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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6. 집중의 훈련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인경스님)

6. 집중의 훈련


계행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제할 있다. 그러나 우리 고통의 진정한 원인은 정신적인 행동이다. 단순히 말과 행동을 삼가지만, 마음은 여전히 갈망과 혐오감 등의 건전하지 못한 정신적 행동으로 들끓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머지않아 계를 파하고 갈망과 증오가 폭발하여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미칠 것이다.

건전하지 못한 행동은 잘못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수천 동안 모든 종교는 도덕적 행위의 중요성을 가르쳐 왔다. 그러나 유혹이 밀어닥치면 마음은 거기에 휩싸이고 () 범하게 된다. 술은 해롭기 때문에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지만 마시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그는 술을 마시고 다시 취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조절할 없기 때문에 자신을 멈추게 없다. 그러자 바람직하지 못한 정신적 행위를 멈추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건전치 못한 말과 행위를 삼가는 것이 쉬워질 것이다.

문제는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 차원에서 대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바바나(bhavana) 수행을 해야 한다. 바바나는 문자적으로정신적 발전보통 말로는명상 의미한다. 바바나의 가장 일반적인 영어 해석인 명상(meditation) 보다 넓게는 정신적 이완, 백일몽, 자유연상에서 자기 최면에 이르기까지 많은 활동을 가리키는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붓다가 바바나를 사용하는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붓다는 용어를 특별한 정신적 훈련, 집중하는 기술과 마음의 정화를 가르치는 사용한다. 

바바나는 정신집중과 지혜의 훈련을 포함한다. 정신집중의 수행은 평정심(, samatha - bhavana) 발전시키고, 지혜의 수행은 통찰(, vipassna-bhavana) 발전을 가져온다. 바바나 수행은 팔정도의 번째 영역으로 정신과정을 통제할 있는 전체적 행위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진정한 주인 노릇을 하도록 한다. 바바나 수행은 팔정도(八正道)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깨달음(正念), 그리고 바른 집중(正定) 등이 포함된다.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노력이 바와나(bhavana)수행의 단계이다. 마음은 쉽게 무지 속에 휩싸이고 혐오나 격분에 흔들린다. 마음을 견고하고 안정되게 강화시켜야 한다. 환자를 진단하는 의사는 환자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조사한다. 조사하기 전에 의사는 먼저 현미경을 적당히 조절한 다음 혈액 샘플에 현미경을 고정시켜 집중한다.

이렇게 해야 면밀히 검사할 있고 병의 원인을 발견하여 적절한 처방을 내릴 있다. 우리는 하나의 대상, 마음에 집중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자신의 미묘한 성품, 마음을 검사하는 도구를 만들어 가야 한다. 

붓다는 그를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을 집중하는 여러 가지 수행법을 고안했다. 가운데 내적 행동을 탐구하는 가장 좋은 기술은 붓다가 몸소 실천한 아나파나-사띠(anapana-sati)이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숨을 쉬어야 하기 때문에 호흡은 모든 사람에게 손쉬운 주위 집중의 대상이고 쉽게 접근할 있는 명상의 대상이다. 바바나 수행을 시작할 수행자는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편안하게 눈을 감는다. 

가능한 주의집중에 방해받지 않는 방에서 해야 한다. 수행자가 외부에서 내면의 세계에 돌아올 가장 중요한 활동은 호흡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호흡의 과정,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호흡하는 훈련이 아니라 알아차림의 훈련이다. 호흡을 자의적으로 조정하는 노력이 아니라 짧든 길든 무겁든 가볍든 거칠든 부드럽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호흡을 의식하면서 깨어있는 상태로 남는 것이다.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어떤 혼란도 없이 호흡에 주의 집중하는 방법이다.

수행자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것이다. 호흡에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자마자 기억, 희망, 두려움 등의 수천 가지 생각들이 마음속에서 뛰어 나온다. 이것들 하나에 주의를 빼앗기다 보면 우리는 호흡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새로운 결심으로 다시 시작하지만 마음은 호흡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된다.

호흡에 집중을 시작하자마자 마음은 재빠르게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버릇없는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마음도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이것은 마음의 깊은 습관이며 생애를 통해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성품을 조사하기 시작할 마음의 방황은 멈춘다.

우리는 정신적인 습관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참된 성품과 함께 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의 끊임없는 방황을 알아챘을 , 참을성 있게 그리고 조용하게 다시 돌아와 호흡에 집중하면 된다. 실패하면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미소를 지으면서 긴장하지 않고 실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우리는 반복하여 계속 수행을 가면 된다. 삶의 습관이란 짧은 시간에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조용히 인내를 갖고 반복하여 계속적으로 관찰해 수밖에 없다.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고 바른 노력이다. 

