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UDDHISM/11일간의 특별한 수업

위빳사나강의: 11일간의 특별한 수업(8회)

“칠각지, 깨달음의 요소”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8-1
“육문을 조심하고, 몸·입·마음 단속하고 사념처를 수행하는 것”


8.칠각지와 위빳사나

 

 오늘은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 즉 칠각지(七覺支)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 때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부처님, 깨닫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깨닫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요소 일곱 가지(칠각지)를 수행해야 하고, 그 칠각지를 위해 사념처 수행을 해야 한다.”

 

부처님이 그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념처 수행을 잘 하려면 육문(六門)을 잘 챙겨야 하고, 육문을 잘 챙기기 위해서는 세 가지 좋은 습을 키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 가지 좋은 습이란 몸으로 하는 좋은 습 세 가지, 입으로 하는 좋은 습 네 가지, 마음으로 하는 좋은 습 세 가지를 말합니다. 몸으로 하는 좋은 습 세 가지는 살생을 피하는 것, 도둑질을 피하는 것, 삿된 음행을 피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하는 좋은 습 네 가지는 거짓말을 피하고, 이간질을 피하고, 욕설을 피하고, 쓸데없는 말을 피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또 마음으로 하는 좋은 습 세 가지는 탐욕의 마음을 버리고, 성냄의 마음을 버리고, 사견을 피하는 것입니다.

 

육문을 잘 챙긴다는 것은 눈·귀·코·혀·몸·마음을 항상 챙겨야 한다는 의미인데 예를 들어 대상을 보면서 욕심 부리지 않고, 성내지 않도록 하는 것, 소리 들을 때 그것을 좋아하여 욕심 부리고 싫어하여 성내는 마음을 피하는 것 등등입니다. 눈이 잘 보여도 맹인처럼 행동하고, 귀가 잘 들려도 귀머거리처럼 행동하라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귀를 막고 살 수는 없지만 들을 때 항상 마음을 챙기면서 조심스럽게 듣고, 이와 같이 형상·냄새·맛·몸의 감촉·마음 등을 잘 챙겨야 사념처 수행이 잘 되어 몸·느낌·마음·법을 바르게 관찰하게 되고, 그렇게 하면 올바른 칠각지 수행이 되고, 결국에는 깨달음을 이루게 됩니다. 즉 육문을 조심하고, 몸으로 나쁜 짓 안 하고, 입으로 나쁜 말 안 하고, 마음으로 나쁜 생각 안 하면서 사념처를 실천 수행하는 것 자체가 칠각지를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칠각지는 깨달음의 요소를 말하는 것으로 그 깨달음의 정도가 100% 완전해졌을 때 마침내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로 말하면 위빳사나 지혜의 상태가 1도, 2도, 3도, 4도에서 99도까지가 위빳사나의 상태이고 거기에 1도를 마저 채워 100도가 되면 깨달은 것이 됩니다. 이렇게 깨달음으로 가는 데에 필요한 일곱 가지 요소를 칠각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칠각지라는 것이 그냥 쉽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반복해서 많이 닦고 닦아야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칠각지가 계속 반복해서 많이 쌓아가야 되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칠각지를 자세히 풀이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깨달음의 요소 일곱 가지 중 맨 처음에 나오는 것이 사띠입니다. 이것은 매 순간 사념처를 잊지 않고 주의 깊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법을 고찰하는 것, 법을 살펴 숙지하는 것으로 이것은 법을 깊이 살펴 안다는 것이니 곧 지혜를 가리킵니다. 지혜에는 ‘확실하게 앎.’이라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수행자들이 호흡을 관찰하면서 지대, 화대, 풍대를 본다면 그것이 지대, 화대, 풍대를 제대로 아는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나는 마음, 즉 마음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데 그 대상을 싫어하고 미워하면서 마음을 망가뜨리려고 하고 있고, 마음이 망가지고 있는 것을 안다면 화나는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화의 특징을 아는 것도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칠각지에서 법을 아는 지혜란 부처님의 가르침인 사성제, 진리 등의 의미라기보다는 물질과 정신, 오온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를 아는 지혜를 뜻합니다.

