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문제의 뿌리
고통의 문제는 끝까지 철저하게 탐구되어야 한다. 붓다는 말한다.(상응부) 붓다가 깨닫던 날 밤 그는 고통이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소멸되는지 알 때까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으로 보리수 밑에 앉았다.
고통의 정의
분명하게 고통이 존재함을 붓다는 보았다. 비록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통은 인생의 시작과 더불어 생긴다. 어머니 배 속에서의 생활을 기억할 순 없지만 태어나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탄생은 커다란 상처이다. 인생이 시작되면서 필연적으로 병과 늙음의 고통을 만난다. 그러나 비록 병에 걸리고 늙어 가지만 우리 모두는 죽기를 원치 않는다. 죽음은 정말로 큰 슬픔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죽음에 직면한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인 여러 형태의 고통을 만날 수밖에 없다.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싫어하는 것과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이 고통이다.
고통의 실례들은 깊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붓다는 지적인 설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계속하여 내부에서 고통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실험을 했다. 붓다는 “물질(色), 의식(識), 인식(想), 감각(受), 의지작용(行)의 오온(五蘊)에 대한 집착”(상게서)이 고통임을 발견했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고통은 우리들 각자의 몸과 마음속에 생겨나는 비정상적인 집착이다. 인간은 자신의 정신이나 육체에 깊이 집착해 있다. 이 집착은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며 실제로 계속되는 고통일 뿐이다.
집착
집착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습관적으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집착이다. 마약에 중독이 된 사람은 마약의 사용이 중독을 더욱 깊게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약에 의해 감각적 쾌락을 계속 경험하기를 바란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조건지어진 갈망의 수준을 탐닉한다. 하나의 욕망이 만족되면 또 다른 욕망이 발생한다. 그 대상은 오히려 이차적이다. 사실 모든 갈망 자체가 쾌락적 감각을 발생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적으로 갈망의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갈망은 이미 소멸시킬 수 없는 중독 상태, 습관이 되어 있다. 중독자에게 약을 점차로 줄이면 더 많은 분량을 요구하는 것처럼, 갈망이 점차 강해질수록 더욱 그 갈망을 만족시키려 한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갈망을 소멸시킬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갈망하는 한 결코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
두 번째 집착은 스스로 가지는 자기의 이미지, 즉 자아 “나”이다. 우리 각자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쇳가루로 둘러싸인 자석처럼 행동한다. 자석은 종이 위에 있는 모든 쇳가루를 자기를 중심으로 배열시킨다. 조그만 반성도 없이 우리 모두는 본능적으로 싫은 것은 거절하고 쾌락은 추구하면서 세계를 자기중심으로 정돈하려 한다. 그러나 누구도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타인과 갈등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각자가 만들고 싶은 배열 형태는 다른 사람의 자기장에 의해 방해받는다. 우리는 쉽게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는 불행과 고통뿐이다.
집착은 “나”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집착을 “나의 것”까지 확대한다. 우리 각자는 소유한 것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유한 것은 우리와 결합되어 있고 “나”의 이미지를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만일 “나의 것”이 영원히 존재하고 “나”가 그것을 영원히 즐길 수 있다면 이것에 대한 집착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나”와 “나의 것”은 분리되어 있어 언젠가는 헤어질 시간이 온다. 그 때가 되면 집착이 크면 클수록 고통은 더욱 커진다.
집착은 더욱 광범위하여 견해나 신념까지 확대된다. 이것이 실제적으로 어떤 내용이든지, 옳든 잘못되었든 간에 우리가 집착한다면 분명히 그것은 불행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견해와 신념이 최상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것들에 대한 비판을 하면 매우 언짢아한다. 또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고자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황하게 된다. 그러나 본인의 신념이나 견해를 주장하는 것은 효과가 없는 설득이다. 오히려 선입견이나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實相,reality)을 보는 일이 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견해에 대한 집착은 진실을 보는 데 방해될뿐더러 우리를 계속 불행하게 한다.
세 번째 종류는 종교적 형식이나 의식에 대한 집착이다. 우리는 내면적 의미보다도 종교의 외적 표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종교적 의식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진실한 종교인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본질적 요소가 결여된 외형적 종교의식은 빈껍데기임을 망각한다. 만약 마음이 여전히 성나고 악의로 가득 차 있다면, 기도하고 의식을 행한다 해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참된 종교인이 되기 위해 모든 살아 있는 생명에 대한 순결, 사랑, 자비와 같은 종교적 태도를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외형적인 종교의식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정신보다는 의식의 껍데기에 더 비중을 둔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을 놓치게 되고 무지한 상태로 남게 된다.
