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지혜의 훈련
붓다만이 도덕훈련(계, 戒, sila)과 집중훈련(정, 定, samadhi)을 가르친 것은 아니다. 그러한 훈련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이전에 이미 널리 알려져 실천되고 있었다. 사실 붓다는 해탈의 길을 찾으면서 두 스승으로부터 집중훈련 수행법을 배워 수련했다. 붓다가 이 수행법을 설명하는 방식은 기존 종교의 스승들과 다르지 않았다. 모든 종교는 도덕적 행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또 기도, 의식, 단식, 금욕적 생활양식이나 여러가지 명상법을 통해서 환희감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런 수행법의 목적은 단순히 정신적으로 깊이 전념해서 몰입되는 상태로 이것이 종교적인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한 황홀감이다.
이런 집중은 초월의 수준까지 도달하지는 못해도 많은 도움을 준다. 혐오나 갈망에 빠져들 상황으로부터 주의를 전환하여 마음을 안정시키는것이 가능하다. 화의 분출을 막기 위해서 조용히 열까지 수를 세는 것은 집중훈련 수행의 기본 원리이다. 또 다른 형태는 화두나 만트라를 반복하거나 시각적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다른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면 마음은 고요하고 평화로워진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얻은 안정은 진정한 해탈이 아니다. 분명히 집중훈련은 유익하지만 그것은 오직 마음의 의식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 25세기전, 현대심리학이 체계화되기 전에 붓다는 ‘무의식적인 마음의 존재’를 자각하고 이를 아누사야(anusaya)라고 했다. 그는 주의전환과 집중이 의식수준에서 갈망과 혐오를 다루는 좋은 방법이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을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집중훈련에 의해서 안정된 마음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고, 끊임없이 갈망하고 혐오하는 반응은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아서 잠복상태로 있게 된다. 마음의 표면에서는 평화와 조화가 있지만, 마음 깊숙이에는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억압된 화산이 잠자고 있다.
쓰러진 나무라고 해도 뿌리가 그대로 땅에 박혀 있다면 새 싹이 나오듯, 갈망과 혐오의 습관을 뿌리째 뽑지 않으면 고통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무의식에 마음의 습관이 남아있는 한 언제든지 고통을 일으키는 상황에 처하면 마음은 여전히 이전에 반응했던 습관대로 감정의 덩어리를 불쑥 드러내고 말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붓다는 집중훈련으로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했지만 해탈하지 못했음을 알고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고통을 벗어나 행복에 이르는 길을 계속 찾기로 했다.
그는 두 가지 길을 보았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자기탐닉의 길이다. 그것은 이루어지든 아니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걸어가는 세속의 길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 길은 결코 행복으로 인도될 수 없다고 보았다. >>
원하는 대로 모두 다 성취한 그런 사람은 이 지구상에 없다. 사람들은 원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실패감과 불쾌감을 경험한다. 원했던 것은 곧 사라질 것이고 만족은 순간적일 뿐이라는 두려움을 갖는다. 찾고 갈망하고 그 무엇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항상 초조하다. 붓다는 세속을 떠나 사문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이 길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것이 평화의 길이 아님을 알았다.
