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삶의 지혜
우리들 자신에 관한 편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은 “자아가 있다”(There is self)는 것이다. 이 같은 가정에 의해서 우리들 각자는 자아에 최고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또 우주의 중심으로 삼는다. 모든 무한한 세계 가운데 자아만이 오직 유일하다. 비록 셀 수 없는 많은 존재 가운데 오직 자아만이 유일하다는 것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한다 해도, 우리는 자아의 존재와 그 가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자아를 과장시킨다 해도 시간과 공간의 광대함에 비교하면 그것은 하찮은 것으로 남는다. 자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분명하게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한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자아의 성공을 이룩하는 데 바친다.
그러나 자아의식이 고뇌임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가 얼마나 큰 병통인지를 안다. 우리가 갈망과 공포, 자기정체성(identity)에 열중되어 있는 한, 우리는 세계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채로 자아의 감옥에 갇혀있을 뿐이다. 이런 자기 망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속박으로부터의 진정한 자유이고, 우리를 세계 속으로 뛰어들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삶에 있어서 진정한 성취를 발견하는 길이다. 필요한 것은 자기 부정이나 자기 억압이 아니라 잘못된 자아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런 해방의 길은, 자아라고 불리는 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 하루살이의 파동에 불과하다는 자각에 의해서 비롯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런 자각을 얻는 방법이다. 개인적으로 육체와 마음의 순간적 변화의 본질을 경험하지 못하는 한,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의 덫에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단 고정되고 영원한 것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면 “나”라는 고집은 자동적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고통은 엷어지고 마침내 없어진다. 수행자에게 자아와 세계의 수난적인 본성인 무상(無常, anicca)에 대한 자각은 자유로 향한 문을 여는 열쇠다.
무상(impermanence)은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꿰뚫는 아주 중요한 주제이다. 그는 말했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삶의 본성을 알고 살아가는 단 하루가, 맹목적으로 살아가는 천년의 삶 보다 더 낫다." -(법구경)
그는 무상함의 자각을 농부의 쟁기에다 비유했다. 그것은 농부의 쟁기처럼 밭을 갈 때 모든 뿌리를 잘라 낸다. 무상에 대한 깨달음은 모든 대들보 가운데 가장 높은 지붕의 용마루이며 모든 신하들을 지배하는 힘 있는 왕이며 별들의 빛을 압도하는 달빛이며 모든 어둠을 쫓아내는 밝은 태양이다.(상응부)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은 “모든 형성되어진 것은 소멸되기 마련이다. 부지런히 정진하라.”(법구경) 였다.
무상(anicca)의 진리는 단순히 지적인 이해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 또 감정이나 헌신만으로도 받아들일 수 없다. 오직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상의 진실을 경험해야 한다. 무상과 자아 그리고 고통의 환상적인 본성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가 자유로 인도하는 참된 통찰을 구성한다. 이것이 바른 이해이다.
수행자는 계(계, sala), 정(定, samadhi), 그리고 혜(慧, panna)의 실천으로써 이 자유로운 지혜를 경험한다. 만약 이 세 가지를 닦지 않는다면, 또 길을 따라 단계적으로 밟아 가지 않는다면, 수행자는 진정한 통찰,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을 수 없다. 비록 수행을 시작하기 전이지만 수행자는 몇 가지의 지혜, 고통(苦)에 대한 지적 인식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표면적 수준이라고 해도 그와 같은 이해가 없다면 고통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할 수행에 대한 발심(發心)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바른 이해(正見, right understanding)가 최우선한다.”고 붓다는 말했다.(중부)
사실 팔정도의 첫 번째 단계는 바른 이해(正見)와 바른 사유(正思)이다. 우리는 문제를 알고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결정한다. 오직 이때야말로 법의 실제적인 실천이 가능하다. 우리의 행위를 삼가는 계행(戒行)을 지키는 도덕적 훈련으로부터 수행은 시작된다.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집중력(定)을 발전시키고, 신체의 전 부위의 느낌을 관찰함으로서 우리는 조건지어진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경험적 지혜(慧)를 발전시킨다.
