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는 팔정도”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1(끝)
부처님 “팔정도 외에 다른 가르침으로 깨달은 자를 보지 못했다”
11.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3번)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싸
모든 번뇌를 완전히 여의시어 온갖 공양과 예경 받으실 만하며
사성제 진리를 비롯한 모든 법을 올바르게 스스로 깨달으신
그 존귀하신 부처님께 절합니다.
고통 받는 중생들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위험 처한 중생들 모든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걱정 있는 중생들 모든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기를 (3번)
Dukkhappattā ca niddukkhā
bhayappattā ca nibbhayā
sokappattā ca nissokā
hontu sabbepi pāṇino (3번)
둑캅빳따 짜 닛둑카
바얍빳따 짜 닙바야
소깝빳따 짜 닛소까
혼뚜 삽베삐 빠니노
사두 사두 사두
(팔정도 게송)
Etadattani sambhūtaṃ, brahmayānaṃ anuttaraṃ
niyyanti dhīrā lokamhā, annadatthu jayaṃjayaṃ
에따닷따니 삼부땀, 브라마야낭 아눗따랑
니얀띠 디라 로깜하, 안냐닷투 자양자양
이 위없는 최고의 범천의 수레(팔정도)를 본인의 것이 되게 하라.
이 세상을 벗어나는 지혜로운 자는 나머지 모든 것들도 이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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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의 집중수행을 마치는 해제법문입니다. 그 동안의 법문을 압축시켜 말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정도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의 게송은 이 팔정도에 대한 게송입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어디에 머무르시건 이 게송을 부르면서 팔정도 수행을 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때 부처님께 다가온 아난존자가 그 날 있었던 일을 전하였습니다.
“부처님, 제가 오늘 탁발을 하려고 길을 걷다가 마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그 마차에는 흰색 옷을 입는 자눗소니라고 불리는 큰 부자인 바라문이 타고 있었고, 흰 말 8마리가 끌고 가는 마차도 온통 흰색으로 치장이 되어 있어서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마차 뒤를 따라가는 사람들도 모두 흰옷을 입었고, 마부도 흰색 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마부가 들고 있는 회초리까지도 흰 색이었습니다. 그것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감탄하여 소리를 질렀는데 ‘아, 이것이 진짜 범천의 마차(브라마야나)이다.’ 하며 칭찬을 쏟아놓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처님, 사람들은 그 마차를 매우 대단하게 여기면서 관심을 보였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그 정도로 대단한 수레(마차)는 없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가르침에는 아주 대단한 수레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담마야나이다.”
‘담마야나’란 ‘법이라는 수레(법승)’라는 뜻입니다. 차는 사람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타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경전에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법이라는 수레에 올라타면 자기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장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다. 그 수레가 최고의 수레이고, 더 이상 좋을 수 없으며 싸움에서 항상 이기는 최고의 수레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에는 마차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아주 일반적인 마차로 두세 사람이 탈 수 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위에서 말한 말 8마리 정도가 끄는 아주 크고 대단한 수레이며, 마지막으로 하나는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혼자 타고 싸우는 마차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마차는 바로 팔정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말 8마리가 끄는 마차일지라도 이 세상 끝까지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팔정도라는 법승(法乘)을 타면 인간의 세상에서 신의 세상으로 갈 수 있고, 인간의 세상에서 범천의 세상으로 갈 수도 있으며, 인간의 세상에서 세상을 초월하고 해탈까지 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가끔씩 농담 삼아 “나는 대승도 아니고 소승도 아니고 바로 법승이다.”라고 말하곤 할 때의 그 법승이 담마야나입니다. 한국에서는 소승 대승을 말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원래 소승도 없고, 대승도 없습니다. 대승을 원어 그대로 번역하면 ‘대’는 크다는 뜻의 ‘마하’, ‘야나’는 수레라는 뜻이어서 ‘마하야나’이고 소승은 히나야나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때 ‘소’라는 말과 ‘히나’의 뜻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즉 ‘소’는 ‘작다’라는 뜻인데 ‘히나’는 ‘낮다’라는 뜻입니다. ‘대소’는 ‘크고 작음’이라는 의미이니 소승을 바르게 번역하려면 ‘작다’는 뜻의 ‘쭐라야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낮다’는 말인 ‘히나’의 반대말은 ‘높다’ 즉 ‘에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번역되어 쓰이는 말은 ‘마하야나, 히나야나’이니 그 의미가 좀 어중간하고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하여간 삼장법, 오부니까야에는 ‘마하야나, 히나야나’라는 단어 자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열반하시고 불교에 여러 파가 생기면서 나중에 생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오직 하나, ‘담마야나’ 즉 법승(法乘)입니다. 법승이 다른 것이 아니라 팔정도인데 이 팔정도라는 법의 수레를 타면 아주 좋은 데에 갈 수 있고, 모든 싸움에서 이긴다는 말이지요.
