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빳사나, 깨달음의 길”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7
“상카루빽카 넘어서면 아라한…부처 되려면 상카루뻭카에 머물러야”
그것이 ‘방가 냐나’라고 하는 위빳사나 지혜 다섯 번째 단계입니다. 그 방가 냐나가 아주 강할 때는 눈을 뜨고 있는데도 모든 게 계속 사라지는 듯이 생생하게 느껴져서 바닥을 보면 바닥이 사라지는 것 같고, 나무를 봐도 나무가 해체되는 것처럼 나무 모습이 흩어져 보입니다. 발을 바닥으로 내려디디면 발과 바닥이 함께 아래로 쑥 들어가는 느낌이 있어서 일반적으로 보고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니 점 같은 미세한 대상들이 계속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방가가 너무 센 까닭입니다. ‘내가 눈이 나빠졌나?’ 하고 착각할 정도로 눈을 뜨고 있을 때도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하면 사람을 봐도 사람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느낌을 받습니다.
위빳사나 지혜의 다섯 번째 단계, 그 다음 지혜로 넘어가면 ‘바야 냐나’라는 여섯 번째 지혜가 생깁니다. ‘바야’는 ‘무섭다’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몹시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이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지혜를 말로 표현할 때는 다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모두 무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무상을 보면서 고를 알 때가 있고, 무상을 보면서 무아를 알 때도 있습니다. 방가 냐나 단계에서도 고를 많이 알게 됩니다. 계속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아, 이것이 가치 있는 게 아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게 없다. 너무 괴롭다…….’ 이런 것이 다 고에 해당되는데 이런 고를 25가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를 무조건 고통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 고통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나를 계속 고문하는 느낌이 오면 괴롭힘을 당한다고 느끼므로 이것 또한 고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둑카는 가치가 없는 것, 확고하지 않은 것, 고문하는 것, 괴롭히는 것 등등이 모두 포함되는 의미입니다.
수행 중에 보는 모든 것이 무상합니다. 관찰하면 그 즉시 사라지는 걸 보는 과정에서 계속 알게 되는 느낌은 그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처음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봤다가 나중에는 계속 사라지는 것만 보게 되는데, 계속 사라지는 것을 보니까 무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무서움은 무상을 보는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지혜의 공통점은 무상·고·무아를 보는 것입니다. 그 무상·고·무아를 보는데 어느 지점이 되면 특별히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지혜의 단계를 나누는 것이고, 위빳사나 지혜 4단계부터 깨달음에 도착할 때까지는 계속 무상을 봅니다. 무상을 보며 무아를 느낄 때가 있고, 고를 느낄 때가 있으며, 깨달음에 들어가기 직전 마음, 도의 바로 직전 마음까지는 지속적으로 무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 다음의 도마음은 해탈을 봅니다. 무상의 소멸, 원인과 결과의 소멸을 보는 것이 도지혜 과지혜이고 그 도의 바로 앞 마음까지는 무상만 봅니다. 일어나 사라지는 물질과 정신의 과정, 그 무상을 보는 것이 4단계 위빳사나 지혜의 처음 단계부터 깨달을 때까지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의 무상을 볼 때 지혜와 집중 정도에 따라서 그 보는 대상은 다릅니다. 방가는 계속 무너지는 것이고 바야는 무서운 느낌이 강하게 오는 것입니다. 무서움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행 안 하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고 사띠를 놓쳐 버리는 데서 온 결과입니다.
