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수행의 궁극적 목표
“형성된 모든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상응부) 실재에 관한 이런 경험이야말로 붓다의 가르침에서 본질에 해당한다.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과정의 다발일 뿐이다. 우리의 고통은 실체가 없는 하루살이에 불과한 변화의 과정에 집착함으로써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이 과정의 무상(無常)한 본질을 직접적으로 깨닫게 되면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사라진다. 끊임없이 변하는 내면의 느낌과 생각들을 관찰하여 그 자체의 덧없는 본성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수행자가 할 일이다.
느낌과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에 따라가지 않고 일어나는 대로 사라지는 대로 그냥 바라본다. 그러면 오랫동안 마음에 조건지어진 무의식이 표면으로 튀어나와 사라진다. 조건지어진 것과 집착이 멈추면 고통이 멈추고 우리는 자유를 경험한다. 이것이 오랜 기간동안 수행자에게 계속적으로 요구되는 작업이다. 길을 가는 모든 순간에 행복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계속되는 힘찬 정진을 요구한다. 오직 인내심을 가지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감으로 인하여 수행자는 마침내 마지막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궁극적 진리에의 통찰
수행의 길에는 세 단계의 발전이 있다. 첫째는 단순히 어떻게 왜 수행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두 번째는 수행법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자신의 성품의 깊이를 꿰뚫어 수행의 마지막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붓다는 모양, 형상, 색깔, 냄새, 고통, 쾌락, 사유와 감정, 인간의 외형적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붓다는 그것들이 궁극적 실재는 아니라고 말한다. 일상적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보다 미묘한 현상들로 구성된 커다란 형태만을 인식한다. 밑에 잠재된 구성요소는 보지 못하고 그 형체만을 보기 때문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형체의 차이점을 인식하게 된다. 또 분별하여 이름을 붙이면 편애와 편견이 생겨 좋아하고 싫어하기 시작한다.
갈망이나 갈망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전체적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사물을 깊이 관찰하여 표면적 현상의 배후까지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신체의 여러 부위, 여러 가지 기관이나 손발 등,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자기를 검토하기 시작해야 한다. 자세한 관찰이 신체의 어느 부위는 견고하고 어느 부위는 부드러우며 어느 부위는 운동하고 어느 부위는 운동하지 않음을 밝혀 줄 것이다. 우리는 신체의 온도와 대기의 온도를 구별할 수 있다. 모든 이런 관찰은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데 크게 도움을 준다.
내면의 느낌을 자각함으로써 우리는 수행자로서 큰 발전을 이룬다. 이 발전은 우리에게 전에 무지의 상태로 남겨져 있던 미세한 순간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먼저 우리는 신체의 다른 부위에서 다른 형태의 느낌, 일어났다가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지는 느낌들을 알아챈다. 비록 우리가 표면적 수준을 뛰어 넘는다 해도 우리는 아직도 표면적 현상의 통합된 형태를 관찰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갈망, 성냄, 집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만약 우리가 부지런히 수행해 간다면 곧 우리는 느낌이 일어나는 내적인 장소에 도달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신체를 통하여 일어났다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미세한 느낌의 형태를 자각한다. 우리는 통합된 형태를 꿰뚫어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의 미세한 느낌을 인식한다. 우리는 계속 일어났다 사라지는 입자들의 덧없는 본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 이제 우리는 내면에서 경험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혈액이나 뼈, 액체나 고체 혹은 가스, 추하거나 아름답거나 관계없이 오직 떨림의 덩어리로서 인식한다. 그리하여 분별하고 이름 붙이는 과정을 멈춘다. 우리는 우리 육체 내부에서 물질의 궁극적인 진리,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흐름을 경험한다.
