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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11일간의 특별한 수업

위빳사나강의: 11일간의 특별한 수업(3회)


“경전은 내비게이션”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3-1
“깨달은 사람은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는 사람은 업도 없다”


3. 법과 위빳사나

 

선업(善業) 복을 지을 때가 가장 좋은 때이고, 선업 복을 짓는 날이 가장 좋은 날이며, 선업 복을 짓는 장소가 가장 좋은 장소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아주 좋은 때, 좋은 날, 좋은 장소에 와 계십니다.

 

앞에서 ‘부처님과 위빳사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에는 ‘법과 위빳사나’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기 전에 8선정을 얻으셨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깨달음이 아니었고, 그래서 다시 팔정도 수행을 하심으로써 사성제 진리를 성취하셨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부처님의 법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부처님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자(佛子)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믿는 법이 무엇이고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법(法)’을 빨리어로는 담마(dhamma)라고 합니다. ‘담마’라는 원어의 뜻을 풀어 보면 ‘법이 받쳐주다, 법이 데리고 가다’ 등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받쳐준다’는 것은 ‘떨어지지 않게 하다’라는 뜻이니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부처님이 실천하셨던 법은 부처님을 받쳐주고, 제가 법을 실천했다면 그 법이 저를 받쳐줍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실천한 법이 여러분을 받쳐주는 것입니다. 이때 어디로 떨어지지 않는가를 생각해 보면, 지금 인간으로 태어나 바른 법을 실천하면 인간 이하 즉 지옥이나 아귀, 축생, 아수라 등의 사악처 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수행을 열심히 해서 수다원이 됐다면 자신이 성취한 수다원도와 과의 법이 자기를 받쳐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실천한 법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받쳐준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또 자신이 쌓은 선업이 자신을 더 좋은 곳, 즉 천상세계나 범천으로 데리고 간다, 모시고 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법이란 그런 의미입니다. 법이란 법칙이에요. 만약 불선업(不善業)을 했다면 그 불선업이 여러분을 지옥으로 데려가고 축생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데리고 간다’는 말은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법이란 무엇인가요. 부처님의 법에는 다음 열 가지, 즉 네 가지 도(수다원도, 사다함도, 아나함도, 아라한도), 네 가지 과(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닙바나(해탈), 그리고 경전(삼장법, 오부니까야, 팔만대장경 등으로 부르는)입니다. 이 열 가지 외에 다른 법은 없습니다. 경전에서 거듭 언급하는 부처님의 법인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 닙바나, 이 아홉 가지를 출세간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성제를 깨달아 아시는 분을 붓다라고 믿고, 붓다의 법이 사성제라고 믿으면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하는 법은 바로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입니다. 도는 성취해야 하는 깨달음이고, 과는 그 깨달음에 저절로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과를 성취하기 위해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를 깨달으면 도 다음에 바로 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다원도를 깨달은 사람들에게 곧바로 수다원과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럼 경전은 무엇인가? 위에서 열 가지 법이라고 했을 때는 경전이 포함되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경전은 법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경전은 법에 대한 설명서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네 가지 도를 약이라고 한다면 경전은 그 약에 대한 설명서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플 때 약을 먹어야 병이 낫는 것과 같은 이치로 네 가지 도라는 약을 먹어야 번뇌라는 병에서 나을 수가 있는데 그 약은 안 먹고 도가 무엇인지, 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등에 관한 설명서만 계속 먹고 있으면 병이 낫지 않겠지요? 따라서 경전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경전은 내비게이션과 같은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은 목적지가 아니고 길도 아니며, 단지 길을 가리키는 지도 같은 것입니다. 내가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그 길을 스스로 직접 가야 합니다. 그러니 해탈이 목적지이고, 도는 길이며, 경전은 그 길을 가리키는 지도라고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수행은 하지 않고 경전만 계속 공부하고 있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열 가지 법을 엄밀하게 따져보면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 닙바나,  경전 이 세 가지가 서로 같지 않습니다. 닙바나, 해탈은 목적지입니다. 도를 깨치면 도의 결과를 얻는데 그 결과가 곧 과입니다. 그래서 과 선정에 들어간다고 하면 수다원은 수다원과 선정에 들어갈 수 있고, 사다함은 사다함과 선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 선정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기 들어가서 무얼 하고 있을 것 같습니까? 바로 해탈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해탈은 도와 과의 대상입니다. 해탈로 도 지혜도 알 수 있고 과 지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탈은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도착해야 하는 곳입니다. 성취해야 하는 것은 도이지요. 도를 깨치면 도의 대상이 바로 해탈입니다. 도를 깨달으면 과가 따라오고 해탈, 닙바나에 도착한다는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의 법은 바로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라고 알면 됩니다.


