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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그냥 바라만 볼 뿐이다

8. 알아차림과 평정심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인경스님)

8. 알아차림과 평정심


알아차림() 평정심(),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둘을 함께 수행할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있다. 어느 쪽이 결여되거나 약하면 목표에 이르는 수행의 길에서 진보가 없다. 마치 새가 날기 위해서 날개가 필요하고 마차가 움직이기 위해서 바퀴가 필요한 것처럼 알아차림과 평정은 똑같이 강해야 한다. 새의 한쪽 날개가 약하고 다른 쪽이 강하다든지 마차의 바퀴가 쪽이 작고 다른 쪽이 크다면 그것은 없고 계속 앞으로 굴러갈 없다. 수행자는 수행의 길에서 알아차림과 평정의 능력을 동시에 발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마음과 물질이 가장 본질적인 수준에서는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동이나 생각과 같이 몸과 마음의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주의를 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전체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능력과, 감각에 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능력 가지를 모두 발전시켜야 한다. 

알아차리고 있으나 평정심이 부족하다면, 감각을 알아차릴수록 우리는 더욱 예민해지고 그것에 더욱 반응하게 되고 고통은 더욱 증가되게 된다. 반대로 평정하지만 감각이 없다면 이때의 평정심이란 마음의 심층에서 무지의 상태로 반응이 잠자고 있는 단지 표면적인 안정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아차림() 평정() 모두를 가장 깊은 수준으로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아차려야 하고 동시에 또한 그것은 변화할것이라는 진리를 이해하면서 알아차린 감각에 습관적으로 반응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자기 본성의 이해, 자기 내면 깊숙한 곳의 진리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얻은 이해, 이것이 진정한 지혜다. 이것이 붓다가실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함으로써 깨닫는 지혜이다. (yatha-bhuta nana-dassana)

지혜로 우리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있다. 일어나는 모든 감각은 계속되는것이 없다는 무상(無常) 이해를 위해서 일어나고, 무상을 이해할 모든 반응이 멈추고, 반응이 멈춤으로써 반응에 의해서 형성되는 모든 갈망과 혐오가 멈춘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우리는 스스로 고통을 만들어 내는 모든 행위를 멈추게 된다.



오래된 반응의 축적


알아차림과 평정심은 새로운 반응, 고통의 원천을 만들어 내는 일을 멈추는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루어야 하는 고통에 대한 다른 측면이 있다. 지금부터 반응하지 않으면 이상의 고통의 원인은 만들지 않겠지만 우리들 각자는 과거에 쌓은 모든 반응의 총합, 조건화의 축적물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축적을 새로 만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축적된 과거의 습관적 반응(sankhara) 우리를 고통스럽게 것이다.

상카라( Sankhara )라는 낱말은형성”(formation)으로 번역된다. 이는 형성하는 행위와 형성된것 다를 의미한다. 모든 반응은 정신 과정의 연속된 결과의 마지막 단계지만, 또한 새로운 정신적 행위의 원인으로써 단계가 수도 한다. 모든 상카라(sankhara) 그것으로 이끄는 과정에 의해 조건화되고, 다음 과정을 조건화하기도 한다.

조건화는 정신작용의 번째 과정인 지각에 영향을 미친다. 의식은 기본적으로 차별하거나 분별하지 않는다. 의식은 단순히 육체나 마음에서 접촉이 발생했음을 뿐이다. 그러나 지각은 분별적이다. 지각은 새로운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평가하고 분류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에 의존한다. 과거의 반응들은 새로운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가 된다. 과거 상카라(sankhara) 따라 새로운 경험을 판단하고 분류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과거의 갈망과 혐오의 상카라는 우리의 현재 지각에 영향을 준다.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대신  색안경을 통하여본다. 안팎의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과거에 형성된 조건들, 편견과 기호에 따라 물들고 왜곡되어 있다. 뒤틀린 지각에 따라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적인 느낌들은 곧장 평가되어 기쁨도 되고 불쾌한 것도 된다. 이런 느낌에 우리는 다시 지각을 왜곡시키는 새로운 조건화를 만들어 낸다. 이렇게 형성된 의지적 반응은 미래의 행동을 형성하는 새로운 원인이 된다.