마찬가지로 정신과정의 표면의 현상이 미묘한 심층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대상에 대해서는 좋고 싫은 느낌이 발생하는 순간, 그것은 과거에 조건지어진 것들에 기초한다. 마음이 좋고 싫음을 반응, 반복하는 다음 순간에 그것은 갈망과 혐오감으로 발전할 때까지 계속적으로 강화된다. 우리는 강한 정신의 반응만을 알아챈다. 이런 표면의 인식을 가지고 우리는 쾌락과 불쾌, 선과 악, 갈망과 혐오 사이를 분별하고 혹은 동일시하기도 한다. 물질의 현상과 마찬가지로 강렬한 감정의 경우에 있어서도 내면의 느낌을 관찰하는 순간에 그것들은 사라지고 만다. 물질이 소립자의 미묘한 물결이듯이 강렬한 감정도 순간적인 좋고 싫음이 결합된 형태, 느낌의 순간적인 충동일 뿐이다. 일단 강렬한 감정이 미세한 형태로 녹아들면 그것들은 더 이상 압도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신체의 다른 부위에서 다르게 결합된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신체의 전 구조 내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통일된 미세한 느낌을 자각하는 데까지 진보한다.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느낌들로 인하여 그것들은 신체의 전체에서 흐르는 떨림의 물결로 경험한다. 우리가 신체의 구조 내에 의식을 집중하는 부위는 어디든지 일어남과 소멸됨의 과정임을 깨닫는다. 하나의 생각이 마음에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신체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마음과 육체의 거친 덩어리가 녹으면 우리는 물질, 육체 그리고 정신적 형성물이 궁극적으로 대단히 바른 속도의 떨림, 진동이라는 사실을 경험한다. 이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은 말한다.
온 세계는 불타오르고 연기 속에 파묻힌다.
온 세계는 불타오르고 끊임없이 진동한다.(상응부)
고통의 소멸상태(bhanga)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알아차림(慧)과 평정심(定)만이 필요하다. 마치 과학자가 현미경으로 배율을 높임으로써 보다 미세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듯이 알아차림과 평정심을 발전시킴으로써 수행자는 미세한 내적 변화를 관찰할 능력을 증가시킨다.
이런 경험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면 이 경험은 확실히 매우 큰 기쁨임을 알 것이다. 모든 번민과 고통은 사라지고 수행자는 평화로움, 행복, 은총을 느낀다.
정신-물리적 과정의 생멸을 경험할 때마다 수행자는 기쁨과 축복을 느낀다. 그는 불사를 얻는다. 현자들이 실현한 바와 같다.(법구경)
마음과 육체의 견고함이 소멸할 때 축복은 수행의 길에서 하나의 진보를 이룩한 것이다. 이런 기분 좋은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목적지에 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수행의 길에서 만나는 오직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마음과 물질을 뛰어넘어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하여 궁극적 진리를 체험해야 한다.
붓다(Buddha)라는 낱말의 의미는 명상수행을 통해서 우리에게 매우 명백하게 된다. 거친 내적 실재로부터 미세한 마음의 작용까지 그 변화를 꿰뚫음으로써 우리는 신체의 전 부위에서 일어나는 떨림의 흐름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때 갑자기 흐름이 사라지고 우리는 신체의 어떤 부위에서 강력하고 불쾌한 느낌을 경험한다. 그러나 다른 어떤 부위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상황에 혐오감을 느끼기 시작하고 반대로 변하는 흐름에 갈망을 가진다면 위빠사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기분 좋은 경험은 취하고 불쾌한 경험은 피하는 노력 속에서 위빠사나를 변질시키고 있다. 일생 동안 계속될지도 모를 밀고 당기고 좋아하고 싫어하고 하는 무의식적 선택의 게임은 오직 고통을 초래할 뿐이다.
지혜가 증가함에 따라 소멸의 경험이 이후에서조차 거친 느낌들의 재현은 후퇴가 아니라 오히려 수행의 진보를 가르친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표는 느낌에 대한 특별한 경험에 있지 않고 마음을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데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느낌에 다시 반응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일이다. 우리가 느낌을 따르지 않고 균형을 유지한 채로 남아 있다면 조건지어진 것들은 곧 사라지고 느낌은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수단이 된다. 불쾌한 느낌들에 반응하지 않고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혐오감을 제거한다. 쾌락을 주는 느낌에 반응하지 않고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갈망을 제거한다. 애매하고 멍한 느낌들에 반응하지 않고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무지를 제거한다. 그리하여 본질적으로 느낌이나 경험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만약 수행자가 균형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선이다. 그러나 수행자가 마음의 균형을 상실하면 그것은 악이다.
