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엔카(S. N. GOENKA) 위빠사나수행 10일 여섯번째 법문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교리도 아니고, 지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철학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연구해야만 합니다. 오직 여러분이 그것을 경험할 때만, 그것을 진실로써 받아들이십시오. 진리에 대하여 듣는 것은 중요하나,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 수행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수행되어져야만 하고, 경험되어져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불행에서 벗어납니다.
붓다가 설명했던 몸의 전 구조는 원자보다도 더 작은 단위의 미립자들인 깔라빠(kalapa)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 미립자는 물질의 네 가지 요소(四大)들과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들이 함께 결합되어진 것입니다. 외적인 세계에서나 또한 내적인 세계에서, 어떤 물질은 딱딱한 땅의 요소(地)가 있고, 어떤 것은 유동성인 물의 요소(水)가 있으며, 어떤 것은 움직임인 공기의 요소(風)가 있고, 그리고 이 모든 경우에 온도는 불의 요소(火)가 있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실재를 고찰하는 사람은 이 네 가지 요소를 좀더 미세한 차원에서 이해할 것입니다.
무거움에서 가벼움까지 무게의 전 범위는 땅의 요소입니다.
불의 요소는 극단의 차가움으로부터 극단의 열에 이르는 온도의 분야입니다.
공기의 요소는 외관상 정지된 상태로 보이는 것에서부터
굉장한 운동에 이르기까지 움직임이 있는 것입니다.
물의 요소는, 뭉쳐지는 응집성의 성질과 관계됩니다.
미립자들은 이 네 가지 요소 중에서 한 개, 혹은 몇 개의 우세함으로 일어나며, 다른 요소들은 잠재되어 있습니다. 감각은 그 미립자들 속에서 우세한 요소의 성질에 따라서 드러납니다.
만약 미립자들이 불의 요소가 우세하여 일어난다면, 감각은 열이나 차가움으로 발생합니다. 다른 요소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모든 감각들이 신체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방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지하다면, 우리는 감각들에 가치판단을 매기고, 스스로 새로운 불행을 만들면서 감각들에 반응합니다.
그러나 만약 지혜가 있다면, 우리는 소립자들이 단순히 하나나 혹은 다른 어떤 요소의 우세함으로 일어나며, 그것들은 모두 주체가 없이 변화하는 현상이며, 사라지기 위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있으면 우리는 어떤 감각을 마주할지라도 자기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계속 관찰할 때, 이 미립자들이 왜 일어나는지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미립자들은 마음과 물질의 흐름, 생의 흐름에 입력을 주기 때문에 만들어집니다. 물질의 흐름은 물질의 입력을 필요로 하고, 거기에는 두 가지 유형의 입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고 있는 음식과 우리가 살고 있는 대기가 바로 물질의 입력입니다. 마음의 흐름은 정신의 입력을 필요로 하며, 이 역시 다시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상카라와 과거 상카라입니다.
만약 우리가 현재 순간에 분노를 입력시키면, 마음은 즉각적으로 물질에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소립자는 우리에게 열의 감각을 느끼도록 하면서, 불 요소의 우세함으로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약 두려움을 입력시키면, 그 때 일어난 소립자는 공기 요소의 우세함을 가질 것이며, 우리는 떨림의 감각을 느낄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의 정신의 입력은 과거 상카라입니다. 모든 상카라는 얼마 후에 결과와 결실을 주는 씨앗입니다. 씨앗(상카라)을 심을때 우리가 경험했던 감각이 무엇이든지, 그 상카라의 결실이 마음의 표면에 올라왔을 때, 그와 똑같은 감각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감각이 일어날 때, 이 네 가지 원인들 가운데 어떤 것이 주요 원인인가를 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단지 일어나는 감각은 무엇이든지 다 받아涌㈍?합니다. 오직 우리가 기울여야 할 노력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상카라를 일으키지 않고, 그저 관찰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에 새로운 상카라를 입력시키지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옛 상카라는 감각으로 나타나면서 그 결실을 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단지 마음을 챙겨 알아차리고, 그러면 그것은 사라집니다. 다시 우리는 어느 감각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옛 상카라는 그 결실을 주어야만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계속 마음 챙기며 평정함에 머무름으로써, 우리는 옛 상카라들이 하나둘 일어나고 사라지도록 허용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새로운 상카라를 일으키게 하는 오래된 습관은 버려야만 합니다. 그것은 오직 반복되는 수행과 지속적인 노력에 의해서 점차 개선되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수행의 길에는 장애나 방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을 제압하려고 하는, 그리고 여러분의 진보를 막는 다섯 가지 강한 적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두 가지 적은 욕망과 혐오입니다.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목적은 이 두 가지 마음의 근본 번뇌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욕망과 혐오는 여러분이 수행하는 중에도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번뇌가 마음을 사로잡으면, 정화의 과정은 멈춥니다. 아마 여러분은 미세한 감각들, 혹은 심지어 열반을 갈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설령 열반을 갈망한다 할지라도 거기엔 아무런 차이점이 없습니다. 욕망, 갈망은 그 연료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다 태워버리는 불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해탈의 반대방향으로 데려갑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여러분이 경험하는 통증에 혐오를 일으키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다시 본 궤도를 벗어난 것입니다.
또 다른 적은 게으름, 졸음입니다. 밤새도록 여러분은 아주 잘 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하기 위해 앉아 있을 때, 여러분은 매우 졸림을 느낍니다. 이 졸림은 위빠사나 수행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여러분의 명상을 멈추게 하려고 시도하는 여러분의 번뇌들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적들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싸워야만 합니다. 졸림을 느끼면 약간 강하게 호흡하거나, 그래도 안 되면 일어나십시오. 눈에 찬물을 끼얹든지 조금 걷든지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다시 앉아 수행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굉장한 동요를 느끼든지, 아니면 번뇌들이 여러분의 위빠사나 수행을 멈추게 하려고 작용하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하루종일 여러분은 수행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하면서 여기저기 뛰어다닙니다. 그 후에 여러분은 여러분이 시간을 낭비했다는 것을 깨닫고, 울며 한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법의 길에는 울음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실수했다면, 그 때 여러분은 여러분이 신뢰할 수 있는 윗사람 앞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유의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또 하나 무서운 적은 의심입니다. 스승에 대해서나 수행법에 대해서, 혹은 그것을 수행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여러분은 의심을 합니다. 맹목적인 받아들임은 유익하지 않지만, 타당하지 않은 끝없는 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의심에 빠져 있는 동안은 수행의 길에서 단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 여러분에게 분명하지 않다면, 여러분을 지도해주는 선생님에게 가는 걸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에게 문제를 의논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가르침 받은 대로 수행한다면, 수행의 결과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법은 어떤 마술이나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작용합니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수행하기 시작한 사람은 누구나 불행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이 수행법의 이익을 경험했습니다. 오직 붓다에게 왔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대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현대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챙김과 평정함에 머물도록 노력하면서 올바르게 수행한다면, 겹겹의 과거 번뇌들이 마음의 표면에 올라오게 되어 있고, 그리고 그것들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힘써 수행한다면, 법은 여기에서, 그리고 지금 놀라운 결과를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한 확신과 이해를 가지고 수행하십시오.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이 수행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부디 여러분들 모두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길 빕니다.
모든 존재들이 다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