 

칠각지 세 번째 요소는 위리야(노력)이고 


네 번째는 삐띠(희열, 기쁨)입니다. 삐띠를 영어로는 ‘like’로 번역합니다. 이때의 ‘좋아하다’는 욕심으로 좋아하여 좇아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욕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대상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집착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만약 어떤 사람을 욕심으로 좋아하면 마음이 그 대상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집에 있어도 그 사람이 생각나고, 어디를 가든 그 사람 생각이 계속 떠나지 않는 식으로 마음에 그 대상을 풀로 붙여 놓은 것처럼 끈적거리는 느낌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삐띠는 욕심이 아닙니다. 희열, 기쁨은 순간순간 대상에 대하여 가지는 좋은 느낌으로 집착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단지 그것을 순수하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칠각지의 다섯 번째 요소는 고요함입니다. 이것은 ‘시원하게 조용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을 틀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시원하면서 고요해지는 그런 느낌입니다.

 

칠각지의 여섯 번째는 집중이고 마지막 일곱 번째가 우뻭카(평정)입니다. 우뻭카가 그냥 대상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고 중립적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계속>



“수행, 기쁘게 하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8-2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라, 고요해져야 집중이 가능한 것이니”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왜 사띠를 맨 앞에 두고 가르치셨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띠를 제외한 여섯 가지 요소는 다시 세 가지씩 둘로 나뉘어서 그 둘이 서로 짝을 이룹니다. 그리고 그 두 갈래의 세 가지 요소들이 완벽하게 서로 균형을 이루어야 수행이 제대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해야 합니다.

 

그에 반해 사띠는 아무리 많아도 넘치는 것이 없고 사띠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만큼 사띠가 중요하기 때문에 칠각지의 맨 앞에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 도중에 항상 사띠가 끊어지지 않도록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사띠가 있어야 나머지 여섯 가지 요소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여섯 가지 요소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사띠입니다. 사띠가 없는 것은 어떤 옷을 입을 때 끈 하나를 풀어 버리면 옷이 지탱되지 않고 그대로 흘러내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나사 하나를 빼버리면 모든 부속품들이 흩어져 버려 못 쓰게 되는 기계에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사띠는 수행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사띠가 없으면 수행자가 자신의 노력 정도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쓸데없이 애만 많이 쓰고 있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게으름에 빠져 졸고 있어도 그것 또한 기억하지 못합니다. 수행 중에 사실을 아는 것은 지혜가 하는 일이지만 수행 대상을 기억하는 것, 자신의 현재 수행 상태를 기억하는 것은 사띠가 하는 일입니다.

 

수행 중에 노력이 지나친데도 계속 밀고 나가다가 결국은 머릿속이 멍해지고 가슴이 탁탁 막히면서 답답해지고, 배꼽 주위에 힘이 꽉 주어지면서 숨이 차오른다면 사띠가 없어서 노력이 넘친 상태입니다.

사띠는 관찰의 대상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마음을 붕 뜨지 않게 해주는 것으로 집중과는 다릅니다.

집중은 마음을 가만히 단단하게 대상에 놓아두는 것이고, 사띠는 마음이 대상을 떠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과 대상이 딱 붙어 있게 하는 것이 사띠가 하는 일이고, 마음이 대상에 붙어 있는 상태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은 집중입니다. 아주 미묘합니다. 사띠가 없으면 대상과 마음이 잘 계합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호흡을 관찰 대상으로 했을 때 사띠가 없으면 마음이 호흡을 알긴 알지만 그것을 아는 마음과 호흡이 딱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호흡의 사실을 정확하고 깊게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대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 사띠가 하는 일입니다. 강한 사띠가 있어서 마음속에서 대상이 분명해질 때 그 대상에 있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묶어 하나로 계합하는 것이 사마디, 집중입니다. 사띠와 사마디는 연결이 되어 있지만 하는 일이 서로 다릅니다. 사마디는 마음을 가만히 단단하게 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띠와 사마디가 있어야 지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호흡이 수행 대상이라면 호흡 속이나 배의 움직임에 대한 사실, 경행이라면 걸어가면서 오른발 걸음 왼발 걸음을 알고, 그 걸음 속에 있는 물질의 특성과 정신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법을 고찰하고 숙지하는 것, 즉 담마위짜야입니다.


