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알아차리도록 노력하십시오.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놓아두십시오.
그러면 그대의 마음은 어떤 환경에서도 고요해질 것입니다.
숲 속의 맑은 연못처럼...
온갖 놀랍고 희귀한 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그 연못으로 올 것이며,
그대는 모든 존재의 본성을 또렷이 볼 것입니다.
기이하고 경이로운 것들이 수없이 오고 가는 것을 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고요할 것입니다. 이것의 부처의 행복입니다. -아잔 차
서문
나의 도반인 아잔 차 스님의 가르침을 소개하는 책에 서문을 쓰게 되어 참으로 기쁘다.
우리의 세계는 지금 무척 흥미로운 시대에 와 있다. 서양 사람들은 동양의 것들인 요가와 권법, 명상을 배우고 있고, 동양 사람들은 서양의 것들인 과학, 비즈니스, 서양 예술과 철학을 배우고 있다. 지금은 음과 양이 매우 빨리 바뀌고 있는 시기이다. 따라서 만일 그대가 어떤 관념-무엇은 동양적이고, 무엇은 서양적이며, 어떤 것은 어떻고, 어떤 것은 어떠해야 한다는 생각들-에든 집착하고 있거나 어떤 생각이나 견해를 붙들고 있다면, 그대에게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대는 이 세계와 연결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관념과 견해를 내려놓는다면, 진실은 바로 그대의 눈앞에 있다. 하늘은 푸르고, 나무는 초록빛이며, 설탕은 달고, 소금은 짜다. 개는 ‘멍멍’짓고 있다. 수탉은 “꼬끼오”하고 울고 있다. 그때에 그대는 배고프면 먹고, 피로하면 잔다. 배고픈 사람이 오면 먹을 것을 준다. 목마른 사람이 오면 마실 것을 준다. 그게 전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그것이 불교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잔 차 스님은 말한다. “사람들은 물소와 같다. 네 다리가 단단히 묶이지 않으면 어떤 약도 받아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 이와 같이, 우리 대부분은 고통에 완전히 묶인 뒤에야 망상들을 놓아버리고 포기할 것이다. 몸부림칠 기력이 남아 있는 한 항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듣는 것만으로 법을 깨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 대부분은 삶을 통해서 배워야 한다. 삶은 우리를 끝까지 가르칠 것이다.”
훌륭한 가르침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언젠가 스님은 위빠사나 명상 수련원의 잔디밭에서 느린 걸음으로 걷기 명상을 하고 있는 수련생들을 보면서, 명상 수련원이 속세에 물든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병원 같다고 말했다. 또 매일 오후 산책을 하다가 수련생들 곁을 지나칠 때면 큰 소리로 격려했다. “곧 나아질 겁니다. 곧 나아지길 바랍니다.”그것도 아주 훌륭하다.
스님은 말한다. “자, 들어보세요. 여기에는 아무도 없어요. 이것뿐이에요. 주인이 없어요. 늙거나 젊다고, 좋거나 나쁘다고, 허약하거나 건강하다고 할 그 누가 없어요. ... 태어난 사람도 없고, 죽을 사람도 없어요. ... 우리가 짐을 지고 있으면 짐이 무겁지요. 짐을 질 사람이 없으면 세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이것이 참된 도(道)이다.
스님은 선(禪) 일화를 얘기한다. “선불교의 공안 가운데 ‘바람에 날리는 깃발’이 있다. 두 사람이 깃발을 바라보고 있는데,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한다. 두 사람의 다툼은 끝없이 이어질 수 있고 몽둥이까지 들고 싸울 수 있겠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다. 움직이는 것은 마음이다.”맞는 말이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점은 마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는 것이다. 그대에게 마음이 있으면 문제도 있다. 그러니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누가 그것을 만들었는가?
위대한 스승 아잔 차 스님은 이미 그대에게 위대한 도(道), 진리와 바른 삶을 전해 주었다. 부디 그대들이 이 책을 통해 참된 길을 찾고 깨달음을 얻어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기를....