붓다는 바른 노력 가지를 말한다.


* 삿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 삿된 생각이 일어나도 무시함

* 자비심의 개발

* 자비심의 발전과 완전한 성숙(증지부)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은 가지의 바른 노력 모두를 닦아 가는 것이다. 우리는 앉아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호흡에 집중함으로써 자기에 대한 알아차림의 상태를 유지한다. 우리는 나태와 혼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 만일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추구하는 대신에 다시 반복하여 호흡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킬 있는 능력과 방해에 저항하는 능력, 가지의 본질적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바른 깨달음(正念)


호흡의 관찰은 바른 수행을 하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의 고통은 무지에서 온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참된 성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충동적 행동을 한다. 마음은 대부분의 시간을 환상, 잡념, 반복되는 과거의 기쁘고 슬픈 경험들,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등으로 낭비해 버린다. 마음이 같은 갈망과 혐오로 빠져들면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에게 순간이 중요하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우리는 미래에 없다. 미래는 영원히 곳에 있을 우리는 오직 현재에만 존재한다.

만약 현재의 자기 행위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거의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꿈은 실현시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의 순간을 자각하는 능력을 개발할 있다면 과거를 미래의 안내서로 사용하여 우리의 목표에 도달할 있을 것이다.

() 지금의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순간을 자각할 있도록 우리의 능력을 발전시켜야만 한다. 주의를 순간순간 우리 자신의 성품에 집중시켜야 한다. 

이것이 아나파나-사띠(anapana-sati) 기술이다. 수행법은 숨이 들어오는 순간, 밖으로 나가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자각하는 능력을 길러 준다. 호흡에 대한 관찰은 현재의 순간에 대한 자각이다.

호흡에 대한 관찰능력의 발전이 필요한 다른 이유는 우리가 궁극적 실재를 경험하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호흡에 대한 집중은 자신이 느끼고 있지 못한 것들에 대한 탐구, 무의식을 의식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호흡은 의식이나 무의식의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호흡에 대한 관찰은 무의식을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우리는 호흡을 조절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호흡할 있다. 잠시 동안 호흡을 멈출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호흡 조절하기를 멈추면 그것은 자연 상태의 호흡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를테면 우리는 보다 쉽게 집중하기 위해서 약간 강하게 호흡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흡을 규칙적으로 하려는 노력은 필요 없다. 노력은 오직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일 뿐이다. 자연적 호흡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보통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몸의 자동적 기능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의도적인 호흡의 덩어리를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자연적인 호흡의 미세한 부분을 관찰하는 데까지 발전한다. 우리의 관찰은 표면적 수준에서 미세한 실재의 자각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호흡을 관찰하는 다른 이유는 갈망과 혐오 그리고 무지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이다. 호흡은 정신상태를 반영한다. 마음이 평화롭고 조용하면 호흡은 규칙적이고 점잖다. 그러나 마음속에 성냄, 질투, 공포와 같은 부정적 상념이 일어날 호흡은 보다 거칠어지고 무겁고 빨라진다. 이렇게 우리의 호흡은 우리에게 자신의 정신 상태를 점검하게 하는 지표가 되고 우리로 하여금 정신상태를 다룰 있게 한다. 

호흡을 관찰해야 이유가 있다. 우리의 목표가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이기 때문에 목표를 향하는 모든 단계들이 순수하고 건강하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호흡은 바로 점을 만족시켜 준다. 우리는 호흡에 대하여 혐오감이나 갈망을 가질 없다. 그것은 환상이나 망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러므로 호흡은 주의집중의 적당한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마음이 호흡에 완전히 집중되는 순간 마음은 갈망, 혐오와 무지로부터 자유롭다. 마음의 순수가 비록 짧은 순간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매우 강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의 모든 습관, 조건지어진 것들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모든 축적된 의지작용의 조건지어진 습관이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다양한 형태로 솟아나 알아차림으로 향하는 노력들을 방해한다. 수행의 진보에 대한 갈망, 진전이 느리기 때문에 오는 압박, 성냄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혐오감 등을 경험할지도 모른다. 종종 무기력함에 빠지거나 명상하기 위해 앉자마자 졸음이 쏟아지기도 한다. 때때로 초조하여 우리는 수행을 피할 변명을 찾거나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또는 조소주의, 강박관념, 명상에 대한 우리의 능력과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한 비합리적인 의심 등으로 의지를 약화시킬지도 모른다.