그 다음인 위리야, 즉 노력도 지혜와 관련됩니다. 칠각지에 신심은 포함되지 않지만 신심이 있어야 노력이 이루어지는데 신심은 지혜가 없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지혜가 있어야 신심이 생긴다고 말하는 이유는 알지 못하는 것에 믿음이 생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믿을 수 있고,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지혜가 있어야 노력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수행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있어야 수행을 할 수가 있고, 수행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면 수행을 하고 싶은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수행에 대해 아는 것이 담마위짜야이고, 수행 도중에 알게 되는 것도 담마위짜야입니다.

 

수행 중에 일어나는 지혜가 다시 신심과 노력을 일으키는 힘이 됩니다. 노력이 있어야 사띠가 좋아지고, 노력이 있어야 지혜도 좋아집니다. 그만큼 수행에서 노력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노력을 힘차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삐띠, 희열입니다. 그래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수행을 기쁘게 하라는 것입니다. 수행을 소중히 여기면서 기쁘게 하면 노력이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몸의 세포들, 혹은 바이러스하고 비슷해서 하나가 있어야 둘이 되고, 둘이 있어야 넷으로 늘어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니 지금 만약 삐띠가 없다면 억지로라도 삐띠를 일으켜야 그것을 바탕으로 더 큰 삐띠가 생기고, 그래야 그것이 차츰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일단 하나가 생기면 확산되어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노력도 이와 같아서 앞의 노력이 있어야 그 다음 노력이 올 수가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노력이 점점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수행에도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기쁘게 수행을 시작하고 수행할 때마다 기쁘게, 기쁘게 하십시오. 기쁘게 해야 노력이 좋아집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작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호흡 관찰을 예로 들자면, 숨을 들이쉬는 것에 사띠를 가지면서 노력하여 들숨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순간 ‘잘 되는구나.’ 할 때 기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기쁜 마음이 다음의 호흡을 관찰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하나 다음에 하나, 그런 노력으로 마음의 힘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냥 멍하게 있을 때와는 달리 사띠를 가지면서 노력해서 마음을 대상에 딱 올려놓으니까 그 순간 마음이 깨어나는 특별한 느낌, 거기에 수행의 맛,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좋아하게 되어 있는 것처럼 좋은 마음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을 하지 않을 때와 수행할 때의 마음 수준은 확실히 다릅니다. 대상 하나에서 제대로 노력해서 알아차리는 순간 그 마음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그것에 대하여 생기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 기쁨 하나가 생기면 그 다음에 다시 생기는 것은 쉬워집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있으면 다시 노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쁨과 노력도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이 고요함으로 이 고요함은 삐띠가 있어야 생깁니다. 우리가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없으면 고요할 수가 없지요. 화가 나고 열도 나고 속도 타고 몸도 안 좋아지고 마음도 안 좋아지면 고요함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안 좋고 불편하고 수행이 바라는 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있으면 욕심이나 들뜸이 생기면서 고요함이 오지 않습니다. 수행 도중에 안 좋은 생각이나 욕심 즉 ‘이것 하고 싶다, 먹고 싶다, 자고 싶다.’ 이런 생각들이 있으면 고요함이 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요함은 그런 욕구가 사라지고 삐띠, 기쁨이 있을 때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고요함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기뻐야 되고, 기쁘면 만족감도 올라갑니다. 그 만족감이 올라와야 고요함이 생깁니다. 

 

이와 같이 고요함도 깨달음의 요소인데 고요함이 있어야 집중이 옵니다. 고요하지 않은 마음은 항상 흔들려서 불안정합니다. 불안정하고 고요함이 없을 때 수행자들이 많이 막힙니다. 고요함이 집중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는 것과 내가 강제로 힘을 주어서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억지로 집중하려고 지나치게 애를 쓰면 답답하고, 머리가 어지러워집니다. 집중은 강제로 되는 일이 아니고, 고요함에 뒤따라 자연스럽게 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뭔가 걱정거리가 있으면 마음이 들뜨게 되어 있습니다. 걱정 근심은 들뜨는 마음이고 너무 노력을 강제로 할 때는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렇게 힘이 드는 마음으로 집중을 유지하려고 하다 보니 가슴이 답답하고 아프거나 가슴이 조이는 느낌이 일어나고 다음에는 인위적으로 숨을 멈추기도 합니다.