첫 단계로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진정한 이해가 일어났을 때 바른 이해가 생겨난다.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자아의 본성을 자각함으로써 수행자는 갈망 혐오 그리고 무지로부터 자유롭다. 이 같은 순수한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준다는 생각조차 불가능하다. 그의 생각은 선한 의지와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로 가득 차 있다. 말 행동 그리고 생활에서 그는 불평이 없고 성실하며 평화롭게 살아간다. 도덕의 실천으로 얻어진 평정심은 보다 쉽게 집중을 가능케 하고 집중이 강하면 강할수록 지혜는 더욱 깊어진다.
서로를 돕는 계(戒), 정(定), 혜(慧)의 훈련은 다리가 세 개 있는 삼각대와 같다. 세 개의 다리 중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삼각대는 설 수 없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계(戒, sila), 정(定, samadhi), 혜(慧, panna)를 동일한 국면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른 이해에서 바른 생각이 나오고, 바른 생각에서 바른 말이 나오고, 바른 말에서 바른 행동이 나오고, 바른 행동에서 바른 생활이 나오고, 바른 생활에서 바른 노력이 나오고, 바른 노력에서 바른 알아차림이 나오고, 바른 알아차림에서 바른 집중력이 나오고, 바른 집중에서 바른 지혜가 나오고, 바른 지혜에서 바른 자유가 나온다.(상게서)
위빠사나 수행은 수행의 가치를 지금 현시점에 둔다. 일상생활에서는 평정심을 위협하는 셀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난다. 기대하지 않던 반대, 어려움 등을 만난다. 결국 위빠사나를 배우는 것은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보증이 아니다. 항해사가 항해 기술을 배우는 것은 오직 순조로운 항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폭풍이 오고 문제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을 피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자기 패배이다. 반대로 적절한 훈련은 폭풍을 돌파하도록 도와준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무지는 우리로 하여금 외적 사건이나 사람을 비난하게 하고 그것들을 두려움의 근원으로 간주하고 모든 힘을 외적 상황의 변화에 쏟는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 자신의 행복이나 불행의 책임은 우리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음을 깨닫게 한다. 문제는 맹목적인 습관의 반응(行)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조건지어진 맹목적인 충동이라는 내적 폭동에 주의 집중해야 한다. 단순히 무의식의 반응을 멈추려는 결심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조건지어진 것들이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한 조만간에 그것은 일어나 마음을 뒤흔들고 모든 결심을 압도해 버릴 것이다. 오직 진정한 해결은 그것을 관찰하는 법을 배워 우리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하기는 대단히 쉽다. 그러나 이것을 실행에 옮기기는 매우 어렵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관찰하는가이다. 부정적인 충돌, 공포, 혐오 혹은 질투 등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관찰하기도 전에 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 말하고 행동해 버린다. 그리고 나중에 모든 것이 지나간 다음에야 실수를 깨닫고 후회하곤 하지만 다음에도 똑같은 행위를 계속하여 반복한다.
화가 나기 시작할 때 그것을 관찰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라. 관찰하려는 순간에 화를 나게 만든 사람이나 상황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여기에 머무르는 것을 화를 더욱 돋우는 것이다. 어떤 원인이나 상황으로부터 독립된 감정의 관찰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닌 능력을 벗어난다.
