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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아비담마 길라잡이

아비담마 길라잡이 서문 3. 아비담마란 무엇인가


3. 아비담마란 무엇인가 


‘앗타’와 ‘상가하’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제 ‘아비담마’란 무엇인가를 간략히 살펴볼 차례이다. Abhidhamma는 ‘법(法)’으로 번역되는 dhamma에다 ‘위로, ~에 대하여, 넘어서’를 뜻하는 접두어 ‘abhi-’가 첨가되어 만들어진 단어이다. 그래서 일차적인 의미는 ‘법에 대한 것, 법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석서에서는 ‘abhi-’를 ‘뛰어난, 수승한’, 즉 ‘넘어선’의 의미로 해석한다. 붓다고사는 『담마상가니』의 주석서인 『앗타살리니』에서 ‘abhi-’라는 접두어는 ‘뛰어나다, 특별하다’라는 뜻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수승한 법’이란 뜻이고<주해1> 그래서 중국에서는 ‘勝法’이라 옮기기도 했다. 

아비담마라는 단어에서 키포인트는 무엇보다도 담마(dhamma, 法)이다. dhamma(Sk. dharma)는 인도의 모든 사상과 종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쓰이는 술어이며 또한 방대한 인도의 제 문헌들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불교 문헌에서도 예외 없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술어 중의 하나이다. 빠알리 삼장에 나타나는 담마(dhamma)의 여러 의미를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는 『앗타살리니』에 나타나는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스님은 dhamma를 ① 빠리얏띠(pariyatti, 교학, 가르침) ② 헤뚜(hetu, 원인, 조건) ③ 구나(gun*a, 덕스러운 행위) ④ 닛삿따닛지와따(nissatta-nijjiivataa, 개념이 아닌 것)<주해2>의 넷으로 분류하고 있다.<주해3> 이것을 다시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⑴ 부처님 가르침(=진리=덕행)으로서의 법과 ⑵ 물/심의 현상으로서의 법(개념이 아닌 것)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요즘 서양학자들은 전자를 대문자 Dhamma로 후자를 소문자 dhamma로 표기한다. 그러므로 아비담마라는 용어도 이런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비담마는 첫째, 부처님 가르침(Dhamma)에 대한(abhi-) 것이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법문(法門)을 하셨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중국에서 法門이라 번역한 원어는 빠알리어로 담마 빠리야야(dhamma-pariyaaya, V.i.40; D1/i.46; M5/i.32 등)인데 빠리야야는 다른 말로 ‘방편’이라고도 번역되었듯이 듣는 사람의 근기에 맞게 설해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초기경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는 처음부터 법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주로 재가자들)에게는 보시와 지계와 천상에 나는 것[施/戒/生天](daanakatham* siilakatham* saggakatham*. - D1/i.3; M1/i.56 등)을 설하셨고 법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 다양하게 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이거나 높거나 낮은 단계의 수많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없으면 자칫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놓치거나 오해하고 호도할 우려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핵심만을 골라서 이해하려는 노력은 제자들 사이에서 아주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있어왔다. 이런 노력이 자연스럽게 아비담마로 정착된 것이다. 그러므로 듣거나 배우는 사람의 성향이나 이해정도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즉 아무런 방편을 붙이지 않고 설한 가르침이 아비담마라는 말이다. 그래서 아비담마는 ‘빠리야야(방편)가 아닌 닙빠리야야 데사나(nippariyaaya-desanaa, 비방편설)’라고 논장의 주석서들에서는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다.(abhidhammakathaa pana nippariyaayadesanaa. - DhsA.222) 그래서 붓다고사 스님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뛰어난 법과 특별한 법’으로 아비담마를 정의하고 있고 중국에서도 승법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비담마는 부처님께서 [아무런 방편을 쓰지 않고] 제일 먼저 천상의 신들에게 가르치신 것(예를 들면, DhsA.12-13.)이라고 신화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둘째, 아비담마는 물/심의 여러 현상(dhmma)을 대면하여(abhi-) 그것을 잘 분석하여 그것이 유익한 것[善法, kusala-dhamma]인지 해로운 것[不善法, akusala-dhamma]인지, 그런 현상들은 어떤 조건 하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가는지를 철저하게 알아서 저 고귀한 열반을 증득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장 스님이 구사론에서 對法이라 옮긴 것이 돋보인다. 