 

숨을 쉬면 마음이 흔들리는 걸 본인이 알기 때문인데 그것은 집중에 대한 욕심입니다. 수행하면서 집중이 잘 되었던 때를 계속 그리워하면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욕심 때문에 앉기만 하면 그 상태로 가려고 밀어붙이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상기가 되거나 숨이 차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배꼽 주변이 꽉 조이는 등의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고, 몸의 기운이 순환이 잘 안 되면서 통증이 엄청나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수행자는 그런 현상을 일어나는 즉시 깨닫지 못하고 한참 진행된 이후에야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사띠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중에 대하여 욕심 부리는 마음은 가슴에 깊이 박힌 돌멩이와 같아서 잘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밤에 잘 때도 안 좋은 꿈을 많이 꿉니다. 자신은 미처 모르고 있기가 쉽지만 그것은 화나는 마음입니다. 나를 압박하면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생기는 현상입니다.

 

고요해야 집중이 온다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이론입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 지도하는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이완되어야 고요함이 오고, 고요함이 있어야 집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급하기 때문에 고요함이 없는데도 집중에 자꾸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면 수행은 갈수록 힘들어집니다. 자동차도 엔진을 시원하고 고요하게 하는 쿨링 시스템이 있습니다. 수행은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은 마음으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건으로 뭔가를 만들거나 하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하는 일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수행을 하면 이상하게 배가 고픈 것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렇다 보니 자꾸 배가 고픕니다. 그런데 수행이 잘 되어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으면 그 에너지가 절약됩니다. 그래서 수행이 아주 잘 되면 그 다음부터는 조금만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게 됩니다. 쿨링시스템이 좋아져서 엔진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으니 엔진 과열이 되지 않고 차가 잘 굴러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계속>




집중에 욕심 부리지 말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8-3
“수행이 안 된다고 자존심 상하는 건 자만심으로 수행하기 때문”

 

고요함 뒤에 집중, 사마디가 되고 그 다음에 우뻭카가 됩니다. 사마디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뻭카 상태로 되어간다는 것을 선정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초선정, 2선정, 3선정까지는 희열, 행복, 4선정은 행복과 집중, 5선정으로 가면 중간 느낌과 집중으로 바뀝니다. 초선정부터 4선정까지 있던 희열이나 행복은 사라지고 5선정에서는 우뻭카, 평정의 느낌, 즉 차분해지면서 중간 느낌과 집중만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사마디가 있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입니다. 차분한 마음이 더 차분해지는 것의 원인이 됩니다. 즉 사마디가 있어야 사마디가 있다는 말이지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이 말이 사실입니다. 사마디가 없으면 사마디가 없고, 앞에 사마디가 있어야 뒤에 사마디가 따라온다, 그런 의미입니다.

 

집중도 마찬가지여서 집중되는 마음을 다시 관찰하면 더 깊은 집중이 옵니다. 그러므로 집중을 키우는 법은 바로 집중되고 있는 그 집중의 마음 상태를 다시 관찰하는 것입니다. 집중이 빨리 안 오는 이유는 집중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처음에 앉을 때는 마음이 딴 생각들을 많이 하지만 조금 있으면 조용해집니다. 그 조용한 마음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점점 더 조용해지게 됩니다.


생각이 많으면 마음이 시끄럽습니다. 마음속에 생각이 많으면 그 생각이 머리로 가고 그것들이 머리에서 감정을 일으킵니다. 생각이 많을수록 감정이 복잡해지고, 감정이 복잡해지면 고요함이 다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집중을 관찰할 때는 머리로 보지 말고 가슴으로 보아야 합니다.