도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세기 때문에 번뇌를 뿌리까지 뽑아 없애버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도는 딱 한 순간으로 완벽한 것이어서 두 번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다원만 되면 불·법·승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또 사견이 완전히 없어지고 바른 견해만 남습니다. 원인이 소멸되면 결과가 소멸되는 것, 물질과 정신의 소멸을 통해 자신이 분명히 해탈을 경험한 것입니다. 도 지혜 과 지혜를 봤고, 법을 직접 알았습니다. 스스로 분명하게 알아 깨우친 법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법을 보았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의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도라는 것, 도인이라는 것, 도를 깨쳤다는 것은 번뇌가 없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번뇌가 없습니다.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그래서 수다원도를 성취하면 사견과 의심이 사라져서 더 이상 사악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수다원도가 받쳐주기 때문에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수다원이고, 욕계에 최대한 많이 태어날 경우라도 일곱 번까지만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일곱 생 동안 사람이나 신으로 태어나지 그보다 낮은 단계로는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나함 도를 성취하면 성냄이 없어집니다. ‘성냄’의 원래 의미는 매우 다양합니다. 짜증나다, 싫다, 밉다, 무섭다, 마음에 안 든다 등등이 모두 포함되는 것인데 한국에서는 성냄이나 진(瞋)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그 의미가 축소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아나함이 되면 그런 성냄에 뿌리를 둔 마음이 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아라한 도까지 성취하면 모든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의 번뇌가 없습니다. 이것이 법에 대한 바른 정의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이 이 법이고,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법도 바로 이 법입니다. 번뇌가 없는 사람은 업도 없습니다. 우리가 네 가지 도 중 어떤 법을 깨달았을 때 그 법이 나를 어떻게 받쳐주는지 그 의미도 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깨달은 도의 수준만큼 자신이 보호를 받는다고 알면 되겠습니다.




“12연기의 순방향이 윤회, 역방향이 팔정도”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3-2
“혜 키우면서 잠재적 번뇌까지 제거하려면 위빳사나 수행 필요”


 그런데 부처님의 그 많은 가르침을 다 배우는 것이 시간이나 능력 면에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망하거나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알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계·정·혜 삼학입니다. 경전, 율장, 논장을 삼장이라 하지요. 율장의 핵심은 계, 경전의 핵심이 정, 논장의 핵심은 혜입니다. 삼장법 즉 오부니까야가 너무 많다면 이 삼학만 확실히 알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부처님 법을 확실하게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주 논리적, 합리적입니다. 왜 계·정·혜를 가르치는가? 그것은 번뇌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며, 그 번뇌의 상태에 맞게 계·정·혜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번뇌는 다음 세 가지, 즉 건너간 번뇌, 일어나는 번뇌, 잠재적 번뇌입니다. 그리고 윤회란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지요.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업이 아니라 업의 과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왜 과보를 받게 되는가? 전에 했던 업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왜 업이 있는가? 번뇌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라는 이 윤회를 끊으려면 번뇌를 소멸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번뇌의 굴레를 벗어나야 업이 소멸되고, 업이 소멸되면 과보의 굴레에서 벗어납니다. 내 마음속에 번뇌가 들어오면 그 번뇌의 마음이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망가뜨리고 해칩니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고 하는데, 불교에는 그런 원죄라는 것이 없고 번뇌가 문제라고 하지요. 이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우리의 문제가 풀리는데 그 문제인 번뇌의 유형에 위와 같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계·정·혜 세 가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번뇌의 형태에 맞게 대응할 수 있도록 세 가지 무기를 주신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번뇌의 세 가지 형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는 건너간 번뇌입니다. 몸과 입으로 화가 나서 하는 행동과 말, 욕심 부리면서 하는 행동과 말, 어리석게 하는 행동과 말, 질투와 시기를 드러내는 행동과 말 등을 말합니다. 불이 나서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있는 형국이지요. 완전히 끝장 난 상태로 그때는 돌이키기가 힘들어진 상태입니다. 이미 파괴의 상태로 마음속에 있던 번뇌가 몸과 입으로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번뇌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상태를 말하는데, 몸과 입으로 아직 드러나지 않았을 뿐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탐, 진, 치, 자만, 질투, 시기, 의심, 들뜸, 후회, 사견 등 여러 가지 마음의 나쁜 성향들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일어나는 번뇌’입니다.

 

세 번째 번뇌는 아주 잔잔하게 밑에 깔려 있는, 잠재되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금은 없는 것 같지만 조건이 생기면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아무런 마음 없이 집중해서 법문을 잘 듣고 있으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아이고, 법문이 마음에 안 든다.’ 싶으면 바로 마음속에 번뇌가 일어납니다. 그러니 번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잠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할 때 수행이 잘 되면 하도 평화롭고 행복해서 내가 혹시 해탈한 게 아닐까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가 와서 싫은 소리 한 마디만 해도 그 모든 게 한 순간에 다 날아가 버립니다. 우리가 깨달음이나 법에 대해서 확실하게 모르면 그렇게 착각할 수 있습니다. 집중 혹은 선정 상태에 들면 아무런 고통이 없고 아주 행복합니다. 지금 선정을 갖고 번뇌가 없다 해도 조건만 맞아떨어지면 선정이 깨지면서 즉시 번뇌가 나타납니다. 이런 것을 잠재 번뇌라고 합니다.


불이 나면 불을 끄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에 119를 부릅니다. 그 119에 해당하는 것이 부처님의 계율입니다. 계율로 몸과 입을 빨리 막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계율은 파괴 상태의 번뇌를 막기 위해서 부처님이 주신 무기입니다. 계율을 가르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제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속에 일어나는 번뇌는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마음속의 문제는 계율로 막을 수 없습니다. 계율이 책임지는 것은 몸과 입에 국한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정학과 혜학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정(定), 즉 집중은 대상 하나에 마음을 딱 붙여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이 한 대상에 딱 붙어 있는 동안에는 탐·진·치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학을 배워 익히는 이유입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목적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번뇌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일어나는 상황은 없어졌지만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혜학이 필요합니다. 이 혜학이 바로 위빳사나입니다. 지혜를 키우면서 잠재 상태의 번뇌까지 제거하려고 하면 위빳사나 수행이 필요합니다. 위빳사나 수행으로 도를 성취했을 때 그 도로 잠재 상태의 번뇌까지 없앨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를 닦지 않으면 도는 결코 오지 않습니다. 위빳사나를 계속 닦아서 알고자 하는 것이 무상·고·무아이고 이것을 알면 욕심이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욕심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욕심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되면 그것을 가지려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욕심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면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릴 수 있게 됩니다. 탐·진·치가 가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무상·고·무아를 아는 지혜, 바른 견해 즉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관찰하여 그 사실을 그대로 아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리하여 ‘아, 이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 이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이 무상하구나, 고(苦)이구나. 무아구나’라는 지혜가 꽉 찰 때 비로소 이 몸과 마음에 대한 욕심이 떨어져 나갑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 욕심을 버린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 욕심을 부릴 일이 없습니다. 내 몸과 마음조차도 더러운데, 다른 사람의 몸을 가지려고 하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고통스러운데 굳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져오려고 할 리가 없습니다.