처음에는 제대로 관찰하여 무상이 무서운 것을 보았는데 그 무서움이 점점 커지면서 공포심이 더 커지니까 마음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약해지면서 제대로 관찰하지 않으니까 생각이 들어온 것이고, 생각이 들어오니까 그 공포감이 일반적인 무서움으로 넘어가 버린 것입니다. 수행으로 보게 된 무서움이 평소 알고 있는 일반적인 공포감으로 바뀌면서 관찰을 하지 못하게 된 경우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멈춰버리고 우는 사람도 있고, 수행처에서 도망가는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위빳사나 수행 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본인의 과정에서 온 잘못입니다. 본인이 마음으로 끊임없이 관찰해야 되는데 관찰하지 못하고 생각들이 많아지면서 수행이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바야 냐나, 무서움의 단계에서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관찰하면 다음에 일곱 번째 지혜인 ‘아디나와 냐나’, 즉 비참함의 지혜가 생깁니다. ‘아, 사실이 이런 것이구나.’ 하면서 물질과 정신에 대해 완전히 정이 떨어지는 단계입니다. 계속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이 실체가 없는 것을, 착각한 것임을 알게 되는 지혜입니다.
‘나’를 ‘무아’로 보는 것, 나를 부정하는 것이지만 화로 보는 게 아니라 있는 사실 그대로를 봅니다. 매 순간 무너지기 때문에 너무나도 무섭고 그것을 비참하다고 압니다. 예를 들면 부부가 있는데 남편이 부인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부인이 계속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자신이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후에 ‘아, 전혀 좋은 게 아니었구나. 너무도 나쁘구나, 무섭구나.’ 하고 아는 순간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나면 부인의 나쁜 점이 계속 눈에 들어오면서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집성제가 계속 무너지고 있는 것으로 고를 알면 집이 계속 무너지는 것이 그와 같습니다. 도성제로 계속 관찰하고 있는 것이 고성제이며 이 지혜의 힘으로 여덟 번째 위빳사나 지혜인 ‘닙비다 냐나’로 넘어갑니다. 여덟 번째인 ‘닙비다 냐나’는 너무 지루하고 모든 게 혐오스러워지는 단계입니다.
이 때 수행자가 잘못하면 진짜 게으름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너무 심심하고 뭐든지 하기 싫고 먹기 싫고, 잠을 자는 것도 싫고 수행을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할 정도가 됩니다. 이 단계에서 제대로 수행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자꾸만 화가 나고 세상이 싫어지고 심지어는 자살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물론 이 닙비다 냐나 단계에서 제대로 깊게 관찰하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을 아주 깊게 볼 수 있게 되는데, 수행의 힘이 약해지면서 관찰을 제대로 못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닙비다(지루함)가 오는 것입니다. 그건 제대로 마음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에 올바른 지혜에서 조금 비뚤어진 쪽으로 가버린 상태로 잘못하면 생각이 엄청나게 많아질 수 있습니다.
제대로 관찰하는 사람은 이 상태가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는 동안에 생기는 현상임을 알고, 지루함이나 혐오감도 수행 중에 생긴 것일 뿐 그것이 일상생활의 지루함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마음 상태를 계속 놓치지 않고 집중하여 관찰하면 그 다음에는 ‘아, 지루하다, 이런 생을 더 받고 싶지 않다, 다시 윤회하고 싶지 않다.’ 하는 마음이 강해지면서 그때부터 해탈을 강력하게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윤회하지 않고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이 해탈이지요. 일체 원인과 결과가 소멸되는 단계, 원인이 모두 사라지니 당연히 결과도 사라지는 것이 해탈인데 마음이 그 쪽을 향해 강하게 방향 전환을 합니다.
그래서 아홉 번째가 ‘문찌뚜까먀따 냐나’입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 해탈로 가고 싶은 마음, 이 몸과 마음,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계속 보면서 참기 어렵게 지루하고, 그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렬한 마음,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지루함에서 벗어나 해탈을 성취하고자 함이 문찌뚜까먀따, 이것도 지혜입니다.
지루하고 혐오스러운 마음 상태를 관찰하여 문찌뚜까먀따 상태로 넘어서면 물질과 정신의 일어나고 사라짐,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는 이 행고에서 벗어나서 해탈로 가고 싶어지는데 여기에서도 바르게 수행하지 못하면 생각이 많아지고, 그렇게 되면 수행을 그만두고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납니다.
