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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無心님의 불교이야기

노자(老子)의 산책

노자(老子)의 산책


노자께서는 우주만물에 대해 깊이 사유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우주자연의 근본 질서 또는 이법理法(이치와 법칙)을 도道라고 이름 지으셨다. 노자께서는 우주자연의 근본 이치(원리)와 법칙(질서)인 도道가 개체적으로 구현된 현상을 덕德이라고 이름 짓고, 도道와 덕德에 대한 가르침을 남기셨다.

일생 동안 말로 (자세히) 가르치고 글로 쓰는 걸 싫어하신 노자셨지만, 히말라야(?)를 향해서 떠나는 생의 마지막 여정에서 만난 국경수비대 제자의 간곡한 권유로 도덕경으로 알려진 5천 여자 정도로 된 도道경과 덕德경을 저술하여 제자에게 남기셨다.

도道경은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라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한다. 이 구절은 '말(언어)을 사용해서 도道라고 표현 가능可한 도道는 항상常한(진정한, 보편적인/예외가 없는, 완전한) 도道가 아니다非'라는 뜻이다.

인간의 말(언어)이란 인류가 지구 상에 존재한 이래 인간의 물질(육체)적, 정신적 경험을 기호화(개념화)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언어는 실재(여기서는 道)가 아니라 실재의 근사치일 뿐이다. 때문에 도道 또는 득도의 경지를 말(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도道의 경지(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길을 안내하는 것(언어로 가르치는 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2500년 전에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그리하셨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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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께서는 수행과 가르침의 일환으로 제자와 함께 산책을 하시곤 했다. 그러나 노자께서는 산책에서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다.

노자(老子, BC 570~479)께서 제자와 함께하신 ‘무언의 산책’은 붓다(BC 624~544)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무언의 탁발’과 같은 무언의 가르침이자 수행이다.

어느 날 노자께서 한 제자를 데리고 저녁산책을 하셨다. 노자와 제자가 조용히 언덕에 올라섰을 때 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그 때 제자가 그 석양을 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석양인가!“

산책에서 돌아온 후 노자께서는 제자에게 말하셨다.

"내일부터는 따라오지 말거라.“

제자가 ‘아! 얼마나 아름다운 석양인가!’라고 말했을 때, 제자는 더 이상 석양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제자는 자신의 말, 생각(내면의 말, 내면의 해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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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른(正) 알아차림(念) 수행의 일환으로 대상을 볼 때 말함을 (내면의 말인 생각도) 버려야 하는 이유다.

왜냐하면 ‘말, 생각'을 보는 것은 실제 대상(석양)을 진정으로 바르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 석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가 아닌 ‘말, 개념, 헛된 설명, 주관적인 생각’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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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께서 무언의 산책에서 제자에게 가르치시고 싶었던 것은 붓다께서 바히야 따루찌리야(Bahiya Daruciriya)에게 가르치셨던 아래와 같은 삼마[Samma, 正; 바른] 사띠[Sati, 念; 마음챙겨 알아차림]의 가르침이다.

볼 때, 단지 ‘보여 지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seen will be merely what is seen;

들을 때, 단지 ‘들려지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heard will be merely what is heard;

감각(후각, 미각, 촉각)을 느낄 때, 단지 ‘느껴지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sensed will be merely what is sensed;

인식(생각, 기억, 감정 등의 정신감각을 인식)할 때, 단지 ‘인식되는 것’만 있게 하여라.
in the cognized will be merely what is cognized.

이와 같은 방법으로 네 자신을 수련(training oneself, 훈련, 계발 수행; 식카sikkhā, 바와나bhavana)해야 하느니라. 바히야여!
In this way you should train yourself, Bahiya!

- <바히야경(Bāhiya Sutta), Udana 1.10>

“'보고, 듣고, 냄새, 맛, 촉감' 등(의 물질감각, 오감각)을 느끼고, ‘생각, 기억, 감정' 등(의 정신감각)을 인식하는 ‘여섯 감각’에 대한 인식작용을 할 때, 눈에 보여지는 것(눈의 감각), 귀에 들려지는 것(귀의 감각), 코의 감각, 혀의 감각, 몸의 감각, 의근[意根, mana-indriya; 뇌를 기반으로 한 정신감각 기관]의 감각 등 ’여섯 감각‘만 있게 하여라."

아(我)가 개입된 주관적인 판단 분별없이 객관적으로 ’여섯 감각 받음(受) 무더기(蘊), 수온[受蘊; 웨다나 칸다]‘만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사띠[sati, 念; 마음챙겨 알아차림]하도록 스스로를 수련(훈련, 수행)하라는 것이 붓다께서 바히야에게 가르치신 사띠-빳타나[sati-patthana, 念處; 사띠 확립] 수행의 핵심 요체다.

붓다께서는 매일 제자들과 함께 탁발을 하셨다. 붓다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무언(無言, 또는 묵언黙言)의 탁발은 수행의 일환이기도 했다. 붓다께서는 탁발을 나가기 전에 묵언의 탁발 수행에 대해 미리 제자들에게 자세히 가르치셨다. 붓다께서는 탁발 중에는 설법을 하지 않으셨는데, 천리길을 달려와 탁발하러 가시는 붓다께 가르침을 청하는 바히야에게만은 유일하게 설법을 하셨다.

붓다와 제자들이 탁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바히야는 미친 소에 받혀서 죽어 있었다. 붓다께서는 제자들에게 "바히야는 아라한과를 성취한 후에 죽었으니 아라한의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주라"고 하셨다. 

이미 네 단계 선정의 자유자재와 네 단계 무색계 삼매를 모두 이룬 수행 상태였다고 추정되는 바히야 따루찌리야는 탁발하러 가시는 붓다께 위와 같은 가르침[바히야경(Bāhiya Sutta), Udana 1.10]을 듣고 난 후 그 자리에 앉아서 수행하여 불과 몇 시간 만에 정각을 증득한 아라한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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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장(노자-장자) 사상에서 ‘道의 경지(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至) 사람(人), 또는 道를 완전히 깨달은 사람’을 지인至人 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장자(莊子)》의 첫 번째 편인 '소요유逍遙遊'에서 장자께서는 말하신다.

지인무기至人無己, 신인무공神人無功, 성인무명聖人無名

지인(至人, 道를 완전히 깨달은 사람)은 자기(己, 我)가 없고(無), 무아(無我)
신인(神人)은 아(我)가 행하여(爲) 이룬 것(功)이 없고(無), 무위(無爲)
성인(聖人)은 이름(名, naming, 이름 지음, 분별)이 없다(無), 무분별(無分別)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자유롭게 노닐다)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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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장자의 도(道)와 붓다의 담마(다르마, 法)는 그 내용이 매우 일맥상통하다. 비교하자면 도(道)는 진리(眞理, 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에 대한 철학적·문학적 표현이고 담마(法)는 과학적(경험적·합리적) 표현이다.

노자-장자의 가르침에는 도(道)의 경지(완전한 깨달음의 경지, 완전한 행복의 경지)에 도달하는 구체적인 방법(실천법, 수행법)과 '나(己, 我, ego)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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