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윌리암 하트(William Hart) 요약·일중(一中) 스님 옮김
5일이 지나갔습니다. 여러분이 수행해야 할 날들이 5일간 더 남았습니다. 수행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열심히 수행하며 남은 날들을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한정된 범위 안에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여러분은 온 몸 전체에서 감각들을 관찰하는 것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이 수행을 시작할 때, 아마도 우리는 먼저 통증이나 압박감 같은 거칠고, 단단하며, 강하고, 불쾌한 감각들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에도 그러한 경험들을 했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의 습성은 감각들에 반응하며, 쾌감은 좋아하고 통증은 싫어하며, 항상 동요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반응함이 없이 관찰하는 법과 감각들을 자기동일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그것들을 점검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통증은 존재하며 고통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운다고 해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그것과 함께 살 수 있을까요?
병자를 치료하는 의사는 병이 무엇인지, 병의 근원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만약 거기에 원인이 있다면, 필시 거기에는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한번 그 원인이 제거되면, 병은 자동적으로 제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단계들을 밟아야만 합니다.
먼저 우리는 괴로움(苦)의 진리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어디에나 괴로움은 존재합니다.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반응함 없이 괴로움을 관찰하기 시작할 때, 고귀한 진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고귀하고 성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우리가 첫 번째 고귀한 진리인 괴로움의 진리(苦諦)를 관찰하기 시작할 때, 그 때 매우 빠르게 괴로움의 원인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원인을 또한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고귀한 진리, 괴로움의 원인(集諦)입니다. 만약 원인이 소멸되면, 그 때 괴로움도 소멸됩니다. 이것이 세 번째 고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滅諦)입니다. 그것의 소멸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계들을 밟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네 번째 고귀한 진리-그 원인을 소멸시킴으로써 괴로움을 끝내는 방법(道諦)입니다.
우리는 반응함 없이 관찰하기를 배움으로써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하는 통증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십시오. 마치 그것이 다른 누군가의 통증인 것처럼 말입니다. 실험실에서 실험을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그것을 조사해 보십시오. 만약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도하십시오. 노력을 계속하다 보면, 여러분은 점차적으로 여러분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은 괴로워합니다. 삶은 울음으로 시작합니다. 태어남은 굉장한 고통입니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질병과 늙음의 고통을 직면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얼마나 괴로울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굉장한 괴로움이기 때문입니다.
한 평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것들과는 헤어지게 됩니다. 원하지 않는 것들은 일어나고, 원하는 것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괴로움을 느낍니다.
‘괴로움(苦)’이라는 이 실재에 대해서 지적인 차원의 단순한 이해만으로는 그 누구도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 못할 것입니다.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고 진리를 경험하게 하는데, 그런 지적인 이해는 자신의 내부를 보도록 영감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붓다가 되기 위해 했던 것은 지적인 차원의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경험적인 차원에서 진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는 거칠고 두드러진 진리에서, 좀더 미세해진 진리로, 그리고 가장 미세한 진리로 나아가면서, 과학자처럼 자기 몸의 형체 안에서 실재를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유쾌한 감각은 지속시키려 하고, 불쾌한 감각을 제거하려는 욕망이 일어날 때마다, 그리고 그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마다 우리가 괴로워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좀더 나아가 가장 미세한 차원에서, 그가 완전히 집중된 마음으로 보았을 때, 다섯 가지 집합체(五蘊)에 대한 집착이 바로 괴로움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지적으로 우리는 물질의 집합체(色蘊)인 이 육체가 ‘나’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 단지 그것은 우리의 통제권 너머에 있는 비인격적이며,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이 육체를 자기라고 여기며, 엄청나게 이 육체에 대해 집착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의식, 인식, 느낌, 반응이라는 마음의 네 가지 집합체에도 집착을 합니다. 그것들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본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매달립니다. 관습적인 목적으로는, 나, 나의 것이라는 말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오온(五蘊)에 집착을 할 때, 우리는 스스로 괴로움을 만드는 것입니다. 집착이 있는 곳에는 불행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집착이 더욱 강해지면 그만큼 불행도 더 커집니다.
