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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부록2. 진정한 믿음

부록 II

 

진정한 믿음

 

일전에 한 신도분으로부터 질문을 받았다. 기독교에서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신과 인간이라고 하는 차원이 다른 존재로 설정하고 있으며, 그들 사이에는 인간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누구든지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신앙의 주체와 신앙의 객체, 즉 무엇을 믿고 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없다.

게다가 하느님의 말씀은 일단 한글이고 한 권의 책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하느님에 대해서 매우 확신에 차 있고 성경구절도 줄줄 외우면서 가끔씩 만나는 모임에서 강력한 태도로 자신은 전지전능한 신을 믿는데 불교인은 인간인 부처를 믿는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그런데 본인은 물론 열성적으로 절에 다닌것은 아니지만 수 년간 불교의 주변을 맴돌다가 이제 이곳 미국에 이민와서는 뭔가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 절을 찾았는데 교회와 같은 분명한 윤곽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도 그러하고 수많은 경전의 말씀도 복잡하고....그러니 나더러 한마디로 분명하게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다. 중요한 질문이었다. 나 역시 지금껏 부처님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셨는지 그 핵심을 찾아서 헤맸으며 수많은 경전의 말씀 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될지 막연했었다. 그러나 스님의 신분으로 절을 맡아서 살고 있기 때문에 아쉬운대로 임시적인 대답이나마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선 부처님과 우리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다. 그리고 경전은 스승의 가르침이다. 제자가 스승을 믿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과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인 하느님을 믿는 것과는 다르다. 즉 불교도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와 올바른 사고를 전제로 하고 있다. 무조건 부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해서 죽어서 극락세계를 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똑같은 물도 독사가 마시면 독을 만들고 소가 마시면 우유를 만들듯이 아무리 훌륭한 교리도 그릇된 사람이 전달하면 그것은 그릇되게 전달되고 아무리 그릇된 교리도 올바른 사람이 전달하면 올바르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사용되는 도구나 수단이 얼마나 훌륭하고 더 우수한가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보다는 그것을 누가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느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당연히 부처님의 말씀 자체도 중요하지만 문제는 얼마나 정확히 이해해서 얼마만큼 정확히 실천했는가가 중요하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으며 인간은 신의 종이다. 그러므로 오직 신에 대한 복종과 믿음이 강조될 뿐 신의 존재에 대한 지적이고 논리적인 이해나 판단은 금지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차이는 기독교의 하느님은 사후의 인간을 심판하고 심판의 기준은 그에 대한 믿음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심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리고 믿음과 실천의 시점이 현재 이 순간이며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기독교는 미래 시점이 상대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는 천국이 가까와졌으니, 다시 말해서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하느님을 믿어서 지옥의 화를 면하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미래의 세계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천당과 지옥을 만들기 때문에 천당과 지옥은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순간 천당은 지금 여기에 있으며,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한 지옥은 또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는 바로 자신의 본질을 들여다봄으로써 현재의 고통스런 삶으로 부터 해방되고 자신의 마음 안에서 천당을 경험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또다른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그것은 마치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와도 같다. 실제로 경전에서 부처님을 의사 가운데서도 최고의 의사인 의왕(醫王)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병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 그 병의 원인과 그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즉, 경전의 말씀은 바로 의사가 환자에게 내리는 처방문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절이라고 하는 곳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병원의 기능을 하는 곳이 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의사의 처방문이라고 하는 것은 어디어디가 병이 났으니 어떤 약을 어떻게 먹으라는 지시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직접 눕혀놓고 수술을 해서 병을 고쳐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의사의 처방문에 해당하는 경전의 말씀을 이해했다고 해서 마음의 병이 곧바로 낫는 것이 아니다. 환자가 자신의 병이 낫기를 원한다면 의사가 처방해준 지시에 따라야 된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의 처방문을 가지고 부처님을 열심히 믿어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 그의 삶의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단 한번도 듣거나 공부한 일이 없어도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고 올바르게 법을 실천하면 그가 곧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경전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을 믿으면 그것만으로 곧장 원죄를 용서받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하느님을 믿으면 천국을 가고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아도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다.

결론적으로 불교는 우리들 각자의 삶의 행위 자체가 얼마나 올바른가가 중요하고 기독교는 개인의 실제 행위보다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중요하다. 따라서 절은 개인의 행위를 올바르게 연습하고 자신의 마음상태를 점검하는 동시에 치료하는 공간인 반면에 교회는 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장소다.

그리고 그 종교생활의 결과로서 받게 되는 보상으로 불교는 자신이 행위한 데서 털끝만큼도 에누리 없는 댓가를 받을 뿐만 아니라 보상을 받는 시점 자체가 미래가 아니라 바로 행위하는 그 순간에 이루어진다. 즉 귀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만큼 귀해지고 천한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만큼 천해진다.

