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보는 것”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7-1
“청정함을 위한 하나뿐인 길, 걱정·근심·눈물 넘어설 유일한 길”
7. 대념처경과 위빳사나
오늘은 대념처경과 위빳사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대념처경은 수행에 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자 하는 분들께 제가 항상 기본적으로 추천하는 네 가지 경전이 초전법륜경, 무아경, 열반경 그리고 이 대념처경입니다. 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공부해야만 하는 경전이지요. 초전법륜경에는 부처님의 이름과 철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가르침들이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는 “내가 부처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는데, 그들 중에서도 ‘육사외도’라고 불리는 여섯 명이 가장 유명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당신이 진정한 붓다임을 증명하기 위해 펼치신 가르침이 바로 초전법륜경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부처님만이 홀로 깨달으신 특별한 법을 이 초전법륜경에서 다 펼쳐 보이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공부해야 할 경전이 무아경입니다. 초전법륜경을 통해서 하루에 한 명씩 5비구가 모두 수다원이 되었는데 그때 걸린 시간이 닷새입니다. 지금 달력으로 하면 양력 7월 보름이고 인도 달력으로는 그때가 4월 보름이었는데, 그 때 초전법륜경을 시작하여 닷새째 되던 날 다섯 명의 비구가 모두 수다원이 된 후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 무아경입니다. 그 무아경을 듣고 나서 5비구가 모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무아경은 중요한 경전이기 때문에 꼭 공부해야 하는 것으로 부처님의 아주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세 번째로 추천하는 것이 대념처경으로 오늘 이 시간에 살펴볼 것이고, 네 번째가 열반경입니다. 열반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지침서에 해당되는 아주 중요한 경전입니다. 이 네 가지 경전을 제대로 공부하면 부처님 가르침의 아주 큰 틀은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대념처경이 어떤 경전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대념처경은 부처님이 꾸루라는 나라의 깜마사다마라는 곳에서 가르치신 것으로, 구체적 수행 방법과 함께 이 수행을 하면 어떤 결과가 있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에서 가르치는 이것이 중생들의 청정함을 위한 하나뿐인 길, 걱정 근심, 눈물 흘림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분명하게 밝히며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즉 이것은 몸과 마음의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미입니다.
중생들이 청정하지 못한 이유는 탐·진·치 등 번뇌 때문인데, 이 수행법은 그 번뇌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 사념처수행을 하면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해지고, 걱정 근심에서 벗어나고,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고, 지혜를 갖추게 되며, 마침내 해탈을 성취할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념처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아래에서 살펴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것은 다름 아닌 팔정도 수행과 같습니다. 즉 몸에서 몸을 몸으로 보고, 느낌에서 느낌을 느낌으로 보고, 마음에서 마음을 마음으로 보고, 법을 법이라고 보는 것,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몸에서 몸에 있는 것을 사실 그대로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를 들어 지금 더우면 더운 것이 몸이지요. 더우면 더위를 보고, 추우면 추위를 보고, 딱딱하면 딱딱함을 보고, 차가우면 차가움을 보고, 부드러우면 부드러움을 보고, 움직이면 움직임을 보고, 당기면 당김을 봅니다. 또 숨을 들이쉬면서 배가 부풀면 부푸는 것을 보고 꺼질 때 꺼지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대념처경에 보니까 부풂 꺼짐이라는 말은 없던데요?”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배도 몸이고 그 배의 부풂을 보는 것도 몸의 움직임 중 하나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느낌에서 느낌을 느낌으로 본다고 할 경우 ‘느낌’이란 좋은 느낌, 안 좋은 느낌, 중간 느낌이 그것인데 몸의 고통스러움과 쾌감, 마음의 즐거움과 괴로움, 몸과 마음의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간 느낌이 그것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괴로우면 그냥 괴로운 대로 괴로움을 알고 느끼기만 할 뿐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 느낌을 느낌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행복하면 행복함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지 않고 오직 행복한 느낌 그대로를 알기만 할 뿐 ‘내가 행복하다, 이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뭔가를 하겠다.’라고 애쓰지 않는 거예요. 행복할 때 행복함을 보고 괴로울 때 괴로움을 보는데 그것을 한 번 보고 마는 게 아니라 반복해서 보는 것, 다시 반복하고 반복해서 보아야 그 봄이 깊어지면서 무상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마음을 보는 것도 같은 방법입니다. 