또 하나의 다른 길은 모든 욕망을 삼가는 자기절제의 길이다. 당시 인도에서는 심한 경우 자기 몸을 스스로 불로 지지거나 신체 일부를 절단하거나 채찍으로 때리는 수행자도 있었다.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 갈망과 혐오의 습관을 치유하고 마음을 정화한다는 이유였다. 그와같은 고행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종교적 현상이다. 붓다 역시 출가 후 여러 해 동안 그 길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뼈와 가죽만 남는 지경까지 가서도 여전히 마음은 해탈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행방법을 달리했다. 마음의 습관을 끊기 위해서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불건강한 행위를 일으키는 욕망을 만족시키는 일을 삼가하면서 보다 적절한 형태로 훈련하는 것이 좋다. 적절한 자기절제 훈련은 부도덕한 상황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탐닉 보다는 한결 좋은 수행법이다. 그러나 만일 갈망이나 혐오를 제거하기 위해서 단지 자기억압적인 방법만을 사용한다면 오래지 않아서 정신적인 긴장을 위험한 상태까지 끌고 가게 된다. 왜냐하면 억압된 욕망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이면에 쌓여서 언젠가는 파괴적인 에너지를 방출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인 습관의 뿌리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안전하고 평화롭지 못하다. 도덕훈련은 마음의 습관을 통제하는데 매우 유용하지만 단지 의식적으로 결심하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하는 ‘의지’ 만으로는 끝까지 지탱할 수 없다. 집중력을 발달시키는 집중훈련도 마음의 습관을 버리는데 도움은 되지만 문제의 뿌리가 놓여있는 심층의 깊이에 까지는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해결방법에 불과하다. 낡은 마음의 뿌리가 무의식 깊이 박혀있는 한 진실하고 지속적인 행복과 해탈 또한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정신적인 습관의 뿌리가 마음속에서 제거된다면 좋지 않은 행동에 탐닉할 위험이나 자기억압의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좋지 못한 행위를 하게 만드는 바로 그 욕망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욕망에 탐닉해서 추구하거나 있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는 데서 오는 모든 긴장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문제의뿌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시작된 근본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의 깊은곳 까지 관통해야만 된다. 이것이 바로 붓다가 발견한 방법,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혜(panna)의 훈련이다. 고통의 원인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인 통찰. 이것이 지혜를 훈련하는 방법, 위빠사나 바바나(Vipassana-Bhavana)인 것이다. 이것은 붓다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스스로 훈련했던 수행법인 동시에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이다.
도덕훈련(계, 戒, sila)은 집중훈련(정, 定, samadhi)에 도움이 되고, 집중훈련은 지혜훈련(혜, 慧, panna)에 도움이 되며, 지혜훈련으로 마음은 모든 모든 무지와 갈망과 혐오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롭다.
도덕훈련(sila)과 집중훈련(samadhi)은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그것들의 참된 목표는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지혜를 통해 극단적 자기탐닉과 자기절제 사이에서 중도(middle path)를 발견하게 된다. 도덕훈련을 실천함으로써 정신적 동요를 일으키는 행동을 피하게 된다. 또 집중훈련에 의해 마음을 지킴으로써 더욱 고요해지고 동시에 효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점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실제를 꿰뚫어 보고 무지와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지혜의 발전에 의해서 성취된다. 팔정도(八正道)의 바른 생각(正思)과 바른 이해(正見)가 바로 지혜의 훈련에 해당한다.
바른 생각(正思惟)
통찰수행(vipassana-bhavana)을 시작하기 전에 모든 생각이 멈추어야 하는것은 아니다. 생각은 여전히 지속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계속 유지된다면 통찰훈련을 시작하기에 충분하다. 생각은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본질적인 패턴이 변한다. 혐오와 갈망은 호흡 알아차림 으로 가라앉는다. 마음은 적어도 의식수준에서는 균형을 이루게 되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즉 법(法)의 길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 호흡의 알아차릴 때 뒤따랐던 어려움은 이제 지나갔거나 어느정도 극복되었다. 오직 법을 생각함으로써 법의 길에 섰을 때, 다음 단계인 바른 이해를 위해서 준비한다.
바른 이해(正見)
바른 이해가 바로 진정한 지혜이다. 진리에 대해 생각하는것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우리는 몸소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 그대로의 모습인 실상(實相)을 보아야 한다. 외견상의 진리도 실재하지만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궁극적 실재(實在)를 경험하고 꿰뚫고 들어가야만 한다.
지혜는 들어서 아는 지혜(suta-mayapanna), 지적인 지혜(cinta-mayapanna), 그리고 경험적 지혜(bhavana-mayapanna)의 세 종류가 있다.
첫번째 지혜의 형태인 suta-mayapanna의 의미는 “들은 지혜”(heard wisdom)로 책을 읽거나 설법이나 강연 등이나 다른 사람에게 듣고 얻은 지혜를 자기 것으로 채택한 지혜이다. 보통 다른 사람의 지혜를 자기 지혜로 수용하는 것은 무지로부터 생긴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어떤 이념, 신념, 종교를 가진 조직사회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그 사회의 주도적인 가치를 의문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또는 갈망으로 부터 생기기도 한다. 조직사회의 지도자들은 기존의 이념이나 전통적 믿음을 받아들이면 멋진 미래가 약속된다고 말한다. 어떤 종교지도자들은 신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고 말한다. 자연히 축복은 매력적이므로 기꺼이 받아들인다. 또는 두려움 때문인 경우도 있다. 믿지 않으면 죽어서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한다.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회적 가치를 수용한다. 이처럼 맹목적 믿음이나 갈망, 두려움 때문에 받아들여진 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혜가 아니다. 그것은 빌려 온 것이다.