 

고성제를 알아야 집성제를 버리고 멸성제에 도착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도성제를 수행해야 한다, 사성제가 그런 의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위빳사나 수행을 한다는 것은 바로 사성제 수행, 그 중에서도 팔정도 수행입니다. 여러분이 대상을 잊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이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대상을 기억하고 있는 것, 잊지 않는 것이 바른 사띠이고, 그 대상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바른 집중이지요. 그러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수행하면 팔정도 중에서 다섯 가지를 닦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이 지키고 있는 계율이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계입니다. 그래서 팔정도 수행입니다. 그 팔정도 수행을 함으로써 바른 생각과 바른 견해가 생기는데 그 바른 견해가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100% 힘이 찰 때 도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팔정도를 끊임없이 굴려야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한 순간이라도 놓치면 바로 윤회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12연기의 순방향이 윤회이고, 12연기의 역방향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무명으로 인해 행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윤회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IC가 어디겠습니까? 자신의 몸과 마음을 계속 관찰하다 보면 갈애가 안 일어납니다. 느낌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면 갈애로 넘어가지 않게 되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직전에 마지막 제자에게 “팔정도가 있는 가르침에 깨달은 자가 있다.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에 깨달은 자가 없다.”라고 하신 가르침, 그것이 불법의 핵심입니다.

 

무상·고·무아를 알면 일체 사견이 사라집니다. 바른 견해와 사견이 같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어둠과 밝음이 같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두울 때 불을 켜면 그 순간 어둠이 사라집니다.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이 무상·고·무아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모든 아상이 깨지고,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됩니다. ‘무상(無常)’이란 항상 변한다, 앞뒤가 다르다,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늘 변하니 고정된 무엇, 어떤 하나가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이 무아(無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과 마음을 관찰하다가 집중이 되어서 지혜가 생기면 이 몸과 마음이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 딱히 ‘나’라고 할 것이 없음을 확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세포가 매 순간 새로 생기고 사라진다는 것은 의학계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물질 또한 한 순간도 그냥 있지 않고 변화하며 사라져 간다는 것을 물리학계에서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체가 ‘무상·고·무아’라고 말이지요. 어떤 것을 보고 좋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이것이 영원한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상을 알면 고도 알게 됩니다. 고(苦)는 고통뿐만 아니라 좋지 않은 것, 즉 가치가 없는 것, 더러운 것, 핵심이 아닌 것, 심지어는 변하는 자체도 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른 견해가 일어나면 사견이 사라지고, 사견이 일어나면 바른 견해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관찰해야 이 몸과 마음의 ‘무상·고·무아’를 알게 되고, 바른 견해가 일어나고 사견이 사라집니다. 팔정도 수행을 하여 ‘무상·고·무아’를 알게 되면 굳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버리려고 애를 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있다고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깨닫는 순간 일체의 상이 깨져나가 사라집니다. 위빳사나 지혜가 무엇이고 어떻게 수행을 하는 것인지, 부처님의 법이 무엇인지 이제는 분명하게 이해하셨으리라 봅니다.



“업장소멸 방법은 팔정도의 실천밖에 없어”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3-3
“사마타는 선정에서 범천으로, 위빳사나는 청정에서 해탈로”


그렇다면 법과 위빳사나, 부처님의 법이란 무엇인가? 『법구경』에 보면 ‘법을 실행하여 지키는 자를 법이 보호한다.’라는 부처님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열심히 선업공덕을 쌓으면서 원을 세우고 법을 실행하면 그 법이 나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이해하면 부처님이 우리를 돌봐준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에게 복을 내려준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완전히 열반하셨는데 이 세상의 우리를 지켜보고 돌봐준다고 말한다면 부처님이 아직 살아 계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신다면 부처님이 윤회한다는 의미이지요. 부처님을 크게 왜곡하는 말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예전 부처님들과 똑같이 이 세상에 오셨고, 똑같이 가셨다는 것, 그래서 부처님 스스로 ‘따타가따’라고 하셨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공덕은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이 무엇인지를 『열반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아난존자가 웁니다. 부처님의 열반을 앞둔 날 부처님의 그림자 같던 아난존자가 보이지 않자 부처님이 찾습니다. 그 때 아난존자는 문설주를 붙잡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아난존자는 수다원이었기 때문에 탐·진·치가 남아 있었습니다. 수다원은 사견과 의심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여전히 슬픔이나 성냄은 남아 있습니다. 아난존자는 부처님이 얼마 안 되어 곧 돌아가신다는 사실 때문에 슬퍼서 거기 가서 울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아난존자를 불러 말씀하십니다.