숭산선사
프로비던스 선원
머리말
당신이 부처님의 살아 있는 가르침을 찾아서 1980년대의 어느 날 아시아에 간다고 가정해 보자. 또 혹시 아직도 탁발에 의지해 숲 속에 살며 단순한 삶과 수행을 실천하는 비구와 비구니들이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
아마 당신은 부처님에 관한 기록을 읽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승려들과 함께 인도의 숲 속을 유랑하며 살았고, 좋은 가문의 남녀들을 초대하여 참된 지혜와 한없는 자비를 일깨우도록, 탁발승으로 소박하게 살면서 내면의 고요함과 깨달음에 헌신하도록 인도했다. 2,500년이 지난 지금, 이런 삶의 방식이 아직도 살아 있을까? 또 그 가르침이 현재 현대인의 마음에도 여전히 알맞게 적용될 수 있을까?
당신은 방콕이나 콜롬보, 랭군 근처의 현대식 공항에 내릴 것이다. 택시를 타고 있으면 차창 밖으로 아시아의 시가지 모습, 달리는 차들,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열대 과일을 파는 거리의 노점상들이 스쳐 지나갈 것이다. 몇 구역마다 시내 불교 사원들의 황금색 탑이나 뾰족한 지붕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사원을 찾으러 온 게 아니다.이 사원들에는 고대 경전을 공부하는 승려들이 머물며 염송과 설법을 하고 사람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숲 속에서 생활하는 단순한 삶을 찾으려면, 또 부처님 당시처럼 가사와 바리때만으로 소박하게 살면서 수행에 전념하는 삶을 찾으려면 도시와 시내의 사원들로부터 멀리 떠나야 한다. 만일 그곳이 수많은 사원과 승려들의 나라 태국이라면, 인파로 붐비는 후알람풍 역에서 아침 일찍 멀리 남쪽이나 북동쪽으로 떠나는 기차를 타야 할 것이다.
한 시간 남짓 기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철로 주변에 늘어선 집과 상점들, 변두리 빈민가, 제멋대로 뻗어 나간 도시 근교의 어수선한 모습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동남아시아의 최대 쌀 재배지역인 태국 중부의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끝없이 펼쳐진 논들은 논두렁을 경계로 바둑판무늬를 이루며 늘어서 있고, 운하와 수로들에 의해 규칙적으로 나뉘어 있다. 벼들이 바다를 이룬 들판 위에 군데군데 섬처럼 보이는 곳은 야자수와 바나나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곳이다. 기차가 이런 야자수 섬 가까이 지나갈 때면, 햇빛에 반짝이는 오렌지색 지붕을 인 사원과 나무 기둥 위에 세운 목조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남아시아풍의 마을이 보일 것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큰 마을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사원이 있다. 사원은 기도하고 의식을 행하는 장소와 마을 회관으로 이용되는데, 예전에는 마을의 학교로도 쓰였다. 마을에 사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스무 살이 되면 이곳에서 계를 받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분히 배워서 그들이 속한 사회의 성숙한 구성원이 되도록 석 달에서 일 년 사이 승려로 생활한다. 이런 사원은 대개 나이 지긋하고 소박하며 인정 많은 몇몇 스님이 운영하는데, 그들은 경전도 공부하고 마을의 성직자로 봉사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불교의 의식과 기본 가르침을 잘 알고 있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생활의 일부이지만 당신이 찾으러 온 사원은 아니다.
