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넘어서 스스로 보라
수행을 하는 동안, 나는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공부를 많이 하지도 않았다. 나는 오로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랐으며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공부했을 뿐이다. 수행할 때는 그대 자신을 잘 지켜보라. 그러면 지혜와 통찰력이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 만일 그대가 명상을 하면서 이런저런 식으로 명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당장 그만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수행을 할 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하고, 수행이 어떤 식으로 되어야 한다는 관념조차도 버려야 한다. 이제까지 배운 지식이나 견해들은 옆으로 치워 놓아라.
그대는 모든 말과 상징, 모든 수행 계획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면 바로 여기에서 드러나는 진리를 스스로 볼 수 있다. 내면을 향하지 않는다면 결코 실상을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승려가 된 뒤 첫 두세 해는 경전을 공부하면서 지냈고, 그 뒤에는 여러 학자와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들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런 공부가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그분들의 설법을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스승들은 내면에 있는 진리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수행을 하는 가운데 그 진리가 내 마음속에도 있다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이 스승들이 정말로 진리를 알고 있었고, 그분들이 걸어간 길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그분들이 얘기한 것을 모두 만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에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분들 말씀이 맞다. 달리 무엇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오직 이것뿐.”
꾸준히 수행을 하자 깨달음은 그렇게 펼쳐졌다.
만일 그대가 법을 알고자 한다면, 그저 포기하고 그저 놓아 버려야 한다. 수행에 대해 생각만 하는 것은 그림자를 붙잡으려 애쓰면서 실체를 놓치는 것과 같다. 공부를 많이 할 필요는 없다. 기본적인 것들을 따르며 그에 맞게 수행을 하면 스스로 진리를 보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말로 듣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자기와 대화를 하고,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라. 마음이 말하고 생각하기를 그친다면, 그대는 바른 판단을 위한 진정한 잣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력이 깊이 꿰뚫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수행하라. 나머지는 자연히 뒤따를 것이다. --41쪽
불교심리학
어느 날, 불교 철학을 가르치는 유명한 여강사가 아잔 차 스님을 찾아왔다. 이 강사는 방콕에서 아비담마와 복잡한 불교 심리학을 정기적으로 강의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님과 얘기하면서, 불교 심리학을 이해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또 자신에게 배우는 학생들이 얼마나 혜택을 입고 있는지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런 다음, 그런 이해가 중요하다는 데에 스님도 동의하는지 물었다.
“예, 아주 중요하지요.” 스님은 동의했다. 그녀는 기뻐하면서, 스님도 제자들에게 아비담마를 배우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럼요, 물론이지요.”
그러자 그녀는 제자들에게 어디서부터 시작하도록 권하느냐고 또 어떤 교재와 과목이 가장 좋으냐고 물었다.
“오직 여기지요.”스님은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오직 여기.”
공부가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것과 수행에 적용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얘기해 보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목적은 하나뿐이다.
그것은 삶의 불만족스러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고, 우리 자신과 모든 존재를 위해 행복과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고통은 원인이 있어 생겨나며, 머물 곳이 있어 존재한다. 이 과정을 이해해보자. 마음이 고요할 때는 자연스러운 상태에 있다. 마음이 움직이면 생각이 지어진다. 행복과 고통은 이런 마음의 움직임, 생각의 틀 짓기의 한 부분이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가고 싶은 욕망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어나는 생각을 좇으며 그런 생각들에 지배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움직임을 잘 지켜보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잘 지켜보면 마음의 기본적인 특성을 알 수 있다. 마음은 끊임없이 변하며, 만족하지 못하고 텅 비어 있다. 그대들은 이러한 마음의 현상을 잘 알아차리고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한다. 그러면 연기의 과정을 알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무지(無知)가 원인이 되어 모든 현상계와 의지작용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다. 의지는 의식을 일으키고, 의식은 다시 마음과 몸을 일으킨다.이것이 연기의 과정이다.
불교를 처음 공부할 때는 이런 전통적인 가르침이 이치에 맞는다고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일어날 때, 머리로만 이해하는 사람은 그 진행과정을 제때 알아차릴 수 없다. 사슬의 고리들은 마치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지듯 순식간에 떨어지므로 그런 사람들은 어느 가치를 지나쳤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예컨대, 즐거움을 주는 감각의 접촉이 일어나면 곧바로 그 느낌에 휩쓸려 버리며,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과정의 윤곽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교재의 내용은 물론 정확하지만, 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체험을 대신할 수는 없다. 책은 우리에게 ‘무지가 일어날 때는 이런 체험을 하고, 의지 작용은 이렇게 느껴지고, 이것은 어떤 종류의 의식이며, 몸과 마음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이렇게 느껴진다.’고 알려주지 않는다.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쳐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정확히 몇 미터 몇 센티를 떨어지는지 일일이 계산하지는 않는다. 그저 땅바닥에 부딪히고 아픔을 경험할 뿐이다. 어떤 책도 그 경험을 묘사할 수는 없다.