 

“내가 늘 말하지 않았는가? 만났으면 헤어지게 되어 있다고, 살아 있으면서 헤어지거나, 죽어서 생이 갈라지면서 헤어지게 되어 있다고 항상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면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존자에게 간곡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면 스승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가고 나면 45년 내내 내가 가르쳤던 법이 그대들의 스승이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이 그대들의 스승이다.’ 법은 경전과 논장(아비담마)이고 위니아는 계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시면서 따로 후계자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주 분명하게 일러주셨지요, 법이 그대들의 스승이라고. 여러분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알려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네 가지 경전이 있습니다.

첫째는 『초전법륜경』, 둘째가 『무아경』, 셋째는 『대념처경』이고 넷째는 『열반경』입니다.

그 네 경전을 확실하게 공부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최초 가르침인 『초전법륜경』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최초로 ‘내가 부처이다.’ 하고 세상에 나오실 때 당신이 깨달으신 법을 펼친 것이 『초전법륜경』입니다.

 『무아경』은 부처님의 궁극적·최종적인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자아’입니다. ‘자아’가 있어야 신도 의미가 있는 것이고 넓은 의미에서 신도 자아입니다. 영원한 자아라고 하면 되겠지요. 오로지 부처님의 가르침만이 ‘무아(無我)’입니다. 따라서 『무아경』을 우리가 확실하게 공부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직접 그 법을 실천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 『대념처경』입니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철학을 공부하고, 부처님의 법이 왜곡되지 않게 보호하려면 『열반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1년 전에 하셨던 가르침들을 다 묶어 놓은 『열반경』은 불교 지침서에 해당합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올해로 2557년째(2013년 기준)인데 지금까지의 불교의 흐름을 보면 부처님께서 그 때 이미 미래를 다 내다보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 열반 이후 불교가 어떻게 망가질지를 예상하시고는 그것을 막기 위해 해야 할 모든 지침을 일일이 밝혀 놓으셨습니다.

 

 이 네 가지 경전만 제대로 공부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있고, 잘 따를 수 있고, 잘 보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법을 공부하여 바르게 이해해야 법을 실천할 수 있고 부처님도 따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모르고 사람을 따르게 되면 그 사람을 부처님 대신으로 삼게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한다고 하면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불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고, 그 부처님의 법만 보고 살면 됩니다. 그것이 부처님을 우러르며 사는 참된 삶입니다.

 

불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딱 두 가지, 공부와 실천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는 목적은 오직 바르게 실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부처님의 법을 잘못 잡으면 뱀보다 무서울 수 있습니다. 이 법이 자신을 물어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을 공부할 때는 아주 바르고 선한 마음으로, ‘이 공부를 바르게 하여 그것을 실천하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만 해야 합니다. 계율을 공부하면 그 배운 대로 계율을 실천해야 되고, 경전을 공부하면 그 경전에 나오는 대로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이론과 실천 두 가지가 부처님의 가르침, 불법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계·정·혜를 공부하고 실천해야 하는 ‘청정도’에는 몸과 입은 지계, 마음은 정과 혜라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업을 소멸시키는 방법은 계·정·혜라는 팔정도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모든 행동, 말, 마음이 업을 일으키고 있는데 그 업 두 가지는 선업 아니면 불선업이지 그 중간은 없습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이 아닌 모든 중생은 업에서 벗어날 수 없고 업은 두 종류뿐입니다. 만약에 내가 하는 어떤 업이 선업도 아니고 불선업도 아니라면 지금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폭 자는 마음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지만 깨어 있으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약하건 강하건 어쨌든 선업 아니면 악업입니다. 업이 있으면 과보를 받게 되고 그래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렇게 윤회하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가 계속 이어지는 끝없는 윤회입니다.

 

그러면 선업과 불선업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선업은 행할 때 죄가 없고 남과 본인을 해치지 않으며, 그 결과는 행복이라는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불선업은 그 반대로 하고 있을 때 죄가 있고, 결과가 고통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이 불선업입니다.

 

좋고 나쁜 것, 옳고 그른 것, 원인과 결과 등을 아는 게 지혜인데, 그 지혜의 정의가 교단마다 다른 이유는 그 정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고,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정의는 아주 확실합니다. 어떤 종단에 속해 있든, 어떤 가르침을 받았든 상관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진리는 법칙을 뜻합니다. 진리는 종교에 따라 달라질 수 없는 것입니다. 선악의 기준은 종교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생각, 의도와 말, 행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와 상관없이 그 사람이 지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죄(번뇌)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합니다. 죄의 여부는 욕심, 성냄, 어리석음, 자만 등의 유무를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죄가 있으면 틀림없이 그 죄의 값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변할 수 없는 법칙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옳은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옳은 것입니다. 욕심과 성냄이 좋은지 안 좋은지, 질투 시기가 좋은지 안 좋은지는 종파와 상관없이 그 결론이 똑같습니다. 진리가 법칙이라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죄가 다른 것이 아니라 옳지 않은 마음가짐 자체가 죄이고, 그 마음으로 한 행동이 악업이 되는 것입니다. 질투 시기의 마음으로 말하면 그 말이 죄가 있는 말이 되고, 그것이 불선업이며 그 질투 시기자체가 이미 불선업입니다. 불선업이 있으면 불선업의 과보를 받게 되고 그 결과가 고통입니다. 그것은 종교, 국적, 믿음 등과 아무 상관이 없는 법칙입니다.