조건지어지고 미래의 조건이 되는 의지적 행위, sankhara 가지 기능은 연기(緣起) 사슬로 나타난다. 12연기의 번째 고리는 무명(無明) 다음의 ()인데, 이것은 오온(五蘊) 번째 () 일으키는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sankhara) (,consciousness), (,perception), (,sensation) 다음으로 오기도 한다. 느낌() 다음에 오는 갈망과 혐오의 습관적 반응으로 나타난다. 갈망과 혐오는 집착으로 발전하고 그것은 새로운 정신적 육체적 활동의 충동이 된다. 정신의 과정은 자체로 성장하여 간다. 모든 () 사건의 사슬에서 나와 새로운 ()으로 귀착된다. 새로운 () 다시 끝없이 반복되는 사건의 사슬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행동하는 모든 순간 우리는 행동하는 정신의 습관을 강화시킨다. 갈망과 혐오를 발전시키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그것들을 계속 발생시키려는 마음을 더욱 강화시킨다. 일단 정신 행위의 형식이 형성되면 우리는 그것에 붙잡히고 만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바라는 물건을 B라는 사람의 방해로 인하여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 A B 매우 나쁘게 뿐만 아니라 B 자기를 싫어한다고 믿는다. 신념은 인간의 본성을 고려한 판단이 아니라, B 자기의 욕망을 좌절시켰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경험은 A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B 계속되는 모든 접촉은 이것에 물들여져 있고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다시 혐오감을 발전시켜 B 대한 A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킨다. 비록 사람 사이의 만남이 20 만이라 할지라도 A B 보면 즉각적으로 불쾌감을 느낀다. B 20 동안 많이 변했지만 A B 과거의 경험으로 평가한다. 정신의 반응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B 대한 맹목적인, 이미 형성된 편견에 기초를 둔다.

반대로 B A에게 A 원하는 물건을 얻는 도움을 주었다고 하자. A B 매우 선량하고 자기를 좋아한다고 믿는다. 믿음은 B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는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결코 B 성격에 대한 고려가 아니다. 이런 믿음은 무의식 속에 계속 남아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들의 접촉에 영향을 준다. A 사람 자체에 반응하지 않고 처음에 형성된 B 대한 맹목적인 신념에 반응한다.

이렇게 (,sankhara) 즉각적으로 미래에까지 반응을 일으킨다. 우리가 우리의 느낌, 우리의 지각에 의해서 형성된 느낌들에 반응하면서도, 우리는 외적 대상을 다루고 있다고 착각한다. 비록 순간에 새로운 의지적 행위() 멈춘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과거에 형성된 의지적 행위는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 축적된 습관에 따라 반응하려는 경향이 남아 종종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 조건지어진 정신적 습관이 계속 남아서 저항을 하는 , 우리는 여전히 자유로울 없다.

어떻게 과거의 습관적 행위를 지울 있는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위빠사나 수행의 과정을 보다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건지어진 것들의 소멸 


위빠사나 수행에 있어서 우리의 작업은 단순히 신체의 부위에서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특별한 느낌에 관한 원인은 우리의 관심 밖이다. 모든 느낌은 내적 변화의 징후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변화는 원천적으로 정신적이거나 신체적이지만 마음과 육체의 기능은 독립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분류할 없다. 육체나 마음은 어느 쪽에서 변화가 일어나면 그것은 무엇이든 다른 쪽에 영향을 미친다. 

2장에서 논한 바와 같이 몸은 모든 운동이 일어났다가 재빠르게 사라지는 소립자(Kalapas) 구성되어 있다. 그것들은 결합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 신체 느낌의 영역을 만드는 기본적 성격을 보여준다.