이런 순간에 우리는 이런 방해들이 호흡에 대한 관찰, 수행의 성공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조금만 참고 견딘다면 그것은 줄어들고, 오히려 방해가 있을 수행은 더욱 쉬워진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수행의 초기 단계에서도 가지의 조건지어진 행위들은 마음의 표층에서 제거된다. 이렇게 호흡을 관찰하기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마음은 청소되며 자유를 향한 전진이 시작된다.


바른 집중(正定)


호흡에 대한 집중은 현재의 순간을 알아차리는 도움을 준다. 가능한 순간 순간에 알아차림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바른 집중()이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집중은 요구되지만 반드시 바른 집중의 수준은 아니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은 집중할 있다. 고양이는 쥐구멍 앞에서 쥐가 나타나자마자 덮칠 준비를 하고 모든 주의집중을 기울여 기다린다. 소매치기는 지갑을 훔칠 작정으로 그것을 빼낼 순간을 기다린다. 밤중에 침대에 누워 공포에 사로잡힌 아이는 방구석을 응시한다. 이런 집중은 내적 자유에 도움을 주는 바른 집중이 아니다. 집중(samadhi) 모든 갈망과 혐오와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상에의 집중이다.


호흡의 관찰에서 알아차림의 상태를 깨뜨리지 않고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발견할 것이다. 호흡에 집중하려는 굳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에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은 어디론가 도망가 버리고 없다. 바른 길을 걷지 못하고 자꾸 옆길로 빠지는 취한 사람과 같다. 사실 우리는 무지와 환상에 취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와 미래, 갈망과 혐오 속에서 비틀거린다. 우리는 알아차림의 바른 길을 걷지 못한다. 


수행자는 같은 곤란에 직면하여 용기를 잃거나 자책하지 말고, 살아온 만큼의 뿌리 깊은 정신적 습관을 변화시키는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오직 반복하고 참고 견디며 끈질기게 계속해야 한다. 우리의 일은 단지 주의집중이 잘못되는 순간을 깨닫고 호흡으로 다시 돌아오는 일이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방황하는 마음을 변화시킬 중요한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그리고 반복하여 수행함으로써 점점 빨리 의식의 흐름을 제자리로 가져올 있다. 점차 호흡을 놓치는 기간이 짧아지고 깨어있는 상태는 길어진다.

집중이 강해지면 우리는 여유, 행복, 충만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점점 호흡은 변화되어 부드러워지고 규칙적이고 가벼워지고 얇아진다. 종종 호흡이 멈추어 버린 같다. 실제로 마음이 평온해지면 몸은 고요해지고 신진대사는 느려지고 그래서 산소는 적은 양만이 필요하게 된다.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자들은 이런 단계에서 눈을 감고 있는 동안 빛을 본다던가 통찰을 얻는 이상한 경험, 특별한 소리를 듣는 같은 경험을 있다. 소위 이런 초감각적 경험은 단지 마음이 높은 수준의 집중으로 들어가는 징후일 뿐이다. 자체로써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여전히 집중의 대상은 호흡이다. 초감각의 경험을 기대하지 말라.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이외는 정신적 산만일 뿐이다. 모든 초감각의 경험은 수행의 진보를 알리는 단순한 이정표이다. 때로는 이정표들이 숨어있어 보이지 않거나 수행에 집중하고 있어 보지 못하고 계속 걸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이런 이정표를 수행의 마지막 목표라고 간주하고 거기에 집착한다면 수행의 진전은 멈추게 된다. () 수행하는 이들은 그와 같은 경험을 추구하기보다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도 그들 자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추구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오직 호흡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집중이 되면 호흡은 보다 미세해지고 더욱 알아차리기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주의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식으로 계속 마음을 닦아 집중력을 강화하여, 외형적인 모습을 넘어서 내면 깊숙이에 있는 미묘한 실재를 관찰하기 위해서 본질을 꿰뚫어 보는 도구로 만들어야 한다.  집중력을 향상시키는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낱말을 반복함으로써 낱말에 집중하거나 영상 이미지 또는 어떤 신체적 행동을 자꾸 반복하여 수행하는 방법등이다. 그러는 동안에 수행자는 하나의 대상에 주의집중하게 되고 황홀의 축복상태를 얻는다. 그런데 이런 상태가 의심 없이 지속되는 동안 기쁨을 준다 해도 전과 같은 문제로 가득 일상생활로 되돌아왔을 때는 사라져 버린다. 이런 방법들은 마음의 표층에서는 기쁨과 평화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심층의 조건화된 무의식은 그대로 남는다. 이런 수행법들은 순간순간의 자신의 성품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다. 이때 얻는 축복이란 정화된 마음의 심연에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것이기보다는 첨가된 것이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바른 집중은 정신적 흥분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망상이나 작위와는 거리가 멀다.