물/심의 여러 현상을 법이라 한다고 했다. 이를 아비담마에서는 더욱더 정확하게 정의한다. 가장 잘 알려진 법에 대한 정의가 『담마상가니』의 주석서에 나타난다. 붓다고사 스님은 ‘자신의 본성(사바와, sabhaava, 고유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을 법이라 한다’ (attano pana sabhaavam* dhaarentii ti dhammaa. - DhsA.39)고 정의하고 있는데 법에 대한 정의로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이다. 여기에 대해서 아난다 스님은 ‘전도되지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성질을 가진 것이 본성이다’라고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bhaavo ti avipariitataa vijjamaanataa, saha bhaavena sabhaavo. - DhsMt*.25) 이것을 종합하면 본성(sabhaava)이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자기 고유의 성질’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법(dhamma)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최소단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이런 최소 단위로 하나의 마음(citta), 52가지 마음부수(cetasika), 18가지 물질(ruupa), 하나의 열반으로 모두 72가지를 들고 있다.<주해4> 

예를 들면 ‘사람, 동물, 산, 강, 컴퓨터’ 등 우리가 개념지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법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다시 여러 가지의 최소 단위로 분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가지 최소 단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들은 개념(빤냣띠, pan$n$atti)의 영역에 포함된다. 이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개념적인 것이지 사실 그대로가 아니다. 강이라 하지만 거기에는 최소 단위인 물의 요소(aapo-dhaatu)들이 모여서 흘러감이 있을 뿐 강이라는 불변하는 고유의 성질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이 만들어낸(parikappanaa) 개념이지 그들의 본성(sabhaava)에 의해서 존재하는 실재는 아닌 것이다. 

물론 법(dhamma)이란 의미를 광의로 해석하면 이런 모든 개념(pan$n$atti)들도 모두 법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최소단위로서의 법은 ‘궁극적 실재, 혹은 구경법(paramattha)’으로 강조해서 부른다. 그러나 아비담마 전반에서 별다른 설명이 없는 한 법(dhamma)은 구경법을 뜻한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아비담마는 ‘나’ 밖에 있는 물/심의 현상(dhamma)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초기경에서부터 부처님께서는 dhamma를 제 육근인 마노(mano, 意)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계신다. 눈/귀/코/혀/몸의 다섯 감각기능[前五根]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현상일지라도 사실 마노(mano, 意)가 없으면 판독불능이고 그래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겠다.(본서 4장 ‘인식과정의 길라잡이’ 참조.) 일단 전오식(前五識)에 의해서 파악된 외부의 세계도 받아들여지고 나면 그 즉시에 마노의 대상인 dhamma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외부세계도 일단 나의 대상이 되어 내 안에 받아들여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외부물질을 다섯 감각기능[根]들의 대상으로서만 파악하고 있으며 이름도 고짜라(gocara)라고 붙이고 있는 것이다. 고짜라는 소(go)가 풀을 뜯기 위해서 다니는(cara) 영역이나 구역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가지 알음알이[前五識]가 움직이고 다니고 의지하는 영역이라는 말이다. 대상이란 보는 것 등의 기능[根]이나 그런 알음알이[識]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술어라 하겠다. 

이처럼 아비담마의 주제는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강조해서 말하는 법(dhamma)이다. 역자들은 이렇게 법을 내 안에서 파악하는 것이야말로 불교를 이해하는 핵심중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이런 제일 중요한 측면을 놓쳐 버리면 법은 나와 아무 관계없는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내 안에서 벌어지는 물심의 현상인 법에 대해서 배우고 사유하고 고뇌하고 찾아내어 이를 바탕으로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튼튼한 기초를 다져야 하거늘 오히려 법은 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저 밖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지는 않은가? 내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래서 밖으로만 신심을 내어서 무언가를 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다가 잘 안되면 법은 그냥 불교지식이나 불교상식정도로 치부해 버리고 있지는 않는가? 매찰나를 법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법을 내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비법에 온갖 관심을 쏟아 붓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법(dhamma)을 이렇게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면 그 순간부터 부처님 가르침(Dhamma) 역시 의미를 잃고 만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Dhamma)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물/심의 현상(dhamma)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궁극적으로 법은 오직 하나의 의미뿐이다. 

이런 부처님 말씀을 골수에 새기고 내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현상(dhamma)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관찰하고 사유하여 무상/고/무아인 법의 특상을 여실히 알아서 괴로움을 끝내고 不死(열반)를 실현하려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주해1) ayam pi dhammo dhammaatirekadhammavisesat*t*hena abhidhammo ti vuccati. - Ibid. 

주해2) nissatta-nijjiivataa의 문자적인 뜻은 ‘삿따(중생, satta)도 아니고 영혼(jiiva)도 아님’이다. 즉 중생이라는 개념(빤냣띠, pan$n$atti)이나 영혼이라는 개념이 붙을 수 없는 궁극적 실재(빠라맛타, paramattha)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개념이 아닌 것’으로 옮겼다. 궁극적 실재는 1장 §2의 해설을, 개념은 8장 §29를 참조할 것. 

주해3) dhamma-saddo pana ayam* pariyattihetugun*anissattanijjiivataadiisu dissati. (Ibid. 38.) 

주해4) 28가지 물질 가운데서 10가지 추상적인 물질(anipphanna-ruupa)은 최소단위로 취급하지 않는다. 72가지 구경법에 대해서는 6장 §4 해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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