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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11일간의 특별한 수업

위빳사나강의: 11일간의 특별한 수업(10-5,6회)

“사마타건 위빳사나건 고비 잘 넘겨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5
“올라오는 고통을 열심히 관찰하면 수행이 좋아져서 다음 단계로”

 

‘삼마사나 냐나’라고 하는 세 번째 단계인 무상·고·무아를 아는 지혜가 일어나면 생겨나는 모든 것이 끊임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단계에서 다시 한 단계 올라선 이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뭐든지 보면 변하거나 사라지고, 더위, 추위, 딱딱함, 부드러움, 아픔 등의 변화가 매우 다양하고 빠르며, 아픈 것도 여러 가지이고 아픈 정도가 몹시 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 세 번째 단계가 되면 관찰하는 대상들이 쏟아지듯이 많아져서 관찰이 힘들다고 느낍니다.

 

위빳사나 수행의 첫 단계 때에는 수행자가 대상을 잡고 있으면서 관찰하는 속도가 매우 느립니다. 하나 관찰하고 한참 있다가 다시 하나 관찰하는 식으로 느리게 진행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지혜가 되면 관찰하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고 빠른 만큼 대상들도 많이 보이니까 그 대상이 쏟아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관찰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를 관찰하는데 한꺼번에 넷, 다섯, 여섯……, 이렇게 다양한 대상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제대로 관찰하기도 전에, 미처 다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힘이 들고, 계속 사라지기만 하니 모든 것이 무상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몸의 여기가 조금 불편하여 여기를 보면 보는 순간 그것이 없어지고, 또 다른 데가 이상이 있어 그곳을 보면 그 즉시 없어지고, 그래서 ‘아, 진짜 무상하구나. 모든 것이 보면 변하는구나.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게 하나도 없구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그리고 무상한 게 고통스럽게 느껴지고 몸과 마음도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수행 도중에 몸도 마음도 몹시 괴로워서 수행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많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아직 이 단계까지는 아무래도 물질 쪽을 많이 봅니다. 물론 처음 1단계 때의 물질보다는 많이 미세해진 물질이고, 보면 다 해체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 세 번째 단계까지는 몸이 완전히 사라지는 느낌은 별로 없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사라진 느낌이어서 손발, 머리, 다리 등 몸의 어떤 부분은 없는 것 같고 어떤 부분은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들인데 그 상태에서 집중이 더 강해지면 점점 대상이 사라져 감을 느낍니다.

 

뭔가가 있는 것 같아 관찰하면 그것들이 해체되면서 흩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다리를 봐도 처음에는 분명하게 느껴지던 것이 계속 관찰하다 보면 차츰 아무것도 없는 느낌으로 변합니다. 그런 식으로 내가 관찰하는 부분이 다 흩어지고 해체가 되면서 처음에 알고 있던 모양과 크기가 없어지고 나중에는 지·수·화·풍의 느낌들만 남습니다. 따뜻함이나 차가움, 가볍고 무거움 등의 느낌만 남고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물질적 느낌은 모두 사라진다면 세 번째 단계의 수행이 잘 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세 번째 단계에서 무조건 다 아파야 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다른데 원래 마음이 아주 평온한 사람들이나 별로 화가 나지 않는 사람들은 아프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많지는 않습니다. 또 사마타 집중수행을 많이 했던 사람들도 별로 아픈 것을 모르고 바로 바로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 번째 단계에서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오만 가지가 통째로 다 나타나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여기 아프다가 없어지고, 저기 아프다가 없어지는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집니다.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니 무엇부터 관찰해야 하는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됩니다.

 

이걸 관찰하면 또 다른 무엇이 생기고, 그것을 보다 보면 또 다른 것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습니다. 뭔가 괴로운 것이 되게 많고, 아픈 곳도 엄청 많고, 병이 나는 곳도 아주 많습니다. 딱딱한 것을 보면 딱딱한 것이 없어지고, 몸이 뜨거웠다가 그것을 보면 다시 뜨거운 것이 없어지고, 이런 식으로 보면 없어지는데 처음 그 단계를 시작할 때는 오래가기도 합니다. 처음 보면 오래가는데 한 번 제대로 보면서 변하면 ‘아, 진짜 무상하다.’ 이런 마음이 확고하게 생깁니다.

 

이 단계에서 무상을 한 번 보면 머리로는 무상을 천 번 만 번 그려 보게 됩니다. 세 번째 지혜는 그런 것입니다. 무상·고·무아를 수행의 체험으로 아는 사실이 한 번이라면 이것을 계속 반복해서 숙지하는 것은 수없이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보다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런 식으로 하다 보니 모든 것이 무상이다, 고통스럽다, 무아이다 이런 마음만 꽉 차게 됩니다. ‘아, 진짜 고통스럽다.’ 하는데 이 단계에서의 고(苦)는 사실 ‘고고’입니다. 정말 아프고, 너무나 괴롭고, 견디기 어려울 만큼 힘듭니다.