화나는 마음이 있으면 화나는 마음이라고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할 뿐 ‘화내지 마.’나 ‘화내면 안 돼.’가 아닙니다. 화 없는 마음이면 화 없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화내는 마음과 화 없는 마음을 확실하게 구분하여 알기 위해서는 그 두 마음을 정확하게 비교하며 관찰해보면 됩니다. 화가 나 있을 때 그 마음을 계속 관찰하다 보면 어느 순간 화가 사라집니다. 그러면 화나지 않는 그 마음과 앞에서 화났던 마음이 서로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비교 대조해 보면 그 둘이 어떻게 다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도 마찬가지로 법에서 법을 법이라고 반복해서 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즉 몸‧느낌‧마음‧법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볼 뿐 이것을 ‘나의(욕심)’ 몸‧느낌‧마음‧법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또한 몸‧느낌‧마음‧법을 ‘나(자만)’라고 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몸‧느낌‧마음‧법을 나의 ‘자아(사견)’라고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봄’의 바른 의미입니다. 이때 아주 중요한 수행의 요소가 노력, 지혜, 사띠입니다.<계속>
----------------------------------------------------------------------------------------------------------------------------
“사념처와 팔정도는 같은 것의 다른 표현”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7-2
“초전법륜경에는 법, 진리를, 대념처경에는 그 법의 실천법을 설해”
그러면 대념처경과 팔정도는 어떻게 서로 관련이 되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곧 팔정도인데 왜 다시 사념처를 하나뿐인 길이라고 했는가. 그 두 가지를 잘 살펴보면 사실은 같은 것인데 표현을 다르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팔정도를 가르치실 때는 구체적인 대상을 언급하지 않고 단지 팔정도, 즉 깨달음을 위한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을 말씀하셨는데 사념처에서는 팔정도에 덧붙여서 몸·느낌·마음·법이라는 수행의 구체적인 대상을 함께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팔정도에서는 여덟 가지 길이 있다고 했는데 왜 사념처는 세 가지만 있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력과 사띠가 있으면 틀림없이 집중이 생깁니다. 사띠가 있어 대상을 놓치지 않으면 마음이 한 대상에 머물게 되면서 집중이 됩니다. 그리고 집중이 있으면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니 노력과 사띠가 있으면 당연히 집중도 일어나고, 올바른 집중이 있으면 지혜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관련성을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사냥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따라가며 화살을 쐈는데 화살을 맞은 사슴이 단번에 죽지 않으면 피를 흘리면서 도망을 갑니다. 그러면 사냥꾼은 땅에 흘린 핏자국을 보면서 계속 사슴을 쫓아갑니다. 그러다 시간이 많이 지나 피가 마르면 그 다음에는 사슴의 발자국을 살피며 계속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바위가 나타났는데, 바로 앞까지 있던 발자국이 바위 앞에서 사라졌고, 바위 뒤에 계속 이어졌다면 틀림없이 사슴은 바위 위로 넘어갔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과인 이것을 보며 원인인 저것을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이 지혜가 있으면 그 앞에 반드시 집중이 있습니다. 집중 없이는 지혜가 생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집중이 있다면 노력과 사띠가 앞에 원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사념처에 팔정도가 있다고 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사진=타타가타 여래투어 제공
같은 방식으로 더 살펴보면, 바른 견해가 있으면 바른 사유가 되는 것이고 바른 사유 뒤에는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가 따라 오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바른 견해가 있는 사람이면 바른 사유가 되고, 사견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나쁜 생각 즉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 바른 지혜가 있다면 당연히 바른 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사념처를 깊이 이해하면 거기에 팔정도가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견해를 말씀하셨으면 팔정도의 나머지들도 더불어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팔정도와 사념처를 전혀 다른 별개의 경전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고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사념처 자체만으로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즉 몸·느낌·마음·법에 사띠를 가져야 비로소 수행을 할 수가 있는데 이 사띠는 팔정도 중 하나인 정념입니다. 또한 사띠를 가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이 노력 또한 팔정도 중 하나인 정정진입니다. 이렇게 경전을 이해하는 힘이 생기면 팔정도, 사념처, 사성제, 12연기가 결국은 다 같은 것인데 표현만 다르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저의 은사 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일화입니다.
