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도덕성의 훈련
수행이란 무지, 갈망, 혐오 등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여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작업이다.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붓다는 실천의 방법을 발견하고 몸소 가르쳤다. 붓다는 이 방법을 팔정도(八正道, the Noble Eightfold Path)라고 불렀다.
모든 악을 삼가고 선을 행하며 그대의 마음을 정화시키라. 이것이 깨달은 사람의 가르침이 다.(법구경)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매우 명료한 가르침이다. 모든 사람들은 해로움을 주는 행동은 피하고 자비로운 행동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해롭다든가 자비롭다는 것 혹은 건전하다든가 사악하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자신의 견해, 전통적인 믿음, 우리의 선호나 편견에 따라 이것들을 이해한다면, 결국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좁은 교파적 이해에 머물고 만다. 붓다는 이런 편파적 해석을 버리고 건전함과 사악함, 자비와 죄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를 제공한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행동, 그들의 평화와 조화를 방해하는 행동은 건전하지 못한 잘못된 행동이다. 다른 사람을 돕고 평화와 조화에 기여하는 행동은 건전하고 가치 있는 행동이다. 더구나 수행은 종교적 의식을 행하거나 지적인 훈련 없이 스스로 실재를 직접 경험하고 또한 고통을 만들어 내는 조건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하는 일을 함으로써 자체를 정화시킨다.
팔정도(八正道)는 계(戒, sila), 정(定, samadhi), 혜(慧, panna) 세 단계로 나뉘어 진다. 계는 몸과 입으로 행하는 건전하지 못한 행동을 삼가는 도덕적 실천이고, 정은 주의력을 모아 자신의 정신과정을 의식적으로 조정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수행이며, 혜는 그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순수한 통찰의 발전된 형태이다.
도덕적 실천의 가치
법(法)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은 계행을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수행의 진보에 없어서는 안 될 첫 번째 단계이다. 우리는 모든 행동(身), 말(口), 뜻(意)을 절제해야만 한다. 사회는 그 자체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요구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해롭기 때문에 행동의 절제가 요구된다. 마음속에서 초조함, 갈망, 그리고 혐오이 일어나지 않고서 건전하지 못한 행동들, 거짓말, 살인 도적질, 사음 등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갈망과 화를 내는 순간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 더 깊은 불행을 가져온다고 붓다는 말한다.
현재 타오르는 불꽃은 미래에도 타오르고, 악을 행하는 자는 두 번이나 고통을 받네.
현재 행복하면 미래에도 행복하고, 덕이 있는 사람은 두 번 기뻐하네.(상게서)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의 생에서 바로 우리의 내면에 있는 그것을 경험할 수 있다. 잘못된 행동을 범할 때 우리는 혐오와 갈망이라는 지옥의 불꽃을 경험한다. 자비를 실천할 때 천국의 내적 평화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전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삼가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자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행복 그 스스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서 그러하다.
계행의 실천을 위한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꿰뚫는 깊은 성찰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마음이 매우 고요해야 한다. 마음이 혼란스러우면 우물의 깊이를 들여다 볼 수 없다. 내면적 관찰은 초조함으로부터 자유로운, 고요한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가 잘못된 행위를 할 때마다 마음은 초조함으로 넘치게 된다. 몸으로나 정신으로나 모든 악(惡)을 멀리할 때 마음은 충분히 평화로워져 내면의 관찰을 계속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계행이 왜 본질적인 문제인가 하는 세 번째 이유가 있다. 법(法)을 실천하는 사람은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궁극적 목표를 향하여 간다. 이렇게 수행하는 동안 그는 버리려고 하는 모든 옳지 않은 습관들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행동은 수행을 향한 모든 순간에 발걸음을 뒤로 옮기게 하며 목표를 향해 가는 데 방해가 된다. 이때 계는 사회의 정의와 구성원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개인의 세속적인 선과 수행의 진전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팔정도의 세 부분인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은 계행의 실천에 포함된다.