지혜의 두 번째 형태는 지적인 이해(intellectual understanding)이다. 어떤 가르침을 읽고 들은 후에 그것이 합리적이고 유용한지를 살펴본다. 만약 지적 이해의 수준에 만족한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진리로써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신의 통찰이 아니라 오직 그가 들은 지혜의 지적인 이해일 뿐이다.
지혜의 세 번째 형태는 경험으로부터 일어나는 지혜로 진리의 개인적 실현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지혜이고 마음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그 자신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참된 지혜이다. 일상의 삶에서 경험적이고 실험적인 지혜가 항상 필수적이고 타당한 것은 아니다. 불이 위험하다고 하는 사실은 다른 사람의 경고를 받아들이거나 연역적인 추론을 따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불 속에 뛰어들면 화상을 입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불에 들어가 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그러나 붓다가 다르치는 법(法)의 세계에 있어서는 경험에서 오는 지혜만이 본질적이다. 왜냐하면 오직 직접적인 체험만이 우리를 과거의 낡은 정신적인 습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얻거나 지적 탐구를 통해서 얻은 지혜가 우리를 경험의 지혜로 인도한다면 그것들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만일 의심없이 기존의 지혜를 받아들여 단순히 만족한다면 그것은 경험적인 지혜를 얻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단순히 진리를 사색하고 지적 이해나 탐구에 만족한다면 모든 지적인 이해는 해탈의 출구가 아니라 우리를 지식의 노예로 만든다.
우리는 직접적인 경험과 명상수행에 의한 진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오직 살아 있는 경험만이 마음을 해탈로 이끈다.
남이 깨달은 진리가 우리를 해탈하게 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붓다의 깨달음 조차도 붓다 한 사람만을 해탈시킬 수 있었다. 기껏해야 다른 사람의 깨달음은 우리들이 따라가는 지표를 제공함으로써 어떤 영감을 제공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들 각자는 스스로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말했다.
너는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깨달은 자는 오직 그 길을 보여 줄 뿐이다.
진리는 직접 경험함으로써,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외부의 것들은 무엇이든 우리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다. 자신 안에서 실재를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세가지 지혜의 형태 가운데 처음 두 가지는 붓다만 가르친게 아니다. 붓다 이전에도 이 두 가지의 형태는 있었고, 같은것을 가르치는 스승들은 붓다 시대에도 있었다. 세상에 대한 붓다의 기여는 진리를 직접 깨닫는 법을 가르쳐 경험적 차원의 지혜를 계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직접적인 진리의 깨달음을 성취하는 방법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
위빠사나(vipassana)는 진리에 대한 갑작스런 통찰, 번뜩이는 직관으로 기술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보통 “직관의 개발”이라고 부른다. 낱말 passana의 의미는 “보는 것” 우리가 눈을 뜨고 보는 일상적 의미다. Vipassana는 자기 안의 실재를 관찰하는 특별한 통찰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의집중의 대상으로써 자신의 신체적 감각을 선택하여 성취된다. 이 기법은 자신의 감각을 조직적이고 냉철하게 관찰하는 방법이다. 이 관찰은 몸과 마음의 실재를 온통 다 드러낸다.
왜 감각(Sensation)을 주의집중의 대상으로 삼는가? 첫째로 우리가 실재(Reality)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감각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상이 오관(眼耳鼻舌身)과 마음(意)에 접촉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은 세계를 만나는 문이며 모든 느낌의 기반이다. 어떤 무엇이 여섯 개의 감각기관과 접촉하면, 느낌이 발생한다. 붓다는 이 과정을 이렇게 기술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막대기 두 개를 서로 비벼대면 열이 나고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기분 좋은 경험의 결과로 유쾌한 느낌이 일어난다. 달갑지 않은 접촉의 결과로 불쾌한 느낌이 일어난다. 덤덤하게 경험된 느낌의 결과로 유쾌와 불쾌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덤덤한 느낌이 일어난다.(상응부)
마음이나 육체와 대상과의 접촉은 느낌의 불꽃을 산출한다. 이 느낌은 정신적 신체적 모든 현상과 세계를 연결하는 고리이다. 경험의 지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실제로 경험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즉 우리는 느낌에 대한 자각을 발전시켜야 한다.