 

우리는 번뇌를 가지고 매 순간 업을 짓는데 어떻게 해야 청정해질 수 있는가. 몸과 입이 청정하기 위해서는 계율을 지켜야 하고, 마음을 청정하게 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인 정과 혜를 바르게 알고 닦아야 합니다. 사마타는 정이고, 위빳사나는 혜입니다. 사마타는 선정에서 범천으로, 위빳사나는 청정에서 해탈로, 바로 이것입니다. 사마타는 계·정·혜 중에서 정까지만 가능하고 혜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마타에서 멈추면 안 되고 해탈로 가기 위해서는 위빳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사마타로 선정은 가능하지만 선정이 곧 해탈은 아닙니다. 그 선정을 얻었으면 그 힘을 바탕으로 계속 수행하여 무상·고·무아의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선정의 힘으로 무상·고·무아를 보면 선정 없는 사람보다 더 미세하게 볼 수 있지만 선정 없어도 무상·고·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즉 선정이 없어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서 선정이 필수는 아니지만 물론 필요합니다. 삼매를 정도에 따라 나누면 순간적인 삼매, 근접삼매, 본삼매가 있는데 위빳사나 수행에서는 본삼매가 필수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본삼매가 있으면 더욱 좋지만, 본삼매가 없어도 깨달을 수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아예 삼매가 없으면 무상·고·무아를 볼 수 없습니다. 삼매 없이 보는 무상·고·무아는 개념적인 것입니다. 개념적인 무상으로는 해탈로 갈 수 없습니다. 진짜 무상을 안다는 것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물질과 정신의 무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상을 보려면 마음의 힘이 필요하고 그 마음의 힘이 삼매입니다. 그런데 선정의 상태, 본삼매의 상태는 아주 몰입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물질 정신의 사실, 실제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그 본삼매를 놓으면 근접삼매입니다. 근접삼매 경계를 넘어가면 본삼매, 본삼매가 꺼지면 바로 근접삼매이지요. 존재하고 있는 물질과 정신적인 대상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의 무상·고·무아를 알고 깨닫는 것이 위빳사나입니다. 그래서 ‘사마타는 선정에서 범천으로, 위빳사나는 청정에서 해탈로’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습니다.



“1초라도 무시하지 마십시오”

 

[빤딧짜 스님의 위빳사나 강의- 11일 간의 특별한 수업] 3-4
“들숨날숨만 알면 사마타, 궁극적인 실제의 특징을 알면 위빳사나”


그렇다면 사성제의 도성제를 우리가 어떻게 실천 수행해야 하는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팔정도, 즉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사띠, 그리고 바른 집중 이렇게 여덟 가지입니다. 우리가 꼭 해야 하는 일이 계·정·혜밖에 없고, 팔정도밖에 없습니다. 계율을 지키면서 바른 노력으로 바른 사띠, 즉 잊지 않고 깨어 있으며 그럼으로써 바른 집중력을 키우고, 바른 집중의 힘을 바탕으로 해서 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을 키우는 것이 바로 팔정도 수행입니다.


그 바른 견해의 기본 단계가 업의 단계이고, 중간 단계가 무상·고·무아를 아는 것이고, 가장 높은 것이 깨달음의 도 단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바른 견해라는 것의 제일 처음 단계가 업과 과보, 12연기, 윤회이고 그 위의 단계가 무상·고·무아를 아는 위빳사나 지혜,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성취한 것이 도와 과 지혜입니다.

 

다른 법이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법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그 팔정도를 새벽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실천수행하고 있는 이 순간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1초라도 무시하지 마십시오. 잊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 내가 수행하고 있다고 기억할 때마다 잊지 않고 1초라도 무시하지 않는 정신으로 수행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복 받은 삶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가장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부처님을 만나고, 부처님의 정법을 알아 믿게 되고, 몸과 마음으로 실행할 수 있는 사람보다 복이 많은 사람은 없습니다. 수행의 기본적인 이론과 실제를 확실히 알고 있지 않으면 수행할 때마다 헤매게 되고 애매모호해져서 자신의 수행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수행의 기본을 분명하게 알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법의 핵심인 팔정도를 좀 더 깊이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팔정도를 셋으로 분류하면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가 지혜, 바른 말과 바른 행위와 바른 생계가 계율, 그리고 바른 노력과 바른 사띠와 바른 집중이 정, 이것이 곧 계·정·혜 삼학이라는 것을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이어서 팔정도의 첫 번째 묶음인 계(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부터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바른 말이란 거짓말, 이간질, 욕설, 쓸데없는 말 등 네 가지를 피하고 그 네 가지의 반대에 해당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거짓말 대신 진실을 말해야 하고, 서로를 갈라지게 하는 말 대신 화합하여 잘 지내게 하는 말을 해야 하고, 욕설이나 거친 말이 아니라 자비로운 말을 해야 되고, 쓸데없는 말 대신에 쓸모 있고 남에게 이익이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바른 행동이란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을 피하는 것인데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살생을 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살려주고 오래오래 살게 도와주는 것, 도둑질을 안 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호해 주고 보태주는 것, 삿된 음행 안 하고 상대방을 보호하고 위해 주는 것 등이 이에 속합니다.