 

그때 수행자가 그 고비를 넘어가지 못하면 수행에서 몹시 어려워집니다. 그 고비를 잘 넘겨야 합니다. 그 고비를 못 넘기는 사람은 그 고비가 무섭고 두려워서 다음에 수행하면 진땀부터 납니다. 그 힘든 고비를 넘어서고 나면 ‘아, 너무도 행복하다.’ 하면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깨달은 줄로 착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힘든 것을 넘어가서 행복한 것이지 자신이 깨달은 법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이 없어지니까 행복한 것이지요. 처음에 아프다고 울다가 이번에는 너무나 행복하다면서 웁니다. 특히 여자들이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경향이 있지만 남자들도 눈물이 나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빛 같은 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몸이 날아갈 듯 가볍고 사띠가 아주 좋아집니다. 그때부터 놓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는 경지라서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어린 아기가 자기 아버지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학교로 따지면 지금 막 유치원 어린이정도랄까, 아직 초등학교도 안 간 상태입니다. 그 정도 단계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사실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수행에 어려움이 사라지고 흔들림도 없어집니다.

그 세 번째 고비를 넘으면 한 시간 앉아도 괜찮고, 두 시간 앉아도 괜찮고 별로 몸에 대한 고통이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앉아서 집중만 되면 이 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마타건 위빳사나건 그 세 번째 단계는 공통입니다.

 

화두 수행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화두수행 중에도 어떤 때는 너무 힘들다가 그것만 넘어가면 너무 행복해서 울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이 아닙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은 세 번째 단계에서 네 번째로 갈 때에 계속 물질과 정신을 끊임없이 관찰하기 때문에 무상·고·무아를 반복적으로 보게 됩니다. 사마타로 가는 사람은 지도자가 없으면 거기서 멈추게 됩니다. 백 명 중에 백 명이 멈춰 버리고 죽을 때까지 그 행복했던 상태를 그리워하면서 살게 됩니다. ‘아, 그때 좋았었는데. 아, 그때 내가 대단했었는데…….’ 하면서 현재 자신의 수행이 제자리에 멈춰 있다고 걱정하고, 지난날의 수행에 대해 스스로 백 점 만점의 점수를 주면서 그때를 그리워합니다. 거기서 멈춘 사람은 어떻게 하면 예전처럼 될까를 고민하며 제대로 수행을 하지 못하니 더 이상 수행의 진도가 나아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사마타건 위빳사나이건 그 고비를 잘 넘어가야 합니다.
 
세 번째 지혜의 특징은 고찰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고찰은 생각으로 살피는 것과 비슷합니다. 지혜가 있긴 있지만 꿰뚫어 보는 지혜와 생각하는 지혜가 섞여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무상·고·무아로 봅니다. ‘내가 진짜 무상하네, 영원하지 않네, 계속 변화하네…….’ 이런 생각이 계속 됩니다. 숙지하는 마음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가다 보면 고통이 올라옵니다. 그 고통을 다시 열심히 관찰하게 되면 수행이 좋아져서 4단계로 올라갑니다.




“단계 높아질수록 변화 속도 빨라져”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10-6
“수행의 단계에서 오는 현상 왜곡 않고 바르게 관찰해야 성숙한 단계로”


‘우다얍바야 냐나’라고 하는 4단계에서는 몸이 아프지 않은 상태에서 사띠가 아주 좋아 놓치는 것이 별로 없어지고, 갈수록 관찰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뭐든지 생기면 바로 사라지고, 생기면 바로 사라져서 생멸밖에 없게 됩니다. 4단계에서도 심리 변화가 많이 있습니다. 4단계로 가면 욕심이 많이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욕심 부리는 마음이 잘 안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여겨져 무엇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거의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도 많이 줄어들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만 가도 스스로가 깨달았다고 착각할 만큼 달라지지만 지혜가 있는 순간만 그러할 뿐 그 지혜가 없어지면 다시 아래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그 지혜를 유지만 시킬 수 있으면 세 번째 단계로도 사람이 아주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를 유지시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진정한 위빳사나 지혜는 네 번째 단계부터입니다.