인생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키워나가는 집착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욕구나 갈망의 습성에 대한 집착입니다. 욕망이 마음에서 일어날 때, 그것은 신체적인 감각을 동반합니다. 비록 마음의 심층에서는 동요의 폭풍우가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표면 층에서 우리는 감각을 좋아하고, 그것이 계속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상처를 긁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긁는 것은 오히려 상처를 악화시킬 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긁는 감각을 즐깁니다. 이 같은 방법으로 한 가지 욕구가 충족되자마자, 욕구와 동반되는 감각은 또한 없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감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욕망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욕망에 빠지기 시작하고, 자신의 고통을 증식시키기 시작합니다.
또 다른 집착은 이 ‘나(I)’가 실제로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나, 나의 것’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나’에 대한 어떤 비판이나, 자신에 대한 어떤 해로움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속한 것이 무엇이든지, ‘나의 것’이 어떤 것이든지 다 포함시키면서 집착을 확장시킵니다. 만약 ‘나의 것’은 무엇이나 영원히 계속시킬 수 있고, ‘나’ 또한 그것을 즐기도록 영원히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이 집착은 불행을 가져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은 조만간 자신이나 타인이나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하지 않은 것(無常)에 대한 집착은 고통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의 견해나 믿음에도 집착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어떤 비판도 참을 수가 없고, 심지어는 다른 이들이 다른 견해를 가지는 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제각기 다른 색을 본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색안경을 벗어버림으로써, 우리는 색깔 없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우리는 자기 안경의 색깔에, 자기 자신의 선입견과 믿음에 집착이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집착은 자기의 의례, 의식 그리고 종교적 수행법들에 대한 매달림입니다. 이런 것들은 단지 모두 외적인 표시들이며, 그것들은 진리의 핵심을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우리는 실패합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 자기의 내부에서 진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방법을 알았다 할지라도, 공허한 외적 형상에 매달리기를 계속합니다. 이 집착은 그런 사람 안에서 맹렬한 전쟁을 일으키고 불행을 초래합니다.
인생의 모든 괴로움은 자세히 고찰해 보면, 이 네 가지 집착 중의 어느 하나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고타마 싯다르타가 진리를 추구하면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는 고통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을 발견하고 그것을 근원까지 추적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의 전체 현상들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 안에서 관찰하는 것을 계속했습니다.
분명하게도 질병, 늙음, 죽음, 신체적·정신적 고통과 같은 인생의 모든 괴로움들은 태어난 존재들의 불가피한 결과들입니다. 그러면 태어남(生, jati)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물론 바로 직전의 원인은 부모의 육체적 결합입니다.
그러나 넓은 관점으로 볼 때, 태어남은 전 우주가 관련되어 있는 그 속에서 생성되어감의 끝없는 과정 때문에 일어납니다. 죽음의 시간에도 그 과정은 멈추지 않습니다. 몸이 계속해서 부패하고 분해되어 가는 동안에도, 의식은 다른 물질구조와 관련을 맺기 시작하고, 그리고 흐름(flowing)과 생성되어감(becoming)의 과정이 계속됩니다.
생성되어감(有, bhava)의 이 과정은 왜 있습니까? 그 원인은 자신이 일으켰던 집착이라는 것이 그에게 분명해졌습니다. 이 집착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깊은 인상을 만드는 상카라, 강한 반응들을 일으킵니다. 임종의 순간에, 그것들 중의 하나가 마음 속에 떠오를 것이고, 그것은 의식의 흐름을 지속시키기 위한 추진력이 될 것입니다.
그럼 이 집착(取, upadana)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붓다는 그것이 좋아함과 싫어함의 순간적인 반응들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아함은 굉장한 욕망으로 발전되고, 욕망의 대칭 이미지인 싫어함은 굉장한 혐오로 발전되어서, 이 둘 다 집착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럼 왜 좋아함(愛, tanha)과 싫어함의 순간적인 반응들이 일어납니까?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들이 신체적인 감각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유쾌한 감각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유지하려고 하며 증식되기를 원합니다.
