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관점을 바르게 하기
버섯을 따러 갈 때는 어떤 버섯을 따야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아잔 차 스님은 주의를 준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수행을 할 때는 어떤 태도를 키우고 어떤 위험을 피해야 하는지, 마음의 어떤 성질을 북돋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아잔 차 스님은 인내심과 용기를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중도(中道)를 찾으려는 의지, 중도를 찾은 뒤에는
어떠한 유혹과 번뇌에도 굴하지 않고 그 길을 따르려는 의지를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말한다. 탐욕과 미움, 망상이 올라올 때, 그것들에 굴복하지 말라. 낙담하지 말라.
어떤 상황에서도 늘 현재에 머물며 주의 깊게 지켜보고 결심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
꾸준히 수행에 전념하다 보면 자신이 겪는 경험들이 모두 일시적이며, 그래서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런 특성들을 모든 존재 안에서 끝없이 볼 것이며, 집착이 없이 자유로워지는 길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즐거운 일이나 괴로운 일을 평등심으로 관찰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스님은 그렇게 우리를 일깨운다.
가슴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맑아지면, 아잔 차 스님이 ‘오직 그만큼’이라고 표현하는 것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진리를 아주 단순하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계 전체는 진실로 오직 ‘그만큼’일 뿐이다.
이 말의 뜻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
그릇된 길
진리를 찾아 떠도는 수행자가 부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방방곡곡을 찾아 헤맸다.
어느 날 밤, 그가 묵으려고 들어간 집에는 부처님도 머물고 계셨다.
하지만 부처님의 모습을 몰랐던 그는 그곳에 계신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일어나서 부처님을 찾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바른 이해(정견) 없이 평화와 깨달음을 찾는 것은 이와 같다.
고통과 고통을 끝내는 길에 관한 진리(사성제)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나머지 부수적인 요소들도 모두 그릇될 것이다.
곧 견해가 그릇되면 의도가 그릇되고, 말이 그릇되고, 행위가 그릇되고, 집중과 평정의 수행이 그릇된다.
이 문제에서도 그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믿을 만한 안내자가 아니다.
비록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것을 최고의 기준으로 삼고 따르겠지만...
오호라, 이것은 어느 마을을 찾아가는 것과 같도다.
바른 길을 모른 채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은 그 길이 편하고 쉬우므로 마음 편하게 여행을 한다.
그러나 원래 가고자 했던 곳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66쪽
바른 이해 (정견正見)
모든 존재 안에서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보게 되면 바른 이해가 자라며 마음을 빼앗기거나 집착하지 않게 된다.
집착하지 않음은 싫어함이 아니다.
우리가 한때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는 마음 역시 일시적이며, 머지않아 그것에 대한 갈망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대가 죽순 요리나 카레를 좋아한다고 가정해보자. 몇 년 동안 날이면 날마다 죽순 요리만 먹는다고 상상해 보라.
넌더리가 날 것이다. 이제는 누군가가 죽순 요리를 대접해도 기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존재 안에서 일시성, 고통, 비어 있음을 늘 보아야 한다. 죽순 요리를 생각하라.
우리는 쾌락의 삶이 아니라 평화를 찾으려 한다. 평화는 우리 안에 있으며, 흔들림과 고통이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평화는 숲 속이나 산꼭대기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승이 주는 것도 아니다.
고통을 경험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을 수 있다.
고통으로부터 달아나려고 애쓰는 것은 실제로는 고통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고통을 조사하고 그 원인을 보라.
결과만을 어찌해 보려 애쓰지 말고 지금 당장 그 원인을 끝내라. --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