우리 은사 스님 집안 쪽에 큰스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나라(미얀마)에서는 불교와 관련된 글들은 모두 ‘나모따사’로 시작합니다. ‘나모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할 때의 ‘나모따사’이지요. 그때 그 큰스님의 법문이 아주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멀리 산악지방에 있던 한 스님이 큰스님의 명성을 듣고 경전을 공부하기위해 큰스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안거철이 다 끝났는데도 이 ‘나모따사’가 안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스님이 ‘아, 내가 많은 경전을 공부하러 왔는데 한 경전의 맨 위에 있는 나모따사만 3개월 내내 하고 계시니 내 공부가 언제 끝나겠나?’ 하면서 큰스님 밑에서 경전 공부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머물던 절로 돌아가 버렸지요. 절로 돌아가서 경전을 다시 보니 이상하게도 모든 경전의 내용을 자신이 다 알고 있고 이해가 아주 잘 되더랍니다. 큰스님이 나모따사 하나만 법문하시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 나모따사 한 줄로 모든 경전의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게 가르치신 것이지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이 스님이 다시 큰스님한테 돌아와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참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공부하면서 이렇게 서로 다른 경전의 핵심이 같음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면 공부가 제대로 된 것입니다.
반복해 말하자면, 팔정도는 수행 방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여덟 가지 수행 과제를 말했다면 대념처경은 수행의 대상과 수행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밝혀 놓음으로써 수행자가 바르게 실천할 수 있도록 한 가르침이라고 보면 됩니다. 초전법륜경에 보면 팔정도만 나오고 팔정도를 가지고 어떻게 수행하는지 그 방법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대념처경에서는 그 방법이 자세하게 나옵니다. 초전법륜경에서 법, 진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면 대념처경에는 그 법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설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초전법륜경에서는 ‘도성제란 무엇인가?’가 나오고 대념처경에는 ‘이 도성제를 어떻게 실행할까?’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따라서 대념처경은 팔정도의 실천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계속>
---------------------------------------------------------------------------------------------------------------------------
“마음 관찰은 예리하게, 확실하게, 빠르게”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7-3
“사념처 수행이 부처님의 말씀이란 확신으로 열심히 수행하길”
대념처경의 큰 틀은 신(身)·수(受)·심(心)·법(法)인데, 몸에서 부처님이 첫 번째로 가르치는 것이 호흡입니다. 두 번째는 행주좌와(行住坐臥) 네 가지 자세이고, 세 번째가 그 네 가지 큰 자세 외의 모든 작은 동작들, 즉 앞으로 가는 것, 뒤로 가는 것, 가사 입는 것, 발우 드는 것, 대소변 보는 것 등을 아주 자세히 언급하고 다시 덧붙이시기를, 몸의 어떤 부분이든지 일어나는 그대로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배의 부풂 꺼짐을 관찰하는 수행은 여기에 포함됩니다. 첫째는 호흡, 둘째는 행주좌와, 셋째는 작은 동작들, 모든 작은 동작들에도 확실한 앎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고 네 번째는 부정관(不淨觀)입니다. 몸의 32가지 부분을 더러움으로 관찰하는 것이지요.