 

수행하면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10분에 한 번 정도씩 관찰하는 마음을 다시 관찰하라고 하지요. “보는 마음을 또 보세요.” 하는 말이 그 말인데, 보고 있는 마음을 다시 보면 고요함이 느껴집니다. 그 차분하게 가라앉은 마음을 볼 줄 알면 그 가라앉음이 집중입니다. 그 집중을 보면 다시 더 집중이 됩니다. 수행하다 10분에 한 번 정도씩 다시 ‘지금 수행하고 있는 몸과 마음을 파악하는 것’은 수행의 기술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수행을 체크하여 수행하고 있는 현재의 마음과 몸이 불편한지 편안한지, 좋은지 안 좋은지를 보면서 수행의 상태를 바로잡는 것도 수행입니다. 조금 집중되는 상태를 바로잡아 주게 되면 더 집중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수행 중에 가라앉은 마음이 있으면 가라앉는 마음을 아는 것도 수행입니다. 수행자들이 호흡 관찰을 한다면서 무조건 호흡만 잡고 있는 것도 욕심일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수시로 자신의 수행 상태와 수행하고 있는 마음 상태를 점검하십시오.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수행하면서 자꾸 사띠를 놓치고 집중이 잘 안 되면 그것 자체를 차분하게 관찰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합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계속 궁리를 하고,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에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자만심으로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럴수록 마음의 균형이 깨져 버려 더더욱 수행이 망가지는 위험을 초래합니다.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마음을 체크하면서 지금 내 수행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위빳사나 수행 방법을 보면 ‘바라는 마음도 없고 원하는 마음도 없고, 조급한 마음도 없고 걱정하는 마음도 없고,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고 성급한 마음도 없고, 단지 현재의 현상에 마음만 있도록 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수행 중 자신의 수행 상태와 마음을 점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무언가를 바라면서 수행하고 있다면 잘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수행은 단지 현재에 있는 것을 관찰해야 하는데, 현재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뭔가를 계속 바라면서 합니다. 그것은 이미 마음이 현재의 대상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수행이 잘 되질 않겠지요. 원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데 원하는 마음이 아주 많습니다. 수행 중에 이거 원하고 저거 원하니 이미 수행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마음은 또 얼마나 조급한지! 그러므로 수행 중에 수시로 그 마음을 스스로 점검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찬찬히 마음을 살펴보면 어떤 때는 걱정하고 있고, 또 어떤 때는 두려워하거나 조급해 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함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것들을 모두 놓아버려야 고요함이 오고 집중이 됩니다.

 

수행이 잘 안 되는 것은 집중이 문제가 아니고, 집중에 대한 욕심이 문제입니다. 수행에서 집중은 필수입니다. 당연히 집중이 필요한데 문제는 집중에 계속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수행자가 ‘아, 내가 집중에 욕심을 부리고 있구나.’라고 알면 문제가 아닌데 대부분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계속 거기에 빠져 있습니다. 수행은 지금 이 순간을 오직 관찰만 해야 하는데 관찰은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집중이 될까?’ 하고 계속 머리만 쓰고 있으니 머리에 열이 나서 뜨거워집니다. 사마디가 있어야 편안해지면서 우뻭카가 오고, 그러면 욕심에도 쉽게 빠지지 않게 됩니다. 또 쉽게 성도 내지 않게 되어 마음이 단단해지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이 되어 계속 그 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들이 칠각지의 의미입니다. <계속>




“사띠로 수행의 균형을 이루라”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8-4
“초보자는 집중에서 멈춰 깨지고, 경험자는 욕심 때문에 발전 못해”

 

칠각지에서 사띠를 빼면 여섯 가지가 남습니다. 그것을 다시 세 가지씩 묶어 둘로 나누면 한 쪽이 노력 그룹이고 다른 한 쪽이 집중 그룹으로 짝을 이룹니다. 담마위짜야(지혜), 위리아(노력), 삐띠(희열, 기쁨)가 노력 쪽이고, 빳삿디(고요함), 사마디(집중), 우뻭카(평정)가 집중 쪽입니다. 
 