이런 이해를 가질 때 우리는 모든 느낌을 조건지어진 것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의 평정심, 곧 상카라-우펫카(sankhara-upekkha)로 알려진 단계로 점차 마지막 목표인 궁극의 진리 자유, 열반(涅槃,nibbana)으로 인도한다.
자유의 경험
자유는 가능하다. 인간은 모든 조건지어진 것,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붓다는 말했다.
물질의 전 영역 마음의 전 영역을 넘어선 경험이 있다. 그것은 이 세계도 아니요, 다음 세계도 아니요, 또 양자 모두의 세계도 아니다. 달도 해의 영역도 아니다. 이 경험을 일어남 발전함 거주함 소멸함 혹은 환생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이것은 유지 발전 작용도 아니다. 이것은 바로 고통의 끝이다.(udana, 詩)
또 붓다는 말했다.
태어나지 않고 생성하지 않으며 창조되지 않고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만약 태어나지 않고 생성되지 않으며 창조되지 않고 조건지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면, 해탈은 태어나고 생성되고 창조되고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 알려질 수 없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고 생성되지 않는 것 때문에, 해탈은 태어나고 생성되며 창조되고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 알려진다.(Udana)
열반은 단순히 인간이 죽은 후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서 그리고 지금 각자의 내면에서’ 경험되어질 성격의 것이다. 그것은 부정적 경험(negative-experiene)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기술할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에 부정의 용어에 의해서 기술된다. 모든 언어는 정신과 물질의 영역을 다루지만 물질과 마음을 뛰어넘는 무엇을 기술하는 낱말이나 개념들은 아니다. 언어는 모든 범주의 구별을 정의한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말함으로써만이 대상을 기술한다.
사실 열반(nibbana)을 기술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어떤 설명도 혼란을 가중시킨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반에 관한 논의나 토론보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붓다는 말했다.
“고통의 소멸, 이 거룩한 진리는 자기 안에서 실현되어야 한다.”(상응부)
자유의 궁극적 실재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선 내면의 실재를 꿰뚫어 몸과 마음의 소멸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행자가 내면의 실재를 더욱 꿰뚫고 들어가면 갈수록 궁극적 진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단계적으로 밟아 가면 자연스럽게 열반을 경험하는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것을 갈망할 필요도 없고 그것이 과연 올 것인지 의심할 이유도 없다. 법(法,Dhamma)을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두 정확하게 온다. 그것이 왔을 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깨달음의 일부는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조건지어진 것들의 축적의 정도에 달려 있고, 일부는 그것을 제거하려는 뜨거운 노력에 의존한다. 수행자가 할 수 있는 모든 일,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일은 조건지어진 것에 따라 다시 반응하지 않고 각각의 느낌을 계속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 진리인 열반을 경험할 때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열반을 향하여 진보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현재 마음의 상태를 조절할 수 있다.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안팎으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이 순간에 자유를 얻을 수 있다. 궁극적 진리에 도달한자, 붓다는 말했다.
“갈망의 소멸, 생성의 소멸, 무지의 소멸, 이것을 열반(nibbana)이라고 부른다.”(상응부)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자유를 경험한다. 결국 법(Dhamma)은 미래가 아닌 지금 현 시점에서 효과가 있어야 한다. 모든 수행의 과정에서 수행의 은총을 경험해야 하고 모든 단계에서 직접적으로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이 순간에 조건지어진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은 평화롭다. 모든 순간이 우리를 완전한 자유의 순간으로 보다 가깝게 데려간다.
우리는 억지로 열반으로 발전시킬 수 없다. 열반은 개발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열반으로 이끌기 위해서 여러 가지 덕, 평정심 등을 발전시킬 수 있다. 작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관찰하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궁극적 진리를 꿰뚫는다. 마음에서 최고의 덕은 완전한 깨달음에 기초한 평정심이다.