바른 말(正語)
말은 순수하고 건전해야 한다. 순수는 삿됨을 제거함으로써 성취된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삿됨을 이루는 요소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말하자면 거짓말, 험담, 욕설, 부질없는 이야기, 자기와 다른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는 의미 없는 잡담,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너절한 말들이 포함된다. 이런 모든 잡된 말들을 삼감으로써 바른 말(正語)이 남게 된다.
이것은 오직 부정적인 개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어(正語)를 실천하는 사람에게 붓다는 설명한다.
진실을 말하라.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고 성실하며 신뢰할 수 있도록 확고해라. 싸움을 중재하고 화합을 조성하며, 조화를 즐거워하며 조화를 추구하고 말로써 화합을 만들어 내라. 말은 점잖고 듣기에 편하며 친절하게, 따뜻하고 용기를 북돋우며 긍정적으로 즐겁게 하라.
정어를 실천하는 사람은 법과 계행에 맞게 적절한 시기에 말한다. 그의 말은 매우 합리적 이며 절제되어 있고 건설적이다.(중부)
바른 행동(正業)
행동 역시 깨끗해야 한다. 말과 함께 우리는 잘못된 행동을 삼갈 수 있도록 잘못된 행동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와 같은 행동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 사음, 자기가 한 말이나 행동을 알지 못할 정도로 술을 과음하는 것, 마약의 흡연 등이 포함된다. 이런 잘못된 행동을 삼감으로써 건전하고 바른 행동을 지킨다.
이것 역시 부정적 개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른 행동(正業)을 실천하는 사람에 관하여 붓다는 말했다.
회초리와 칼을 옆으로 치워 두고, 정업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해를 주지 않으며 친절하고 모든 생명의 선을 추구한다. 어떤 비밀도 없이 스스로 순수 그 자체가 되어 살아간다.(상게서)
계행(戒行)
세속적 생활을 하는 일반인은 바른 말과 행동을 실천하기 위해서 다섯 가지의 계행을 지켜야 한다.
1.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
2. 훔치지 않는다.
3. 사음하지 않는다.
4. 거짓말하지 않는다.
5. 술을 마시지 않는다.
오계는 도덕적 행위에 필요한 본질적인 최소한의 것이다. 법(法)을 실천하는 모든 사람은 이것들을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마음을 정화시키고 자유를 향하는 길을 걷기 위해 며칠 아니 단 하루라도 바쁜 세속적 일상생활을 옆으로 제쳐두어야만 한다. 이를테면 10일 수련코스 같은 기회가 주어질 지도 모른다. 이런 기간은 법을 실천하는 중요한 시간이고 이런 시기의 행동은 일상생활보다 더욱 주의 깊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마음의 정화에 맞지 않는 행동은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런 시기에는 팔계를 지키는 것이 좋다. 이 계 가운데 사음을 삼가라는 계율은 모든 음행을 금하는 조항으로 바뀌어 적용되고, 오계에 때 아닌 때 먹지 말라, 오락을 즐기거나 몸에 장식물을 부착하지 말라, 사치한 침대를 사용하지 말라는 계행이 더 첨가된다.
독신생활의 요구와 강화된 계행은 마음의 고요를 증대시키고 내적 관찰을 고무시킨다. 또 모든 외적 혼란으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데 도와준다. 팔계는 법의 집중적인 수행을 위해 주어진 기간동안이라도 지켜져야 한다. 이 일정한 수련의 기간이 끝나면 일반 재가 신도는 다시 오계로 되돌아간다.
마지막으로 탁발승이나 은둔자에게 적용되는 십계가 있다. 십계는 일곱 번째의 계행을 춤추고 노래하는 오락의 금지와 몸에 금, 은 등의 장식물을 지니지 말라는 두 개의 항목으로 나뉘고, 돈을 받지 않는다는 계율이 첨가된다. 탁발승은 탁발로 생활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과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해 자유롭게 완전히 마음을 밝히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다.
오계, 팔계, 그리고 십계는 전통에 의해서 명령되는 공허한 형식이 아니다. 계는 말 그대로 “수행을 완성시키기 위한 단계”로 그 자신과 타인에게 해롭지 않은 말과 행동을 확실하게 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이다.