소립자가 일어나게 하는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우리가 사는 환경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신체에 영향을 주고 소립자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입자들은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는 정신적 반응 때문에 일어나고, 현재의 정신상태에 영향을 과거의 반응으로 일어난다. 움직이기 위하여 육체는 음식을 요구한다. 만약 육체에 음식을 제공하지 않으면 즉시 기능은 멈춘다. 육체는 근육에 저장된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주일 동안은 계속 유지될 있을 것이나, 모든 저장된 에너지가 소비되어 마침내 육체는 붕괴된다. 신체의 흐름은 끝장이 난다.

같은 이유로 마음은 의식의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활동을 요구한다. 정신의 활동이 상카라(sasnkhara)이다. 조건지어진 생기(生起) 사슬에 따라 의식은 상카라(sankhara)에서 온다. 각각의 정신의 반응은 의식의 흐름에 충격을 줌으로써 책임을 다한다. 육체가 하루 일정한 간격으로 음식을 요구하듯이 마음은 새로운 자극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것이 없다면 마음은 순간이라도 계속될 없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정신적이고 습관적인 반응을 하지 않는다. 주어진 순간에 그는 상카라(sankhara) 만들지 않는다. 이때 정신의 흐름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당장에 멈추지 않는다. 대신에 과거에 축적된 습관의 반응이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 미음의 표면에 나타난다. 과거에 조건지어진 반응이 일어나 기본적 의식에서 다른 형태로 변천해 간다. 조건화는 육체적 수준에서 일어나는 입자의 조건지어진 특별한 형태에 의해서 나타나는데 이것을 육체 내부의 느낌으로 경험한다. 아마도 혐오를 야기하는 과거의 상카라(sankhara) 입자로 자체를 드러내며, 그것은 육체 내부의 불쾌감으로 경험된다. 만약 느낌을 싫어하게 된다면 새로운 혐오감이 발생한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은 새로운 자극을 받기 시작하며 과거의 습관적 행위는 의식의 표면으로 오를 기회도 없어진다.

그러나 혐오감이 일어난다 해도 거기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상카라(sankhara)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과거의 습관적 상카라는 사라진다. 그러나 순간에 다른 과거의 상카라가 느낌으로 일어난다. 다시 여기에도 반응이 없다면 과거의 상카라는 사라진다. 이렇게 평정심을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과거에 축적된 습관적 반응을 마음의 표면으로 떠올리고 계속하여 그것들은 느낌으로써 알아차림하게 되면, 우리는 과거의 조건지어진 것들을 점차로 소멸시킬 있다. 

혐오에 대한 조건화가 남아 있는 , 무의식적으로 마음은 일상생활 속에서 직면하게 되는 불쾌한 경험에 혐오감을 가지고 반응한다. 갈망에 대한 조건화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은 기분 좋은 상황에서 갈망스럽게 반응한다. 위빠사나는 이런 조건지어진 반응을 제거한다. 수행을 우리는 계속하여 유쾌와 불쾌의 느낌을 만난다.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모든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점차 갈망과 혐오를 약화시키고 소멸시킨다. 어떤 형태의 조건지어진 습관적 충동이 제거되면 같은 형태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모든 조건지어진 반응이 하나씩 제거되면 마음은 완전히 자유롭다. 과정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건지어진 것들은 진실로 무상하다네.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들, 

만약 이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면, 

조건지어진 것들의 소멸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온다네.(장부)