불쾌한 감각이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싫어하고, 그것을 제거하기를 원합니다. 그럼 왜 이러한 감각(受, vedana)들이 있습니까? 분명하게 그들은 감각기관 중의 어느 하나와 그 특정한 감각 대상의 접촉 때문에 일어납니다.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마음과 생각, 혹은 상상과의 접촉 때문에 감각이 일어납니다. 접촉이 있자마자, 유쾌하거나 불쾌한, 혹은 중립적인 감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접촉(觸, phassa)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분명하게도, 전 우주는 감각의 대상들로 가득합니다. 다섯 가지 신체적인 감각기관과 마음, 이 여섯 가지가 작동하고 있는 한은, 그것들에 대응하는 대상들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 salayatana)이 존재합니까? 그것은 분리시킬 수 없는 마음과 물질의 흐름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들은 생이 시작되자마자 일어납니다. 그럼 마음과 물질(名色, nama-rupa)의 흐름, 생의 흐름은 왜 발생합니까? 그것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 때문입니다. 그럼 이 의식(識, vinnana)의 흐름이 왜 있습니까? 그는 그것이 정신적 반응인, 상카라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상카라는 의식의 흐름에 추진력을 줍니다. 상카라에 의해서 의식에 주어진 힘 때문에 흐름은 계속됩니다.
그럼 정신적 반응(行, sanskara)은 왜 발생합니까? 그는 그것들이 무명(無明,avijja)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카라를 계속 일으킵니다. 거기에 무명이 있는 한 괴로움은 남을 것입니다.
고통이 일어나는 과정의 근원은, 즉 가장 깊은 원인은 무명(無明)입니다.
무명으로부터 우리가 스스로 불행의 산을 만들어감에 의해 사건의 고리는 시작됩니다. 만약 무명이 소멸될 수 있다면, 고통도 소멸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것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이 연결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을까요? 마음과 물질의 흐름, 생의 흐름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자살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새로운 불행만을 만들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않고는, 우리는 감각기관들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감각기관들이 존재하는 한, 접촉은 거기에 대응하는 대상들과 함께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접촉이 있을 때마다, 감각은 몸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여기, 감각의 연결점에서 그 연결고리를 부숴버릴 수 있습니다. 종전에는 모든 감각이 강한 욕망이나 혐오, 그리고 굉장한 불행으로 끌고 갔던, 좋아함과 싫어함의 반응을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각에 반응하는 대신에 여러분은 ‘이것 또한 변할 것이다’라고 이해하면서, 평정한 마음으로 단지 관찰하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감각은 오직 ‘무상(anicca)’을 이해하는, 지혜가 일어나도록 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굴러가는 고통의 수레바퀴를 멈추고, 그것을 반대 방향으로, 해탈을 향해서 굴려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상카라를 일으키지 않는 순간에, 과거 상카라 중의 하나가 마음의 표면 위로 올라올 것이고, 그것과 함께 감각이 몸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평정함에 머문다면, 그것은 사라지고 또 다른 과거의 상카라가 그 곳에 올라올 것입니다. 우리가 신체적 감각에 대해 계속 평정함으로 머문다면, 과거 상카라들은 하나 둘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질 것입니다.
만약 무지 때문에 우리가 감각들에 반응한다면, 그때 우리는 상카라를 증식하고, 자신의 불행도 증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감각들에 반응하지 않고 지혜를 계발한다면, 그 땐 하나 둘 계속해서 상카라가 소멸되고, 괴로움도 소멸됩니다.
수행의 전 과정은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수행함으로써, 여러분이 새로운 매듭 맺는 것을 멈추고, 그리고 옛것들은 자동적으로 풀려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여러분은 새로운 태어남으로 이끌고, 그래서 새로운 괴로움으로 이끌어 가는 모든 상카라들이 소멸되어진 단계, 즉 완벽한 해탈과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를 향해서 진보해 나갈 것입니다.
이 수행을 시작하는데, 우리가 먼저 전생이나 내생을 믿어야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데는, 현재가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 이 현재의 삶에서, 우리는 상카라를 계속 일으키고, 자기 자신을 계속 불행하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 습관을 깨트려야만 하고, 불행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수행한다면, 여러분이 과거의 모든 상카라들을 다 소멸했고, 새로운 상카라를 일으키는 것도 멈췄다고, 그래서 모든 괴로움에서 여러분 자신이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날이 확실하게 올 것입니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여러분은 스스로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남아 있는 5일 동안 여러분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해탈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 열심히 수행하십시오. 부디 여러분들 모두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길 빕니다.
모든 존재들이 다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