수행이 잘 되려면 그 요소들이 균형을 유지해야 하고 두 그룹도 서로 정확히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사띠는 균형을 이룰 필요 없이 무조건 많아야 하고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세 가지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것도 사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띠가 없으면 깨달음의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 균형이 깨졌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수행이 완전히 망가지고 나서야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혜가 많아지면 노력도 좋아지는데 노력이 지나치면 집중이 약해집니다. 지혜는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하지만, 아는 것을 머리로 숙지하면서 계속 돌아보는 것도 지혜에 속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머리로 생각하는 지혜가 지나치면 수행에 방해가 됩니다. 예를 들어. ‘아,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저렇게 해야 하는 거야.’ 또는 ‘아, 법문할 때 그렇게 들었으니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이렇게 하는 게 맞지, 아냐, 저렇게 해야 맞는 거야…….’ 이러다 보면 고요함이 깨지면서 집중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머리로 많이 그리는 지혜는 욕심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신심 때문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신심과 욕심은 아주 가깝습니다. 수행이 잘 되면 신심이 좋아지는데 신심이 좋아지면 머리로 여러 가지 상태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 봐야지, 내가 포교해야지, 내가 절을 지어서 사람을 어떻게 수행시켜야지…….’ 이렇게 계속 앉아서 머리를 씁니다. 그러면 수행은 망가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심으로 시작했던 것이지만 그 신심이 생각을 일으키면 그 때부터는 신심이 아니라 욕심입니다. 올바른 신심은 단순하게 불·법·승을 좋아하고 믿으면서 그 힘으로 수행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지혜로도 생각이 많아지고, 신심으로도 생각이 많아지지만 그 둘의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지혜로 생각이 많아지면 신심이 떨어지고, 신심으로 생각이 많아지면 지혜가 떨어집니다. 아주 미묘한 관계입니다. 내가 신심이 일어나면서 생각이 점점 많아지면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면서 마음이 들뜨게 됩니다. 그래서 지혜가 떨어지고 잠에 빠지는 쪽으로 바뀝니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후회만 남습니다. 신심으로 시작한 것이 후회로 끝나 버리는 경우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계속 지혜가 일어나면서 끊임없이 따지고 분석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가 다 아는 것 같아서 수행의 필요성도 못 느끼게 되니, 수행은 조금만 하고 내내 생각만 하고 있으면서 점점 자신이 모든 걸 다 깨달은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것은 제대로 아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지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신심조차 망가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특히 머리 좋은 사람이 많이 조심해야 하는데, 머리 좋은 사람은 수행을 조금 해도 이해하는 것은 많을 수 있습니다. 실천력은 조금 있는데 이해력이 많아서 그 이해력으로 자신이 다 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 그냥 일주일 만에 수다원 되더라. 나한테 와.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 줄 테니까.” 하고 다니는데 이런 사람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머리가 비상하게 좋고 말을 잘 하는 데다가 경전까지 알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더 무섭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없는 것이 신심입니다. 신심이 떨어지면 지혜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기 중에도 대단한 사기이지요. 본인이 직접 수행을 해야 깨닫는 것이지 수행을 과외 수업시켜 남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깨달음이 일주일에도 될 수 있고, 한 시간 안에도 될 수 있지만 실천수행이 없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에는 각 요소들이 항상 균형을 이루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사띠입니다. 수행 중에 신심이 오면 그러함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이 잘 되니 신심이 좋아지고 불·법·승에 대한 믿음이 강해지는 것은 좋은데 이것이 균형을 잃으면서 갑자기 ‘아, 아버지 어머니는 이 좋은 것을 모르고 가셨구나.’ 하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아, 우리 동생도 수행시켜야지, 남편도 알면 좋을 텐데, 내 아들딸도 수행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이 계속 그렇게 흘러가고 있으면 그 마음을 빨리 관찰해야 합니다. 신심이 지나치면 그 다음은 욕심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욕심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으면 그 다음은 성냄으로 치솟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애들에게 수행하라고 하는데 왜 안 하나? 왜 이렇게 말귀가 어두워?’ 그렇게 되면 갑갑해지면서 수행이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신심이 넘쳐도 안 되고 지혜가 넘쳐도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심이 넘치면서 진정한 지혜가 없다 보니 지금 내가 제대로 하는 건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가족들과 갈등이 일어납니다. “아이고, 말만 하면 수행, 수행 하면서 하는 짓을 보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또 지혜만 높아져도 문제이니 이런 사람은 실천과 수행이 나란히 병행해야 되는데 실천은 조금만 하고 생각은 아주 많이 합니다. 법문을 듣고 책을 읽어 아는 게 많다 보니 ‘수행하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하고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상상은 상상일 뿐, 그 상상이 이론적으로 틀리지 않더라도 자신의 심리에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는 거구나. 아, 경전에서 말하는 이것이 실천하면 이렇게 되겠구나.’ 하고 이해는 하지만 자신의 심리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이것이 수행으로 체험한 사람과의 큰 차이점입니다. 실제로 체험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심리에 변화가 옵니다. 그래야 사람이 성장합니다.