그러나 마음과 물질의 궁극적인 실재를 탐구함으로써 붓다는 무의식적 충동이 일어날 때 마다 신체에 두 가지 형태의 변화가 일어남을 발견했다. 하나는 호흡이 거칠어지는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미세한 현상으로써 생화학적 반응인 느낌이 신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보통의 지성을 가진 사람이 적절한 훈련을 한다면 쉽게 호흡과 느낌을 관찰할 능력을 개발할 수 있다. 이곳은 우리에게 부정적 무의식의 충동이 위험한 수준으로 발전하기 전에 발견하여 변화시킬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계속해서 호흡과 느낌을 관찰한다면 쉽게 부정적 무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물론 무의식적 충동의 습관은 매우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에 당장에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완벽하게 한다면 적어도 몇 가지 정도는 무심코 그 충동에 따르지 않고 쉽게 자기 자신을 관찰할 수 있다. 점차 관찰의 순간이 증가하면 무의식의 충동이 일어나는 횟수가 줄어들 것이다. 비록 부정적인 반응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강도와 시간은 최소화된다. 대단히 자극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호흡과 느낌을 관찰할 수 있고 균형과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
마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의 평온과 균형을 가지고 사람은 처음으로 진정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진정한 행동은 항상 긍정적이고 창조적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부정적 행위에 대한 무의식의 동일한 보복 대신에 우리는 보다 유익한 반응을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 무지한 사람은 덩달아 화를 내고 결국은 양자 모두에게 상처만 남기는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균형과 평화를 유지한다면 그 사람이 분노로부터 문제를 건설적인 방향으로 다룰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우리는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부정적 무의식의 충동에 우리가 압도당하게 되면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정적 무의식의 충동을 볼 때마다 그들이 고통 받고 있음을 이해한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들 스스로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도울 수 있다. 우리가 평온하고 행복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행복하고 평화롭도록 도울 수 있다.
알아차림과 마음의 균형을 개발하는 것은 식물처럼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내적 평화의 추구에 열중하는 동안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는다. 법(法)은 자신의 번영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번영에도 책임을 지도록 가르친다. 항상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는데 필요한 행동을 취한다. 모래 웅덩이 속에 빠지는 어린아이를 보았을 때 어리석은 사람은 당황한 나머지 어린이의 앞뒤로 뛰어다니며 결국 그도 빠져 버리고 만다. 현명한 사람은 조용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아이에게 닿을 수 있는 나뭇가지를 찾아내어 아이를 구출한다. 갈망과 혐오의 웅덩이에 빠지는 사람과 함께 당황하면 그를 도울 수 없다. 우리는 견고한 정신적 기반 위로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
인생에 있어 종종 강력한 행동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로 그의 실수를 설명하려 하지만 강력한 말과 행동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그 사람은 충고를 무시한다. 이런 때 강력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행동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가지고 있는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만약 사랑과 자비가 있다면 그 행동은 도움을 줄 것이다. 만약 사랑과 자비가 없다면 진정으로 누구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사랑과 자비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결코 나쁘게 되지 않는다.
우리는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를 보았을 때 그 같은 불건전한 행동을 멈추게 할 책임을 느낀다. 비록 약자에게는 동정을 공격자에게는 화를 낸다고 하더라도, 위빠사나 수행자는 약자에게는 강자의 피해를 공격자는 스스로 불건전한 행동으로 인한 상처를 막아야 함을 알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연민을 느낀다.
강경한 행동을 취하기 전에 마음을 검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나중에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옳지 못하다. 만약 우리 스스로 안으로부터 평화와 조화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평화와 조화를 조장할 수 없다. 우리는 알아차림과 평정심을 수행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선을 위해 일한다. 만약 세계의 전체적 긴장을 완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을 위해 건전한 행위를 실행할 것이다. 진실로 평정심은 모든 침묵에 의해서 여러 방향으로 좋은 영향을 멀리 미친다.
결국 정신적 부도덕성은 세계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뿌리이다. 마음이 순결할 때 무한한 삶이 앞에서 열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진정한 행복을 즐길 수 있다.
질문과 대답
질문 ; 나는 요가(Yoga)를 실천한다. 어떻게 이것을 위빠사나와 결합시킬 수 있는가?
대답 ; 본 명상센터에서 요가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서 당신은 위빠사나와 요가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요가 자세의 신체적 연습과 호흡의 연습의 조절을 실천할 수 있다. 요가는 육체 건강에 매우 유익하다. 당신은 요가와 위빠사나를 결합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자세를 취하고서 신체의 느낌을 관찰한다. 이것은 요가만 했을 때 보다 더 큰 효과를 줄 것이다. 그러나 주문과 영상을 사용하는 요가 수행법은 위빠사나 수행법과는 완전히 반대된다. 위빠사나와 요가를 섞지 말기 바란다.
질문 ; 위빠사나 호흡법과 요가의 호흡법은 어떻게 차이가 있는가?