더욱이 신체적 감각은 마치 호흡이 현재의 정신 상태를 반영하고 있듯이 마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정신적 대상들, 생각 관념 상상 감정 기억 희망 두려움 등이 마음과 접촉하게 되면 느낌이 일어난다. 모든 생각 감정 정신의 행동은 육체 내의 상응하는 느낌에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적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역시 마음을 관찰한다.
느낌은 진리를 깊이 탐구하는 데 필수적이다. 세계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무엇이나 신체 안에서 느낌을 유발시킨다. 느낌은 육체와 정신이 만나는 교차로이다. 느낌은 육체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정신에서 느낀다. 죽은 시체나 생명 없는 물질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느낌이 없다. 만약 우리가 느낌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실재에 대한 우리의 탐구는 피상적이고 불완전하게 남는다. 정원의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서 감추어진 뿌리를 찾아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들에게 대부분 감추어진 채로 남겨진 느낌을 알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알고 그것을 적절하게 다루려 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느낌은 모든 순간에 신체의 전 부분에서 일어난다. 모든 신체적, 정신적 접촉은 느낌을 만들어 낸다. 모든 생화학적 반응은 느낌을 유발시킨다.
일상생활 속에서 의식은 느낌을 자각할 만큼 필요한 집중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일단 호흡관법에 의해 마음을 예리하게 만들고 반응의 힘을 발전시키면 우리 내면에 있는 모든 느낌의 실재를 의식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에서 주된 노력은 호흡을 통제하고 단속하는 데 있지 않고 자연스런 호흡을 관찰하는 데 있다. 마찬가지로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 우리는 단순하게 육체의 느낌을 관찰해야 한다. 우리는 체계적으로 신체의 전 부위, 머리에서 발끝까지 조심스럽게 주의집중을 옮겨가야지만 그러는 동안에 특별히 다른 형태의 느낌을 따라가지 않으며 다른 형태의 느낌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노력의 요점은 오직 신체에 나타나는 느낌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대상으로써 관찰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이를테면 열 차가움 행복 가벼움 떨림 수축 팽창 압박 고통 흥분 맥박 등이 될 것이다. 수행자는 특별한 느낌을 추구하기보다는 단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상의 신체적 느낌을 관찰한다.
느낌을 관찰하는 노력은 느낌의 원인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다. 원인은 앉은 자세에서, 신체적 허약이나 질병의 결과에서, 먹은 음식에서 오는 분위기적 조건일지 모른다. 느낌의 원인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관심 밖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을 집중하여 육체의 일부에서 일어나는 순간에 발생되는 느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 수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 우리는 신체의 일부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 수 있다. 자각의 능력은 완전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미세한 느낌보다는 강한 느낌만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교대로 신체의 모든 부분에 계속적으로 주의를 집중시키고 조직된 순서에 따라 의식의 집중을 움직여 본다. 우리는 보다 강한 느낌에 의해 과도하게 이끌어진 주의에 따라가지 않고, 의식적으로 선택한 대상에 주의를 고정시키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이제 우리는 순서적으로 신체의 각 부분에 의식을 집중하는 능력을 사용한다. 느낌이 분명치 않은 부분에서 우세한 부위로 뛰어 들어가지 않고 몇 가지 느낌 속에서 머뭇거리거나 다른 느낌으로 도망가지 않으면서 이렇게 계속 주의집중력을 키워 가면 우리는 신체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지점에 점차 이르게 된다.
호흡을 관찰하는 수행에서 숨은 종종 무겁고 불규칙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점차 규칙적이고 조용하고 가볍고 미세해진다. 마찬가지로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에서도 사람들은 오래 지속할 것 같은 강하게 덩어리진 느낌을 경험한다. 동시에 강렬한 감정이나 오랫동안 잊었던 생각과 기억들이 일어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정신과 육체의 불편함이 생긴다. 호흡관찰을 방해하는 갈망 혐오 게으름 초조 그리고 의식의 장애물들은 느낌의 자각을 불가능하게 할 만큼 강력하게 반복되어 나타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마음의 고요와 예민함을 다시 얻기 위하여 호흡의 알아차림상태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참을성 있게 다시 집중을 획득한 수행자에게 이 모든 어려운 점이 첫 성공의 결과임을 이해해야 한다. 보다 깊이 숨은 조건지어진 것들이 자극을 받고 의식의 수준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점차로 어떤 긴장도 없이 지속적인 노력으로 마음은 고요와 집중을 얻는다. 강한 감정이나 생각이 지나가고 수행자는 느낌의 자각으로 되돌아온다. 반복되고 계속되는 수행으로 강한 느낌들이 통일되어 섬세한 것으로 녹아들고 마침내 대단히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단순한 떨림으로 해체된다.