 바른 생계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방금 전에 말했던 나쁜 행동과 나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바른 생계입니다. 이 안에는 앞에서 말한 나쁜 행위 세 가지와 나쁜 말 네 가지를 피하는 것이 다 포함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악으로 단정하여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행위를 한 사람의 마음, 의도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것입니다. 똑같은 살생이라도 그 의도에 따라 죗값이 다를 수는 있지만 살생은 어떤 경우에도 불선업입니다. 여러 사람을 살려주기 위해서 살생하건, 나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 살생하건 살생은 살생입니다. 불선업은 불선업의 죄를 받아야 되고 선업의 경우에는 선업의 공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이며 그 둘은 함께 하지 않습니다. 기름은 기름이고 물은 물이며 그 둘은 섞이지 않습니다. 선업은 선업이고 불선업은 불선업입니다. 이 둘의 중간은 없습니다.

 

 계율을 왜 지켜야 되는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계율이라는 것이 건물의 기초하고 똑같습니다. 기초가 약하면 건물이 높이 올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계율이 약하면 정과 혜가 올라가지 못합니다. 다른 노력을 많이 한다 해도 기초인 계율이 약하기 때문에 그 노력들이 흔들려서 높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몸과 입이 청정하지 않은 사람이 마음이 청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율이 더러우면 마음 또한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정합니다. 안정적인 마음을 갖출 수가 없기 때문에 정이 깊어질 수 없고 그러면 혜가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이렇게 계·정·혜는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 나는 계율이 청정하지 못하니 수행을 할 수 없겠다.’ 하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그럴수록 더욱 열심히 수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계율과 지혜는 연관이 되어 있어서 사람이 지혜로운 만큼 계율이 깨끗해지기 때문입니다. 현재 지계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수행을 하지 않으면 아예 희망이 없어지는 것이니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지금의 내 지혜와 집중이 약한 상태에서는 계율을 깨끗하게 지킬 수 없지만 지혜와 집중을 높이는 만큼 계율을 높일 수 있고, 계율을 높이는 만큼 집중과 지혜도 따라서 높일 수 있습니다. 계·정·혜가 이렇게 상호작용을 하면서 서로에게 힘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무조건 수행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수행을 많이, 열심히 할수록 지계가 분명해지고, 그만큼 더 깨끗하게 살고 싶어지고, 마음이 착해지고, 그렇게 차츰 좋아질 수 있습니다.


 

팔정도의 두 번째 묶음은 정(바른 노력, 바른 사띠, 바른 집중)입니다.

 

바른 노력은 다음 네 가지를 말합니다. 즉 했던 불선업을 다시 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하지 않은 불선업을 아예 안 하도록 노력하는 것, 하지 못한 선업을 열심히 찾아서 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이미 한 선업을 반복해서 더 많이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른 노력은 수행에서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에서도 필수적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자신이 불선업을 했으면 ‘이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여 그대로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번뇌가 일어날 때 그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선업을 저지르고 싶어질 때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막는 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수행 중에는 수행 대상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른 노력입니다. 그렇게 하면 바른 노력 네 가지가 다 포함됩니다. 수행의 대상만 매 순간 관찰하고 있으면 했던 나쁜 짓도 다시 할 생각이 없어지고, 하지 않은 불선업을 할 생각조차 나지 않겠지요. 생각이 났다 해도 금방 그것을 알기 때문에 곧바로 사라져서 거기에 휩쓸리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 중에 수행 대상을 잊지 않도록 노력하기만 해도 이 네 가지가 다 포함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평소 내가 하지 못한 선업 즉 도 지혜 과 지혜도 수행 중에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는 머리로 열심히 생각하면서 선업을 짓지만 수행 중에는 따로 머리 쓸 일 없이 대상만 놓치지 않으면 네 가지 노력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할 것이 바른 사띠입니다. 사실 바른 사띠는 바른 노력이 있으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른 사띠란 불·법·승 삼보와 선업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선업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선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일만 생각하고 좋은 일만 하려고 하는 것, 생각날 때마다 좋은 행동, 좋은 말, 좋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바른 사띠입니다. 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자, 항상 좋은 생각 하고 좋은 말 하고 좋은 행동 하고, 내가 원하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 그것에 필요한 것을 계속 만들어 가는 것, 즉 일반적으로 말하면 선업을 잊지 않음이 바른 사띠입니다. 수행 중에도 수행의 대상을 잊지 않는 것이 사띠입니다. 호흡을 관찰할 때 호흡을 잊지 않으면 그것이 사띠가 있는 것이고, 배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사람이 배가 부르고 꺼질 때 그것을 잊지 않으면 그것이 사띠입니다. 또 부풂 꺼짐을 잊어버리고 딴 생각하더라도 ‘생각하고 있네.’ 하면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것이 또한 사띠입니다. 생각하다가 화가 났으면 ‘화내고 있네.’ 하고 화내고 있는 것을 잊지 않음이 사띠입니다. 이렇게 몸·느낌·마음·법 중 내 몸의 뭔가 하나를 한 순간에 하나라도 확실하게 알면 수행자가 수행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른 사띠입니다. 그것이 바로 법입니다. 불법승과 선업을 잊지 않는 것이 바로 선업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노력이고 바른 사띠이고 바른 생각이고 바른 견해이기 때문에 선업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정정, 바른 삼매이고 그 중 제일 높은 것이 8선정입니다. 8선정뿐만 아니라 근접삼매도 삼매이고 순간적인 삼매도 삼매입니다. 숨을 쉴 때 두 가지로 알 수 있지요. 개념적으로 알면 사마타, 궁극적인 실제를 알면 위빳사나입니다. 예를 들어 숨을 쉴 때 대상을 개념적으로 잡고 ‘지금 들이쉬고 있네, 내쉬고 있네.’ 하며 들숨 날숨만 알고 있으면 사마타, 호흡에서 따뜻함, 차가움 등 궁극적인 실제의 특징을 알고 있으면 위빳사나입니다. 어떻게 하든 마음이 대상에 한 번 집중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수·화·풍 사대 중에 따뜻함이라는 화대에 순간적으로 마음을 집중했기 때문에 그 화대의 사실을 따뜻함, 차가움으로 알게 되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그리고 지혜가 그렇게 알 수 있게끔 마음이 가만히 대상에 있는 것이 바른 집중입니다. 계율이 밑에서 받쳐주고 집중이 마음을 가만히 있게 해주면 그 순간 수행자가 관찰하는 대상에 대한 확실한 앎이 생기는 것이고 그 확실한 앎이 바른 견해입니다.


