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똥을 줍는 사람
아잔 차 스님은 처음 영국을 방문했을 때 여러 불교 단체들의 초청을 받아서 순회 법회를 열었다. 어느 날, 저녁 법문을 마치자 기품 있어 보이는 여성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다. 그녀는 불교 아비담마 심리학 교재에 있는 89가지 의식 분류에 따라서 마음의 복잡한 사이버네틱스를 오랫동안 공부해 왔다. 스님은 불교 심리학 체계의 난해한 부분을 알기 쉽게 설명함으로써 그녀가 공부를 계속하도록 도울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놓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에는 자연히 불법의 원리에 집착하게 된다.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원리를 받아들여 삶의 본질을 찾는 도구로 사용한다.
스님은 이 여성이 마음을 공부하는 데 전념하기보다는 지적인 관념들에 사로잡혀 있음을 간파하고서 그녀에게 꽤 직설적으로 대답했다.
“부인께서는 마당에 암탉을 키우면서 달걀 대신 닭똥만 줍고 있군요.”--53쪽
마음속에 있는 도둑들
명상의 목적은 사물을 들어 올려 시험해 봄으로써 그 본질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몸을 근사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지만, 부처님께서는 부정(不淨)하고 일시적이며 고통받기 쉬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느 관점이 더 진실한가?
우리는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과 같다.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면 제대로 즐길 수 없다. 하지만 그 언어를 배운 뒤에는 그 나라 사람들과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다. 우리는 또 어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더 자라야 하는 어린아이들과 같다.
사람들은 대체로 몸과 함께 시작되는 생명의 요소들이 안정적이라고 믿는다. 한 아이가 풍선을 가지고 놀다가 가시에 찔려 풍선이 터지자 울음을 터뜨린다. 이 아이보다 더 총명한 다른 아이는 풍선이 쉽게 터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풍선이 터져도 그다지 슬퍼하지 않는다. 마치 나중에 배설할 것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맛있는 음식만을 실컷 먹는 식도락가처럼,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사실에 눈을 감은 채 장님처럼 살아간다. 그 뒤 자연이 부를 때, 이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그들은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한다.
세상에는 위험이 있다. 자연요소들로부터 오는 위험도 있고, 도둑들로부터 오는 위험도 있다. 사원에도 이와 비슷한 위험들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위험 요소들을 자세히 살피라고 가르치셨으며, 계를 받는 사람에게 비구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다.
비구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탁발하는 자라는 뜻이요, 다른 하나는 현상계와 집착들에 내재한 위험을 보는 자라는 뜻이다.
중생들은 탐욕, 미움, 망상을 경험한다. 그들은 이런 번뇌들에 굴복함으로써 그에 따른 과보를 받고, 나쁜 습관들을 더 키우고, 더 많은 업을 짓고 다시 번뇌들에 굴복한다.
그대들은 왜 탐욕, 미움, 망상을 없애지 못하는가?
그릇되게 생각하면 고통을 겪을 것이다.
바르게 이해하면 고통을 끝낼 수 있다.
업의 작용, 원인과 결과의 작용을 알라. 즐거움에 집착하면 그 결과로서 고통이 일어난다. 맛있는 음식을 지나치게 먹으면 위에 장애가 생기고 장이 불편해진다. 어떤 사람은 물건을 훔치고서 좋아하지만, 뒤에 경찰이 와서 그 사람을 붙잡아 간다. 주의 깊게 지켜보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고, 집착과 괴로움을 끝내는 법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이 점을 간파했기에 세상의 진정한 위험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우리는 그것들을 내면에서 극복해야 한다. 바깥에 있는 위험들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면에 있는 위험들이다. 무엇이 내면에 있는 위험요소들인가?
바람 : 사물은 감각기관에 접촉하여 충동과 욕망, 화, 어리석음을 일으키며 우리 안의 좋은 것들을 파괴한다. 흔히 우리는 나뭇잎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만 보지만, 감각의 바람을 잘 지켜보지 않으면 욕망의 태풍이 일어날 수도 있다.
불 : 이 사원은 한 번도 불난 적이 없지만 탐욕과 미움, 망상이 우리를 끊임없이 불태우고 있다. 우리는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으로 인해 그릇되게 말하고 그릇되게 행동한다. 망상으로 인해 좋은 것을 나쁘게 보고, 나쁜 것을 좋게 보고, 추한 것을 아름답게 보고 하찮은 것을 귀중하게 본다. 명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이 점을 보지 못하며 이런 불들에 지배당한다.