진실한 행복
언젠가 붓다는 진정한 행복을 설명해 달라고 요구를 받았다. 그는 행복을 만들어 내는 건전한 행위를 열거했다. 모든 행복은 가족과 사회적 책임을 완수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번영에 기여하는 실천적 행동과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실천 행동 두 가지 범주로 나눈다. 자기 자신의 선은 다른 사람의 선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붓다는 말했다.
모든 인생의 소용돌이에 직면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슬퍼하지도 않고 혼란에 빠지지 않고 항상 견고함을 느끼는 이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숫다니파타)
무엇이 일어나든지 자기 자신의 육체와 마음의 세계에서든 혹은 거대한 외계에서든, 긴장하지 않고 갈망과 혐오감을 가까스로 억누름도 없이 편안하게 마음의 깊이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으로 삶의 소용돌이에 우리는 직면할 수 있다. 모든 상황에서 기쁘거나 슬프거나 부족하거나 남거나 수행자는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고 무상(無常)의 통찰로 오는 완전한 견고함을 느낀다. 이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주인이고 당신을 압도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웃으면서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이 완전한 균형이고 진정한 자유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진정한 평정심은 단순히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인 초연함이 아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친숙함이나 인생의 문제를 도피하는 냉담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정신의 균형은 문제에 대한 완전한 자각에 기초한다.
갈망과 혐오감의 결핍은 무감각한 무관심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유를 즐기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참된 평정심은 “거룩한 무관심”(holy indifference)이라고 불러야 적절하다. 거룩한 무관심은 마음의 순결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맹목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마음은 처음으로 매우 생산적이고 창조적이며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긍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마음의 균형과 더불어 순수한 마음의 또 다른 덕목이 생겨날 것이다. 선한 의지, 어떤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 다른 사람의 실패와 아픔을 함께 하는 자비, 성공과 행복을 기뻐하는 것, 이런 네 가지 덕목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얻어지는 자연스런 결과이다.
전에는 항상 자기가 좋은 것은 가지려 하고 원치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 자신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음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고 다른 사람에게 줌으로써 스스로 행복해짐을 이해한다. 그래서 좋은 것은 무엇이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나누어 갖고자 한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평화를 경험함으로써 수행자는 이것이 가장 커다란 선(善)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수행자는 다른 사람이 이 선을 경험하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논리적 결론, 메타-바바나(metta-bhavana) 즉 다른 사람을 향한 선한 의지의 개발이다. 예전에는 말뿐인 봉사였고 마음의 깊은 곳에서 여전히 갈망과 혐오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정도까지는 맹목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은 멈추고 깊은 이기주의는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선한 의지가 자연히 마음 깊숙이 들어왔다. 순수한 마음의 전체적인 힘과 이 선한 의지는 모든 이의 이익을 위해 평화롭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창조하는 데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마치 어떤 화가가 팔레트(pelette)의 수많은 색깔 가운데 회색만을 사용하여 그림 그리고, 혹은 어떤 피아니스트가 오직 중앙의 도 음만을 연주하는 것과 같이, 평정심을 수많은 인생의 다양성 속에서 오직 한 가지 의미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행하게도 사실 우리 자신의 피아노음은 조율되지 않아서 엉망이고 더더욱 그것을 연주하는 방법조차 모른다. 단지 우리는 자기표현이란 미명 아래 건반을 마구 두들김으로써 불협화음만을 만들어 낼 뿐이다. 그러나 악기를 다루는 방법을 배워 적절히 잘 연주한다면 이때 우리는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가장 낮은 음에서 가장 높은 음까지 우리는 키보드의 전 영역을 사용하여 우리가 연주하는 모든 악보가 조화롭고 아름다운 음악이 되도록 할 수 있다.