위의 ‘모든 싸움에서 이긴다(상가마위자야).’라는 말과 관련된 경전에 전하는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출가하려고 하면 신들이 “아, 어느 지방에서 어떤 부모의 아들딸이 지금 출가하려고 한다.”라고 소리를 지른답니다. 그 다음에 어떤 사람이 머리 깎고 수염 깎고 가사를 입을 때면 다시 “어느 지방의 어떤 집안 아들딸이 전쟁터에 나가려고 갑옷을 입고 있다.”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른다고 합니다. 이 가사가 갑옷, 번뇌와 전쟁하는 갑옷입니다. 또 그 다음에 그 사람이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아라한이 될 때 아주 큰 소리를 지른답니다. 신들이 그렇게 소리를 지른다고 할 때에 바로 ‘상가마위자야(saṅgāmavijaya)’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가마’는 ‘전쟁’을, ‘위자야’는 ‘이긴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존자에게 팔정도라는 법승을 타는 사람이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싸움에서 이기고 최고로 좋은 곳에 갈 수 있는 마차가 바로 이 팔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을 하면서 힘이 들 때 이 게송을 암송하면 큰 힘이 생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열반에 드시기 직전 마지막 제자인 수밧다에게 해 주신 말씀도 다름 아닌 이 팔정도입니다. 이런저런 의문 나는 것들을 묻는 수밧다에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시간이 별로 없구나. 다른 이야기는 하지 말고 이 말을 잘 들어라. 팔정도가 있는 가르침에 첫 번째로 깨달은 자인 수다원이 있다. 두 번째로 깨달은 자 사다함이 있고, 세 번째로 깨달은 자 아나함이 있으며, 네 번째로 깨달은 자인 아라한이 있다.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에는 이 네 종류의 깨달은 자가 없다. 내가 지금 출가한 지 51년째인데 이 가르침 외에 다른 가르침으로 깨달은 자를 보지 못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지막 시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만큼 여러분들이 팔정도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만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이렇게 팔정도를 공부하고 계시니 바른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감을 가지셔도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덧붙이시기를, 비구들이 이렇게 팔정도를 열심히 수행하고 있으면 이 세상에 아라한은 끊이지 않을 거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수행자가 팔정도를 제대로 실천하면서 잘 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오래 머물 수 있고, 우리가 잘못 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빨리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아라한이 있는 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라지는 것의 단계를 다섯 가지로 봅니다. 첫 단계는 깨달은 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라한이 없어지고, 아나함이 없어지고, 사다함도 수다원도 모두 없어져서 깨달은 자가 한 명도 살아 있지 않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인간 세상이건 천신 세상이건 범천 세상이건 깨달은 자가 하나도 없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사라짐입니다.
그래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직은 남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가 없어도 깨닫기 위해서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대로 된 비구·비구니가 살아 있어서 계·정·혜를 실천하고 있다면 아직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이것의 사라짐이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 사라짐은 제대로 된 승가가 없고 제대로 계율을 지키지 않는 스님만 남아 있을 때입니다. 그 스님들은 머리 깎고 가사 입고 공부를 하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겉모습만 승가입니다.
그 다음에는 스님들이 평복으로 입는 가사는 사라지고 행사 때만 가사를 입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사를 입지는 않고 가사의 귀퉁이를 조금 잘라 몸에 걸쳐 스님임을 표시하게 됩니다. 머리도 기르고 가사를 귀에 조금만 걸어도 스님이라고 인정하는 시대가 오고, 어떤 사람은 가사를 끈처럼 해서 손이나 목에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차차 그렇게 될 것이라고 경전에 나옵니다.