수행처에 있으면 집으로 도망가고 싶고, 집에 있으면 또 다른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져서 진득하게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어디에 있든지 항상 불편해 합니다. 항상 마음이 안정을 못 찾아 방황하게 되는데 그때는 다시 수행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 정신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보면서 지혜가 생겨야 되는데, 사람들의 집중이 떨어지고 지혜가 부족하여 계속 놓쳐버리고 마음이 또 딴 생각으로 가버리고, 그 생각들을 챙기지 못하면 마음이 헤매게 됩니다.
그런 상태를 분명하게 관찰하여 계속 지혜가 커지면 그 다음 열 번째 단계가 ‘빠띠상카 냐나’라는 지혜가 생깁니다. ‘빠띠’는 ‘다시’, ‘상카’는 ‘노력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은 다른 핑계거리를 찾지 않습니다. 4단계부터 확실해지는 것이 도리가 없다, 오로지 수행하는 이 길밖에 없다는 것을 본인이 잘 압니다.
‘아, 진짜 벗어나고 싶은데 다른 길이 없구나.’ 하는 자연스럽고 강한 이 느낌이 강하게 밀려옵니다. 계속 관찰하면서, 그 관찰하는 과정과 결과가 아무리 괴로워도 ‘괴롭구나, 그런데 이 길밖에 없구나.’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서 그때부터는 수행에서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그래서 끊어지지 않는 관찰이 시작됩니다. 무상을 계속 보는 마음이 별로 무섭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고,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 수행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빠띠상카 지혜 다음에 마지막으로 ‘상카루뻭카’, 최고의 지혜가 오는 것입니다. 이 상카루뻭카는 위빳사나 지혜 중에서 최고 단계입니다. ‘상카라’는 지금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는 사실이고 ‘우뻭카’는 중립, 평정심입니다. 무서운 것도 없고, 지루한 것도 없고, 벗어나고 싶은 것도 없고, 모든 상황을 아주 평정하게 받아들이면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카루뻭카가 아주 강할 때는 아라한의 마음하고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별로 놀라는 일도 없고 어떤 두려운 상황에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화도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상카루뻭카 지혜도 영원하지 않아 언젠가는 깨지지만, 한순간에 깨져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밑에 있는 약한 지혜들은 깨지면 바로 0으로 떨어져서 다시 시작할 때는 첫 단계인 밑바닥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상카루뻭카는 그렇게 쉽게 깨지지도 않고, 깨졌다 해도 한꺼번에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약해지면서 서서히 무너집니다.
상카루뻭카를 강하게 갖고 있는 사람은 아라한이 어떤 분인지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욕심 부리지도 않고 화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면 보통 사람들은 가장 사랑하던 가족 누군가가 갑자기 죽으면 눈물 안 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카루뻭카 상태에 있으면 눈물을 마구 쏟거나 쉽게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계속 무상·고·무아를 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죽은 것을 평정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지금 여기에서 무상, 죽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 죽었구나.’를 아는 순간 그 마음이 슬프기 마련인데, 그 슬픔이 일어나는 즉시 싹 사라지고 계속 중립이 유지되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멍청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분명하게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상카루뻭카 지혜를 확실하게 가져본 사람만이 아라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상카루뻭카를 갖고 있는 순간의 마음이 제일 깨끗한 순간입니다. 잠재적 번뇌까지 완전히 약해지는 상태입니다. 잠재의 번뇌가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거의 없는 듯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상카루뻭카 상태를 그대로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그때가 바로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는 기회이고,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중단 없이 수행하면 마침내 깨닫는 것입니다. 상카루뻭카 지혜의 마음에 머물 수 있으면 사람이 지극히 청정해지면서 도지혜가 어떤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상카루뻭카에서 도가 일어날 때는 상카루뻭카를 한 단계만 넘어가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도를 성취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상카루뻭카와 도지혜 사이에 마음이 몇 개 있습니다. 상카루뻭카 지혜의 마지막 마음으로 빠리깜마, 우빠짜라, 아눌로마, 고뜨라부라는 네 가지 마음이 있고 그 다음에 도지혜의 마음이 일어납니다. 빠리깜마는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카루뻭카에서 도의 상태로 들어갈 때 마음이 준비하는 것이 빠리깜마이고 그 다음에 우빠짜라, 이 단계가 되고 난 후에 두 번, 세 번 될 수는 있지만 많은 시간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어서 한 시간 두 시간씩 있을 수는 없습니다. 상카루뻭카로 넘어가서 우빠짜라로 나아가면 이것은 도로 들어가기 위해서 도의 마당으로 들어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빠짜라가 도의 마당으로 들어선 것으로 비유된다면 그 다음이 아눌로마인데 이것을 영어로 하면 adjust입니다. 우리가 전기코드 꽂을 때 전압이 안 맞으면 중간에 연결시켜 주는 어댑터가 있는데 그것과 흡사합니다. 그런 것이 아눌로마예요. 지금 일반적인 마음, 범부의 마음에서 성인의 마음으로 가려고 하는데 그 중간에 어댑터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눌로마라는 마음 하나가 있는데 이것도 위빳사나에 포함되는 마음이며 ‘아눌로마 냐나’란 그런 의미입니다. 빠리깜마, 우빠짜라, 아눌로마는 모두 무상을 봅니다.