붓다는 마음을 정화하는 데 있어서 “완전한 지혜”를 얻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기쁨 평정 깨달음 완전한 이해 참된 행복”을 경험한다고 말한다.(장부) 균형 잡힌 마음으로 우리는 인생을 보다 잘 즐길 수 있다. 기분 좋은 상태가 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완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 현재의 순간에 완전하고 혼란되지 않은 깨달음을 가지고 또한 그 경험이 사라질 때도 어떠한 실망도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것이 마땅히 완전히 변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하면서 계속 미소 지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불쾌한 상황이 와도 우리는 당황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변경시킬 길을 발견한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내부 문제가 아니라면 그때 우리는 이 경험이 곧 지나갈 것임을 알기 때문에 평화롭게 남을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이 긴장으로부터 자유롭게 됨으로써 우리는 보다 즐겁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미소는 집착이나 무지에서 나오지 않고 법(法,Dhamma)에서 온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은 찡그릴 수 없다. 고통이 없어지면 자연히 미소가 생긴다. 자유로워지면 자연히 미소가 생긴다.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그는 자연히 행복을 느끼게 된다. 평화, 평정 그리고 선한 의지의 마음에서 나오는 미소, 모든 상황에서 밝게 나는 미소가 참된 행복이다. 이것이 법의 목적이다.
질문과 대답
질문 ; 신체적 고통처럼 정신적 강박관념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겠다.
대답 ; 단지 마음속에 강박관념이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그것은 깊이 억압되었다가 이제 의식의 수준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상세하게 조사하려 하지 말라. 단지 감정은 감정으로써 받아들이라. 그것과 함께 당신은 무엇을 느끼는가? 신체의 수준에서 감정은 반드시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느낌을 관찰하라.
질문 ; 이때 우리는 어떤 특별한 감정과 관계되는 느낌을 조사해야 하는가?
대답 ;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라. 당신은 느낌과 감정의 관계를 발견해 낼 수 없다. 그것은 쓸모없는 노력이다. 마음속에 감정이 있을 때 신체적으로 당신이 경험하는 느낌이 무엇이든 그것은 그 감정에 관계한다. “이 느낌은 무상하다.” “이 감정 또한 무상하다.”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단지 이렇게 느낌을 관찰하고 이해하라. 당신은 감정의 뿌리가 잘려지고 곧 사라짐을 발견할 것이다.
질문 ; 감정과 느낌은 같은가?
대답 ; 동전의 양면이다. 감정은 정신이고 느낌은 신체적이다. 실제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들은 신체에 있어서 느낌들과 함께 일어난다. 이것이 자연 법칙이다.
질문 ; 감정 그 자체는 마음의 문제인가?
대답 ; 마음은 육체의 전체와 밀접하게 관계를 가진다.
질문 ; 의식은 육체의 모든 입자들 안에 있는가?
대답 ; 그렇다. 이것은 특별한 감정과 관계된 느낌이 왜 육체 안에서 일어나는지의 이유이다. 만약 당신이 신체의 전 부위에서 느낌을 관찰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감정에 관계된 느낌을 관찰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질문 ; 만약 우리가 앉아서 어떤 느낌을 느낄 수 없다면 이것은 수행에 있어 어떤 도움이 있는가?
대답 ; 만약 당신이 앉아서 호흡을 관찰한다면 그것은 고요하게 마음에 집중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느낌을 느낄 수 없다면 마음의 정화는 표면적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마음의 심층에서는 끊임없이 계속 무의식의 충동이 일어난다.
질문 ; 선생님께서는 학생이 열반(nibbana)을 경험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대답 ; 어떤 수행자가 실제로 열반을 경험했다면 그것을 체크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 때문에 선생님은 잘 훈련되어져야만 한다.