대답 ; 요가의 호흡법은 신체적 연습으로 도움을 주지만 위빠사나의 아나파나-사띠(anapana-sati)과는 섞지 말라. 위빠사나 아나파나-사띠는 호흡을 조절하려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호흡을 관찰해야 한다. 요가의 호흡조절은 신체적 연습이지만 위빠사나의 호흡은 명상을 위한 수행이다.
질문 ;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집착, 끓어오르는 야심이 아닌가?
대답 ; 그렇다면 당신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당신이 집착하는 한 당신은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단순히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라. 이 순간의 실재(reality)를 계속적으로 관찰하라. 그러면 깨달음은 온다. 그것이 오지 않는다 해도 당황하지 말라. 오직 당신은 당신의 수행만을 계속하라. 그 결과엔 관심을 두지 말라. 만약 이렇게 수행해 간다면, 당신은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깨달음은 틀림없이 올 것이다.
질문 ; 이땐 오직 정진만 해야 하는가?
대답 : 그렇다. 당신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 당신의 책임이다. 책임을 다하라. 그러나 집착하지 말라.
질문 : 이것은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닌가?
대답 ; 아니다. 오는 것은 그 자체로 온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질문 ; 아이들에게 법(Dhamma)을 가르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답 ; 가장 적절한 시기는 태어나기 전이다. 임신 기간동안 어머니가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한다. 그러면 아이는 그것을 받아서 법의 아이(Dhamma Child)가 태어난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있다면 그들에게 법을 가르칠 수 있다. 예를 들면 위빠사나 수행의 결과로써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평화와 조화를 나누어주는, 다른 사람을 향한 선의 의지(metta bhavana)를 배웠다. 만약 당신의 아이들이 어리다면 명상이 끝날 때마다 혹은 잠잘 시간에 그들에게 직접 당신의 선한 의지, 사랑을 주라. 이런 식으로 그들은 당신의 법의 수행으로부터 축복을 받는다. 그들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조금씩 법(Dhamma)을 설명하라. 그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으로 몇 분씩 호흡관법을 가르치라. 결코 강요하지 말라. 단지 당신과 함께 앉아 있도록 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 스스로 건강한 법의 삶(Dhamma Life)을 사는 것이다. 이것이 당신의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귀감이 된다. 가정에서 당신은 그들이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돕는 평화롭고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어린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다.
질문 ; 경이로운 법(Dhmma)에 감사드린다.
대답 ; 법(Dhmma)에 감사를 바친다. 법은 위대하다. 나는 오직 하나의 뗏목에 불과하다. 또한 그대 자신에게도 감사하라. 당신은 매우 열심히 정진했다. 그래서 삶의 기술을 이해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행복하게 살라. 그리고 뜨겁게 노력하라.
괘종소리
이 경이로운 수행법이 원형의 형태로 2천여년 동안 보존되어 온 곳, 법(法)의 땅, 버마에 태어난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백여년 전에 나의 할아버지는 인도에서 이곳에 정착했다. 그래서 나는 이 나라에 태어났다. 사업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십대부터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돈 버는 것이 인생에서 나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다행이 일찍부터 많은 돈을 벌었다. 만약 부자의 생활을 스스로 알지 못했다면 나는 그와 같은 삶의 공허함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만약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마음 한 구석에서 참된 행복은 부에 있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부자가 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이나 특별한 지위가 주어진다. 그들은 여러 조직의 책임자가 되기도 한다. 나는 20대 초반부터 사회적 특권을 추구하는 이 미친 짓을 시작했다. 그 자연스런 결과로 바쁜 생활의 긴장은 신경증과 심한 편두통을 야기했다. 밤마다 이 증세로 고생했다. 그러나 이 병의 발생은 큰 행운이었다.
버마의 가장 좋은 의사조차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처방은 고통을 진정시키는 모르핀을 투여하는 것이었다. 밤마다 나는 모르핀주사를 요청했다. 그리고 메스꺼움, 구토, 신경쇠약 등의 후유증으로 고통 받았다.