모든 우리의 고통은 이런 세 가지의 집착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고통과 집착은 항상 함께 발견된다.
연기(緣起) : 고통이 발생되는 인과의 고리
집착의 원인은 무엇인가? 집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붓다는 자신을 분석하고 관찰함으로써, 집착은 좋고 싫은 것을 분별하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선택하는 의지적 행위(行)에 의해서 생겨남을 발견했다. 미음의 무의식적 조작 행위는 반복되고 순간순간 강화되어 강력한 힘과 충동으로 자라나 모든 집착에 개입한다. 집착은 마음속에서 무의식적 조작적 반응이 발전된 형식에 불과하다. 이것이 고통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렇다면 좋고 싫은 분별하는 조작 원인은 무엇인가? 붓다는 깊이 관찰하여 그것이 감각(受;Sensation)임을 발견했다. 쾌락을 느끼는 감각은 대상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불쾌한 감각은 싫어하게 된다. 왜 이런 감각이 생겨났는가? 감각의 원인은 무엇인가? 붓다는 더욱 깊게 관찰하여 그것이 접촉(接觸)임을 발견했다. 눈은 색깔을, 귀는 소리를, 코는 향기를, 입은 맛을, 몸은 만질 수 있는 것들을, 마음은 생각. 감정. 이념. 기억. 상상된 것들과 접촉한다. 이 다섯 가지의 신체적 감각과 마음으로 우리는 세계를 경험한다. 물질적 대상이나 정신적 현상이 이 여섯 감각과 접촉할 때마다 감각은 쾌락이나 불쾌를 일으킨다.
왜 첫 번째에 접촉이 있는가? 붓다는 눈, 귀, 코, 입, 신체, 마음의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六處)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접촉은 불가피하다. 세계는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 다양한 생각들과 감정들, 셀 수 없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세계와의 접촉은 피할 수 없다.
왜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六處)이 있는가? 이것들은 마음과 물질의 흐름에서 본질적 측면이기 때문이다. 왜 물질과 마음의 흐름이 있는가? 이 흐름의 원인은 무엇인가? 흐름(flow)은 세계를 보는 자와 보여지는 것, 주체와 객체, 나와 타인으로 구분하는 인식행위인 의식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런 이원적 격리로부터 탄생과 개체와 과정이 일어난다. 매 순간마다 의식은 일어나고 이때 정신과 물질의 형태를 수반한다. 다음 순간에 의식은 재빠르게 다른 형태로 변한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지만 의식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어떤 간격도 없이 의식은 새로운 형태로 한 존재에서 다음 생까지 계속 이어진다.
이때 의식의 흐름은 무엇으로 인하여 계속되는 것일까? 붓다는 이것을 심리적 의도(行) 때문이라고 보았다. 마음은 끊임없이 작의(作意)를 일으키고 모든 심리작용은 의식의 흐름에 추진력을 주어 다음 순간까지 계속되게 한다. 심적 작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이 주는 추진력은 더욱 강해진다. 한 순간의 미세한 마음의 작용은 오직 그 한 순간의 흐름으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좋고 싫은 것의 순간적인 의지 선택이 갈망이나 혐오의 형태로 강화되면 그것은 추진력을 얻어 여러 순간에 반복되고 또 몇 분, 몇 시간 동안 계속된다. 갈망이나 혐오감도 더욱 깊어지면 몇 달, 몇 년까지도 지속된다. 만약 전 생애를 걸쳐서 특정 형태의 무의식적 충동(行)이 계속하여 반복되고 강화되면, 이 마음의 작용은 다음 생애까지 충분히 지속될 것이다.
마음의 의지적 작용(作意)은 무엇으로 일어나는가? 실재를 깊이 관찰한 결과, 붓다는 바로 무지(無知) 때문에 일어난다는 사실은 알았다. 우리는 우리가 마음으로 어떤 사건에 재반응하여 조작한다는 사실을 모를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재반응하여 조작하는 마음의 진실한 본성을 모른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영원하지 못하고(無常), “나”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無我)을 알지 못한다. 또한 이것들에 대한 집착이 고통(苦)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모르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반응하고, 이 맹목적 충동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맹목을 고집하고 더욱 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무지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심리 조작에 의한 습관 속에 갇혀 지낸다. 이것이 고통의 수레바퀴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원인이다.
