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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선방일기_지허스님

3. 10월 2일 산사의 겨울채비

아침공양이 끝나자 방부를 드렸다장삼을 입고 어간(대웅전 한가운데)을 향해 큰절을 세 번 한다본사와 사승(師僧)그리고 하안거 처소를 밝히고 법명을 알리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선착스님들은 환영도 거부도 하지 않는다그저 담담히 부장불영(不將不迎)할 뿐이다.

 

법계의 순에 따라 좌석의 차서(次序)가 정해진다.

비구계를 받은 나는 비구석 중 연령순에 따라 자리가 주어졌다.

내가 좌정하자 입승스님이 공사를 발의했다.

공사란 절에서 행해지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일종의 회의를 말함인데 여기서 의결되는 사항은 여하한 상황이나 여건 하에서도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작게는 울력으로부터 크게는 산문 출송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공사를 통하여 채택되고 결정된다.

 

본래 절 생활이란 주객이 없고 자타가 인정되지 않고 다만 우리들이라는 공동생활만이 강요되는 곳이다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질서와 법도의 준수가 요구되며 개인행동이 용납되지 않는다생활의 외양은 극히 공산(共産)적이지만 내용은 극히 자주적이라고나 할까.

 

공사의 내용은 김장울력이다오늘 아침공양 대중은 스물세 명이다.

원주스님과 젊은 스님 두 분이 양념 구입차 강릉으로 떠나고 나머지 스님들은 무우 배추를 뽑은 뒤 각자의 소질대로 일에 열중했다무우 구덩이를 파고 배추를 묻기 위해 골을 파는 일은 주로 소장스님들이 하고시래기를 가리고 엮는 일은 노장스님들이배추를 절이고 무우를 씻는 일은 장년 스님들이 담당했다.

 

김장이 끝난 후 조실스님은 버린 시래기 속에서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다.

조실스님은 최소한도로 먹을 수 있는 시래기를 다시 골라 엮고 있었다.

나도 조실스님을 도와 시래기를 뒤졌다조실스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옛날 어느 도인이 주석하고 계시는 토굴을 찾아 두 납자가 발길을 재촉했다오.

그런데 그 토굴에서 10리쯤 떨어진 개울을 건너려고 할 때

이런 시래기잎이 하나 떠내려 오더래요.

그러자 두 납자는 발길을 멈추고

도인은 무슨 도인시래기도 간수 못하는 주제인데 도는 어떻게 간수하겠어.

공연히 미투리만 닳게 했구려” 하면서 발길을 되돌려 걷자

스님들스님들저 시래기 좀 붙잡아 주고 가오.

늙은이가 시래기를 놓쳐 십리를 좇아오는 길이라오.”

두 납자가 돌아보니 노장스님이 개울을 따라 시래기를 좇아 내려오고 있더래요.

시래기를 붙잡은 두 납자의 토굴을 향한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겠지요.”

 

조실스님이 계속해서 시래기를 엮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식물(食物)은 아껴야만 하겠지요.

식물로 되기까지 인간이 주어야 했던 시간과 노동을 무시해 버릴 순 없잖아요.

하물며 남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식물이야 더욱 아껴야 하겠지요.”

 

나는 침묵하면서 시래기를 뒤적일 뿐이었다.

진리 앞에서 군말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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