질문 ; 수행자는 어떻게 혼자 힘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대답 ; 그들의 삶에 변화가 온다. 열반을 진실로 경험한 사람은 성인다워지고 순수한 마음에 된다.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본적 오계를 파괴하지 않는다. 실수를 감추는 대신에 그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낸다. 종교적 제사나 의식에 대한 집착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단지 외적 형태나 실제의 경험이 없는 공허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를 가져다 준 길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가진다. 그들은 수행 이외의 다른 방법을 탐색하려 하지 않는다. 끝내 자아의 환상은 그들의 내면에서 사라질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열반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마음이 여전히 혼란되고 예전처럼 행동이 건전하지 못하다면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 그들의 삶은 진실로 열반을 상태를 보여주어야 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열반을 얻었다고 선언하거나 어떤 증명서를 발급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학생이나 선생에게 자아를 강화시키는 경쟁을 불러일으킨다. 학생들은 오직 깨달음의 면허증을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 선생이 면허증을 많이 발급하면 할수록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만 간다. 열반의 경험은 이차적인 것이 되고 면허증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된다. 이것은 미친 게임이다. 법(dhamma)은 오직 사람들을 순수하게 돕는다. 최상의 도움은 학생이 진실로 열반을 경험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선생과 그 가르침의 목적은 진정으로 사람을 돕는 것이지 그들의 자아를 밀어 올리는 것이 아니다.
질문 ; 정신분석과 위빠사나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대답 ; 정신분석은 마음속에 조건지어지고,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과거의 사건으로 의식을 되돌리려고 한다. 반면에 위빠사나는 실제로 조건지어지기 시작하는 마음의 깊은 장소로 수행자를 데려가려 한다. 정신분석에서 다루려는 사건은 신체의 수준에서 느낌으로 나타난다.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전체의 전 부위에 걸쳐 신체의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수행자는 조건지어진 수많은 무의식의 층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도록 허락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조건지어진 것을 그 뿌리부터 처리하여 그것으로부터 그 자신을 해방시킨다.
질문 ; 무엇이 진실한 자비인가?
대답 ;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소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집착도 없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의 슬픔에 울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법의 길이 아니다. 만약 참된 자비를 가진다면 그때 모든 사람과 함께 당신의 최선을 다하여 돕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봉사의 결과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균형 잡힌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참된 자비이다.
질문 ; 위빠사나 수행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할 것인가?
대답 ;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검토하고 조건지어진 것을 제거함으로써 성취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이런 방법을 당신이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결코 위빠사나를 들어본 적이 없는 수행자들이 자발적으로 그와 같은 수행의 과정을 해 나간다. 이런 경우는 인도의 많은 성자들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들은 단계적 과정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빈 병에 기름 채우기
한 어머니가 아들에게 빈 병과 10루피를 주고 가까운 상점에서 기름을 사오라고 했다. 소년은 상점에 가서 병에 기름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그만 기름병을 떨어뜨렸다. 다시 소년이 병을 집어 들었을 때는 기름이 땅에 흘러 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울면서 소리쳤다. “기름 반을 잃어버렸어요. 반이나 잃어버렸다니까요.” 그는 매우 기분이 나빴다.
어머니는 둘째 아들에게 병과 10루피를 주고 기름을 사오라고 했다. 그도 역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병을 떨어뜨렸다. 기름은 땅에 흘러 반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매우 행복해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께 말했다. “보세요. 저는 기름을 반쯤 구해 냈어요.” 두 사람은 똑같은 상황으로 어머니께 돌아왔다. 그러나 한쪽은 반병이기 때문에 울었고 다른 한쪽은 반병이나 구해 낸 것에 기뻐했다.
그때 어머니는 또 다른 아들에게 병과 10루피를 주고 기름을 사오라고 심부름시켰다. 그도 역시 돌아오는 길에 기름병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기름 반 정도를 버렸다. 그는 두 번째 아들처럼 행복하여, “ 어머니, 저는 기름 반 정도를 구해 냈어요.” 그러나 이 소년은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소년이었다. 그는 낙천주의자였고 실재론주의자였다. 그는 기름 반병을 구해 냈으나 반병을 잃어버렸음을 이해했다. 그래서 어머니께 말했다. “나는 시장에 가서 온 종일 일하겠어요. 나는 병에 가득 채울 기름값을 벌겠어요.”
이것이 위빠사나이다. 염세주의자가 아니다. 반대로 낙천주의자이며 실용주의자이다. 특히 그는 일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