무지(無明)를 연(緣)하여 의지작용(行)이 일어나고
의지작용을 연하여 의식(識)이 일어나고
의식을 연하여 마음과 물질(名色)이 일어나고
마음과 물질을 연하여 여섯 감각(六處)이 일어나고
여섯 감각을 연하여 접촉(觸)이 일어나고
접촉을 연하여 느낌(受)이 일어나고
느낌을 연하여 갈망과 증오(愛)가 일어나고
갈망과 증오를 연하여 집착(取)이 일어나고
집착함을 연하여 생성(有)이 일어나고
생성을 연하여 탄생(生)이 일어나고
탄생을 연하여 늙음과 죽음, 슬픔과 한탄, 육체와 정신의 고통과 시련이 일어난다.(중부.38)
이런 인과(因果)의 고리에 의해서 우리는 현재에 존재하고 미래의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마침내 진리는 분명해졌다. 고통은 “나”라고 불리는 현상, 우리의 참된 본성에 대한 무지에서 시작된다. 다른 고통의 원인은 의지작용(行), 습관적인 마음의 조작. 충동이다. 무지로 눈이 멀었기 때문에 우리는 갈망과 증오를 쌓아 가고 이것에 다시 집착하여 모든 불행을 만들어 낸다. 마음의 의지적 습관은 미래를 만들어 내는 행위자, 즉 업(業)이다. 행(行)은 단지 참된 본성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일어난다. 무지, 갈망, 증오는 모든 고통을 일으키는 세 가지의 뿌리이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고통과 그 원인을 이해함으로써, 붓다는 다시 어떻게 고통을 종식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붓다는 인과라는 업의 법칙을 문제의 실마리로 삼는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인하여 저것이 일어난다. 만약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멈춤으로 인하여 저것이 멈춘다,”(상게서<上揭書>)
원인 없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원인이 소멸된다면 결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고통이 일어나는 과정을 거꾸로 관찰된다.
무지가 소멸되면 의지작용이 멈추고
의지작용이 멈추면 의식이 멈추고
의식이 멈추면 마음과 물질이 멈추고
마음과 물질이 멈추면 여섯 감각이 멈추고
여섯 감각이 멈추면 접촉이 멈추고
접촉이 멈추면 느낌이 멈추고
느낌이 멈추면 증오와 갈망이 멈추고
증오와 갈망이 멈추면 집착이 멈추고
집착이 멈추면 생성이 멈추고
생성이 멈추면 탄생이 멈추고
탄생이 멈추면 늙음과 죽음, 슬픔과 한탄,
정신적 신체적 고통과 재난이 멈추고
그래서 고통의 덩어리가 멈춘다.(상게서)
만약 무지가 뿌리째 뽑히면 모든 종류의 고통을 야기하는 맹목적인 의지작용도 없다. 더 이상 고통이 없다면 그때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경험한다. 고통의 수레바퀴는 자유의 수레바퀴로 변하게 된다.
이것이 고마타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실천했던 바이고 가르친 내용이다. 그는 말한다.
스스로 악을 행함으로써 그대는 그대 자신을 더럽힌다. 스스로 악을 행하지 않으면 그대는 그대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바이다. (법구경)
우리 각자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신의 의지적 행위(行)에 대해 책임이 있다. 이런 책임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윤회(輪廻, samsara)
연기의 수레바퀴에 의해서 붓다는 윤회(輪廻, samsara)의 과정을 설명한다. 당시 인도에서 윤회라는 개념은 널리 일반화된 상식이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윤회를 지지할 수 없는 걸맞지 않는 교의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윤회를 받아들이거나 거절하기 이전에 윤회가 존재하는지에 관하여 이해해야 한다.
윤회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반복되는 존재의 사이클이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를 계속되는 삶의 과정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힘이다. 낮은 수준이든 높은 수준이든 각자의 삶은 우리의 행위에 따라 천하기도 하고 거룩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윤회의 개념은 현생에서 행한 행동의 보상을 내생에서 받게 된다고 가르치는 다른 종교들의 개념과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붓다는 최상의 거룩한 존재에게서조차 고통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시 태어나는 곳이 어디든지 환생은 전체적으로 고통이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자유로울 때 세속적인 기쁨보다 진실한 행복(法悅)을 경험한다. 붓다는 모든 생활 속에서 이런 행복을 경험하는 길을 가르쳤다.