물 : 마음속에서 번뇌의 홍수가 일어나면 우리의 참된 본성은 흙탕물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다.
도둑 : 진정한 도둑은 바깥에 있지 않다. 이 사원에 도둑이 든 것은 지난 스무 해 동안 한 번뿐이지만, 우리 마음속에서는 다섯 가지 집착, 집합체(색수상행식)라는 강도들이 늘 우리를 강탈하고 때리고 파괴한다. 이 다섯 가지 집합체는 무엇인가?
첫째는 몸이다. 몸은 질병과 아픔에 시달린다. 몸이 기대에 어긋날 때 우리는 슬퍼하고 탄식한다. 몸은 자연히 늙고 쇠약해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괴로움을 겪게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몸에 대해 매력이나 혐오감을 느끼며 참된 평화를 빼앗긴다.
둘째는 느낌이다. 아픔과 즐거움이 일어날 때 우리는 그것들이 일시적이고 고통이며 우리 자신이 아님을 잊는다.우리는 감정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이런 그릇된 이해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셋째는 기억과 지각이다.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면 탐욕과 미움, 망상이 일어난다. 그릇된 이해는 습관이 되고 잠재의식에 저장된다.
넷째는 의지 및 마음의 다른 요소들이다. 마음 상태들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여기에 반응하게 되고, 그러면 생각과 느낌, 좋아함과 싫어함, 즐거움과 슬픔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것들이 일시적이고 고통이며 우리 자신이 아님을 잊고서 그것들에 집착한다.
다섯째는 의식이다. 우리는 다른 집합체들을 알고 있는 의식에 집착한다. 우리는 ‘나는 무엇을 안다. 나는 무엇이다. 나는 어떻게 느낀다.’고 생각하면서 분리되어 있다는 망상, 자아가 있다는 망상에 얽매인다.
이러한 도둑들, 그릇된 이해는 그릇된 행위를 낳는다. 부처님은 이런 것들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 부처님은 세상에서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하여 이 위험을 보고서 빠져나올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비구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것이다. --57
부처님은 승려들에게 다섯 가지 집합체(오온)의 참된 성질을 가르치셨으며, 그것들을 나 자신 혹은 나의 것으로 붙들지 않고 놓아버리는 법을 알려 주셨다. 우리가 이 다섯 가지 집합체를 이해하게 되면, 그것들이 큰 해를 끼치거나 큰 유익을 줄 수도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그것들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집착하지 않을 뿐이다. 부처님은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육체의 질병을 앓으셨고, 아픔과 즐거움을 느끼셨으며,기억과 생각과 의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나 자신 또는 내 것으로 붙들지 않으셨다. 부처님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아셨으며, 그것을 아는 자 역시 내가 아니며 자아가 아님을 아셨다.
다섯 가지 집합체를 번뇌와 집착에서 분리하는 것은 숲 속의 나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잡목을 솎아 내는 것과 같다. 일어남과 사라짐만이 끊임없이 이어질 뿐, 번뇌는 발 디딜 곳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집합체와 함께 태어나고 죽을 뿐이다. 그들은 그저 본성에 따라 오고 간다.
누군가가 우리를 저주해도 우리에게 자아라는 느낌이 없으면 그 일은 그냥 내뱉어진 말과 함께 끝나고, 우리는 고통을 겪지 않는다.
불쾌한 느낌이 일어나면, 그 느낌이 자기 자신이 아님을 깨달음으로써 그 자리에서 멈추게 해야 한다.
비구는 “그는 나를 미워해, 그는 나를 괴롭혀, 그는 나의 적이야.”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자만심을 갖거나 비교하지 않는다. 총구 앞에 서 있지 않으면 총에 맞지 않을 것이요, 받을 사람이 없으면 편지는 되돌아갈 것이다.
일어나는 일들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비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걷는 비구는 고요하고 평화롭다. 이것이 자유롭고 텅빈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니 다섯 가지 집합체를 탐구하라. 깨끗한 숲을 만들라. 그대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비어 있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그들은 비할 수 없는 기쁨을 알게 된다. 왜 한번 시도해 보지 않는가? 마음속의 도둑들을 없애고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텐데. --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