바른 생활(正命)
각 개인은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고유한 생활 방식, 직업을 가진다. 바른 생활을 위해서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는 그 자신의 일 속에서 오계를 범하지 않아야만 한다. 오계를 범하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른 사람이 계를 범하게 하는 어떠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우리의 생활양식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도록 요구하는 생활은 바른 생활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죽였다 해도 죽은 동물의 가죽과 살과 뼈 따위를 파는 행위는 바른 생활양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술이나 다른 약을 파는 행위는 많은 이익이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을 마취시키고, 그들을 결국에는 해치게 된다. 도박하는 카지노를 경영하는 것은 수지가 맞는 일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서 노름하는 사람은 그들 스스로를 해치고 있다. 독을 팔거나 무기를 판매하는 일은 이익이 큰 사업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수의 행복과 평화를 해친다. 이것들은 결코 온당한 생활양식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생활양식이 직접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만약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결국 해를 입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바른 생활이 아니다. 전염병이 발생하기를 바라는 의사나 식량 부족 상태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장사꾼은 결코 바른 생활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이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또 각자는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회에 대한 책무를 다 한다. 이것에 대한 보상으로 각자는 스스로의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탁발하는 승려조차도 그가 받은 보시나 공양으로 그의 고유한 일 즉 자신의 선과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밝히는 일을 한다. 우리의 일로 받는 보상이 무엇이든 그것은 우리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만약 초과분이 있다면 적어도 그것의 일부는 사회에 환원되어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사회 속에서 자신을 유지하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유용한 역할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그가 하는 일은 바른 생활 방식이 될 것이다.
10일 수련코스에서 본 계행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은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실천되어야 한다. 10일 수련코스에서는 이런 관점에서 계행을 실천할 기회를 준다. 이것은 법(法)의 집중적인 수행을 위해 세속적인 생활을 잠시 제쳐놓는 기간이다. 그러므로 팔계가 모든 참가자들에게 지켜진다. 그러나 처음 이 수행 과정에 참가한 사람이나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휴식이 허용된다. 그들에게는 저녁에 가벼운 고기도 제공된다. 이런 이유로 그들에게는 오계만 적용된다. 참가자들은 팔계를 지키면서 9일 동안은 내내 침묵해야만 한다. 그들은 다른 참가자와 이야기할 수 없으나 선생님이나 운영자들과는 이야기할 수 있다. 이렇게 모든 산란함은 최소화되고 사람들은 서로 방해되지 않고 비좁은 곳에서 생활한다. 그리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내적 관찰의 미묘한 작업을 계속한다.
이렇게 수행과정 중에 그들은 다른 사람의 보시로 살아가는 수행승 같은 생활을 한다. 내적 관찰의 수행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들 자신과 타인의 선을 위해 참가자는 수행과정에 참가하는 동안 바른 생활(正命)을 실천할 수 있다.
계의 실천은 법(法)의 길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계행의 실천 없이는 도(道)의 진전을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너무나 혼란스러우면 참된 내적 실재를 탐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적 발전은 계 없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없다. 계행의 실천 없이도 여러 가지 황홀상태를 경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들은 정신적 성취라고 할 수 없다. 계행의 실천 없이 마음은 고통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또 궁극적인 진리를 경험할 수 없다.
질문과 대답
질문 : 바른 행동(正業)을 지키는 것도 집착의 한 종류가 아닌가?
대답 ; 아니다. 그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의 일을 열심히 하라. 그것들은 이루어질 것이다.
질문 ; 그러면 실수해도 좋다는 듯인가?
대답 ; 만약 실수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라. 그리고 다음에는 다시 실수하지 말라. 그러나 다시 실수할 수 있다. 다시 웃고 다른 방법으로 해 보라. 만약 실패도 웃고 넘길 수 있다면 당신은 집착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실패가 당신을 우울하게 하고 성공이 당신을 우쭐하게 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 ; 바른 행동(正業)은 결과가 아니고 단지 노력인가?