그러나 느낌이 쾌락이든 불쾌이든 강한 것이든 약한 것이든 다양한 것이든 통일된 형체의 것이든 수행에는 관계가 없다. 단지 수행의 요체는 느낌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불쾌감이 주는 불안이든지 쾌락의 끌림이든지 간에 우리는 수행을 멈추거나 혼란에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또 어떤 느낌에도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은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관찰하듯이 단지 우리들의 집착을 관찰하는 것이어야 한다.
무상(無常), 무아(無我), 그리고 괴로움(苦)
느낌을 계속 관찰할 때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로 우리의 감각적 느낌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매 순간 신체의 모든 부위에서 느낌은 일어나고 모든 느낌은 변화의 표식이다. 매 순간 신체의 모든 부위에서 전자기적이나 생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 정신의 과정은 매우 빠르게 변화되고 신체변화로 나타난다.
이것이 몸과 마음의 본 성품, 실재이다. 이것이 변화이고 무상(無常, anicca)이다. 모든 순간에 몸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은 일어났다가는 사라지고 모든 순간에 정신의 기능은 나타났다가 사라지면서 계속 작용한다. 신체나 정신의 우리 내부 모든 것은 외계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순간순간 변한다. 분명하게 이것이 진실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머리 속으로 이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 의해서 우리 몸의 구조 안에서 직접 무상(無常)의 실재를 경험한다. 일시적인 느낌에 대한 직접 경험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의 현상적 본성을 본다.
육체의 모든 부분, 정신의 모든 과정은 끊임없는 흐름의 과정이다. 단 한 순간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아(I)”는 언제나 변하는 과정의 결합일 뿐이다.
여기서 수행자는 또 하나의 기본적 실재, 진실한 나, 영원한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anatta)를 이해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헌신하는 에고는 정신과 육체적 과정의 결합,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하다. 깊은 심층의 수준에서 몸과 마음을 탐구해 보면 사람은 변화의 과정으로부터 독립된 본질, 영원한 실체는 없으며, 무상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본다. 오직 통제를 벗어나 변하는 비개인적 현상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기본적 실재가 분명해진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라고 말하며 무엇을 붙잡으려는 노력은 결국 곧 지나가 버릴 것을 붙잡아두려 하기 때문에 항상 괴로움(苦,dukkha)을 만들어 낸다. 무상하고 일시적인 환상일 뿐으로 통제로부터 벗어난 것들에 대한 집착(attachment)은 고통이다. 우리는 이런 집착이 고통스럽다고 우리에게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내면에서 그것이 고통임을 경험한다.
평정심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불행을 막을 수 있는가? 어떻게 고통 없이 살 수 있는가? 대답은 이렇다. 습관에 길들어 반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관찰함으로써 가능하다. 어떤 경험은 선택해서 유지하려 하고 어떤 경험은 밀어내 피하려 하는 노력 대신에 단순하게 모든 경험을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마음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쉽고 간단하게 들린다. 그러나 한 시간 가량 좌선하려고 앉아 있으면 10분 후에 무릎이 아파 온다. 이때 우리의 의지적 작용(行)을 관찰해 보라. 우리는 이 고통이 싫어진다. 또 고통이 어디론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로 가지 않는다. 반대로 고통이 싫어지면 싫어질수록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신체적 고통은 이제 정신적 고통이 된다.
만약 이 순간에 우리가 신체적 고통을 관찰하는 것을 배운다면 잠깐이라도 “내”가 고통을 느낀다. 그것은 “나”의 고통이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또 우리가 의사처럼 환자의 고통을 검사하듯이 객관적으로 그 느낌을 검사할 수 있으면, 이 때 우리는 고통 그 자체의 변화를 보게 된다. 그것은 영원히 남아 있지 않는다. 매 순간 변하고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고 또 다시 사라진다.