그래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조금은 남아 있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맨 끝에 가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관한 지식까지 모두 없어집니다.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나 미얀마에 있는 돌에 새긴 경전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아무도 모르게 되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 신의 세계, 범천의 세계 그 어디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가 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사리도 사라집니다. 그것이 완전히 끝나는 것입니다. 즉 첫째는 깨달음의 단계, 둘째는 실천의 단계, 셋째는 경전 공부의 단계, 넷째는 겉모습의 단계, 다섯째는 완전히 부처님의 사리까지 끝나는 단계입니다. 그러니 비구·비구니, 재가자 사부대중이 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부처님의 시대가 오래오래 갈 수 있게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음과 같습니다.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한다 다니 빅카웨 아만따야미 워
와야담마 상카라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비구들이여, 이제 당신들에게 마지막 말을 해야겠다.
조건 따라 움직이는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이 모든 것은 사라지는 법이다. 그러니 잊지 않음으로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완벽하게 하라.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도 “너희들이 해야 하는 일이란 다른 일이 없다, 오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잊지 않음으로 완벽하게 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잊지 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잊지 않음이 논장에서 말하는 사띠입니다. 그 잊지 않음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이 많이 있는데 핵심은 불·법·승 삼보와 선업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선업을 잊지 않음 속에도 가르침이 많이 있지요. 몸으로 하는 나쁜 짓 세 가지, 입으로 하는 나쁜 말 네 가지, 마음으로 하는 나쁜 짓 세 가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나쁜 세 가지를 하고 오욕락에 빠져 있으면 완전히 잊어버린 사람, 나쁜 세 가지는 안 하지만 선업도 하지 않는 사람이 두 번째로 잊어버린 사람, 세 번째 잊어버린 사람은 나쁜 것 세 가지는 하지 않고, 선업을 하긴 하지만 대충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이렇게 법문 듣고 수행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욕락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또 그 오욕락에 빠져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몸으로 살생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삿된 음행을 하기도 합니다. 또 입으로 거짓말, 이간질하고 쓸데없는 말 하고 욕설하고 그런 사람도 있고, 직접 몸으로는 하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욕심 부리고, 성내고, 사견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고 있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선업을 앞뒤가 끊어지지 않게 연결시키면서 꾸준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만이 잊지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젊기 때문에 자만이 생기는 것도 잊고 있는 것이고, 건강하기 때문에 자만하게 되는 것도 잊고 있는 것이며, 외모가 잘 생기고 예뻐서 자만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잊어버림과 잊지 않음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많이 있는데 핵심은 선입니다. 선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하고 있으면 ‘아빠마다’, 선을 잊어버리면 바로 악, ‘빠마다’이지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잊지 않음, 사띠이고 실천적으로 말하면 사념처 수행입니다. 사념처를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몸, 느낌, 마음, 법 중 어느 하나에는 항상 사띠를 가지고 있어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양하고 아주 많지만 궁극적으로는 한 가지입니다.
오늘 수행 마지막 날인 해제법문에서 수행자 여러분들께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선물로 드립니다.
한다 다니 빅카웨 아만따야미 워
와야담마 상카라 압빠마데나 삼빠데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시고 더 이상 아무 말씀 안 하신 채 열반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말 한 마디만 마음 깊이 담아 두고 잊지 않아도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잊지 않음, 항상 깨어 있음으로 해야 하는 일을 완벽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에는 가사 공양도 있고, 꽃 공양, 촛불 공양 등 많이 있지만 그 중 최고의 것은 실천 수행하는 공양, 즉 빠띠빳띠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모든 보시를 법의 보시가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해 온 계·정·혜 수행 공덕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겠습니다.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 그리고 닙바나
이와 같은 아홉 가지 법을 마땅히 성취할 수 있는 수행으로
성스러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드높은 법에 공양을 올립니다.
드높은 승가에 공양을 올립니다.
이 계·정·혜 수행 공덕이 생․노․병․사 삼세윤회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닙바 나를 성취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회향공덕’을 함께 읽겠습니다.
오늘 하루 쌓아올린 모든 선업 공덕을 스승님, 부모형제 그리고 친지들, 도움 주신 천신들 그리고 성인들, 친구든 원수든 차별 없이 회향하니 모두들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저의 이러한 공덕의 회향으로 모든 이들 불선업에서 완전히 벗어나 삼세 행복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이 모든 선업을 모든 이들이 고르게 고르게 고르게 나누어 가지소서.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