대답 ; 결과가 아니다. 만약 당신의 행동이 좋다면 자연히 결과도 좋을 것이다. 법(法)은 인과의 사슬이다. 우리는 결과를 선택할 힘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우리의 행동을 선택할 수는 있다. 곧장 최선을 다하라.
질문 ; 정당한 성행위와 잘못된 성행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충동의 문제인가?
대답 ; 아니다. 성은 가정생활에서 정당성을 가진다. 억지로 억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강하게 독신을 주장하는 고행자는 긴장을 만들고 이것은 보다 많은 문제와 어려움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만약 성적 욕구가 일어날 때마다 아무하고나 성관계를 가진다면 이때 당신은 그러한 정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양극단을 피하기 위해서 법(法)은 정신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고 서로가 허락한 남녀의 성관계인 건전한 성적 표현, 중도의 길을 마련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파트너가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성적 열정이 일어날 때마다 당신 두 사람은 그것을 관찰할 것이다. 이것은 억압도 탐닉도 아니다. 관찰함으로써 당신은 쉽게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당신 부부는 여전히 성관계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점차 성이 의미 없는 단계로 발전한다. 이것이 진실하고 진정한 독신의 단계, 마음속에서 성적 열정의 생각마저 일어나지 않는 단계이다. 이런 독신은 성적 만족을 넘어 큰 기쁨을 준다. 항상 만족스럽고 조화로운 느낌으로 살아간다. 인간은 이런 참된 행복을 경험해야만 한다.
질문 ; 서구에서는 많은 사람이, 서로 동의한 성인들의 성관계는 허용된다고 생각한다.
대답 ; 이런 견해는 법(法)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람 저 사람과 성관계를 가지는 사람은 그의 욕망과 고통을 증가시킨다. 당신은 어떤 한 사람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독신생활을 해야 한다.
질문 ; 새로운 의식이나 괴상한 환상을 경험하기 위해 약을 사용하는 경우는 어떤가?
대답 ; 어떤 학생은 환각제를 사용함으로써 명상에서 만나는 것과 같은 경험을 겪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약을 복용해서 얻는 경험은 외적인 힘에 의존한 형태이다. 그러나 법(法)은 원해서 하기만 하면 당신의 의지로 경험할 수 있도록 언제든지 당신 자신이 그대로 당신 자신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친다.
약을 사용하는 것과 의지에 의한 경험의 큰 차이점은 약을 사용한 경우 정신적 균형을 무너뜨리고 의지력을 약화시켜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힌다는 것이고, 법(法)의 실천에 의한 진리의 경험은 수행자로 하여금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도 견고한 균형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질문 ; 술을 삼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취하지 않고 적당히 술 마시는 것은 특별하게 어떤 해로움이 없는 것 같다 한 잔의 술도 계를 파하는 것인가?
대답 ; 적은 양을 마셨다 해도 결국은 술에 대한 갈망을 발전시킨다. 이것이 중독의 시작이고 결국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해를 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중독 상태는 한 잔에서 시작된다. 만약 당신이 매우 진지하게 수행하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려 포도주 한 잔을 마셨다면, 그 날 당신은 당신의 명상수행이 약해짐을 발견할 것이다. 법(法)은 음주와 함께 갈 수 없다. 당신이 진실로 법(法)을 발전시키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술을 삼가야 한다. 이것이 수많은 수행자들의 교훈이다.
질문 ; 종종 사람들은 “좋은 것이 좋다”라고 말한다.
대답 ; 왜냐하면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혐오감으로 행동하면 자동적으로 마음속에서 초조감을 느낀다. 당신이 갈망으로 행동하면 쾌락을 느낄지 모르지만 마음의 심층에는 초조감이 있다. 결국 그것은 무지에서 좋은 것을 느낀다. 당신은 그와 같은 행동이 자신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를 깨달을 때 자연적으로 그런 행동을 멈추게 될 것이다.
질문 ; 고기를 먹는 것은 계를 파한 것인가?