붓다의 가르침 속에서 얻을 있는 다양한 황홀상태가 있다. 붓다는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경험하는 정신적 흥분을 여덟 가지로 분류하여 가르쳤다. 그는 계속 이것을 수행했다. 그러나 황홀상태는 그에게 자유를 주지 못했다.

붓다가 정신적 흥분상태를 가르치는 것은 통찰의 발전 단계로써의 기능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수행자는 정신적 황홀이나 흥분을 경험하기 위해서 집중의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들 자신의 성품을 검토하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조건들을 제거하기 위한 마음의 도구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 ; 아랫배보다는 코에 집중하는 호흡관법을 가르치는가?

대답 ; 우리에게 아나파나-사띠는 특별하게 강한 집중이 요구되는 수행의 준비 과정이다. 집중의 영역을 좁힐수록 집중은 더욱 강해진다. 이런 집중을 개발하기 위해서 복부는 너무 넓다. 가장 적당한 것이 코이다. 이것이 붓다가 우리의 집중을 코에 두게 하는 이유이다.

질문 : 호흡을 관찰할 숨의 숫자를 센다든지, 숨이 들어올 안으로숨이 나갈 밖으로라고 말해도 좋은가?

대답 ; 아니다. 말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만약 호흡을 관찰하면서 계속하여 말을 덧붙인다면 점차로 말만 의식하게 되어 당신은 호흡을 잃어버릴 것이다. 호흡할 안으로”, “밖으로라고 계속 말하면 그것은 주문이 된다. 오직 호흡 자체, 있는 그대로의 호흡만이 남아 있어야 한다.

질문 ; 집중훈련(samadhi) 수행은 자유를 얻는 충분하지 못한가?

대답 ; 집중훈련를 통해 얻는 마음의 정화는 조건된 것들의 제거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억압에 의해 성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진흙투성이로 탱크의 물을 백반과 같은 침전물을 집어넣어 씻어내는 것과 같다. 백반은 퍼져있는 진흙의 입자들을 탱크의 바닥으로 가라앉게 한다. 마찬가지로 집중훈련 수행은 마음을 상층의 상태로 묶어두기 때문에 무의식의 밑바닥은 그대로 남는다. 잠재적 불순물마저 제거해야 자유에 도달한다. 깊은 마음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위빠사나를 수행해야 한다.

질문 ; 현재의 순간에 주목하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망각하는 것은 해롭지 않는가? 결국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닌가?

대답 : 수행법은 당신에게 과거를 완전히 잊어버리라고 가르치지 않으며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정신적 습관은 과거의 기억이나 욕망, 계획,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에 깊이 빠져들어 현재에 대한 무지한 상태로 남고자 한다. 건강하지 못한 습관이 삶을 고통 속에 빠뜨린다.

질문 ; 좌선을 하면 마음이 끊임없이 떠돌아다닌다. 어떤 욕망이 일어나지만 그것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갈망이 일어나 초조해 진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답 ; 갈망 때문에 초조해지는가? 단지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라. “보라, 갈망을이것이 전부이다. 그러면 당신은 거기서 빠져 나올 것이다. 마음이 방황하고 있음을 알았으면 받아들이고 마음의 방황을 보라. 그러면 자동적으로 다시 호흡에 집중할 있다. 마음이 갈망하고 방황을 일으킨다고 긴장을 만들어 내지 말라. 만약 긴장하면 당신은 새로운 감정, 혐오감을 만들어 낸다. 그것을 단지 받아들이라. 이렇게 수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질문 ; 모든 불교 수행은 이미 요가(yoga)에서 가르쳐 왔다. 붓다가 가르친 수행의 새로운 점은 무엇인가? 

대답 ; 오늘 요가라고 불리는 것은 실제로 후기에 발전된 것이다. 요가를 체계화시킨 파탄잘리(Patanjali) 붓다 시대로부터 5백년 뒤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요가경> 붓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물론 요가수행은 붓다 이전부터 인도에 널리 알려진 수행법이었다. 붓다도 깨닫기 이전에는 수행법을 실천해 보고 실험했다. 모든 이런 수행은 계행(戒行) 감각적 경험으로 제한된, 정신집중의 8가지 단계로 구성된 집중훈련(samadhi) 이루어진다. 붓다는 아홉 번째의 단계를 발견했다. 그것이 위빠사나이다. 위빠사나는 수행자에게 모든 감각적 경험을 초월하여 궁극적 목표에 이르는 통찰의 힘을 증가시켜 준다.