윤회(samasara)는 환생을 반복하면서 고전된 동일성을 유지하는 자아나 영혼의 전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붓다는 이쪽의 삶에서 저쪽의 삶으로 옮겨가는, 그러면서도 전혀 변화가 없는 동일성은 없다고 말한다.
“소에서 우유가 나오는 것처럼, 우유에서 응유(凝乳)가 나오고, 응유에서 버터가 나오고, 깨끗한 버터에서 걷어 올린 크림이 나온다. 우유가 있을 때는 그것을 응유나 버터 그리고 크림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재에서 현재의 순간만이 참으로 진실한 모습이다. 과거나 미래는 기억이나 상상에 속하는 것이다.”(장부.9)
붓다는 고정된 자기의 동일성이 계속 반복하여 환생한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과거나 미래의 존재는 없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의 행위가 생성되는 삶의 흐름에 추진하는 힘(연료)이 계속 주어지는 한, 이쪽 삶에서 저쪽 삶으로 계속하여 생성되어감을 깨달았고 가르쳤다.
비록 현재의 순간만이 진정한 존재라고 믿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연기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가 자신의 맹목적인 의지작용에 관하여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지금 여기에서 고통을 만든다. 만약 무지를 제거하고 맹목적인 의지작용을 멈춘다면 지금 여기에서 곧장 행복을 경험할 것이다. 천당과 지옥은 지금 여기에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육체 안에서, 이 현생에서 경험된다. 붓다는 말했다.
“비록 내생은 없으며 선한 행위에는 보상을 받고 악행은 처벌을 받을 미래가 없다고 믿을지라도, 질투와 혐오과 무지로부터 자유롭다면 모든 삶 속에서 그는 행복하게 살아간다.”(증지부)
과거나 미래의 존재에 대해 믿거나 믿지 않거나 관계없이,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맹목적인 의지작용에 의해서 야기되는 문제들, 현재의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며, 맹목적인 습관을 종식시킴으로써 고통을 소멸시키는 길을 밟을 것이며, 자유와 행복을 지금 경험하는 것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 건전한 갈망과 혐오가 있지 않는가? 이를테면 독재에 대한 혐오, 자유에 대한 갈망, 신체적 상처에 대한 두려움 등?
대답; 갈망과 혐오는 결코 건전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항상 당신을 긴장시키고 불행하게 할 것이다. 만약 마음속으로 갈망과 혐오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비록 당신이 매우 가치 있는 목표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을 얻기 위해서 당신은 끝내 건전하지 못한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물론 당신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당신은 공포에 압도되어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당신은 결국 스스로에게 해를 주는 공포를 발전시킬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혐오감을 가지고 불의와 싸워 성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혐오감은 해로운 정신적 상처나 콤플렉스를 만든다. 당신은 불의와 싸워야 한다. 당신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균형 잡힌 마음으로 행동해야 한다. 평정심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좋은 무엇을 성취하는 일을 할 수 있다. 평정심은 항상 도움이 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문: 미래를 위한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것도 갈망의 일종인가?
대답: 판단의 기준은 당신이 그 계획에 집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모든 사람은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만약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당신이 울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에 집착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어도 여전히 웃으면서 “나는 최선을 다 했다. 실패했을지라도 다시 도전할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당신은 여전히 행복하다.
질문: 연기의 수레바퀴가 멈춘다는 것은 자살이나 자기 허무주의에 떨어진다는 소리처럼 들린다. 왜 우리는 이것을 원하는가?
대답; 허무주의의 추구는 인생에 있어 무엇을 성취하려는 비정상적인 갈망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해롭다.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한 갈망도 없이 자유분방하지도 않으면서 일이 진행되는 본성에 순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질문: 그러나 마음의 의지적 작용인 행(行,sankhara)의 사슬이 완전히 멈출 때 비로소 윤회가 멈춘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대답;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지금 현재의 삶, 바로 그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라.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 멋진 현재를 만들어 가라. 그러면 자동적으로 미래는 좋다. 윤회에 관계된 마음의 의지적인 모든 행(行)이 소멸될 때 삶과 죽음의 과정은 멈추게 된다.
질문: 그것은 소멸이 아닌가?
대답; “나”라는 환상의 소멸이 고통의 소멸이다. 이것이 불꽃을 불어서 끈다는 낱말 nibbana(涅槃)의 의미이다. 인간은 갈망의 불꽃, 화의 불꽃, 무지의 불꽃으로 끊임없이 타오른다. 이 불꽃이 멈추면 괴로움도 멈추게 된다. 남은 것은 오직 긍정성이다. 그러나 이 긍정성은 감각적 영역을 초월하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현재의 삶 속에서 경험되어야 한다. 그때 당신은 존재의 본성을 알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알게 되면 소멸의 공포는 사라지게 된다.