우리가 이것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해할 때 고통이 더 이상 우리를 압도하고 조정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 아마 그것은 재빨리 사라지거나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초연하게 고통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고통으로부터 상처받지 않는다.
해탈의 길
알아차림(awareness)과 평정심(eguanimity)의 개발을 통해서 사람들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고통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무지의 어둠 속에서 마음은 좋고 싫은 것, 갈망과 혐오로 모든 느낌에 대해서 의지적인 작용을 한다. 이런 집착은 고통을 가져오는 사건의 연결고리, 원인이 된다.
인과의 쇠사슬을 어떻게 끊어 낼 수 있는가? 아무튼 무지에서 시작된 과거의 행동으로 인하여 현재의 삶, 몸과 마음의 흐름은 출발했다. 이때 이 흐름을 멈추기 위해서 자살을 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스스로를 죽이는 순간에 마음은 완전히 고통에 빠진다. 이런 행동은 행복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
삶이 시작되면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러면 감각경험의 기초가 되는 눈 귀 코 혀 몸 마음(뜻)의 육근(六根)을 파괴해야 하는가? 사람은 눈을 뽑아내고 혀를 잘라 내고 코와 귀를 도려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몸뚱이를 파괴시키고 마음(뜻)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자살이다. 이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육근(六根)이 불가능하다면 육근의 대상이 되는 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법(法) 등의 육경(六境)을 없애 버려야 하는가? 이것도 불가능하다. 우주는 셀 수 없는 대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을 모두 없앨 수 없다. 일단 육근의 감각들이 존재하면 그것에 상응하는 육경과의 접촉(contact)을 막을 수 없다. 접촉이 일어나자마자 그곳에는 반드시 느낌이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곳이 인과의 쇠사슬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지점이다.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과의 결정적 연결 고리는 “느낌”이다. 모든 느낌은 쾌락이나 불쾌를 발생시킨다. 이 순간 좋아함이나 싫어함의 무의식적 반응은 다양하고, 더욱 강렬해져 갈망과 혐오 그리고 집착으로 발전하여 현재와 미래의 고통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결국 자동적으로 반복되는 맹목적 습관이 되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느낌을 알아차림하는 능력을 발전시킨다. 수행자는 느낌에 대해 좋아함과 싫어함도 없이 냉정하게 조사한다. 그것에 새로운 느낌을 첨가하지 않고 모든 느낌에 대해 통찰(panna)만을 발전시킨다. “이것은 무상하다. 마땅히 변화될 것이다. 사라질 것이다.”
마침내 느낌의 사슬은 부서지고 고통은 멈춘다. 갈망과 혐오의 새로운 반응은 없다. 그래서 고통을 야기할 어떠한 원인도 없다. 고통의 원인은 업(kamma), 즉 갈망과 혐오의 맹목적인 반응, 정신적 행위(行, sankhara)이다. 마음이 한결같이 느낌을 자각하고 있을 때 여기에 무의식적인 선택은 없다. 고통을 만들어 내는 원인은 없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붓다는 말한다.
모든 행위는 무상하다. 그대가 참된 통찰로 꿰뚫어 이것을 안다면 이때 그대는 고통으로 부터 초연해 진다. 이것이 정화의 길이다.(법구경)
여기서 상카라(行, sankhara)라는 낱말은 매우 넓은 의미를 가진다. 마음의 맹목적 의지작용을 sankhara라고 부르지만 그런 행동의 결과 역시 sankhara라고 부른다.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결과이다. 그러므로 가장 넓은 의미로 sankhara는 창조되거나 세계 내에서의 무엇을 뜻한다. 그래서 “형성되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우주 안에서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위빠사나 수행에 의해 경험적 지혜로 이 명제가 관찰될 때, 고통의 원인이 사라졌기 때문에 고통은 사라진다. 수행자는 갈망과 혐오의 맹목적인 의지작용을 포기한다. 이것이 자유의 길이다.