정규 과정대로 불법을 공부하면 체계적으로 자세히 배울 수 있지만, 현실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우리의 가장 깊은 지혜 곧 ‘아는 자’를 통해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우리 본인의 지혜 곧 아는 자가 마음이 진정 무엇인지를 경험하면, 마음은 우리 자신이 아님을 환히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 내가 아닌 것, 내 것이 아닌 것은 모두 놓아 버려야 한다. 마음과 의식을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의 이름을 공부하는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말에 집착하기를 바라기 않으셨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일시적이며 불만족스럽고 자아가 없음을 알기 원하셨을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오로지 놓아버리라고 가르치셨다. 이런 것들이 올라올 때마다 곧바로 알아차려라. 그것들을 알라. 이렇게 할 수 있는 마음만이 잘 훈련된 마음이다.
마음이 휘저어지면 정신적 형성물들, 생각의 틀 짓기, 반작용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계속해서 지어지고 증식하게 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것들을 그냥 내버려두어라. 부처님의 말씀은 단순하다. ‘포기하라.’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는지를 알기 위해 마음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
마음을 이루는 요소들의 표본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것들이 자연스러운 순서를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마음의 요인들은 이러이러하고, 의식은 이런 식으로 일어나서 이런 식으로 지나간다는 것 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직접 수행을 해 보면,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알아차릴 때 바른 생각과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삶이 자연히 뒤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마음의 요소들은 아는 자로부터 일어난다. 아는 자는 등불과 같다. 등불이 빛을 발하듯, 이해가 바르면 생각을 비롯한 모든 요소들도 바르게 될 것이다. 알아차림으로 지켜보면 바른 이해(정견正見)가 자라게 된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낱낱이 조사해 보면, 마음의 요소들이 모여 있을 뿐 어디에도 자아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발을 디딜 수 있겠는가? 느낌, 기억, 그리고 마음과 몸의 모든 다섯 가지 집합체들(오온=색수상행식)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이러지리 움직일 뿐이다. 명상을 하다보면 이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명상은 통나무와 같다. 통찰과 조사는 통나무의 한쪽 끝이다. 고요와 집중은 다른 쪽 끝이다. 통나무를 들어 올리면 양쪽 끝이 동시에 들어올려진다. 어느 것이 집중이고, 어느 것이 통찰인가? 오직 이 마음뿐,
사실, 집중과 내면의 평온, 통찰은 따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망고 열매가 처음에는 초록색에 신맛을 내다가 나중에는 노란색에 단맛으로 변하지만, 그 둘이 서로 다른 과일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이 자라서 저것이 된다. 처음 것이 없이는 다음 것이 올 수 없다. 그런 용어들은 가르침을 위한 방편일 뿐이다. 우리는 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참된 앎을 얻는 길은 오직 우리 내면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해야만 끝에 이를 수 있으며, 이런 공부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공부이다.
집중 수행의 초기 단계에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단순한 훈련을 계속하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러나 이 고요함이 떠나면 고통스러워진다. 고요함에 집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음이 평온해졌다고 해서 수행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 됨과 고통이 남아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집중, 평온한 마음에 대해 더 깊이 탐구했다. 평온함에 집착하지 않을 때까지 이 문제의 진실을 조사했다. 평온함은 그저 또 하나의 상대적인 현실이며, 수많은 정신적 형성물 가운데 하나이고, 수행의 길에서 마주치는 하나의 단계일 뿐이다. 만일 그대가 평온함에 집착한다면 그로 인해 태어남과 됨(유有)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평온함이 그치면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그대는 이전보다 한층 더 집착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됨과 태어남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 탐구를 계속했다. 아직 이 문제의 진실을 알지 못했기에, 마음을 이용하여 더 깊이 고찰했고 일어나는 마음의 모든 요소들을 조사했다. 마음이 평온하든 그렇지 않든 계속해서 꿰뚫었고 더 깊이 조사했으며, 마침내 자신이 본 모든 것, 몸과 마음의 다섯 가지 집합체들(오온)이 모두 뜨겁게 달구어진 쇠구슬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쇠구슬이 온통 벌겋게 달구어져 있는데 대체 어디를 만질 수 있겠는가? 다섯 가지 집합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부분을 잡든 고통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평온한 마음이나 집중된 상태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의 평화나 평온함을 나 혹은 나의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여기면 자아라고 하는 고통스러운 현상, 집착과 망상의 세계, 곧 뜨겁게 달구어진 또 하나의 쇠구슬이 만들어질 뿐이다.