그 다음이 고뜨라부 냐나인데 이것은 범부의 성(姓)을 잘라버리는 것으로 범부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의미입니다. 범부의 영역이 끝나고 성인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단계가 꿰뚫어 봄인데 고뜨라부가 바로 그 경계선입니다. ‘고뜨라’는 ‘성(姓)’이고 ‘아비부’는 ‘넘어왔다, 넘쳤다, 넘었다’는 뜻이어서 ‘원래 있던 성을 넘어섰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이 마침내 도지혜가 됩니다. 그런데 고뜨라부부터는 무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해탈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 도의 마음 직전 마음이 고뜨라부인데 고뜨라부 때는 해탈을 봅니다. 고뜨라부 전까지인 빠리깜마, 우빠짜라, 아눌로마까지 물질 정신을 대상으로 물질 정신의 무상·고·무아 셋 중에 하나를 알고 그 다음 단계인 고뜨라부, 다음이 도지혜(막가 냐나)입니다. 도 다음에는 바로 과지혜로 도지혜는 딱 한 번 있지만 과지혜는 두세 번 될 수 있습니다. 빳짜웩카나 냐나는 뒤돌아보는 지혜입니다. 뒤돌아본다는 것은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 방금 전에 그랬구나.’ 하고 해탈을 순간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해탈은 한 번만 보는 것으로 도지혜를 딱 한 번 보면 그 도지혜가 해탈을 보는 것이고, 그것이 번뇌를 잘라버리는 일도 동시에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성제를 동시에 안다는 뜻입니다. 사성제를 동시에 안다는 것은 불을 켜면 환해지는 것과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불을 켜자 어둠이 순식간에 없어지고 밝아지는 것처럼 도성제가 되는 즉시 고성제가 되는 것이고, 집성제를 버리는 것이고, 멸성제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성제가 동시에 된다는 뜻이고, 도의 단계는 단 한 순간이며 그 다음에 바로 과마음입니다.