모든 상카라(sankhara) 끊임없이 계속되고 반복되어 일어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지혜를 발전시켜 그것을 객관적으로 있다면 반복은 멈출 것이고 소멸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가 그것에 반응만 하지 않는다면 층층이 쌓인 오랜 상카라(sankhara) 일어났다가 소멸 것이다. 상카라가 소멸된 만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우리는 행복하게 된다. 과거의 조건지어진 상카라가 모두 소멸되면 우리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 끝없는 행복을 누린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은 과거의 조건화된 행위에 따르지 않음으로써 조건지어진 것들을 소거시키기 위한 정신의 단식이다. 삶의 모든 순간 속에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이제는 알아차림(,awareness) 평정심(,equanimity) 의해 우리는 행동하고 어떤 상카라(sankhara) 발생시키지 않는 순간을 성취한다. 순간에 신념은 무엇이든 힘이 있다. 수행자는 이때 거슬러 올라가는 역류의 과정, 정화의 과정을 걷기 시작한다. 

과정을 촉진시키기 위해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습관의 반응을 삼가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느낌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그것들을 고요한 마음의 상태에서 관찰해야 한다. 알아차림상태와 평정심을 유지하는 모든 행위는 마치 어두운 방을 비추는 등불처럼 과거의 습관적 충동을 자동적으로 제거할 것이다. 붓다는 자선사업을 했던 사람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결론적으로 논평했다.


비록 대단한 자선 사업을 했더라도 그가 마음으로부터 깨달은 사람, , 성인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업의 과보(,sankhara) 받는다. 비록 그가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해도 그가 기꺼이 다섯 가지의 지각 표상(五蘊) 받아들인다면 그는 아직도 업의 과보를 받는다. 그가 비록 자선사업을 했더라도 소의 우유를 짜내면서 선의 의지를 발전시킨다면 그는 아직도 업의 과보를 받는다. 그가 비록 자선사업을 많이 했더라도 그가 다른 사람을 경멸하면서 무상의 깨달음을 발전시키는 것은 아직도 그는 업의 과보를 받는다. (증지부)


비록 매우 짧은 수간이지만 수행자가 신체의 내부에서 느낌의 실체를 자각했다면 그는 순간적 존재로서의 느낌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것에 반응하지 않는다. 짧은 순간조차 매우 강력한 효과를 가진다.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하여 계속 수행하여 간다면 평정심은 강해지고 습관의 반응은 줄어든다. 점차 습관적인 마음의 행위는 부서지고 오랫동안 조건지어진 것들은 소멸되어 마침내 마음은 과거, 현재의 모든 맹목적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운 때가 온다.


질문과 대답

질문 ; 오늘 오후에 움직이지 않고 등을 곧바로 세우고 오랫동안 앉을 있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나는 많은 느낌을 느끼지 못했다. 느낌이 실제로 것인가? 아니면 처음의 자세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가?

대답 ; 일부러 불편한 자세를 취하여 느낌을 만들지 말라. 그것이 수행에 적절한 방법이라면 우리는 고통스런 장소에 앉아야 것이다. 이런 극단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체는 곧바로 있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느낌들은 자연스럽게 오게 하라. 그것들은 것이다. 그것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당신이 그것을 전에 느끼던 방식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다른 무엇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질문 ; 보다 미세한 느낌이 있었다. 처음에 움직이지 않고 조금 앉아 있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대답 ; 당신은 보다 편안한 자세를 발견하는 것이 좋다. 느낌들은 본성대로 그냥 두라. 아마 보다 강한 느낌들이 지나가고 이제는 미세한 느낌들을 다루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마음은 그것을 느낄 만큼 날카롭지 못하다. 마음이 더욱 날카로워지기 위해서 당분간 호흡을 관찰하라. 이것은 당신의 집중력을 높이고 미세한 느낌을 느끼는 도움을 것이다.

질문 ; 느낌이 거칠다면 좋겠다. 왜냐하면 오랜 상카라(sankhara) 다가왔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대답 ; 반드시 그렇지 않다. 어떤 충동들은 미세한 느낌으로 나타난다. 거친 느낌만을 갈망하는가? 무엇이 오든지 당신의 일은 관찰하는 것이다.

