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
현실 세계는 모든 사람이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가는 동화 속의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의 삶은 불안하고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고통이 어떤 원인으로 생겨나며, 또 그 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건이 우리가 조정하고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영역 속에서 제멋대로 발생한다면, 그 때 우리는 무력해지고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마저 포기하게 된다. 그렇지 않고 고통이 전능한 존재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명령된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 없도록 이 존재를 달래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붓다는 우리의 고통이 그저 단순하게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님을 깨달았다. 모든 현상에 원인이 있는 것처럼 고통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다. 인과의 법칙은 존재의 보편적이고 기본적 원리이다. 그리고 고통의 원인은 우리의 영향 밖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업(業; kamma)
산스크리트어 ‘karma’로 알려진 ‘kamma’라는 낱말은 대체로 ‘운명’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운명이라는 낱말은 붓다가 업에 의해 의도했던 뜻과는 정반대가 된다. 업은 문자적 의미로 ‘행동’(action)이다. 우리 자신의 행동은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의 원인이다.
“모든 존재는 그들 자신의 행위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행위로부터 상속되고 생성된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행위하고자 한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의 의지처이며 삶의 토대이고 거룩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존재하게 된다.”(중부,135)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이다. 따라서 우리는 행동의 주인이 됨으로써 운명의 주인이 된다. 우리 각자는 고통을 야기하는 우리의 행동을 책임져야 한다.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고통을 종식시키는 방법을 가진다. 붓다는 말한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주인
그대 자신의 미래를 만든다.(법구경,XXX.21(380))
우리들 각자는 마치 복잡한 고가도로에서 운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눈가리개를 하고 운전대에 앉아 있는 것과 흡사하다. 그는 사고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것 같지 않다. 그가 차를 운전하고자 하나 실제로는 그 차가 그를 운전한다. 어떠한 사고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다면, 우선 눈가리개를 벗고 운전하는 법을 배우고 가능한 한 빨리 그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깨달아만 한다. 이때 우리는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는 행동을 배우게 된다.
업의 종류
업(業)에는 신체적인 업(身業), 언어에 의한 업(口業), 정신적인 업(意業) 등 세 종류가 있다. 물론 신체, 언어, 정신의 순서대로 그 중요성을 둔다. 현실에서는 다른 사람을 때리는 것을 속으로 품은 악의보다 또는 말로 심하게 모욕을 주는 것보다 더 심각한 행동으로 본다. 확실히 이것은 법률적 해석과 일치한다.
그러나 법(法, dhamma)에 따르면 정신적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 몸이나 입에 의한 업은 그 행동을 이루는 의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외과의사는 칼을 죽어 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사용하지만, 살인자는 그 칼을 사람을 죽이는 데 사용한다. 신체적으로 보면 이들 행위는 비슷하고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정신적으로 이들은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다. 외과의사는 자비로써 행동하고 살인자는 증오심으로 행동한다. 각자의 행동은 정신적 행동에 따라 완전히 다르다.
입으로 말하는 경우에도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동료와 싸우고 그를 바라보고 부르면서 욕설을 퍼붓는다. 또 어떤 사람은 진흙탕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다정스럽게 바라보고 부른다. 그는 사랑으로 말한다. 이 양자의 경우 똑같은 말을 했지만 그 마음은 반대다. 이 같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의도이다.
말이나 행동에서 드러난 결과는 순전히 정신적 행위의 결과이다. 그것들은 사람들이 표현하는 의도와 성격에 따라 판단된다.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 올 참된 의미의 업은 정신적 행동이다. 이 같은 사실을 알기 때문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은 모든 현상보다 먼저 존재하고 모든 것은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 만약 삿된
마음으로 그대가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땐 고통이 그대를 뒤따르리라,
마치 바퀴가 마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만약 순수한 미음으로 그대가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땐 행복이 그대를 뒤따르리라,
마치 그대를 따르는 그림자처럼.(상게서<上偈書>, 1, 1과2)
고통의 원인
그런데 정신적 행동(意業)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일까? 단지 마음의 의식(識), 인식(想), 감각(受), 의지작용(行) 이라면 고통은 이 중 어느 정신 과정에서 생겨나는가? 이들 각각은 어느 정도 고통을 야기하는 과정에 모두 관여한다.