 

 팔정도의 세 번째 묶음은 혜(바른 견혜, 바른 사유)입니다.

 

 노력이 없으면 사띠가 없고, 사띠가 없으면 집중이 불가능합니다. 그 노력, 사띠, 집중이 다 마음속의 대상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해주는 일을 합니다. 반복하자면 사띠는 마음속에 있는 대상을 분명하게 만들고, 마음이 대상에 딱 붙어 집중할 수 있도록 대상을 계속 기억하며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띠가 대상을 주의 깊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고요하면서 차분하게 대상에 온전히 붙어있을 수 있고 이것이 집중입니다. 그러면 ‘아, 따뜻하구나. 차갑구나. 딱딱하구나. 움직이고 있구나.’ 하면서 대상의 특성을 파악하여 알게 되고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 지혜가 생기지 않으면 그 자리에 바로 사견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지혜와 생각은 100%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자가 그렇게 계속 관찰함으로써 물질이면 물질의 사실 그대로를 압니다. 그래서 물질을 단지 물질만으로 알 뿐 그것을 나, 너, 남자, 여자, 예쁘다, 어떻다, 저렇다 이런 식으로 착각하지 않게 됩니다. 위빳사나가 그런 것입니다. 바른 견해가 일어나면 바른 생각이 일어나고, 사견이 일어나면 나쁜 생각이 일어납니다. 나쁜 생각이 바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을 가지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생각하고, 욕심 부리고, 싫어하고 좋아하고 그런 것인데 이것들이 다 사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견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무지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가 없으면 사견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수행을 하지 않으면 사견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잘못 행동하고, 잘못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계율이 깨끗할 수가 없겠지요. 이렇게 팔정도가 모두 서로서로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것을 아주 소중하게, 지극히 소중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수행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몸과 마음을 확실하게 알면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도 똑같이 알 수 있게 됩니다. 내 몸과 그 사람 몸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물질과 정신만 이해하면 이 우주 세계를 다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우주에 물질과 정신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 몸과 마음이라는 간단한 기계를 통해서 아주 복잡한 기계인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것, 수행은 이렇게 크고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하면서 생기는 지혜들이 정견, 그 지혜를 따라 일어나는 올바른 생각들이 바른 생각, 정사유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수행이 팔정도이고, 이 팔정도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머리에 못이 박힐 정도로 확실하게, 결코 잊혀지지 않도록 공부해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법에 의심이 생기지 않고 수행도 잘 할 수 있게 됩니다.

 

 수행이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는 의심 때문입니다.

 조금 하다가 의심이 일어나면 남들에게 물어보고, 책도 읽어 보고 또 조금 하다가 이것저것 다른 것을 해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면 수행이 제대로 되질 않습니다. 수행에 대한 이론이 확실하면 자신이 실천하는 수행에 대해 자신감이 생깁니다. 이론을 명확히 이해하고 그 이론 그대로 실천해 보니까 스스로 체험하는 것이 있고, 그 체험이 쌓이는 만큼 자신감도 증가합니다. 그런 만큼 신심도 좋아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신심이 생기는 것과 다른 교단에서 말하는 믿음은 전혀 다릅니다. 다른 교단의 믿음은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것인 데 반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가 실천하고 확인하여 아는 만큼 믿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믿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행을 통해 내 몸과 마음을 내가 아는 만큼 믿는 것, 내가 확실하게 알아서 더 이상 의심이 없는 것, 그래서 수행은 계속 체험하면서 자신감을 갖는 것입니다. 신심이 좋아지면 노력이 좋아지고, 신심의 힘 따라 노력의 힘이 생깁니다. 신심을 키우려면 지식과 지혜, 체험이 필요합니다. 즉 내 지식의 힘, 지혜의 힘, 체험의 힘이 신심의 힘이고 그 신심이 노력의 힘입니다. 믿는 만큼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수행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수행에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심 있는 만큼 노력하고, 노력하는 만큼 사띠가 강해지고, 사띠가 강한 만큼 집중이 강해지고, 집중이 강한 만큼 지혜가 높아지고……. 이렇게 모든 게 다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식과 지혜를 통해서 생기는 신심으로 수행을 하고, 거기서 체험을 얻으니 신심이 깊어지면서 더 노력하게 되고, 그 노력에 맞게 사띠가 되고, 사띠에 맞게 집중, 지혜가 되면서 수행이 계속 흘러갑니다.