완전한 노력이란 어떻게 맹목적인 행위를 그만둘 것인가, 어떻게 새로운 행위(sankhara)를 만들지 않을까를 배우는 것이다. 하나의 느낌이 일어남과 동시에 좋아함과 싫어함이 일어난다. 이 흐름의 순간 우리가 sankhara의 작용을 깨닫지 못한다면 자꾸 반복되고 점차 강력해져 갈망이나 혐오로 발전된다. 이렇게 발전된 무지상태의 갈망이나 혐오는 마음을 압도하여 강한 감정의 덩어리가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감정을 붙잡아 보다 나은 판단으로 대치시킬 수 있다. 그 결과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주는 삿된 말과 행동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 맹목의 순간에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고 현재와 미래에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맹목의 행위(行,sankhara)가 일어나는 순간의 지점을 알아챈다면 즉 우리의 느낌을 자각한다면 어떤 종류의 맹목적 충동이 일어나거나 강해지더라도 그것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좋고 싫은 감정도 없이 그 느낌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갈망이나 혐오로 발전하여 우리를 압도할 만큼 강력한 감정으로 돌변할 기회가 없다. 그것은 단순히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마음은 그대로 균형과 평화를 유지한다. 우리는 지금 행복하고 아무런 의지적 작용(行)이 없기 때문에 미래도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
신체 안에서 느낌을 자각할 때 동시에 한결같이 균형을 유지할 때 그 순간 마음은 자유롭다. 아마도 처음에는 명상수행의 시간이 잠깐일지도 모른다. 명상하지 않을 때는 마음이 느낌의 옛 습관에 빠져 갈망과 혐오 그리고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매일 반복하여 명상수행을 해가면 끝내 옛 습관은 무너지고 계속하여 평화로운 상태로 남을 수 있다. 이것이 고통을 멈추는 방법이다. 이것이 스스로의 힘으로 고통을 만들어 내는 부질없는 짓을 그만 두는 방법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 ; 왜 우리는 순서에 따라 육체에 대한 주의집중을 옮겨가야 하는가?
대답 ; 우리는 마음과 신체의 완전한 능력을 탐구하는 중이다. 이것을 위해 신체의 모든 부위에서 어느 곳도 빠뜨리지 말고 일어나는 것을 느끼는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 만약 당신의 주의집중을 이곳저곳으로 마구 옮긴다면 자연히 강한 느낌 쪽으로 끌리게 된다. 따라서 당신은 신체의 다른 부위에 대해서는 게으름을 피우게 되고 미세한 느낌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게 된다. 당신의 관찰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하며 피상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러므로 항상 순서에 따라 주의집중을 옮겨가는 것이 중요하다.
질문 ; 우리는 우리 느낌을 만들어 내지 않음을 어떻게 아는가?
대답 ; 당신 스스로 실험할 수 있다. 당신이 느끼는 느낌이 진실인지 어떤지를 의심한다면 당신은 자기 자신에게 명령을 하는 자기암시의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만약 느낌이 자기암시로 인하여 변한다면 이 느낌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이땐 모든 경험을 내던지고 잠깐 동안 호흡의 관찰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 느낌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느낌이 당신의 의지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모든 의심을 버리고 그 경험이 진실하다고 받아들이라.
질문 ; 만약 이 느낌이 진실하다면 왜 일상생활에서 그것들을 느끼지 못하는가?
대답 ; 무의식의 수준에서 당신은 느낀다. 의식되는 마음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순간에 무의식은 육체 내부의 느낌을 느끼고 그것들에 반응한다. 이 과정은 온 종일 일어나고, 위빠사나 수행에 의해서 당신은 의식과 무의식의 벽을 무너뜨린다. 당신은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의 정신적 신체적 구조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아채게 된다.
질문 ; 일부러 육체적 고통을 느끼는 데 열중한다면 그것은 매조키즘(masochism)처럼 들린다.
대답 ; 단순히 고통을 경험하는 것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객관적으로 고통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당신이 맹목적인 습관의 반응 없이 관찰할 때, 자동적으로 마음은 고통의 현상을 뛰어 넘어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떨림적인 미묘한 마음의 성품을 꿰뚫어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신이 마음의 미묘한 성품을 경험할 때 고통은 당신을 지배할 수 없다. 당신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때 당신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롭다.
질문 ; 그러나 고통은 신체의 일부에 혈액의 공급이 중단되었음을 표시한다. 이런 신체의 반응은 무시해도 좋은가?
대답 ; 이 수행은 몸에 해롭지 않고, 해롭다면 권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수행해 왔는데 이 수행으로 자신을 해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생각보다 우리의 몸은 유연하고 순응성이 좋다. 균형 잡힌 마음으로 그것에 직면한다면 고통은 사라진다.