기차는 이제 옛 수도인 아유타야를 향해 북쪽으로 달리고 있다. 그곳의 화려한 궁전과 웅장한 사원들은 몇 세기 전 이웃 왕국들과 간헐적으로 벌인 전쟁의 와중에 약탈당하고 부서져 폐허로 변해 버렸다. 수백 년의 세월을 말없이 견뎌 온 거대한 석불들은 이 장엄한 폐허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제 기차는 동쪽으로 선회하여 코리트 고원을 가로지르며, 멀리 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지역을 향해 긴 여정을 떠난다. 몇 시간을 달려도 보이는 것은 대지뿐이다. 여전히 벼를 심은 논과 마을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갈수록 드물어지고 초라해 보인다. 중부 지역의 비옥한 농경 지대와 운하들, 망고 나무들, 울창한 열대 삼림과 달리 이곳의 풍경은 한결 단조롭다. 집들은 작아진다. 여기에 있는 사원들도 지붕이 반짝이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 역시 더 작고 소박하다. 이곳에는 오랜 옛날처럼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아낙네들은 현관에 앉아서 베틀로 담요를 짜고 있고, 농부들은 들판에서 일하며, 아이들은 철로 옆 도랑에서 물소를 돌보고 있다.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이런 시골에는 숲 속에 사는 승려들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 주변에는 숲과 밀림지대, 나무가 울창한 나지막한 산들이 널리 펼쳐져 있고, 국경 인접 지역에는 아직 사람이 살지 않는 곳들이 있다.이런 지역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지키고 실현하는 데 헌신하는 숲 속의 승려와 수도원들을 오랜 세월 뒷바라지했다.숲 속의 승려들은 대개 마을의 성직자로 봉사하지 않으며,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고, 고대 경전들의 언어를 보존하거나 연구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부처님이 가르친 내면의 평화와 통찰을 실현하는 데 전념하고자 한다.
이제 기차에서 내려 버스나 택시를 타고서 먼지가 폴폴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린 뒤, 태국 북동부 지역에 있는 수십 개의 수도원 가운데 하나에 도착했다면 당신은 무엇을 발견할까? 그곳의 가르침과 수행법이 현대인의 삶에 의미 있게 적용될 수 있을까? 통찰과 알아차림 수행이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살던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당신은 많은 서양인들이 앞서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965년 이래 수백 명의 유럽인과 미국인들이 당신처럼 뭔가를 배우기 위해 숲 속으로 찾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짧은 기간 공부한 뒤 여기에서 배운 것을 일상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들은 일 년, 이 년 혹은 그 이상 머물며 승려로서 더욱 철저히 수련한 뒤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숲 속의 삶이 풍요롭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며 지금까지 수도원에 머물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들의 가슴과 마음에 직접 전해졌으며, 지혜롭고 깨어 있는 삶의 길을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그 길이 꽤 쉽고 매우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막상 부처님의 길을 실현하려고 해보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자신의 삶에서 담마(Dhamma), 즉 진리를 깨닫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
왓 바퐁 같은 숲 속의 수도원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수행의 기풍이 확연히 느껴진다. 바스락거리는 나무들은 고요히 서 있고, 허드렛일을 하거나 천천히 걸으며 명상을 하는 승려들은 조용조용 움직인다. 수도원 건물들은 백 에이커쯤 되는 경내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 비구와 비구니를 위한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작고 수수한 오두막들이 숲 속의 공터에 하나씩 자리 잡고 있고, 나무들 사이로 난 호젓한 오솔길이 오두막들을 이어 준다. 수도원 중앙에는 대강당과 공양실, 수계식을 하는 법당이 있다. 숲 속의 건물들은 한결 같이 소박하며 출가의 분위기를 북돋운다. 당신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느낀다.