 

그래서 네 번째 단계에 도달했으면 본인이 이번 생에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건강하고, 신심이 있고, 노력하고, 정직하며, 이 네 번째 지혜인 ‘우다얍바야 냐나’가 있으면 그 사람은 바로 이번 생에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건강해야 되고, 신심이 좋아야 되고, 노력도 해야 되고, 또 정직해야 하고, 이 네 번째 지혜까지 일어나고 있으면 바로 이번 생에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필요 없다고 부처님께서 단언하시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몸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온몸의 느낌이 어디에서나 똑같아서 머리, 코, 목, 배 등 어디에서 보든지, 조금 더 미세한 뭔가가 몸이라고 할 수 없는, 마음속으로 알고는 있는데 분명하지는 않은 뭔가가 있고, 그것도 계속 빠르게 일어나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런 때는 수행 중에 갑자기 허전한 느낌이 들 수가 있습니다. 처음엔 물질 쪽으로 많이 보고 있는데 그 물질들이 다 없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자신의 수행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지혜의 단계에서 네 번째 지혜로 넘어갈 때 수행자들이 많은 어려움을 느낍니다. 처음엔 이 세 번째 지혜 때 대상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그 대상들을 따라 관찰하느라 매우 바쁩니다. 그래서 1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릅니다.


또 아플 때도 아프면서 집중이 되고 있기 때문에 대상이 아주 또렷합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지혜를 넘어서면 갑자기 몸 전체가 대상을 관찰하는 것같이 느껴지면서 수행이 어렵게 여겨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갑자기 수행할 줄 모르는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가 너무 답답하고 또 그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수행이 깨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수행 단계가 무너지면 다시 1단계에서 시작합니다. 호흡을 봤다가, 배를 봤다가, 물질 정신을 구별하는 단계로 다시 내려왔다가 하면서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과정을 많이 합니다. 세 번째 지혜에서 밑의 단계로 떨어지면 몸이 다시 느껴지고, 아주 분명히 앉아 있을 때 앉아서 눈을 뜨면서 보는 것같이 몸이 다 느껴지는 단계로 다시 돌아가는데 처음보다 속도는 빨라집니다. 그런 상태에서 조금만 있으면 집중되어 방금 전의 그 자리로 다시 옵니다. 그렇게 1단계, 2단계, 3단계를 아주 빠르게 내려갔다 올라갔다 잘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3단계의 초기 단계가 되면 원래 보고 있던 물질이 아주 미세해지면서 물질의 느낌보다는 정신 쪽의 느낌이 강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마음이 그런 마음 상태를 관찰할 줄 모르기 때문에 자꾸 망상을 부립니다. 생각이 자꾸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아, 내가 열심히 하는데 수행이 안 된다. 처음보다도 안 된다.’ 그렇게 착각합니다. 마음이 너무 빨리 변화하며 들락거리고 그것을 빨리 따라잡지 못하면서 집중도 안 된다고 느낍니다.

 