질문 ; 우리는 느낌과 상카라(sankhara) 결합되는 것을 검토해야 하는가?

대답 ; 그것은 힘의 낭비다. 그것은 더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 옷의 얼룩이 생겼는지를체크하기 위해멈춘 것과 같다. 이것은 당신의 , 이것은 옷을 깨끗하게 세탁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가장 중요한 일은 세탁비누를 사용하여 옷을 세탁하는 것이다. 세탁이 되면 얼룩은 제거될 것이다. 이와 같이 당신은 위빠사나의 세탁비누를 받아들이고 이것을 사용하여 마음의 모든 얼룩을 제거하라. 만약 당신이 특별한 느낌의 원인을 찾아낸다면 당신은 지적인 게임을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무상(anicca) 무아(anatta) 관해 잊어버린다. 이런 지적 게임은 당신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질문 ; 나는 관찰하는 사람, 관찰되어진 것에 관해 혼돈에 빠졌다.

대답 ; 지적인 설명으로 당신을 도울 없다. 당신 스스로 조사해야 한다. 내가이것 하는 동안()’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계속 조사하고 분석하라. 어떤 나타나는지 보라. 만약 무엇이 나타나거든 그것을 관찰하라. 무엇도 오지 않으면 그땐, 환상에 불과하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질문 ; 조건지어진 정신적 행동 가운데 가지는 긍정적이지 않는가? 이것들을 모두 지우려 하는가? 

대답 ; 긍정적 조건들은 우리에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동기를 준다. 그러나 이런 목적을 얻었을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을 버리게 된다. 마치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리듯이 일단 강을 건너면 여행은 끝난다. 뗏목은 이상 필요가 없다. 그것은 뒤에 남겨야 한다.( 유명한 뗏목의 비유는 중부, 22에서 인용됨) 이처럼 완전한 자유에 이르면 조건지어진 것들은 필요가 없다. 사람은 긍정적으로 조건지어진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의 순수함 때문에 자유롭다.

질문 ;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할 불편한 경험을 하는가? 

대답 ; 위빠사나는 먼저 거친 충동을 제거하는 작용한다. 당신은 방을 청소할 먼저 모든 쓰레기와 휴지 조각을 치우고 쓸고 나서 계속하여 먼지를 닦아 낸다. 위빠사나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마음의 거친 충동 등을 제거하고 미세한 먼지들은 쾌감으로써 경험된다. 열중하여 편안한 감각적 경험을 수행의 마지막 목표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당신은 모든 조건지어진 습관적 반응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든 느낌을 객관적으로 계속 관찰해야 한다.

질문 ; 당신은 우리가 더러운 속옷을 가졌고 그곳을 있는 비누도 가졌다고 말한다. 나는 오늘 비누를 버렸다고 느낀다. 아침에 명상은 매우 힘이 있었지만 오후엔 화만 나고 희망도 없다고 느낀다. 마치 수행이 강해지면 내부의 (아마도 자아인데) 그만큼 강해져 나를 탈진시킨 같다. 그리고 나는 그것과 싸울 힘이 없다고 느낀다. 이렇게 열심히 싸우지 않아도 좋은 방법이 있는가?

대답 ; 평정심을 유지하라. 이것이 최상의 길이다. 당신이 경험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명상수행이 되었을 마음은 균형을 이루고 그것은 무의식의 깊이까지 꿰뚫었다. 그런 결과로 과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 흔들려 마음의 표면으로 나왔다. 다음엔 앉아서 당신은 과거의 흐름과 대면해야 한다. 이때 평정심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정적 의식이 당신을 압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의 균형이 약하다면 호흡을 관찰해 보라. 물결이 왔을 당신은 닻을 내리고 그것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라. 호흡은 당신의 닻이다. 호흡과 함께하라. 폭풍은 지나갈 것이다. 무의식이 마음의 표층으로 나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청소할 기회를 가지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평정심을 유지한다면 그것은 쉽게 지나갈 것이다.