 


 수행이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과거·미래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수행하면서 집중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나 미래를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 중 집중이 안 된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생각이 많은 것이고 그 생각이 과거나 미래에 있기 때문에 집중이 안 되고 수행이 안 되는 것입니다. 수행 중에 생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길게 지속되느냐 짧게 끝나느냐는 그 사람의 신심과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노력이 부족하여 계속 길게 수행 대상을 놓치고 있는 사람은 신심부터 다시 키워야 합니다. 신심이 없으면 법문을 많이 들어야 하고, 수행에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사마타 수행도 많이 해야 됩니다. 그렇게 신심과 노력을 키운 후에 수행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수행이 잘 안 될 때는 수행할 수 있는 자세를 잡는 것이 먼저입니다. 부처님의 공덕을 많이 생각하고, 자애를 많이 베풀고, 몸에 대해 부정관을 많이 하고, 죽음에 대한 수행을 많이 하면서 수행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수행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제대로 수행할 마음의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팔정도를 계속 수행함으로써 무상·고·무아에 도착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냥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관찰하다가 그 관찰로 집중과 지혜가 높아지면 이 몸과 마음이 무상한 것, 고통스러운 것, 무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무상·고·무아를 알고, 고성제를 알고, 집성제가 떨어지고, 멸성제에 도착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 길을 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몸과 마음의 바로 이 순간 있는 그대로를 관찰한다.’ 지금 여기,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 현재, 그리고 다른 여기저기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지혜에서 진리를 얻는 것인데 진리는 가짜 속에 없고 실제, 사실 속에 있습니다. 지금 현재 있는 대상을 봐야 실제를 안다는 것이 그런 의미입니다. 실제 속에서 우리가 진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위빳사나의 기준이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수행이 안 되는 세 번째 이유는 게으름입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노력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수행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적당한 노력인데 적당한 힘을 한 순간도 내려놓지 않고 끊임없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노력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아람바 위리야’란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하는 노력으로 ‘아, 내가 수행해야지, 어느 수행처에 가서 일주일 수행해야지.’ 하고 신심을 내서 하는 노력을 가리킵니다. 이 첫 번째 노력은 어지간한 사람은 다 합니다.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노력인 ‘닉까마 위리야’란 모든 어려움을 떨치면서 견딜 수 있는 힘, 그런 노력을 말합니다. 수행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일도 하다 보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 그 어려움을 헤쳐 나가면서 참아내는 힘, 꺾이지 않고 견디는 힘이 닉까마 위리야입니다.

세 번째는 ‘빠락까마 위리야’로 하나 끝나고 그 다음에 하나, 그것 끝나고 다시 그 다음에 또 하나…, 이렇게 끊임없이 끈기를 가지고 계속 하는 힘을 말합니다. 수행 중에는 어려움을 떨쳐버리고 견디는 끈기와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수행하는 중에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리고, 그 다음에 쉬고 그러면 수행은 희망이 없습니다. 수행으로 모았던 힘을 계속 이어받아 새벽에 잠에서 깰 때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앞뒤 연결이 끊어지지 않아야 수행이 제대로 될 수 있습니다. 수행은 그 누구도, 부처님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계속 끊어지지 않게 이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에 아주 중요한 것이 빠락까마 위리야입니다.

 


수행이 안 되는 네 번째 이유는 과도한 욕심입니다.

 노력이 너무 강한 사람은 몸에 열이 올라오니 힘을 너무 심하게 쓰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아, 놓쳤어. 또 놓쳤어. 방금 전에 내가 관찰했나, 안 했나?’ 계속 이러고 있으면 수행이 깨집니다. 예전에 태엽 감아서 쓰던 시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세게 태엽을 감으면 끊어져 시계가 못 쓰게 되고 맙니다. 노력도 같은 이치입니다. 지나친 노력은 들뜸을 일으킵니다. 들뜸은 마음이 대상에 딱 붙어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놓친 것입니다. 이 들뜸과 망상은 조금 다릅니다. 망상은 마음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들뜸은 지금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맞는데 그것이 너무 강해서 수행이 망가지는 경우입니다. 열심히 수행하려는 의도는 좋은데 너무 지나쳐서 나쁜 것입니다.

 

일상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조용히 일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주 정신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연히 힘을 빼며 요란스레 일하는 사람과 수행에서 지나치게 노력하는 사람이 똑같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바빠 보이지만 사실 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조용하게 티 안 내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바빠 보이지 않지만 실은 일을 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도 이와 같아서 너무 노력이 강한 사람은 쓸데없는 힘을 쓰기 때문에 괜히 분주해보이기만 할 뿐 수행에 진도가 안 나갑니다. 마음이 대상과 떨어진 상태로 계속 움직이고 있어서 집중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 기분이 가라앉고 지쳐버립니다. 그래서 ‘아, 내가 깨달을 수 없나 보다. 나는 수행 체질이 아닌가 보다.’하며 좌절하게 됩니다. 수행하다 마음이 약해지면 그 약해지는 마음을 계속 관찰해야 합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억지로 힘주려 하지 말고 포기하려 하는 그 마음을 관찰 대상으로 삼아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면 수행이 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은 수행을 방해합니다. 다른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의 마음을 잘 아는 것이 수행을 잘 하는 것입니다. ‘아, 내 마음이 이렇게 되고 있구나.’ 하고 알면 신·수·심·법 중에 심과 법을 많이 보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수행이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으면서 집중이 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데 집중이 안 된다 싶으면 ‘내가 체질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과 만났다, 사람으로 태어났다, 지금 이 법을 이해하고 있다.’ 하면서 꾸준히 수행하면 그 사람이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체질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지혜가 조금 부족해서 그렇게 되고 있음을 알고 계속 수행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 팔정도 수행을 열심히 하여 모든 고통 벗어난 닙바나를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붓다 사사남 찌람 띳타뚜(3번). 
붓다 사사남-부처님의 가르침이, 찌람-오래오래, 띳타뚜-머무소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오래 머무소서.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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