 

그런데 수행은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사람은 지식과 지혜가 좋아서 말 잘하고 강의도 잘하지만, 인간적인 성장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제일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염시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조심해야 하고, 자신의 수행 중에 그런 상태가 오는 것도 놓치지 않고 알아차려 경계해야 합니다.
 
다시 간단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지혜와 노력, 희열이 한 편이고, 고요함과 집중, 평정이 다른 한 편입니다. 지혜가 커지면 노력도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지혜가 수행에 의한 올바른 지혜가 아니라 계속 머리로 하는 이해에 의한 지혜일 경우에는 노력하는 만큼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만큼 집중이 안 온다면 틀림없이 머리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조심해야 합니다. 실천하는 것보다 머리를 많이 쓰고 있으면 집중이 안 오고, 제대로 수행하여 노력하고 있다면 집중이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수행이 잘 되고 있으면 차츰 몸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만약 계속 몸과 마음이 불편하다면 자신의 수행 상태나 마음 상태를 점검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집중이 안 온다면 알게 모르게 신심이 넘치거나, 지혜가 넘치거나, 노력이 넘치는 등의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에는 삐띠가 수행을 도와줄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삐띠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나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좋은 사람은 지혜로 생각하면서 바르게 이해해도 삐띠가 올 수 있고 틀리게 이해해도 삐띠가 올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자만심과 함께 하는 삐띠도 있으니 삐띠를 100%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욕심의 삐띠도 있어서 좋아하며 먹을 때도 삐띠가 있고 영화 볼 때, 노래 부를 때, 남자 여자가 좋아할 때도 삐띠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삐띠가 있다고 하여 그것을 다 좋다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자만과 욕심으로 되는 삐띠도 있어서 ‘내가 잘한다, 내가 잘한다.’ 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만으로 떨어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실로 수행이 잘 된다면 자만은 줄어들게 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삐띠로 열심히 노력하면 그 노력이 집중으로 가는 노력이 아니고 많이 생각하는 노력입니다. 그러면 욕심을 부리는 쪽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에도 희열이 조금 있을 수는 있지만 이것은 욕심과 관계 있는 희열입니다.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타고난 체질 자체가 욕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거나, 수행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어서 수행과 관련된 생각이 많지 않은 사람으로, 그런 경우에는 빨리 집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집중이 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집중이 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아주 고요하고 평온하다가 조금 있으면 잠에 빠져 버립니다. 집중이 되면 대상이 미세해지는데 마음이 이 미세한 대상을 미처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중이 너무 강해지면 마음이 무거워졌다가 그 다음에는 작동을 안 합니다. 관찰하는 것을 멈춰 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욱 강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띠입니다. ‘아,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고 있구나.’ 하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면서 노력을 강화시켜 확실한 관찰력으로 그 상태를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숨을 들이쉬면서 들이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희미해지면 들숨, 날숨 하고 명칭을 붙이면서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고, 명칭을 안 붙여도 마음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강하게 사띠하면서 조심스럽고도 확실하게 알면 노력과 지혜와 희열이 다시 올라오게 됩니다. 적절히 노력해서 대상을 확실하게만 관찰해 주면 지혜로 현재의 대상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사띠는 수행의 매 순간 항상 챙겨야 하는 수행의 필수요건입니다. 수행에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노력과 지혜, 희열 쪽에 문제가 많습니다. 노력이 넘치면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이완시키면서 우뻬카를 올려 줍니다. 초심자의 경우 집중이 넘쳐 몽롱해지고 관찰이 무뎌지면 노력 쪽에 좀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렇게 현재 자신의 수행 상태가 어떤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사띠는 항상 필요하며 사띠의 힘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수행 초보자는 집중에서 멈추면서 수행이 깨지고, 수행 경험자는 욕심으로 수행하기 때문에 수행이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걸 아시고 사띠를 연결시켜서 깨달음의 요소 여섯 가지가 균형을 이루도록 할 때 수행이 고르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칠각지 내용을 바르게 알아 마음에 새기고, 열심히 팔정도 수행을 하여 모든 고통 벗어난 닙바나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Buddha 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맨 위로 맨 아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