이런 수행이 왜 필요한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 중생들이 원래부터 갖고 있는 욕망들 중에서 유독 강한 세 가지가 식욕, 수면욕, 성욕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만으로 사는 세상을 축생이라고 말합니다. 동물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로 이 세 가지로 삽니다. 사람들이 동물을 붙잡아서 강제로 일을 시키는 것을 제외하면 별로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도 거의 이 세 가지로 사는 사람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도 사실은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이 많이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욕구가 강한 삶일수록 동물과 비슷하고, 세 가지에 대한 탐욕이 약할수록 인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축생과 성인의 사이에 있는 범부는 동물 반, 성인 반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의 밑바닥에서 당기는 힘인 이 세 가지 즉 식욕, 수면욕, 성욕은 대단히 강합니다. 지구도 지구의 중심에서 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물건을 위로 던져도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이 힘, 중력 때문입니다. 로켓이나 미사일을 발사할 때 그것이 우주까지 가려면 지구의 중력을 벗어날 때까지는 계속 무언가가 터지면서 힘을 보태줘야 합니다. 그 힘이 모자라면 발사된 로켓이나 미사일은 지구 표면으로 도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미사일 안에 장착된 것이 한 번 터지고, 두 번 터지고, 세 번 터지면서 그 힘이 충분할 때 마침내 우주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중력이 작용하지 않게 되어 우주의 목표지점에 머물면서 편하게 돌 수가 있게 됩니다. 범부가 성인으로 되는 것이 이와 같은 이치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범부가 성인이 못 되는 이유는 ‘밑에서 당기는 힘’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어서 그 ‘세 가지 욕심’을 줄이고 줄여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먹는 것도 적당히 먹어야 되고, 자는 것도 많이 줄여야 되고, 성적으로도 많이 조심해야 됩니다. 이 세 가지에서 벗어날수록 성인에 가까워지고 완전히 벗어났을 때 아라한이 됩니다. 죽지 않을 만큼 먹고, 성욕을 완전히 버리면 이때부터가 아나함입니다.
아나함이 되면 성에 대한 욕심이 완전히 없어집니다. 그래서 아나함들이 아라한이 안 된 상태에서 죽은 뒤 다시 태어나면 범천으로 태어나는데 범천 세상에는 남자 여자가 없습니다. 그곳은 얼마나 조용할지 생각해 보세요. 남자 여자가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몹시 복잡하고 시끄럽지요. 남성 여성이 없으니 성차별문제도 있을 리 없고 서로에게 상처 줄 일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범천 세상이 중생 중에는 제일 행복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윤회는 합니다.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사막을 여행하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죽게 생겼답니다. 그래서 죽은 자기 아들을 말린 고기를 먹으면서 걷습니다. 이런 경우는 순전히 죽지 않기 위해서 먹는 것이지요. 이 삼세윤회의 고통이라는 사막에서 힘들게 걸으면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인육을 먹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식사한다면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을 거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부처님께서 예를 들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기 위해서 더러움을 계속 관하다 보면 어쩔 수 없어서 먹는 거지, 욕심을 부리며 먹고 싶어서 먹는 것은 별로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시체를 보면서 시체가 변해가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는 수행 방법도 있습니다. 화장하거나 매장하지 않고 그냥 버려둔 시체의 변화를 보면서 하는 수행입니다. 이틀 사흘 지나면서 시체에서 물이 나오고, 얼굴과 몸의 색깔이 변하고, 시체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 하는 이런 모습들을 빠짐없이 관찰합니다. 새가 와서 쪼아 먹고, 개가 와서 뜯어먹고, 계속 부풀다가 터지면서 안에 있던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오고, 살들이 다 없어져 뼈만 남고, 뼈들이 흩어지고…….