대답 ; 아니다. 당신이 동물을 죽이지 않았다면 아니다. 만약 당신에게 우연히 고기가 제공되고 당신이 그것을 다른 음식처럼 맛있게 먹었다면 계를 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당신은 고기를 먹음으로 인하여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살생계를 범하도록 부추긴 것이 된다. 동물은 언제나 갈망과 화를 일으킨다. 동물은 그 스스로를 관찰하고 그 마음을 정화시킬 수 없다. 동물의 온 근육은 갈망과 화로 퍼져 있다. 당신이 채식이 아닌 육식을 먹을 때 이것들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수행자는 화와 갈망을 없애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식을 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질문 ; 당신은 일상생활에서도 채식을 권하는가?
대답 ; 그것이 유익하다.
질문 ; 수행을 하면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가?
대답 ; 만약 당신이 법(法)을 실천한다면 비록 돈을 벌 수 없다 해도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돈을 벌고 법(法)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 없다. 법(法)이 더욱 중요하다. 사람은 세상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지탱해 가야만 한다. 당신은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 여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러나 법(法)과 함께 해야 한다.
질문 ; 평화주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답 ; 평화주의의 의미가 어떤 공격에 직면하면 무력해진다는 것을 뜻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법(法)은 적극적이고 실제적 방법을 가르쳐 준다.
질문 ; 마하트마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에 의한 저항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답 ; 그것은 상황에 달려 있다. 만약 공격자가 무력 이외에 다른 언어를 이해할 수 없다면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물리적 힘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 용기에 의해서 저항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법(法)의 길이다. 그리고 이것이 간디의 방법이었다. 무장된 적을 빈손으로 대항하는 것은 용기를 요구한다. 그러기 위해서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죽음은 곧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람은 두려움에 떨거나 아니면 용기 있게 죽을 수도 있다. 법(法)의 죽음은 두려움이 없다. 간디는 무력적 탄압 앞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동료의 시체를 등에 메지 말라, 당신의 가슴으로 안아라.” 고 했다. 법(法)이 간디의 가슴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성공했다.
의사의 처방
어떤 사람이 아파서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그를 진단하고 몇 가지의 처방을 적어 준다. 그 사람은 의사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다. 그는 집에 돌아와서 그의 기도실에 아름다운 사진을 걸어 둔다. 그리고 그 사진을 향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세 번 절하고 꽃과 향을 바친다. 그리고 앉아 기도하기 시작한다. 의사가 적어 준 처방을 꺼내어 매우 경건하게 “아침 두 알, 오후 두 알, 저녁에도 두 알.” 암송하기 시작한다. 온 종일 아닌 일생 동안 내내 그는 의사에 대한 믿음이 대단하기 때문에 의사의 처방을 암송한다. 그러나 의사의 처방은 아직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 사람은 의사의 처방에 대해서 더 많이 알기를 원한다. 그래서 의사에게 달려가서 묻는다. “왜 당신은 이 약을 처방했는가? 이것이 나의 병을 낫게 할 것인가?”
의사는 지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자, 이것이 그대의 병이고 그대 병의 원인이다. 만약 내가 처방한 이 약을 먹으면 병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고 설명하고 그 사람은 ‘매우 훌륭하고 그의 처방은 매우 적절한 방법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나의 의사가 가장 훌륭하다. 다른 의사들은 필요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이웃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그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평생을 주장한다 해도 이것이 결코 그를 돕지 못한다. 그가 약을 먹을 때만 그 사람은 고통이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자유를 얻은 모든 사람은 의사와 같다. 자비로운 마음으로 고통으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처방을 준다. 만약 사람들이 이런 개인에게 맹목적인 믿음을 발전시킨다면, 그들은 처방을 경전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들 종교의 창시자는 위대하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교파들과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약을 먹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의사의 충고를 환자가 따른다면 의사에 대한 환자의 믿음은 유용하다. 만약 약을 먹고자 하는 동기를 유발시켜 준다면 약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유익하다. 그러나 실제로 약을 먹지 않는다면 병은 치유되지 않는다. 당신은 스스로 약을 먹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