이런 수도원에 사는 승려들은 두타행이라고 하는, 단순하면서도 엄격한 수행의 길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다. 금욕적인 생활 방식을 자원하여 따르는 숲 속 승려들의 전통은 부처님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처님은 승려의 의복과 음식, 거처에 제한을 두는 열세 가지 특별 계율을 정하도록 허락했다. 두타행의 핵심은 최소한의 물건으로 생활하고 수행에 전념하며 하루 한 번씩 탁발을 하는 것이다. 이런 생활 방식은 불교의 다른 전통들과 함께 미얀마, 태국, 라오스의 밀림지대에 널리 퍼져 있는데, 이 지역은 동굴이 많고 대부분 개간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 수행에만 전념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이런 고행승들은 예로부터 유랑자들이었다. 이들은 혼자 또는 여럿이 함께 생활하며, 천으로 만든 우산 천막을 나무에 매달아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한적한 시골 지역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왓 바퐁은 가장 규모가 큰 숲 속 수도원 가운데 하나이며, 이 책은 이곳에 머물며 수행자들을 지도했던 아잔 차 큰 스님의 가르침을 엮은 것이다.
아잔 차 스님과 그의 스승들인 아잔 통 라트, 아잔 문 스님은 이런 숲 속에서 걷고 명상하며 오랫동안 수행에 정진했다. 이들과 같은 숲 속의 스승들을 통하여 직접적이며 강력한 법의 가르침이 면면히 전해 내려왔다. 이런 가르침은 불교 의식이나 지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면서 눈과 가슴을 맑게 정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숲 속 수행의 전통에서 뛰어난 스승들이 출현하자 일반인과 승려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숲 속으로 찾아 왔다. 스승들은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유랑을 멈추고 특정한 숲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두타행을 하는 수도원들이 성장했다. -23쪽
금세기에 인구가 부쩍 늘어나면서 승려들이 유랑하며 머물 수 있는 숲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래서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고자 하는 승려들은 대부분 위대한 스승이 머물렀거나 현재 머무르고 있는 숲 속의 수도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왓 바퐁도 아잔 차 스님이 오랫동안 떠돌며 수행한 뒤 고향에 돌아와 인근 울창한 숲에 머무르면서 시작되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그 숲은 코브라와 호랑이, 유령들이 출몰하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었는데, 아잔 차 스님에 따르면, 그래서 오히려 숲 속에서 수행하는 승려가 머물기에 딱 알맞은 장소였다. 이곳에 스님을 중심으로 큰 수도원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숲 속에 몇 채의 초막으로 시작한 왓 바퐁은 이제 태국에서 가장 크고 잘 운영되는 수도원 가운데 하나로 발전했다. 아잔 차 스님이 뛰어난 스승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방문객들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태국 전역에 있는 불자들의 요청에 따라 곳곳에 오십여 곳의 분원이 세워졌으며, 각각의 분원들은 스님에게 배운 제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그중 왓 바퐁 근처의 분원인 왓 바나나차는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을 위해 설립된 것이다. 서양에도 분원과 연합 수련원이 여러 곳 설립되었는데, 영국의 치트허스트에 있는 수도원이 대표적이며, 스님의 서양인 상수 제자인 아잔 수메도 원장이 책임을 맡고 있다.
아잔 차 스님의 가르침에는 ‘불교 명상의 핵심’이라고 불리는 수행법이 들어 있다. 그것은 가슴을 고요히 하고 마음을 열어 참된 통찰을 하게 하는 직접적이고 단순한 수행법이다. 알아차림(mindfulness) 또는 통찰 명상이라고 하는 이 불교 수행법은 서양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숲 속 수도원이나 수련원에서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승려와 일반인에게 이 수행법을 배운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 가슴을 길들이는 보편적이고 직접적인 길을 찾게 될 것이다. 또한 탐욕과 두려움과 슬픔을 다루는 법, 인내와 지혜와 순수한 연민의 길을 배울 수 있다. 이 책은 이 명상법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을 안내하고 돕기 위한 것이다.
아잔 차 스님은 젊어서 수행을 시작했는데, 숲 속에 은거하는 훌륭한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고 고된 수행을 하면서 차츰 성장해 갔다. 언젠가 스님은 웃으며 회상하기를,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과 소꿉장난을 할 때마다 그는 늘 승려의 역할을 맡았고, 바리때로 가장한 그릇을 들고 아이들에게 가서 사탕이나 과자를 달라고 했다 한다.하지만 실제로 승려가 되어 수행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면서, 제자들에게 인내심과 끈기가 중요한 덕목이라고 가르친다. 젊은 승려이던 시절, 스님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몇 주일 동안 병상을 지키며 쇠잔해 가는 모습과 죽음을 지켜보았는데, 이 경험은 스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스님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삶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기 어렵다.”고 말한다.