의식은 단순히 경험의 자료를 받아들이고, 인식은 자료를 분류하고 감각은 입력되는 사건을 감지한다. 이 세 단계는 단지 수동적으로 입력되는 정보를 소화한다. 그러나 마음의 의지작용은 수동적 반응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싫고 좋은 감정을 발생시킨다. 마음의 의지작용(行)이 행동에 새로운 사건의 연결고리를 만들어 낸다. 사건의 출발점에는 마음의 의지작용인 상카라(행,sankhara)가 있다. 붓다는 말한다.
고통이 일어나는 곳에는 그 원인이 되는 의지작용이 있다.
만약 이 마음의 조작이 멈추면 고통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수타니파타<Sutta Nipata>,3.12)
고통의 진정한 원인, 진실한 의미의 업은 마음의 의지적 작용이다. 싫고 좋은 순간적인 마음의 조작은 아직 뚜렷한 결과를 만들지 않지만 계속하여 축적이 된다. 마음의 반응은 순간순간 반복되고 반복됨에 따라 강화되어 혐오감이나 갈망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초전법륜(初轉法輪)에서 말한, 문자적 의미로 갈애를 뜻하는 탕하(tanha)이다. “갈애”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현재에 대한 불만족을 의미한다.(상응부) 갈망이나 불만이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의 사고, 말,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고통은 그만큼 깊어진다. 붓다는 말한다.
“몇 가지의 의지인 행위(行)는 연못의 물 위에 그어놓은 선과 같이 긋자마자 곧 사라진다. 어떤 행위는 모래밭에 그어놓은 선처럼 파도와 바람에 의해 지워진다. 또 어떤 행위는 끌과 해머로 바위에 깊이 새겨놓은 선과 같아서 바위가 바닷물에 침식될 때까지 수많은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지워진다.”(증지부.3 5.3,130)
살아가면서 마음은 계속적으로 반응하고 조작하여 간다. 만약 잠자리에 들어 그것들을 기억해 내려 하면 깊은 인상을 남긴 한두 개 정도의 행위를 상기시킬 수 있다. 만약 월말에 자신의 행위를 돌이켜보면 역시 한두 개 정도의 조작되어진 우리 자신의 행위를 기억할 수 있다. 다시 연말에 우리는 그 해에 가장 인상 깊었던 건전하지 못한 충동적 행위를 한두 개 정도 기억해 낼 수 있다. 지워지지 않고 이와 같이 깊이 잠재되고 축적되어진 마음의 의지적 조작은 매우 위험하고 커다란 슬픔의 원인이 된다.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째로 마음의 조작행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철학적 개념이나 믿음이 아닌 진실로 우리의 삶에 깊게 영향을 주는 힘의 존재로써, 있는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고통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는 고통을 받는지를 이해하고 스스로 시인함으로써 마음의 조작이나 충동 등을 멈출 수 있고 조절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본성을 직접 자각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질문과 대답
질문; 고통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삶의 일부인가? 왜 우리는 그것들을 피할 수 없는가?
대답; 우리는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 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대가 정신의 순수한 행복이 존재함을 믿는다면, 행복이 마음의 자연스런 상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질문; 고통은 사람을 성숙시키고 품위 있게 만들 수도 있지 않는가?
대답: 그렇다. 사실 수행은 고통을 통해 사람을 품위 있게 만드는 정교한 도구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당신이 고통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때만 가능하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고통에 집착한다면 고통은 당신을 고귀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것은 비참한 상황이다.
질문;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계속 관찰한다면 어떻게 일상생활을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관찰하는 데에 너무 바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행동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대답: 수행을 완전히 다 마친 사람은 매우 자연스럽다. 지금 그대로 10일 수련 코스에 참여함으로써 정신적 훈련을 받는다. 이것이 그대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필요한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다. 당신이 온 종일, 온 생애를 눈감고 수행할 필요는 없다. 마치 체력 훈련에서 얻은 힘이 일상생활 속에서 당신을 돕듯이 이 정신적 훈련 역시 일상생활 속에서 당신을 도와 줄 것이다. 당신이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맹목적인 충동이다. 스스로를 관찰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삶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평정 속에서 당신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당신은 이때야 비로소 참되게, 긍정적으로 자신과 이웃에게 유익한 행동을 할 것이다.
질문; 어떤 원인도 없이 우연히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없는가?