질문 ; 실제로 고통이 없어도 수행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을 있는가?

대답 ; 만약 당신이 알아차림상태와 마음의 균형을 유지한다면 그땐 고통이 있든지 없든지 당신은 확실히 수행에서 진보한다. 발전하기 위해서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고통이 없는 대로 받아들이라. 당신은 단지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라.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


봄베이 가까이에 성인 같은 은둔자가 살았다. 그를 만난 사람은 그의 순수한 마음을 존경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완전히 자유를 얻었다고 했다. 은둔자는 이런 말을 듣고서과연 내가 완전한 자유를 얻었을까?’하고 생각했다.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을 면밀히 조사한 끝에 아직도 자신의 마음속에 충동의 흔적이 남아 있는 완전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있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있습니다. 붓다라고 부르는 고타마가 바로 그분입니다. 그는 사받티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으며 자유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은둔자는 사람에게 가야 한다. 나는 그에게서 완전한 자유인이 되는 방법을 배우리라.’ 그래서 그는 봄베이에서 인도 중앙부를 가로질러 걸어서 마침내 인도 북부에 있는 사받티시에 도착했다. 사받티에 도착하자 그는 붓다의 수행처를 물어서 찾아갔다. 

그분은 밖에 나가셨습니다.”

승려가 대답했다.

그분은 탁발하기 위해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면서 쉬세요. 그분은 돌아오실 것입니다.”

아니오, 기다릴 없습니다.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그분이 길을 가르쳐 주세요. 나는 따라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이 길을 알려드리지요. 좋으시다면 당신은 길을 따라가면 그분을 만날 있습니다.”

은둔자는 바로 출발하여 도시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탁발하는 승려를 만났다. 승려에게서 풍기는 평화로움과 경이로운 조화의 분위기가 은둔자에게 이분이 붓다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주었다.

은둔자는 붓다에게 다가가서 절을 하고 그의 발에 손을 얹고 말했다. “저는 당신이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유를 얻는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제게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붓다는 말했다. “그렇다. 나는 자유에 이르는 길을 가르친다. 그러나 적절한 시간도 장소도 아니다. 나의 수행처에 가서 기다리라. 돌아가 가르쳐 주리라.”

아닙니다. 저는 기다릴 없습니다.”

반시간도 기다리겠다고?”

저는 기다릴 없습니다. 반시간 후면 저는 죽을 것입니다. 제가 당신에게 가진 모든 신뢰는 30 후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때 저는 가르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이 적절한 시간입니다. 제발 지금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붓다는 사람을 보고 말했다. “그렇다 그대는 시간이 없다. 죽게 것이다. 그대는 지금 이곳에서 법을 받아야 한다.” 

거리의 가운데서 어떻게 () 가르칠 것인가? 그러나 붓다는 마디의 말을 주었고 말은 완전한 가르침이 되었다.

보는 곳에서는 오직 보기만 해야 한다.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하는 곳에서는 오직 냄새만 맡고 맛만 보고 만지기만 해야 한다. 인식이 있는 곳에서는 오직 인식만이 있어야 한다.”

여섯 감각의 접촉으로 느낌이 일어날 아무런 평가도 조건지어진 지각도 없어야 한다. 일단 지각이 경험을 좋다 나쁘다 평가하게 되면 그는 맹목적인 습관의 반응으로 세계를 왜곡하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과거의 습관적 반응이나 평가를 멈추고 무의식의 반응도 없이 깨어있어야 한다. 

은둔자는 매우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마디의 말로도 충분했다. 그는 도로의 쪽에 앉아서 그의 주의를 자신의 내적 본성에 집중시켰다. 아무런 평가도 없이 아무런 무의식의 투사도 없이 그는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내면의 변화과정을 관찰하기만 했다. 분이 지나자 그는 수행의 목표를 얻었다. 그는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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