽골 등의 불교를 포함시킬 수 있다.남방불교는 스스로에 대해 상좌불교 혹은 빨리불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하며, 북방불교에서는 대승불교라는 이름을더욱 선호한다. 이처럼 상이한 명칭들은특정한 지역과 시대 그리고 문화적 배경의 차이를 포함한다.
세계의 종교사에서 불교만큼 고유의 색채를 흩트리지 않으면서 다른 이질적인문화를 탄력성 있게 수용·발전해 온 종교란 찾기 힘들다. 이것은 붓다 당시부터상대방의됨됨이에 따라 거기에 걸맞는 가르침을 펼쳤던 대기설법對機說法의 방식에 근거한다. 다양한 지역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각자 스스로의 처지에 맞추어 계승해 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 땅을 벗어난 불교가 붓다의 본래의 의도를 저버리고 각기다른 가르침이 되어버린 것은 아니다. 서로의 명칭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각각의지역불교는 스스로에 대해 붓다의 후계자라는 자긍심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남방불교는 빨리어로 쓰인 삼장三藏의 문헌의 온전히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빨리어삼장을 붓다의 원음으로 간주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실천을 위한 지침으로 삼는다. 또한 그들은 율장에 근거한 전통적인 수계 의식을 원형에 가깝게 유지한다. 그들은 승단의구성원에 대해 예외 없는 엄격한 계율의 준수를 요구해 왔으며, 일정한 지역을 중심으로현전승가現前僧伽를 구성하는 오랜 전통을 고수해 왔다. 그리고 이 현전승가를 율장에 기술된 모든 규정들이 그 효력을 발휘하는 기본 단위로 삼아왔다.
한편 북방불교는 붓다의 근본정신을 되살리는 데에 스스로의 존립 근거를 두고 발전해 왔다. 따라서 형식적인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모습으로 지속적인쇄신의 길을 걸어왔다. 특히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는 유식학·중관학·화엄학·선불교 등의 다양한 새로운 교리적 해석들을 꽃피우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그 중에서도 선불교는 자립적인 승단 경영의 원칙을 제정하여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라고 할 만큼수행과 일상을 분리하지 않는 독특한 수행 문화를 정착시켰다.
현존하는 남방불교가 붓다의 원래 가르침에 가까운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남방불교 교리체계는 다른 부파들의 견해와 교리를 비판하는와중에 구체화되었다. 이것은 남방불교 당시의 가르침만을 고스란히 전승해 온 것이아니라는 의미이다. 더구나 남방불교에서도 세속적 복락을 얻기 위한 주술의 관행들이 목격된다. 이점을 고려할 때 남방불교의 모든 것을 절대시하는 태도는 문제가 될 수 있다. 남방불교의 이상적 모습만을 강조할 경우, 그것과 비교되는다른 지역의 불교를 부당하게 폄하할 가능성이 있다.
한편 북방불교는 초기불교에서 찾을 수 없는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북방불교는 여러 차례의 훼불과 종교적 박해를 견뎌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방불교의 끈질긴 생명력은 다종교·다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이제 우리는 각각의 지역불교를 동시에 접할 수 있으며, 서로에게서 발견되는장점을 취합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현실과 이상의 조화로운 삶을 권장하였으며, 출세간의 이상에 집착하여 주변의 여건을 방기하지 않았다.다양한 지역불교의 양상들은 각자의 현실 위에 이러한 붓다 가르침을 계승한 결과라고 할 수있다.
지난 역사를 통해 수많은 나라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바르게 수용되던 시기에는국가적으로 흥성했던 시간들이 뒤따랐다. 이것은 인도·중국·한국·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현실과 이상을 아우르는 유연한 가르침과 실천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출처] 임승택 교수의 초기불교 산책|작성자 제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