질문 ; 여섯 감각의 문(六根) 이를테면 색에 대한 눈의 접촉, 소리에 대한 귀의 접촉을 관찰함으로써 위빠사나 수행은 가능하지 않은가?
대답 ; 그렇다. 그러나 관찰은 느낌의 자각을 포함해야 한다. 여섯 개의 문에서 접촉이 일어날 때마다 느낌은 발생한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맹목적인 의지가 작용(行)하는 지점을 놓치게 된다. 감각의 대부분은 접촉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때는 귀로 소리를 듣지만 또 어떤 때는 듣지 못한다. 그러나 심층의 수준에서 모든 순간에 마음과 물질의 접촉이 상존하고 계속적으로 느낌을 일으킨다. 이런 이유로 관찰된 느낌은 무상(無常)의 현실을 경험하는 가장 손쉽고 생생한 방법이다.
질문 ; 만약에 우리에게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단지 관찰만 한다면 어떻게 발전을 기할 수 있는가?
대답 ; 발전이란 당신이 평정심을 이룰 수 있는지에 따라 측정된다. 당신은 느낌을 변화시킬 수 없고,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에 당신은 평정심을 제외한 어떤 다른 선택도 없다. 무엇이 오면 그것은 쾌감이나 불쾌 등 이런 저런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평정심을 유지한다면 당신은 확실히 수행의 길에서 진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맹목적인 의지작용(行)의 오랜 정신습관을 깨뜨리고 있다.
질문 ; 평정심은 명상할 때만 가능하다. 어떻게 일상생활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대답 ; 일상생활 속에서 문제가 일어날 때 잠깐 멈추고 균형 잡힌 마음으로 당신의 느낌을 관찰하라. 마음이 고요하고 균형을 이룰 때 당신이 결정한 것은 무엇이나 좋은 것이다. 마음이 균형을 찾지 못했다면 이때 어떤 결정이든 그것은 오랜 습관의 반응이다. 당신은 부정의 반응들을 긍정적 행동으로 바꾸는 것을 배워야 한다.
두 개의 반지
돈 많은 노인이 두 아들을 남겨 두고 죽었다. 인도의 전통에 따라 당분간 그들은 한 집에 같이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재산을 나누어 따로 살기로 결정했다. 모든 재산을 반으로 나누었다. 그런데 두 아들은 아버지가 매우 깊숙이 감추어 둔 작은 꾸러미 하나를 발견했다. 그 꾸러미 안에서 반지 두 개가 나왔는데 하나는 매우 가치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였고 다른 하나는 평범한 은반지였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자 형은 마음속으로 갖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 동생에게 말했다. “이것은 분명히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가보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재산과는 별도로 보관하셨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집 보물로 계속 보관되고 앞으로도 계속 상속되어야 한다. 내가 장남이므로 이것을 보관해야겠다. 너는 은반지를 가지는 것이 좋겠다.”
동생은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지고 행복하게 사세요. 저는 은반지로 행복합니다.” 그들은 반지를 끼고 각자의 길을 떠났다.
동생은 혼자 생각했다. ‘아버지는 다이아몬드 반지의 가치가 높아 보관하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은반지도 보관했을까?’ 그는 반지를 유심히 조사하고 반지에 새겨진 글씨를 발견했다. ‘이것도 또한 하나의 변화이다.’라고 그것은 아버지의 만트라(기도)였다. 그는 손가락에다 반지를 끼었다.
형제는 인생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봄이 왔을 때 형은 의기가 넘쳐 그 마음의 균형을 잃어버렸고 가을이나 겨울이 되면 깊은 우울로 다시 균형을 잃었다. 그의 긴장은 결국 고혈압으로 발전했다.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수면제나 안정제 혹은 보다 강한 약을 사용했다. 병세는 전기 쇼크방법을 써야 할 단계까지 악화되었다.
은반지를 가진 동생은 봄이 오면 즐겼다.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반지를 보면서 “이것도 하나의 변화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날씨가 변화되기 시작하면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모든 것은 변화된다는 사실을 안다.” 가을이나 겨울이 왔을 때 다시 그는 반지를 보면서 “이것도 또한 변할 것이다.” 삶의 겨울도 다시 변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울지 않았다.
그렇다. 그것 역시 변화되고 사라진다. 모든 삶의 부침(浮沈)가운데서, 인생의 흥망성쇠 속에서 그는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것은 변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마음의 균형을 잃지 않고 행복하게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