이것은 사마타 수행 방법입니다. 그런데 시체 명상으로는 초선정밖에 안 됩니다. 다른 대상과는 달리 시체가 대상인 경우에는 수행자가 의식적으로 위딱까(생각)를 일으키지 않으면 대상인 시체에 대한 관찰을 계속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은 시체처럼 더러운 대상은 자발적으로 가지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선정과 그 위의 선정을 가지려면 위딱까를 놓으면서 가야 하는데, 시체를 계속 관찰하려면 위딱까를 버리면 안 되기 때문에 시체를 보면서는 초선정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초선정과 2선정의 차이는 위딱까, 즉 일으키는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지고 따집니다. 초선정에서는 호흡을 계속 보면서 그것을 알고 호흡이 꺼지면 다시 보고 알고……, 그런 식으로 하는데 위딱까가 계속 일을 해야 합니다. 초선정에서 2선정으로 넘어갈 때까지는 이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해야 하는데, 계속 집중된 상태에서 수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애를 쓰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낍니다. 반복적으로 노력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완전한 집중이 안 되고 약간의 들뜸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를 넘어서기 위해 마음에 힘을 조금 더 주면 다음에는 집중이 깨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대상을 계속 살필 수가 있게 되는데 이때 위딱까라는 요소 하나가 없어집니다. 일으키는 생각, 지속적인 고찰, 희열, 행복, 집중 이 5가지가 초선정의 구성요소인데, 2선정으로 가면 일으키는 생각이 없어지고, 지속적인 고찰, 희열, 행복, 집중 4가지만 남아 있게 됩니다.
반복하자면 시체를 보는 사람은 초선정까지는 잘 가지만, 초선정에서 2선정으로 가기 위해 마음이 일으키는 생각(위딱까)을 놓으려고 하면, 시체라는 대상에 대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일으킨 생각을 내려놓고 계속 살펴야 2선정으로 들어가는데 시체를 보려고 하는 마음(위딱까)이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시체를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으로는 2선정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에서는 14가지를 가르칩니다. 즉 호흡, 네 가지 큰 자세, 나머지 작은 동작들, 그리고 먹는 것에 대한 더러움, 사대, 9가지 시체에 대한 관찰(시체가 가루로 변해 사라지기까지의 9가지 과정), 이렇게 14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정리할 때는 이렇지만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이런 것을 하나씩하나씩 순서대로 수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옷장에 보면 양말들이 따로 있고, 속옷들이 따로 있고, 셔츠들이 따로 정리되어 있지만 입을 때는 양말도 신고 속옷 겉옷 다 입는 것과 똑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런 여러 가지 수행 방법을 자연스럽게 섞어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책에서 읽은 것과 똑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만약 호흡을 관찰하겠다고 결정하면 호흡 외에 다른 것은 다 무시합니다. 굳이 하려고만 하면 그렇게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호흡만 보면서 살 수는 없잖아요. 만약 출가를 하여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수행만 할 수 있다면 몰라도 일반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수행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루에 호흡 관찰만 한 시간 한다, 그러면 23시간은 수행을 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사념처를 이론적으로 분류해 놓기는 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그것들을 따로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상을 바꾸면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체를 관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상생활을 가지고 하는 수행은 아니지요. 그런 것은 한 번 제대로 수행하면서 내면에 기억해 놓으면 될 것입니다. 자기가 누워 있을 때 마음으로 자기 몸을 시체로 만들어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집중이 깊어지면 자기 몸이 진짜 시체처럼 느껴져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도 시체의 아홉 가지 부분 모두를 순서대로 할 필요는 없고 보이는 것만 자연스럽게 관찰하면 됩니다.