우리는 수행을 하면서 경험하는 것을 나 혹은 나의 것이라고 믿으며 붙잡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만일 그대들이“나는 고요하다. 나는 흔들리고 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나는 나쁜 사람이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집착은 더 많은 됨(유)과 태어남을 일으킨다. 행복이 끝나면 고통이 오고, 고통이 끝나면 행복이 온다. 그대들은 이런 식으로 천국과 지옥을 끊임없이 오락가락할 것이다.
부처님은 마음의 조건이 이러함을 보았으며, 이와 같은 태어남과 됨 때문에 아직 완전히 해탈하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래서 이러한 경험 요소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 참된 성질을 탐구했다. 태어남과 죽음은 집착 때문에 존재한다.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태어남이다. 낙담하는 것은 죽음이다. 죽고 나면 태어나고, 태어나면 죽는다. 태어남과 죽음은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돌고 돈다.
부처님은 마음이 일으키는 것들이 모두 일시적이고 조건지어진 현상이며 텅 비어 있음을 알았다. 이 점을 깨닫자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포기했으며, 마침내 고통의 끝을 발견했다. 그대들도 이 문제를 진리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부처님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태어나지 않으며, 죽지 않으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가르치셨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게 되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마음의 요소들은 속임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은 자유롭고 빛나며 눈부시게 환하고,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는다.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은 오직 오해하기 때문이며, 조건지어진 현상들과 자아라는 그릇된 느낌에 속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조사라고 말씀하셨다. 맨처음에는 무엇이 존재하는가? 진실로 아무것도 없다.현상은 일어나고 사라지지만, 이 비어 있음은 그대로 있다. 그것은 좋은 것과 접촉해도 좋아지지 않으며, 나쁜 것과 접촉해도 나빠지지 않는다. 순수한 마음은 이러한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며 그것들이 실체가 없음을 안다.
수행자의 마음이 이와 같이 머물 때는 어떠한 의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됨이라는 게 있습니까? 태어남이라는 게 있습니까?”하고 누구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부처님은 마음의 요소들을 조사한 뒤 다 놓아 버렸으며, 단지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자가 되었다. 부처님은 오로지 평정심으로 지켜보았다. 그분에게는 태어남으로 이끄는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분은 완전한 지혜로 그것들은 모두 일시적이며 불만족스럽고 자아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확실히 아는 자가 되었다. 아는 자는 이런 진리에 따라서 보며, 조건이 바뀌어도 좋아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참된 평화다. 그것은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에서 자유롭고, 원인과 결과와 조건에 의존하지 않으며, 행복과 고통의 너머에 있고, 선과 악을 초월한다. 어떤 말로도 그 평화를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조건도 그 평화를 바꿀 수 없다. --50
그러므로 삼매와 고요와 통찰력을 계발하라.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일으켜 잘 쓰는 법을 배워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은 불교를 말로만 알 것이며, 고작 존재의 특성만을 묘사하며 돌아다닐 것이다. 여러분은 머리가 좋을지 모른다.그러나 마음속에서 생각이 일어날 때는 어떻게 하는가? 그것들을 따르는가? 좋아하는 것을 보면 곧바로 집착하는가? 그것들을 놓아버릴 수 있는가? 불쾌한 경험들이 올라오면 어떻게 하는가? 아는 자가 그 싫은 느낌을 마음속에 품는가, 아니면 놓아 보내는가? 싫어하는 것을 볼 때 여전히 그것을 붙들거나 비난한다면, 그대들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더 남아 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관찰하면 스스로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책에 있는 용어들을 써 가면서 수행하지 않았다. 오직 아는 자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만일 그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왜 그렇게 하는지 물어보라. 일어나는 모든 것의 근원을 면밀히 조사해 보면, 집착과 미움이라는 문제를 풀 수 있고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모든 것은 아는 자에게 돌아가고, 아는 자로부터 일어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반복하여 꾸준히 수행하는 것이다. --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