질문 ; 나는 자주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그들의 가치를 끌어내리곤 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대답 ; 수행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있다. 만약 자아의 관념이 강하면 다른 사람의 인격을 떨어뜨리고 그들의 중요성을 줄이고 본인의 역할을 강화시킨다. 명상 수행은 자연스럽게 이런 자아의 행위를 해소시킨다. 자아가 사라지면 이상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다.

질문 ; 가끔 내가 일에 죄책감을 느낀다.

대답 ; 죄책감은 당신을 돕지 못한다. 오직 상처만을 입힐 것이다. 죄는 () 길을 대신할 없다. 행동의 잘못을 깨달았을 그것을 감추거나 정당화시키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 당신이 존경하는 분을 찾아가저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앞으로 저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입니다.” 말하면 된다. 그리고 명상 수행을 하라. 그러면 당신은 당신이 어려움을 빠져 나왔음을 발견할 것이다. 

질문 ; 나는 계속하여 자아를 강화시키는가? 나는 계속이기를 고집하는가?

대답 ; 이것은 무지로부터 행동한 마음이 조건화된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당신을 해로운, 조건지어진 정신적 습관들로부터 해방시킨다. 자기에 대한 생각보다 항상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질문 ; 다른 사람을 위한 생각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대답 ; 단계는 사람이 어떻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를 자각하는 일이다. 만약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애(self love) 광란으로부터 벗어날 없다. 수행을 더욱 열심히 함에 따라 당신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조차도 사실은 자기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나는 사람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가?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행동을 기대하다가 그가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순간 나의 모든 사랑은 사라져 버린다. 진실로 나는 그를 사랑했는가 아니면 나를 사랑했는가?” 대답은 지적인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당신이 이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이기성으로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이타적이고 조건 없이 주는 진정한 사랑을 발전시킬 있다.



밀크푸딩


매우 가난한 어린 소년이 농촌이나 도시에서 음식을 구걸하면서 살았다. 소년은 태어나면서부터 봉사였고 다른 소년이 그를 도왔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 다녔다. 

어느 봉사인 소년이 아팠다. 그의 친구는여기서 쉬어라, 내가 음식을 얻어올 테니.”라고 말하고 구걸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날 소년은 매우 맛있는 밀크푸딩을 얻었다. 전에 이것을 먹어 적이 없었던 소년은 불행하게도 친구에게 가져갈 용기가 없어서 혼자 모두 먹어 버렸다. 

친구에게 돌아와 소년은 말했다. “미안해. 오늘 아주 좋은 밀크푸딩을 얻었지만 가져오지 못했어.”

소년이 친구에게 물었다. “ 밀크푸딩이라는 것이 무엇이니?”

, 그것은 하얀색이야. 밀크가 흰색이니까.”

태어나면서 봉사였기 때문에 그의 친구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이 하얀색이지?”

하얀색이 무엇인지 모르니?”

, 몰라.”

그것은 검정의 반대야.”

검정이 무엇인데.” 그는 검정색도 몰랐다.

하얀색만 알려고 .” 그러나 소년은 이해할 없었다. 그래서 친구는 주위를 돌아보다 하얀 학을 보았다. 그는 새를 잡아 소년에게 가져다주면서하얀색은 새와 같다.” 말했다. 

눈이 소년은 손으로 만져 보았다.

, 알았다. 하얀색은 부드러운 것이다.”

아니야, 아니야, 부드러운 것은 하얀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하얀색은 하얀색이다. 제발 알아줘.”

하지만 너는 하얀색은 학과 같다고 했어 내가 학을 만져 보니 그것은 부드러워. 그러니까 밀크푸딩은 부드러우며 하얀색은 부드러움을 뜻한다.”

아니야 너는 잘못 이해했어. 다시 해보자.”

다시 소년은 학을 만져 보았다. 손으로 부리, , 몸통, 발톱 등을 만져 보았다. “, 이제 알았다. 그것은 굽은 것이다. 밀크푸딩은 굽어진 것이다.”

이처럼 소년은 하얀색을 경험할 감각기관이 없기 때문에 이해할 없었다. 만약 당신이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의 성품을 경험할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언제나 당신에게 굽어진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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