질문: 그때 의식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대답: 왜 그것을 걱정하는가? 오직 경험되어질 성격의 것을 사변적인 말로써는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최고의 목적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당신을 오히려 멀리 격리시켜 놓을 것이다. 당신이 그곳에 도달하면 그것을 즐기라. 더 이상 의심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 이르기 위해 뜨겁게 노력하라.
조약돌과 버터기름
어느 날 한 젊은이가 울면서 붓다를 찾아왔다. 그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붓다는 그에게 물었다.
“젊은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예, 어제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쩔 것인가? 운다고 해서 돌아가신 분이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특별한 부탁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제발 죽은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십시오.”
“음, 내가 죽은 너의 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발 무언가를 좀 해주십시오. 당신은 매우 힘이 있는 사람이고 분명히 무엇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사제들, 면죄부를 파는 사람, 자선 기부금을 모으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돕기 위해 장례식이나 종교적 의식을 집행합니다. 제식이 행하여지면 천국의 문이 열리고 죽은 사람들은 그곳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말하자면 입국비자를 얻은 것입니다. 부처님, 당신은 그런 힘이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죽은 저의 아버님을 위해서 제사를 지내 주신다면, 그는 비록 입국비자는 발급받지는 못했지만 영원한 거주를 승낙받게될 것입니다. 제발 죽은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해 주십시오.”
이 젊은이는 너무나 슬펐기 때문에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붓다는 그를 위해 새로운 방식을 사용했다. 붓다가 그에게 말했다.
“좋다. 시장에 가서 단지 두 개를 사 오너라.”
젊은이는 붓다가 그의 죽은 아버지를 위해 어떤 의식을 집행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매우 기뻐했다. 그는 시장으로 달려가서 단지 두 개를 사가지고 왔다.
“좋다. 한 쪽에는 버터기름를 넣고 다른 쪽에는 자갈을 넣어라.”
붓다가 지시한 대로 젊은이는 따랐다.
“자, 그것들을 연못에다 집어넣어라.”
젊은이는 그대로 했다. 두 개의 단지는 연못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붓다는 말했다.
“자 이제 긴 막대기를 가지고 와서 그 단지를 쳐서 깨뜨려라.”
젊은이는 붓다가 그의 아버지를 위해 훌륭한 의식을 행한다고 생각하고 매우 기분이 좋았다.
인도의 옛 관습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의 아들은 화장터로 가서 장작 위에 놓고 불태운다. 몸이 반쯤 탔을 때 아들은 두꺼운 막대기로 두 개골을 지끈 깬다. 옛 관습에 의하면, 두개골이 이 때 깨어지면 천국의 문이 열린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젊은이는 ‘아버지의 몸은 이제 다 재로 변해가고 붓다는 상징적으로 내가 이 단지를 깨뜨리기를 원하는구나.’ 고 생각했다. 그는 매우 행복했다.
붓다가 말한 대로 젊은이는 막대기를 가지고 두 개의 단지를 내리쳐 깨뜨렸다. 당장에 한 쪽 단지에 담겨진 버터가 흘러나와 연못 물 표면으로 떠올랐다. 다른 쪽에 담긴 자갈은 흘러나와 밑바닥에 남았다. 그때 붓다는 말했다.
“젊은이, 이것이 내가 행한 의식이다. 자, 이제 너의 사제들과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불러와 그들에게 찬송과 기도를 하게 하라. ‘오 자갈이여 위로 올라오라, 위로 올라오라. 버터여 밑으로 가라앉으라, 가라앉으라.’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오, 부처님 당신은 지금 농담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자갈은 물보다 무겁기 때문에 바닥으로 가라앉습니다. 그것들은 위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버터는 물보다 가볍기 때문에 물 표면에 올라옵니다. 버터는 아래로 가라앉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젊은이여, 그대는 자연의 법칙은 매우 잘 알고 있으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대의 아버지가 그의 인생에서 자갈처럼 무거운 행위를 했다면 그는 반드시 아래로 내려간다. 누가 그를 위로 끌어올리겠는가? 그리고 버터처럼 그의 행동이 가벼웠다면 그는 반드시 위로 올라간다. 누가 그를 아래로 끌어내리겠는가?”
우리가 보다 빨리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여 그 법칙에 따라 살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보다 빨리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상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