도지혜와 과지혜를 다시 비유하여 설명하자면, 힘차게 뛰던 사람이 갑자기 멈추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서지 못하고 한두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가게 되는 것처럼 도지혜 다음에 곧바로 과지혜가 이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뒤돌아보는 지혜, 빳짜웩카나 냐나는 방금 전의 아주 충격적이고 선정의 힘이 강한 상태에서 ‘아, 그랬구나!’ 하면서 자신이 버린 번뇌를 알고, 남아 있는 번뇌도 알 수 있으며, 방금 전에 본 해탈을 다시 새겨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지혜가 생기면서 한 단계가 끝나는 것이고 그것이 수다원의 도와 과 단계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깨닫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심리를 분석하지 못했거나 깨달음의 정의를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위빳사나가 이렇게 지혜의 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수행임을 알고, 단번에 깨달을 수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단 한 번에 깨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진짜 깨달음이 아닌 것을 깨달음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고, 진짜 깨달음이라면 본인의 심리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수행 단계를 계속 올라간 사람일 것입니다. 수행이 제대로 되고 있으면 지금까지 말한 느낌들과 그 과정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위빳사나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위빳사나 지혜가 무르익어갈 때 물질과 정신의 매 순간 일어나서 사라짐을 보는 것은 똑같은데 수행자의 지혜, 거기에서 받는 느낌이 다른 것으로 지혜의 단계를 나누는 것입니다. 무상을 보면서 무서워하기도 하고, 거기에 대한 지루함이나 혐오감을 보기도 하는 것이지요. 상카루뻭카에 이르면 수행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수행이 스스로 수행을 합니다. 원래 수행은 본인이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상카루뻭카는 그렇게 애쓸 것 없이 수행이 자기 스스로 걸어가는 것처럼 저절로 됩니다. 그 상카루뻭카 지혜가 내게 있는지 없는지는 아주 뚜렷하기 때문에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에 오면 24시간 안 자고 수행할 수 있습니다. 상카루뻭카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잠자는 것이 별로 필요 없습니다. 5분 정도만 졸아도 다섯 시간을 잔 것처럼 힘이 생기고 피로가 사라집니다. 한 번씩 졸기는 하지만 우리가 매일 하듯이 잠자리에 누워서 자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상카루뻭카 상태가 되면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든지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상카루뻭카 지혜를 얻어 보면 아라한이 어떤지 알게 되어 진정한 해탈을 간절한 마음으로 추구하게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전생에 십바라밀 보살행을 하시면서 위빳사나 수행을 많이 하셨는데 상카루뻭카 상태에서 멈춰 계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처가 돼야 하셨기 때문이었는데, 상카루뻭카를 넘어가서 아라한이 되고 나면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윤회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내가 꼭 부처가 돼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상카루뻭카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열심히 해 보면 내가 보살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수행에 아무 문제가 없고, 수행을 이보다 더 열심히 할 수는 없을 만큼 하는데도 상카루뻭카를 넘어서지 못하면 아마 보살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넘어가지 않는 이유는 붓다가 되겠다는 큰 원력 때문입니다. 붓다가 되겠다고 보살행을 계속 해왔던 원력이 참으로 강한 사람은 수행의 모든 것을 갖춰도 상카루뻭카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합니다. 지혜도 뛰어나고 노력도 대단하고, 건강과 신심이 더할 수 없이 좋은데다 상카루뻭카까지는 잘 갔는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가고 싶지도 않다면 틀림없이 자신을 보살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살인지 아닌지를 검증할 수 있는 단계가 바로 이 상카루뻭카입니다.
어떤 수행에서 시작하든 몸과 마음을 관찰하여 위빳사나 지혜가 일어나면 틀림없이 깨달을 수 있는 길을 가는 사람이고, 그런 것이 없으면 깨달음의 길이 아닙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아무리 잘한다 해도 선정을 얻을 뿐 깨닫지는 못합니다. 깨닫는 길로 가고 있으면 틀림없이 지금까지 공부한 이 과정을 거쳐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수행자 본인이 수행을 함으로써 스스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그 단계가 각각 어떠한지를 모두 살펴보았고 불·법·승 삼보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도 다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게송을 함께 암송하겠습니다. 불·법·승의 공덕을 숙지하고 공덕을 쌓으면서 그 공덕의 진실을 말함으로써 여러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는 아주 아름다운 게송입니다.
붓도 로께 사뭅빤노, 히따야 삽바빠니남
담모 로께 사뭅빤노, 수카야 삽바빠니남
상고 로께 사뭅빤노, 뿐냑켓땀 아눗따람
에떼나 삿짜왓제나 수키따 혼뚜 사다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부처님의 법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이다.
승가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중생들이 선업이라는 씨앗을 심기에 좋은 논밭이 되어 주기 위해서이다.
이 진실을 말함으로써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
Buddha 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