처음 3단계에서 아플 때는 한 시간 정도가 그대로 집중이 됩니다. 아프니까 대상이 분명합니다. 그러다가 차츰 아픔이 없어지면 대상이 희미하게 느껴지면서 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지고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이 완전히 망가진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 대상이 전혀 다르게 바뀌기 때문에 수행자가 새로운 대상을 못 잡고 있어서 그럴 뿐입니다. 그럴 때가 바로 수행지도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 단계입니다. 그때에 편안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미세해지고 묘해지는 대상을 놓치지 않고 차분하게 따라가면서 관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주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수행자가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서 관찰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 네 번째의 지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지혜가 되면 대상이 미세하기 때문에 그 집중은 원래 있었던 집중보다 엄청나게 깊은 집중입니다. 그렇게 해서 네 번째 집중이 네 번째 단계에 있는 대상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가 오게 됩니다. 사실 세 번째 지혜의 끝부분부터 큰 변화가 일어나는데, 엄청나게 눈이 부실 정도로 빛이 나올 때도 있고, 어느 때는 그 빛이 워낙 강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굴 피부 색깔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합니다. 강력한 희열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도 합니다. 희열에는 강도의 차이에 따라 다섯 가지 정도로 나뉘는데 처음에 생기는 희열은 등이 서늘하거나 추운 것 같은 느낌이 들다가 조금 세지면 파장이 몸으로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 오고, 어느 때는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전류가 관통하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손발이 날아가는 것처럼 갑자기 움직여지기도 하고 몸통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런 것이 다 희열인데 네 번째 지혜에서 생기는 희열은 엄청나게 묘합니다. 예를 들자면 기름 한 방울을 솜에 떨어뜨리면 그 기름은 한 방울 정도의 적은 양인데도 차츰차츰 솜으로 다 번져나갑니다. 그런 것같이 희열이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까지 퍼져나가는 느낌이 듭니다. 온몸이 편안해져서 안 좋은 데가 없을 정도이고 불편한 데가 없습니다. 지·수·화·풍의 느낌에 치우침이 없이 아주 원활하고 조화롭게 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 느낄 정도로 몸이 부드러워지고 온몸에 엄청난 희열이 퍼져나갑니다. 그러면서 온몸이 고요해지고 평온해집니다. 그럴 때는 쉽게 땀이 나지 않습니다. 그 지혜에 들어가면 편안하고 에어컨을 쐬는 것같이 시원하고 상쾌합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몸에서 땀이 많이 나고 냄새도 아주 심합니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볼 때도 냄새가 몹시 많이 납니다. 그런데 그 단계를 넘어가면 4단계부터는 몸이 매우 좋아지기 때문에 그런 독한 냄새들이 없어지고 땀도 많이 안 납니다. 똑같은 온도에서 수행할 때 네 번째 지혜가 안 오는 사람은 많이 지치지만 그 지혜가 일어나는 사람은 지치지 않고 이렇게 몸 상태도 두드러지게 좋아집니다. 그때는 사띠도 엄청나게 좋아져서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기억들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어느 때는 현재에서 시작하여 거꾸로 과거를 죽 기억하면서 특별히 생각하지도 않는데 40살에서 39살 때, 38살 때, 37살 때……, 이런 식으로 과거로 죽 돌아가서 네 살, 세 살 때까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4단계 지혜에 오래 머무르면서 계속 수행하면 그 단계의 지혜가 점점 뚜렷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이 단계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다시 더 성숙한 단계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4단계 지혜가 뚜렷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방금 전에 말한 것처럼 사띠가 매우 좋아지면서 빛이 보이고 몸의 느낌이 매우 좋아지면서 그런 것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기쁨과 행복의 느낌이 엄청나게 강렬하기 때문에 그런 착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지혜의 청정함이 생기지 않으면 이 상태에서 멈추면서 자만이 강해지고 점차로 수행이 망가집니다. 그렇게 망가지면 무너져 내려 다시 1단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1단계에서 4단계로 올라가는 속도는 처음보다 매우 빠를 수 있지만 그렇게 계속 왔다 갔다 하기만 하면 진정한 위빳사나 지혜가 쌓이지 않습니다. 
 
이 네 번째 지혜 단계에서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은 빛이 보이면 그 빛을 관찰해 보거나, 그 빛에 이런 저런 생각이 들면 그 생각을 관찰해 보기도 하고, 궁금한 것이 일어나면 그 궁금한 것을 관찰하기도 합니다. 또 온몸에 퍼져 있는 희열이 있으면 그 희열을 관찰합니다. 성숙한 단계로 못 가는 사람은 그 희열이 오면 ‘아, 되게 좋다.’ 하고 거기서 욕심을 부리고, 그 상태에서 깨달았다고 착각하며 자만을 부립니다. 또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 집중이 떨어져서 수행이 잘못되면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게 됩니다. 수행의 단계에서 오는 현상을 왜곡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바르게 관찰하는 사람은 성숙한 단계로 올라가게 됩니다. 4단계 초기에서 계속 수행하여 성숙한 단계로 가게 되어 진정으로 생멸을 보는 것이 ‘우다얍바야 냐나’로, 그때부터가 진정한 위빳사나 지혜의 시작입니다.

 

그 4단계를 오래 보면 계속 일어남 사라짐의 속도가 점차 빨라집니다. 사람의 힘에 따라 속도는 똑같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무상을 1초에 한 번 알다가 두 번 알다가……, 하는 식으로 변화가 오고 그 정도도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삼법인을 아는 정도가 매우 빨라지면 행고, 즉 ‘상카라둑카’라는 것이 무섭다고 느끼게 되고, 매 순간 내가 죽임을 당하는 느낌이 옵니다. 죽음이 와서 편안하게 한 번 죽는 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그렇지가 않아 태어나고 죽고, 또 태어나고 또 죽는 느낌이 드니 너무 괴로운 것, 그것이 고입니다. 거기서 무아를 아는 것이지요.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완전히 원인에 따른 결과일 뿐 원인이 내가 아니고 결과도 내가 아니고 원인에도 손을 쓸 수 없고 결과에도 어찌해 볼 수 없이 있는 것을 오직 바라보기만 할 뿐입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걸 알고 있는 것 자체가 무척 무섭고 두렵고, 그 변화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니까 다음에는 생기는 것을 보기보다는 사라지는 것을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차가 빨리 지나가면 앞 번호는 안 보이고 뒷번호만 겨우 조금 볼 수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 상태에서 계속 집중하여 관찰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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