몇 년이 지나서 의사들은 “지금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 모르핀주사를 맞고 있지만, 만약 계속 투여한다면 곧 모르핀에 중독 되고 당신은 매일 모르핀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나는 앞으로 계속될 고통을 예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의사는 충고했다. “우리는 당신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당신은 사업상 외국에 종종 나가므로 위험한 모르핀 보다 중독증이나 후유증이 없는 다른 진통제를 구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당신 건강에도 좋다.”
의사들의 충고에 따라 나는 스웨덴 독일 영국 미국 그리고 일본 등지를 여행했다. 나는 이들 나라에서 최상의 의사들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병을 치료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것을 행운으로 여기나 나는 떠날 때보다 더 악화되어 돌아왔다.
내가 참담한 상태로 되돌아왔을 때 친한 친구가 내게 와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위빠사나 수행의 10일 수련코스에 참가해 보지 않을 텐가? 인품이 고결하고 정부의 고위 공무원이며 자네처럼 가정을 가진 우바킨(U Ba Khin)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는데, 이 수행은 마음의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가르친다고 하네. 자네의 병은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마도 이 수행생활이 자네의 병을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병을 고치려고 여러 곳을 찾아다녔지만 모두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명상을 가르치는 이 선생님을 만나 보기로 했다. 나는 곧 명상센터로 찾아가 이 비범한 사람을 만났다. 나는 아주 고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 그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저는 당신의 위빠사나 수행코스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좋다. 10일 수련코스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그대를 환영한다.”
나는 계속하여, “저는 몇 년 동안을 치료할 수 없는 편두통으로 고생해 왔습니다. 이 수행을 통해서 병을 고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안된다.” 그분은 갑자기 말했다.
“이곳에 오지 말라. 그대는 이 수행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나는 그분이 왜 단호해졌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분은 곧 자비로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법(法, Dhamma)의 목적은 신체의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병원으로 가는 것이 더욱 좋겠다. 법(Dhamma)의 목적은 모든 삶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다. 당신의 그 병은 매우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병은 곧 지나가버릴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정화과정에서의 부산물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첫 번 부산물로써 병이 치유된다면 그때 당신은 법(Dhamma)을 높게 평가하지 못할 것이다. 법의 목적은 신체의 치유가 아니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그는 나를 안심시켰다. “이제 저는 이해합니다. 오직 마음의 정화를 위해 오겠습니다. 병의 치료와 관계없이 나는 이곳에서 본 평화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분에게 나는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10일 수련코스에 참여하는 것을 미루었다. 독실하고 보수적인 힌두교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그대 자신의 본성, 그대 자신의 종교 안에서 죽는 것이 좋다. 결코 다른 종교로 가지 말라.”라는 시를 암송하면서 자랐다. 나는 자신에게 말했다. ‘불교는 다른 종교가 아닌가? 그리고 불교는 무신론자들이다. 그들은 신과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마치 신이나 영혼을 믿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양) ‘만약 내가 무신론자가 된다면 그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오, 아니다. 나는 나의 종교 안에서 죽는 것이 좋다. 불교의 수행센터에는 가지 않으리라.’
몇 달 동안 이렇게 주저했다. 그러나 마침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기 위해서 명상수행법을 배워 보기로 결정했다. 나는 10일 수련코스에 참여하여 그 코스를 끝마쳤다. 나는 대단히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성, 나 자신의 길, 다른 사람들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직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 자신을 관찰할 능력을 가진다. 동물은 자신을 관찰할 능력이 없다. 자기 내면의 실재를 관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만약 우리가 이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면 그때 우리는 낮은 수준의 삶을 살고 우리의 삶을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항상 스스로를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모든 필수적인 의무를 실천했으며 도덕 규칙에 따라 많은 자선을 했다. 만약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면 왜 그렇게 많은 종교단체의 장 노릇을 했을까? 확실히 나는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내가 많은 자선과 봉사를 했다고 하더라도, 또 비록 내가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어두운 상자를 관찰하기 시작했을 때 끊임없이 고통을 만들어 내는 교활함 오만 등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했다. 지금은 불건전한 삿된 생각들이 점차 소멸됨에 따라 평화를 누리기 시작했다. 나는 법(Dhamma)의 보물인 이 경이로운 수행을 배운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깨달았다.