느낌 관찰도 아주 간단합니다. 행복함(즐거움), 괴로움(고통), 중간 느낌 이 세 가지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 관찰은 마음을 반복해서 관찰하는 것인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마음에는 16가지가 있습니다. 마음을 관찰하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마음에서 마음을 반복해서 관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물으신 다음 곧바로 “욕심나는 마음을 욕심나는 마음이라고 알고, 욕심 없는 마음을 욕심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욕심 부리지 마라.’가 아니라 욕심 부리고 있음을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할 때 욕심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을 관찰합니다. 이때 욕심나는 마음을 알면 ‘아, 욕심, 욕심, 욕심…….’ 하고 마음을 관찰할 때 아주 예리하고 빠르게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 속에 빠지게 됩니다. 물질을 관찰할 때는 어느 정도 느리게 해도 되는데 마음을 관찰할 때는 아주 예리하게, 확실하게, 빠르게 관찰하면 마음이 빨리 사라집니다. 물론 일어난 마음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는 법 자체가 그렇습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의도를 없애버리려고 하지 말고 일어난 마음을 그냥 확실하게 알려고, 빠르게 알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욕심 있는 마음에서 욕심 없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 보입니다. 욕심 있는 마음을 관찰할 때는 앞에 있는 것이 욕심 있는 마음이고, 이어서 관찰하는 마음이 있지요. 이때 욕심 있는 마음의 힘이 세고 관찰하는 힘이 약하면 욕심 있는 마음이 다시 약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관찰하는 마음이 더 세면 욕심 있는 마음은 없어지고, 그러면 욕심 없는 마음을 알게 됩니다.
성냄 있는 마음을 성냄 있는 마음이라고 알면서 보고 있으면, 성냄이 사라져 성냄 없는 마음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 있는 마음으로 보고, 그 어리석은 마음이 없어지면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봅니다.
수행자들이 집중되는 마음으로 수행할 줄 모르고 집중되는 마음에서 욕심을 부려서 오히려 수행이 망가지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집중되는 마음을 다시 관찰하면 더욱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집중되는 마음을 관찰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니 그 집중이 사라지고 맙니다. 스스로 집중을 먹어치우는 셈이지요. 망상 부리는 마음, 집중이 되지 않고 들뜬 마음으로는 수행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붕 뜨고 들뜨면 그 들뜨는 마음을 그대로 관찰해야 되는데 들뜬 마음을 꽉 붙잡아 억누르면서 코를 본다, 배를 본다 하니까 수행이 마냥 어렵고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들뜰 때는 ‘아, 마음이 계속 흔들흔들 하는구나.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움직이고 있구나.’라고 알고 그 움직이고 있는 마음을 다시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야 집중되지 않는 마음을 집중되지 않는 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법을 관찰하는 방법을 보겠습니다. 그 첫째는 다섯 가지 장애입니다. 수행 중에 계속 욕심 부리는 생각들이 올라오는 것도 5장애 중에 하나입니다. 싫어하는 것, 미워하는 것도 5장애에 속하고 나태 혼침, 의심, 들뜸과 후회도 5장애입니다. 그 장애들을 보는 것 자체가 법 관찰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가 수행을 가로막고 있으면 마음속으로 팔정도가, 선업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태 혼침이나 들뜸 후회, 의심이나 욕심 또는 성냄이 있으면 수행이 안 되는 것이지요. 끊임없이 관찰을 하는 것이 수행인데 관찰은 하지 않고 그 장애에 이끌려 다니면 수행이 막히고 망가집니다. 그러나 그 5장애를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 그대로 관찰하면 그것은 수행입니다. 졸음이 올 때 졸음을 보는 것이 법입니다. 졸기 전에 먼저 해태 혼침이 있는데 이것을 아는 것도 법이에요. 오온, 곧 색·수·상·행·식을 알면 그것도 법입니다. ‘안眼,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 즉 십이처를 보는 것도 법입니다. 수행이 좋아져서 다시 노력을 보게 되고, 사띠를 보게 되고, 지혜를 보게 되고, 수행 도중에 그런 것들을 다시 보게 되는 것도 법입니다. 사성제 즉 고집멸도를 보는 것도 법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념처를 이런 순서로 가르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사념처는 수행하는 구체적인 실천법이고 팔정도는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 즉 법입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사념처 수행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으로 열심히 수행하여 모든 고통 벗어나 닙바나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Buddha 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3번)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