대답; 원인이 없이 그냥 일어나는 사건은 없다. 종종 우리들의 감각이나 지성으로 알 수 없는 경우는 있지만 그것이 원인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질문; 그러면 인생은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는가?
대답; 확실히 우리 과거의 행동은 선이나 악의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경험되는 상황, 삶의 형태를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과거의 행동에 의해서 예정되고 규정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거 우리의 행동의 쾌락이나 불쾌의 경험이 우리 삶의 흐름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동시에 현재의 행동도 중요하다. 자연은 우리에게 현재 우리 행동의 주인이 되는 능력을 주었다. 이 같은 통제력이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킨다.
질문; 그런데 다른 사람의 행동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가?
대답; 물론이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호전적이라면 전쟁과 파괴가 일어나 고통을 야기한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정화시키기 시작하면 폭력은 줄어든다. 문제의 뿌리는 각 개인의 마음 안에 있다. 왜냐하면 사회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만약 각 개인들이 변화하기 시작하면, 그때 사회는 변할 것이고 전쟁과 파괴도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질문; 각 개인이 그 자신이 한 행동의 결과로써 한정되어 있다면 어떻게 다른 개인을 도울 수 있는가?
대답; 우리 자신의 정신적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생각만 일으킨다면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건강한 마음과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당신은 다른 사람의 행동을 조절할 수 없지만 주변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위해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질문 ; 왜 유복함이 좋은 업이 되는가?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부유한 서구인의 대부분은 선업(善業)을 가지고 있고 가난한 제3세계의 사람들은 악업(惡業)을 가지고 있는가?
대답; 오직 부(富), 이것만이 선업은 아니다. 만약 부자가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고통스럽다면 어떻게 이 부를 잘 사용하겠는가? 부를 가지면서도 진실로 행복하다면 그것은 선업이다. 부자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행복이다.
질문; 우리는 어떻게 건전하지 못한 습관적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대답; 행위의 인위적인 조작보다는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행동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식물처럼 무감각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운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삶을 행위의 조작으로부터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매우 가치 있는 무엇을 얻을 것이다. 또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당신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종자와 열매
원인이 있으면 그 결과도 있다. 씨앗이 있으면 열매도 있다. 행동이 있으면 결과도 있다.
농부가 밭에 두 종류의 씨앗을 뿌렸다. 하나는 망고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악취가 나는 열대 식물인 님(neem)나무의 씨앗이다. 이 두 씨앗을 같은 토양에 같은 양의 물을 주고 동일한 공기와 햇살을 받도록 한다. 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온 힘을 다하여 님나무는 악취를 풍기고 망고나무는 온 힘을 다하여 향기를 내뿜으며 자란다. 왜 자연은(당신이 좋다면 신이라고 해도 좋다) 하나에게는 향기를 주고 다른 하나에게는 악취를 주었는가? 자연이 불공평한 것은 아닌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자연은 친절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고정된 법칙대로 작용할 뿐이다. 자연은 씨앗의 본성이 드러나도록 도와 줄 뿐이다. 모든 자양분이 씨앗의 잠재적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준다. 망고나무의 씨앗은 향기로운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무도 향기롭다. 님나무의 씨앗은 쓴맛의 성품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무는 필연적으로 쓴 향을 낸다.
농부는 님나무에게 가서 세 번 절하고 그 주변을 108번 돌면서 꽃이 피고 향기가 나고 열매 맺기를 바란다. 그리고 농부는 기도를 한다. “오, 님나무 신이여, 제게 향기로운 망고를 주세요. 저는 향기로운 열매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엾은 님나무 신은 농부에게 망고를 줄 수 없다. 만약 망고의 열매를 원한다면 농부는 망고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그 누구에게 구걸할 필요도 없다. 만약 농부가 망고나무의 씨앗을 심으면 향기로운 망고나무의 씨앗을 얻을 수 있다. 씨앗이 있으면 열매가 있다.
우리의 무지는 뿌린 씨앗에 대해 엉뚱한 열매를 원한다는 점이다. 님나무의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을 때가 되면 우리는 갑자기 엉뚱하게 망고 열매를 원한다. 그리고 희망 없는 망고열매 맺기를 기도하며 울기까지 한다. 이런 일은 소용없는 짓이다.(증지부.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