아잔 차 스님은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뒤, 세상에 살면서 겪는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부처님이 가르친 자유와 평화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찾고야 말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진리를 위해 주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버렸다. 그는 육체의 질병과 통증, 온갖 의심 등 수많은 난관에 부닥쳤고, 수없이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그는 숲 속을 떠나지 않았으며, 앉아 있었고 앉아서 지켜보았다. 때로는 무력감에 사로잡혀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 날들도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용기를 내어 씩씩하게 정진해 나갔다. 어느덧 그의 내면에서 참된 지혜와 유쾌한 정신, 사람들을 돕는 불가사의한 힘이 자라기 시작했다.
원래 타이어와 라오어로 말해진 스님의 가르침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 책에 수록된 가르침들에는 유쾌한 수행의 정신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본래 이 가르침들은 대부분 숲 속의 수도원을 머물며 스님 곁에서 수행하는 승려들에게 설해진 것들이다. 그래서 여성보다는 남성을, 일반인보다는 승려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표현된 법의 성품은 직접적이고 보편적이며 우리 모두에게 적합한 것이다.
아잔 차 스님은 탐욕, 두려움, 미움, 망상이라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데 역점을 두며, 이런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고 이것들이 우리의 삶과 세상에 어떠한 고통을 일으키는지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는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인 사성제(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고통과 고통의 원인, 고통을 끝내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집착이 어떻게 고통을 일으키는지 보라. 아잔 차 스님은 거듭 강조한다. 그대의 경험을 통해 공부하라. 보이는 것,소리, 지각, 느낌, 생각의 끊임없이 변하는 성질을 보라. 스님은 삶이 일시적이고 불확실하며 자아가 없음을 이해하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특성을 모두 알고 받아들여야만 평화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숲 속의 수행 전통은 이런 진실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 혹은 저항을, 우리의 두려움과 화, 욕망을 직접 다룬다. 아잔 차 스님은 우리에게 번뇌를 똑바로 보면서 놓아버림, 끈질긴 노력, 알아차림이라는 도구로써 극복하라고 말한다. 또일시적인 기분이나 걱정에 휩쓸리지 않는 법을 배우고, 마음과 세상의 본성을 직접 또렷이 볼 수 있도록 훈련하라고 강조한다.
아잔 차 스님의 맑고 유쾌한 성품, 직접적인 수행 방식은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의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진리에 대한 탐구심과 이해력, 유머 감각, 경이로움을 느끼는 마음, 내면의 깊은 평화가 일깨워진다. 이 책에 실린 가르침과 숲 속 생활에 관한 이야기들이 그런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담아내고 있다면, 또 독자 여러분이 분발하여 더 열심히 수행하도록 도움을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잔 차 스님의 가르침을 주의 깊게 듣고 실천에 옮겨 보라. 왜냐하면 스님이 가르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수행이며, 그의 관심사는 오직 우리의 자유와 행복이기 때문이다. 왓 바퐁을 찾아오는 방문객의 수효가 급증하던 초기에 수도원으로 들어오는 길을 따라 일련의 표지판들이 붙어 있었다. 첫 번째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곳을 찾는 여러분, 경내에서는 조용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명상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표지판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진리를 깨닫는 것만이 이 삶에서 가치 있는 일입니다. 지금이 바로 시작할 때가 아닐까요?”
이러한 정신으로 아잔 차 스님은 우리에게 숨김없이 얘기하며, 가슴을 고요하게 하고 삶의 진실을 탐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지금이 바로 시작할 때가 아닌가? -28쪽
오늘 하루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평안하고 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