14년 동안 나는 선생님의 친절한 지도 아래 버마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이 큰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가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 하면서 동시에 아침과 저녁으로 계속 명상수행을 하고 주말이면 선생님의 명상센터에 찾아갔다. 그리고 해마다 10일 수련코스에 참가했다.
1969년 초 나는 인도를 여행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몇 년 전에 인도를 가셨다. 어머니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고칠 수 있는 신경병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어머니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인도에는 없었다. 위빠사나 수행의 발생지인 인도에는 이 수행법이 사라진 지가 오래 되었고 이름조차도 잊어버렸다. 나는 내가 인도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한 버마 정부에 감사한다. 당시엔 일반 시민의 외국 여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1969년 6월에 첫 위빠사나 코스를 봄베이에서 열었다. 부모님과 12명이 참여했다. 부모님에게 법(Dhamma)을 가르침으로써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어 기뻤다.
인도에서 나의 목적이 달성되면 버마로 되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이 수행에 참여한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명상코스가 운영되기를 열망해 왔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 남편 자식들 그리고 친구들을 위한 명상코스의 신설을 원했다. 그래서 그때 두 번째 10일 수행코스를 열었고, 다시 세 번째 네 번째의 과정으로 법(Dhamma)의 가르침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1971년 보디가야에서 명상수행코스에 참여하고 있을 때 나는 나의 스승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랑군(Rangoon)으로부터 받았다. 물론 이 소식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너무나 갑작스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내게 준 법(Dhamma)의 도움으로 나의 마음은 균형을 유지했다.
이젠 나는 이 거룩한 스승, 우바킨(U Ba Khin)에게 감사의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했다. 나의 부모님은 인간의 몸을 주었지만, 여전히 무지의 조개껍질 속에 갇혀 있었다. 내가 조개껍질을 깨뜨리고 내면의 실재를 관찰하여 진리를 발견한 것은 오직 이 경이로운 분의 도움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4년 동안 법(Dhamma) 안에서 나를 튼튼하게 자라도록 지도해 주었다. 어떻게 그분에게 보답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법의 생을 살기 위해 그가 가르친 바를 실천하는 길이다. 가능한 큰 사랑과 자비를 발전시키며 또 마음의 순결을 향한 길을 걸으면서 남은 생을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그분이 내게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가 입멸한 후 2천 5백년 뒤에는 법(Dhamma)이 이곳에서부터 세계로 퍼져 다시 인도로 되돌아간다는 버마의 전통적 믿음을 자주 언급하곤 하셨다. 버마에서 위빠사나를 가르치면서 이 예언이 실현되기를 돕는 것이 그의 소망이었다. “2천 5백년이 지났다.” 그는 말씀하시곤 했다. “위빠사나의 괘종소리는 울리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그분은 말년에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외국여행을 할 수가 없었다. 1969년 내가 인도입국을 허가 받았을 때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고엔카, 나는 못 갈 것이지만 너는 그곳에 간다.”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 나는 이 예언이 단순히 종파적 신념이라고 생각했다. 왜 보다 빨리 일어나지 않고 2천5백년 이후에 일어나야 하는가? 그러나 내가 인도에 왔을 때 내가 비록 백 명의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천여 명의 사람들이 모든 문화 사회적 집단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인도뿐만 아니라 수천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왔다.
원인이 없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연히 명상코스에 참여하지 않는다. 몇 사람은 그들이 과거에 건전한 행위를 한 것의 결과로 현재에 법의 종자를 받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미 법의 종자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 온다. 당신의 법의 종자를 얻기 위해서건 혹은 발전시키기 위해서건 당신 자신의 선, 자신의 은총, 자신의 자유를 법안에서 키우라. 그러면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돕는 방법을 발견할 것이다. 법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져 있다.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이 평화의 길을 들어서든지 발견하기를!
그들이 모든 속박 고통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그들이 모든 삿된 생각과 조건지어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우주의 모든 생명이 행복해지기를 발원한다.
모든 생명이 평화를 누리기를 발원한다.
모든 생명이 자유롭기를 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