반면에 기독교는 무조건 신을 믿기만 하면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요즘처럼 계산적인 시대에 기독교의 주장은 보다 솔깃하고 매력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 그 보상을 받는가 하는 점이다. 기독교는 믿음의 결과를 현재가 아니라 죽은 후에 심판받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간다는 그 사실을 믿으라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다. 지금 여기서가 아니다.

우리는 혼히 전생의 모습을 알고 싶으면 현생의 모습을 보고 내생의 모습을 알고 싶으면 현생에서 하고 있는 모습을 보라고 했다. 과거가 없는 현재나 현재가 없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의 문제를 놓고 객관적이고 초연하게 얘기하기는 힘들다. 아무리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며 삶의 연장이라고 해도 죽고싶지 않은 것이 중생의 마음이다. 그리고 누구도 죽은 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불안은 무의식 속에 깔려 있다. 그러니 학식의 고하를 막론하고 죽은 후의 세계를 보장한다는 말에 위안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겠는가? 미래를 기대하고 믿는 것은 좋지만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인식해야만 되는 것은 하느님을 믿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르든, 믿고 따르는 자의 능력과 한계 안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누구도 자신의 이해능력과 범위를 넘어서서 신을 믿거나 따를 수는 없다. 아무리 하느님이 전지전능하다고 해도 그를 믿는 자가 어리석으면 마치 순수한 이슬을 먹은 독사가 독을 만들듯이 하느님을 욕되게 만들고 혐오스럽게 만들 뿐이다. 또한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이 절대행복과 절대진리로 이끄는 길이라고 해도 누가 그 불법을 전하느냐에 따라서 정도(正道)가 되기도 하고 사도(邪道)가 되기도 한다.

부처님 말씀에 올바른 사람이 그릇된 수단을 사용하면 그릇된 수단이 올바른 수단으로 변하고, 그릇된 사람이 올바른 수단을 사용하면 올바른 수단이 그릇된 수단으로 변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르냐를 분별하거나 부처님이냐 하느님이냐를 시비하기 전에 하느님을 전달하고 부처님을 전달하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올바르고 순수한가를 점검해야 된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의 분노는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에너지가 되지만, 마음이 불순한 사람의 분노는 사회를 혼란시키고 자신을 번뇌망상에 사로잡히게 할 뿐이다. 진실한 사랑은 관심과 애정으로 기다리는 것이지 자신이 만들어낸 우상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불상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이 우상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신 십자가 앞에서 유일신 사상을 내세워서 타종교인을 비방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우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능력과 권능을 과시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예수님조차도 믿음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죽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어찌 온갖 이기심과 착각에 사로잡힌 중생이 어찌 자신의 신념을 강요하는가? 부처님 또한 마찬가지다. 결단코 부처님은 자신의 수행으로 오직 당신 자신을 해방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스스로의 해방을 찾아서 직접 나아가야 된다. 결단코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인간은 생긴 모습만큼이나 각자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거기서 비롯되는 삶의 문제 또한 다양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문제에 따라서 해결하는 방법이 다양할 수 밖에 없다.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의사 역시 전문 분야가 있듯이 개인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 역시 다르다. 병의 증상과 개인의 근기에 따라서 무조건 죄사함을 받고 용서를 받는다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도 있고, 자신의 병의 원인과 상태를 정확히 진단해서 스스로 이겨나가고 극복해가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이 있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감당하기 벅차고 힘겨운 것이다. 때로는 삶 자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체험은 엄청난 위로와 삶의 의미를 더해준다. 삶의 고통과 무게로 방황 하다가 갑자기 종교적인 체험이나 어떤 신비감을 경험하게 되면 한동안은 마치 자신이 체험하는 종교만이 진정한 종교인양 착각 하기도 한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그 종교의 창시자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따르기 보다는 집단 에고이즘에 빠져서 창시자의 이름을 빌미로 집단파워를 형성하는 일에 도취된다. 그것은 정말로 올바른 종교적 태도가 아니다.

진정한 종교적인 태도는 존재에 대한 무지를 인식하고 저차원적인 에고이즘을 극복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너와 나를 갈라놓고 집단과 집단을 갈라놓는 종교는 사회악이다. 종교의 진정한 기능은 병리적인 이기심을 버림으로 평화와 조화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적인 자세는 스스로를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는 삶의 태도를 훈련함으로 타인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자세를 배우는 것이다. 결코 자신의 믿음이나 신념과 다르다는 이유로 타인을 부정하고 다른 집단을 부정하는 태도는 너무나 반종교적이며 진실로 사회악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신도 종파도 그것 자체가 너와 나를 갈라놓고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다만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이나 부처님이 아니라 믿음의 주체인 바로 너와 내가 무지한 탓에 그릇되게 이해하고 그릇되게 행하는 것 뿐이다.

종교적인 교의나 사상이나 주의주장을 가지고 시비하는 것만큼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낭비하는 일은 없다. 창시자의 가르침이 아무리 위대하고 또 위대해도 비뚤어지고 독선적인 사람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면 그 가르침은 비뚤어지고 독선적으로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종교인이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가 믿고 따르는 대상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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